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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멋이없는건안해 Nov 03. 2023

날 빡치게 한 네놈의 사주를 들여다보마

사주공부 마음공부

극초기 스타트업에서 마케터는 사실 여러모로 뜨악한 자리이다. 마케팅 예산도 아주 미미한 데다 그것마저도 투자 상황에 따라 있다 없다 할 수도 있고, 팀도 여유롭게 꾸려지지 못하다 보니 마케팅 전문 회사가 아닌 이상 인하우스 마케팅 조직 인력은 주로 한두 명에서 많아봤자 5명 내외의 소수 인원으로 마케팅, 브랜드, 커뮤니케이션, PR 등 모든 잡다구리한 일을 해내야 하는 도전적이라고 쓰고 처참하다고 읽는 환경. 


특히 회사가 어려워지면 제일 먼저 잉여인력으로 치부되어 굉장한 눈칫밥을 먹게 되고 결국 회사에서 정리되는 1순위 포지션이 마케터라는 미생 중에 미생. 나는 그걸 알면서도 왜 오래오래 마케터이고 싶을까 의문.

 

지금의 회사는 초기 스타트업으로 아직도 생존형, 생계형 마케팅을 해야 하는 환경인데 우리 대표님은 왜 주니어, 시니어 마케터도 아닌 나를 CMO(Chief Marketing Officer)로 뽑았을까? 나는 뻔히 알면서도 왜 또 이 불구덩이에 뛰어들었을까? 요즘 여러 생각이 많아지는 날들의 연속이다.


우리 회사는 가난했고, 가난하며,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가난할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가난한 집에서도 밥은 먹고 공부는 하고 사랑도 하고 미래를 꿈꾸듯. 우리 회사 마케터들은 예산을 모으고+모으고+모으고, 또 외부에서 따내고+따내고+따내고, 소중히 모았지만 여전히 먼지 같은 예산으로도+시장에 없는 차별화된+고객에게 센세이셔널한 경험을 주면서+크리에이티브는 끝장나고+자생적 바이럴까지 일으키는 지구상에 없는 완벽한 마케팅 활동을 기획하고 실행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랄력 끝판왕 리더형"인 나한테 욕하지 않고 즐겁게 일해주고 있는 팀원들이 고맙기까지 한 상황인데... 적은 내부에 있고 그 적이 대표새퀴이다.


울대표는 (여느 대표와 크게 다를 것 없이) 하고는 싶고 중요한 것도 알고 또 눈은 높아서 세련된 것들 하고 싶으신데 현실은 막막하니 브랜드, 마케팅, 디자인의 그 어떤 과제들도 정량적이고 즉각적인 영업적 기여가 없다면 쉽사리 집행하지 못하게 하신다. 이해는 한다. 사실 백번 천번 만이해한다. 그런데 마케팅 태생 그러기 힘든 조직인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바닷가 모래에서 진주를 찾듯 공고한 기획을 발굴하고 엄선하고 다듬고 심지어 목표까지 정량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번쩍이는 실행템이다 싶어서 제시했을 때에도 이런 저런 핑계로 뭉개다가 막판에 의사결정력 재로 결국 drop 하실 때는 하앍... 힘이 빠진다.


처음부터 꿈깨라고 하시지. 하지 말라고 하시지. 회사 상황 백만 번 천만 번 확인하고 이 정도는 진행해도 되겠다고 CMO서의 판단으로 확신하고 진행하는 건임에도 불구하고, 하라고 했다가 하지 말라고 했다가 또 하라고 했다가 하지 말라고 했다가 아주 백만 번 와따리가따리 했다가 최종 마지막 순간에 drop 된 케이스가 많다. 심지어 너무 잦다. 관련해서 협의했던 내/외부 파트너에게 죄송함, 결국 거짓말쟁이가 된 것에 대한 민망함을 수습하는 것은 순전히 내 몫. 너무 잦으니 지치고 실망스럽다.


오늘도 오후 3시 59분 28초부터 slack으로 잔소리 시작시더니 15분 넘게 call 잔소리로 넘어갔다가 결국 다시 slack으로 무한 잔소리를 시전... 다음날 새벽 12시 08분에 그의 오늘자 한바탕 잔소리 시전이 끝났다.

몸과 마음이 탈. 탈. 탈. 탈. 탈. 한줌도 남기지 않고 털려졌다.


보통의 밤 같으면 와인을 들이붓는데 오늘은 소파에 한참을 앉아있다가 조용히 핸드폰에 만세력 앱을 켜고 그놈새퀴의 사주를 들여다본다. 물이 그득한 망망대해에 떠다니는 작은 나무 을목 乙木, 이노무 대표노무새퀴는 어떠한 난관에도 뭘 해보고는 싶은데... 다른 사람들 말에 팔랑거리고 결정은 못 내리겠고... 또 사주에 木이 적으니 의지력은 부족하고... 더럽게 변덕스럽나 보구나... 휴... 알겠다... 어쩌겠냐... 이런 팔자인 것을... 이런 팔자의 너를 내가 이해해야지...


술 대신, 조용히 핸드폰 속 너의 사주를 들여다보며 너를 더 이해하고자 하고, 또 우리의 상황을 이해하고, 결국에는 내 마음을 다스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진하고 솔루션을 찾고자 하는 것도 또 임수 壬水 사주인 내 팔자인 것을. 휴 내일 내가 좀 더 노력을 해볼 수밖에. 빡쳤던 내 마음을 백해무익한 술로 위로하지 않고 사주공부 마음공부로 위로하면서 오늘도 마음 한 뼘은 더 큰 사람이 되어가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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