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김 춘수
조금 전까지 거기 있었는데
어디로 갔나,
밥상은 차려놓고 어디로 갔나,
넙치지지미 맵싸한 냄새가
코를 맵싸하게 하는데
어디로 갔나.
이 사람이 갑자기 왜 말이 없나,
내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온다.
내 목소리만 내 귀에 들린다.
이 사람이 어디 가서 잠시 누웠나,
옆구리 담괴가 다시 도졌나, 아니 아니
이번에는 그게 아닌가 보다.
한 뼘 두 뼘 어둠을 적시며 비가 온다.
혹시나 하고 나는 밖을 기웃거린다.
나는 풀이 죽는다.
빗발은 한 치 앞을 못 보게 한다.
왠지 느닷없이 그렇게 퍼붓는다.
지금은 어쩔 수가 없다고
-김춘수, <강우>, [거울 속의 천사] 민음사, 2001-
삶은 습관이란 단어와 동일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왜 아니겠어요? 대소사를 챙기던 나이 든 안주인이 먼저 저 세상으로 가버렸습니다. 늘 그녀가 거기 있었는데 말입니다. 반려자를 먼저 보내버린 노 시인은 밥 상머리에서부터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해집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내의 빈자리가 더 크게 다가옵니다. 내 소중한 사람을 상실해 버려 '지금은 어쩔 수가 없다고'하며 혼자 견딜 수밖에 없는 노 시인의 심경을 이해할 것도 같습니다.
화가들 중에도 드물게 사이좋은 부부가 있습니다. 오늘 소개할 칼 라르손(Carl Larsson, 1853-1919)과 호아킨 소로야(Joaquin Sorolla y Bastida,1863-1923) 부부가 그들입니다. 북유럽의 칼 라르손 형님과 호아킨 소로야 사이에 밥그릇 수로따지면 10년의 차이가 있네요. 스페인의 호아킨 소로야가 태어난 1863은 나폴레옹 3세에 의해 살롱전에서 우수수 떨어진 낙선작들을 전시하겠다는 폭탄선언이 있었던 해입니다. 살롱전의 보수세력과 당시 비주류에 속했던 젊은 층 다수가 모일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 사건이었습니다. 인상주의 깃발아래 토론을 하고 모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니까요.
스페인, 발렌시아 지도/123RF#스웨덴, 스톡홀름지도/123RI
스페인의 호아킨 소로야(Joaquin Sorolla y Bastida)가 태어난 곳은 지중해 햇볕이 따가운 해안 도시 발렌시아라는 지역입니다. 축구 좋아하는 작가님들이라면 지명만 들어도 왠지 친숙할 것 같습니다. 스페인 레알 마드리도, 바르셀로나, 그리고 발렌시아 이렇게 말이죠. 한국의 이 강인(2018-2021) 선수가 잠시 머물렀던 팀이기도 하지요. 소로야는 두 살 때 스페인에 만연해 있던 콜레라로 양친 모두를 잃고 여동생과 함께 삼촌의 보살핌을 받으며 유년시절을 보냅니다. 10대 후반 스페인 미술전에 참여하게 되면서 일찌감치 그의 재능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18세 때 마드리드로 이주해 프라도 미술관에서 거장들의 그림을 모작하며 실력을 쌓아가지요. 벨라스케스 그림을 무지 좋아했던 화가입니다.
겨울이 길고 오후 3시만 되면 어두워지는 스웨덴의 칼 라르손(Carl Larsson)은 스톡홀름 출신입니다. 한창 북유럽 가구스타일이 유행한 적이 있지요. 고인이 되신 잉그바르 캄프라드(Ingvar Kamprad,1926-2018)가 IKEA "많은 사람에게 보다 나은 일상을 제공한다."라는 목적 선언문 아래 회사의 정신적 뿌리가 칼 라르손과 그의 아내 카린 라르손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다고 솔직히 언급해 왔습니다. 라르손은 빈민촌에서 오랫동안 힘들게 성장했습니다. 몸만 어른인 아버지의 폭언과 술주정에 시달려야 했고요. 당시 세탁부로 가족을 부양하고 있던 어머니는 그림에 재능이 있다는 선생님의 설득으로 아들을 위해 헌신합니다. 외할아버지가 화가셨다고 하는 걸 보면 칼 라르손의 예술적 재능도 어머니 쪽이란 생각이 듭니다. 13살 때 스톡홀름 미술 아카데미(Stockholm Academy of Fine Arts)에 들어갔고 1869년 앤티크 스쿨(Antique School)에서 공부합니다. 학비도 벌고 가족을 부양하고자 신문, 잡지의 만화와 삽화 등 닥치는 대로 그립니다.
호아킨 소로야와 칼 라르손 모두 프랑스 인상주의가 큰 트렌드로 자리매김할 때 영향권에 있었던 화가들입니다. 소로야는 프랑스 인상주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고향 발렌시아의 바닷가 아이들, 이웃들의 모습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소화시켜 나갑니다. 반면에 칼 라르손은 인상주의 스타일이 너무 급진적인 화풍이라 생각했 던 모양입니다. 프랑스 유학시절 인상파 화가들과 친분을 쌓지 않았어요. 당시 대세를 따르지 않고 바르비종파의 속했던 밀레와 같은 자연주의 기법을 고수합니다. 그런데 스웨덴으로 돌아와 스톡홀름 아카데미의 후진양성에 반기를 든 화가 들 중 한 명인 걸 보면 그 역시 프랑스 인상주의 영향을 조금은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라르손에게 자연주의가 훨씬 편하게 다가왔나 봐요.
Joaquin Sorolla, <Mother>,1895/Pinterest Carl Larsson,<karin and Brita>1893/Pinterest
호아킨 소로야의 아내 클로틸데(Clotilde Garcia del Castillo)입니다. 잘 나가는 집안의 엄친 딸이었던 그녀는 소로야와 결혼하며 그의 정신적 지주이자 서포터 역할을 합니다. "나의 부인 클로틸데를 향하여"라는 말을 자화상에 새겨 넣을 정도로 애처가였던 사람이 호아킨 소로야입니다. 고흐 저리 가라 할 정도로 800 통이 넘는 편지를 아내에게 보낼 정도니 할 말 다했죠. 특히 장인어른이신 안토니오 가르시아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사진작가였던 장인이 찍은 흑백 사진에 색칠해서 그림을 그리거나 구도나 역동성을 실험해 보기도 하며 공부자료로 많이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만하면 처가댁 말뚝에 절할만하겠다 싶습니다.
당시 둘째 딸 엘레나를 낳은 아내의 모습을 아기와 함께 그렸습니다. 엄마와 아이 모두 평온해 보여요. 딱히 강한 색감은 없는데 아기와 아내를 향한 소로야의 시선 때문일까요 그림이 참 따뜻해 보입니다. 목까지 끌어올린 이불이 구름이불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색의 표현이 세련되어 있어요. 왠지 요란한 색으로 치장할 것 같은 스페인 분위기를 상상했는데 말이죠. 흰색으로 보이는 저 색상을 하얀색 물감을 전혀 쓰지 않고 저 느낌을 표현해 낸 걸 보면 소로야의 테크닉이 상당히 뛰어나 놀랍기도 합니다.
칼 라르손(Carl Larsson)의 아내 카렌 라르손(Karin Larsson 1859-1928)입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딸 Brita(1893)를 안고 젖을 물리는 모습처럼 보입니다. 앉아있는 소파부 터해서 커튼, 벽지, 그리고 주변 사물까지 남편 칼이 뚝딱뚝딱 만들고 아내 카렌이 직접 수를 놓거나 직물을 만들어 세팅을 한 아늑한 공간입니다. 이곳을 남편 칼이 그림을 그려 남겼고요. 지리적 특성상 야외에서 생활하는 시간보다 집 안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많다 보니 실내 인테리어에 각별히 신경을 쓴 모습입니다. 밝고 화사한 색으로 포인트도 주고 아이들이 편안하게 드나들 수 있도록 배려한 모습으로 말이죠. 실제로 그들 가족이 살았던 공간을 방문하고 오신 분들은 융통성 있게 만들어진 공간 활용에 놀란다고 해요. 당시 빅토리아 풍이 유행이라 거실은 무늬만 거실인 공간이었는데 칼 라르손의 집은 아이들이 수시로 드나들 수 있도록 소통의 공간으로 만들어 놓았던 거죠. 아이들이 아빠가 그림 그리는 공간을 볼 수 있도록 배려해 놓았고요.
아내 카린은 부유한 사업가 아버지를 두었고, 그 자신도 뛰어난 미술학도였습니다. 프랑스 특히, 여성 입학이 가능한 곳으로 갈 정도로 말이죠. 파리 외곽에 있는 스칸디나비아 예술가들의 거주지 그레 쉬르 루앙(Grez-sur-Loing)에서 남편 칼 라르손(Carl Larsson)을 만납니다. 카렌은 그와 결혼하여 풍요로움과 안정감을 칼 라르손에게 선물하지요. 그녀와의 만남이 신의 한 수 같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말입니다. 그의 인생이 180도 바뀌었거든요. 가장 먼저 화풍이 달라집니다. 유화를 고수해 오던 그에게 수채화를 권한 것도 아내 카린입니다. 이 선택은 그가 살롱전에 입선할 수 있도록 빛을 발합니다.
잘 나가는 화가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녀는 남편을 내조하고 스스로 모델이 되기도 하며 가사와 8자녀의 육아에만 전념합니다. 당시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높지 않아 전업 화가의 길은 포기했지만 미술 작업을 모두 포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그림 대신 패브릭 제품과 가구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이국적인 식물을 키워 집 안팎으로 생기 넘치게 꾸미기도 하고 집안에서 사용되는 직물(앞치마, 침대 덮개, 식탁보 등)과 자신과 아이들의 옷, 자수 작품, 가구(의자, 아이들의 나무 침대)를 디자인하게 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공간 장식가로 수공예 작품으로 길을 바꿉니다. 밝고 유쾌하고 대담하고 생생한 색채와 모던한 추상적 스타일로 가족의 일상에 스며들게 합니다. 작가님들 중 육아와 가정사로 잠시 경단녀가 되어 우울하신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딱히 정답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주어진 환경에서 일하는 여성도 되었다가 때론 가정주부로 들락날락하며 융통성을 발휘하셨으면 좋겠네요. 거 친시 간도 지나가니까요. 먼저 살다 간 카린 라르손이 좋은 샘플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결혼을 반대했던 장인어른도 사위 라르손을 인정하게 되고 1888년 순트보른에 있는 작은 집을 라르손에게 선물합니다. '작은 용광로(Lilla Huttnas)'라고 이름 짓고 1891년 라르손 가족들이 프랑스에서 스웨덴으로 귀국해 입주하면서 많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칼 라르손은 이 집에서 30년 동안 살면서 7번이나 공사를 했다고 합니다. 총 8명의 자녀를 두었으니 아이들이 생길 때마다 하나씩 늘려갔다는 얘기지요. 아이들 숫자만큼 그들의 다른 개성을 고려하고 표현하기 위해 부부가 직접 의자도 만들고 색도 칠하고 자수한 텍스타일로 공간을 장식하며 실용적이고 온기 넘치는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라르손의 작품 속에 이 집이 묘사되면서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유명한 집이 되어 매년 수많은 관광객들을 끌어 모으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1차 세계대전으로 어수선한 전장에서 스웨덴 군인들이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가지고 있었던 그림이 칼 라르손이 직접 그린 집과 그 안에 일상을 살아가는 가족들 모습이었다고 해요. 살아 돌아가면 이런 가정을 꿈꾸면서 말이죠.
Joaquin Sorolla,<Running along the beach>,1908/WikiArt# Carl Larsson<쾌적한 해수욕장>/WEART
호아킨 소로야가 즐겨 그렸던 고향마을 발렌시아 바다와 바닷가 아이들입니다. 파도가 금방이라도 발끝으로 다가올 것 같지 않은가요. 이미 풍덩하고 들어가 바닷물에 몸을 맡긴 아이들이 신나 보입니다. 누드차림으로 질주하는 이 녀석 종아리 근육을 스쳐간 빛이 반짝입니다. 스페인에서 12살 미만의 남자아이들은 누드차림으로 수영을 할 수 있다는 법이 있다네요. 마음이 급한 이 녀석 앞서 뛰는 여자 아이들 금방이라도 따라잡을 것 같습니다. 뒤쳐지는 친구를 확인하는 듯 뒤돌아선 여자아이 치마에 빵빵한 바닷바람이 아이들 마음을 부풀게 합니다. 언제 봐도 호아킨 소로야의 바닷가 아이들은 건강미 넘치고 지중해 바닷물 색을 닮아 매력적입니다. 뜨거운 지중해 태양빛을 빠른 시간 안에 캔버스에 옮겨야 했기에 붓을 길게 해서 멀리 서서 그림을 그렸다고도 전합니다. 양쪽에 기둥 두 개를 세우고 빨랫줄로 연결을 해 커다란 캔버스를 걸어 이동하면서 그리기도 하고요. 프랑스에서 배운 인상주의 화풍을 자기 식으로 멋지게 소화해 내 에너지 넘치는 현장에 관람자도 가고 싶게끔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것 같습니다.
살고 있는 집 앞으로 강이 흐른다면 개인 수영장이 따로 없겠죠. 며칠 안 되는 야외활동 중 하나인가 봅니다. 칼 라르손이 살았던 집 주변으로 강이 흘러요. 이미 물속에 헤엄치고 있는 아들, 보트 위에 아들도 보이고 , 누드차림으로 '하나 둘 셋 '하며 뛰어내릴 준비를 하고 있는 또 다른 아들도 보입니다. 낑낑거리며 한 다리 걸치고 어찌어찌 올라가는 중인 딸아이, 아빠가 만들어 준 다이빙대 덕분에 지루하지 않은 여름 한 나절이 흐릅니다. 사고 날 까 염려스러운 엄마가 그늘에서 다섯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모두 시선이 강을 보고 있는데 유일하게 붓을 쥔 집주인 라르손을 응시하고 있는 이 집 강아지 오늘 제대로 포즈 잡았네요.
Joaquin Sorolla ,<Return From Fishing>,/wikipedia# Carl Larsson,<crayfishing>/gallery&art.com
호아킨 소로야의 그림을 보다 보면 이국적인 그림이 눈에 많이 뜨입니다. 뜨거운 열기를 식혀주기 위해 말을 데리고 바닷물 샤워를 하는 그림도 무척 인상적이지만 제 눈에 이 그림이 더 눈에 들어왔습니다. 소 두 마리가 귀향하는 어부들 배를 끌고 가는 장면입니다. 젊은 어부 정강이 주변에 몰려든 뽀얀 파도와 바닷물에 어릿어릿 어려있는 그와 소 두 마리의 그림자가 일렁입니다. 밭 갈고 있는 소는 보았어도 배를 움직이는 소는 상상해 보지 못해기에 더 제 눈에 띄었나 봅니다. 한국 소도 스페인 발렌시아 가면 이렇게 밥값 해야 하는 거죠. 어떤 생선으로 작은 배를 가득 실었는지 모르겠으나 소 두 마리를 사용해 끌어야 할 정도면 나름 만선인가 봅니다. 어딜 가나 녹록지 않은 서민들의 생활에 고단함도 묻어있는 것 같고요.
<가재 잡기(Crayfishing)>라는 제목의 칼 라르손 그림입니다. 강가에 가족이 총출동했네요. 제법 낚시군 티를 내며 낚싯대와 틀 채를 동시에 사용하고 있는 아들 녀석, 치마 걷어 부치고 가재 잡겠다고 낚싯대 드리 운 막네도 보입니다. 각자 맡은 역할이 조금씩 달라 보여요. 산더미처럼 쌓인 붉은 가재가 오늘의 메인 요리입니다. 새우보다 좀 크고 게보다는 작은 가재말입니다. 술, 커피포트, 잘 구운 빵, 그리고 큰 가마솥(?) 같은 도구도 눈에 들어오고요. 북유럽의 여름 축제로 그동안 어떻게 참고 지냈나 싶을 정도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밖으로 나오는 날이래요. 8월 첫째 주 수요일에 주로 가재 파티를 한 다고 합니다. 이때가 가장 맛있고 , 8월 말이 되면 가재 잡이가 금지되기 때문이래요. 약간의 소금과 맥주, 그리고 북유럽의 향신채소 Dill이 조금 들어가는 간단한 요리라고 합니다.
가족이 모두 모여 가재를 하나씩 들고 까먹는 상상을 한 번 해보세요. 행복지수 치솟을 겁니다. 행복이 뭐 별 것인가요? 이렇게 작은 행복들을 자주 경험해 보고 쌓을수록 우울감이 바닥을 칠 때 나를 꺼낼 줄 무기 아닐 까 싶습니다. 스웨덴에서 1500년경부터 전해온 이 전통은 처음에는 귀족들만의 것이었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소비가 늘어나고, 일반 사람들도 가재를 먹을 수 있게 되면서 무분별한 포획을 막고자 1900년경 가재를 잡는 시기에 관한 법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가장 아름다운 북유럽의 8월 어느 날에 파티는 열리며 주로 친구, 이웃과 늦은 밤까지 함께 합니다. 백야의 영향으로 12시가 넘어도 떠있는 해를 보면서 말이죠.
Joaquin Sorolla,< My wife and Children>,1897,Sorolla Museum/ Google Arts&Culture #Carl Larsson, <Breakfast under the Big birch>/ www. wikiart.org
호아킨 소로야의 작품 중 제가 애착이 가는 작품으로 소로야의 아내와 아이들입니다. 미완성 작이고요. 아빠를 향해 오고 있는 가족들을 후다닥 그려야 해서 아내 표정이 덜 잡혀 있어요. 아빠를 바라보는 큰 딸 마리아, 동생에게 치맛단 붙잡힌 둘째 딸 엘레나 기저귀도 차지 않은 채 누나 따라가기 바쁜 아빠와 똑같은 이름의 아들 호아킨입니다. 우아한 모습의 그녀는 남편에게 영웅이자 사랑이자 친구의 모습으로 남아있습니다.
칼 라르손은 장인이 선물로 준 순트브른집에 자작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해요. 날벌레를 쫓아주고 그늘을 만들어 주기 때문이지요. 아침식사 자리입니다. 당연히 빈 의자는 칼 라르손 아빠의 자리겠지요. 앙징맞은 서열막내가 가족을 그리고 있는 아빠를 쳐다보네요. 붉은색 모자와 대롱거리는 줄무늬 타이즈가 귀엽습니다. 가족 모두 깨끗한 정장차림을 하고 식사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나름 가족의 일원으로 한껏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이 든 개도 아침식사 정식 멤버인가 봅니다. 자연스럽게 한 자리 차지 하는 걸 보면 말이죠. 식사 후 가볍게 목을 축을 와인도 두 병 눕혀져 있네요.
칼 라르손은 총 8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SuSanne(1884)
Pontus(1888)
Lisbeth(1891)
Brita(1893)
Kersti(1896)
EsbJorn(1901)
두 살 때 아이 하나를 잃고, 18살 되던 아들을 맹장염으로 잃었어요.
자작나무 'K'이니셜과 하트도 보여요. 아이들 중 'Kersti(1896)'라는 이름이 있는데 혹시 아이 태어난 날을 새긴 걸까요? 푸성귀 널려있는 앞마당, 흰 닭 한 마리는 깜짝 우정출연했네요. 수채화라 가볍고 화사한 색깔이 녹색의 나뭇잎들과 어울려 담백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8hnjkPZzb8
1890년 출판물에 색을 재현하는 기술이 개발되면서 그의 작품은 점점 인기가 많아졌습니다. 그의 책들이 제작되었고 1909년 독일에서'햇빛 속의 집(The House in the Sun)'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된 그의 작품 수록집은 3개월 만에 4만 부가 팔렸다고 합니다. 라르손 본인도 깜짝 놀랄 정도로 말이죠. 2001년까지 40쇄를 인쇄했다고 하니 대단하죠.
Valencia.Las Grupas(1916)/wikipedia #<Mid Vinterblot>1914-1915/google Arts&Culture
호아킨 소로야가 미국 뉴욕에 있는 'Hispanic Society of America'의 요청을 받아들여 그린 벽화로 총 14점 연작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4점 중 하나인 <Valencia. Las Grupas> 작품으로 1916년 작품입니다. 발렌시아 각 지역, 동내 모임을 대표한 행렬처럼 보입니다. 소로야가 1911년 계약을 한 후 미국에 머물며 작품을 제작했는데 1913년 첫 작품을 시작으로 1919년까지 6년에 걸쳐 완성한 연작입니다.
칼 라르손의 마지막 작품이 된 <한겨울의 희생(MIdwinter Sacrifice)>이다. 기근을 피하기 위해 스웨덴 왕이 제물로 바쳐지기 직전의 모습입니다. 세로 6미터 가로 14미터의 대작이고요. 북구의 신화에 등장하는 Domalde 왕은 자신의 재임 기간 내내 기근에 시달리게 되자 첫 해는 제물을 두 번째 해는 사람을 바쳤으나 세 번째 해에도 역시 대 기근에 시달리게 되자 결국 자신을 제물로 희생하고 풍년이 찾아왔다고 전해집니다. 작품이 완성되었지만 미술관 이사회에서 이 작품의 게시를 거절했다고 합니다. 거절을 통보받은 라르손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요. 그는 이 작품을 자신의 작품 가운데 최고의 역작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은 일본인에게 팔렸다가 1992년 스웨덴 국립 미술관에 라르손 작품 전시회를 할 때 걸리게 됩니다. 스웨덴에서 이 작품에 대한 논의가 끊이질 않자 1997년 다시 작품을 사들여 원래 전시하고자 했던 곳에 걸리게 됩니다.
Joaquin Sorolla 개인 집 겸 미술관/마이버킷리스트# Carl Larsson 집 내부/ 위시빈
1926년 아내 클로틸데가 사망하며 그녀는 자신들의 저택을 스페인에 기증합니다. 유럽에는 작가가 살던 집이 박물관이나 미술관으로 바뀌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의 아내 덕택에 일반인들도 잘 꾸며진 그의 정원들을 요기조기 통과해 집 안 내부에 꾸며진 그의 작품들을 볼 수 있습니다. 1층은 자재창고로 쓰인 곳을 고쳐 호아킨의 핵심작품들을 전시해 놓았습니다. 2층은 서재나 손님맞이하던 기전 용도를 바꾸어 새 작품을 전시하거나 특히 가족들 초상화를 전시하는 용도로 꾸며 놓았습니다. 호아킨은 초상화를 그릴 때 가족을 가장 먼저 그려 테스트를 해본 다음에 새 작품에 도전했다고 합니다. 3층은 빛을 중요시한 그가 외부 작업이 힘든 늦가을이나 겨울 상태가 안 좋은 때 작업하는 작업실 공간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책을 손에서 놓지 않던 그가 잠시 쉴 수 있는 작은 침대도 비치되어 있습니다. 여인들을 그렸던 초상화만 모아놓은 방도 따로 있습니다.
스웨덴의 칼 라르손과 카렌 라르손 가족들이 살았던 집입니다. '작은 용광로(Lilla Huttnas)'로 불리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지요. 백 년 전 디자인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지금 막 들어가서 하하 호호 떠들며 식사를 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초대만 해준다면 말이죠. 따뜻한 원목의 느낌과 아내 카린이 직접 짠 패턴이 있는 직물 그리고 방금 집 주변에서 꺾어 화병에 꽂은 듯한 꽃들로 소박하고 안락함을 꿈꾸는 도시의 바쁜 현대인들이 한 번쯤 꿈꾸고 있을 법한 살가운 공간입니다. 후손들에 의해 잘 보존된 공간입니다.
두 화가의 그림을 비교해 보며 공통점도 보이고 차이점도 느끼실 겁니다. 그들의 유난한 가족 사랑은 불우했던 두 화가의 어린 시절 결핍이 있어 더 그러한 것 같고요. 행복을 너무 피상적이고 멀리 있는 곳에서 찾으면 내게 온 행복의 기운도 눈치채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냥 가게 놔두지 마시고 작은 거라도 자주자주 경험하시는 시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출처: 위키피디아, 구글 아트앤컬쳐, 위키아트, 핀터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