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싸움이 추억이던 시절, 그 여름날의 명예 전쟁 ―
“어린아이는 싸우면서 큰다.”
누가 처음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몰라도, 우리 중리동네 아이들한테는 그 말이 딱 들어맞았습니다.
우린 정말 자주 싸웠습니다.
이유도 없었고, 미워서도 아니었습니다.
그 시절의 싸움은 지금처럼 날카롭거나 흉한 게 아니라, 장난과 의리와 명예가 뒤섞인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싸움은 단연코, ‘중리대 땅넘’과의 전쟁이었습니다.
‘땅넘’은 행정구역상으론 분명 중리동인데, 본동네에서 500미터쯤 떨어진 작은 마을, 말하자면 새끼 중리였습니다.
지금은 아스팔트가 깔려 있지만, 그땐 비포장 흙길에 자갈이 섞여 있었고, 해가 지면 가로등 하나 없는 그 길을 넘어 도깨비불도 본다는 땅넘에 가려면 겁도 났습니다.
그런 땅넘과 우리 본동네 아이들은 늘 긴장 관계였습니다.
싸움의 시작은 늘 비슷했습니다.
재봉이 형님이 한마디 툭 던지면, 싸움은 예정된 수순처럼 벌어졌습니다.
“야, 오늘 땅넘이랑 한 판 붙자.”
그 말이 떨어지면 우리 마음속엔 설렘 반, 긴장 반이 일었습니다.
싫어도 싸워야 했습니다.
왜냐고요?
재봉 형님이 시켰거든요.
재봉 형님은 우리 동네 골목대장으로서 카리스마나 리더십이 대단했습니다.
동네에서 재봉 형님의 말 한마디면 우리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우리 동네 아이들의 실세 중의 실세였습니다.
게다가 이건 단순한 장난이 아니라, 중리 본동네의 자존심, 명예가 걸린 싸움이었기에 땅넘 아이들에게 질 수는 없었습니다.
전투 장소는 보통 국민학교 철봉대 옆 모래밭이었습니다.
낮엔 체육 시간에 멀리뛰기를 하고, 씨름도 하고, 턱걸이를 하던 곳이지만, 방과 후가 되면 그 모래밭은 우리만의 사각 링이자 전쟁터로 변신했습니다.
처음엔 씨름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어깨를 맞대고, 중심을 낮추고, 모래바닥을 박박 문지르며 다리를 걸고 허리를 틀어 넘어뜨렸지요.
그러다 “내가 이겼어!”, “아냐, 네가 졌어!”라며 다투다 보면, 어느새 싸움으로 번졌습니다.
하지만 이 싸움도 마치 시합처럼 정해진 방식이 있었습니다.
특정 인물을 콕 집어 붙이는 ‘대전 방식’이었지요.
땅넘의 대표는 거의 항상 인이 형님이었습니다.
그에 맞서는 건 주로 충길이 형님.
형님들이 일대일로 맞붙고, 우리 쪽이 지쳐 보이면 경남이 형님, 화인이 형님, 민남이 형님 같은 백업들이 차례로 투입되었습니다.
우리 본동네는 인원도 많고 형님들도 줄줄이 대기 중이었기 때문에, 전투는 늘 유리했습니다.
그런데 땅넘 형님들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땅넘은 숫자는 적었지만, 기세가 대단했습니다.
‘비록 숫자는 적지만, 큰 동네에게 지지 않는다’는 자존심 하나로 버텼습니다.
주로 인이 형님이 중리의 모든 적수들을 대적했고, 그러다 인이 형님이 지치면 천수 형님이 나왔습니다.
그 싸움이 점점 진화하면서, 밤의 ‘칼싸움’으로 바뀌게 됩니다.
물론 진짜 칼은 아니고, 대나무나 소나무 같은 일자로 곧게 뻗은 막대기로 길이는 대략 80센티미터 정도 였습니다.
아이들의 키에 딱 맞게 손에 쥐기 좋고 휘두르기 좋은 크기였습니다.
처음엔 막대기 규격을 정해놓고 나름대로의 룰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막대기의 크기는 점점 커졌습니다.
빨래줄을 늘어지지 않게 받치는 간짓대나, 초가집을 새로 단장할 때 이엉이 고정되도록 하는 바지랑대를 들고 나오기도 했습니다.
해순이 형 집은 닭을 많이 키웠는데, 닭장을 만들거나 수리하기 위해 항상 대나무 장대가 많았습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우리는 어른 키의 두 배가 넘는 대나무 장대를 몰래 훔쳐와 그것으로 싸웠습니다.
대나무는 길기는 하지만 속이 비어 있었기에, 우리들은 크게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고,
그 대나무를 휘두르면 ‘휙휙’ 소리가 나서 굉장한 무기를 자진 것처럼 기분이 좋았습니다.
밤이 되면, 학교 운동장은 칼싸움의 성지가 되었습니다.
땅넘의 팀은 숫자가 적어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여섯, 일곱 살 아이들도 인이 형으로부터 징발되어 나왔습니다.
그 아이들은 형아들을 따라다니며,
“앞에 무슨 소리가 난다”, “형아야 뒤에 중리 형아들 있다” 하며 땅넘 형들의 연락병 역할을 했습니다.
중리 형님들은 그 아이들을 잡아도 너무 어리기 때문에 칼로 때리지는 못하고, 크게 아프지 않을 정도로 꿀밤 한 대씩 주고는 보냈습니다.
처음에는 학교 운동장에서만 칼싸움을 했는데, 쫓기고 쫓다 보니 운동장만이 아니라,
교장 선생님 사택 뒤편, 일반 선생님들이 사시는 사택 구역, 학교로부터 떨어진 종석이 형 집 골목, 담배창고, 바닷가 둑 바로 옆에 있는 호남이 형님 집 뒷마당,
그리고 심지어는 바닷가 뻘밭까지 전장이 넓혀져 온 동네가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그날 중 한 번, 참으로 전설적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어떤 형님이 호남이 형님네 뒷간, 그러니까 옛날식 재래식 똥통에 빠진 겁니다.
그날따라 바닷물이 빠져 있어 갯물로 씻지도 못하고, 결국 샘터로 들어가 똥투성이 몸을 박박 씻고 나왔지요.
그 모습을 본 샘터 옆 동생 하나가 샘에서 사람이 쑤~욱~ 나오자 “우와~ 귀신이다!” 하며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그다음 날, 호남이 형님네 집 식구들이 그 샘물로 밥은 지었는지, 세수는 했는지…
그건 지금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그 칼싸움은 커져, 하리 동네 아이들도 참전했고, 나중네는 금평리 아이들도 한두 번 참전한 적이 있는 대(大) 행사가 되었고, 학교에서 쉬는 시간이면 전날 있었던 칼싸움 이야기로 꽃을 피웠습니다.
그런데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은 칼싸움도,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밤마다 시끄럽게 떠든다고, 사택에 사시는 선생님 가족들이 불만을 제기해서 골목대장 형님들이 선생님들께 혼났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어쩌면, 형님들 스스로 “이제 그만하자.” 했을지도요.
그렇지만…
그 시절의 칼싸움은 단순한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처음으로 동네 명예라는 것을 위해 싸웠던 전쟁이었고,
또한 우리가 처음으로 패배를 받아들이고, 승리를 나눴던 유년기의 성장통이었습니다.
지금은 형님들도 다들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손주들이 칼싸움 할 나이들이 되어 갑니다.
가끔은 그 시절을 떠올리며 손자들과 칼싸움 한 판, 어떻습니까?
예전처럼 산에서 대나무 자를 필요도 없고,
마트에서 장난감 칼 하나 사면 되겠네요.
그 시절, 우리가 그토록 진지하게 휘두르던 대나무 한 자루 속엔 웃음과 땀과 형님들의 눈빛,
그리고 지금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아름답고 뜨거운 유년의 여름밤이 담겨 있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