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을 깍으며...

과학 분야에서 일하는 인문학 전공자의 세계에 대한 질문 NO - 1

by 모따모모

"연필을 깍을 때는 글 쓰기 편할정도로 적당히 날카롭게 손잡기 편할 정도로 적당한 길이로 너무 길거나 너무 짧지 않게 적당한 연필심으로 연필심이 부러지지 않게 적당한 힘으로 연필종류에 맞게 적당한 모양으로...

그러나 적당하더라도 함께 모아서 보면 이쁘게 연필을 깍을때는 모든 정신을 쏟으면서... 이런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과 사람이 만날때도 적당히 날카롭고, 적당한 거리에서, 적당한 긴장관계로, 적당한 모양으로...

그러나 그 사람과 아름다운 관계를 생각하며, 온 정신을 쏟아야 올바른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된다는 생각을 하게 해준, 고마운 연필 깍기 시간이였다." -2018년 7월 9일 오늘의 질문의 시작


화면 캡처 2026-02-18 011325.jpg
화면 캡처 2026-02-18 011435.jpg

SF 단편 / 제 1 화 [연필을 깍는 아침]


나는 매일 아침 연필을 깍는다.


연필은 왼손에 날카로운 칼은 오른손으로 잡는다. 칼날이 나무를 얇게 벗긴다. 처음엔 부드러운 소리다. 그러다 심에 가까워질수록 소리가 달라진다. 더 높고, 더 바삭하고, 더 정확해진다. 내가 원하는 각도에 딱 맞는 그 소리가 들릴 때,

나는 멈춘다.


“바삭.”

이 소리를 들으면 알 수 있다. 오늘 이 연필로 쓴 글자는 선이 가늘고 단단할 것이다. 힘을 주면 종이에 자국이 남고, 지우개로 밀어도 흔적이 남는 그런 선.

오늘 아침도 그렇게 연필을 깍다가, 나는 문득 손을 멈췄다.


연필을 들여다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세가지 조건을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작업이다.

모양은 예뻐야 하고, 잡는 부분은 편안해야 하며, 심은 잘 써야 한다.

셋 중 하나라도 실패하면 연필로서의 기능이 흔들린다.


그렇다면 나는?

내 외모는 특별하지 않다. 연구소 복도에서 마주치면 기억에 남지 않을 평범한 얼굴. 잡는 부분—그러니까 내가 사람들과 손잡는 방식—은 날카롭지 않다. 둥글고 부드럽고, 가끔은 너무 말랑해서 스스로도 놀란다. 그런데 연필심은?

나는 실험실 복도에 서서,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내 생각은... 날카로울까?"


[과학자의 노트]
흑연(graphite)의 구조에 대한 짧은 메모.

연필심의 주성분인 흑연은 탄소 원자가 육각형 격자로 결합된 층상 구조를 갖는다. 각 층 사이의 결합은 약하기 때문에 종이 위에서 층이 쉽게 떨어져 나가 자국을 남긴다. 즉, 흑연이 쓸 수 있는 이유는 단단하기 때문이 아니라, 적절히 약하기 때문이다.

심의 경도(H)가 높을수록 선은 가늘고 선명하지만 종이에 흔적이 적게 남는다. 경도(B)가 높을수록 선은 굵고 진하지만 번지기 쉽다. 연필은 이 두 속성 사이 어딘가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나는 인문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지금은 과학 연구소에서 일한다. 동료들은 내 전공을 들으면 대부분 같은

표정을 짓는다. 흥미롭다는 것인지, 당황스럽다는 것인지, 나는 아직도 구별하지 못한다.


내가 하는 일은 데이터를 읽고 이야기를 만드는 인문학적 데이터 리더(Reader)것이다.

숫자들 사이의 빈 공간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그것을 언어로 옮긴다. 과학자들은 실험을 설계하고,

나는 실험이 왜 그렇게 설계되어야 했는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한다.


어떤 날은 내가 정말로 쓸모 있다는 느낌이 든다.


어떤 날은 내가 연필인지, 연필 깎는 사람인지조차 모르겠다.


그 날 오후,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다.


팀장이 나를 회의실로 불렀다. 테이블 위에는 그래프가 가득한 보고서가 펼쳐져 있었고, 팀장의 표정은 평소보다 진지했다. 그는 내게 물었다.


"이 데이터가 뭘 말하는 것 같아요?"


나는 그래프를 한참 들여다봤다. 숫자들은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규칙 없이 흔들렸다. 과학자라면 이상값을 제거하고 추세선을 그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그 흔들림 자체를 읽었다.


“이 그래프가 흔들리는 구간은 외부 조건이 바뀐 때가 아닙니다.
연구자의 집중도가 달라진 때예요. 보고서에는 안 나와 있지만,
이건 사람의 리듬이에요.”


팀장이 나를 봤다. 3초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그게 맞아요. 실제로 그 기간에 팀원 한 명이 아팠거든요."


나는 저녁에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오전에 깍은 연필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모양은 여전히 평범하다. 잡는 부분은 여전히 둥글다.


그런데 심 끝을 손가락으로 살짝 눌러봤다. 작은 점 하나가 피부에 찍혔다. 아프진 않지만, 분명히 남는 자국.


날카롭다는 건 찌르는 것이 아니라,
남는 것이다.


나는 그제야 이해했다. 연필 깍기의 세 가지 조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세 번째다.

하지만 세 번째가 가능하려면 첫 번째와 두 번째가 있어야 한다. 눈에 띄지 않는 외형과, 손에서 구르지 않는 편안함이, 결국 심이 종이에 닿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나는 오늘 무언가를 이해했다.


특별하지 않은 얼굴과, 부드러운 방식으로 사람을 대하는 성격이, 어쩌면 내 생각이 누군가에게 닿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었을지도 모른다.


날카로운 심은, 날카로운 몸에서 나오지 않는다.


흑연이 쓸 수 있는 건, 단단하기 때문이 아니라 적절히 약하기 때문이다.


나는 새 노트를 펼치고, 오늘 깍아둔 연필로 첫 줄을 썼다.


“오늘의 질문: 나는 어떤 경도(硬度)의 사람인가?”


선이 가늘고 선명했다.
흔적은 남았다.


글 · 잡학도서관 모따모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