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우구스티노 Feb 06. 2023

하얀색 보고서에 새빨간 단풍이 들었다

15ㅣ대기업 전략팀의 보고서는 뭐가 다를까



"최주임."

"네, 팀장님."

"이게 뭐야! 이게 보고서야?"

'엥? 뭐야. 또. 아침부터...' 라고 생각한 그날은 2007년 봄이 막 시작한 어느쯤이었다.


어제 작성해서 팀장님 자리에 둔 보고서를 보고, 다짜고짜 나에게 고성이다.

'뭔가 잘못됐다. 뭐지? 어느 부분이 그렇게 맘에 안 드는 거지?'

"아, 죄송합니다. 말씀 주시면 바꾸겠습니다."


"아니, 도대체 누가 보고서를 이렇게 써!"

하면서 내 머리 위로 보고서를 던져버린다......!

보고서가 5장 정도 되었으니 타격감이 있지는 않았는데, 가슴속 상처는 그 어떤 펀치보다 세게 남는다.

'뭐야!!?? 이렇게 보고서를 던져버린단 말인가?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이번에는 ’죄송합니다‘ 라는 말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입술을 꽉 깨물고 그가 돌아간 발자욱 밑에 있는 보고서를 한 장 한 장 줍는다. 종이는 천근인 양 무겁고, 마음은 만근인 양 무겁다. 분노를 꾹꾹 눌러 담듯 보고서를 주으면서, ‘도대체 이게 이렇게까지 면박당할 일인가?’ 라는 짜증이 밀려들면서도 창피함이라는 놈도 같이 불쑥 얼굴을 내민다.


옆자리에 있던 나의 새로운 사수 이대리님은 나와 마찬가지로 어쩔 줄 몰라하며 같이 주워주려 한다. 나는 IR팀에서 전략기획팀(경영기획팀에서 이름이 바뀌었다.)으로 옮긴 지 이제 8달 정도 되었고, IR팀에 손대리님이 있었다면 전략기획팀에 나보다 5기수 차이나는 이대리님이 있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사수에게 보고서를 다시 감수받는다. 사수가 보기에도 특별히 문제가 있어 보이진 않다고 하던데, 뭔가 팀장이 기분이 매우 나빴던 것으로 결론을 냈다.(겨우 3년 차의 보고서가 문제없었을 리가 있나. 지금 생각하면 분명 문제가 많았을 보고서인데, 사수가 나에게 잔소리를 하지 않으려고 그런 결론을 낸 것 같다.)


그때의 어이없는 경험이 짜증 나고 분해서, 그 이후로 나는 보고서를 정말 열심히 준비했다. 개인적인 시간을 정말 많이 써서라도 잘 만들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략기획팀장님은 나의 보고서에 무수한 빨간색을 장식해 주었다. 하얀색 종이가 빨간색 종이가 된 것 같을 정도로 제목부터 마지막 줄까지 거의 모든 부분에 빨간펜으로 수정사항이 적혀있었다.


심지어는 보고서 한 장을 5등분 해서 위아래로 다시 배치하여 스카치테이프로 붙여주었다. 일부러 자극을 주려고 그렇게 찢고 붙이고 하는 게 느껴지니까 짜증과 창피함이 울그락불그락이다. 사실 전략기획팀은 그룹을 상대해야 하고, 사장님께 보고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보고서 작성은 매우 중요했다.


공장에서의 생산물이 제품이라면,
스탭부서의 생산물은 보고서였다.


공장에서 제품을 잘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듯이, 스탭은 보고서를 잘 만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게 우리 팀의 당연한 분위기였다.


당시 기획 부문장님은 그룹에서 내려왔기 때문에, 거기서 배운 보고서 스킬에 굉장히 자부심이 많은 분이었다. 내가 속한 전략기획팀장님 역시 흔히 말하는 ‘기획통’ 이어서 회사의 보고서 달인 두 명이 내 직속상관이었다. 사실 빨간펜으로 그어진 것을 말씀대로 바꾸면 확실히 읽기도 보기도 좋았다.


제목은 22pt, 본문은 14.4pt, 그리고 하이픈(-)이 달리는 써브 내용은 13.4pt 등 각 줄에 해당하는 폰트가 정해져 있었다. □으로 시작해서 하이픈(-)과 점(·)으로 끝나는 Bullet Point 도 당연히 Rule이 있었다. 줄 간격, 자간간격을 미세 조정할 수 있고, 쪽복사와 쪽추가 등의 여러 기능을 마련해 놓은 훈민정음 프로그램은 어떤 보고서라도 쓸 수 있었다.


그러나 양식이야 적응하면 그만이지만, 중요한 것은 ‘콘텐츠’였다. 내용을 요약해서 제목을 어떻게 정하고, 방대한 조사 내용을 어떤 방식으로 서술해야 완벽한 논리적 흐름을 만들 수 있을까. 그것을 잘하기 위해 나의 하얀색 보고서는 매일같이 새빨갛게 물이 들었고, 빨간펜 선생님 앞에서 나의 얼굴도 덩달아 빨개졌다.


과거 ‘미생’ 이라는 드라마에서 이런 내용이 나온다.

한 선배가 대부분의 말이 서술형으로 쓰여있는 글을 주면서 이것을 한번 요약해 보라고 시킨다. 후배가 그 글을 보면서 최대한 압축해서 요약해 보는데, 이 말은 이 말이랑 중복이니까 빼고 이 말은 길게 서술되어 있지만 짧은 단어로 표현하면 이렇게 쓸 수 있으니까 바꾸고 하면서 바꿨더니 정말 군살이 쏙 빠진 간결한 그러나 내용은 다 들어가 있는 글이 완성되었다.


드라마에서 이 내용을 보면서, 윤태호 작가님이 우리 회사에 와서 인터뷰를 했나 싶었다. 나 역시 많은 내용을 요약해서 간결하게 핵심만 쓰는 법을 집중적으로 훈련(?) 받았다. 흩날려 뿌려지는 보고서를 머리로 맞아가면서(딱 한 번뿐이긴 했지만), 종이가 빨간색이 되었을 정도로 엄청나게 수정받아가면서 배웠었다.


항상 신문을 많이 보라고 강조하던 상무님은, 신문기사의 헤드라인이 어떻게 뽑히는지를 눈여겨보라 하셨다. 신문기사 헤드라인처럼 글 전체의 핵심을 잘 뽑아내는 것이 없다고 하면서, 핵심요약에 대한 습관을 어렸을 때부터 잘 기르라고 하셨다.


그리고 애널리스트 리포트 요약 보고서나 경쟁사 조사 보고서 등의 어렵지 않은 보고서들을 주니어 시절에는 정말 많이 작성했었고, 그 이후 의사결정이 필요한 보고서들을 조금씩 만들어 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런 과정에서 나의  보고서는 항상 새빨갛게 변하였지만, 그 단풍이 나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것을 경험했기에 나의 얼굴색은 더 이상 변하지 않았다.


그렇게 가을 단풍이 지나가면 또 새해가 오듯이, 나의 보고서에도 배움이 물들어 예전보다는 훨씬 나아지게 되었다. 결국 어느 순간부터는 팀장님이 빨간펜부터 찾는 일이 줄어들었고, 나는 후배들에게 보고서를 쓰는 방법을 알려줄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첫 회사가 보고서에 있어서는 가장 빡센 곳이었는데, 나는 직급에 맞게 가벼운 보고서를 아주 빈번하게 썼다. 자주 작성하다 보니 습관이 잘 만들어졌고, 반드시 틀에 맞는 게 아닌 약간의 융통성까지 경험하면서 배운 게 정말 많았다.


그리고 두 번째와 세 번째 회사를 거치면서 18년 이상 회사생활을 했더니 나의 보고서 스킬이 이제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듯하다. 각 기업의 문화와 윗사람들의 성향이 같지 않아서, 위에서 좋아하는 보고서의 형태나 스타일은 조금씩 다른 점이 있었지만, 그래도 본질은 큰 차이가 없었다.


감히 그 본질에 대해 축약해서 얘기해 본다면,


하나, 빈틈없는 논리적 흐름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콘텐츠

맞던 틀리던 논리적 흐름이 명확해야 하고, 그 논리를 뒷받침하는 근거(콘텐츠)가 붙어야 한다.

논리적 흐름에 있어서 (한 장 짜리 보고서를 기준으로 하면) 결론을 처음부터 써야 하는 경우도 있고, 뒤에 쓸 수도 있다. '결론부터 먼저 써라' 라는 말을 많이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보고받는 사람이 이 안건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면 결론부터 쓰고, 다소 생소한 안건이라면 내용부터 설명해 주고 결론을 내는 것이 좋다.


이 근거가 논리에 너무 중요한 콘텐츠라 생각이 되면 그 근거를 쓰되 작성자는 그 내용에 대해 매우 확실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초등학생에게 설명하 듯 쉽고 간결하게 설명이 될 수 있다. 어디서 들어는 봤고 여기저기서 이게 중요하다고 하니까 근거로는 넣고 싶을 때가 많다. 그러나, 스스로 설명은 쉽게 못하겠다면 아무리 중요한 것이라 생각해도 아예 처음부터 쓰지 않는 것이 좋다.(사실 근거로 꼭 넣어야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중요한 콘텐츠를 제대로 이해 못 해서 쓰면 안 되겠다 싶을 정도이면, 그 보고 준비는 잘못된 것이라 봐야 한다.)


하나, 콘텐츠가 잘 읽히도록 만들어주는 가독성

논리적 흐름과 콘텐츠에 정말 공을 많이 들인 보고서가 있다. 그러나 그렇게 준비했다고 해도 보고가 잘 안 풀리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가독성이다. 내용이 보기 좋게 정리되어 있지 않아서 눈에 잘 안 들어온다는 얘기이다.


윗분들은 매우 바쁘다. 특히 임원들은 더욱 바쁘다.(실제로 안 바쁜 것 같기도 하지만, 막상 그들의 삶사실 보고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보는 임원은 거의 없다.


윗분들은 매우 바쁘다. 특히 임원들은 더욱 바쁘다.(별로 안 바빠 보일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대로 된 임원이라면 대부분 정말 바쁘다.) 임원들은 관장하고 있는 업무가 상당히 많고 그에 대해 일일이 다 공부하고 이해할 시간이 없다. 그런 그들에게 가독성이 없는 보고서는 일단 읽기부터, 보기부터 싫다.


논리 흐름과 콘텐츠가 시원시원하게 보여야 하고, 그래서 읽혀야 한다. 읽히지 않으면 눈에서 어지럽고, 머리도 어지럽다. 어지러운 가운데 말을 많이 들어봐야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보고서를 보면서 '이게 다 무슨 말이야?' 라는 생각이 들고 있는데, 귀가 열리겠는가. 보고서가 간결하고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을 때, 임원이 읽고 있는 것과 보고자의 말이 합쳐지면서 상승 작용이 나는 것이다.


하나, 상사가 원하는 바와 내가 원하는 바의 황금비율적 조화


다뤄지는 안건에 대하여 상사와 여러 가지 얘기를 미리 나눴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보고를 준비할 때 갑자기 '짠' 하고 최종보고서가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구두로 하던 장표로 하던 중간중간 과정에 대한 커뮤니케이션을 하게 된다. 그때, 상사의 말을 잘 귀담아듣고 진정 원하는 바를 캐치해 내야 한다. 내가 논리적으로 원하는 바가 따로 없어서, 상사가 원하는 바에 절대적으로 맞추는 경우는 쉽다. 그건 그냥 상사가 원하는 대로 논리적 흐름을 마련해서 작성하면 된다.


그러나, 상사가 원하는 바와 내가 원하는 바가 다를 때는 고민이 된다. 상사에게 다 맞출지, 아니면 나의 의견으로 반영을 할지 결정해야 한다. 상사와의 교감이 100에 가깝지 않다면 절대 본인이 원하는 대로 보고서를 작성하지 않는 것이 좋다. 어떨 때는 상사의 의중에 기반을 두되 나의 생각을 첨가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나의 의견을 미세하게 기본으로 두되 상사의 의견을 첨가하는 경우도 있게 해야 한다.


상사와의 교감이 많이 없어서 상사가 원하는 바를 전혀 모르겠는데 일단 보고서를 만들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 내가 원하는 바는 있는데 상사가 원하는 바는 모를 때, 두가지 정도의 안으로 일단 빨리 보고를 하는 것이 좋다. 한가지는 내가 원하는 안, 그리고 다른 한가지는 다소 중립적인 안으로 작성하면 된다.


한 박자 빠른 보고를 하면서 상사와의 대화를 통해 서로의 원하는 바를 최대한 맞춰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한 박자 빨랐으니 상사의 의중을 충분히 반영한 재보고는 정박자에 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하면 타이밍적으로도 문제가 없게 만들면서 빠릿빠릿한 이미지까지 덤으로 가져올 수 있다.




위 보고서의 본질에 사실 몇 가지를 더 추가할 수도 있겠으나, 상대적으로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3가지만 담았다. 다만 3가지에 우선순위를 두지 않고 ‘하나’ 로 각각 표기한 이유는 셋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우월한 본질이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기 3가지는 서로 간의 상호작용을 하여 보고서가 완전해지는 데에 엄청난 도움이 된다.


혹여,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항상 애를 먹는 사람들은 위 사항들을 유의하면서 작성 프로세스와 아웃풋을 조금만 가다듬어 보자. 분명 지금보다는 '더 좋은 보고서를 쓴다.' , '깔끔한 보고를 한다.' 는 평가로 바뀔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본사라 해도 지방은 가고 싶지 않아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