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 낭만과 해체

외젠 들라크루아& 폴 세잔



모두를 위한 예술 art for all
- 사무엘 코톨드-




코톨드 미술관( The Courtauld Gallery)은 영국 런던 중심부의 스트랜드에 위치한 서머싯 하우스( Somerset House) 내부에 자리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술관입니다. 이 미술관은 사무엘 코톨드 트러스트( Samuel Courtauld Trust)의 소장품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런던 대학교의 자치 대학인 코톨드 미술 연구소( The Courtauld Institute of Art)의 소장품을 소유하고 있고요. 런던 대학교의 자치 대학인 코톨드 미술 연구소( The Courtauld Institute of Art)의 하부조직으로도 운영됩니다. 미술관은 특히 프랑스 인상주의 및 후기 인상파 회화로 명성이 높습니다. 중세부터 현대에 이르는 회화, 드로잉, 조각 및 기타 다양한 작품들도 소장하고 있고요.




The Courtauld Gallery/ The Courtauld Institute of Art


The Courtauld Gallery/Bowel of chalk-London Walking Tours




코톨드 미술관은 런던 중심부의 스트랜드에 위치한 유서 깊은 서머싯 하우스 내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서머싯 하우스는 1776년에 윌리엄 챔버스 경 ( Sir William Chambers) 이 설계한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물로 , 런던의 대표적인 역사적 건축물 중 하나입니다. 1989년부터 서머싯 하우스의 북쪽 또는 스트랜드 블록( North or Strand block)으로 이전하여 현재 위치에 자리 잡았습니다.





코톨드 미술관은 1932년 사업가이자 미술품 수집가였던 새뮤엘 코톨드( Samuel Courtauld, 1876-1947), 외교관이자 수집가인 파햄 남작 아서 리( Lord Lee of Fareham, 1868-1947), 그리고 미술사학자 로버트 위트경( Sir Robert Witt,1872-1952)의 자선 활동을 통해 설립된 코톨드 미술 연구소의 일부로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은 예술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고 대중에게 미술을 접할 기회를 제공하려는 공통된 비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The Courtauld Gallery/The Guardian



The Courtauld Gallery/SomersetHouse




사무엘 코톨드(1876-1947)는 특히 1932년에 광범위한 인상주의 및 후기 인상파 작품 컬렉션을 기증하며 미술관의 핵심 소장품을 형성했습니다. 그의 컬렉션은 당시 영국 미술계에서 생소하게 여겨지던 마네(1832-1883), 모네(1840-1926), 세잔(1839-1906), 반 고흐(1853-1890), 고갱(1848-1903) 등의 작품들을 포함하여 현대 미술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변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연구소 설립자 중 한 명인 리 경(1868-1947 )이 수집한 옛 거장 회화 컬렉션과 로버트 윗 경(1872-1952)이 기중한 옛 거장 및 영국 드로잉 컬렉션 등 추가적인 유증이 어어져 소장품의 깊이를 더했습니다.




1958년부터 1989년까지 코톨드 컬렉션은 워버그 연구소( Warburg Institute) 건물 일부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1989년부터 코톨드 미술 연구소와 함께 서머싯 하우스의 스트랜드 블록으로 이전하여 윌리엄 챔버스( Sir William Chambers) 경이 설계한 공간에 자리 잡았습니다. 이 공간은 원래 왕립 학술원(Royal Academy), 왕립학회(Royal Society), 런던 고고학회( London Society of Antiquaries)를 위해 지어진 곳입니다.




SomersetHouse







코톨드 미술관(The Courtauld Gallery)은 약 530점의 회화와 26,000점 이상의 드로잉 및 판화를 소장하고 있습니다. 특히 인상주의 및 후기 인상파 작품으로 유명하고요. 이 컬렉션은 런던에서 가장 중요한 인상주의 및 후기 인상파 미술 소장품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에두아르 마네 ( Edouard Manet)의 대표작 중 하나인 <폴리베르제르의 바 A Bar at the Folies-Bergere>와 <풀밭 위의 점심식사 Dejeuner sur I'Herbe>의 여러 버전 중 하나가 소장되어 있습니다. <폴리베르제르의 바>는 19세기 후반 파리의 사회상을 담은 상징적인 작품으로, 복잡한 구도와 반사 표현으로 유명합니다.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의 <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 Self-Portrait with Bandaged Ear> 작품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Still Life with Plaster Cast by Paul Cezanne/ Getty images





특히, 영국에서 가장 중요한 세잔 작품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생트 빅투아르 산과 큰 소나무 Montagne Sainte-Victoire with a Large pine>, <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 The Card Players>< 아기 천사와 함께한 정물 Still Life with Cherub> 등 여덟 점의 주요 작품이 있습니다. 세잔은 인상주의와 입체주의를 잇는 교량적 역할을 한 화가로 평가받습니다.





오귀스트 르누아르( Auguste Renoir)의 < 라 로주( La Loge)>와 같은 작품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클로드 모네( Claude Monet)의 < 아르장퇴유의 가을 효과 Autumn Effect at Atgenteuil> 등 풍경화도 있고요. 에드가 드가( Edgar Degas)의 발레 장면을 묘사한 작품들과 <무대 위의 두 무용수 Two Dancers on a Stage>, < 창가의 여인 Woman at a Window> 등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폴 고갱의 <네버모어 (Nevermore>와 테 레리오아 Te Rerioa> 등의 작품을 포함합니다.




Young Woman Powdering Herself by Georges Seurat/wikimedia commons



조르주 쇠라 <Georges Seurat>의 <쿠르브부아의 다리 Bridge of Courbevoie>와 <분 바르는 젊은 여인 Young Woman Powdering Herself> 등 점묘법의 대표작들이 있습니다. 인상주의 및 후기 인상파 작품 외에도 시대의 걸작들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중세 및 초기 르네상스, old Master 회화, 토마스 갬비어-패리 컬렉션( Thomas Gambier-Parry Collection), 블룸즈버리 그룹의 작품도 있고요.




The Courtauld Gallery/Arthive






국제적으로 코톨드 미술 연구소는 미술사 연구, 보존, 큐레이팅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기관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연구소의 졸업생들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Metroploitan Museum of Art), 뉴욕 현대미술관( Museum of Modern Art), 내셔널 갤러리( National Gallery) 등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서 고위직을 맡는 등 미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어 '코톨드 마피아( Courtauld Mafia)'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오르세 미술관 ( Musee d'Orsay)이나 시카고 미술관 ( Art Institute of Chicago)처럼 광범위한 인상주의 컬렉션을 보유한 대형 미술관과 달리 , 코톨드 미술관은 인상주의 및 후기 인상파 작품에 특화된 소규모이지만 질적으로 뛰어난 컬렉션을 제공합니다. 이는 관람객이 작품과 더욱 친밀하게 교감할 수 있는 아늑하고 집중적인 몰입 경험을 선사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JWLK1ct78




오늘은 낭만주의 사조를 대표하는 외젠 들라크루아( Eugebe Dekacriux, 1798-1863)와 '현대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폴 세잔(Paul Cezanne, 1839-1906)의 작품을 살펴봅니다.







외젠 들라크루아( Eugene Delacroix, 1798-1863)는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미술을 대표하는 핵심 인물이자, 현대 미술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혁신적인 화가입니다. 그는 신고전주의의 엄격한 규범에서 벗어나 감정과 상상력, 자유로운 표현을 중시하며, 강렬한 색채와 역동적인 구도를 통해 인간 내면의 깊은 감정과 역사적 사건을 드라마틱하게 화폭에 담아냈습니다. 들라크루아는 단순히 당대의 흐름을 따른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하며 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Saint-Maurice Val-de- Marne/wikipedia



외젠 들라크루아는 1798년 프랑스 파리 근교 생모리스( Saint-Maurice, 파리 동쪽 발드마른 주)에서 상류 부르주아 가정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제1공화국 시절의 외교관이었으며, 어머니는 예술가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7살 때 부친을 잃고 16살에는 어머니마저 사망하여 고아가 된 그는 , 누나 집에서 지내며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고전 교육을 받았으며, 문학과 예술에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 시기의 문학적 소양은 평생 그의 작품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특히 셰익스피어(1564-1616), 괴테(1749-1832), 바이런(1788-1824) 등의 작품에 조예가 깊었습니다.





미술과 문화의 이해






들라크루아의 예술 교육은 1815년 신고전주의 화가 피에르 나르시스 게랭( Pierre-Narcisse Guerin, 1774-1833)의 화실에 들어가면서 시작되었습니다. 1816년에는 에콜 데 보자르( Ecole des Beaux-Arts)에 입학하여 전통적인 아카데미식 미술 교육을 받았지만, 그는 기존의 신고전주의 스타일에 한계를 느끼고 자신만의 새로운 표현 방식을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당시의 거장인 앵그르의 신고전주의적 완벽주의와 대조적으로, 루벤스와 베네치아 르네상스 화가들의 색채와 운동감에 영감을 받았습니다.



들라크루아는 열정에 열정적으로 사랑에 빠져있었으나,
열정을 표현하는 데에는 가능한 한 명료하고 냉정하게 결연했다.
- 보들레르-



그는 고전주의적 이상에 반대하며 예술적 자유와 개성을 강력하게 추구했습니다. 그의 예술관은 감정의 강렬함과 색채의 풍부함에 대한 믿음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그는 열정에 열정적으로 몰입하면서도, 그 열정을 가능한 한 명료하고 냉정하게 표현하려 했다는 보들레르의 평처럼, 감성과 이성의 조화를 추구했습니다.




들라크루아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자연을 구사하여 현실을 초월한 진실 속에 상상 세계에서의 인간의 모습과 , 영웅적인 모습이 되려고 노력하는 인간의 표상"을 담고자 했습니다. 그는 또한 예술에 대한 깊은 생각과 관찰을 일기, 평론, 편지 등에 많이 기록으로 남겼으며, 이는 그의 예술적 탐구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그는 신고전주의의 질서 정연한 구도와 완벽한 마무리에 대조되는 바로크적인 구성을 선호했습니다. 루벤스와 베네치아 르네상스 화가들처럼 외곽선의 명료성과 세밀한 형태보다는 색채와 운동에 집중하여 그림에 생동감을 불어넣었습니다. 그에게 색채는 그림의 가장 중요한 재료이자 포인트였습니다. 그는 강렬하고 풍부한 색조를 사용하고, 색의 광학적 효과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인상주의자들의 작업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따뜻한 색과 차가운 색의 대비를 통해 빛과 분위기를 극적으로 강조하며 감정을 전달하는 도구로 활용했습니다.






들라크루아의 작품은 전 세계 주요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특히 그의 마지막 거주지이자 작업실이었던 국립 외젠 들라크루아 박물관( Musee National Eugene DElacroix)은 그의 작품 세계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핵심적인 장소입니다. 이곳에는 약 1,300점의 회화, 드로잉, 판화, 원고 등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HLFxG1Mpvw



들라크루아에게 바치는 경의 ( Hommage a Delacroix) , 앙리 팡탱 라투르( Henri fantin latour) ,1864/위키백과







현대 미술의 아버지,
지각과 사유의 혁명가
-Paul Cezanne(1839-1906)-




폴 세잔(Paul Ceaznne, 1839-1906)은 19세기 후반 프랑스 후기 인상주의 화가로, '현대 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며 20세기 아방가르드 미술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자연을 순간의 인상으로 묘사하는 인상주의화풍에 한계를 느끼고, 보다 구조적이고 본질적인 표현을 추구했습니다. 세잔은 전통적인 회화의 규칙을 깨고 사물의 근본적인 구조와 예술의 형식적인 특성을 강조함으로써 회화의 근본적인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그의 예술적 탐구는 피카소와 브라크의 입체주의 ( Cubism) 뿐만 아니라 야수파, 추상미술에까지 영향을 미쳐, 많은 현대 미술가들이 그를 "우리 모두의 스승" 또는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폴 세잔(1839-1861)은 1839년 프랑스 남부 엑상프로방스에서 부유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루이 오귀스트 세잔은 세잔 & 카바솔 은행의 공동창업자였으며 이러한 배경 덕분에 세잔은 평생 경제적인 안정 속에서 예술 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 안 엘리자베스 오베르는 낭만적이고 명랑한 성격으로, 세잔의 예술적 비전 형성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세잔은 열 살 때 엑상프로방스의 성 요셉 학교에 입학했고, 1852년에는 콜레주 브르봉( 현재 콜레주 미녜)에 입학하여 소설가 에밀 졸라( Emile Zola, 1840-1902)와 바티스탱 바이유( Baptistin Baille, 1841-1918)를 만났습니다. 이 세 친구는 "분리될 수 없는 세 사람( les trois inseparables)"으로 불리며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학창 시절부터 편지를 주고받으며 예술에 대한 깊은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1857년부터는 엑스에 있는 자유 시립 드로잉 학교에서 스페인 신부 조제프 기베르로부터 미술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1858년부터 1861년까지 엑스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나, 미술 수업을 병행하며 점차 법학보다는 미술에 대한 열정이 커졌습니다.





Portrait of Emile Zola by Edouard Manet/Fine Art America





친구인 에밀 졸라(1840-1902)는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언론인입니다. 그는 인상주의 화가들과 친분을 맺고 그들의 작품을 옹호하며 미술 평론가로서도 활동했습니다. 에밀 졸라는 소설가로 유명해지기 전, 시인 보들레르(1821-1867)처럼 미술 평론가로 먼저 이름을 알렸습니다. 그는 프랑스 파리의 신문과 팸플릿에 미술 비평을 즐겨 썼습니다. 25세에서 30세 사이에 미술 비평에 대한 원칙과 방법론을 형성했고요. 졸라의 미술 비평 지식은 당대 최고의 지성들이 발표한 저술과 이론을 접하면서 축적되었고, 특히 카스타냐리와 프루동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졸라(1840-1902)는 마네(1832-1883), 세잔(1839-1906), 드가(1834-1917) , 모네(1840-1926) 등 인상주의자들과 친하게 지냈으며, 대중이 인상주의 회화를 수용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는 무명이었던 마네의 예술적 가치를 최초로 인정하고 지원해 주었습니다. 26세의 어린 나이에 고티에나 보들레르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마네의 미술 세계를 찬양하며 19세기 프랑스 미술 비평에 새로운 활력소를 제공했습니다.



졸라는 1866년 "예술의 순간 ( The Moment in Art)"이라는 글을 기고하여 현대 예술 작품은 개성의 표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 그는 1868년부터 "새로운 방식 ( une nouvelle maniere)"회화를 제안하는 젊은 화가들의 역량을 역설했습니다. 졸라의 미술 평론은 당시 새로운 미술 유파였으나 외면당하던 인상파 화가들에 대한 변론이자 옹호였습니다. 그는 인상파 화가들에 대한 투쟁적 옹호의 논리적 근거를 진리 탐구, 관용, 현대성에 두었습니다. 그는 특히 마네를 옹호하며, 비판받던 마네(1832-1883)가 언젠가 승리할 것이며 그의 영향이 지대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예술 작품은 기질을 통해 드러나는 창조의 한 모퉁이이다"
-에밀 졸라-





https://www.youtube.com/watch?v=HNYVwvUvAj0

<나의 위대한 친구, 세잔 Cezanne et Moi>, 다니엘르 톰슨 감독




1861년, 세잔은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술적 발전을 위해 파리로 떠났습니다. 파리에서 그는 아카데미 쉬스( Academie Suisse)에 다니며 카미유 피사로( Camille Pissarro, 1830-1903),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 오귀스트 르누아르( Auguste Renoir, 1841-1919)와 같은 인상파 화가들을 만났습니다. 특히 열 살 연상이었던 카미유 피사로는 세잔의 멘토이자 정신적 스승이 되어, 그의 괴팍한 성격을 품어주고 재능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어두운 색조에서 벗어나 밝은 색을 사용하도록 이끌었고요. 세잔은 피사로를 "우리는 모두 피사로의 가지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그를 존경했습니다.




Camille Pissarro/Simple Wikipedia







이 시기 세잔의 초기 작품들은 낭만주의와 사실주의의 영향을 받아 어두운 색채와 높은 검은색 비중, 격렬한 표현이 특징이었습니다. 1863년 나폴레옹 3세가 개최한 낙선전(Salon des Refuses)에 작품이 처음 전시되었으나, 공식적인 파리 살롱에서는 1864년부터 1869년까지 매년 거부당했습니다. 187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의 작품 테마는 주로 풍경화로 변했고, 피사로의 영향 아래 밝은 색채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1874년 제1회 인상파 전시회와 1877년 제3회 인상파 전시회에 참여했으나 , 점차 인상파의 순간적인 인상 포착 방식에 한계를 느끼고 본질적인 형태를 탐구하는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했습니다.




나는 무언가 단단하고 박물관 속 미술처럼
오래가는 인상(impressionism)을 만들고 싶다.
-Paul Cezanne-






1880년대 초반, 세잔의 가족은 프로방스 지방에 정착했고, 이 시기는 그의 예술적 "건설기"로 불립니다. 1886년 세잔은 오르탕스 피케와 결혼했으며, 같은 해 그의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아 경제적 제약 없이 예술 활동에 몰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절친한 친구였던 에밀 졸라와의 30년에 걸친 우정이 파국을 맞았습니다. 졸라의 소설 <작품 (L'oeuvre)>에 등장하는 재능 없는 화가 클로드가 자신을 모델로 했다고 오해한 세잔은 졸라에게 결별 선언했고, 다시는 만나지 않았습니다.



L'oeuvre/Bol.com






입체감은 색과 색 사이의 정확한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다.
각각의 색조가 조화를 이룰 때
화면에 입체감이 생기게 된다.
- Paul Ceanne-





1890년대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 세잔은 당뇨병을 앓게 되어 성격이 불안정해지고 인간관계가 꼬이면서 거의 은둔자처럼 지냈습니다. 개인적으로 최악의 시간이었으나 이 시기는 그의 예술적 최전성기로 , 우리가 익히 아는 걸작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는 고향 엑상 프로방스에서 주로 활동하며, 생트 빅투아르 산 연작, 사과 정물화,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 목욕하는 사람들 연작 등 대표작들을 완성했습니다. 그의 회화는 단순한 재현을 넘어, 시각적 현실을 해석하고 재구성하는 새로운 사고방식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형태, 색채, 구조에 대한 깊은 사유를 담아 회화를 '보이는 것'에서 '구성하는 것'으로 확장시킨 현대 미술의 출발점입니다.




알프레드 바 도표/스마트 K







The Barque of Dante,1822/Wikimedia Commons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의 1822년 작 <단테의 배 The Barque of Dante>는 프랑스 낭만주의 미술의 서막을 알리는 중요한 작품으로, 그의 첫 번째 주요 전시작이자 파리 살롱 데뷔작입니다. 이 대형 유화는 단테 알리기에리( Dante Alighieri, 1265-1321)의 14세기 서사시 < 신곡 The Divine Comedy> 중 <인페르노( Inferno)>제8곡에 묘사된 지옥의 장면을 극적으로 구현합니다. 이 작품은 당시 지배적이었던 신고전주의의 차분하고 이성적인 경향에서 벗어나 감정, 움직임, 주관적인 경험을 중시하는 낭만주의 시대로의 전환점을 상징합니다.





The Raft of The Medusa by Theodore Gericault,1819/Britannic




또한 이 작품은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 The Raft of The Medusa>(1819)과 함께 대규모 역사화에서 인간의 고통과 감정을 현실적이고 강렬하게 묘사하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메두사의 뗏목>은 1816년 7월 2일에 발생한 실제 사건을 재현한 그림입니다. 1816년, 왕실 해군 소속의 메두사호가 서아프리카 세네갈로 항해하던 중 풍랑을 만나 난파되었습니다.




The Raft of The Medusa by Theodore Gericault/ AengusArt



detail/The Argo Reader




당시 구명보트가 부족하여 승선자 149명은 뗏목에 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뗏목과 연결된 밧줄을 선장이 자신의 안전을 위해 끊고 도망쳐 뗏목은 표류하게 됩니다. 표류 이틀 만에 폭동이 일어났고, 사흘째에는 굶주림에 죽은 동료의 시체를 먹기까지 했다고 생존자들이 전했습니다. 12일 만에 아르고스 함대에 의해 발견되어 15명만이 극적으로 구조되었습니다.



제리코는 이 사건을 완벽하게 재현하기 위해 두 명의 생존자를 만나 실물과 같은 거대한 뗏목을 만들기도 하고, 죽은 사람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병원 시체실에서 시신을 연구하고, 심지어 절단된 머리나 신체 일부를 스튜디오에 가져와 관찰하며 스케치하기도 했습니다. 제리코의 친구이자 화가인 들라크루아가 모델이 되기도 했습니다.













<단테의 배>는 <신곡> 중 지옥편( Inferno)에서 단테가 시인 베르길리우스( Virgil)의 안내를 받아 스틱스 강( River styx)을 건너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스틱스 강은 분노의 죄를 지은 영혼들이 고통받는 지옥의 다섯 번째 원형을 상징하고요. 불타는 디스( Dis) 시의 배경은 지옥의 풍경을 더욱 암울하게 만듭니다.




단테는 그림의 중앙에 위치하며, 붉은 망토와 초록색 모자를 쓰고 공포와 불안에 압도된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그는 주변의 끔찍한 광경에 깊이 동요하여 망토를 얼굴에 바싹 대고 있고요. 이는 죄와 처벌에 직면한 인간 영혼의 취약성을 상징합니다. 들라크루아는 단테의 이러한 두려움과 사색을 통해 인간이 공포와 이성 사이에서 겪는 내적 갈등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detail/Rethinking The Future





단테 옆에 서 있는 베르길리우스(Virgil)는 차분하고 위엄 있는 태도를 유지하며 단테를 진정시킵니다. 그는 혼돈 속에서 이성과 지혜를 상징하며, 단테의 지옥 여행 동안 그의 보호자이자 도덕적 나침반 역할을 합니다. 베르길리우스의 사각형 형태는 안정감과 평온함을 나타내며, 흰색 머리 장식은 그의 지혜와 용기를 강조합니다.





detao;/Rethinking The Future





플레기아스( Phlegyas)는 배를 능숙하게 조종하는 근육질의 뱃사공으로 묘사됩니다. 그의 얼굴은 가려져 있지만 뒤태만으로도, 이 지옥 같은 강을 헤쳐나가는 데 필요한 엄청난 노력을 보여줍니다. 그는 단순히 뱃사공이 아니라 지옥의 동력원이자 이 암울한 풍경 속에서 자연의 힘을 구현하는 존재입니다.






detail/wikipedia
detail/wikipedia



강물은 벌거벗은 채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는 영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들은 필사적으로 배에 매달리거나, 허우적거리며, 얼굴에는 공포와 간절함이 가득합니다. 들라크루아는 이들의 몸에 물방울이 맺힌 모습을 네 가지의 섞이지 않는 색소(흰색, 노란색, 녹색, 붉은색)를 사용하여 사실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이는 루벤스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며 색채학적 실험의 중요한 출발점이었습니다. 여성 인물도 저주받은 영혼들 사이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는 고통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이들의 일그러진 얼굴과 뒤틀린 몸은 분노의 죄가 가져오는 고통과 절망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detail/Rethinking The Future




들라크루아는 <단테의 배>에서 신고전주의 전통에서 벗어나는 혁신적인 시각적 및 기법적 특징을 선보였습니다. 그림은 배가 기울어진 강한 대각선 구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운 움직임을 전달합니다. 물속의 인물들은 혼란스러워 보이면서도 의도적으로 배열되어 있으며, 서로 맞물리는 삼각형과 곡선은 작품의 전반적인 역동성을 더합니다. 이러한 구도는 관람자의 시선을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여 지옥의 여정을 따라가게 합니다.





들라크루아는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여 극적인 분위기를 고조시켰습니다. 특히 불타는 도시의 붉은색과 강물에 비치는 어둡고 탁한 초록색의 대비는 시각적 긴장감을 조성합니다. 명암 대비( chiaroscuro)는 인물들을 극적으로 부각하고, 고뇌하는 표정과 근육의 형태를 더욱 강조하여 장면의 감정적 무게를 더합니다. 그는 색채를 단순한 묘사를 넘어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분위기를 조성하는 수단으로 활용했습니다. 그의 색채 활용, 과감한 붓질, 빛과 그림자의 극적인 사용은 이후 인상주의( Impressionism)와 상징주의 ( Symbolism)를 비롯한 여러 후대 예술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The Basket of Apples,1895/wikipedia






폴 세잔( Paul Cezanne, m1839-1906)의 <사과 바구니 The Basket of Apples>(1895)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단순한 정물화를 넘어, 시각적 인식의 본질과 회화적 표현의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재정의한 작품입니다. 그는 전통적인 선형 원근법을 의도적으로 파괴하고 다중 시점, 기하학적 형태의 단순화, 그리고 색채를 통한 형태 구축이라는 혁신적인 기법을 사용했습니다. 대상의 피상적인 모습을 넘어 그 본질적 구조와 공간적 관계를 탐구했고요. 이러한 세잔의 접근 방식은 후대 파블로 피카소(1881-1973)와 조르주 브라크(1882-1963)의 입체파, 앙리 마티스(1869-1954)의 야수파 등 20세기 주요 현대 미술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현재 미국 시카고의 시카고 아트 인스튜트( Art Institute of Chicago) 헬렌 버치 바틀렛 기념 컬렉션( Helen Birch BartlettMemorial Collection)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작품 크기는 약 65cm* 80cm(26*31인치)로 기록되어 있으며, 왼쪽 하단에 "P. Cezanne"이라는 서명이 있습니다. 이 그림은 세잔의 예술적 성숙기를 대표하며, 후기 인상주의 (Post-Impressionism) 시기에 속합니다.






세잔이 전통적인 회화의 규칙, 특히 원근법에 도전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조형 언어를 구축하던 시기에 완성되었습니다. 세잔은 근대 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며 , 그의 작품은 메를로 퐁티(1908-1961), 질 들뢰즈(1925-1995)와 같은 당대의 사상가들에게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습니다. 메이어 샤피로(1904-1996), 클레멘트 그린버그(1909-1994) 같은 평론가들에 의해 미술사에서 그의 확고한 가치가 확인되었고요. 생전에는 말년을 제외하고 작품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1895년 파리의 미술상 앙브루아즈 볼라르( Ambroise Vollard,1866-1939)의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이 열리면서 대중에게 그의 작품이 재평가되는 중요한 기회를 가졌습니다. 이 전시는 세잔이 고향 프로방스에서 은둔하며 작업한 지 거의 20년 만에 그의 작품을 대중에게 선보이는 자리였습니다.




사과처럼 가만히 있으라.
- 폴 세잔-




이 작품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분리된 원근법( disjionted perspective)입니다. 세잔은 단일한 시점에서 공간의 환영을 만드는 르네상스 이후의 전통적인 선형 원근법( linear perspective)을 거부했습니다. 대신 그는 움직이는 시각(sight in motion)을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시점에서 사물들을 바라보고 재구성했습니다.







그림 속 테이블은 직각이 없는 불가능한 형태를 이루며 기울어져 있습니다. 이는 의도적으로 불안정한 느낌을 주며, 관람자가 하나의 고정된 시점에서 벗어나도록 유도합니다. 테이블의 좌우 지지대 높이가 다르고, 상판의 색상과 수평이 일치하지 않는 것도 이러한 의도를 반영합니다.







사과가 담긴 바구니도 앞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마치 병과 테이블보의 주름에 의해 제자리에 고정된 것처럼 보이고요. 접시 위의 쿠키들은 측면에서 본모습과 위에서 본모습이 동시에 나타납니다. 이러한 다시점( multiple perspectives)은 인간의 시각 인식이 고정된 한 지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복잡하다는 세잔의 인식을 반영합니다.




작품은 불균형한 부분들(기울어진 병, 경사진 바구니, 축약된 쿠키의 선)이 테이블보의 선과 어우러져 전체적으로는 균형 잡힌 구성을 이룬다고 평가받습니다. 이는 세잔이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는 대신 조화로운 구도를 창조하려 했음을 보여줍니다.





세잔은 생생한 색채와 분석적인 붓질을 사용하여 창의 적인 구성을 만들어냈습니다. 사과의 빨강, 주황, 노랑, 초록 등 다양한 색조가 풍부한 질감과 볼륨감을 선사합니다. 색을 사용하여 형태를 구축하고, 색상 값을 통해 사물에 입체감을 부여했습니다.




Art in Context




세잔은 두꺼운 붓질(heavy brushstrokes)을 사용하여 실제보다 더 큰 밀도감을 부여했습니다. 이 붓질은 촉각적이고 눈에 보이며, 사물의 형태와 질감을 표현하는 데 기여합니다. 사과 표면의 윤기 나 병에 비치는 빛의 느낌은 이러한 붓질과 색의 조합으로 표현됩니다.




세잔은 빛과 그림자를 직접적으로 사용하기보다는 색의 미묘한 농담 변화를 통해 형태를 조형적으로 드러냈습니다. 이는 그의 '구성적 붓질 constructive brushstrokes'시스템으로 발전하여, 색채만으로 형태를 구축하고 왜곡된 원근 공간을 창조하는 방식의 정점을 보여줍니다.



Art in Context




세잔은 대상을 원통, 구, 원뿔과 같은 기하학적 형태로 환원하여 자연의 본질적인 구조를 탐구했습니다. 작품 속 사과, 병, 바구니의 형태는 기하학적으로 단순화되어 있으며, 이는 구성 전체에 구조적 일관성을 부여합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대상의 피상적인 모습이 아닌 본질을 포착하려는 세잔의 목표를 보여줍니다.




빛은 그림에서 명암 대비를 만드는 요소라기보다, 색채와 결합하여 공간의 깊이와 물체의 존재감을 동시에 전달하는 역할을 합니다. 어두운 부분과 밝은 부분의 색조 변화가 형태를 구성하는 핵심입니다.<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Jean-Baptiste-Simeon Chardin)작품과 비교해 보세요.>





Basket of Grapes by Jean-Baptiste-Simeon Chardin/ MeisterDruck








The Massacre at Chios, 1824/ Smarthistory




BBC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의 <키오스의 학살 The Massacre at Chios>(1824) 작품입니다. 1822년 그리스 독립 전쟁 중 오스만 제국에 의해 자행된 잔혹한 사건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대형 유화는 당시 지배적이던 신고전주의의 미적 기준에서 벗어나 감정의 격렬함과 극적인 서사를 통해 인간의 고통과 절망을 표현했습니다. 작품의 높이 419cm, 너비 354c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로, 현재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키오스의 학살>은 1822년 4월, 그리스 키오스 섬에서 발생한 학살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15세기말부터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던 그리스는 19세기 초 프랑스혁명의 영향으로 민족주의와 독립 의식이 고취되며 독립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1821년 3월 그리스의 여러 지역에서 독립군이 봉기했고, 1822년 1월에는 그리스 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이에 오스만 제국은 독립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무자비한 보복에 나섰고, 키오스 섬은 그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The Massacre at Chios/ Flickr





키오스 섬 주민들은 독립 전쟁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기를 꺼렸습니다. 1822년 3월 사모스 섬의 혁명가들이 키오스에 상륙하여 오스만 군대에 대한 공격을 주도하면서 상황이 악화되었습니다. 술탄 마흐무드 2세는 이에 격분하여 7,000명의 병력과 함께 함대를 파견하여 섬을 파괴하고 주민들을 말살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1822년 4월 13일 성금요일부터 시작된 오스만 군의 진압 작전은 수개월간 이어졌습니다. 대규모 학살, 고문, 강간, 약탈이 자행되었고요. 당시 키오스 섬의 12만 명 이상의 주민 중 약 9만 명이 사망하거나 노예로 끌려가고, 단 2,000명만이 살아남았다고 추정됩니다. 이 참상은 유럽 전역에 충격을 주었으며, 그리스 독립을 지지하는 필헬레니즘 운동( 그리스 문화에 대한 지속적인 찬사와 존경을 나타내는 개념)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들라크루아는 <키오스의 학살>(1824)을 의뢰받아 그린 작품이 아니라, 이 비극적인 사건에 대한 개인적인 공감과 인도주의적인 분노에서 자발적으로 제작했습니다. 그는 1821년 9월부터 오스만-그리스 전쟁을 주제로 그림을 그릴 생각을 했습니다. 1823년 5월에 키오스 학살을 그리기로 결심했고요. 당시 유럽 언론을 통해 키오스 학살에 대한 상세한 보도가 이어지면서 들라크루아는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관객들의 동정과 정치적 지지를 이끌어내어 그리스 독립 투쟁에 힘을 실어주고자 했습니다.



The Massacre at Chios,1824/wikipedia



<키오스의 학살>은 혼돈과 절망으로 가득 찬 장면을 파편화된 구성으로 보여줍니다. 그림의 전경에는 희생자들의 고통받는 군상이 거의 평면적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중심부에 영웅적인 인물이 부재하다는 점이 특징이고요. 대신 들라크루아는 희생자들을 두 개의 피라미드 형태로 묶어 배치함으로써 고통과 무력감을 강조했습니다. 왼쪽 피라미드에는 체념한 모습의 인물들이, 오른쪽 피라미드에는 말에 묶여 몸부림치는 여성과 말을 타고 폭력을 휘두르는 오스만 병사가 역동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두 그룹 사이의 열린 공간은 오히려 더 큰 황량함과 비극성을 드러냅니다.





작품 속 인물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학살의 참혹함을 보여주며, 인간 본연의 고통과 감정을 대변합니다. 전경에는 고통받는 그리스인 남성, 여성, 아이들이 다양한 상태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죽어가는 남성은 허리 부위를 부여잡고 쓰러져 있고, 그 옆에는 아내가 절망적으로 기댄 채 어깨를 잡고 있습니다. 죽은 어머니의 젖가슴을 파고드는 아기는 순수함과 무고한 생명의 상실을 상징하며, 가장 가슴 아픈 장면 중 하나로 꼽힙니다. 노인들은 체념과 좌절에 빠져 있으며, 그들의 공허한 시선은 희망 없는 현실을 반영합니다. 이들의 표정과 몸짓은 공포, 슬픔, 분노, 절망 등 혼란스러운 감정을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Head of a woman detail/wikipedia







오스만 병사들은 희생자들과 대조적으로 강인하고 무표정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말을 타고 그리스 여성을 강탈하는 병사의 모습은 정복자의 잔인함과 무자비함을 상징합니다. 이들의 활기찬 묘사는 희생자들의 비참한 모습과 대비를 이루며, 일부 비평가들로부터 들라크루아가 가해자들에게 동정심을 표현하려 했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배경이 되어주는 불타는 마을과 연기로 자욱한 황량한 풍경은 학살로 인한 파괴와 절망감을 고조시킵니다. 이 멀리 떨어진 배경은 전경의 비극을 더욱 극적으로 만들고요.





야만적
회화의 학살( massacre of Painting)
- 화가 앙투안- 장 그로 ( Antoine-Jean Gros)-

예술 운동의 열병과 간질 ( fever and epilepsy)을 구현한 작품이다.
- 앵그르-





Louvre site des collections





들라크루아는 어둡고 흙빛이 강한 색조를 주로 사용하여 비극적이고 암울한 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동시에 인물들의 의복에는 밝은 색채를 사용하여 극적인 효과를 강조했고요. 빛과 그림자의 복잡한 상호작용은 역사적 사건의 무게감을 전달합니다. 인물들의 고통스러운 표정과 뒤틀린 자세를 부각하고요.





들라크루아의 붓터치는 자유롭고 역동적이며 생동감이 넘칩니다. 이는 당시 학문적인 정밀함을 추구하던 신고전주의와는 확연히 다른 접근 방식이었습니다. 그의 느슨하고 표현적인 붓질은 화면에 즉각적인 활력과 움직임을 드러냈습니다. 현장의 혼란과 인물들의 강렬한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했고요. 이러한 기법은 표면적인 아름다움보다는 감정적인 진실을 포착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작품의 논쟁에도 불구하고 6,000프랑에 이 그림을 구매하여 뤽상부르미술관에 전시했고, 이는 들라크루아가 혁신적인 예술가로서 주목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그림은 그리스의 독립 투쟁에 대한 유럽인들의 관심을 환기시키고 국제적인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sJWoXTg6c4








The Card Players, 1890-1895/wikipedia







폴 세잔( Paul Cezanne, 1839-1906)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 '(프랑스어: Les Joueurs de cartes, 영어: The Card Players ) 작품입니다. 1890년대 초 세잔의 만년기에 그려진 유화 연작으로, 후기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그의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이 연작은 총 다섯 점의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각 크기, 등장인물의 수, 게임이 진행되는 배경이 다양합니다. 단순한 일상 풍경을 넘어 인간 내면의 집중과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세잔의 깊은 사유와 예술적 실험 정신이 담겨 있는 작품입니다. 세잔은 이 연작을 통해 20세기 현대 미술의 토대를 마련한 '현대 미술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각 작품은 두 사람을 그린 버전과 여러 사람이 있는 버전이 존재합니다. 세잔은 이 연작을 준비하기 위해 수많은 드로잉과 습작을 제작했습니다. 이 작품들은 비평가들에 의해 세잔의 1890년대 초중반 시기 예술의 초석이자, 그가 가장 찬사를 받은 작품들을 그린 말년 시기의 "전주곡"으로 여겨집니다. 각 그림은 파이프를 물고 카드놀이에 몰두하는 프로방스 농부들을 묘사합니다. 모든 남성들은 카드놀이하는 동안 시선을 아래로 향하고 눈앞의 게임에만 열중하는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CNN




세잔은 19세기 후기 인상파 운동의 일원으로서, 특히 형식적 단순화 측면에서 20세기 많은 아방가르드 운동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그의 회화에 대한 혁신적인 접근 방식을 입체파, 야수파, 추상 표현주의와 같은 현대 미술 운동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세잔은 인상주의의 감각적 실험을 넘어, 입체주의와 현대미술의 출발점이 되는 화풍을 구축했습니다.




The Card Players by Le Nain brothers, 1640-45/wikimedia commons




세잔은 고향 엑상프로방스로 돌아온 1890년대 초, 오랜 타향살이의 상처를 뒤로하고 아버지의 영지에서 다시 붓을 들었습니다. 고된 노동을 마친 농장 일꾼들이 카드놀이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장면은 그에게 평범한 일상이 아닌, 인간의 내면과 관계, 시간의 흐름을 담아낼 수 있는 무대였습니다. 그는 이 장면을 단순한 재현이 아닌, 기억에 남는 형태로 승화시키고자 했습니다. 특히 엑상프로방스 박물관에 걸려 있던 르 낭 형제( Le Nain brothers)의 카드놀이 그림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르 낭 형제는 17세기 바로크 시대의 작가들로, 상인과 노동자들의 생동감 있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포착하는 데 인기가 많았습니다.





세잔의 작품 모델은 현지 농장 노동자들이었습니다. 일부는 세잔 가문의 영지인 자 드 부팡( Jas de Bouffan)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는 농촌 노동자의 침묵과 품위를 그려냈으며, 이들에게 위풍당당한 존재감을 부여했습니다. 당시 프랑스 농민 사회는 산업화와 도시화 속에서도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유지하며 소박한 여가를 즐겼는데 카드놀이는 이러한 농민과 노동자들의 대표적인 여가 활동이었습니다. 세잔은 17세기 풍속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술집의 난폭하고 술 취한 도박꾼들 대신, 더 단순화된 환경에서 무표정하고 엄숙한 농민들을 묘사했습니다. 이는 극적인 순간을 강조했던 이전 풍속화와 달리 , 드라마, 서사, 전통적인 인물 묘사가 부족하다는 점에서 차별화됩니다. 두 명 버전에서 등장하는 와인 병을 제외하고는 17세기 풍속화의 주요 요소였던 술과 돈이 없습니다.






세잔은 전통적인 원근법을 벗어나 독창적인 공간 구성을 실험했습니다.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에서 테이블은 평면이 아닌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으며, 이는 입체적인 공간감을 연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테이블의 원근선은 깊이를 설정하고 공간 배열을 구조화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겹치는 관점은 플레이어의 적절한 표현과 데이블 전체에서의 상호 작용에 기여하고요. 관객은 장면을 오른쪽에서 약간 각진 시점으로 가까운 거리에서 관찰하는 것처럼 묘사됩니다. 왼쪽 플레이어는 완전하게 그려져 우리에게 더 가까이 있는 듯한 인상을 주고요. 맞은편 파트너는 등뒤가 일부 잘려 있는 비대칭적인 구도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다시점(multiple perspectives)과 형태의 왜곡은 이후 브라크와 피카소의 입체주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wikimedia commons




세잔은 색채를 사용할 때 "억제된 듯하면서도 속이는 듯한 (절제된 기만)"방식을 사용했습니다. 단단한 형태와 그 구조를 표현하기 위해 얇게 칠한 "프라이밍"색상을 명암 변화 부분에 사용했고, 그림에 생기를 불어넣기 위해 라일락색과 녹색을 사용했습니다. 아래쪽 절반의 식탁보에는 밝고 깊은 색상이 활용되었습니다. 작품 전반에 걸쳐 따뜻한 색상과 차가운 색상을 모두 사용하여 균형 잡힌 색상 구성표를 보여줍니다. 붓놀림은 페인트가 두껍게 적용된 영역과 함께 캔버스에서 만져볼 수 있는 질감을 만들어냅니다. 붓놀림은 자발성을 나타내며 일부는 짧고 고르지 않은 반면 다른 일부는 더 길고 균일하며 부드럽습니다. 이러한 붓질은 인물, 테이블, 커튼 모자, 파이프, 의자와 같은 현실 세계의 인식 가능한 물체를 묘사합니다.






5인버전(반스재단)/ The Card Players(4명)/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The Card Players, The Courtauld Institute of Art, London






세잔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 연작은 총 다섯 점이지만, 마지막 세 작품은 구도와 플레이어 수 ( 두 명)가 동일하여 때로는 하나의 버전의로 묶기도 합니다. 가장 왼쪽이 5인 버전 (반스 재단 소장 ) 작품입니다. 크기는 134.6*180.3cm입니다. 세 명의 카드 플레이어가 테이블에 반원형으로 앉아 있고, 그 뒤에 두 명의 구경꾼이 있습니다. 그림의 오른쪽 뒤에는 시선을 아래로 향하며 게임을 응시하는 소년이 있습니다. 그림 왼쪽 뒤에는 벽에 등을 기댄 채 파이프를 피우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듯한 남자가 서 있습니다.





Barnes Foundation




세잔이 서 있는 남자를 추가한 것은 그림에 깊이를 더 하고 시선을 캔버스의 위쪽으로 유도하기 위함이라고 추측됩니다. 이 작품은 헐렁한 옷을 입고 자연스러운 자세로 게임에 완전히 몰두한 농부들을 차분하게 묘사합니다. 작가 니콜라스 워들리( Nicholas Wadley)는 색상, 명암, 모자 모양, 옷 주름의 변화와 같은 요소들이 대립을 통해 갈등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대립 속의 긴장"이라고 묘사했습니다. 다른 이들은 이 연작에서 드러나는 "소외감"이 이 버전에서 가장 두드러진다고 설명했고요. 현재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의 반스 재단 박물관이 소유하고 있습니다.




New York CityThe Met/Alamy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4인 버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작품입니다. 크기는 65.4*81.9cm이고요. 반스 재단 버전의 절반도 안 되는 크기입니다. 소년은 없지만 구도는 거의 동일하게 유지되며, 관람자의 시점은 카드 게임에 약간 더 가까워지고 인물들 사이의 공간은 줄어들었습니다.



첫 버전에서는 가운데 플레이어와 소년이 모자를 쓰지 않았지만, 이 버전에서는 모든 남자가 모자를 쓰고 있습니다. 왼쪽의 꽃병 선반과 벽 중앙에 있던 그림 액자도 사라지고, 네 개의 파이프와 걸려 있는 천만이 카드놀이하는 사람들 뒤에 남아 있습니다. 이 그림은 첫 버전에 비해 파란색 톤에 덜 집중하며 더 밝습니다. 엑스선 및 적외선 연구에서 흑연 밑그림 층과 두꺼운 유화 물감 층을 확인했는데, 이는 이 버전이 두 번째 버전이 아니라 세잔의 가장 큰 두 번에 대한 예비작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또한 분석가들은 이 밑그림을 통해, 세잔이 습작에서 개별적으로 그린 남자들을 하나의 캔버스에 옮기는 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Musee d'Orsay, France





세 버전 중 아마도 가장 잘 알려져 있고 가장 자주 복제되는 것은 오르세 미술관에 있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47.5*57cm로 가장 작습니다, 미술사학자 마이어 샤피로( Meyer Schapiro)는 오르세 그림이 모든 버전들 중 "가장 기념비적이면서도 가장 세련된 "작품이라고 하며, 형태는 더 단순하지만 관계성에서 더 다양하다고 언급합니다. 가장 공간이 넓은 이 작품은 일반적으로 '카드놀이하는 사람들'연작의 마지막 작품으로 간주됩니다.





이 오르세 버전은 1961년 8월 엑스에서 열린 순회 전시회에서 세잔의 그림 여덟 점이 도난당하는 대규모 도난 사건 때 함께 도난당했습니다. 도난당한 작품 중 가장 가치 있는 '카드놀이하는 사람들'의 손실을 인정하는 의미에서, 프랑스 정부는 4색의 기념우표를 발행하기도 했습니다. 모든 그림은 몇 달 후 몸값이 지불된 후 회수되었습니다




London The Courtauld Gallery/Alamy







다른 두 명의 플레이어가 등장하는 버전은 런던의 코톨드 미술 연구소( Courtauld Institute of Art)와 개인 소장품에 있습니다. 코톨드 미술 연구소 소장품은 60*73cm, 개인 소장품은 97*130cm입니다. 코톨드 미술 연구소( Courtauld Institute of Art)는 런던 대학교 소속의 자치 대학으로, 미술사 연구를 전문으로 하는 영국의 주요 기관 중 하나입니다. 이 연구소는 영국에서 가장 큰 미술사학자와 보존학자 커뮤니티의 본거지이며, 미술사 교육, 연구, 감상을 위한 국제적으로 유명한 중심지 역할을 합니다.




Man with a Pipe , The Courtauld/ Courtauld institute of Art




세잔은 '카드놀이하는 사람들' 연작을 위해 상당한 수의 습작과 예비 드로잉을 제작했습니다. 그가 가장 큰 그림부터 시작하여 점차 작은 크기로 작업했다고 오랫동안 믿어져 왔지만, 21세기 그림의 엑스선 촬영과 예비 스케치 및 습작에 대한 추가 분석을 통해, 일부 학자들은 세잔이 습작과 작은 버전을 모두 사용하여 더 큰 캔버스를 제작했다고 추정합니다. 세잔은 최종 그림들을 준비하기 위해 현지 농장 노동자들에 대한 12점 이상의 초기 스케치와 채색 습작을 제작했습니다. 그의 모델들은 완성된 작품 자체보다는 습작을 위해 자세를 취했으며, 화가가 엑스 카페에서 예비 작업을 스케치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일부 습작들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작품으로 높이 평가받습니다. 특히 런던의 코톨드 갤러리에서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과 함께 전시되어 있는 <파이프를 문 남자>가 그런 작품입니다. 이 습작은 , 같은 시기에 제작된 흡연자 그림 두 점과 함께 세잔의 가장 뛰어난 걸작으로 손꼽힙니다.









The Deatn of Sardanapalus/wikimedia commons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의 <사루다나팔루스의 죽음 La Mort de Sardanapale>(1827) 작품입니다. 혼란과 폭력, 이국적인 관능미가 충돌하는 극적인 장면을 묘사합니다. 이 거대한 유화는 당대의 신랄한 비판과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점차 예술사에서 낭만주의 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이자 들라크루아의 걸작으로 인정받게 되었고요,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은 아시리아의 전설적인 마지막 왕 사르다나팔루스에 대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합니다. 이 서사는 그리스 역사가 디오도르스 시켈루스( Diodorus Siculus)의 기록에서 유래했습니다. 사르다나팔루스가 그의 왕국인 니네베가 적들에게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수치스러운 패배를 피하기 위해 모든 귀중품과 사람들을 파괴하기로 결정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애첩들, 환관들, 노예들, 심지어 말과 개들까지 살해하고, 모든 보물과 함께 거대한 장례용 화장대 위에서 자신을 불태우도록 명령했습니다.




image.png The Byron Society of America




들라크루아의 그림은 특히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로드 바이런의 1821년 희곡 '사르다나팔루스( Sardanapalus)'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바이런의 희곡은 고대 아시리아 왕의 호화로운 삶과 비극적인 죽음을 극화했습니다. 들라크루아는 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상상력을 더해 더욱 파괴적인 장면을 창조했고요. 그러나 들라크루아는 바이런의 텍스트를 정확히 따르기보다는, 자신의 예술적 비전과 상상력을 통해 원본 이야기보다 더 많은 시체를 추가하고 더욱 혼란스러운 상황을 연출하며 비극의 규모를 확장했습니다. 이 그림은 바이런의 희곡뿐만 아니라, 고대 역사적 기록과 여러 문헌적 원천들을 복합적으로 참고하여 제작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들라크루아가 29세였던 1827년에 제작되었습니다. 당시 그는 고전주의 전통에 도전하는 낭만주의 운동의 선두 주자로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스타일을 확립하고 있었습니다. 들라크루아는 감정, 개인주의, 이국주의 , 드라마틱한 강렬함을 중시하는 낭만주의의 핵심 이상을 그림에 구현했습니다. 당시 프랑스 복고 왕정 시기의 정치적 위기 속에서, 이 그림은 왕실 권위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담고 있었습니다. 사르다나팔루스의 퇴폐적이고 무능한 통치자의 모습은 당시 논란이 되었던 샤를 10세의 왕권과 연결되어 해석되기도 했습니다.








그림의 주요 초점은 호화로운 붉은색 천으로 덮인 거대한 침대에 있습니다. 침대 위에는 흰색 망토의 금빛 왕관을 쓰고 풍성한 수염을 가진 사르다나팔루스 왕이 비스듬히 누워 있습니다. 주변에서 벌어지는 학살을 무관심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고요. 그의 발치에는 죽은 여인이 널브러져 있고, 여섯 명의 여인들이 옷이 벗겨진 채 다양한 죽음의 고통 속에서 그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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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라크루아는 의도적으로 비대칭적이고 혼란스러운 구도를 사용하여, 역동적인 대각선과 구불구불한 곡선으로 격렬하고 동적인 에너지를 표현했습니다. 그림의 중앙에는 격렬한 살육이 펼쳐지며, 칼로 찔리는 사람들, 스스로 상처를 입는 남자, 그리고 화려하게 장식된 말이 살해당할 위기에 처한 모습 등이 묘사되었습니다. 곳곳에 값비싼 장신구와 보물들이 흩어져 있어 왕의 사치를 보여주고요. 이러한 세부 묘사는 그림의 전체적인 충격을 약화시키지 않으면서도, 화려한 세계의 파괴를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그는 풍부하고 따뜻한 색채를 사용하여 낭만주의적 표현을 극대화했습니다. 특히 왕의 침대에 드리워진 강렬한 붉은색과 반짝이는 금색은 그림을 지배하며, 부드러운 살색과 대조를 이룹니다. 들라크루아는 색채의 강렬함을 통해 감정적인 반응을 유도했습니다. 노란색과 보라색, 파란색과 주황색, 붉은색과 초록색 같은 보색 대비를 과학적으로 계산하여 사용했고요.




이 작품은 '비네트 Vignette'스타일로 구도가 잡혔는데, 이는 그림의 중앙 부분에 빛과 가장 밝은 색채를 집중시키고 가장자리로 갈수록 덜 선명하고 어둡게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이 기법은 보는 이의 시선을 혼란스러운 장면의 핵심으로 이끌며, 중심부의 살육 장면을 강조합니다. 심지어 왕 자신도 그림의 한편에 어둠 속에 살짝 가려져 있어, 주변의 혼돈 속에서도 무심한 '아웃사이더'같은 느낌을 줍니다.




/Kuadros






유화로 그려진 작품으로, 원작의 크기는 높이 3.92m, 폭 4.96c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입니다. 들라크루아는 느슨하고 표현적인 붓터치( painterly brushstorke)를 사용하여 작품에 강한 움직임과 혼돈을 부여했습니다. 동시에, 그는 세밀한 부분에는 정교하고 정확한 붓 터치를 사용하여 질감과 장식을 섬세하게 표현했습니다.





이 작품은 낭만주의 운동의 중요한 특징인 강렬한 감정, 이국적인 주제, 그리고 개인의 상상력을 보여줍니다. 작품이 그려진 1827년, 그는 아직 동양을 직접 방문하기 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인의 눈높이에서 '신비로운 동양'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국적인 요소들을 그림에 담았습니다. 이 그림은 프랑스 식민주의 프로젝트와 관련하여 '오리엔탈리즘 (Orientalism)'에 대한 프랑스적 개념, 즉 동양의 잔인함과 나태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동양을 '타자화'하고 서구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당시의 인식을 반영합니다.








Liberty Leading the People, 1830/ wikipedia



"나라를 위해 싸우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나라를 위해 그림을 그릴 것이다"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1789년 프랑스혁명이 아닌, 1830년의 7월 혁명 ( 프랑스어: Les Trois Glorieuses, 즉 '영광스러운 3일 '>을 기념하는 작품입니다. 1830년 7월 27일부터 29일까지 사흘간 파리에서 발생한 이 혁명은 부르봉 왕가의 샤를 10세 국왕( 재위 1824-1830)의 전제적인 통치에 대항하여 시민들이 봉기한 사건입니다. 샤를 10세는 1814년 헌장의 정신을 무시하고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며 의회를 해산하는 등 보수적인 정책을 추진하여 국민들의 불만을 고조시켰습니다. 이러한 억악접인 조치들, 특히 7월 칙령( July Ordinances)의 발표는 파리 시민들의 폭력적인 시위와 봉기로 이어졌고, 결국 샤를 10세는 왕위에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shorts/OELrb_JpJ0c


프랑스 부르봉 왕가 가계도/Reddit







혁명 이후 샤를 10세는 퇴위하고 영국으로 망명했습니다. 그의 사촌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 1세( Louis-Philippe I)가 '시민왕'으로 즉위하여 입헌 군주정인 7월 왕정( July Monarchy)이 수립되었습니다. 이로써 프랑스의 통치권은 부르봉 가문에서 오를레앙 가문으로 이행되었으며, 세습권의 원칙이 민중 주권의 원칙으로 대체되는 중요한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그림의 중앙에는 자유의 여신이 반라의 여성 인물로 묘사되어 혁명가들을 이끌고 있습니다. 이 여성은 프랑스 공화국과 프랑스 자체를 상징하는 마리안( Marianne)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는 한 손에는 프랑스혁명의 삼색기( tricolour)를 높이 들고 다른 손에는 총검이 달린 머스킷총을 들고 있습니다. 발가벗져진 가슴과 맨발은 자유의 원초적인 힘과 대담한 투쟁 정신을 상징합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 예술에서 여신들을 묘사하던 방식과 유사하여 민주주의의 탄생을 나타내고요. 또한 그녀가 쓰고 있는 프리지아 모자( Phrygian cap)는 1789년 프랑스혁명 이래 자유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해방된 노예들이 착용하던 고대 로마의 전통에서 유래했고요.



Medium






자유의 여신을 따르는 군중은 프랑스 사회의 다양한 계층을 대표합니다. 여기에는 부르주아 계급의 남성 (실크 해트 착용), 도시 노동자(작업복 착용), 그리고 피스톨을 든 어린 소년(학생으로 추정, Gavroche 캐릭터의 영감)등이 포함됩니다. 이처럼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인물들이 함께 싸우는 모습은 혁명이 특정 계급만이 아닌 "모든 사람을 위한 혁명"임을 강조하며, 자유를 향한 단합된 의지를 보여줍니다. 전경에 널브러진 시신들은 혁명의 비극적인 대가를 상기시키며, 전투의 혼란과 희생을 여과 없이 드러냅니다.






들라크루아는 역동적인 구성과 드라마틱한 색채를 사용하여 작품의 감정적 강렬함을 극대화했습니다. 그는 혼란스러운 장면 속에서도 피라미드 형태의 안정적인 구도를 사용하여 자유의 여신을 정점으로 끌어올립니다. 그림의 색채는 주로 어두운 갈색과 회색 톤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프랑스 삼색기의 밝은 빨강, 흰색, 파랑이 대비되어 강한 시각적 효과를 만들어냅니다. 특히 삼색기는 혁명과 민주주의의 상징으로서 두드러지게 표현되고요. 배경에는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이 희미하게 보입니다. 그 탑 위에도 삼색기가 휘날려 혁명의 현장이 전경의 시신들을 비추며, 장면의 감정적 깊이를 더하고 혼돈 속에서 희망을 제시합니다.




Liberty leading the People, 1830/Center for Art Law







1831년 파리 살롱에서 처음, <바리케이드의 장면들 Scenes from the Barricades>이라는 제목으로 전시되었을 때, 이 그림은 혁명적인 메시지로 인해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3,000프랑에 그림을 구입하여 뤽상부르 궁전의 왕좌실에 전시할 계획이었으나, 그 '선동적인 정치적 메시지'때문에 1832년 6월 봉기 이후 대중에게서 철거되었습니다. 루이 필리프 왕정의 억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 작품은 몇 년간 보관되다가 들라크루아에게 반환되었고요.





1848년 제2 공화국이 수립된 후, 이 그림은 잠시 전시되었습니다. 이후 1855년 살롱에서도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요. 마침내 1874년 , 새로 수립된 제3공화국에 의해 파리 루브르 박물관의 소장품으로 정식 인수 되었고, 이후 루브르의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자리 잡았습니다.



Returns to the Louvre After a Breathtaking Restoration/Smithsonian Magazine






그림은 오랜 세월 동안 여러 겹의 노란색 바니시와 먼지로 인해 원래의 색채를 잃었습니다. 2013년 9월, 루브르 박물관은 그림의 보존과 복원을 위해 작품을 전시에서 철거했습니다. X선, 자외선, 적외선 분석을 통해 여러 겹의 바니시 아래 숨겨진 원래의 생생한 색채와 디테일이 발견되었고요. 특히 자유의 여신이 입은 드레스의 색깔이 원래는 연한 회색에 금색이 가미된 것이었으나, 1949년 복원 과정에서 노란색으로 변질되었음이 밝혀졌습니다. 또한 그림의 하단에는 오랫동안 포장석과 섞여 보이지 않던 닳은 부츠 한 켤레가 발견되었고요. 2024년 4월, 6개월간의 복원 작업을 거쳐 그림은 원래의 빛나는 색채와 디테일을 되찾고 루브르 박물관에 다시 전시되었습니다.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전시된 두상부/위키백과


레 미저러블, 가브로슈(Gavroche)/wikipedia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다양한 예술 작품과 정치적 상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그림은 빅토르 위고의 1862년 소설 '레 미제라블'의 주인공 한 명인 가브로슈( Gavroche) 캐릭터의 영감이 되었다고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프레데리크 외귀스트 바르톨디의'세계를 밝히는 자유의 여신상(뉴욕 자유의 여신상)' 에도 영향을 주었고요. 이 여신상은 들라크루아의 그림이 그려진 지 반세기 후에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선물되었습니다.








Bathers, 1898-1906/National Gallery London






폴 세잔(1839-1906)의 <목욕하는 사람들 (Les Grandes Baigneuses)(1894-1905)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세잔 생애 마지막 10년간 그가 몰두했던 세 점의 대형 '목욕하는 사람들 '그림 중 하나로, 그의 오랜 예술적 탐구의 정점을 이룹니다. 캔버스에 유채로 그려진 이 작품은 높이 127.2cm, 폭 196.1cm에 달하며, 현재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나무가 우거진 숲 속 공터에서 앉거나, 서 있거나, 기대어 있는 나체 여인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흰 천을 들고 있거나 부분적으로 걸치고 있습니다. 세잔은 인물들을 사실적으로 그리지 않고 단순화하여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존재감만큼은 강렬합니다. 그들의 몸은 따뜻한 황갈색-오렌지색과 푸른색으로 모델링 되어 있습니다. 푸른색으로 강하게 윤곽이 그려져 입체적인 형태와 실루엣의 패턴이 두드러지고요. 얼굴은 마스크처럼 세부 묘사가 거의 없이 개성이 배제된 풍경의 일부처럼 보입니다. 작품의 일부 인물들은 등지고 있고, 일부는 관람객을 향하고 있지만, 얼굴에는 거의 세부 묘사가 없습니다. 그림 왼쪽 가장자리에 있는 여성은 중앙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것처럼 보이고요. 오른쪽 가장자리에서 걸어오는 훨씬 작은 인물과 균형을 이룹니다. 이 작은 인물의 크기는 다른 인물들보다 멀리 떨어져 있음을 시사하며, 머리를 숙인 그녀의 희미한 몸은 짙푸른 나뭇잎 사이에서 돋보입니다.





The Large Bathers(Les grandes baigneuses)/ Barnes Foudation





여성들 뒤편, 그림 중앙에는 옅은 구름 아래로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습니다. 구름 위 하늘은 짙은 푸른색입니다. 그림 제목과 달리 물속에서 목욕하는 모습은 명확하게 묘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림의 따뜻한 전경은 오렌지색, 밝은 갈색, 노란색의 작은 붓놀림으로 이루어져 있고요. 이 색상은 여성들의 몸에 가까워질수록 약간 더 어두워집니다. 중앙의 작은 삼각형 영역에는 짙은 푸른색으로 그려진 작고 희미한 개의 굽은 형상이 있습니다.





여성들은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강한 대각선을 이루는 견고한 나무줄기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는 일부 인물들에 의해 반복되고, 왼쪽으로 기울어진 다른 인물들에 의해 균형을 이루며 그림에 견고한 구조를 부여합니다. 작품은 중앙을 비워둔 채 나무와 인물을 배치하여 긴장감을 조성하는 거대한 삼각형 구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 독특한 삼각형 구도는 그림 전체의 조화와 안정감을 형성하는 데 기여합니다.





세잔은 1880년경부터 이른바 '구성적 붓놀림( constructive stroke)'을 개발하여, 그림 전체에 걸쳐 균일하고 방향성 있는 붓놀림으로 물감을 칠했습니다. 이러한 기법은 입체적인 형태를 만들어내는 동시에, 구도 전체의 표면을 통일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세잔은 물감을 칠하는 대신 그림을 '구성'하는 것처럼 신중하고 체계적인 붓놀림으로 색소를 캔버스에 적용했습니다.





세잔은 인물 형상을 원통, 구, 원뿔과 같은 기본 기하학적 형태로 단순화하여 사물의 본질적인 구조를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전통적이거나 사실주의를 넘어 형태와 색채가 동등한 회화적 무게를 갖도록 했습니다. 색채와 형태의 병열 배치는 빛이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림 내부에서 발산되는 것처럼 보이게 하여 새로운 시각을 창조했습니다. 세잔은 모델을 직접 사용하여 누드를 그리는 것을 불편해했기 때문에, 루브르 박물관 방문 시 스케치했던 자료나 조각 연구를 바탕으로 상상력을 동원하여 이러한 장면들을 만들어냈습니다.




<'목욕하는 사람들> 시리즈는 세잔이 인상주의의 덧없는 측면과 포비즘, 입체주의, 표현주의, 그리고 심지어 완전한 추상화와 같은 더욱 물질주의적인 예술 운동 사이를 연결하는 가장 강력하고 본질적인 고리를 형성합니다. 세잔은 그림이 주로 시각적 인식을 반영한다는 인상주의자들의 주장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예술 행위를 새로운 종류의 분석적 규율로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의 접근 방식은 형태를 색채로부터 해방시켜 새로운 주관적 회화적 실재를 창조했으며, 이는 20세기 미술의 새로운 세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 마티스의 '수영하는 사람들'>




Les Demoiselles d'Avignon/wikipedia




https://www.youtube.com/watch?v=wUzF0e9JNIw









Women of Algiers in their Apartment, 1834/wikipedia






셔벗과 과일로도 진정시킬 수 없는 열병" 같은 경험
- 외젠 들라크루아-





외젠 들라크루아(1789-1863)의 <알제리 여인들 Women of Algiers in their Apartment> (1834) 작품입니다. 오리엔탈리즘 회화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되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들라크루아가 1832년 북아프리카 여행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습니다. 당시 유럽 사회에 동양의 신비롭고 이국적인 환상을 전달하는 데 크게 기여했고요. 동시에 서구의 제국주의적 시선과 욕망, 그리고 동양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현대적 해석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LNB Associates





<알제리 여인들>은 캔버스에 유화로 그려졌습니다. 현재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요. 박물관의 영구 소장품 중 하나로 전시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1834년 파리 살롱에 처음 전시되었을 때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평가가 엇갈렸습니다. 미술 비평가 구스타브 플랑슈( Gustave Plance)는 이 작품이 "회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신선하고 활기차며 대담하고 베네치아적이지만, 회화의 거장들에게 뒤지지 않는다"라고 평했습니다. 루이 필리프( Louis Philippe) 국왕이 1834년 이 작품을 구매하여 룩셈부르크 박물관에 기증했습니다. 이후 1874년 루브르 박물관으로 이전되어 현재까지 소장되어 있고요. 들라크루아는 이 작품 외에도 1847년에서 1849년 사이에 두 번째 버전을 제작했는데, 이 두 번째 버전은 프랑스 몽펠리에의 파브르 미술관( Musee Fabre)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들라크루아는 1832년 1월부터 6개월간 모로코와 알제리를 여행했으며, 이 경험은 그의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프랑스 국왕 루이 필리프의 특사 샤를 드 모르네( Charles de Mornay) 백작의 외교 사절단에 수행 화가로 합류하여, 당시 프랑스령 식민지였던 알제리와 긴장 관계에 있던 모로코 술탄과의 조약 협상을 시각적으로 기록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이 여행에서 들라크루아는 수많은 스케치북과 수채화를 통해 이국적인 풍경, 사람들, 의상, 그리고 지중해 지역의 빛과 분위기를 기록했습니다.




shuttlestock



특히 알제리에서 그는 이슬람 가정의 하렘(여성들의 사적인 공간)에 접근할 수 있는 드문 기회를 얻었는데, 이는 당시 서양 남성에게는 금지된 영역이었습니다. 이 짧은 방문 동안 들라크루아는 여성의 모습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는 이때 그린 두 개의 작은 스케치와 수채화 습작을 바탕으로 <알제리 여인들>을 완성했습니다. 이러한 직접적인 경험은 작품에 현실적인 세부 묘사를 더했지만, 동시에 유럽인의 상상력과 환상이 뒤섞인 오리엔탈리즘적 시선도 반영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19세기 유럽에 만연했던 오리엔탈리즘( Orientalism)이라는 광범위한 문화적 현상 속에 위치합니다. 오리엔탈리즘은 유럽이 동양( 특히 북아프리카, 근동)을 신비롭고, 매혹적이며 , 이국적인 대상으로 상상하고 묘사하는 방식입니다. 이는 유럽의 제국주의적 시선과 경제적, 군사적 이익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동양을 서구와 대조되는 '타자'로 규정하는 데 사용되었고요. 하렘 그림은 이러한 오리엔탈리즘 장르의 핵심 중 하나로, 남성 화가들이 실제 하렘에 접근할 수 없었기에 소문이나 상상, 혹은 매춘부 방문에 의존하여 오리엔트의 환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냈습니다. 들라크루아의 작품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동양 여성에 대한 서구인의 호기심과 환상을 자극하며, 당시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 시각적 서사를 제공했습니다.





The Women of Algiers(detail)/www.wga.hu




이 작품은 구성, 색채, 빛, 인물 배치, 공간 표현 등 여러 시각적 요소를 통해 복합적인 의미를 전달합니다. 작품의 중앙에는 화려한 의상과 장신구를 착용한 세 명의 알제리 여인이 느긋한 자세로 앉아 있습니다. 이 여성들은 현실적이면서도 감각적으로 묘사되어 하렘의 내밀한 공간과 여성들의 일상적인 모습을 드러냅니다. 여성들은 붉은색, 금색, 초록색, 푸른색 등 풍부하고 대담한 색채의 화려하고 헐렁한 의상과 정교한 장신구를 착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복식은 동양의 신비로움과 유혹을 나타내며, 이국적인 부와 사회적 지위를 상징합니다. 특히 늘어진 듯한 옷과 드러난 목선은 유럽인의 오리엔탈적 환상에 부합하는 은근한 에로티시즘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The Metropolitant Museum of Art



여성들은 서로를 마주 보거나 멍한 듯한 시선을 던지며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입니다. 왼쪽의 여성은 정면을 응시하며 사적인 공간에 대한 침범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는 듯 도전적인 시선을 던집니다. 이러한 표정은 감각적이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신비와 내면의 침묵을 암시하며, 관객에게 이국적 세계의 정서를 깊이 느끼게 합니다. 이들의 나른하고 수동적인 자세는 당시 유럽 남성들의 여성에 대한 이상화된 욕망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Google Arts& Culture






그림의 오른쪽에는 등을 보인 채 커튼을 걷고 있는 흑인 하인 여성이 등장합니다. 그녀의 시선은 앉아있는 여성들을 향하고 있으며, 이러한 배치는 이국적인 분위기를 더하는 동시에 식민주의 시대의 사회적, 인종적 위계를 암시합니다. 비평가들은 이 하인 인물을 "구성적 장치(compositional foil)"로 보며, 들라크루아의 문화적 거리가 오히려 다양한 타자성을 포용하게 했다고 분석하기도 합니다.





작품의 구도는 실내 공간을 밀폐적이면서도 편안하게 연출하여 하렘의 사적인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합니다. 실내공간인 하렘은 화려하게 장식된 공간으로, 페르시아 양탄자와 직조 태피스트리, 쿠션 등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배경의 정교한 장식, 카펫, 쿠션, 벽의 문양 등은 이국적인 분위기를 강조하며 관객의 시선을 작품 내부로 깊숙이 끌어들입니다. 공간은 비좁고 밀집된 느낌을 주며, 이는 북아프리카 주거 공간의 건축적 제약을 반영합니다.




detail/smarthistory



작품 속에 등장하는 물담배(narghile pipe)와 향로 ( charcoal burner)는 여유로운 삶과 관능적인 몽상을 암시하는 상징물입니다. 이는 현실과 환상, 욕망과 몽상 사이의 경계를 흐리게 만들며, 동양의 세계를 꿈처럼 표현하는 효과를 냅니다. 당시 유럽인들에게 물담배는 아편 흡연과 연관되어 퇴폐적인 환상을 더했습니다. 또한 금색 액자 거울은 시선을 여성들에게 유도하는 역할을 하며, 화면의 구성을 더욱 복잡하게 만듭니다.



<알제리 여인들>(1834)은 19세기 낭만주의 회화를 넘어 20세기 현대 미술에 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르누아르, 세잔, 피카소 그리고 알제리 예술가 후리아 니아티의 작품입니다.)





Pierre-Auguste Renoir, Parisiennes in Algerian Costume, 1872/wikipedia




모든 이 찬란한 색채...
마치 목구멍으로 쏟아지는 와인처럼
눈으로 들어와 즉시 취하게 만드는 것 같다"
- Paul Cezanne, 들라크루아 작품에 대하여-




The Women of Algiers by Pable Picasso,1955/wikipedia



알제리 예술가 후리아 니아티(Houria Niati)/Universes in Universe




https://www.youtube.com/watch?v=lcaNYS1q4SY









Mont Sainte-Victoire, 1905/ Smarthistory




폴 세잔(1839-1906)의 <생트 빅투아르 Mont Sainte-Victoire >(1905년경) 작품입니다. <생트 빅투아르 산 > 연작은 그의 예술 경력에서 가장 중요하고 혁신적인 부분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특히 1905년경의 작품들은 후기 인상주의에서 현대 추상 미술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전환점을 보여줍니다. 이 시기 작품들은 세잔이 평생에 걸쳐 자연의 본질적 구조를 탐구하고 회화의 새로운 언어를 구축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의 정수를 담고 있습니다.






Maontagne Sainte-Victoire/Denise M Taylor


La Maontagne Sainte-Victoire/Mairie d'Aix




폴 세잔의 <생트 빅투아르 산> 연작은 그의 고향인 프랑스 남부 엑상프로방스( Aix-en-Provence) 근처에 위치한 실제 산인 몽타뉴 생트 빅투아르( Maontagne Sainte-Victoire)를 주제로 합니다. 세잔은 이 산을 1870년대부터 사망하는 1906년까지 약 80점 이상의 유화와 수채화로 그렸습니다. 이는 그의 예술적 탐구와 발전 과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군입니다. 1905년경의 작품들은 세잔의 말년 시기(약 1895-1906)에 해당합니다. 이때 그는 에크스 북쪽에 있는 레 로브( les Lauves) 언덕의 작업실에서 이 산을 바라보며 대 부분의 작품들을 완성했습니다. 이 시기 작품들은 색채의 포화도가 높아지고, 구성이 덜 안정적이며, 두꺼운 붓놀림에 따라 형태가 더 작은 부분들로 명확하게 나뉘는 특징을 보입니다.




La Maontagne Sainte-Victoire, 1895/wikiArt.org





세잔은 1878년 4월 14일 친구 에밀 졸라에게 아르크 강 계곡 다리를 건너는 기차에서 본 생트 빅투아르 산을 "아름다운 모티브( beau motif)"라고 극찬했습니다. 실제로 이 연작의 여러 작품에서 아르크 강 계곡을 가로지르는 철도 다리가 화면의 오른쪽 중앙 부근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산은 고대부터 중요한 지리적, 문화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기원전 102년 로마 장군 카이우스 마리우스( Caius Marius)가 침략자들을 물리친 이후 '빅투아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후에 '성스러운 빅투아르'(Saint-Victoire)로 기독교화되었고요. 세잔에게 이 산은 단순한 아름다운 풍경을 넘어 자연의 웅장함과 영속성을 구현하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는 이 산의 새로운 의미와 특징을 발견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그렸습니다.




1905년경 <생트 빅투아르 산> 작품은 세잔의 예술적 탐구가 절정에 달한 시기의 특징들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과거의 사실적 재현을 넘어선 분석적이고 건축적인 구성, 과감한 색채 사용, 그리고 독특한 붓놀림이 특징입니다. 구성 (composition)적인 면에서, 1905년작에서는 산이 극적인 옆모습으로 자주 나타납니다. 주변 평야 위에 우뚝 솟아 있고요. 이 평야는 농가, 나무, 밭 등으로 이루어진 패치워크처럼 펼쳐져 있습니다.(전통적인 원근법으로 그려진 작품과 비교해 보세요.)





Nicolas Poussin, Landscape with Saint John on patmos,1640/The Art Institute of Chicago




세잔은 전통적인 원근법을 따르기보다는 , 다양한 시점에서 본 형태들을 한 화면에 담으려는 실험적인 구성을 시도했습니다. 그는 캔버스 내에서 공간을 평면화하면서도 색채와 톤을 통해 깊이감을 유지했습니다. 이 시기 작품들은 이미지의 단순화를 더욱 극단적으로 보여주며, 자연의 형태가 기하학적 엄격함을 통해 관찰되면서도 대기의 빛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여전합니다. 일부 작품에서는 화면 오른쪽의 시야를 넓히고 전경을 확장하기 위해 캔버스를 덧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구성은 질서와 평온함을 지니고 있지만, 세잔에 의해 강요되었다는 느낌을 주지 않으며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룹니다.




La Maontagne Sainte-Victoire/Khan Academy



detail/Khan Academy



세잔은 1905년경 작품에서 더욱 채도가 높은 색채를 사용했습니다. 강렬한 색채의 분리된 조각들로 형태를 구축했고요. 그의 색은 주로 흙색조로 구성되었지만, 파란색과 녹색의 터치는 캔버스에 생동감을 불어넣었습니다. 산과 하늘을 묘사하는 데 동일한 범위의 푸른색을 사용함으로써, 산과 하늘의 경계가 모호해지며 자연의 기본적인 요소들이 응집되는 효과를 주었습니다. 따뜻한 색조는 전경을, 시원한 색조는 산과 하늘을 덮어 대기 원근감을 형성하며, 산과 주변 풍경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 섬세하게 포착했습니다. 세잔은 빛을 외부에서 비추는 것이 아니라, 색채의 병렬적 배치와 조화를 통해 화면 내부에서 발산되는 것처럼 재해석했습니다.





세잔은 인상주의가 주장하는 실제 세계의 충실한 재현에서 벗어나, 대상에 대한 신중한 분석을 통해 풍경을 화면 구성 연습을 위한 소재로 변모시켰습니다. 그는 인상주의의 '순간적인 인상'을 '견고하고 영구적인 무엇'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목표는 사물의 본질적인 구조와 예술적 형식적 특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나타났습니다. 복잡한 화면을 만들기 위해 색면과 작은 붓놀림을 사용하여 학문적 예술의 전통적인 규칙을 변화시켰습니다.




1905년경 <생트 빅투아르 산> 작품은 세잔의 후기 양식을 대표합니다. 후기 인상주의 (Post-Impressionism)의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할 뿐만, 아니라, 20세기 현대 미술, 특히 입체주의 ( Cubism)와 추상 미술(Abstraction)의 전조로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입체파 화가 브라크의 작품입니다.)





Georges Braque <Viaduct at L'Estaque,1908



유영국(1916-2002)<산>/Vogue Korea






시간과 명상이 우리의 시야를 변화시킨다....
결국 우리는 이해를 얻는다
-Paul Cezanne-




https://www.youtube.com/watch?v=KJuYXFHvRaY






https://www.youtube.com/watch?v=UvhDumWnO8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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