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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접한 이별

그리고 죽음

by 요가강사조재자

<처음 접한 이별 그리고 죽음.>

20대 시절 그때를 떠올려본다.
죽음을 처음 접한 21살 때.
크리스천으로 활동했던 중. 고등 여고시절.
젊은 집사님 한분이 교회청년부를 맡으셨다. 그분의 성함은 이동진집사님.

우수한 성적으로 4년대를 졸업하셨으며, 40대 중반 나이에 시골교회가 인접한 마을로 오셨다.

고령. 면소재지에 위치한 곳에서 대구까지 출퇴근을 하셨다.

결혼을 늦으막에 하셨다는 얘기, 사정상 자녀를 낳으실 수 없다는 얘기와,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운 분을 아내로 맞이하셨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누구보다 그분은 교회일에 열심을 다하셨다.

시골교회의 특성상 교회예배를 보기 위해선 기본 걸어서 40분 걸리는 곳에서 오는 분들이 있다.
나 역시 그렇다.
그런 조건 때문에 차량운행 필수다.
차량운행은 수요예배, 주일예배 집사님은 그 일을 도맡아 하셨다.

직장일로 피곤하실 텐데도 늘 성실히 , 불평 없이 교회일을 맡아주셨고, 교회성가대며, 청년부일도 마다하지 않아 청년들이 잘 따라주었다.

그렇게 친분을 쌓아가기 3년 뒤.
내가 고3시절 때.

날벼락같은 소식이 전해왔다.
대구에서 고령집으로 오시는 새벽 1~2시경에 교통사고로 그 자리에서 "운명"하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가슴이 먹먹하고, 심장이 마구 뛰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성가대에서 같이 연습하며, 하하 호호 웃음꽃 피우셨던 분이셨는데..
하루아침에 유명을 달리하셨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차마 장례식장엔 가보지 못하고, 시골교회 마을입구에 안치하는 입관날에 참석했다.

죽음을 처음 접한 19살 나이.
나에게 슬픔보다 두려움이 앞섰다.
집사님은 흰 천으로 뒤덮여 꽁꽁 감싸져 있었지ㅡ.
숨 쉴 구멍하나조차 남겨놓지 않고 압팍되어 있었다.
가족들 과신도들은 찬송가를 부르며 집사님이 가시는 길이 외롭지 않기를 바랐다.
목사님의 마무리기도로 입관식은 막바지에 이르고 끝내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좋은 곳에 가셔서 이 세상 이루지 못한 가정 이루어 행복하시라며 흐르는 눈시울 뜨겁게 기도드렸다.

"마지막 이 생의 끝 미련 없이 가소서"

차가운 땅. 흙덩이에 갇힌 빈 육체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내가 딛고,
숨 쉬고,
헐떡 거리며 마시는 공기도

쉼 없이 펌프질 하는 심장도

죽음을 다하며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너무 이른 나이에 죽음을 지켜본 나에게 "삶은 즐거움과 기쁨 두려움과 슬픔을 안겨주었다.

기억너머 저편에서 이별을 추억하며 이만 펜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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