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가면서 노트북을 가져가기는 처음이다. 여행지에 습관처럼 책을 한두 권 가지고 갔었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휴양지에서 읽을 책을 고르지 않고 틈틈이 여행기록을 남길 작은 수첩과 노트북을 트렁크에 고이 넣었다. 브런치 스토리가 이렇게 나를 승격시켰단 말인가?(땡큐, 브스!!)
이번 여행은 여행 그 자체만의 설렘에 브런치스토리에 여행스케치를 글로 올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더해졌다. 마치 여행이라는 에스프레소 위에 여행스케치라는 크림을 얹은 향기롭고 부드러운 커피 같은 시간이 될 것이라는 바람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비행기에서부터 노트북을 꺼내고 여행의 모든 시간을 글로 남기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지만 역시 현실과 이상의 거리는 한국에서 몰타(올여름 가족 여행지)의 물리적 거리만큼이나 멀었다.
2024년 여름 가족여행지는 몰타이다.
몰타는 유럽 지중해의 아주 작은 나라이다. 최근 휴양지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아직 한국에서는 조금 낯선 나라이기도 할 듯하다. 더구나 한국에서의 직항이 없기 때문에 몰타에 가려면 유럽의 다른 나라를 경유해야 한다. 그래서 비행 시간도 길다.
미리 이탈리아에 가 있던 딸과 로마공항에서 만난 나와 신랑은 3일은 로마에서 머물고 몰타로 건너가기로 여행 계획을 세웠다. 십여 년 전 바디칸에서의 나의 감탄과 경이로움을 다시 한번 눈과 가슴에 담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컸다. 나에게 로마에서의 2박 3일은 트레비 분수나 젤라또가 아니라 바티칸 하나면 충분했다. 그리고 일주일은 몰타에서 지내기로 했다.
아! 몰타는 뭐랄까!! 두 가지의 필름으로 돌아가는 나라이다.
첫 번째 필름은 중세시대로 타임슬립을 해서 그 시대의 일원으로 들어간 느낌이다. 사실, 이런 비현실적이고 상당히 몽환적인 느낌이 딱 내가 반해버리는 취향이다. 우리는 몰타의 수도이자 구시가지의 모습과 해안절경을 품은 발레타(몰타의 수도)의 에어비앤비 숙소에서 몰타여행 전반을 머물기로 했다. 세계문화유산이므로 외부 건축물의 리모델링이 철저히 제한을 받아서인지 신기할 정도로 수백 년 전의 외관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그러나 에어비앤비 내부는 반전이 있었다. 신식엘리베이터(유럽에서는 상당히 보기 드문)를 갖추고 있는 편리한 내부였다.
그리고 몰타의 후반여행을 위해 발레타에서 택시로 15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휴양지역인 세인트 줄리안스에 위치한 드레고나라 리조트로 이동했다. 이곳은 고전적인 발레타와 달리, 한창 현대식 리조트가 들어서고 버거킹등의 대중적인 음식점이 있는 휴양지였다. 지중해 바다와 리조트 수영장에서 하루 종일 수영을 즐길 수 있는 그야말로 쉬면서 즐기는 곳이다.
일단 전체적인 여행 스케줄이 이러한데, 노트북 이야기로 다시 거슬러 올라가자면 비로소 여행의 중반을 넘어서면서 나는 처음으로 노트북을 열었고 그간 수첩에 틈틈이 메모해 두었던 조각 메모들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트렁크에서 가장 먼저 늘 소중히 꺼냈었던 노트북은 숨만 쉬고는 다시 트렁크로 들어가는 신세였다. 로마, 몰타의 발레타, 몰타의 세인트 줄리안스에 와서야(여행 후반부) 나의 노트북은 지중해 아침 햇살로 일광욕을 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지금 이 글을 쓰는 시각은 몰타시간으로 오전 10시경).
나의 용감한(?) 포부는 나의 첫 번째 브런치 연재를 이번 여행스케치로 올릴 계획이다. 늘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인정하는 바 아무튼 계획은 그러하니 세세한 나의 여행스케치는 일단 한국으로 돌아가서 구상하기로 하고 미뤄두기로 한다.
지금 지중해 바다를 바라보며, 떠올린 것은 ‘여행이 인생의 축소판’이라는 감상이다.
여행의 중반을 넘어가니, 차분한 사색과 글을 쓸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나도 인생의 중반 정도를 돌아가는 이 시점에 다시 내가 마음에 늘 소중히 품었던 글쓰기를 실타래 풀 듯 풀어내듯이!
자, 그리하여 이제 여행이 인생과 얼마나 비슷한지에 대한 리스트를 떠올려보자.
첫 번째, 여행과 인생은 둘 다 시작과 여정과 끝이 있다는 것이다.
네버엔딩스토리라면 여행이, 그리고 우리의 인생이 이렇게 소중하게 여겨질까 싶다. 소설도 기승전결이 있기에 하나의 스토리가 되듯이 여행도 인생도 유한하기에 더욱 귀한 시간들이다.
두 번째, 여행의 초·중반 까지는 시간이 그리 빠르지 않지만, 여행의 중반을 넘어가면 어느새 여행이 끝나가서 아쉬워지고 그 시간이 소중한 것처럼, 인생도 인생중반을 넘어가면서부터는 체감의 시간 빠르기가 다르다. 오죽하면 우스갯소리로 열 살 때는 시속 10Km, 삼십 살 때는 시속 30Km, 60살 때는 시속 60Km, 아휴! 백 살 때는 시속 100Km(과속?)로 달린다고 하던가!
세 번째, 여행에는 경비와 시간과 에너지가 들어간다. 우리 인생도 똑 닮았다.
어떤 형태로든 내 것을 투자하지 않은 여행은 없으며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한마디로 날로 먹는 것은 여행이든 인생이든 불가하다. 우리가 흘리는 땀 한 방울, 눈물 한 방울, 1칼로리의 소진, 현실적으로는 통장의 잔고 등등. 무수히 많은 대가와 경비를 준비하고 소진하며 여행하고, 인생을 살아간다.
네 번째, 여행에는 늘 나름 일정계획이 있지만 여지없이 예측하지 않았던 일들이 사이사이 생겨난다. 우리의 인생처럼. 그래서 여행도 인생도 Fun Fun!! 하다고 했던가. 계획한 대로만 흘러가면 좀 심심하지 않은가. 좀 아슬아슬하더라도 숲길 걷다가 예상치 않은 나무에서 불쑥 다람쥐가 뛰어나오고, 햇살 속에서 갑자기 소낙비가 지나가듯 우리는 예상치 않은 상황 속에서 때로는 환호를, 때로는 비명을 지르지만 분명한 것은 심장이 쿵쿵거리며 흥분한다는 것이다.
다섯 번째, 여행에서는 처음에는 숙소도 그 지역도 낯설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지고 정이 생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낯선 지역, 낯선 주거지의 ‘낯섦과 익숙함’을 얼마나 빈번히 경험하는가.
이번 여행에서도 고작 이틀째 묵었던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역시 집이 편하네!’라는 농담 아닌 농담을 하며 우리 가족은 웃었다. 이번 여행에서 두 나라, 세 곳의 숙소를 이동하면서도 그 사이에 ‘낯섦과 익숙함’의 반복을 경험하고 있다. 하물며 긴 인생에서는 어떠하겠는가!
여섯 번째, 여행자의 성격 기질 그리고 품성에 따라 저마다 여행 스타일이 다르다. 선호하는 여행지나, 여행방법도 각양각색이다. 여행 중에 맞닥뜨리는 상황이나 문제에 대한 해석이나 해결방안도 다 다르다. 어쩜 인생살이와 이리도 데칼코마니인지, 인생을 풀어나가는 스타일을 보면 자신의 기질과 성격대로 살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람의 기질과 성격은 ‘삶의 해석의 틀’을 만든다. 똑같은 상황이라 할지라도 각자 그 상황을 해석하고 받아들이고 해결해 나가는 과정과 방식이 다르다. 과정과 방식이 다르니 당연히 결과 또한 다르다. 며칠 전 바티칸에는 극성수기라서 역시 사람이 엄청나게 많았다. 그들이 다 똑같은 바티칸을 경험했을까? 아마 그 수많은 사람 수만큼이나 그날 그 시간에는 수많은 바티칸이 공존했을 것이다.
일곱 번째, 여행을 하다 보면 새옹지마를 경험하는 경우가 많다. 앗! 했다가 오! 하는 경험들.
인생의 굽이굽이 길 가다 보면 우리가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새옹지마가 얼마나 많던가! 살다 보면 더욱 절감하는 것은 사자성어나 속담은 얼마나 놀라운 통찰의 산물인지! 수 십장의 원고내용이 단 네 글자, 단 한 문장으로 표현되다니! 감탄이 절로 나온다. 기회가 된다면 사자성어나 속담으로 글 한편 풀어내고 싶다. 아무튼, 다시 새옹지마로 돌아가자면 당황스럽거나 불쾌하기까지 한 상황으로 감정에 빨간등이 삐뽀삐뽀 켜지는 순간이 이번 여행에도 소소하게 있었는데 그 이후 그로 인해 약간의 보상이 되는 에피소드(브스 연재에 세세한 이야기는 올라갈 수 도 있겠다)가 있었다. 그때 딸이 ‘새옹지마’를 외쳤다. 우리 인생 살아가며 새옹지마뿐이겠는가! 얼마나 많은 사자성어와 속담을 외치는 순간들이 많은지, 아! 인생이여!!
여덟 번째, 여행을 하다 보면 친절하고 정직한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나기도 하지만 무례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도 만나게 되기도 한다. 인생 살다 보면 우리는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은 만나며 살아간다. 좋은 사람도 만나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만나게 된다. 특히, 해외여행 중에서 이번 몰타 여행은 동양인 특히, 한국인을 찾아보기 힘들었기에 이런저런 인종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문화, 다른 인종의 차이에서 오는 문화적 차이 그리고 겉으로 드러나는 다양한 태도 등을 접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깊고 얕게 맺어지는 관계에서 좋은 사람 또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무수히 만난다. 나는 대체로 어떤 사람으로 상대에게 기억되는 사람일까하는 생각을 역으로 하게 된다.
아홉 번째, 여행은 대체로 즐겁고 행복한 경험들을 하고, 평소에 누리지 못했던 호사를 누릴 때가 있는데 그 순간 가슴 한편에는 이를 함께 누리지 못하는 사랑하는 누군가를 떠올리며 가슴이 쓰릴 때가 있다. 예를 들어 나의 경우에는 연로하시고 다리까지 불편해지신 홀로 계신 친정어머니라든가(엄마에게 전화해 보니, 역시 한국은 오늘도 매우 덥고 습한 날씨라 한다. 안부전화를 하는 내내 마음이 울컥!!). 인생에서도 마찬가지이다.좋은 것을 누리게 되었을 때 이 삶을 사랑하는 이들도 함께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이 늘 한편에 있으니 말이다. 나이가 들수록 ‘행복하길 바라’라는 인사말이 상투적인 말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들 행복하게 인생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깊어진다.
열 번째, 여행의 모든 일정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희로애락을 다 경험한다. 그러나 그 여행을 마무리할 때 또는 훗날 그 여행을 떠올릴 때는 대체로 ‘좋았다’라는 하나의 인상으로 남는다(경우에 따라서 다른 인상이 남을 수 도 있지만). 인생도 인생 백 년이라고 치면 얼마나 수많은 희로애락으로 점철되었을지! 그러나 훗날 인생을 회고할 때는 어쩌면 구구한 긴 문장이 아닌, ‘좋았다’의 단어 하나면 충분할지도 모르겠다. 여행마다 희로애락의 각각의 빈도와 깊이는 다 다르다. 어떤 여행은 희가 많고 어떤 여행은 애가 많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인생은 말할 필요도 없다. 과정 중에 있을 때는 각각의 희·로·애·락이 다 각자 그 존재를 분명히 드러낸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과정이 지나고 되돌아볼 때(회고) 각자의 것들이 녹여지고 섞여서 그중 가장 두드러졌던 것으로 ‘대체로’라는 수식어가 붙으며 귀결된다.
‘대체로 좋았어’.
지금 바로 눈앞에 수영장이 있고 저 너머에는 지중해바다가 넘실거린다. 몰타의 해는 하늘 중앙에서 이글대고 사람들은 물속에 첨벙 뛰어든다. 수영을 못해서 발이 지면에 닿지 않으면 패닉이 오는 나를 위한 아주 얕은 수영장이 눈앞에 있으니, 자 이제 나는 노트북을 덮고 마음 같아서는 첨벙 물속에 다이빙하고 싶지만, 물이 무서우니 내 스타일 대로 살금살금 수영장에 몸을 담그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