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분야에서 일하는 인문학 전공자의 세계에 대한 질문 — No. 6
시온은 영생 데이터베이스의 기록자다.
2104년, 인류는 의식 업로드 기술을 완성했다. 뇌의 모든 신경 연결을 디지털로 변환해 서버에 저장하는 것. 육체는 죽지만, 의식은 영원히 남는다. 적어도 서버가 작동하는 한.
시온의 일은 업로드된 의식들을 관리하고, 그들의 활동을 기록하는 것이다. 어제 그는 업로드 107년 차인 한 의식과 면담을 했다.
피험자 ID: ETL-00127 (전 이름: 김철수, 업로드 2097년 3월)
면담 기록:
"처음엔 좋았어요. 아프지도 않고, 늙지도 않고. 원하는 기억을 언제든 꺼내볼 수 있고. 근데 이제... 107년째인데... 뭐랄까, 권태로워요. 아니, 권태보다 더한 거. 의미가 없어요."
시온은 면담 후 혼자 남아, 자신의 오래된 노트를 꺼냈다. 거기엔 어제 성당 미사에서 사도신경에 이런 문장이 있다.
"영원한 생명을 믿으며..."
시온은 천주교 신자다. 매주 일요일 미사를 본다. 신경을 외울 때마다 이 구절이 나온다. '영원한 생명.'
그런데 어제, 이 말을 되뇌다가 문득 질문이 떠올랐다.
왜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이 중요할까?
'영원하다'는 것과 '생명'이라는 것. 이 두 단어를 보는 순간, 나는 왜 부처를 떠올렸을까?
이 질문은... 너무 어처구니없는 건가?
시온은 신학자가 아니다. 그는 데이터 관리자이자, 철학을 전공한 기록자다. 하지만 그는 매일 '영생'을 관리한다. 디지털 형태의 영생을.
그리고 107년 차 김영수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돈다. "의미가 없어요."
[과학자의 노트]
열역학 제2법칙과 정보 엔트로피에 대한 짧은 메모.
물리학에서 엔트로피는 무질서도를 의미한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계는 더 무질서해진다. 에너지는 분산되고, 구조는 붕괴한다. 이것이 시간의 방향을 정의한다.
그런데 생명은 엔트로피를 감소시킨다. 외부에서 에너지를 받아 질서를 만든다. 무질서에서 의미를 창조한다. 생명의 본질은 유한한 시간 동안 엔트로피에 저항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원한 생명은? 시간이 무한하다면, 엔트로피 저항의 의미는 무엇인가? 끝이 없다면, 시작도 의미가 없다. 변화가 없다면, 존재도 구별되지 않는다.
오후, 시온은 불교 철학 데이터베이스를 열었다.
어제 미사 때 왜 부처를 떠올렸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는 '영원'과 '생명'을 검색했다. 그리고 발견했다.
불교 용어: 열반(涅槃, Nirvana)
산스크리트어 'Nirvana'는 '불어서 끈다'는 뜻. 촛불을 불어 끄듯, 갈애(欲望)의 불을 끄는 것.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
중요: 열반은 '영원한 생명'이 아니다. 오히려 '생명의 끝'이다. 더 정확히는, 생(生)과 사(死)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상태다.
시온은 화면을 보며 천천히 이해하기 시작했다.
천주교가 말하는 '영원한 생명'과 불교가 말하는 '열반'은 정반대 방향을 가리키는 것 같지만, 사실 같은 질문을 던진다.
끝이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끝이 없다면, 시작은 무엇인가?
영원하다면, 순간은 무엇인가?
시온은 다시 김영수의 데이터를 열었다. 107년간의 활동 기록. 처음 10년은 활발했다. 가상 세계를 탐험하고,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다른 의식들과 대화했다.
하지만 50년 차부터 활동이 줄었다. 70년 차엔 거의 정지 상태였다. 100년 차엔 한 달에 한 번 접속했다.
시온은 다른 의식들의 패턴도 확인했다. 거의 모두 비슷했다. 업로드 후 30-50년이 지나면 활동이 급격히 감소했다.
그들은 영생을 얻었다. 하지만 살고 있지 않았다.
시온은 깨달았다.
영원한 생명이 중요한 게 아니다.
유한한 시간에 의미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천주교가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는 이유는, 죽음 이후에도 의미가 지속된다는 희망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의미는 유한한 삶에서 만들어진다. 사랑, 희생, 창조. 모두 끝이 있기 때문에 소중하다.
불교가 '열반'을 말하는 이유는, 생과 사의 집착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영원히 살려는 욕망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집착도, 모두 고통의 원인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이다.
시온은 노트에 적었다.
“왜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이 중요할까?”
답: 영원한 생명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인간이 원하는 것은 영원이 아니라 '의미의 지속'이다. 내가 사랑한 것, 내가 만든 것, 내가 남긴 것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천주교의 영생은 그 의미가 신 안에서 보존된다는 약속이다. 불교의 열반은 의미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라는 가르침이다.
하지만 둘 다 같은 진실을 가리킨다: 유한성이 있기에 의미가 생긴다. 끝이 있기에 순간이 소중하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빛난다.
107년을 산 김영수가 권태를 느끼는 이유는, 그에게 더 이상 끝이 없기 때문이다. 끝이 없으면 시작도 없다. 변화가 없으면 순간도 없다.
영생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일 수 있다.
시온은 창밖을 봤다. 해가 지고 있었다. 하루가 끝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나이를 떠올렸다. 38세. 통계상 앞으로 50년쯤 살 것이다. 길지 않다.
하지만 시온은 의식 업로드 동의서에 서명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끝이 있는 삶을 살 것이다. 오늘의 저녁노을이 내일은 없을 것이기에,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한 삶을.
시온은 보고서를 작성했다.
[영생 프로젝트 윤리 검토 의견서]
결론: 의식 업로드는 생명의 연장이 아니라 정보의 보존이다. 생명의 본질은 변화와 끝에 있다. 영생은 인간이 원하는 것의 왜곡된 해석일 수 있다.
권고: 업로드 전 필수 상담 프로그램 도입. '영생의 의미'에 대한 충분한 이해 후 결정하도록.
시온은 보고서를 제출하고, 컴퓨터를 껐다.
내일 일요일, 그는 다시 성당에 갈 것이다. 신경을 외울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믿으며."
하지만 이제 그는 안다. 그 영생이 무한한 시간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유한한 삶에서 만든 의미가, 영원 속에서 보존된다는 희망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희망은, 역설적이게도, 끝이 있기 때문에 아름답다는 것을.
글 · 잡학도서관 모따모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