온라인 독서 토론모임 : 방구석 미술관-4
나다움에 대하여
이번 모임 때는 에곤 실레와 폴 고갱에 대해 함께 얘기해보았다.
A학생 : 에곤 실레에 대한 요약
이 지긋지긋한 화풍에서 벗어나야겠다, 내가 스승에게 배운 것 그리고 고흐 뭉크 당신들은 감정, 표출, 본출을 하는 것을 보며 나와 감정들을 표출해볼까? 생각함
<예술가가 활동을 못하도록 저지하는 것은 하나의 범죄이다. 그것은 움트고 있는 새싹의 생명을 빼앗는 일이다, 1912>
A학생 :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못하는 것은 하나의 범죄이라고 말했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념을 표현하고 신념을 세상에 주장한다는 것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마치 클림프가 보여준 팔레스 아테나 그림처럼 그런 세상과 전쟁하는 것처럼 보였다.
코멘트 : 이 그림은 몇 살 때 그린 것 같나? 너의 나이와 같이 21살 때 그린 그림이었다. 그리고 실레가 그린 그림이 신념에 근거한 것일까? 다른 사람들이 그린 그림과 어떻게 다를까?
A학생 : 이 그림은 세상에 대한 분노와 짜증이 보이는 것 같다 그리고 외설적이었다.
코멘트 : 그럼 외설과 예술의 차이는 무엇일까? 실레가 그린 그림은 외설이 아니라 예술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지지받았다. 미술사적 흐름에서 보면, 그림에서 표현하는 대상이 바뀌게 된다. 드가인 경우 귀족 계급, 신화의 이야기를 하지 않고 천대받았던 발레리노를 그렸고 에곤 실레는 자신에 대한 탐구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 선 필지가 다르고 스케치가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드로잉으로만 작품이 될 정도였다. 손발을 자르고 몸에만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욕구는 성적 욕구를 강조하며 관계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또한 가족들의 죽음으로 인해 성적 콤플렉스가 있었던 것 같다. 외설인지, 예술의 기준은 현대사에서 권력자들이 정했다. 그럼 지금 그 기준을 누가 정할까? 사람들이 공유되고 공감하는 기준이 있다. 그런 보편적인 생각과 감정으로 기준을 잡지 않고 누군가에 의해 결정된다면 그것은 위선일 것이다. 외설은 사람들의 공감이 아니라 원초적인 자극만 만족하는 것으로 남는다. 하지만 예술은 시대정신에 대한 가치와 사람들의 자각을 이끌어내고 해소되는 것을 예술이라고 불 수 있을 것이다
질문 : 에곤 실레에게는 나다움이란 무엇일까? 예술로 나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것 같다.
A학생 : 나의 경우 사고를 요구하는 토론을 할 수 있을 때 인식되는 것 같다. 그런 과정에서 경험하는 것이 나인 것 같다.
코멘트 : 젊을 때 나에 대해 인정받는 삶, 인간관계에서 나다움을 찾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런 기반에서 살 때 자신의 모습일 수 있지만 전부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삶에 대해 충돌과 인정받지 못할 때 존재가 흔들리고 지속적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나다움이란 것을 지, 정, 의를 통해 나다움을 찾아야 할 것이다.
<고갱, 마리아를 경배하며, 1891>
A학생 : 고갱의 작품이 나는 참 싫다. 뭐라고 표현하지는 못하겠지만 일생의 삶을 보니 그렇게 느껴진다.
마리아를 경배하며 를 보면서 그냥 고갱이 고생하다가 처음으로 인정받게 된 작품이라는 속에서 잘 되었으면 좋겠다.
코멘트 : 고갱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일까?
A학생 : 원시적인 것을 추구한 것 같다. 현대에는 많은 현대인들이 고갱처럼 살아보고 싶었을 것이다. 현대인들이 항상 얘기하는 것이 직장생활에서 일하는 것이 내 가슴을 뛰게 하지 않는다. 이직해야 할까요? 나다움이 가슴을 뛰게 하는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고갱은 증권사였고 세상에서 잘 살아보기 위해 노력했고 가정도 버리고 무책임하고 그림을 통해 자신의 욕구를 채우려고 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코멘트 : 유명한 화가들은 자신이 그리는 작품이 진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고갱은 그런 생각으로 작품을 그린다는 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 고갱은 프랑스 식민주의자였고 부자였기 때문에 그런 힘을 가지고 식민지에 자기 멋대로 자유롭게 살면서 그 당시에 유명한 그림풍으로 그림을 팔았다. 그래서 원시성을 찾는 그림이지만 그 화가가 힘들어지고 가난해지면서 그 당시에 유명한 그림에서 잘 팔릴 것 같은 그림을 팔기 가는 모습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에곤 실러, 이중 자화상, 1915>
B학생 : 에곤 실러는 정해진 규칙과 분위기에 따라가지 않고 자신의 감정, 욕망 그리고 본성에 따라 살아갔던 모습, 적개심의 얼굴과 온화한 얼굴의 이중적 자아를 잘 보여주는 것 같다. 그리고 자신의 겉모습이 아니라 적개심 많고 고통스러운 속 모습을 솔직하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어디로 왔는가? 무엇을 하는가? 어디로 가는가? , 1888년>
B학생 : 고갱의 나는 어디로 와서 무엇이고 어디로 가는가? 작품을 보면서, 나의 본질은 무엇인지,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생각해보게 된다. 이 그림을 통해 바쁜 일상 속에서 나의 정체성을 생각해보고 나다움을 발견할 때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질문 : 사람들이 생각하고 인식하는 내 모습이 아니라 진정 내 모습에 대해 대면하고 인식해본 경험이 있는가? 그리고 현재 살아가는 삶의 목적은 무엇이고 나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까?
A학생 : 지난 한 달 동안 참 알차고 보람 있게 보낸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제 중간고사 시험이 다가오면서 부담감도 생기고 좀 피곤하다. 나는 다른 친구들과 다르게 등록금도 벌어야 하고 용돈도 벌어야 하면서 살아가기가 좀 버겁기도 하다.
B학생 : 내가 나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평상시에는 잘 느끼지 못하지만 그런 여러 가지 힘든 상황에 부딪혀서 흔들리는 나 자신을 보면서 내가 나다움이라는 기초, 근거가 부실한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에곤 실러처럼 나 자신을 진짜 찾고 발견해가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코멘트 : 현재 A학생의 환경은 어렵다. 하지만 내가 누구이고 어떤 존재인지가 분명해지면 존재 자체가 흔들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스스로 바라보는 관점과 정체성이 분명하면 힘든 환경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작년 한 해 동안 좌절을 받았다. 애를 쓰고 노력했지만 1년이라는 시간이 생각보다 잘 되지 않음을 경험했다. 그때 환경을 통해 나란 존재가 흔들리고 자신감이 흔들렸다. 자신감의 기초를 잘못 세웠다. 초등학교 때 성적, 중학교는 관계로, 고등학교는 수려한 말발로 자신감의 기초를 세웠다. 그렇다면 현재 나의 존재 기초를 어디에 세워야 할까? 그것이 세워져야 어떤 환경이든 상관없이 살맛을 느끼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