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프라우요흐
다음 날, 우린 융프라우요흐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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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프라우, 수없이 들었지만 제일 인상 깊었던 것은 전혜린의 책에서 본 융플라우였다. 내 학창 시절에 처음 만난 전혜린은 첫사랑과도 같아서 그녀의 모든 것이 이유 없이 좋았고, 그녀의 삶이 무척이나 궁금했고 그녀의 외로움과 우울마저 사랑했던 시절이었다. 그때 그녀의 책 <이 모든 것을 또다시>와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권이었는데, 첫사랑을 다시 보는 순간 과거는 사라지고 현재라는 필터가 덧씌워지는 것이 두려워 그녀의 책을 펼쳐 확인하는 것을 일찌감치 단념했다. 하지만 난 여전히 그녀를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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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프라우요흐에 가기 위해 얇은 패딩과 목도리까지, 단단히 챙겨서 숙소를 나섰다. 9월 초의 날씨는 더할 나위없이 맑고 화창했다. 그린델발트터미널에서 곤돌라를 타고 아이거글래쳐까지 갔다. 전면이 유리인 곤돌라 창으로 스위스의 파란 하늘과 짙푸른 초원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창밖을 보며 사진을 찍고 감탄사를 자아냈다. 아이거글래쳐에서 산악열차인 융프라우행 철도(톱니바퀴 산악열차)로 갈아탔다. 열차는 아이거산 내부를 뚫은 터널을 통과하여 Top of Europe(유럽의 정상)이라는 융프라우요흐에 도착했다.
고산병은 해발 2,500m 이상에서 나타난다고 하는데 융프라우요흐는 해발 3,454m라 고산병약을 준비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고산병약이 의사의 처방이 필요하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괜찮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여행 유튜버 빠니보틀이 융플라우에서 코피가 나는 고산병 증상이 나타났다고 해서 살짝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 우리 가족에게 별다른 증상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실제 융플라우는 4,158m, 한라산이 1,950m)
융프라우요흐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빙하 동굴 안 얼음궁전(아이스 팰리스: 빙하 속을 파서 만든 얼음 터널)에서 얼음조각들과 전시물들을 구경했다.
그리고 융프라우 패스에 포함되어 있는 신라면도 먹었다. 멀고도 높은 이방인의 산에서 여행객들이 우리나라의 신라면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노라니 K-문화와 국격이 느껴진다고 하면 과장이려나. 둘째 딸 친구가 선물해 준 SKT 서비스로 공짜 커피를 마시고 컵도 받았다. 역시 공짜가 최고다. 요즘 머리가 자꾸 빠지는 것은 공짜를 좋아해서인것 같다.
밖으로 나오니 온통 하얀 눈세상이다. 내 눈앞에 보이는 저 하얀 세상이 빙하란다, 만년설이 아니고. 무식한 나는 빙하는 극지방에나 있는 줄 알았다.
그리고 알프스산맥에는 모두 만년설(녹지 않고 남아 있는 눈)인 줄 알았는데 융플라우에 알레치 빙하가 있고 이 빙하는 길이 약 23km로 알프스에서 가장 큰 빙하라고 한다.
23km면 시속 60km로 달리는 자동차가 23분 동안 달리는 거리인데 빙하가 23km라니 가늠이 어렵다. 여하튼 빙하는 단단한 얼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천천히 흐르는 얼음강이라고 한다.
알레치빙하
길이 약 23km, 면적은 80 제곱 km 두께 최대 900m로 멀리서 보면 평평한 눈밭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천천히 흐르는 거대한 얼음강입니다. 아주 느리지만 실제로 매년 조금씩 움직입니다. 그래서 빙하 위의 돌이나 얼음 구조가 시간이 지나면 위치가 바뀝니다.(ChatGPT참고)
깃발옆에서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섰다. 길다고 생각 안 했는데 1시간은 족히 기다린 것 같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 사진포즈도 구경하고 여름에 보는 눈도 보며 기다리다 보니 시간이 금방 흘렀다. 눈으로 뒤덮인 세상에 햇볕은 따갑게 내리쬐고 있었다.(생각보다 춥지 않았다.) 나도 근사한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었는데 찍고 보니 역시 별로다. 다들 모델처럼 멋지게 사진을 찍던데 내가 해보니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난 왜 이렇게 어색한지....
전설에 따르면 아이거, 묀히, 융프라우의 모습은 사나운 괴물(또는 남자) 아이거가 융프라우(처녀)를 쫓아가자 묀히(수도승)가 둘 사이에 서서 융프라우(처녀)를 괴물로부터 지켜 주고 있는 모습이라고 한다. 다 커다란 봉우리들이라 구별하기도 쉽지 않던데 옛사람들의 상상력이 풍부하기도 하다.
사진을 찍고 만년설과 빙하를 구경하고 내려오는 길은, 융프라우요흐에서 아이거글래쳐까지 기차를 타고 온 후에 다시 트래킹을 시작했다.
셋이서 사이좋게 탁 트인 시야와 멀리 있는 높은 산이 조화로운 평지를 걸었다. 조금 오르거나 조금 내려가는 길은 걷기에 한없이 좋았다. 가끔 들리는 카우벨, 그리고 관광객들, 모두 경치를 즐기면서 트래킹을 했다.
둘째는 쉬는 틈에도 다음 스케줄을 짜고 있는 모습에 마음이 짠했다. 친구들과 왔으면 맘껏 즐겼을 텐데 늙은 부모 효도관광이라 처음부터 끝까지 수발하느라 애쓴 딸, 고맙다.
걷고 또 걷고... 벵엔(wengen)에서 기차를 타고 내려왔다. 벵엔마을 역시 체르마트처럼 자동차 진입이 금지된 청정 마을이라고 한다. 공기도 좋고 폭신한 흙길을 걷는 느낌도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