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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장 Dec 27. 2021

이방인과 고향의 맛

이방인을 돌려세운 건 화려한 쇼윈도가 아닌, 단돈 1불짜리 고소한 해시 브라운 기름 냄새였다. 어린 시절 엄마 손 잡고 따라간 재래시장에서 먹었던 야채튀김과도 너무나도 닮은 그 향기.


 뻔뻔하리만큼 고개를 쳐들던 가난은 섬마을 소녀이던 나를 태평양 너머로 밀어냈다. 해방감과 두려움이 교차하던 그 시절. 혹여나 타인이 과거의 초라한 나를 눈치챌까 두려워 닥치는 대로 고급 레스토랑에 온전히 내 수입과 시간을 바치던 나날들이었다. 미슐랭 스타 쉐프의 코스 요리, 그에 걸맞게 곁들이는 와인… 부자 놀이를 하면서 얻는 행복은 단 2시간. 홀쭉해진 지갑과 함께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완전히 채워지지 않는 알 수 없는 그 무언가에, 늦은 밤. 꼬들꼬들한 면발에 아삭한 김치 한 점 올려서 얼큰한 라면 국물을 들이켜면 비로소 안도감이 밀려들곤 했다.


인고의 시간 동안 어떻게 하면 더 윤택하고 풍요롭게 살 수 있을까의 고민은 꼬리의 꼬리를 물고 5성급 호텔리어의 자리로 이끌었다. 이보다 더 화려할 순 없었다. 매일 펼쳐지는 최상급 재료의 향연. 비록 손님을 빛나게 만들어드리는 그림자 같은 존재였지만 적어도 노동하는 8시간 동안만큼은 마치 그곳의 주인인 것 같은 착각과 함께 대리만족도 느꼈다. 하지만 현실을 자각하는 순간 밀려오는 허기감에 매일 저녁 과하다 싶을 만치의 신경을 저녁상에 쏟아부었다. 혈당 상승 방지를 위한 잡곡밥, 균형 잡힌 단백질을 위한 요일별 각기 다른 육류와 해산물 그리고 비밀병기 보글보글 된장찌개까지.


타지에서의 환상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어느덧 가정을 꾸리고, 매 순간 선택과 책임의 무게를 짊어져야 하는 나이가 된 것이다. 아무리 허영과 사치를 부려봐도 부질없다는 걸 몸소 체득한바. 이제는 소박하지만 가장 정겨운 불판 위 지글지글 익어가는 삼겹살 그리고 소주 한 병이면 토닥토닥 위로받는다. 내 몸의 한 부분처럼 너무 익숙하여 미처 존재감을 알지 못했던 고향의 맛이 정체성을 일깨워 주고 있었다. 너는 뼛속까지 한국인이라고.


 미각과 후각은 어찌나 정다운지 조국이 밉다며 토라진 나를 시도 때도 없이 돌려세운다. 부탁하지도 않았건만 덤으로 과거로 순간이동시켜 추억 여행도 시켜주니 말이다.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멋쩍게 내밀던 검은 봉투 속 바싹하게 튀겨진 통닭 한 마리. 그리고 까끌까끌한 수염에 닿은 뽀뽀 세례. 어린 언니와 나는 “아빠 술 냄새 나”라며 졸린 눈을 비비면서도 고소한 냄새에 늦은 밤 소매를 걷어붙이고 통통한 다리 하나씩을 해치우곤 했다. 그런 날은 유달리 회사에서 쓴소리를 들은 날이었겠지. 비로소 그 시절 아버지의 나이가 되고 나서야 가장의 무게를 이해할 수 있었다.


“1분만 더!”라며 이불속에서 늦장 부리다 허둥지둥 등교 준비를 하곤 했다. 그럴 때면 엄마는 아기 새에게 모이 주는 것 마냥 찌개에 적신 쌀밥을 입속으로 한가득 넣어주며 “한 입만 더”라고 했다. 건강하게 쑥쑥 크라는 엄마의 염원의 한 술이었겠지.


100원, 500원짜리 백통 동전들을 한데 모아 친구들과 하굣길 사 먹던 떡볶이. 별 시답잖은 주제에도 숨이 넘어갈세라 깔깔대며 웃던 순수했던 학창 시절, 어깨를 움츠러들게 하는 강추위가 기승을 부릴 때면 길 한 모퉁이에서 호호 불어가며 베어 물던 붕어빵. 온화한 미소와 함께 몇 마리 더 봉투에 넣어주시던 주인아주머니의 넉넉한 인심까지.


이런 소박하고 따뜻했던 추억의 맛들이 결국엔 나를 성장시켰고, 그간의 결핍들을 몰래 채워주고 있었던 것이다.


 멀리 낯선 땅에서 홀로 서 있는 유색인종만이 느끼는 감정은 아닐 것이다. 정든 고향 떠나 멀리 시집온 우리네 어머니부터, 가족들에게 조금 더 윤택한 생활을 영위하게 할 수 있도록 객지에서 홀로 고생하시는 아버지들 그리고 더 나은 내일을 꿈꾸며 대학 또는 취업을 위해 상경한 청년들까지. 모두의 한켠에는 각자의 그리움의 맛이 있을 것이다. 그 속에는 소중한 이들과 함께했던 소소한 추억들까지.


천천히 스며든 정겨운 향기와 감칠맛들이 일상에 지친 우리네 모두를 이따금 고향으로 소환한다. 든든하게 배를 채워주고 고된 삶을 재정비시켜주기 위해. 유난히 하루가 길었거나, 한국이 그리워지는 날이면 생각이 난다. 따뜻한 거실 바닥, 엄마 무릎을 베개 삼아 누워 손톱 밑이 붉게 물들 때까지 까먹던 새콤달콤한 제주 감귤의 향을...... 영원히 외로운 이방인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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