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 자신이 너무 커져버렸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장엄한 건축물을 올려다본다.
건물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는 한없이 경건해지고, 그 경건함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의 하찮음을 되새기곤 한다.
하찮음 속에서 나는 서서히 소멸한다.
그러나 소멸을 함으로써 나는 역설적으로 살아있음을 느끼게 된다.
고로, 여행의 진정한 목적은 소멸하기 위해서 아닐지.
우리가 사라지기 위해선 세 가지 조건이 따라줘야 한다.
첫째,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타지로 가야 한다.
둘째, 웅장한 건물들 아래에서 한없이 배회를 한다.
셋째, 골목길과 샛길 사이에서 서서히 위치 감각을 상실한다.
우리가 사는 공동체에선 우리의 정체는 너무 뚜렷하다. 우리는 우리의 테두리를 지울 수 없으며, 항상 공동체라는 집합 속에 포괄되어 산다. 공동체에 몸을 담그고 있는 한, 우리는 우리를 지우고 새로운 신화를 창조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여행은 다르다. 여행을 통해 우리는 인파 속에서, 건물 앞에서, 카페 안에서, 사진기 뒤에서 몇백 가지의 방식으로 소멸에 다다르려고 노력한다.
사라짐과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새로운 자아를 창조해내는 틈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여행의 행복이자 사명 아닌가.
삶이라는 서사 속으로 사라지고 난 후 다시 세상을 바라보면 우리는 예전보다 더욱더 선명해진다. 결국 삶은 여행의 연대표다. 사라짐과 선명해짐 사이에서 명멸하다 보면, 이 간격은 조금씩 좁혀진다. 그러나 절대로 맞물릴 수는 없다. 근접해지지만 닿을 수 없는, 마치 이차방정식의 점근선처럼.
그러니 나는 또다시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기회를 엿본다. 그리고 또 한 번 사라져 보길 소망한다. 그 소멸의 소용돌이에서 다시 지상으로 몸을 끌어올리는 순간에 느끼는 개운함이 나를 또 한 번 살아갈 수 있게끔 만든다.
(2019.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