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12-10. 내 짐을 대신 짊어지고 가는 사람(친구)

귀스타브 카유보트&오귀스트 르누아르




오래전 여러 팀과 함께 유럽으로 깃발 여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각자 출발지에서 영국 히드로 공항에 도착한 다음 유로스타 기차를 타고  파리로 2시간 반 만에 넘어가는 코스였지요. 에펠탑, 센 강 유람선, 루브르 박물관 등 손꼽아 기다렸던 곳을 차례로 방문하며 한 여름의 유럽 날씨만큼이나 후끈하고 설레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중에 개인적으로 코 끝 찡했던 곳은 '개선문'이었습니다. 덥고 습했던 날씨를 안고 지하도를 지나 개선문 앞에 다다랐을 때 '나폴레옹' 생각이 났거든요. 그의  전성기 시절 개선문 시공을 명령하고 죽어서 완성된 개선문을 지나간 키 작은 그 사람 말입니다.  '불가능은 없다.'를 외치며 영어 참고서 맨 앞장에 말을 탄 모습으로 젊은 나폴레옹은 사춘기 소녀에게 슈퍼맨이었으니까요. 생각보다 큰 개선문 주변으로 사진 찍기 바쁜 일행들 모습 속에 잠시 멍 때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7월의 더운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뱉기를 반복하며 마음속  그 작은 영웅과의 시간을  밑줄 쫘악 긋고 체크 표시를 했습니다.'불가능한 일이 부지기수더라.' 하면서 말입니다.




개미집처럼 사람들이 우글거리고
벌집처럼 부지런하고 씩씩하고
성 잘 내는 이 오래된 문 밖은
동란의 기대와 희망 속에 떨고 있었다.
그 흥분하기 쉽고
 음침한 외관은
무엇으로도 알 릴 수 없으리라.

-<레미제라블> 중에서 , 빅토르 위고





레미제라블의 파리 성문밖 묘사입니다. 나폴레옹 3세 시절 오스만 남작의 지휘하에 파리는 20개 구로 개편됩니다. 좁은 대로와 비위생적인 도시가 방사선 형태로 쭉쭉 벋어 나가고  규격화된 건물들의 건축물이 들어서기 시작합니다. 곳곳에 공원이 조성되고, 백화점이 들어서며, 극장이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합니다. 영국 런던의 살인적인 교통체증을 경험하셨다면 파리라는 근대화된 도시의 선택에 엄지 척하셨을 겁니다. 





<파리의 거리, 비오는 날>,1877/wikipedia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1876, wikipedia



화가 

미술품 수집상

전시회 기획 및 후원자

정원사

천 디자이너

우표 수집가

요트 제작자 겸 선수



귀스타브 카유보트(Gustave Caillebotte 1848-1894)를 설명하는 부캐가 참 다양합니다.  세 번째 인상파 전시회 출품작인 <비 오는 날의 파리>입니다. 인상주의 테마 중 도시화되어 가는 파리의  달라진 모습을 차분하고 일상적이며 사실적으로 담아낸 그의 대표작입니다. 그림의 가로등을 중심으로 종이접기를 하듯 한 번 두 번 접고 나면 4등분 된 면 안에 인물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제 막 알려지기 시작한 사진술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가장 오른쪽 우산을 살짝 기울여 준 매너남의 뒷모습이 반만 보이도록 배치되어 있습니다. 사진 찍을 때 잘린 것처럼 말입니다. 마치 밖에서 화면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지지요. 왼쪽 끝 대화를 하며 걷고 있는 두 명의 남자도 이제 막 화면 밖에서 안으로 걸어 들어온 듯 보이고요. 순간 포착의 느낌을 주며 그림의 역동성을 부여하는 효과가 있는 거지요.  사진에서 영감을 얻은 그는 바쁜 도시인의 모습과  근대 도시로 변하고 있는 19세기 파리의 모습을 파노라마식 사진 구도로 잡아 화폭에 담아내고자 했습니다. 




거리 양쪽으로 높이 솟은 건물은 위로, 삼각형 모양의 건물은 옆으로 끝없이 뻗어 나갈 것처럼 깊이와 원근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자신만의 생각이나 활동에 몰두한 듯한 인물들의 표정 묘사가 변화하는 도시의 소외와 익명성도 느껴지고요. 어딘가로 시선을 뺏긴 듯한 커플의 꼼꼼한 옷차림 묘사, 쓰고 있는 우산 끝부분에 잡힌 세 가닥 주름, 보도블록의 고인 물까지 섬세하게 표현되어  뭉개진 듯한 인상파 그림들과 사뭇 다르게 보이기도 합니다.  




금수저입니다. 법학 전공자고요. 스물 넘어 본격적으로 그림 공부를 했습니다.  뛰어난 기술력과 탁월한 표현력을 갖추었지만 그의 부유함에 가리어져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습니다. 26살 부모가 연이어 타계하면서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게 됩니다. 작품을 굳이 팔아야 할 이유가 없으니 더더욱 그의 그림이 유명세에서 멀어집니다. 대신 그는 상업적으로 실패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동료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지속적으로 사들이기 시작합니다. 지금은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한 당대 인상파 화가들에게 생활비를 제공하기도 하고 작업실을 구해주기도 합니다. 인상파 전시 때마다 전시회의 자금조달, 조직, 홍보, 설치 등을 주도적으로 담당하고요. 그들의 작업 활동을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는 동료 화가이자, 미술 애호가였던 거지요. 옆에 나란히 함께 한 르누아르의 작품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1876>역시 카유보트가 친구 르누아르에게 직접 산 작품입니다.






따뜻한 칼러, 밝고 화사한 색채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 Auguste-Renoir,1841-1919)의 대표 작품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입니다. 그는 가난한 재단사의 7남매 중 여섯 번째로 태어났습니다. 13세 도자기 공방에서 그림 그리는 일을 하며 생계유지를 했습니다.  틈날 때마다 돈이 모아지면 데생 공부도 하고 근처 루브르 박물관을 드나들며 좋아하는 작품 모사도 했습니다. 도기에 그림을 붙이는 기계가 발명되며 그마저 기계화에 밀려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고전적 누드의 대가였던 샤를 글레르의 문하에서 모네, 시슬레, 피사로 등 훗날 인상파의 거장이 될 동료들을 만나게 됩니다. 인상파 시대 활동했 던 모네, 세잔 등이 자연에 대한 묘사를 많이 했다면 르누아르는 인물, 특히 여인들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많습니다.




본인의 삶이 힘들어서 그랬을까요? 굳이 그가 그리는 그림까지 우울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현실은 고되지만 그의 그림만큼은 밝고 따뜻해서 보는 이를 행복하게 만듭니다. 비평가들은 마네나 드가처럼 당시 호박씨 까는 19세기 남성들의 이중적인 생활을 고발하는 그림에 더 후한 점수를 주었습니다. 행복하고 즐거워 보이는 르누아르의 그림은 거짓 인생을 그린 거라며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삶은 음지와 양지가 다 함께 공존하는 데 말입니다. 




<물랭 드 라 갈레트, 1876>는 파리 몽마르트르가 배경입니다. 유럽의 도시 중 흔치 않게 고지대에 속하는 산동네입니다.  주머니 가벼운 예술가들 (고흐, 피카소, 모딜리아니 등), 가난한 이들이 모여 살 던 곳입니다.  풍차가 있던 이곳 빵 집에서 만드는 과자맛이 일품이라 주말이면 사람들로 붐비기도 했다고 해요. 당시 젊은이들에게 이곳은 나름 힙한 장소로 떠오르게 됩니다. 지인들과 어울리며 수다도 떨고 춤출 수 있는 다목적 공간으로 말이죠. 선남선녀들의 부킹 장소로도 이만한 곳이 없을 듯싶습니다.  커다란 캔버스를 들고 1년 내내 습작을 했을 정도로 대작입니다. 모델 살 돈이 없어 친구들을 등장시키지요.




왼쪽 모퉁이  엄마 따라온 푸른 리본의 금발머리 아이도 이 무도회가 신이 난 모양입니다. 뒤태를 드러 낸 젊은 신사분 양복 위로 얼룩덜룩 구멍이 난 것처럼 빛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정면을 응시하며 춤을 추는 아가씨 얼굴에도 행복한 햇살이 그녀의 얼굴 위로 떨어집니다. 숲 속 나뭇잎들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햇빛은 고단한 일상을 보냈거나 외롭거나 행복의 끄트머리라도 찾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내리는 축복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명암을 직접 사용할 때 어두운 색을 사용하기보다 색의 미세한 밝기 차이로 표현했기 때문에 훨씬 부드럽게 표현된 것을 느낄 겁니다. 당시 이런 스타일의 표현법은 비평가들 사이에서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누아르는 활력 넘치는 사람들을 생생하게 표현함으로써  보는 이들로 하여금  행복하고 즐거운 한때를 덤으로 주는 것 같습니다.






<발코니 남자>,1880/wikipedia #<이레느 깡 단베르 양의 초상,1880>/wikipedia





카유보트는 주로 남자를 모델로 그렸습니다.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이 여성을 주로 모델로 한 것과 다르게 차별화를 두고 싶었나 봅니다. 근대 도시의 건물들이 들어서며 주변 술집, 카페, 극장들이 생겨났지요. 주로 카페에서 남성 모델을 구했다고 해요. 사진술이 발달하기 시작해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똑같은 장소를 그려도  그의 그림은 다른 인상파 화가들과 다르게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독특한 그림들이 많습니다.




 카유보트의 <발코니 남자(Man on a Balcony),1880>입니다. 오른쪽으로 인물을 왼쪽으로 풍경을 그려 넣었어요. 상체를 반쯤 수그린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의 시선은 무엇을 쫓고 있을까요. 한 껏 몸치장을 끝낸 여인들도 지나갈 테고, 새롭게 들어 선 백화점의 모습도 관심 있었을 것 같고, 무엇보다 큰 대로를 활보하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과 차량 또한 구경거리로 안성맞춤이었을 듯합니다.  지금은 너무나 평범한 우리 일상으로 들어온 발코니가  19세기 그들에게 파리의 변화를 한눈에 볼 수 있었던  특별한 장소였다는 사실이 카유보트의 그림 덕분에 알게 됩니다. 당시  파리가 겪고 있었던 급격한 환경의 변화를 묘사하는 것에 초점을 둔 작품인 거지요.






 나는 여성을 좋아해.
여자들은 아무것도 의심하려 들지 않아
 그들과 함께 있으면
세상은 정말 단순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변하지."

- 르누아르의  아들 장 르누아르가 쓴 < 내 아버지, 르누아르>중에서-






르누아르는 남다른 관찰력으로 아이들의 천진 난만한 모습을 담은 그림을 많이 남겼습니다. 특히 여성들을 참 예쁘게 그려 낸 화가이지요. 볼이 통통하고 살 집이 있는 여인들을 좋아했다고 해요. 풍요로운 느낌을 주기에 아무래도 유리했겠죠. 인간에 대한 관심이 누구보다 많았던 화가입니다. 



은행가 루이 깡 단베르의 귀여운 막내딸을 그린 작품입니다. 르누아르는 자신의 아이들을 주제로 한 초상화를 많이 그렸지만 그중에서 특히 뛰어난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눈동자와 핑크기 살짝 도는 맑은 피부색감이 비록 아이지만 우아하고 고상하게 보입니다.  어깨너머 허리까지 늘어진 유연한  머릿결은 가까이 가 만져 보고 싶고요. 길게 늘어뜨린 머리칼 한 가닥, 한 가닥은 르누아르 특유의 흐르는 듯한 붓터치로 섬세한 표현이 돋보입니다. 푸른색계통의 드레스와 머리핀 장식도  세심하고 꼼꼼한 화가 특유의 붓터치에 의해 묘사되고 있습니다. 







<유럽의 다리>,1876  #<퐁네프 다리>,1872/Google Art&Culture




유럽의 철도는 1830년대에 건설되기 시작했습니다. 파리 생라자르역은 1837년에 세워졌고요. 역을 지나는 노선이 늘면서 사람과 마차의 통행을 방해하자 1868년에 역 위를 가로지르는  유럽교가 건설됩니다. 카유보트는 유럽교를 대상으로 소규모 습작을 포함해 대여섯 점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중 하나이고요. 1878년 세 번째 인상파 전시회가 열릴 때 <파리, 비 오는 날 >과 함께 19세기 파리의 도시 문화를 보여준 작품입니다.




카유보트는 마네의 <생 라자르 역>을 참조해서 이 그림을 구상합니다. 기차는 보이지 않지만, 피어오르는 수증기를 보면서 그 너머에 기차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거대한 철제기둥으로 이루어진 다리가 보입니다. 오른쪽 난간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노동자 복장의 사람도 보이고요. 정장을 차려입고 실크했을 쓴 신사를 카유보트로 보는 시선도 있습니다. 노동자 계급에 대한 막연한 연민을 가지고 있었던 부르주아 화가였지요. 밀레가 속한 바르비종파처럼 맘 놓고 상류층을 공격하지 못했지만  그는 이 그림을 통해 자신의 처지를 적절히 변호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프랑스 파리의 센강을 가로지르는 퐁뇌프 다리입니다. 어느 햇빛이 따사로운 오후 르누아르는 동생 에드몽과 함께 루브르 궁 부근 카페 위층 앙트르솔(1층과 2층 사이의 중간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작업한 작품입니다. 일본 판화의 조감법에서 배운 시점을 실험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요. 널찍하게 뚫린 대로 위로 마차가 지나가고 차도 스쳐갑니다. 한 껏 치장을 하고 나온 파리지앵들의 여유도 엿보이고요. 화면 절반의 하늘 묘사는 네덜란드 화가들의 영향을 받은 거랍니다. 넓은 하늘만큼이나 땅 위에 새롭게 높아지는 고급 아파트의 모습도 빽빽하게 채워집니다. 그나마 변함없이 세월을 안고 흐르는 것은 센 강뿐인 것 같습니다.







<대패질 하는 사람들>,1875  #<조르주 샤르팡티에 부인과 그 딸뜰>,1878



당시 농촌에 있던 소시민들이 도시로 건너와 도시 빈민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유명 화가들 그림 속 서정적인 풍경이나 농부의 목가적인 모습을 담은 상투적인 주제들은  종종 표현되었지요. 다만 도시 노동자들은 거의 그림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부르주아에 속한  카유보트는 남성들의 힘 노동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사회적, 도덕적 또는 정치적 제스처를 취하기 위함이 아니고요.  그저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 파리의 면면을 거짓 없이 담담히 기록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살롱에 걸리자  대중들, 비평가들은 수준 낮은 그림이라며 맹 비난을 쏟아냅니다. 그동안 익숙했 던 그리스 조각상, 신을 닮은 그런 몸매가 아니라 그저 평범한 그것도 이웃 하층민에 불가한 빈민의 모습을 그림에 담았다는 이유 때문이지요. 이후 이 작품은 인상주의 전시에 출품하게 됩니다.




발코니 창문을 통해  스며든  광선으로 인해 일하는 공간이 환하게 드러납니다. 세 남자가 맨 등으로 무릎을 꿇고 바닥을 구획합니다. 얼굴을 부분적으로 만 구별할 수 있어 그들의 표정까지 읽어 낼 수 없으나  반지 낀 손을 보니 고된 그들의 노동에도 이유가 있어 보입니다. 모서리에 가지런히 놓인 도구 가방, 망치,  마루 바닥에 흩어진 대패, 채워진 와인 한 병이 그나마 보는 이들도  함께 위로받는 기분입니다. 낮은 빛으로 튀어나온 근육이 강조됩니다. 마치 주변 색상의 따뜻함을 통해 작품의 고귀함을 지키고자 노력한 카유보트의 배려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실내의 자그마한 소재들로 사물이나 인물을 다양한 배치와 구도를 통해 카유보트만의 독특한 조형능력을 살짝 엿보고 가는 기분도 드는 작품입니다. 상류층 화가가 이례적으로 노동계급의 모습을 그림에 담아 아주 공을 들여 그린 섬세한 작품이란 것도 한 특징합니다.






샤르팡티에의 부인인 마르크리트는 남편 못지않게 예술을 사랑했던 여인입니다. 예술가들을 무척 좋아했던 이 부부는 가난한 화가들을 많이 후원했다고 합니다. 르누아르도 어려운 시기에 이 부부의 도움을 받았고요. 우크라이나 출신 은행가이자 영향력 있는 콜렉터였던 샤를 에프록시가 그들의 연결 고리 역할을 합니다. 그를 통해 그림 속 가족의 남편분을 소개받게 됩니다. 남편분이 파리 사교계에 엄청 영향력 있으신 분이셨나 봐요. 남편분을 통해 파리 상류층에 르누아르에 대한 입소문이 나면서 살아서 성공계단을 오르게 됩니다.  이 그림은 말년에 프랑스 국가가 구입하여 '루브르 소장품 목록'에 오르며 그의 명성을 널리 알리는 작품이 됩니다. 





<비오는 예르강>,1875 #<우산>,1886/wikipedia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카유보트의 <비 오는 예르강>입니다. 수면 위로 그려지는 크고 작은 동심원이 점점 커지기도 하고 교집합이 되기도 하며 사라집니다. 물에 비친 강가의 나무들, 물기 머금은 연두 초록 나뭇잎들  어딘가에 두고 온 제 마음 같기도 하고요. 온화하고 사려 깊으며 열정 넘치는 카유보트가 쉼을 가졌던 공간이기도 할 겁니다. 




카유보트는  아버지의 죽음(1874), 큰 동생의 죽음(1876), 어머니의 죽음(1878)으로 인해 자신도 일찍 세상을 떠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애정을 쏟던  정원일을 하다 폐관련된 질환으로  46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그의 유언에 따라 그의 인상파 컬렉션은 루브르 박물관에 기부됩니다. 관련 업무는 유언에 따라 친구였던 르누아르가 도맡아 진행하고요. 당시 미술계 주류와 박물관 위원회는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고 해요. 일부 작품을 제외하는 조건으로 기부를 받아들입니다. 그가 수집한 인상파 작품 68점 중 38점만 받아들여집니다. 나머지 29점은 수령을 거부하고요. (1904년 1908년 ) 프랑스 정부로부터 거부된 일부 제품은 미국 반스 제단에 매각됩니다. 현재의 가치와 작품가를 생각하면 프랑스 정부의 엄청난 실수 아닐까 싶습니다. 




 카유보트는 세련된 감각뿐만 아니라 심미안을 지닌 날카로운 지성의 소유자란 생각을 해 봅니다. 

피사로(19,) 르누아르(10), 드가(7), 마네(4), 모네(14), 시슬리(9), 세잔(5)

그가 구입한 인상파 작품 68점의 목록입니다. 미술 수집가였던 이력이 있어서 일까요. 그의 안목이 놀랍지 않습니까?  쇠라와 같은 점묘법 스타일 혹은 상징주의 제품들은  그림 목록에서 배제되어 있습니다. 인상주의 동료 화가들은 죽은 자들의 세상에서 카유보트를 만나거든 큰 절 한 번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살아서 받은 재정적 정신적 후원들 죽어서까지 지켜준 예술 애호가로서의 의리 때문에 말이죠. 개인적으로 무슨 무슨 사조라는 이름이 붙게 되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지식을 꾸역꾸역 집어넣어야 하죠. 그 틀을 깨 준 작품들이 인상주의 작품들이란 생각을 해 봅니다. 그냥 보고 느끼면 되니까 말입니다.  




루브르를 찾는 발걸음, 오르세 박물관을 채워 준 그림 들, 그 속에 자신이 아낌없이 후원했던 동료 화가들과 나란히 미술관 벽에 걸린 카유보트의 그림도 한 번쯤 눈여겨 봐주셨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굴렁쇠를 든 소녀를 대각선으로 잘라 보시면 검은색 옷을 입은 여인과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는 것을 느끼실 겁니다. 한 그림 속에 다른 화풍이 존재하는 르누아르의 작품 <우산>입니다. 이 그림을 그리다 에스파나, 이탈리아 여행을 하고 왔어요. 벨라스케스와 라파엘로 등 옛 거장의 작품으로부터 새삼스레 감동하고 돌아와 그림을 고쳐 그렸답니다. 엑스레이 사진을 찍어보면 르누아르가 그린 왼쪽 여인의 의상 또한 레이스와 프릴로 장식된 드레스를 그렸다가 밋밋한 옷으로 수정한 게 드러난다고 합니다. 




비를 피해 우산을 펼쳐든 사람들의 행복한 모습입니다. 원래 우산은 유럽에서 귀족들의 사치품이었다고 합니다. 값싸고 가벼운 우산이 나오기 시작하자 자랑이라도 하듯 펼쳐드는 거죠.  파란색, 회색, 갈색을 사용해 빗방울 하나 보이지 않는  비 오는 날을 표현했 냈습니다. 화면 왼쪽을 보세요. 우산이 없이 나섰다가 비를 피해 걸음을 재촉하는 여인은 어두운 색채에 묵직한 옷의 질감이 느껴지는 차분하고 견고한 붓질이 눈에 뜨입니다. 윤곽선도 뚜렷하고 치마의 주름이 또렷 해 고전적인 기법으로 그린 여인인 거죠. 반면 굴렁쇠를 든 어린 소녀와 언니, 그리고 엄마는 부드러운 파스텔 색조에  깃털이  휘날리 듯 물감을 가볍게 칠한 전형적인 인상주의 양식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포착한 그 순간의 엄마와 아이의 모습을 빠른 붓질로 생동감 있게 그려낸 거지요. 인상주의 그림을 그리면서도 르누아르는 그 한계도 느꼈어요.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인상주의가 지닌 한계를 작가 나름의 방식으로 실험해 보고 점점 그의 화풍이 변화하게 됩니다. 르누아르만의 독자적이고 풍부한 색채 표현을 통해서 말이죠.






자신의 부를 혼자 소유하지 않았던 귀스타프 카유보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을 생각해 봅니다. 인상파 화가들에 비해 그림이 치열하지 않았지만 촘촘히 짜임새 있는 구성과 깊이 있는 색감은 뛰어나다고 봅니다. 늘그막에 심한 관절염으로 고생하면서도 마지막까지 작품 활동을 멈추지 않았던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예술 혼도 엄지 척입니다. 화가들의 가치는 그림만으로 말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화가의 삶과 스토리가 얼마나 그림과 잘 연결되느냐도  중요한 부분일 테니까요. 두 화가의 예술 사랑은 '위로'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누군가의 꿈꾸는 자유 속으로 스며들 겁니다. 


그림출처: 위키피디아, 위키아트, 구글아트 앤 컬처

keyword
작가의 이전글 12-9. 다정도 병인양 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