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리스본
파두 공연을 못 보고 간다.
반드시 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면 악착같음이라곤 개미 눈물만큼도 없는 나이기에, 적당한 금액의 파두 공연을 하는 몇 군데 식당이 풀 부킹이라는 말에 바로 접어 버렸다. 어깨 한번 으쓱하고 '파두 못 보고 가는 게 아쉽네' 했더니, 나의 이 말이 크리스티나의 도전의식에 불을 당겼나보다.
나 대신 몇 군데 전화를 돌리는데 좌불안석이다. 나 파두를 그렇게까지 보고 싶진 않다구.
크리스티나를 겨우 진정(!)시키고 리스본에서의 마지막 날은 그냥 익숙한 동네길을 다시 한번 휘돌기로 했다. 약속 시간에 늦었다며 나가던 크리스티나가 그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에나 들러보란다. 숙소에서 5분 거리라 오며 가며 봤던 서점이 그런 역사를 가졌었구나.
우연히 들어가게 된 거대한 실내 푸드코트겸 시장, 'Time Out Market'도 그랬다. 내가 놓치고, 영영 모르고 떠나는 곳들이 백만 개는 넘겠지. 왜 아니겠어.
다음 여행지인 스톡홀름의 살인적 물가를 들은 터라 냥이님들의 조공용 간식을 구입하고 나오던 찰나 발견한 '제이미 올리버'의 피자 가게. 2000년 언저리에 그의 요리 프로 <네이키드 셰프>를 보고 말 그대로 홀딱 반해 한때 나의 프리챌 배경화면은 온통 그였다지. 이번 여행에 런던을 추가하지 않으며 아쉬웠던 단 한 가지였는데 이곳 리스본에서 마주칠 줄이야.
크리스티나의 말로는 생긴 지 한 달도 안 되었단다. 이거슨 운명. 마르게리따 피자 한 판 시켜놓고 추억에 젖어봤...으나 제이미 님, 더는 못 먹겠어요. 미안하지만 제 입맛엔 너무 짜고 느끼해요. 그냥 유럽인들의 입맛에 맞춰진 거겠죠. 우리 제이미 님의 요리 솜씨가 부족한 게 아니라. 그래요, 그래.
결국 포장해 온 피자는 호스트 두 사람의 저녁 식사가 되었으나 이쯤 되면 나도 '성덕'의 반열에 오른 걸로.
오늘 아침 호스트 두 사람이 외출하고 나도 나갈 준비를 슬슬 하고 있는데 살로메가 잠깐 들렀다. 근처에서 미팅이 있는데 점심을 못 먹을 것 같아, 엄마도 없는 엄마 집에 밥을 먹으러 들렀다고. 밥을 먹으면서도 노트북과 전화에서 눈을 떼지 못하길래 방해하지 않았더니 자기 간다며 내 방문을 두드린다.
- 너 내일 간다며? 어디로?
- 스톡홀름. 너도 다음 주에 칠레 간다고 들었어. 새 프로젝트야?
- 아냐. 일이긴 한데 영화는 아니구. 칠레 갔다 이탈리아 갔다 스페인 갔다, 정신이 좀 없네
- 와 너 글로벌하게 산다
- 강의하는 게 하나 있고 마스터 클래스 해달라는 곳도 있고 책 때문에 가는 것도 있고
- 이번 주에 한국 영화 <기생충> 개봉하던데 시간 되면 보고 가
- 아, 칸에서 상탄 그 영화? 길거리에서 포스터 봤어. 영화 좋아?
- 난 좋았어. 유럽 사람들도 좋으니깐 칸에서 상까지 줬겠지?
- 난 그 뭐냐... H가 많이 들어간 한국 영화... 그 감독이 좋던데
- 아, 홍상수 감독의 <HaHaHa> 말하는구나. 그 감독님 요즘 한국에선 스캔들로 좀 시끄러워
- 엥? 무슨?
- 유부남인데 촬영하던 여배우랑 바람이 나서...
- 푸하하하하하 (실제로 뒤집어짐)
방문 붙잡고 떤 수다치곤 좀 길었으나 한국에 초청된다면 꼭 다시 얼굴 보자는 약속을 나누고 헤어졌다.
내일부터는 약간의 강행군이다. 물가 비싼 두 도시, 스톡홀름과 암스테르담이 각각 나흘씩 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내 여행 스타일과는 전혀 맞지 않지만 그래도 또 다른 고양이들을 만날 수 있으니깐.
배낭이 줄어드는 게 눈에 보인다. 뭔가 계속 흘리며 떠나고 있는 거 같아 자꾸 헛헛해지는 건 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