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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찰나를 훔친 금손들

요하네스 페이메이르&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

아침이었습니다. 호기심 많고, 직진형인  털 딸 '레아'와 '바람이'를 데리고 근처 놀이터 딸린 잔디공원으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대충 기분전환 시키고 집으로 방향을 틀어 내려가는 중이었죠. 항상 앞서 가려는 털 딸 '레아'의  목줄을 조절하며 흔들어 대는 꼬리만 쳐다보고  내리막길을 천천히 내려가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달리는 도로변에 차 한 대가 서더니, "엄마!"하고 부르는 게 아니겠습니까?

 얼떨결에 소리 나는 쪽으로 몸을 움직이니,  출근길 큰 아이가 운전석에서 개들과 저의 모습을 보고 아는 척을 한 겁니다. 집이라는 막힌 공간이 아닌 탁 트인 대로변 차 안에서 큰 아이도 저를 보니 반가웠던 모양입니다.  " 어. 잘 다녀와. 운전조심하고'하며 손 짓 한 번 해주고 사라지는 자동차 뒷꽁무니에 대고 묘한 기분이 들더군요. 집이 아닌 길가에서 봐 더 그런 걸까요? '그게 뭐라고...' 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내 발걸음이 조금만 늦었어도, 산책길 나선 개들의 보폭이 조금만 빨랐어도 이 장면은 만들어지지 않았겠구나 싶어 더 그런가 봅니다.  아침부터 생각지도 않은 선물 하나 '툭' 던진 걸 제대로 받은 기분입니다. 마음이 따끈해져 집으로 돌아온 날이었거든요. 괜스레 룰루랄라 흥얼거리면서 말입니다. 




살면서 이런 날이 며칠이나 될까요. 손에 꼽을 겁니다. 아이는 잊겠지만 저에게 그날은 눈으로 찍어 마음으로 간직한 날이었습니다. 이런 찰나의 일상을 잘 잡아낸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페르메르와 18세기 프랑스 화가  샤르댕을 소개합니다. 







그림(왼) 네덜란드(1672)프랑스-네덜란드전쟁/위키백과 그림(오)프랑스(15세기~1792)/위키백과




그림(왼), 유럽이 종교개혁 이후 신. 구교와의 종교를 내세운 힘겨루기로 어수선했습니다. 대부분의 북유럽지역이 개신교를 받아들였고 네덜란드 역시 에스파냐로부터 독립전쟁을 벌여왔죠. 1648년 네덜란드는 전쟁에서 승리해 독립을 쟁취합니다. 중개무역을 통해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있던 상권이 북유럽의 네덜란드로 부가 이동하기 시작하고요. 이로 인해 네덜란드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 문화적으로 상당히 성공한 시기인 '황금시대'가 시작됩니다.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로 유명한 요하네스 페르메르(Johannes Vermeer 1632-1675)만큼 어떤 사람인지 알기 어려운 거장도 드물 겁니다. 제대로 된 20-30대의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이죠. 출생 신고서나 상속 관련 기록들 같은  딱딱한 공문서가 전부입니다.




 1632년 네덜란드 중서부의 도시 델프트의 서민 가정 출신입니다. 네덜란드 독립전쟁 막바지에 치달았을 때 태어났죠. 1653년 21살 때 델프트의 화가 길드에 가입하면서 화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합니다. 같은 해 '운명의 여인' 카타리나 포르네스와 만나 결혼하고요. 돈 많은 가톨릭 집안의 딸과 가진 게 하나도 없는 개신교 집안 아들이 만나 살림을 시작합니다. 이 결혼을 반대했던 장모님도 아내를 사랑하고 아이들을 좋아하는 사위 페르메르를 아낍니다. 후에 장모님이 든든한 후원자로 나서지요. 장모집 2층 작은 방 하나를 화실로 꾸며 화가로서의 꿈을 키워갑니다. 




페르메르와 카타리나는 결혼 후 22년 동안 아이를 15명이나 낳았습니다. 11명이 살아남았고요. 축구팀 한 팀을 매일 집에서 양육해야 하는 외벌이 가장이었던 셈이죠. 당시 네덜란드 평균적인 가정에서 아이를 3-4명 낳았던 걸 생각해 보면 정말 엄청난 다산이지요. 그만큼  아내와 아이들을 정말로 사랑했던가 봅니다.  





 페르메르가 남긴 작품은 35점 안팎입니다. 동시대를 살았던 렘브란트의 작품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지요. 그도 그럴 것이 살아남은 11명의 자녀를 부양하기에  그림만으로  수입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부업으로 여관도 운영해 보고 , 들고 나는 손님들 상대로  여관 벽에 그림도 걸어 미술상 역할도 하며 생계유지에 허덕입니다. 작품 수가 적은 이유도 본업, 부업, 그리고 육아까지 겸했던 충분하지 못한 작업시간도 한 몫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소품 하나를 그려도 네덜란드 특유의 섬세함과 꼼꼼함을 가지고 색을 덧입혔으니 작업이 더디기도 했고요. 물감 마를 겨를도 없이 외상값으로 대기 중인 빵집 주인을 포함한 주변 상인들이 가져가기 바쁩니다. 




그림(오), 18세기 프랑스는 두 얼굴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화려한 대저택에서 풍요로움을 만끽하는 귀족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잔잔한 일상에 묻혀 사는 서민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화가들은 귀족들의 사치와 풍요로움을 화폭에 담아내는 데 주력했습니다. 


<Madame de Pompadour>, 프랑수아 부셰, 1750/pinterest



당시 왕이 살 던 베르사유 궁전은 파리에서 한 참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왕에게 눈도장을 찍어야 하는 귀족들이나 관리들은 궁전까지 왕복을 하려니 힘이 들고요. 그래서 파리를 포기하고 왕이 거쳐하는 베르사유 근처로 이사를 오게 됩니다. 왕의 궁전만큼은 아니더라도 아름답고 우아하게 실내장식을 하고픈 안 주인들의 염원에 따라 여성스럽고 섬세하고 우아하고 장식적인 양식의 로코코(Rococo) 미술이 유행을 하게 됩니다.  






그림에도 등급이 있습니다. 역사화는 신, 성자, 영웅의 서사등을 펼쳐 보이며 최고 등급이죠. 그야말로 인간의 특별함과 도덕적 위대함을 보여주는 식으로 말이죠. 이런 역사화를 잘 그리려면 실기 능력뿐만 아니라 인간의 역사, 종교사, 고전, 신화 등과 관련된 지적 소양도 동시에 갖춰야 했습니다. 



초상화는 왕과 귀족의 위세를 주로 기록했습니다. 인간의 형상을 묘사했기 때문에 상위 등급을 받습니다. 반면 세속적 주제인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그린 풍속화와 인간의 지배를 받는 자연이 주제인 풍경화는 하위 등급으로 분류됐습니다. 장르화라고 불립니다. 


일상의 사물, 과일, 꽃 등 움직이지 않는 (죽은) 대상이 주제인 정물화는 최하위 등급이었습니다.




그림(왼)<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오신 예수>,1655/Keep&Share CNote그림(오)<The Ray>,1725-26/알고가자 프랑스





 렘브란트 등 다른 화가들이 신화나 종교를 소재로 자주 그림을 그렸던 것과 대조적으로 페르메르의 작품 주제 대부분은 집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집안이 아이들로 항상 북적이고 시끄러웠기 때문에 일상과 작업을 분리해야 했습니다. 장모님 집 2층 좁은 작업실에서나마 현실을 벗어난 자신만의 시간으로 들어갈 수 있었죠. 그래서일까요?  그림에 나오는 집들은 모두 완벽하게 정리돼 있고, 조용합니다. 아마도 그림을 사 갈 만한 부유한 고객들의 취향을 맞추기 위해서일 테지요. 아니면 어지러운 마음을 자기가 좋아하는 그림 안에서 승화한 건지 도 모를 일이고요.





그림(왼),  이 작품은  페르메르의 초기 작품입니다. 몇 점 안 되는 종교화이고요. 시작은 종교화로 시작했지만 자신의 재능은 장르화인 풍속화를 그리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합니다. 스승이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저 추측만 난무할 뿐이지요. 그림의 배경은 성경의 <루카복음 10장 38-42절> 말씀이 그 배경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쳐서 쉬어가려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들렀습니다. 언니 마르타는 예수님을 모시느라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합니다. 그런 언니 눈에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만 듣고 있는 동생을 보니 화가 납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하시는데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루카 10,40)


그런데 예수님은 마르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루카 10,41-42)





이 그림에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빵을 들고 있는 마르타와 턱을 괴고 앉아 있는 마리아와 손가락으로 마리아를 가리키며 마르타를 바라보는 예수님입니다. 언니 마르타는 동적입니다. 발랄하고 밝은 노란색 옷을 입고 있습니다. 활동하는 사람을 대변해 주듯이 말입니다. 마리아의 모습은 정적입니다. 사랑의 색인 붉은색 상의와 차분한 색인 청록색 치마를 입고 있습니다. 명상하는 사람을 대변하 듯하고요.





마르타가 동생에 관해 예수님에게 불평을 늘어놓지만 그분은 그녀가 동생의 참모습을 이해하도록 손가락으로 마리아를 가리킵니다. 기도 없는 활동은 무의미하고, 활동 없는 기도는 공허하기 때문에 둘 다 신앙인들에게 필요한 요소들이죠.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Jean-Baptiste-Simeon Chardin 1699-1779)은 18세기 로코코 양식이 유행하던 시절 소재면에서 다른 화가들과 엄격히 다른 세계를 추구했습니다. 귀족들의 호사스러움에 휩쓸려 다녔던 당대의 화가들과 달리 그는 시민계급을 대표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평범함을 모티브로 그림을 그립니다. 가령 평소 사용하던 사물들 냄비, 주전자 등의 소박한 주방도구와 생선, 달걀 등 음식 재료를 늘어놓고 정물화를 그리는 식으로 말이죠. 





당시 모든 화가가 역사화가로 성공하는 꿈을 꿨습니다. 역사화가로 명성을 얻으면 작품 주문이 많이 들어오고 그림도 비싸게 팔 수 있었거든요. 화가들에게 역사화는 출세의 지름길인 동시에 경쟁이 치열한 곳이었습니다. 샤르댕은 다른 화가들과 정반대의 길을 걷습니다 기질에도 맞지 않았고요.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정물화를 그리는 것으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갑니다. 돈벌이와 정 반대의 노선을 걸어간 거죠. 






가구제작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정규 아카데미에서 그림을 공부하지 않았고요. 그는 이단아였습니다. 그렇다고 프랑스 화단에서 왕따였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는 당시 제3계급(1급:왕, 귀족/ 2급:성직자)으로 치부당했던 검소한 생활을 하던 시민들의 모습을 자신의 화폭 위에 재현해 냅니다. 로코코의 화려함보다는 자신만의 스타일로 그려진 풍속화와 정물화로 말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표현과
묘한 유사성을 지니고 있는
 그것의 놀라운 얼굴 묘사는
 정확히
똑같은 그 생선의 살, 피부, 피이다!
-프랑스 철학자이자 비평가, 드니 디드로(Dennis Diderot)-





그림(오), 이 작품의 중심에 내장이 제거된 가오리(홍어(Skate)로도 알려짐)가 매달려있습니다. 그 상처와 반투명 살은 내부 구조를 드러내고요. 흰색 표면과 배를 갈라 드러난 연분홍색의 내장이 생선 장수 눈에는 '고놈, 참 실하다.'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식가라면 막걸리 한 사발에 홍어 삼합을 떠올릴지도 모르고요. 제 눈에 벽에 저 자세로 걸려 있으니, 눈과 입이 그려진  핼러윈 파티 때 입음직한 유령 복장 같습니다. 당시 이 그림 앞에 선 다른 이들도 가오리의 멍한 유령 같은 눈빛이 경악스러웠나 봅니다. 굴 몇 개와 생선 두 마리도 보입니다. 비린 생선 냄새를 맡고 용케 찾아들어 온 고양이 녀석이 귀와 꼬리를 바짝 세우고 있네요. '너, 오늘 딱 걸렸어.' 하는 앙칼진 표정으로 말입니다.  왼쪽에서 쏟아지는 빛 덕분에 부엌에 있는 모두가 싱싱하게 살아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작품은 실제 오브제들을 이와 같은 구도로 배열해 놓고 그린 것이 아닙니다. 샤르댕이 구도를 먼저 스케치한 후 그 구도에 맞는 사물들을 상상하여 배열한 후 그린 '구성 연습을 위한 거짓 정물'이라는 점도 주목할 만한 특징입니다. 




왕립 회화조각 아카데미의 리셉션을 위해 제작된 작품입니다. 그의 후기 작품 <찬장, 음식이 차려진 테이블(The Buffet,1728)>과 함께 제시된 작품이지요. <The Ray>로 인해 샤르댕이 '동물과 과일에 재능이 있는 화가'로 입지를 굳히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첫 걸작으로 간주하는 작품이고요. 이 작품으로 인해 25살의 샤르댕은 프랑스 최고로 권위 있었던 예술 기관으로부터 정식으로 아카데미 회원자격이 주어집니다. 정물화라는 가장 인정받지 못한 분야에서 종종 여자들이나 그리는 그림으로  무시받 던 분야에서 공식적 인정을 받았다는 말이죠.





각각의 구성 요소들이 주는 실제와 흡사한 현실감은 이후 화가들에게  하나의 전형적인 '정물'의 규칙처럼 중요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샤르댕이 그림 속 가오리를 그리는 사실적인 방식에 충격을 받았다는 얘기죠. 흩어진 굴 껍데기를 가볍게 밟으면서 등을 아치형으로 구부리고 털을 곤두세운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왼쪽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생명 없는 물고기들의 수척함도 뚜렷이 부각되고요. 오른쪽에는 주방 기구들이 모여 있습니다.





이 작품은 아카데미가 소장하고 있다가 프랑스 대혁명 이후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게 됩니다. 미술계에 세잔, 마네, 마티스 등에게 영향을 줍니다. 마티스는 샤르댕에게 '사물의 감정을 그릴 줄 아는 화가'라고 치켜세우기까지 합니다. 문학계에 드니 디드로, 마르셀 프루스트 등에 영향을 끼치고요.








그림(왼)<우유를 따르는 여인>,/Artlecture.com 그림(오)<시장으로부터의 귀환>,1739/크리스천 투데이





그림(왼), 페르메르의 <우유를 따르는 여인>입니다. 자주 보셨죠. 17세기 네덜란드 드는 부유한 중산층 계급이 많아지면서 대부분의 가정집들이  하인들을 두고 살았다고 해요. 그의 그림의 대부분이 누군가의 집에 초대받아 갔을 때 볼 수 있는 실내풍경들이 대부분입니다. 



 왼쪽창을  통해 아늑한 빛이 방 안으로 들어옵니다.  지극히 일상적인 일인데도 종교의식을 치르듯 고요함과 숭고함이 느껴지고요.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어디선가 쪼르륵 우유 따르는 소리가 들려올 듯합니다. 바구니에 놓인 빵조각들은 손으로 찢어 한 잎  먹고 싶을 정도로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우유와 섞인 푸딩을 만드는지도 모르죠. 바닥에 이동식 난로 같은 것이 보이는 걸 보면 말입니다. 





 일상적인 순간을 어찌 그리 잘 잡아냈는지 감탄스러울 따름입니다. 각설탕만 하게 깨진 창문틈으로 들어온 빛은 더 맑은 것 같습니다. 우유의 흰 빛과 따르는 손등에 떨어진 빛이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킵니다. 하녀의 얼굴과 옷의 색채 표현은 물론이고 왼쪽 벽은 회색으로 , 오른쪽 벽은 흰색으로 칠한 명암 표현도 절묘합니다. 오른쪽 벽에 드문드문  뚫린 못자국 보이시나요. 빈 공간을 못자국을 통해 이리저리 분산시킵니다. 좁은 실내일 텐데 아늑한 빛 덕분에 아주 넓게 느껴집니다. 엄청나게 비쌌던 청금석을 갈아 만든 블루색을 하녀의 앞치마에 아낌없이 썼습니다. 전형적인 장인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재료만큼은 아끼지 않았습니다. 가족들에게 엄청난 빚을 떠안긴 원인이기도 했지만요.







그림(오), 이 그림은  1739년 살롱전에 전시된 것으로 특히 구성이 돋보입니다.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구리 물통 때문에 소녀가 그림 앞으로 더 바짝 다가와 있는 듯 느껴집니다. 흰색에 가까운 아이보리, 바랜듯한 앞치마의 색, 그리고 붉은 기가 도는 벽돌색이 샤르댕이 그림에 자주 사용하던 색입니다. 우리들 눈에 허름해 보이는 저 색들을 내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습니다. 비밀스럽게 덧대어진 색채는 그만의 독특한 기법이 되었고요. 세부적인 상황을 빼버린 간결함이 눈에 쏙 들어옵니다.  





시장 봐서 부엌으로 들어오는 장면은 전혀 특별할 것 없는 일상입니다.  다리 삐죽 나온 보자기의  고깃 덩어리를 한 손에 쥐고, 다른 한 손에 커다란 빵을   탁자에 내려놓고 있습니다. 오히려 페르메르가 그려 낸  하녀보다 샤르댕이 그린 하녀의 모습이 더 현실에 가까운 모습일 거라 생각합니다. 그녀의 시선은 문을 열고 또 다른 손님을 맞는 어린 가정부에게 쏠려 있습니다. 빵, 포도주병, 접시, 도기그릇, 왼쪽의 구리 물통들까지 샤르댕이 부엌 정물화를 통해 자주 그리던 것들입니다.




 정물화에 대한 샤르댕의 자신감이 잘 나타나는 부분입니다. 특히 빵과 포도주병 그리고 바닥의 그릇은 안정적인 삼각형 구도로 그림의 균형감을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샤르댕이 치밀한 계산하에 물건을 배치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대중으로부터 인정은 받았으나 정물화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합니다. 장르화 중 풍속화를 그리기 시작한 거죠. 자주 그리던 정물화 속에 사람들을 그려 넣기 시작합니다. 흔히 볼 수 있는 여성들이나 부엌 살림살이를  눈여겨보기 시작하고요. 사소한 풍경에 아름다움을 불어넣는 샤르댕의 장르화는 대량생산이 가능한 판화로도 제작돼 많은 사람들에게 팔렸습니다. 어쩌면 계몽주의라는 시대 흐름에 발맞춰 시민들의 눈높이가 샤르댕의 그림을 받아들이고 사 줄 만큼 의식 수준이 성장했다는 얘기지요.









그림(왼)<열린창가에서 편지를 읽는 소녀>/Art&Culture 그림(오)<Saying Grace>,1740/Arts&Culture





그림(왼),  밖에서 불어 바람이 커튼의 윗부분을 휘익하고 감았네요.  열린 창문에 반투명으로 반사된 소녀의 얼굴이 보이고요. 이 정도면 페르메르의 관찰력에 엄지 척해 줘야 할 것 같습니다. 창을 통해 들어온 아늑한 빛이 소녀의 이마, 머리, 둥근 어깨를 거쳐 편지를 읽고 있는 손에 잠시 머무르는 것 같습니다. 황록색 커튼은 지극히 사적인 공간 안으로 들어온 느낌이 들고요. 벽에 큐피드 그림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연애편지를 읽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원래 그림 원본에는 큐피드가 없습니다. 큐피드가 그려진 부분에  누군가 의도적으로 덧칠을 해 놓았거든요. 유화의  아래쪽 색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윤곽선이 드러나고 뭔가를 발견한 거죠. 이 부분을 전문가들이 모여 토론을 하고 의견수렴을 통해 2017년 독일 드레스덴 복원팀에 의해 큐피드가 세상에 빛을 보게 됩니다. 들키고 싶지 않은 사적인 공간을 엿보는 느낌입니다. 








그림(오), 프랑스 중산층 어느 가정집에서나 벌어지고 있을 법한 장면입니다 식탁보의 청결함이 만져질 듯하고요. 아이보리, 바랜 파란색, 그리고 흐린 붉은색이 이 작품에도 보입니다. 기도를 마치고 식탁에 앉은 큰 아이는 모락모락 피어나는 저 음식을 식기 전에 빨리 먹고 싶습니다. 엄마의 시선은 어린 동생에게 가 있고요. 북을 가지고 놀랐 던 아이는 더 놀고 싶은 데 '얼른 기도 안 하고 뭐 하니?' 하는 엄마의 시선이 따갑습니다. 엄마는 가끔 뒤통수에도 눈이 달려있을 때가 있습니다. 아마 감사기도를 할 때까지  시선을 뗄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비록 수프 한 그릇 정도 되어 보이는 저 음식이 식기 전에 얼른 기도를 마쳐야 할 텐데 말입니다. 샤르댕의 그림은 이렇듯 무겁지 않은 주제로 관람자가 더 편안하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합니다. 




18세기  특유의 가족의 부드러움을 가미시킨 그의 작품은 교훈적인 무거움이나 과도한 감상은 보이지 않습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는 가라앉은 색 구성과 조용한 조명에 의해 더 강조됩니다. 샤르댕은 그의 그림들의 다양한 요소들의 배열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구성은 세밀하고, 세 인물의 삼각형 구조에서 만들어진 안정성 또한 그 장면의 고요함을 더합니다. 이 작품은 당시 루이 15세에게 선물로 바쳐졌고, 왕의 사망 이후 잊혔다가 1845년 재발견됩니다. 









그림(왼)<천문학자>/www.scourt.go.kr그림(오)<Soap Bubble>,1733-34/GoogleArts&Culture





그림(왼), 책상 위에 놓인 물건은 지구본이 아니라 별자리를 표시한 천구본입니다.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이 천구본을 거쳐 천문학자의 얼굴을 비추고 있습니다. 지식의 빛이 천구본을 통해 천문학자의 통찰로 들어오는 순간을 표현한 작품이지요. 앞에 놓인 직물천을 통해 보는 이들과 거리 두기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관람객 사이의 거리, 다시 그림과 그림 안의 인물과의 거리 이런 식으로 말이죠. 사적인 공간을 더 강조하면서 깊이감을 준 연출법입니다. 베르메르의 특징 중의 하나인 왼쪽 창문을 통해 실내를 비쳐주는 감싸 않은 빛이 천구본의 둥근 부분, 책, 학자의 얼굴, 손등으로 부드럽게 떨어집니다. 뭔가를 찾아낸 듯 몰입하는 모습이 사뭇 경건하기까지 합니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 가운데 남자 모델이 등장하는 것은 2 작품뿐입니다. 그림 속 주인공의 성별뿐만 아니라 그 분위기도 이전 작품들과는 상당히 다르죠. 어쩌면 페르메이르가 당시에 급속도로 발전하는 과학에서 영감을 받아 전작들과 확연히 다른 그림을 그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전문가들은 그림 속 모델이 그이 동갑내기 동네 친구인 레이우헨훅(Anthony van Leeuvenhoek 1632-1732) 일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그림(오), 비눗방울 놀이를 하기에는 조금 나이가 들어 보이는 한 소년이 두터운 벽돌 난간에 기대어 긴 대롱으로 비누 거품을 불고 있습니다. 오른 팔꿈치 옆에는 비눗물이 든 작은 유리컵이 놓여 있고요.  대롱을 쥔 오른손과 이마에는 밝은 빛이 부서져 어둡게 칠해진 벽돌 난간과 대조를 이룹니다.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비눗방울을 부느라 사뭇 몰입하는 모습입니다.  그림의 오른편에는 모자를 쓴 작은 꼬마가'나도 좀 시켜주지'하는 표정으로 신기한 듯 지켜보고 있습니다. 키자 작아  까치발을 하고 있네요. 오히려 비눗방울 놀이는 키 작은 꼬마에게 더 어울릴 것 같은 데 말입니다.  구성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하지만 순수함, 덧없음, 그리고 찰나의 젊음의 본질을 담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샤르댕이 서른 중반에 그린 작품입니다. 갓 결혼하여 딸 마그리트와 아그네스 그리고 장 피에르가 태어난 후였죠. 샤르댕의 아들 장 피에르는 아버지 뒤를 이어 역사화를 그리는 화가로 성장합니다. 아들 장 피에르는  당시 화가 지망생들이 동경하던 아카데미의 로마상을 획득하기도 하고요. 이탈리아 유학까지 떠났으나, 결국 베니스의 운하에서 익사한 채 발견됩니다. 샤르댕이 죽기 7년 전에 벌어진 일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그림을 보면, 잘 키워 낸 아들을 허망하게 보낸  아버지 샤르댕의 허무가 느껴집니다.  









그림(왼)<회화의 기술,알레고리>,1666-68/Google Arts&Culture그림(오)<self-portrait with Spectacles>,1771/위키백과





그림(왼), 이 작품은 페르메이르의 특징을 잘 소개하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바로 카메라로 찍은 듯한 완벽한 거리감과 빛, 그리고 구도입니다. 사실 그는 카메라 옵스큐라라는 기술을 통해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일종의 원시적인 카메라로, 당시에는 혁신적인 첨단 장치였습니다. 이렇게 구도를 잡은 다음에도 그림을 굉장히 많이 고쳤습니다. 엑스레이 분석에 따르면 페르메르는 등장인물의 위치와 실내 인테리어등을 자주 큰 폭으로 고쳤다고 합니다. 덕분에 페르메르의 그림에서는 원근법과 명암, 구도가 완벽한 조화를 이룹니다. 



카메라 옵스큐라/나무위키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작품은 알레고리 작품입니다. 알레고리란 그림에 나오는 이미지에 하나의 의미가 부여되어 있는 작품입니다. 모델은 머리에 월계수 화관을 쓰고, 왼손에는 트럼펫을 , 오른쪽에는 책을 든 채 눈을 아래로 깔고 있습니다. 하얀 피부에 붉은 입술이 눈길을 끌고요. 월계관은 승리의 영광과 영원한 생명, 트럼펫은 명성을 뜻합니다. 그녀가 들고 있는 책은 헤르도투스 또는 투키디데스의 책으로, 역사를 의미합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모델은 화가의 승리를 가져다줄 '역사의 여신'즉 클리오(Clio)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물론 다르게 해석할 여지도 많습니다. ) 가난에 굴하지 않고 베르메르는 믿었던 것 같습니다. 역사가 기어어 자신을 승리자로 만들어 영예롭게 할 것임을 말입니다. <2023년 암스테르담 페르메르 전시회>에 엄청난 인원이 몰리며 표가 매진된 사례를 보면 페르메르가 그린 월계수의 의미처럼 승리를 한 듯도 싶습니다. 






중앙 오른쪽에 등을 돌린 채 작업에 열중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당연히 페르메이르 자신이죠. 당시의 최신 유행에 따라 상의는 절개된 의상을 걸쳤습니다.  하의는 붉은색 내의를 받쳐 입었고요. 화가 주변에는 유화물감이나 팔레트 등 실제로 그림을 그리는 데 필요한 도구가 없습니다. 이는 그림이 화가의 상상 속 장면을 그렸다는 걸 알려주는 장치입니다. 사실 베르메르는 이렇게 비싼 옷을 입고 좋은 작업실에서 일할만큼 돈이 많지 않았습니다. 작품 분위기는 고요하지만, 자식을 10명 넘게 뒀던 페르메르의 집에는 아기 울음소리가 끊일 날이 없었거든요.  그 녀석들 먹여 살리느라 아버지 페르메르는 스트레스가 가득입니다. 그래도 그림 속 페르메이르는 자신을 멋을 좀 아는 신사로 연출해 놓았습니다. 페르메이르는 빚을 지고 있으면서도 이 작품은 평생 팔지 않았다고 합니다. 히틀러 역시 이 그림을 유독 좋아했고요.








샤르댕의 인생 후반기에 그린 자화상들 중 하나입니다. 날카로운 갈색 눈을 가지고 우리를 향해 한 마디 하는 것 같습니다. 그의 외모의 솔직한 묘사가 눈에 들어오고요. 그이 코에 섬세하게 자리 잡은 안경, 화려하고 기하학적 무늬의 스카프, 복잡하게 얽힌 파란색과 흰색 모자 등 패션니스타가 따로 없네요. 고집스럽지만 당당한 노 화가의 모습이 근사합니다. 




샤르댕의 시력은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합니다. 그가 항상 일했던 납 성분이 함유된 유화 물감으로 인해 악화되어 갑니다. 경력을 포기할까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다 그는 파스텔로 눈을 돌립니다. 파스텔은 그에게 최대한 다양한 색상과 질감을 가져다주었습니다. 1771년 살롱에 다른 여러 작품들과 함께 전시된 이 파스텔 작품의 등장은 그의 관객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의 후기 파스텔 초상화들은 놀라울 정도로 친밀하고 작품 속 모델들의 심리 적인 깊이를 전달합니다. 그의 얼굴에 있는 음색의 병렬 배치로 인해 그는 조각적이고 거의 실물처럼 보입니다. 





 잊혔던 그의 그림들이 20세기에 들어와 견고한 추상성을 가진 구도 때문에 높이 평가받기 시작합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하나의 사조를 형성하기도 했고요. 그는 정물화에서는 적어도 세잔의 출현 이전에 최고의 가장 위대한  한 사람으로 간주됩니다. 입체주의에서부터 추상표현주의까지 많은 현대의 예술운동은 그에게서 영감을 얻기 때문이죠. 









 17세기 종교화로 시작해 장르화중 풍속화의 영역에서 길을 찾은 네덜란드의 화가 페르메르! 작품의 치밀함, 부드러운 빛과 색깔의 절묘한 조화로 43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뒷세대에 미친 영향은 만만찮습니다. 18세기 여자들이나 그리는 그림이라는 정물화로 시작해 당당히 인정을 받고 업그레이드로 장르화 중 풍속화에 도전한 샤르댕! 화려한 기교를 과시하는 스펙터클한 상황은 없습니다. 그저 서민과 중산층의 묵묵한 일상을 조용하고 소박하게 진실을  담아내고자 애쓸 뿐이었죠. 그런 덕분에 화가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그들의 그림들은 시대를 벗어나 계몽주의를 너머 근대의 문을 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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