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융프라우에 일행들과 함께 문명의 힘을 빌어 올라간 적이 있습니다. 가는 곳마다 중국 관광객이 한 트럭씩 내리 던 때라 독특한 억양과 시끄러움 때문에 좀 불편하긴 했지만 말입니다. 첨단 기술로 뚫어 놓은 얼음 동굴, 지루하지 않게 전시물들 배치해 놓아 눈이 호강했던 시간이었습니다. 파노라마 입체 영상관을 지나 산 정상에 다다랐을 때 7월 땡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소복한 눈이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날씨가 맑아 얼마나 다행히 던지요.
설산 앞에 마주한 제 자신이 작은 점 같더군요. 별 볼일 없는 이 점 하나가 작은 점이라도 찍고 가겠다고 그 앞에서 설치는 것 같아 가소롭기도 하고요. 언젠가는 없어질 점 하나가 묵묵히 몇 천년을 버티고 있는 저 설산에게 한 수 배워 내려가야 하는 것 아닌 가 싶기도 했고요. 똑같은 눈일 텐데 이곳에 내린 눈은 왠지 금 값으로 보입니다.
추운 것 딱 질색입니다. 하지만 눈은 엄청 좋아합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스위스 국기 주변으로 올망졸망 모여 있습니다. 세계의 낯선 이들이 스위스 국기 앞에 무장해제를 하고 사진 찍기 바쁩니다. 생전에 다시 올라 올 일 없겠다 싶어 큰맘 먹고 저도 몇 장 찍었습니다. 살다가 헛헛할 때 가끔 꺼내 볼까 해서 말입니다.
오늘은 19세기 풍경화가 였던 독일의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er David Friedrich)와 영국의 존 커스터블(John Constable)에 대해 살펴볼 까 합니다. 지리 시간도 아닌 데 지도를 자꾸 삽입하는 이유는 화가들이 살았던 시대와 지정학적 위치를 알면 미술사의 흐름이나 화가의 스타일을 이해하기 훨씬 수월하기 때문이죠. 헛갈리지 않고 기억에도 오래 남고요.
그림(왼)독일 발트 해안의 항구도시 그라이프스발트(Greifswald)/iSrock그림(오) 영국 서퍽주/wikipedia
https://www.youtube.com/watch?v=v1vq0EaPRY8
유럽의 역사를 바꾼 커다란 사건 3가지를 꼽자면 종교개혁, 프랑스혁명, 그리고 산업혁명이죠. 나폴레옹의 죽음 이후 유럽의 군주들은 빈 회의(1815)를 열고 나폴레옹 이전의 시대로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혁명의 맛을 알아버린 시민들은 계몽주의로 무장한 채 더 이상 옛 시대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았고요. 결국 나폴레옹 이전 시대로 건너갈 수 없게 됩니다.
유럽지도를 펴시면 제법 넓은 면적의 독일 땅이 보일 실 겁니다. 중심에 해당하는 독일은 9개 나라와 국경선을 맞대고 있습니다. 유럽의 제후들 역시 독일이 통일이 되어 주변국들을 위협할 까 항상 노심초사했고요. 한쪽이 너무 커지면 힘의 균형이 깨지기 때문에 주변국들에 의해 독일은 통일하지 못하고 다시 쪼개어집니다. 35개의 공국과 4개의 대도시로 말입니다.
19세기 초 정치, 사회적 상황은 독일에 병적인 좌절감과 어둠움을 안깁니다. 그 불똥은 튀어 엉뚱하게 예술과 문학에서 낭만주의 사조를 만들어 내고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처럼 실연했다고 자살한다거나, 음악에서 슈베르트가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 <겨울 나그네>처럼 다소 감정 과잉스럽게 흘러갑니다.
그림(왼) <안개바다위의 방랑자>,1818/WahooArt 그림(오)<건초수레>,1821/Pinterest
<작업실의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1819
그림(왼),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eiedrich)의 작품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입니다. 뒷모습을 한 채 고독한 듯, 대담한 자세로 한 남자가 신성한 자연 앞에 홀로 섰습니다. 산 정상을 올라가 본 경험이 있으신 분들은 이 기분 아실까요? 작아진 존재감과 압도당한 느낌 말입니다. 결연한 결심을 한 듯도 보이고요.
이 그림이 주목받는 이유는 그때까지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사람의 뒷모습을 그린점입니다. 대자연에 압도되며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을 뒷모습만으로도 충분히 보는 이에게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거대하고 신비로운 자연 앞에 선 작은 인간의 모습은 보는 이에게 경건함마저 일으킵니다. 후세의 많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준 작품입니다.
그는 1774년 독일 발트 해안의 항구 도시인 그라이프스발트(Greifswald)에서 10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납니다. 그의 아버지는 양초와 비누를 만드는 수공업자였고요. 그는 7살 때 어머니가 천연두에 걸려 세상을 떠납니다. 다음 해에 누이 엘리자베스가 떠나고요. 가장 안타까운 점은 13살 때 호수에서 얼음이 깨져 자신을 구하려던 동생 요한 크리스토퍼가 익사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아야 했던 점입니다.
우연찮게 제가 오늘 본 instagram 영상에서 깨진 얼음 사이로 허우적거리는 자신의 개를 견주가 얼음을 깨고 구해내는 해피엔딩으로 끝난 영상이었습니다. 부르르 떠는 몸을 주변 지인들이 옷가지를 벗어 따뜻하게 녹여 주는 장면과 구해냈다는 안도감이 주는 기쁨이 내 일처럼 가슴을 쓸어내리게 했습니다. 그런 결말과 반대로 프리드리히는 사는 동안 극심한 갈등 속에서 살아왔을 것 같습니다. 가슴을 쓸어내릴 겨를 도 없이 또 다른 누이 마리아 마저 발진 티푸스로 사망하게 됩니다.
늘 그의 주변에 이렇게 죽음이 따라다녔습니다. 아픈 시간은 그를 평생 우울증, 대인기피증, 자살 충동에 사로잡히게 했고요. 죽음 앞에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가 돼 곤 합니다. 프리드리히는 가족들의 죽음을 통해 너무 일찍 그 비밀을 알아버리게 됩니다. 자연스레 그의 작품세계는 고독, 우울함, 그리고 경건함까지 뒤섞입니다. 이러한 복합적인 감정은 마주하는 대자연을 범접할 수 없는 신의 모습으로 신비스럽고 숭고한 모습으로 종교에 가깝게 표현됩니다.
화가는 자기 앞에 있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 내면에서 본 것도 그려야 한다.
내면에서
아무것도 볼 수 없다면
앞에 있는 것도 그리지 말아야 한다.
당시 낭만주의는 격렬하게 부는 태풍, 암울하고 산이 많은 풍경, 영원히 길을 잃은 것 같아 보이는 숲 등 자연을 가장 드라마틱한 모습으로 그려냅니다. 이 풍경들은 극도로 음울하고 고독한 장소들이죠. 또한 절대자를 향한 저항할 수 없는 비이성적 탐구심이 이끌려 정처 없이 온몸이 녹초가 될 때까지 방랑하는 장소들이기도 하고요.
프리드리히는 세속적인 성공을 뒤로하고 독일 전역을 여행합니다. 자연의 원형으로 잘 갖춘 바다나 험준한 산 같은 곳으로 말입니다. 자연의 광활함에 절로 경외감이 드는 광경을 말입니다.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케르스팅이 그린 <작업실의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1819>라는 작품 보이시죠. 기도실처럼 아무것도 없는 방에서 경건한 자세로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지형을 자세하게 스케치를 한 다음 작업실에 들어와 서로 다른 현장 있는 요소들을 취합해 완전히 새로운 경치를 만들어 냅니다. 프리드리히가 그려 낸 풍경은 실제 하는 곳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림(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한 말입니다.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 현장에서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 다시 한번 언급해 유명해진 말이기도 하지요. 영국 풍경화가 존 커스터블(John Constable,1776-1837)의 작품을 보면 자연스럽게 떠올려지는 말이기도 합니다.
영국 토박이입니다. 한 지역에 오래 머문 토박이들은 그 지역의 특징과 풍물에 대해서 잘 알고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죠. 그들은 외지인들이 잘 찾아내기 힘든 그 지역만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잘 알고 있고요. 또 그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해 노력합니다. 컨스터블이 바로 그런 화가입니다.
상상 속의 풍경은
결코 실제의 풍경에
근거한 작품을
따라갈 수 없다
영국 남동부지역인 서퍽(Suffolk)의 이스트 버골토(East Bergholt) 출신입니다. 플랫포드 제분소(Flatford Mill)와 에섹스(Essex)에 데덤 제분소(Dedham Mill)를 소유한 부유한 옥수수 상인 골딩(Golding)과 앤 니 와츠( Ann nee Watts)의 둘째 아들이고요. 그가 태어난 영국 남동부 지역은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이 특징입니다. 1년 365일 동안 같은 날씨를 찾기 힘들다고 해요. 덕분에 다양한 날씨 변화를 경험할 수 있는 지역입니다.
그의 가족들은 컨스터블이 아버지의 가업을 물려받기를 희망했습니다. 컨스터블은 7년 동안 아버지를 도와 옥수수 사업에 종사했습니다. 그의 나이 23세가 되던 해인 1799년 , 아무리 생각해도 이 길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아니다 싶었나 봅니다. 예술가로서의 경력을 쌓을 수 있도록 아버지를 설득합니다. 그는 왕립 아카데미 부설학교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실물 그리기를 공부했습니다. 고전 작품에 익숙해져 갔고 훈련을 마친 후 그레이트 말로 사관학교 (Great Malow Military School)의 미술 교사 자리를 제안받지만 거절합니다. 안정이 보장된 자리 대신 전문 풍경화가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당시 영국은 역사화를 제일 으뜸으로 손꼽았고 인물화, 정물화, 그리고 맨 꼴찌가 풍경화 위치였습니다.
그림(오), 컨스터블의 대표작 중 하나인 , <건초수레>입니다. 영국 BBC방송에서 영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1위 풍경이라고 해요. 그것도 해마다 상위권 순위를 놓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산업혁명이 일찍 시작되어 영국의 농촌은 빠른 속도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제 가고 싶어도 돌아갈 할머니 집 같은 그림 속 풍경을 가진 영국 농촌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영국인들이 좋아하는 이유인 것 같고요.
로열 아카데미 전시 당시 원래 제목이 <풍경, 정오(NOON)였습니다. 영국의 여름 시골 풍경을 그린 이 그림에서 느낄 수 있는 정서는 조용하고 충만함입니다. 어떤 수식이나 화려한 꾸밈없이 화장 안 한 여인네 얼굴처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려냅니다. 애정 어린 시선이 없다면 이 그림은 그저 그런 평범한 그림들 중 하나로 보일 겁니다. 뭔가 쨍한 것도 없어 포인트 없는 민무늬 상하의를 입은 느낌이고요.
배경은 영국의 서포크 지방 스투어 강변의 한 평범한 농가 마을 데덤입니다. 그가 나서 자란 곳이죠. 무성하게 우거진 초록빛 배경에 대기와 빛이 변화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원경에서는 농부들이 목초지에서 건초를 베어내고 있습니다. 전경 얕은 물가를 지나가는 마차가 바로 목초지로 향하는 길이고요. 마차 위 소년은 강아지를 부르고 있네요. 조각배를 탄 낚시꾼이 일어서서 습지를 낚싯대로 드리우고 있고요. 지붕과 굴뚝, 그리고 마차 마구의 붉은색이 초록과 보색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컨스터블이 활동하 던 시대는 빅토리아 여왕시대입니다. 경제적으로 빠르게 발전하는 나라였지만 사 회전 테적으로 보수적이었죠. 그래서 라파엘 이전 시대로, 즉 200년 뒤로 후퇴하는 그림 스타일이 유행을 하게 됩니다. 라파엘 전파라고 부릅니다. 이런 그림들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역사도, 신화도 아닌 시골 풍경이 당시 영국인들의 눈에 심드렁하게 보였던 모양입니다. 컨스터블은 영국에서 평생 단 20점의 그림만을 팔았어요. 오히려 프랑스에서 단 몇 년 만에 20점도 넘는 작품이 팔리고요.
<건초수레>는 후일 영국계 프랑스인 딜러가 구매해 1824년 파리 살롱에 전시했습니다. 당시로선 이례적인 크기(130*185cm)의 풍경화였죠. 영국 왕립 아카데미 전시에서 첫선을 보였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너무 흔하게 볼 수 있는 영국의 시골 풍경이라 생각했던 거죠. 샤를 10세 프랑스 국왕이 주는 금메달을 수상하며 그림의 값어치가 상승하게 됩니다.
농촌의 이런 사실적인 세부 묘사와 색채 처리는 밀레의 바르비종파에 영향을 줍니다. 또한 붓질의 자유스러움, 표현의 생동감, 특히 자연에 나가 직접 유화로 스케치하는 방법은 프랑스의 젊은 미술학도들의 관심을 끌기 충분했죠. 광선과 바람의 효과, 이슬이 맺힌 아침 풍경 등 과학적 관찰에 의한 자연의 신선함을 현장에서 포착하려는 태도로 인해 그는 인상주의의 직접적인 선구자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영국 풍경화가인 터너와 함께 그의 풍경화는 보물 전쟁(1870-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간 전쟁)을 피해 영국에 머무르던 모네, 피사로, 시슬리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쳐 프랑스 인상주의의 탄생을 도왔습니다. 그리하여 프랑스는 이때부터 세계 미술사의 주도권을 완전히 쥐게 됩니다. 19세기 초 영국의 풍경화는 프랑스보다 훨씬 발전한 상황이었는데도 말이죠.
그림(왼)테첸 제단화<산속의 십자가>,1807-1808그림(오)<백마>/myunghwamall.com
그림(왼), 프리드리히의 작품은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줍니다. 위 작품은 전통적인 종교화의 상징들을 대체하려는 노력으로 그린 그림이라고 합니다. 보헤미아 지역을 여행하고 그린 그림이고요. 푸른 전나무나 담쟁이들은 그의 영적 감수성을 더 풍부하게 하는 소재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의 글에 따르면, 산은 믿음, 나무는 희망, 석양의 빛은 그리스도 이전의 세계의 종말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프리드리히는 풍경화가 종교적인 계시의 전달 수단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 작품은 이러한 그의 생각이 잘 반영된 그림인 거죠. 이 작품의 주제는 그가 여러 번 사용한 주제이기도 합니다.
화가들에게는 보통 평생 한 작품
또는 둘, 어쩌면 세 작품 정도 특별히
애착을 갖게 되는 작품이 있게 마련인데
내 경우에는 이 그림이 그렇다네
-존 피셔에게 보내는 편지 중-
그림(오), 1819년 아카데미 전시회부터 컨스터블은 야심 찬 시도를 선보입니다. 그림의 크기를 획기적으로 늘려 캔버스의 가로길이가 6피트(182.88cm)나 되는 대형 연작 제작에 착수한 거죠. 이른바 6피트 캔버스(Six-footers) 그림들로 스투어 강 (River Stour) 주변의 풍경과 농민들의 일상을 그려냅니다.
당시로서 6피트라는 사이즈는 아주 드문 사이즈였습니다. 이런 큰 작업을 시작하게 된 것은 40세가 다 되었을 즈음이고요. 이 시기는 그의 작품 활동에 큰 전환점이 됩니다. 일단 크게 그려진 그림이니 눈에 확 들어오겠지요. 실제로 자신의 작품이 왕립 아카데미에서 다른 작품들에 비해 조금 더 눈에 띄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또 그 자신의 풍경화가 좀 더 고전적인 회화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방법으로 그림의 크기를 키웠고요. 나폴레옹 시대 신고전주의 그림들이 모두 큼직했거든요. <나폴레옹 대관식> 그림을 상상하시면 가늠이 가실 겁니다.
시리즈로 제작된 6피트 사이즈의 그림들은 모두 스투어 강 인근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중 첫 번째로 작업한 대형 캔버스 작품이 바로 <스투어 강의 풍경>이라는 제목이 붙기도 했던 <흰색 말>라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존 컨스터블이 화가가 된 이래에 가장 큰 찬사를 받았습니다. 그 호평에 힘을 입어 로열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기도 하고요. 이 작품 덕에 컨스터블의 오랜 소원이 이루어졌네요.
슈투어 강 남쪽 둑에서 바라본 풍경입니다. 좌측 아래에 있는 배에는 백마가타고 있는 걸로 보아 말을 실어 나르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 같습니다. 겁 많은 말을 옮기려니 힘이 좀 들겠습니다. 오른쪽 좀 떨어진 곳에 강물을 마시고 있는 소들이 보입니다. 수문과 초막을 비롯해 뒤쪽으로는 마을의 모습이 보이고요. 하늘 전반에 뭉게뭉게 떠 잇는 짙은 구름들과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의 표현이 생생합니다. 자연을 관찰하고 발견해서 얻은 색조를 기준으로 색을 사용했습니다. 물빛의 반짝거림을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순수한 흰색으로 하이라이트를 올린 것으로도 알려져 있고요.
<흰색 말>은 존 컨스터블이 가장 좋아하는 그림 중 하나입니다. 이 작품을 존 피셔 (주교님 조카)라는 친구가 구매하게 되는 데 이 사람은 컨스터블의 초창기 활동에 큰 힘이 되어 준 사람입니다. 전해지는 설에 의하면 컨스터블이 이 작품으로 얻게 되었던 호평들과 작품을 팔아서 생긴 돈 덕분에 화가의 길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후에 그림을 사갔던 존 피셔에게 경제적인 어려움이 닥치자 그를 돕기 위해 다시 그림을 사갔다고 합니다. 이후 죽을 때까지 이 그림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요.
그림(왼)<Woman at a Window>,1822/Pinterest그림(오)<Golding constable's Flower Garden>/ArtHistory Reference
그림(왼), 뒤태가 단아한 여인이 창밖을 보고 있습니다. 프리드리히가 40대 시절에 만난 20살 아래의 아내 카롤린입니다. 그런 아내마저 뒷모습만 그렸습니다. 앞모습도 보여주시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아내가 있는 실내는 인테리어라고 할 만한 것이 딱히 없습니다. 어두운 단색의 직선의 모습이 오래되고 딱딱해 보이는 실내 풍경입니다. 오히려 열린 창문 밖 세상이 훨씬 화사합니다. 적막하고 정갈한 방 안과 대조적으로 연녹색의 포플러 나무숲과 지나가는 배의 돛대가 보입니다. 비록 강과 범선은 보이지 않지만, 지나가는 저 돛대만 보아도 먼 곳으로의 기나긴 여행을 상상해 보기 충분하죠. 비록 우리는 그녀의 얼굴과 표정을 볼 수 없지만 그녀의 시선을 따라 우리도 이쪽에 몸을 둔 채 더 넓은 저 편의 무한한 공간을 상상해 보게 됩니다.
그림(오), 컨스터블의 아내 마리아 빅넬입니다. 컨스터블은 1809년 그녀가 12살이었을 때 처음 만났던 마리아 빅넬(Maria Bicknell)에게 청혼합니다. 그러나 그녀의 할아버지는 컨스터블 가문이 사회적으로 열등하다고 생각해서,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합니다. 마리아에게 상속권을 박탈하겠다고 위협하면서 말이죠. 한정된 수입으로 아내와 가족을 부양할 수 없었던 이 커플은 비밀 서신을 계속 주고받습니다.
1816년 컨스터블의 아버지가 사망한 후 자녀들을 위한 재산을 남겼습니다. 부유해진 것은 아니지만, 결혼에 필요한 재정적 안정을 가져오게 됩니다. 드디어 이 커플은 런던 필즈(Fields)의 세인트 마틴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립니다.
1828년 3월 장인어른이 돌아가셨고 , 막대한 재산을 아내가 물려받아 재정적인 걱정이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사람일은 알 수 없죠. 같은 해 11월 컨스터블의 아내 마리아 빅넬이 41세의 나이로 결핵으로 사망합니다. 당시 아내는 7번째 아이의 출산으로 쇠약해진 상태였습니다. 일곱 명의 자녀를 고스란히 남기고 사망하고 맙니다. 컨스터블은 아내 사망 이후 우울증에 빠졌다고 합니다. 그의 마음 상태는 폭풍이 곧 몰아칠 것 같은 하늘 같았고요.
그림(왼)<The Sea of ice>,1823-1824/wikipedia그림(오)<Cloud Study>1822/Pinterest 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Norham Castle, Sunrise>,1845/wikipedia
나는 스투어 강둑에 놓여 있는 모든 것들을
나의 조심성 없었던 소년 시절과 결부 짓는다.
그 장면들은 나를 화가로 만들었다.
1930년 나치가 정권을 잡은 후 그들은 카스파르의 작품을 북구 유럽적 특징을 구현한 작품으로 선전합니다. 카스파르의 작품을 국수주의적 특징을 구현한 작품으로 간주한 나치의 오해로 인해서 그의 작품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한동안 기피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림(왼), 이 작품은 현대에 이르러 프리드리히의 대표작으로 손꼽힙니다. 발표 당시에는 독특한 구도와 절망감이 느껴지는 주제로 인해 호응을 받지 못했습니다. 프리드리히가 죽을 때까지 팔리지 않았거든요. 인적이 끊긴 극지에서 두껍고 날까로운 빙해에 의해 산산이 조각나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범선의 조각들이 보입니다. 이 풍경은 낭만주의 자들에게 있어서 자연의 힘에 비해 인간의 노력이 얼마나 미약하고 부질없는 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이 작품에서 삼각형이라는 구도를 반복적으로 사용했습니다. 화면 중앙의 압도적인 모습의 빙해는 그 날카로운 얼음판의 끝이 하늘로 치솟아 있습니다. 그로 인해 그림을 보는 사람들에게 깊은 절망감을 안겨 주고요. 북극을 직접 다녀와 그린 그림은 아니라 빙해의 모양새가 뾰족한 삼각형으로만 표현된 부분은 아쉬움이 남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차가운 색채는 북극의 배경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며 매혹적인 풍경을 보여 줍니다.
그림(오), 당시 풍경화를 그리던 화가들 대부분이 장엄하고 웅장한 풍경을 찾아서 광범한 지역을 여행하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그런 유행과 달리 컨스터블은 한 번도 영국 밖으로 나간 적이 없습니다. 컨스터블에게 그러한 풍경은 별로 호소력을 갖지 못했고요. 오히려 그의 고향인 서퍽의 스투어 계곡(Stour Valley)의 평온하고 정감 있는 풍경을 그리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영국의 곡창지대라고 불리는 이곳은 빛이나 바람이 시시각각 변합니다. 풍부한 소재들을 관찰하기에 용이했고요. 이런 주변 환경으로 인해 컨스터블이 풍경화를 계속 고집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 일 것 같습니다.
그는 고향 서퍽 지방의 풍경을 집중적으로 화폭에 옮깁니다. 야외에서 유화물감으로 스케치를 하거나, 광선과 대기의 효과를 보다 더 잘 전달하기 위해서 다양한 색채들을 실험했습니다. 덕분에 객관적이고 정확한 관찰을 할 수 있었고. 가능한 자신이 본 진실하고 객관적인 풍경들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시골의 전경과 그곳 사람들을 생생하게 담아내려 합니다. 그림 속에 담긴 농경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동정하거나 의미 짓지 않고 그저 보이는 그대로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관찰한 자연을 세밀한 드로잉과 수채화로 연습하던 그가 평생을 이토록 영국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아낸 이유는 고향에 대한 큰 애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영국의 토박이답게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몸에 깊이 스며든 농촌을 아름답게 표현하며 세상에 알리려 합니다. 항상 집 근처 야외에서 작업을 한 것에서 고향에 대한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구름과 대기와 빛에 변화하는 자연을 직접 탐구하며 소박한 시골 정경을 소재로 그림을 그린 존 컨스터블은 풍경화 장르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킵니다. 유럽 전역의 미술에 영향을 끼쳐서 풍경화의 혁명이라고 평가받습니다. 정작 영국에서는 인정받지 못했지만요.
이 구름 그림은 '밝음'과 '어둠'의 불연속적인 변화를 포착한 작품입니다. 흰색이 점점 변해 회색이 되고, 그 위로 푸른빛 음영이 덧씌워집니다. 컨스터블은 1821년에서 1822년 사이 직접 야외로 나가 하늘의 구름이 보여주는 변화무쌍하고 미묘한 변화를 수백 점의 유화 스케치로 남깁니다. 그는 나중에 이 작업을 '하늘 관찰하기(Skying)'라고 이름 붙이지요. 그림 뒷면에 계절적인 차이, 그림을 그린 시각, 바람의 방향, 그 밖의 날씨 조건 등 을 메모해 놓았답니다. 기상 현상에 대한 그의 과학적인 관심의 소산이었던 거죠. 지금처럼 소풍 가듯 가볍게 떠나 그림을 그릴 수 있던 시절이 아니라 그의 작업은 더 의미가 깊습니다. 영국의 동시대 풍경화가인 윌리엄 터너(그림아래)의 작품과 함께 보시면 프랑스 인상주의가 두 사람의 영향을 깊게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그림(왼)<The Monk on the Sea>,1808-1810/충청times 그림(오)<Boat-Building near Flatford mill>,1815 그림(오) 출처: Google Arts&Culture
그림(왼), 당시 미술 전시회들로 유명했던 드레스덴은 독일 낭만주의 운동의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이곳에서 프리드리히는 드레스덴의 시인들과 사상가들 그리고 화가인 필리프 오토 룽게로부터 큰 영향을 받습니다. 그의 회화가 인정을 받은 결정적 계기는 1810년 베를린의 아카데미 전시회에 출품된 이 작품을 빌헬름 황태자가 구입하면서부터입니다.
1810년 베를린 아카데미의 전시에 이 작품이 처음 공개되었습니다. 그 이전에 결코 볼 수 없었던 파격적인 형식의 풍경화에 대해 놀랍니다. 이러한 충격적인 표현은 모래 해변과 검은 바다, 그리고 구름으로 가득 찬 어둑한 하늘이 이루는 수평선을 제외하고는 눈에 초점을 맞출 만한 곳이 없습니다. 불필요한 세부 묘사를 모두 생략해 버려 마치 동양화의 여백미처럼 무한한 공간감을 느끼게 됩니다. 덕분에 신비롭고 영적인 세계를 잘 표현했다는 평가죠.
바다와 하늘이 이루는 두 개의 수평선을 가르는 단 하나의 수직선을 왜소하기 그지없는 수도승의 앞모습도 아닌 뒷모습으로 표현합니다. 넓게 분포된 하늘은 네덜란드식 풍경화의 영향이라고 해요. 지정학적으로 네덜란드는 지평선이 낮은 곳이라 큰 산이 없습니다. 보이는 곳이 다 하늘인 거죠. 캔버스 대부분을 차지한 하늘이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놏치기 쉬운 수도승의 모습을 통해 대자연 앞에 점처럼 작은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수도승은 우리를 향해 등을 돌리고 있어 우리도 그의 시선을 따라 허공이나 다름없는 풍경을 바라보게 됩니다 처절한 고독과 공포감도 느껴지고요. 그런데 이 음침하고 메마른 바닷가는 사실 프리드리히가 자주 여름을 보내곤 했던 발트해의 뤼겐섬 풍경이라고 합니다. 사제 복장을 한 인물은 화가의 모습을 그대로 닮았고요. 무한 앞에 방향을 잃은 인간의 혼돈과 절망, 무력감과 좌절감을 느끼는 내면적이고 우울했던 화가의 자화상인 거지요.
그림(오),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는 대신, 컨스터블은 아버지 소유의 방앗간, 옥수수 농장, 선박 건조장 풍경을 담아냈습니다. 그의 작품 <플랫포드 밀 근처에서의 배 만들기 <Boat-building near Flatford Mill,1815>입니다. 이 그림은 처음부터 완성까지 야외에서 그려진 그림이라고 합니다. 자신에게 영향을 받은, 인상파로 치면 '외광파'에 속하는 수련 연작의 '모네'처럼 말이죠.
첫인상은 오늘날 자동차 정비소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수리하기 쉽도록 근처 강둑에 설치를 해놓았네요. 배의 보이지 않는 아랫부분을 보아야 하니 땅을 최대한 깊이 파 놓은 것 같습니다. 뭔가를 손질하느라 골몰한 남성이 앉아 있습니다. 사람의 사이즈가 작아 보이는 걸 보면 배의 크기가 무척 큰 가 봅니다. 주변에 널브러진 연장들, 불에 올려놓은 커다란 팟에 연기가 나는 걸 보니 맛있는 점심이 끓고 있나 봅니다. 근처 다른 일로 바쁜 남성 한 분도 보이네요. 오른쪽으로 자세히 보니 아빠 따라온 듯한 여자아이도 보이고요. 흘려보내기 쉬운 일상을 컨스터블의 그림 덕분에 19세기 영국의 농촌을 안방에서 보듯 보고 있네요.
영국에서 열심히 터 닦아 놓았지만 전쟁을 피해 잠시 다니러 온 프랑스 이방인 화가들을 통해 그 진가가 알려집니다. 새로움을 보는 시각은 준비된 자에게 기회로 작용하고 꽃을 피웁니다. 이국적인 곳에서 토박이스러움을, 토박이스러움 속에서 이국적인 것을 찾아내는 발상의 전환이 누군가의 새로운 창조로 이어지길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