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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장 Dec 24. 2021

친절한 말 한마디

 “우리의 직원도 누군가에겐 소중한 자식입니다. 폭언을 삼가 주시길 바랍니다.” 상담사 연결 전 이제는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 안내 메시지이다.


 최근 택배 지연이라는 달갑지 못한 이유로 전화기를 집어 들고선, 격앙된 상태로 버튼을 눌렀다.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앳된 연결 직원의 목소리에는 분명히 친절한 어조이지만 그 속에는 무릇 그간의 축적된 고됨이 여실히 묻어나 있었다.  그 찰나의 순간 지난번 엄마의 말이 재빠르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딸을 보러 오는 비행기 안에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승무원들을 보며 꼭 내 딸 같아서 10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물 한 잔 달라는 부탁을 차마 할 수 없어 꾹 참았다고…… 그 말이 떠오른 순간 고작 이런 사소한 이유에 어린아이와 같이 분노의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려 했던 나 자신에게 부끄러웠고 심지어 민망해지기까지 했다.


굳이 한 사람 더 보태지 않아도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서 행복하지 않은 말들을 들어야 하며 죄송하다고 사과해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번뜩 들어서였다. 아니 사실 지연의 이유에 대한 답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코로나19로 인해 주문 물량은 폭발적일 테고 지연은 불가피하 다는걸. 지금 여기서 결이 다른 단 한마디면 불만족 사항 건을 일반 문의 건으로 바꿀 수 있다. 긴 문장도 아니고 화려한 수사구도 필요 없었다. 단지 타인에 대한 조그마한 배려, 잔잔한 톤이면 가능하다.  


“이해합니다. 시일이 걸려도 도착만 한다면 기다릴 수 있습니다. 혹시나 택배가 취소되지는 않았나 궁금해서 연락드렸습니다.” 유선상이지만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안도감, 잔잔한 미소. 사과의 말 대신 감사하다는 기분 좋은 말까지. 더욱이 놀라웠던 건 진심을 담은 건강하시라는 마지막 인사말. 3여 분간의 짧은 통화임에도 오히려 위로받았다. 참 따뜻했다.


이렇듯 친절한 말 한마디의 힘은 실로 대단하다. 분류 항목을 완전히 바꿔버리고, 상호 간의 감정을 좌지우지하기도 하며 심지어 인간의 존중, 존엄성까지 논할 수 있게 한다. 오죽했으면 말 한마디에 천 냥 빚도 갚는다는 속담까지 있을까?


 몇 주 후 까맣게 잊고 있던 택배가 도착했다. 산타클로스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고 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배달원에게 몇 번이고 꾸벅꾸벅 인사를 했다. 이 작은 상자 꾸러미를 전달하기 위해 모두가 같은 질량의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감사 인사를 받고, 또 다른 이는 질책을 받았을 거라 생각하니 괜스레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상자는 뜯은 채 만 채 또다시 수화기를 집어 들고 단 이름 석 자만으로 그때의 앳된 목소리의 직원을 찾아 나섰다. 그에게도 간단한 감사 인사로 오늘 하루 원동력을 불어넣어 주고 싶다는 마음이 감히 들어서였다. 안타깝게도 동명이인이 많아 찾을 수 없다는 답변만 듣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불만 사항에 관한 접수처는 여러 방면으로 잘 만들어져 있어 어떤 노력도 없이 손쉽게 연결이 가능한 반면, 고마움을 표현할 수 있는 경로는 개설되어 있지 않아 너무 인색하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이제는 서로를 굳이 대면하지 않아도 대부분의 소통이 가능해진 세상이다. 반면 서로를 직접 바라볼 수 없기에 눈빛과 표정에서 우러나오는 섬세한 감정은 더욱 읽기 어려워졌다. 그리하여 똑똑한 녹음 스피커는 수신자, 발신자 모두에게 사전 경고성 메시지로 타이른다. 폭언을 삼가라고. 그리고 문득 궁금해졌다. 어쩌면 회사에서 고군분투하는 또 다른 나를 투영하는 그는 오늘 하루 몇 번이나 사과의 말을 했을까? 누군가에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중한 자식인 그 상담사는 오늘 밤 가벼운 발걸음으로 퇴근하여 가족 품으로 돌아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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