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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고 싶지 않아! 그것도 초라하게

Chapter 10. 꼭 한 벌만 갖게 해주세요!

by 썸머
소매가 볼록한 원피스 한 벌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꼭 한 벌만 갖게 해달라고 기도도 했는데. 사실 별로 기대도 안 했어. 하느님은 나 같은 고아가 입을 옷을 고민할 시간은 없을 테니까. 그래도 다행히 난 상상력이 있잖아. 저 옷 중 하나가 아름다운 레이스 장식이 있고 삼단으로 부푼 볼록한 소매가 달린 눈처럼 하얀 모슬린 원피스라고 상상하면 돼. - 빨강머리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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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원에서 입고 온 옷은 너무 낡고 헤져 그 옷을 입고는 주일학교도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마릴라가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바로 앤의 옷을 만드는 일이었다. 앤은 마릴라가 자신의 옷을 만들기 위해 분주하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무척이나 기대했다. 아마도 또래들이 이고 있던 형형색색의 소매가 볼록한 원피스를 떠올렸을 것 같다. 당시에는 볼록한 소매가 대유행이었다.


하지만 마릴라가 가지고 온 옷은 주름이나 장식이라곤 전혀 없는 실용적이고 튼튼한 옷이었다. 디자인뿐만 아니라 색은 어떠한가? 하나는 우중충한 체크 무늬 원피스로 마릴라가 지난여름 이월할인을 받아 산 옷감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흑백 체크 무늬 새틴으로 역시 지난겨울 할인 매장에서 구매한 것이었다.


이 밋밋한 원피스들은 초록 지붕 집 박물관 2층 앤의 방 침대에 나란히 놓여있다. 처음 앤이 이 옷들을 보았던 순간처럼 말이다. 앤은 다락방 침대에 펼쳐놓은 원피스 세 벌을 진지하게 쳐다보았다. 다른 또래들은 모두 유행하는 소매가 볼록한 원피스를 입는데, 혼자만 다른 옷을 입어야 한다. 마릴라는 소매가 볼록한 원피스가 우스꽝스럽다고 하지만, 앤은 차라리 남들과 똑같이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편을 택하겠다고 했다.


IMG_1831 (1).jpg 앤의 다락방에는 원피스 몇 벌이 펼쳐져있다. 투박하고 검소한 마릴라표 원피스 되시겠다.


또래와 다르다는 것은 10대 소녀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고통이다. 마릴라는 극도로 검소한 취향을 가졌고, 그 취향을 꺾지 않을 정도로 고집스러운 면이 있었다. 나는 그런 앤에게 강하게 감정을 이입했다. 딱히 입고갈 옷이 없어 항상 남루했고, 또래 사이에서 유행하는 물건을 가진 적이 손에 꼽았다. 그나마 여름에는 이대나 명동에서 몇천 원을 주고 산 반소매 티셔츠로 해결하면 되었지만, 문제는 겨울이었다. 마땅한 겨울 외투도 없이 교회에 다녀야 했던 장로 딸이라니!


변변찮은 외투를 입고 다녔던 우리 남매에게 어느 날, 엄마는 코트 두 벌을 사서 왔다. 동생은 베이지색, 나는 하늘색 더플코트였다. 200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더플코트, 일명 '떡볶이 단추' 코트는 가난했던 우리 동네 아이들도 모두 하나씩 가지고 있었던 최신 유행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막상 코트를 입고나니 조금 곤란한 상황이 발생했다. 그 코트들은 보통의 더플코트 모양을 하고 있지만, 옷감은 그렇지 못한 탓이었다. 얇고 흐느적거리는 재질이었는데 한 친구는 이 코트를 가리켜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좋게 표현하자면 하늘거리는 코트'라고 정의할 정도였다. 자세도 안날일뿐더러 방한 효과까지 떨어지는 싸구려 코트를 겨울 내도록 입고 다녔다. 이 코트는 다음 해에는 입을 수 없었는데, 드라이클리닝을 맡길 값어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코트를 살 형편이 되지 않았지만, 얇은 교복만 입고 학교에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엄마는 나와 나이 차이가 무려 10살이나 나는 친척 언니가 학창시절에 입던 검은 코트를 얻어왔다. 80년대 청춘 드라마에서나 볼법한 디자인이었지만 옷감은 좋았는지 보풀 없이 깔끔했다. 다만 로코코 시대 귀족들이나 쓸법한 거대한 황금 단추들이 달려있었다. 단추들을 모두 뜯어내고 검은색 단추로 모조리 바꿔 달고 다니니 썩 쓸만했다. 그렇게 또 한 해 겨울을 버텼다.


고 3으로 올라가는 겨울, 웬일로 한 저렴한 캐주얼 브랜드에서 엄마는 내게 더플코트와 오리털 파카를 한 벌씩 사주었다. 모두 내 눈에는 마음에 들지 않는 외투들이었는데, 또래들이 입고 다니는 스타일과는 너무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선호도가 떨어지는 디자인이었기에 저렴하게 판매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다른 브랜드에서 사자는 말도 못한 채 그냥 군말 없이 마음에 들지 않는 새 옷을 받았다. 특히, 오리털 파카는 용기를 내어 한 번 입긴 했는데 친구들이 '근육맨' 잠바라고 놀리는 바람에 다시는 입고 다니지 못하고, 그대로 옷장에 걸리게 되었다. 그토록 바라던 번듯한 외투를 얻게 되었지만 정작 입을 수 없는 옷이었다.


그래도 더플코트는 꽤 괜찮았다. 물론, 더플코트의 유행이 끝나가고 있어 슬슬 사람들이 안 입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나는 그 주에 새로 산 코트를 입고 교회에 갔는데 나보다 교회 집사님, 권사님들이 더 호들갑이었다. '어머, 00 옷 새로 샀네!'라고 감탄을 연발했고, 엄마는 그 옆에서 의기양양한 표정을 하여 '대입 선물을 1년 미리 앞당겨 주었다'고 말했다. 나는 뒤통수에서 호들갑스러운 소리를 들으며 코트 하나 산 것이 그토록 큰 뉴스거리인가 의아했다.


이 의문이 풀린 것은 앤의 원피스 사건을 다시 읽으면서였다. 린드 부인은 앤이 최신 유행하는 옷을 입게 되었을 때, 제 일처럼 기뻐하며 이런 혼잣말을 한 것이다.


그 가여운 아이가 한 번쯤 제대로 된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도 꽤 흐뭇할 거야. 마릴라가 입히는 옷들은 솔직히 말도 안 되잖아. 터놓고 말하고 싶었던 게 열두 번도 더 된다니까. 마릴라가 충고를 듣는 걸 싫어하는 것 같아서 아무 말도 안 한 거지.


사실 주변 사람들은 내가 초라한 행색으로 다니고 있었던 것을 다 눈여겨보고 있었다. 내가 새 옷을 비로소 얻게 되었을 때, 자기 일처럼 기뻐했던 것은 그만큼 안타까워하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떡볶이 코트의 유행은 점차 사그라들었고, 그다음 해 겨울부터는 유행이 지난 낡은 스타일의 옷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앤의 말처럼 입어보지도 못하고 유행이 지나갔다면 평생 한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한 번 해봤으니까 미련도 아쉬움도 없어졌고, 매일 입을 외투가 없어 고민했던 시간도 희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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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또래 친구들과 달라 내가 초라하고 외롭다고 느낀 적이 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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