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반려인의 한글 고군분투기
장기간 동안 사귀면서 서로의 언어를 조금씩 배우고 있다. 네덜란드에서 가까운 이탈리아는 그나마 자주 갈 수 있기에 내 이탈리아어는 반 강제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지만 한국어를 많이 사용할 일이 없는 승태의 실력은 서바이벌 수준으로 버티고 있다. 총 아는 단어가 약 11개 정도 된다.
"맛있어요, 배고파요, 배불러요, 괜찮아요, 멋있어요, 예뻐요, 잘했어, 좋겠다" 등등
그래도 승태의 한국어 실력은 굉장히 높아 보이는데 적재적소에 아주 필요한 단어만 내지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그러니까!, 맞아요 맞아" 한 문장으로 찰떡같이 추임새를 넣어준다. 주로 우리 부모님과 통화할 때나 친구들에게 이탈리아식 과장된 표현을 첨가해 재주(?)를 부리면 모두 홀딱 속아 넘어간다.
아무튼, 승태가 한글을 배우는데 가장 크게 일조하는 것은 넷플릭스의 한국어 드라마들이다. 우리가 미드로 영어를 배우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거기에 대한 폐해도 엄청나다.
승태의 <한국어는 너무 어려워> 시리즈에 대해 소개해 보려 한다.
1. 의역의 폐해
승태가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는 <응답하라 시리즈>이다. 적절한 코미디와 로맨스 그리고 우정까지 이탈리아 남자를 사로잡았다. 한창 <응답하라 1994>에 빠져있었을 무렵 아침에 일어나 부엌으로 내려가니 승태가 방끗 웃으며 "오빠!! 밥 먹어"라고 소리쳤다. 오빠라는 말은 가르친 적이 없는데 자기를 보고 지칭하는 건가 싶어서 넘어갔다. 그날 밖에서 잠깐 만났는데 나에게 손을 흔들며 "오빠!!"라고 부르는 것이 아닌가. '나 오빠 아니야... 누나면 모를까 나이도 네가 더 많잖아'라고 했더니 드라마에서 오빠를 "Honey, Darling"이라고 자막에 나왔단다.
<응답하라 1988>에 빠져있을 무렵 집에 돌아온 나에게 "어 왔어? 으유 미친놈"이라고 한다. 아니 집에 오자마자 욕먹어서 황당해하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친한 사이에 미친놈이라고 부르는 거 아니냐고 한다. 그래 응팔에서 친구끼리 '미친놈, 미친놈' 하긴 했지만 아주 그냥 공기처럼 생각됐었는데 승태를 통해 들으니 아주 난감하다. 그래서 미친놈은 욕이라고 아주 영어로 찰떡같이 알려줬다.
2. 한국어는 한 끗 차이
우리는 부모님과 자주 영상 통화를 하는 편이다. 60 평생 안경을 안 쓰셨던 아빠가 드디어 안경을 맞추셨단다. 이 찰나 승태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아버지, 진짜 못생겼어요!"라고 내질렀다. 우리 가족 모두 자지러지고 승태는 어리둥절해 있었다. 잘생겼다와 못생겼다의 차이를 알려주자 왜 한국어는 한 글자씩 달라지는데 뜻이 180도 달라지냐고 울상을 지었다. 그리고 보니 그렇다 정말 한국어는 한 끗 차이다.
같이 가족과 관련된 한국 영화를 보는데 승태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사랑스러운 눈으로 "아유 개새끼"라고 하는 것이다. 아니 이건 또 무슨 날벼락인가 싶어서 돌아봤더니 방금 전 그 영화에서 할머니가 자기 손주를 어르며 "개새끼"라고 했단다. 내 새끼겠지. 한국말은 이래서 문제라며 어떻게 한 글자 차이로 my love에서 son of Bitch 가 되냐며 한국어의 한 끗 차이에 대해 놀라워했다.
박사를 갓 졸업하고 나서 승태가 나를 종종 '독사'라고 불렀다. '박사'가 '독사'가 되는 것은 승태에게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새로운 단어를 안다며 뿌듯한 얼굴을 한 승태를 위해 굳이 발음을 고쳐주지 않기로 했다. 그래 뭐 독사, 괜.. 괜찮아..
3. 뉘앙스는 몰라요 구글도 몰라
승태가 가족 채팅방에 초대되고 맡은 역할을 전화 잘 안 보는 딸 대신 네덜란드 사진 종종 보내주기, 엄마 아빠가 보내는 꽃 사진에 엄지 척해주기 등등이다. 사진만 보는 줄 알았더니 종종 구글로 메시지를 번역해 보기도 한다. 가끔 엄마가 날 찾을 때 엄마가 뭐 물어본다고 대신 전해주기도 한다. 이렇게 까지 보면 구글이 원활한 통역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다. 나는 낮잠을 자고 승태만 깨어있던 날 엄마가 그룹 채팅에 잘 있냐고 물었나 보다. 한창 카톡 카톡 카톡 하는 소리에 일어났더니 엄마가 보낸 문자에
"진주 지금 잔다. 너희도 좋은 밤 보내라"
라고 답해 놓았다. 엄마도 아빠도 동생까지 모두 웃어서 난리가 났다. 부모님은 집안에 어르신이 하나 더 생겼다며 엄청 즐거워하셨다. 우리 엄마는 엄청 엄하시다. 아빠도 꼼짝 못 한다. 심지어 해리포터 엄브릿지와 닮았다. 동생은 따로 연락해 누나가 시킨 거 아니냐며 30년 동안 엄마를 저렇게 대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며 고소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