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비
비 내리는 하루의 여정(내 마음의 비)
예전 이맘때쯤 초등학교시절 시골집 기왓장인 얹힌 툇마루에 앉아 빗줄기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다독이고, 빗소리에 리듬장단을 맞추었던 그때가 생각난다.
윗채에서 아래채로 건너가려면 슬러퍼에 온통 흙탕물이 튀어 열 발가락 사이사이로 스며들어오는 물은 다시 씻어야 하는 질퍽한 뻘처럼 그곳의 흙내음 가득한 곳이 그리워지곤 한다.
빗소리의 가락 장단에 춤을 추는 기왓장들도 이내 깊어오는 시골의 어둠을 정겨움속에 묻고는 경음악소리에 쉬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나 보다.
물비린내 공기와 한들거리는 바람이 마냥 싫지는 않았었던 그땐 할머니와 난 같은 공간을 함께 했었다. 시골흙집의 특성상 비만 오면 눅눅한 습기냄새와 쾌쾌한 청국장 끓이는 냄새같이 코끗을 자극하지만 난 가히 싫지가 않았다.
아마 소박한 내 보금자리를 즐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마당 한편 장독대옅에는 작은 마한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장맛비가 올 때면 황금색물결이 넘실대 내를 이루고, 바다를 이 룰처럼 출렁거렸다. 그때마다 어김없이 일부러 좁쌀 한 되 박만 한 뚜레박으로 퍼내고 또 퍼내어 때때묵은 장독대를 매끈한 두 손으로 정성스레 씻겨내리기도 하고, 유독 높은 툇마루에 첫발을 디디기 전 디딤돌역할을 하는 뜨럭 앞을 쓰샥. 쓰샥비질한후 좁쌀 한 되 주박만 한 물한두바가지 길어 마음속 묵은 때를 씻기듯 말끔히 씻겨 내리곤 했다.
그렇게 여정을 보내고는
비에 젖은 옷과 청소로 얼룩진 옷을 입고 방으로 들어설라치면 나름대로 깔끔하신 울 김 여사 할머니께선 "젖은 옷 입고 방에 못 들어온다"하시곤 했다. 할머닌 방바닥에 빗물이 떨어져 미끄덩거리는 게 싫으셨던 것이다. 깔끔하신 울 김여사할머니 덕에 늘 정갈한 방에서 지낼 수 있었고, 평생 본인이 맘에 드시지 않는 옷은 남이 줘도 입지 않으신 분이셨다.
또한, 마른빨래를 깨실 때면 늘 손을 다림질 삼아 주름진 곳을 쫙쫙 펴시곤 한 번 더 쓱 누르시고 하셨는데 그때마다 신기하게도 주름이 펴지곤 하는 모습이 영락없이 꼼꼼한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놓으신다.
언뜻 고모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로 할아버지 살아생전에 한복과 두루마기를 손수 지으셔서 입혀주셨다는 얘기를 전해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의연 중에 나도 수건을 깰라치면 벌써 손이 먼저 움직여 따라가고 있다. 아마 보고 자란 것이 있기에 나의 내면아이는 알고 있나 보다.
나에게 할머니는 엄마이자, 유년시절의 친구 같은 각별한 존재이다.
그때엔 아버지와 엄마가 농번일로 바빠 자식들을 챙길 여유가 없어서 할머니가 도맡아 키우다시피 하셨다. 그래서일까 지금 도돌아가신 할머니의 산소를 명절마다 오빠 둘이와 난 찾아뵙고 이리저리 손볼부분이 없는지 살펴보곤 한다.
얼마 전 둘째 오빠가 어버이날을 기점으로 시골에 잠깐 들른다면서 나보고"할머니 산소에 가겠느냐고?" 난 잠시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두 아이를 데리고 가려니 가파른 산길이 살짝 걱정은 되었지만, 아이들도 한두 번 가는 곳이 아니라 문제 될 것이 없어서 같이 가겠다고 대답하고선 할머님이 좋아하시는 소주 한 병 사들고 온다는 것을 깜빡하고, 몇 가지 과일만 챙겨서 온 걸로 위안 삼고는 못내 죄스럽고, 송구스러운 맘으로 산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나란히 누우신 것이 아니라 아파트 위층, 아래층처럼 그렇게 모셔지기를 할머니는 간곡히 원하셨다.
아마도 살아생전 할아버지가 많이 미우셨나 보다.
유독 할머니의 보살핌이 각별했던 난 살아생전 할머니와의 추억이 데면데면하게 떠오른다.
중학생이 된 어느 날 가랑비에 옷 젖는 마냥 조금 쌀쌀한 날, 어둑어둑해진 날인데도 할머니가 돌아오시지 않아 오매불망 기다리다 우산을 냅다 집어 들곤, 집 밖 공터에서 장에 가신 할머니를 마냥 기다렸다.
이제 오실 때가 됐는데~중언부언하면서 동공을 크게 확장해 할머니의 그림자라도 보일까 싶어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기를 십 여분.
저 멀리서 하얀 저고리에 청색치마를 두르신 모습과 머리에 보자기를 이 시고 빗물 머금은 모습으로 지친 발걸음을 힘겹게 걸어오시는데, 반가움과 안타까움으로 할머니의 보자기를 냅다 건네받으며 "왜 이제 와? 나 배고파." 하며 매몰차게 돼 물었던 기억이 까마득히 떠오른다. 행여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나 하는 맘 때문이었다. 그런 맘을 아시는지 "괜찮다." 하시며 주섬주섬 젖은 옷을 벗으시기는커녕 저녁준비를 하러 부엌으로 향하시는 뒷모습이 아른거려 지금도 눈물을 훔치고 있다. 그때는 왜 몰랐을까?
늘 나에게 있는 것을 이웃에게 조금이라도 나눠주시며, 베푸는 삶을 어린 손주들에게 보여주셨다.
그렇게 고생만 하시다 생의 끈을 놓으려 하실 땐 밤새누우신 자리 그대로 한나절을 보내시고, 자식들 다 보시고, 손자, 손녀, 증손자까지 보시고는 잠결에 이 세상을 등지시고 편안한 곳으로 가셨다. 못내 아쉬움 가득 남는 살아생전 손발한번 씻겨 드리지 못하고 긴 머리카락 한번 빗겨드리지 못해 내내 죄스러움으로 남는다.
그런 맘을 아시는지 49제를 지내고 종종 꿈속에서 얼굴을 보여주시기도 하고, 도란도란 나랑 얘기도하곤 했는데 돌아가신 지 3년쯤 되던 해에 하얀 한복을 정갈하게 입으시고, 수많은 사람들의 옷도 온통 하얀 한복을 입고선 할머니의 뒤를 따르고 있다. 또한, 할머니의 좌. 우로는 검정옷에 갓을 쓴 두 사람이 호의를 하고는 산속 옅길 어딘가로 홀연히 사라지시면서 "이제 간다"라고 하셨던걸 지금도 기억한다. 꿈속에서 깨어나면서도 나의 눈가엔 할머니를 맘속에서 보내드릴 수 없어 이슬이 한두 방울 맺혀 있다. 아마도 할머니는 두사자의 보호를 받으며 천국길로 접어드시지 않았을까?
할머니가 가시는 그 길은 꽃밭길이였을 것이고,
영생무병하는 강을 건너시고, 연꽃길 속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셨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할머니를 보내드리고 문득,
입버릇처럼 하신 말씀이 있으셨다.
예전엔 우리 집 땅을 밟지 않고선 마을에 들어설 수 없을 정도의 유지였다고 근데, 어느덧 넉넉히 않는 살림살이가 기울었고, 할머니가 봄이면 산으로 들로 다니면서 쑥 뜯고, 냉이 캐고, 나물을 채취해 월배장에 일주일 한두 번 정도 내다 팔 아서 그 값으로 생활비를 충단했어야 했다고, 그러니, 할머니의 손발은 성한구석이 없을 수밖에 , 깡마르신 체구에 무슨 힘이 있으셨을까? 정말 대단한 의지셨다. 언제부터인지 담배를 피우고 계셨고, 그리라도 하지 않으시면 잠시나마 시름을 잊을 수 있는 위안이 없어서 인 줄도 모르겠다.
지금도 산소에 가면 할머니를 위해 오빠들은 담배를 태워드린다.
할머닌 3남 1녀의 자식을 두셨는데 울아버지는 둘째 아들이시다.
아버지는 농사지으신 쌀을 수확하면 현금으로 되파셔서 부족한 생활비를 충당하곤 했지만 오빠 둘의 고등학교등록금과 용돈을 대기는 턱없이 부족했었다. 그나마 할머니의 부지런함으로 연명해 나갈 수 있었던 게 다행이다 싶다.
그런와중에도
엄만 가난한 생활들이 고달팠는지 알게 모르게 집을 나가셨다. 그리고 몇 해 후 초등 5 학년 때쯤인 것 같은데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온 동네 친인척들이 다 모여 있었다. 그 당시에 우리 마을은 집성촌으로 이루어져 있었기에,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에 집으로 한걸음 옮기니 엄마가 집에 들어와 할머니와 고모랑 얘기를 나누고 있다.
무슨 말을 한 것일까??
난 반가움에 눈물을 글썽이며 엄마품으로 달려가고 싶었는데 엄마의 표정은 그리 밝지만은 않다.
오고 싶지 않은 곳에 , 와서는 안 되는 곳에 온 것처럼 두 눈을 내리깔고 있어서 알 수는 없었지만 표정을 잊은 사람처럼 그렇게 앉아있다. 그땐, 몰랐다. 애지중지 자식들 키워서 장가보내고 나면 끝인 줄 알았는데 손녀, 손녀의 뒷바라지까지 책임져야 하는 할머니의 삶이 고달픔이었고, 그 속에서 헤우적 헤엄쳐보려 했지만 어느한곳에 맘을 부칠 수 없는 방랑의 기질이 엄마에겐 잠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아이를 낳아서 기른 지금에야 조금은 알 것 같다.
오히려 엄마는 시대를 잘 타고났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 적도 있다. 부지런하기로 소문이 났었고, 동네에서 사교성이 좋아서 생활고에 허덕일 때 돈을 융통해서 가져온 것 같다. 아마 보험외판원이나 세일즈가 그 당시에 있었다면 일등판매왕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
그만큼 생활력하나만은 굳건했다. 그렇지만 부모로서 아내로서의 역할은 빵점이었다.
오빠 둘 장가갈 때도 , 내가 결혼할 때도 옅에는 없었다.
오빠 둘이는 사내다 보니 그럭저럭 견딜 수 있었다지만
여자인 나로 써는 20년쯤 흠이 아닐 수가 없었다. 상견례전날
오죽하면 '돌아가셨다고 얘기할까?'라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을 만큼 원망스럽고, 미워했다.
특히, 임신으로 인해 지친 맘에 남들은 친정엄마가 이것저것 출산준비물을 해준다고 자랑하며 떠들어댈 때 난 맘속에서 일어나는 슬픔이 나를 더 짓누를 수밖에 없어서 혼자서 꺼이꺼이 울먹이며 눈물을 삮혀야 했다.
여잔 쮜어짜듯한 생의 다리하나를 건너는 출산의 고통을 겪고나며 진짜엄마가 된다는데 난 진짜엄마가 되었는데도 , "엄마 고마워"라고 얘기할 부모가 옅에없었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엄마'라는 존재가 울컥 올라왔어도 난 소리 칠 곳이 없어 숨 죽어 조리원에서 흐느껴요야 만 했었다.
실컷 울고 난 뒤 속 시원함으로 나 자신을 다독이며
'내 자식들만은 애지중지키워겠다는 다짐을 하며(옅에서 보고 있던 둘째가 애지중지 안 하잖아라며 토를 단다. 귀여븐 녀석) 엄마처럼 은 되지 않겠다고,
자기 살자고 자식을 내팽개치지 않겠다고, 굳건히 마음의 심지를 내렸다.
한데, 시골인심이 그러한가?
가가호호 몇 가구 되지 않는 곳엔 마땅히 이야기소재거리가 없으니 남의 집 허물을 입망아 찢기를 좋아라 한다. 그뿐인가? 소문은 왜 그리 빨리 퍼지는지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는 옛날 속담 그런 거 하나 없다는 걸 새쌈 알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남들보다 행동거지 하나하나 조심할 수밖에 없었고, 말한마디 하는 것조차 동네사람의 눈을 의식했어야 했다. 간혹, 친인척분들이 들러도 달갑지가 않을 수밖에 없다. 오히려 또 뭐라고 소문낼 거리를 찾으러 온 것만 같아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틈만 나면 우리 집 토지를 꿀꺽 그냥 삼 겨버리려는 이리꾼처럼 몰려드는 꼴이라니.. 정말 가관이었다. 속이 뒤틀리고 토사가 금방 쏟아질 것만 같은 심정을 억누를 길이 없다. 그 순간에 그런 생각들이 나의 뇌를 달구었다.
품속에 비수의 칼날을 갈아야만 했던 어린아이의 현실과 타협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하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음에 절망스러웠고, 슬펐다.
그래서 선택한 이중의 성격을 내보이면 친인척들에게 오히려 걱정해 줘서 고맙다고 했었다.
보이는 것만 보려고 하는이 들에게 한방 거하게 날릴 그때를 기다리며 말이다.
이젠 말할 수 있다.
사철송 소나무의 자태처럼 굳건히 비바람을 이겨내는 계절과 세월의 무게를 지탱해 내는 아이가 어른이 되어서
마음속에 비를 주룩주룩 씻겨내기까지 참 많은 인고의 날이 흘렀다. 이제는 그 재를 덜어내어 더도 말도 덜도 말고 비수의 앙갚픔을 "나눔"이라는 두 글자에 덮입혀 되돌려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아이는
삐닥선 기차를 타고 먼 여행지의 길로 들어서지 아니하고, 천성의 선함과 할머니의 맑은 기도가 샘물의 바탕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겉으로 보이길 원했던 아이가 이젠 내면의 아이로 상실 없이 삶은 변화할 수 없고, 성장할 수없듯이 (엘리자베스퀴블러로스의 인생수업 본문 중) 인생의 삶을 제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걸 소리쳐 외쳐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