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 의전 또한 업무이다. 단, 합리적인 선에서 말이다
"한결아, 가자."
"넵."
다음 주 화요일은 상무님과 외국계 증권사 서울지점장 - 한국에서 근무하는 사람 중에 최고직책 - 과 저녁이 있다. 강남 쪽에서 저녁을 하기로 해서, 우리는 사전답사를 가야 한다. 상무님과의 외부 저녁 스케줄에 처음 가보는 식당이 잡혀 있다면 거의 대부분 답사를 하는 것이 기본자세였다. 그 식당이 정확하게 어디에 몇 층에 위치해 있는지, 들어가는 입구는 어떻게 되는지, 주차는 어떻게 되는지, 메뉴는 뭐가 있는지, 자리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가격은 얼마인지 등등을 알아놓고 당일 저녁에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착착착' 진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날은, 자주 가는 곳을 그냥 갈 것이지 그날따라 굳이 새로운 곳을 가보시겠다고 하여, 다른 곳에서 추천을 받아 교대역 근처 소고기 집으로 예약을 해놓은 상태였다. 그래서 우리는 4일 전에 미리 한번 점검하러 온 것이다. 이것저것 세팅이 어떻게 되는지 확인하고, 시범적으로 식사를 하면서도 손주임님은 바쁘다. 화장실, 주차장, 계산하는 곳 등의 동선을 다 알아놓고 옷은 어디에 걸어야 하는지, 술 종류가 어떻게 있는지, 콜키지 프리인지, 추천 고기는 무엇인지, 이 집에서의 고기는 어떤 순서로 먹으면 좋은지를 꼼꼼히 알아본다. 그렇게 충분히 알아봤다고 판단이 들면, 답사 다음날 'OOO증권 석식 미팅의 건' 이라는 이름으로 보고서를 만들고 상무님께 미리 보내놓는다.
드디어 약속 당일 저녁에, 나랑 손주임님은 약속시각 40분 전에 식당에 도착한다. 사전답사를 했는데도 굳이 그렇게 미리 또 가 있는 이유는, 다시 한번 사전답사와 달라진 점은 없는지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종업원들조차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거야? 참 호들갑이다' 라고 생각하는 듯 하지만, 우리라고 좋아서 이런 것이 아니다. 혼나지 말아야 하니까 하는 것이다. 이 회사의 의전은 업무보다 더 중요할 때가 많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의전 위에 일이 있다고는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의전은 기본 중의 기본이라 당연히 잘해야 하는 것이고 그 이상으로 일도 잘해야만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곳이다.
상무님 비서에게 몇 시에 출발하셨는지 여쭤보니 곧 도착 시각이 되어 간다. 이제 20분 전이니까 지금쯤이면 주차장 쪽으로 나가서 대기를 하면서 상무님과 미팅 상대방을 기다려야 한다. 보통 막내급들이 먼저 와 있고, 20분 전 정도면 팀장님을 제외한 남은 인력들이 도착을 한 상태여서 과차장들이 상무님을 기다린다. 보통 팀장님과 상무님은 한 차로 같이 오곤 하는데, 오늘도 늘 그렇듯 약속시각 15분 전에 상무님 차가 도착했고, 팀장님과 이차장님이 상무님을 모시고 손주임님을 따라 방으로 들어간다.
뒤따라서 몇 분 안 되어 미팅 상대방이 도착을 하고 마중 나가있던 현과장님이 모시고 방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나 역시 이때 쫄래쫄래 따라 들어가면 된다. 방 안에서의 좌석은 당연히 그렇듯 누가 그날의 '갑'이냐에 따라 배치가 바뀌게 되고, 이제 너무 자주 해서 너무 익숙해져 버린 자리배치에 따라 각자 착석을 한다. 이 회사는 무서운 것이 신입사원 그룹 연수 때 식사자리 또는 차량에서 상석이 어디고 차석은 어디 자리인지 등을 가르치는데, 참으로 어이없는 그때의 배움이 실제 부서배치 후에 나름 욕을 덜 먹게 되는 데에 사용된다. 물론 케이스바이케이스로 항상 같은 법칙이 성립하지는 않는데, 그래도 대원칙은 그때 배운 것이 맞는 경우가 많다.
자, 이제 메뉴 고르기다. 의례적으로 상대방에게 메뉴를 한번 보여드리지만 사실 메뉴는 우리 쪽에서 다 생각해 놨다. 상대방에게 메뉴를 고르게 하는 것조차 선택을 강요하는 것 같아서 잘하지 않는다. 그러나, 저쪽이 '갑'이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물어보고, 늘 그렇듯이 '편하신 걸로 하시죠 다 좋습니다' 라는 말이 나오면, 상무님이 실무자들을 쳐다본다. 그럼 그다음부터는 그야말로 '착착착' 이다.
"사장님~, 와인은 저희가 갖고 왔구요, 고기는 먼저 안심으로 준비해 주세요."
몇 인분인지 말해주지 않아도 이미 다 얘기가 되어 있다.
"잔은 레드와인 잔으로 일단 사람수대로 주시구요."
사전 답사한 대로, 고기가 순서대로 나오면서 더 빠르지도 너무 늦지도 않게 써빙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려면 실무자들은 눈치가 빨라야 하는데, 역시 답사의 효과인가 '착착착'이다. 아직 아무 문제도 없어 보인다.
'한결아, 잘 되고 있다.' 라는 손주임님의 눈빛을 읽을 수 있다. '네, 다행입니다.' 라고 나 역시 눈빛을 보낸다. 나는 군대를 편한 곳으로 다녀와서 전우애 따위는 나에게 없는 줄 알았는데, 쓸데없는 전우애가 생긴다. 식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 되고 좋은 말들이 오가면서 가식적인 웃음이 살짝씩 나오다 보면, 어느덧 달을 향한 우주비행은 이제 착륙만을 남기고 있다.
"그럼 마무리로 식사 어떻게 할까요."
이 말이 나오면 식당에서의 90% 능선은 넘은 것이다.
마무리 식사에 후식까지 다 먹고 나면, '서로 언제 끝내지?' 라는 생각이 모두의 머리를 살짝 흔든다. 바로 그때 눈치 빠른 과차장급에서 누구 한 명이 앉은 자세에서 허리를 똑바로 하는 액션을 취한다. 그것이 우리 모두가 아는 '일어나셔야죠~' 라는 신호다. 그럼 이제, 자연스레 "그럼 이제 일어나시죠. 오늘 감사했습니다. 다음번 저녁은 저희가 모실 기회를 주십시오." 같은 말이 나오게 된다.
그렇게 식사가 마무리되고, 상대방이 벗어놓은 자켓을 막내급들이 챙겨드리고, 우리 쪽 윗분들 옷은 과차장급들이 챙긴다. 밖으로 나오면 계산은 이미 아까 현과장님이 전화받는 척을 하면 두어 번 방을 나갔다 들어오면서 다 해놓은 상태였다. 계산을 미리 끝내놓는 것은 상대방이 눈치 못 채게 매우 자연스러워야 하며 더 이상 주문이 없어야 하는 타이밍이어야 한다. 기껏 계산을 다 해놨는데 그 이후에도 또 주문이 발생하면 은근히 귀찮아지기 때문에, 끝나기 직전 시점에 한두 번 왔다 갔다 하면서 회사 일 때문에 바빠 보이는 과장급 하나가 자연스레 계산을 마쳐야 한다. 여하튼, 그렇게 모든 식사를 마치고, 식당 문 앞에서 상대방이랑 헤어졌다.
'휴. 이제 다 끝났다.'
그런데, 나는 분명히 모든 것이 착착착 잘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현과장님이 분주하다.
'왜 저러시지?'
"상무님, 기사분께 아까 전화를 해놓았는데, 아직 차가 안 나왔습니다."
목소리에서 뭔가 상황이 부정적임을 느낄 수 있다.
'착착차.. ㄱ 이었는데,
마지막 ㄱ의 방점이 찍히지 않는 건가.'
식당 앞에서 상대방이랑 헤어지면 그 다음은 상무님이 바로 가실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그 짧은 순간에 매끄럽게 연결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상대방과 헤어지고 상무님이 팀장님이랑 팀원들에게 '고생했어.' 라고 말한 후에 돌아서면 차는 떡하니 대기가 되어있어야 했다. 그런데 그 차가 아직 나와있지 않은 상태다. 분명 현과장님이 미리 기사님에게 전화를 해놓은 것 같은데, 무슨 이유에선지 지하 주차장에 있던 차가 상무님 계신 곳까지 나오는 데에는 5분이'나' 소요되었다. 상무님은 당연히 화가 난 상태이고, 팀장님도 불편한 기색을 보이는 상황에 선배들은 안절부절못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저 지하주차장에서 나오는 검은 차의 헤드라이트가 보이는데 우리네 민낯이 들킨 것 같아 '아, 챙피해. 너무 밝아'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퍽"
'뭐야?'
상무님이 팀장님 쪼인트를 깠다.
'와. 이거 뭐야. 망했다.'
아픈 척 조차 차마 할 수 없는 팀장님에게
"뭐 하는 거야, 왜 이리 준비가 별로야!"
라면서 마치 몇 개월간 참아줬다는 사람처럼 일갈을 내뱉는 상무님.
모두들 '이건 아니지..' 라고 생각하면서 몹시 당황했지만, 험악한 분위기여서 아무도 뭐라 할 수 없는 정적을 깨뜨리는 팀장님의 "죄송합니다." 라는 말.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상무님은 차에 탔고, 차문은 현과장님이 열 받지 않은 척 하며 부드럽게 닫아 드리고, 그렇게 상무님이 돌아가셨다.
그러나 이어지는 무거운 분위기.
'분명 모든 게 착착착 순조로웠는데, 어떻게 이렇게 되어버린 거지 이런.. 팀장님 어쩐담..'
또다시 들리는 "죄송합니다."
현과장님이 정말 어쩔 줄 몰라하며 할 말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으니 꺼낸 말이다.
"됐어. 괜찮아." 라고 말씀하시는 팀장님이 매우 안타까웠다.
'나이가 몇 살이신데, 쪼인트를 까이나. 아, 상무님 진짜 별로네. 왜 저러시는 거야.'
보통은 상무님을 보내고 팀 사람들이 모여서 맥주라도 한 잔 하고 가는데, 그날은 그럴 분위기가 당연히 아니어서 팀장님이 먼저 인사하고 가시고, 남은 팀원들도 다들 헤어지기로 하였다.
손주임님이 나에게 "고생했다. 한결아. 아, 근데 마지막에 이렇게 되냐. 아. 진짜.."
"네. 아직도 이럴 수 있단 말인가요? 와, 상무님 정말 너무하시네요."
"상무님이 팀장님께 뭔가 다른 걸로 화가 나 있었던 것 같다."
"아, 네."
"들어가자. 한결아."
"네."
"잘 봤지? 의전이라는 게 잘하다가, 빵꾸 하나 나면 그냥 그걸로 고생한 거 다 도루묵이야. 의전은 진짜 힘든 거야."
"네, 그러게요."
'착착착 잘 쌓아나가고 있었는데.. 바사삭 부러져버리네요..'
[의전 儀典] : 행사를 치르는 일정한 법식
2005년에 있던 일인데, 이후에도 회사생활에 있어서 의전은 수도 없었다. 첫 회사는 의전이 정말 너무 빡센 곳이어서 회사 내부에서, 외부 미팅에서, 외부와의 식사 자리에서, 출장까지 거의 모든 자리에서 의전은 항상 있었다. 정말 비효율적이고 의미 없는 의전이 많아서 그것 때문에 짜증이 났던 적이 매우 많았다. 사수의 영향이었는지, 아니면 기획팀 - 사장님을 지근에서 모시는 팀 - 소속이어서 그랬는지 의전을 직간접적으로 너무 많이 배워서 어느 순간부터는 몸에 밴 것처럼 아주 잘하게 되었는데, 겉으로의 행동과는 달리 마음속으로는 정말 문제 있다고 생각했고 이런 점들이 회사에 대한 정나미가 떨어진 이유 중의 하나였다.
지금 다니는 회사는 세 군데의 회사 중에 의전이라는 것을 가장 안 시키는 회사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오너 일가가 여타의 그룹들에 비해 상당히 소탈하다는 점이 큰 몫을 한다고 본다. 오너가 의전을 덜 신경 쓰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밑으로 밑으로 전해지면서, 의전을 많이 하지 않아도 되는 좋은 그룹이 된 것 같다. 그 점이 사실 내가 이 회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점 중의 하나이다.
의전은 정말 필요한 것인가? 그 물음에 내가 솔직하게 대답해 본다면, 'Yes' 라고 생각한다. 위에 쓴 것처럼 의전은 행사를 치르는 일정한 법식이다. 그러한 법식이 있는 이유는 행사를 보다 완전하게 만들기 위함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의전이라 부르는 것이 행사를 완벽하게 마무리함으로써 회사의 실적에 기여를 한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업무인 것이 맞는 것이다. 회사는 수익을 내야 하는 곳이기 때문에 의전이 없을 수는 없다.
다만, 의전이라는 것이 너무 형식적이거나 너무 과도하여 효과적이지도 않다면 그것은 의전으로서의 의미가 없다. 최대 효과(Effectiveness)를 위한 최고의 효율(Efficiency)을 추구하는 것이 의전의 올바른 목표일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이것은 효과에 부합하지 않고 그저 직원들을 고생시키는 데에만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지양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외부와의 미팅이나 행사에서는 의전을 합리적인 수준에서 유지하되, 내부적인 선후배 관계에서는 의전을 최대한 줄여나가는 것이 우리의 균형잡힌 지향점이 아닐까. 그 정도의 지향점이라면 회사의 구성원 대부분의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