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피티(Graffiti)를 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뭘까? 아마 다양할 겁니다. 사회적, 정치적 메시지를 전 달려는 욕구일 수도 있고, 개인의 창의성과 독창성을 발휘하는 방법이기도 하지요. 일부는 단순히 스릴을 즐기거나, 하지 말라고 하니 더 하고 싶은 심리 자체에서 오는 행위일 수도 있고요.
1. Girl with Balloon,2002/wikipedia 2. Bomv Love, 2003/ Banksy Explained Flower Thrower,2007/wikiArt 1.출처: 하퍼스바자 2.The Son of a Migrant, 2015/wikipedia
어디서 눈에 많이 익은 그림들이죠? 예. 맞습니다. 뱅크시(Banksy) 작품들입니다. 그는 1990년대 후반부터 활동하기 시작한 영국의 익명 그라피티(Graffiti) 예술가입니다. 그의 실제 이름과 신원은 지금도 알려져 있지 않죠. 스스로를 "예술 테러리스트"라고 표현합니다.
뱅크시(Banksy)는 SNS를 자신의 작품을 공개하고 홍보하는 주요 수단으로 활용합니다. 그의 익명성과 신비로운 이미지를 유지하면서 말이죠.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 덕분에 그의 작품은 빠른 속도로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뱅크시는 자신의 Instagram 계정을 통해 새로운 작품을 처음 공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를 통해 그의 팬들은 실시간으로 뱅크시의 최신 작품을 확인할 수 있죠. 작품의 위치나 의미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은 기본이고요.
또한 SNS는 뱅크시의 작품이 빠르게 확산되는 플랫폼 역할을 합니다.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발견하면 SNS에 공유하죠. 이는 다시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 더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뱅크시(Banksy)는 자신의 사회적 메시지와 예술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뱅크시의 작품은 사회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전쟁, 빈곤, 권력 남용, 환경 문제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 소통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는 거리를 캔버스 삼아 누구나 접할 수 있는 공공 예술을 만들어냄으로써, 예술의 접근성을 높이고 싶어 했습니다.
또한, 그의 작품은 기존 예술 제도와 권위에 대한 도전을 담고 있습니다. 예술계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거지요. 그의 풍자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지는 사회적 담론을 형성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중요한 이슈들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자신의 작품을 파쇄(2018,10,6)하는 등의 퍼포먼스를 통해 예술의 가치와 상업화에 대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또한, 그의 의도와는 달리 도발적 행동이 오히려 작품의 가치를 높이며 상업적 성공을 거두는 모순을 낳기도 했지요. 이러한 영향력으로 인해 뱅크시는 현대 문화예술 전반에 신선한 충격을 주는 예술가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오늘은 뱅크시의 20세기 선배 화가 세분을 만나고자 합니다. 그들이 살았던 사회와 그라피티(Graffiti)를 통해 어떻게 그들은 소통하고 대중과의 접근성을 높이는 노력들을 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장 뒤뷔페 ( Jean Dubuffet, 1901-1985, 84세)
키스 해링 (Keith Haring, 1958-1990, 31세)
장 미셸 바스키아(Jean Michael Basquiat 1960-1988,28세 )
예술을 향한 인간의 욕구는 절대적으로 원시적이며,
빵을 갈망하는 것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강렬한 것이다.
빵이 없다면 굶어 죽겠지만
예술 없이는 지루해 죽는다.
-장 뒤뷔페(Jean Dubuffet)-
윤리가 침묵하는 두 차례 세계대전을 거치며 뉴욕이 예술의 주도권을 쥐게 됩니다. 반면 파리의 위상이 예전에 비해 현저히 추락하게 되지요. 그래도 프랑스 파리에서 계속 활약하며 유럽미술의 자존심을 지킨 화가가 있습니다. 장 뒤부페(Jean Du buffeet, 1901-1985)입니다. 뒤뷔페는 생전에 기존의 예술전통을 거부하고 파격적인 예술실험과 독창적 스타일로 당시 서구 미술계에 혁신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특히 20세기 미술사를 장식한 '앵포르멜'미술을 개척하며 현대미술의 최전선에서 활약했습니다.
앵포르멜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미술사조로, '비 정형' 또는 '부정형'을 의미합니다. 기존의 기하학적 추상에 대한 반발로 시작되었습니다. 미리 계획된 구성을 거부하고 자발적, 주관적 표현을 추구합니다. 이성적이고 차가운 추상과 달리 감정적이고 서정적이며 색채 중심의 추상을 지향하지요. 우연성과 퍼포먼스적인 요소를 중시합니다.
Large Black Landscape, 1946, Jean Dubuffet /Tate
'막 그리기 대잔치인가? 무슨 그림이 이렇지.' 기존의 다듬어진 그림을 보던 관람객들은 당황합니다. 아이 낙서 같은 그림을 어떻게 감상해야 할지 몰라서요. 현대미술의 거장으로 불리는 장 뒤부페(Jeam Dubuffet, 1901-1985)의 <Large Black Landscape>(1946) 작품입니다. 그의 초기 작품 중 하나죠.
원시미술 운동의 영향을 받은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거칠고 단순화된 형태와 강렬한 검은색 사용이 특징적입니다. 뒤뷔페는 전통적인 미술 기법을 거부했습니다. 직관적이고 즉흥적인 표현을 추구했지요. 그는 추상화된 풍경을 통해 원시적이고 본능적인 느낌을 전달하려 했습니다. 마치 전후 유럽의 황폐화된 분위기를 반영하듯 말이죠. 이 작품은 뒤뷔페의 아트뷔뤼(Art Brut) 스타일의 초기 발전 단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입니다.
예술작품이란
존재 저 깊숙한 곳에서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투영이 일어날 때
비로소 흥미로운 것이다.
나는 순수하고 원시적인 상태에서의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예술의 창작 과정을
오직 이 '아르부뤼(Art Brut)'안에서만 찾아낼 수 있다고 믿는다.
Dhotel nuance d'abricot(1947)by Jean Dubuffet/ ARTCHIVE
1945년 "높은 반죽"이라는 의미의 프랑스어 '오트 파트(hautes pates) '기법을 자신의 개인전에 처음 선보입니다. 캔버스에 물감을 두껍게 발라 올려 부조와 같은 입체적인 효과를 만듭니다. 물감에 모래, 자갈, 작은 돌 등 다양한 재료를 섞어 사용하고요. 물감이 마르기 전에 레이스, 파편, 조각 등을 넣어 질감을 만듭니다. 평면적인 이미지를 넘어 촉각적이고 공간감 있는 표면을 만들어내어 관람객에게 새로운 예술 경험을 제공합니다.
그가 공격하는 기성 화단은 엘리트주의와 자본가의 힘이 만든 허상으로 가득 찬 공간입니다. 가식과 인공적이고 모방적인 자기 선전으로 꽉 찬 곳이죠. 장 뒤뷔페(Jean Dubuffet)는 오히려 어린아이의 그림이나, 정신 질환을 가진 사람들의 그림에 주목했습니다. 뒤뷔페는 주류 문화가 예술에 있어서 새로운 발전을 흡수하기도 하고,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아르 브뤼(Art Brut)만이 이런 문화의 권력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고 순수한 동기로 창작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의 이런 개념은 거리 예술을 포함한 '아웃사이더 아트 '개념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장르를 뛰어넘는 크로스오버 작업의 선구자 이기도 했고요. 사실 정규 미술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았던 본인의 개인적 경험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그는 40대라는 늦은 나이에 가업인 포도주 상을 하다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섰거든요. 어쩌면 비주류였기에 그는 기존의 예술전통에 맞서 혁신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는 예술가로 타고났고, 따라서 예술가답게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그 책임이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무척 애를 썼다.
다른 예술가들의 삶을 연구하고, 세상을 연구하면서 배웠다.
내가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역할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나는 가능한 한 오랫동안 살면서,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위해
그림을 그릴 생각이다.
그림은 사람과 세상을 하나로 묶어준다.
그림은 마법처럼 존재한다.
-키스 해링(Keith Haring) 저널-
1. Keith Haring/ Artlecture.com 2. "SAMO IS DEAD", Jean Michael Basquiat/ 나무위키
(그림 1). 우리에게 친숙한 현대미술 작가 중 '키스 해링(Keith Haring, 1958-1990)이 있습니다. 키스 해링(Keith Haring)은 누구인지 몰라도 그의 그림은 한 번씩 봤을 정도로 유명하죠. 핸드폰 케이스, 티셔츠 등에 다양하게 상품화되어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작가 중 한 분입니다. 그의 작품은 단순한 선, 상징적인 형상, 리듬감을 특징으로 합니다.
그가 대중 속에서 예술 활동을 벌이게 된 계기는 그가 존경하는 화가이자 학교 스승이었 던 키스 소니어(Keith Sonnier)의 전시회를 도우면서였습니다. 사람들이 작품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예술과 대중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술은 모두를 위한 것이라 여겼던 그의 생각과 전혀 반대되는 모습이 그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거죠. 그래서인지 살아있는 동안 그는 낙서와 예술의 경계를 허물며 사람들에게 친숙한 예술을 선보이고자 노력했습니다.
키스 해링(Keith Haring)이 살았던 1960년대, 미국 사회는 과연 어땠을까요?
1960년대 미국 사회는 여러 가지 이슈로 급격한 변화와 사회 운동이 벌어지고 있던 시기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로 대표되는 흑인 민권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 시위가 확대되어 갔고요. 젊은 세대가 기존의 보수적 가치관에 도전하며 사회 변혁을 요구했습니다. 히피 문화가 등장하고, 평화, 사랑, 자유를 강조하는 새로운 생활양식이 확산되던 시기입니다. 전 애플의 CEO 스티브 잡스(Steve Jobs, 1955-2011)도 한때는 히피 생활을 했던 CEO였지요. 페미니즘과 환경보호 운동이 주목받기 시작하던 때입니다. 음악, 영화 패션 등에서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났던 시기이고요. 다이내믹 했던 이 시기의 사회 변화는 미국 사회의 정체성을 크게 바꾸는 계기가 됩니다.
출처:Artsy
이러한 혼란 속에서 해링은 지하철에서 검은 종이를 덮어놓은 빈 광고판을 보게 됩니다. 그의 주머니에 늘 흰색 분필이 있었거든요. 키스 해링은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매체를 발견했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지하철 전체에 있는 빈 광고판에 흰색 분필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1980년부터 1985년 사이 작가는 수백 개의 공개 드로잉을 제작했습니다. 이런 활동을 통해 그의 작품은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하는 사람들과 친숙해졌습니다. 사람들은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작가에게 말을 건네며 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소통을 통해 작가는 더욱 열심히 작업을 진행했으며 지하철은 작가의 아이디어를 구현할 수 있는 '실험실'이 되었습니다.
(그림 2). 바스키아의 작품은 어린아이의 낙서처럼 천진합니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보호받기를 거부한 그는 거리의 악사가 되어 뉴욕의 빌리지를 'SAMO: Same Old Shit 흔해 빠진 낡은 것)'라는 사인과 함께 철학적인 시들과 낙서로 채워나갑니다.
장 미셸 바스키아의 예술적 배경이 된 뉴욕 브루클린은 팝 아트, 힙합, 스트리트 아트가 부상하고 있었죠. 젊은 예술가들이 거리에서 표현을 시작했습니다. 주정부 입장에선 '그라피티(Graffiti)'는 골칫덩어리였지요. 표현의 자유와 예술의 자유로 보호받을 수 있지만 , 동시에 법적으로는 범죄로 취급될 수 있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었으니까요. 그라피티(Graffiti)가 행해지는 맥락과 장소, 그리고 사회적 합의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긴 하지만요.
'사모SAMO(1980)'라는 이름으로 장 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는 1978년부터 1980년까지 3년 동안 뉴욕 타임스 스퀘어 거리에 지속적으로 낙서(Graffiti)를 했습니다. 앤디 워홀을 비롯해 당시 예술계 인사들에게 'SAMO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소년'으로 바스키아는 존재를 알립니다. 그의 그라피티의 로고 또는 이름에는 '바스키아'를 썼지만 당시 함께 작업했던 협력자인 디아즈(Diaz)와 저지른 낙서들에는 상당히 신비스럽고 상징주의적인 태그 인 '사모 SAMO'를 썼습니다. 1980년 그의 협업자와 헤어졌을 때, 맨해튼 사방 군데에 써갈긴 '사모는 죽었다 SAMO IS DEAD'라는 낙서는 하나의 전설이 되었습니다.
The Beatutiful heavy breast, 1950, Jean Dubuffet/wikiArt.org
기존 아름다운 여인상에 눈이 익숙해져 있었다면 '헉' 할 수 있는 장 뒤뷔페의 <The Beautiful Heaby Breasts>라는 작품입니다. 제목만으로도 뒤뷔페(Dubuffet)의 예술 철학과 미의 전통적 개념에 대한 도전을 읽어 낼 수 있습니다.
뒤뷔페(Dubuffet)는 전통적인 서양의 미 개념, 특히 그리스로부터 물려받은 여성 신체에 대한 관념에 반발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고전적 미의 기준을 "비참하고 우울한"것으로 여겼고, 대신 새로운 종류의 아름다움을 추구했습니다.
"무거운 가슴"이라는 표현은 여성의 신체를 과장되고 왜곡된 형태로 묘사함으로써, 기존의 미적 기준에 도전하는 뒤뷔페( Dubuffet)의 의도를 나타냅니다. 동시에 "아름다운"이라는 형용사를 사용함으로써 , 그는 이러한 비전통적인 형태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고요. 여성의 신체를 자연 풍경이나 지구의 질감과 연관시키며, 풍요로움과 생명력을 찬양하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제목만으로도 뒤뷔페( Dubuffet)의 예술적 반항과 새로운 미의 기준을 제시하려는 그의 노력을 알 수 있습니다.
빨강은 가장 강렬한 색 중에 하나이다.
빨강은 피의 색이고
시각적으로 가장 강한 힘을 갖는다.
그래서 내 생각에는 신호등의 불빛도 빨강인 것 같다.
정지신호도 그렇고
실제로 나는 모든 그림에 빨간색을 쓴다.
-키스 해링(Keith Haring)-
1. Keith Haring, 빨강과 파랑의 이야기/ Artlecture.com 2. Jean- Michel Basquiat's Crowns/ Jean-Michel Basquiat
(그림 1). 키스 해링(Keith Haring , 1958-1990)은 많은 시간을 아이들과 함께 작업하는 데 보내었습니다. 그는 아동 도서를 여럿 출간하는가 하면, 팝 숍(pop shop)에서 판매할 어린이들을 위한 다양한 상품들을 디자인하기도 했습니다. 많은 도시에서 아이들과 워크숍을 개최하기도 하고요.
그는 빨강과 파랑을 먼저 그리고 검은선을 그려서 형태를 완성합니다. 모든 그림을 보면 빨간색이 꼭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빨강과 파랑의 이야기>. 이 작품은 특별히 해링이 어린이들을 위해 만든 21개의 석판화 시리즈입니다. 해링은 이 작품을 만들면서 어린이들이 자신만의 상상력을 발휘해서 각기 다른 이야기들을 만들어 내길 원했다고 합니다.
각 그림은 해링이 배열한 순서대로 배치되어 있고, 마지막 장에는 빨강과 파랑이 보라색의 계란 모양 형태가 되는 것으로 끝납니다. 해링은 시리즈가 합쳐져서 하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을 의도했다고 합니다. 키스 해링(Keith Haring)의 말처럼 어른들이 잊고 있는 아이들의 다양한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이야기 경연대회에도 자주 사용되고, 미국의 많은 학교, 어린이 미술관에서 교재로 채택해서 교육프로그램에 이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나는 갤러리 마스코트가 아니다.
진정한 스타가 되고 싶었다.
- 장 미셸 바스키아(Jean Michael Basquiat)-
(그림 2). 장 미셸 바스키아(Jean Michael Basquiat , 1960-1988)의 작품입니다. 그의 예술에서 중요한 상징 중 하나가 바로 <왕관 Crown>입니다. 특정 아티스트나 흑인들에 대한 존중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왕관은 바스키아 작품의 권위를 나타내는 표현이고요. 때로는 서명 대신 사용되어 작품의 소유권을 표시했습니다. 왕관은 바스키아의 야망, 결단력, 끈기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예술계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열망을 나타내기도 하고요. 특정 인물의 머리 위에 왕관을 씌우는 것은 그 인물을 사회의 규범적 모델과 대비되는 대안적 권위자로 인정하려는 의도를 보여줍니다. 왕관은 바스키아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그의 예술적 정체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가 바로 '왕관 Crown'입니다.
L'Hourloupe, 1966, Jean Dubuffet/ wikiArt.org
우를루프(L'Hourloupe)는 장 뒤뷔페( Jean Duvuffet, 1901-1985)의 대표적인 시리즈입니다. 우를루프(L'Hourloupe)라는 단어는 '외치다. 울부짖다. 늑대'를 뜻하는 각각의 프랑스어를 합쳐 만들었습니다. 동물적이고 원초적인 에너지를 담은 이름입니다.
뒤뷔페는 이 작업에 대담하고 자유분방한 검은 선과 함께 주로 붉은색과 파란색, 흰색을 사용했습니다. 선은 자유로우면서도 색은 제한적으로 사용해 조화를 이루고 있고요. 무의식적으로 연결된 이 선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떤 인물이나 형상이 끊임없이 등장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피아노나 계단, 탑, 배, 찻주전자 등 일상의 사물들을 해체해 검은색 굵은 테두리를 가진 비 정형의 모습으로 재구성하고 흰색과 붉은색, 파란색으로 조각 맞추기처럼 해체해 놓았습니다. 이 시리즈는 1962년 처음 시작되어 수십 년 동안 사랑받고 있습니다. 뒤퓌페는 쿠쿠바자 공연에서 이 우를루프(L'Hourloupe) 시리즈를 입체적으로 만들어 다양한 퍼포먼스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1. Ignorance= Fear, 1989/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2. Untitled, Jean Michael Basquiat/ 나무위키
(그림 1). 키스 해링(Keith Haring, 1958-1990)의 <Ignorance=Fear>(1989)작품입니다. Haring 은 1988년 AIDS(acquired immunodeficiency syndrome 후천성 면역결핍 증후군 ) 진단을 받았습니다. HIV(human immunodeficiency virus 인간 면역결핍 바이러스)에 의해 발생하는 감염성 질환입니다. HIV는 인체의 면역 세포를 파괴하여 면역력을 저하시키고, 이로 인해 각종 감염성 질환과 종양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주로 성접촉, 오염된 주사기 공동 사용, 감염된 혈액이나 혈액 제제의 투여, 감염된 산모로부터 태아로의 수직 감염이 주요 전파 경로로 보고 있습니다.
1960년대 미국에서는 AIDS가 공식적으로 인식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HIV는 존재했지만, AIDS라는 질병으로 명명되거나 인식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AIDS에 대한 인식은 1981년 미국 질병통제 예방센터(CDC)가 처음 보고하면서 공식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그 후 키스 해링(Keith Haring)의 예술은 AIDS 위기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데 중점을 두게 됩니다. 이 작품은 AIDS위기에 대한 미국 정부의 부적절한 대응을 비판하고, 대중의 무지와 침묵이 공포를 초래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림 속 세 인물은 각각 눈, 귀, 입을 가리고 있습니다. 이는 AIDS에 대한 무지와 두려움을 상징합니다. Haring 은 이 작품을 통해 사람들이 AIDS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고, 이해와 동정을 촉구하고자 했습니다.
(그림 2). '검은 피카소'로 불리는 장 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1960-1988). 2017년 뉴욕 소더비 컨템퍼러리 아트 경매에서 <무제 Untitled>가 1억 150만 달러 ( 약 1243억 원)에 낙찰되면서 그동안의 바스키아의 작품 경매 기록이 깨졌습니다. 아이들 장난 같은 낙서 그림입니다. 파란색 배경에 맞춰진 강렬한 윤곽의 두개골은 미국 예술가가 경매한 작품 중 두 번째로 비싼 작품이 되었습니다.
바스키아의 <무제 Untitled>' 작품, 특히 해골을 그린 1982년 작품은 그의 다른 작품들과 몇 가지 중요한 차이점을 보입니다. 이 작품은 다른 작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단순한 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복잡한 기호와 텍스트가 덜 사용되었고요. 해골이라는 단일 주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 다른 작품들에 비해 더 집중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강렬한 색상 대비를 사용하여 시각적 임팩트를 극대화했습니다. 이는 그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볼 수 있지만, 이 작품에서 특히 두드러집니다.
An Illustration from the American 1918 edition/wikipedia
8살 때 길거리에서 놀다 자동차에 치인 후, 바스키아(Basquiat)는 지라 (비장) 제거 수술을 받았다고 합니다. 회복하는 동안 병원 입원실에서 1858년에 발행된 '그레이 해부학 Gray's Anatomy'을 뒤적이며 시간을 보냈다고 해요.
이 책은 상세한 설명과 함께 다수의 삽화와 다이어그램을 제공하는 의대생이나 의료 전문가들을 위한 필수적인 책이라고 하네요. 엄마가 아들이 자신의 몸에 대해 잘 알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준 이 해부학 책이 훗날 그의 작업이 생체 역학 이미지가 새겨진 남다른 에너지의 그림을 선보이는 데 영향을 미칩니다.
어린 아들의 예술적 재능을 알고 그림을 그리게 하고, 뉴욕에서 열린 많은 미술관 전시회에 틈틈이 데리고 다니며 일찌감치 예술에 대한 사랑을 심어준 바스키아의 어머니. 개인적으로 바스키아의 그림 어딘가에 엄마의 몫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작품은 1억 1050만 달러에 팔려 미국 예술가 중 최고가 기록을 세웠습니다. 바스키아 작품 중에서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요. 이 <무제 Untitled> 작품은 바스키아의 예술적 비전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면서도 다른 작품들에 비해 더 강렬하고 직접적인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Coucou Bazar, 1973, Dubuffet's Animated Painting Revived in Paris/ The New York Times(Published 2013
장 뒤뷔페(Jean Duffet, 1901-1985)하면 '쿠쿠바자(Coucou Bazar)'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쿠쿠바자(Coucou Bazar)는 패션과 퍼포먼스, 입체와 평면, 가면, 오브제 등을 모두 포괄하는 종합 예술입니다. 움직이는 그림 공연이라고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뒤뷔페는 쿠쿠바자에 대해서 '더 이상 눈으로 보는 그림이 아닌, 실존하는 그림'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장 뒤뷔페가 '발포 폴리스티렌'이라는 재료로 조각을 만드는데, 이 조각으로 의상을 제작해서 배우들이 입고 공연을 합니다. 1973년에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처음으로 공연을 했고요. 이 쿠쿠바자(Coucou Bazar) 공연은 계속해서 대중과 만나면서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무너뜨립니다. 작품을 미술관이나 갤러리가 아니라 거리로 걸어 나오게 한 거죠.
https://www.youtube.com/watch?v=DWOch_ymZgw
앤디 워홀은 가벼운 주제를 무겁고 심각하게 표현한 반면,
키스 해링은 정반대로 무거운 주제를 밝게 그려낸다.
-오노 요코(세계적인 멀티미디어 예술가)-
1. 앤디 워홀과 키스 해링/ Arts&Culture 2. 앤디 워홀과 바스키아/ 노블레스닷컴
팝아트의 거장인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입니다. 캠벨 수프캔과 마릴린 먼로 초상화로 유명하지요. 그는 상업 예술을 전공한 후 뉴욕에서 활동하며 잡지 삽화와 광고 디자이너로 명성을 쌓았습니다. 실크스크린 기법을 활용해 대량생산과 복제를 통해 예술을 표현했지요. 대중문화와 소비문화를 예술로 승화시킨 인물입니다.
키스해링(Keith Haring, 1958-1990)은 생전 앤디워홀(Andy Warhol)과 많은 교류를 했습니다. 앤디 워홀의 뒤를 이어 팝 아트의 전성기를 이끌 화가로 기대를 받기도 했고요. 워홀은 해링의 멘토이자 영웅으로, 해링의 예술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해링은 워홀에 대한 존경심을 작품으로 표현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앤디 마우스 Andy Mouse>입니다. 이 작품은 워홀의 이미지를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디즈니의 미키 마우스와 결합하여 표현한 것으로, 팝 아트의 거장인 워홀에 대한 경의를 나타냅니다.
두 예술가는 팝 아트와 그라피티의 아트의 융합, 그리고 대중문화화 순수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해링은 워홀로부터 영감을 받아 예술의 대중화와 상업화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발전시켰으며, 이는 그의 작품 세계와 예술 철학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1983년 첫 만남을 시작으로 나이 차이를 뒤로 한 채 서로에게 영감을 주고받는 예술적 동지가 됩니다. 그런데 워홀이 세상을 떠나자 해링은 이 '엔디 마우스 시리지'로 워홀을 추모했습니다. 그림 가운데 생쥐가 귀가 달리고 큰 안경을 쓴 캐릭터가 보이시죠. 이 캐릭터가 해링이 생각한 워홀의 이미지입니다. 굵은 검은 선 몇 개 그렸을 뿐인데 리듬감이 느껴지죠. 대중들이 떠받들고 있는 이미지도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고요.
너무 대충 그린 그림이잖아 (앤디 워홀)
당신 그림도 그렇잖아요?(장 미셸 바스키아)
소호(SOHO)의 거리에서 그라피티를 하고 티셔츠에 그림을 그려 팔던 아이티계의 바스키아와 당대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며 전성기를 구가했던 아티스트 워홀이 만나게 됩니다. 소호(SOHO)의 한 레스토랑에서 만든 엽서를 앤디 워홀에게 팔기 위해 보여주었고, 워홀은 바스키아의 천재성을 알아보게 됩니다. 미국의 미술 시장은 새로운 스타를 갈망하고 있었고 바스키아의 격정적인 추상 표현주의 작업은 화랑가를 열광하게 합니다. 최초의 흑인 아티스트가 미술시장에 탄생하게 된 것이라서요.
뉴욕 그린위치 빌리지의 거리에서 티셔츠에 그림을 그려 팔고 용돈 벌이를 하면서 TV 출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1982년 카셀도큐멘타에 최연소 작가로 참여하기도 했고요. 카셀 도큐멘타는 현대 미술의 중요한 플랫폼으로 , 독일 카셀에서 5년마다 열리는 세계적인 현대 미술 전시회입니다. 이 전시회의 7번째 에디션에 최연소(21살) 작가로 참여했습니다. 두 사람은 워홀의 동료인 미술상 브루노 비쇼프 베르거(Bruno Bischofberger)와 그라피티 아티스트 키스 해링 (keith Haring, 1958-1990)의 소개로 가능했고, 워홀의 작업실 '공장 Facotry'에서 마주합니다.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이 남긴 다이어리에 보면, 이미 유명했던 앤디 워홀에게 바스키아는 수많은 스타작가 워너비 중 한 명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바스키아의 예술성은 대중들과 미술 전문가들에게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기 시작하면서 앤디 워홀도 바스키아의 존재를 인정하게 된 것 같습니다.
워홀의 작품이 대체로 정제되고 계산되는 느낌이라면, 바스키아의 작품은 보다 원시적이고 직관적인 특성을 보입니다. 바스키아의 '낙서'같은 표현 방식은 워홀의 예술적 성격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입니다. 두 사람은 친구사이를 너머 거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같은 사랑과 지원의 연결로 이어집니다. 워홀은 제도권 밖의 바스키아에게 후견인 역할을 자처했으니까요. 워홀 소유의 다락방으로 이사해 그곳에서 작업을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1983)
Jean Michel Basquiat, 2023 & Andy Warhol/ Time Out
장 미셸 바스키아의 <두 개의 머리 Dos Cabezas, 1982) 작품입니다. 당시 54세였던 워홀은 22세에 불과한 바스키아와 함께 폴라로이드를 찍었습니다. 바스키아는 집으로 돌아가 2시간 만에 이 사진을 바탕으로 워홀과 자신의 얼굴을 그려 물감이 마르기도 전에 워홀에게 보냅니다. 워홀은 그 작품의 뛰어남에 경외감을 느꼈습니다. 마스크, 두개골, 그라피티, 모호한 상징은 곧 워홀의 팝 아트 이미지, 로고, 신문 헤드라인과 함께 공동 초상화로 결합되었습니다.
https://vimeo.com/554605278
Jean dubuffet's Tour aux Figures/ Visit ParisRegion / la Tour aux Figures de Jean Dubuffet
map of Kanton Issy-les-Moulineaux.png/WiKimedia Commons
Jean Dubuffet(Jean Dubuffet , 1901-1985)의 <La Tour aux Figures 인물들의 탑 또는 형상들의 탑>는 프랑스 Issy-les-Moulineaux에 위치한 24미터 높이의 조형물입니다. 1986년부터 1988년까지 건설한 거대한 조각 작품입니다. 1967년에 1미터 높이의 모델이 처음 제작되었습니다. 당시 폴리스티렌으로 만든 조각을 수지로 덮어 제작되었고요.
추상적이면서도 인간의 형태를 연상시키는 요소들이 Dubuffet 의 예술 스타일이지요. 강화 콘크리트로 만들어졌으며 에폭시 수지로 덮여 있습니다. 흑백 배경에 빨간색과 파란색 디테일이 특징인 이 구조물을 Dubuffet의 독특한' Hourloupe '스타일을 보여줍니다. 탑의 표면에 그려진 이러한 추상적 형상들이 "Figures"라는 단어로 표현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이름처럼 거대한 탑 구조물에 Dubuffet 특유의 추상적이고 인간적인 형상들이 가득한 작품의 본질을 잘 담아내고 있습니다.
Dubuffet는 건축가 Antoine Butor와 협력하여 내부 구조를 설계했습니다. 내부에는 117미터 길이의 "Gastrovove" 계단이 있습니다. 이 계단은 가이드 투어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습니니다. 이 작품은 1988년에 완공되었으며, 1992년과 2008년에 각각 역사적 기념물로 등록되었습니다. Dubuffet는 예술과 건축의 경계를 넘나들며, 그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구현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0ooUVvJwdg
https://www.youtube.com/watch?v=yDYykA8WVqw
1. Tuttomomdo, 1989.Keith Haring, Pisa,Italy /Alamy 2. Riding with Death, 1988, /Singulart
(그림 1). 1989년 6월 키스 해링( Keith Haring)이 이탈리아 피사에 그린 <Tuttomomdo>(전 세계)는 그의 마지막 대규모 공공 벽화 중 하나입니다. 이 작품은 피사 시내 Sant'Antonil Abate교회의 외벽에 위치하며, 180제곱미터의 거대한 규모를 자랑합니다. 이 작품은 피사 대학생 Piergiorgio Castellani와의 만남을 통해 시작되었습니다. Castellani는 Haring을 피사로 초청하여 이 프로젝트를 계획했고, 피사 시와 협력하여 벽화를 완성했습니다.
< Tuttomomdo>는 세계 평화와 조화를 주제로 30개의 다채로운 인물 형상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 캐릭터는 평화로운 세계의 다양한 측면을 상징하고요. 예를 들어 '인간화된'거위는 악(뱀)을 물리치기 위한 협력을, 아기를 안고 있는 여성은 모성을, 돌고래를 지지하는 두 남성은 자연과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또한 키스 해링 특유의 밝고 선명한 색상들은 보는 이들에게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감정을 전달해 줍니다.
이 벽화는 해링(Haring) 이 처음부터 영구적인 작품으로 구성한 유일한 작품입니다. 그가 보통 하루 만에 벽화를 완성했던 것과 달리 일주일이 걸쳐 제작되었습니다.
<Tuttomomdo>는 해링의 특유의 만화 같은 스타일로 그려졌고,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피사(Pisa)의 숨겨진 보물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UgNeCynVUU
예술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공통의 관심사가 많았던 앤디 워홀과 바스키아는 1984년과 1985년 2년 동안 약 160점의 그림을 함께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협업이 1985년 가을 열린 전시회에서 합작한 작품 16점에 대해 혹평이 쏟아집니다. 당시 뉴욕 타임스는 "(바스키아가 ) 워홀의 명성에 편승했다. (워홀은) 젊은 바스키아의 인기를 이용한다."며 두 사람을 싸잡아 비난했습니다. 실패한 전시회 이후 두 사람의 갈등은 심해지고 결국 결별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워홀이 가벼운 담낭수술을 받은 다음날 상태가 갑작스레 악화돼 갑자기 세상을 떠납니다. 워홀의 나이 58세였죠. 여린 감수성을 지녔던 바스키아는 워홀의 죽음과 함께 자신을 스스로 고립시킵니다. 우울증과 마약에 깊이 빠지게 되고요.
(그림 2). 장 미셸 바스키아(Jean Michael Basquiat , 1960-1988)의 <Riding with Death>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죽기 몇 주 전에 그려진 작품입니다.
위 작품에는 해골 위에 올라탄 인물이 중앙에 그려져 있습니다. 기존 그림에서 볼 수 있던 바스키아 특유의 거칠고 표현주의적인 붓질과 강렬한 색채감이 덜 합니다. 텍스트와 기호도 보이지 않고요.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던 걸까요. 어딘가 힘이 빠진 듯한 바스키아이 이미지는 죽음과 삶의 관계, 그리고 인간의 필멸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앤디 워홀이 세상을 떠난 지 2년이 지난 1988년 늦여름, 바스키아는 그의 작업실에서 헤로인 과다복용으로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HePKNTRmdI
Keith Haring (1958-1990)& Jean - Michel Basquiat(1960-1988)/ MGFS100
자신만의 독특하고 식별 가능한 예술 스타일을 창조했던 4명의 작가들. 이들의 작품은 그들이 살았던 시대와 많이 닮아 있습니다. 대중과 호흡하고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애쓴 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이죠. 그만큼 대중문화와 사회 현상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살아있는 유기체란 말이기도 하지요.
그들의 작품은 종종 사회적,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기도 합니다. 자신이 속했던 사회의 이슈들을 정면으로 맞서기도 하고, 대중으로부터 큰 담론을 이끌어 내기도 하며,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지 않도록 자신의 재능을 아낌없이 풀어낸 작가들입니다.
전통적인 미술교육이나 갤러리 시스템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예술 세계에 진입했던 용기 있는 프런티어들이기도 하지요. 여전히 기절할 정도의 큰 액수로 깰 수 없는 투명벽을 만들어 놓지만요. 그들이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허물어 대중과 더 가까이에서 소통하는 싶어 했던 시도만큼은 엄지 척해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