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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2. 디테일과 분위기

조르조네 &한스 홀바인




https://www.youtube.com/watch?v=MhVyG-RZZss





오래된 영화 한 편을 들고 왔습니다. 영화 <Anne of the Thousand Days>(1969)는 16세기 영국 튜더 왕조를 배경으로 합니다, 헨리 8세와 그의 두 번째 아내 앤 볼린의 비극적인 사랑과 권력 투쟁을 그린 영화지요. 영화의 원전은 Maxwell Anderson이 주연한 연극으로 (1948년 Broadway에서 초연) 연극의 소재인 간통, 사생아. 근친상간이 당시 미국 영화계와 코드가 맞지 않아서 영화가 되는 데 20년이 걸린 작품입니다.





영화는 1536년 영국왕 헨리 8세가 자신의 6명의 왕비 중 두 번째 부인인 앤 볼린(Anne Boleyn)의 처형을 고민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헨리 8세는 왕위 계승을 위해 아들을 원하지만, 형수이자 첫 번째 아내 캐서린과의 사이에서는 아들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던 중 프랑스에서 교육받고 돌아온 영리하고 야심 찬 앤 볼린에게 매료되어,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캐서린과의 이혼을 추진합니다. 이 과정에서 클레멘스 7세(1523-1534) 교황과의 갈등이 심화되고, 결국 헨리 8세는 앤과 결혼합니다. 가톨릭 교회와의 분리이고 영국 국교회의 시작이지요. 헨리 8세는 스스로 성공회의 수장이 되어 영국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한편 앤은 딸 엘리자베스만을 낳고 아들을 얻지 못해 초조해합니다. 헨리 8세는 점차 앤에게서 마음이 멀어지고요. 헨리 8세의 심복 크롬웰은 앤을 축출하기 위해 간통과 근친상간 등의 누명을 씌우는 음모를 꾸밉니다. 결국 앤은 재판 끝에 사형을 선고받고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이 영화는 권력, 배신, 정치적 음모, 그리고 사랑과 욕망이 버무려진 왕실의 어두운 이면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앤의 딸 엘리자베스가 훗날 영국의 위대한 여왕이 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오늘은 영국 헨리 8세의 궁정화가였던 독일 출신의 화가 한스 홀바인( Hans Holbein the Yonger, 1497-1543)과 베네치아 학파로 동료 티치아노와 함께 베니스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요절한 화가 조르조네 ( Giorgione, 1477/1478-1510)의 작품을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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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조네( Giorgione, 1477/1478-1510)는 티치아노(1488-90 ~1576)와 함께 16세기 베네치아 르네상스 양식을 발전시킨 화가입니다. 빛과 색채를 이용해 그림에 이야기와 시적 감흥을 담았습니다. 철학에도 조예가 깊어 그림 속에 다양한 암시를 심어 놓아 그의 작품들은 유럽 회화에서 가장 미스터리하다고 평가됩니다.





16세기와 17세기 내내 높은 명성을 누리며 이탈리아 회화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그러나 그가 일찍 세상을 떠나 그의 작품이라고 전하는 것은 극히 드뭅니다. 조르조네의 작품이라고 전하는 것 중 확실한 것은 베네치아 귀족 마르칸토니오 미카엘이 작성한 베네치아 개인 박물관에 있던 것들로 < 폭풍우>, <세 명의 철학자>, <잠자는 비너스>, <전원의 합주> 등 약 5점에 불과합니다.





이마저도 논쟁의 여지가 있고요. 조르조네의 미완성 그림들을 그의 동료 화가들이 마무리 지었기 때문이죠. 이중 < 세 명의 철학자>는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Sebastiano del Piombo,1485-1547)가, <잠자는 비너스>는 티치아노(Tiziano Vecellio, 1488-90~1576)가 완성했으며, <전원의 합주>는 티치아노의 작품이거나 두 사람의 공동 작품이라는 등 견해가 분분합니다.





1477년경, 베네치아 카스텔프랑코에서 태어난 조르조네는 어린 시절 조반니 벨리니( Giovanni Bellini, 1430-1516)의 공방에서 도제 수업을 받았습니다. 전하는 그림 수가 적고 기록이 전무한 만큼 그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 누구에게 주문을 받아 그림을 그렸는지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가 많이 없습니다. 다만 1507년 베네치아 두칼레 궁 접견실 장식화를 그렸으며 , 이듬해 독일인 교역소 폰다코 데이 테데스키 외벽에 프레스코화의 일부를 그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두 작품은 모두 소실된 상태이고요.






조르조네는 그림의 배경을 중시했습니다. 특히 배경 풍경을 그리는 데 뛰어났고요. 그는 종교화를 그리거나 신화, 고전을 다룰 때도 풍경을 주체적으로 담았습니다. 풍경이 더 이상 배경이 아닌 독자적인 장르로 키워갔습니다. 또한, 그의 그림은 따뜻한 빛으로 전체 화면을 감싸고, 스푸마토 기법을 사용해 부드럽게 표현했습니다. 그림 속 요소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시적인 분위기를 연출했고요.





수푸마토 기법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1452-1519)가 앞서 사용한 기법으로 '연기처럼 사라지다'라는 뜻의 이탈리아어'스푸마레(sfumare)'에서 유래된 단어입니다. 물체의 색을 자연스럽게 번지게 하여 대상의 윤곽선을 불분명하게 보이게 하는 기법입니다.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의 눈꼬리와 입꼬리 등에서 볼 수 있습니다. 모나리자의 미소가 신비롭게 보이도록 한 기법입니다. 조르조네는 모티브를 윤곽선이 아닌 색의 조화와 대비로 표현했습니다. 후일 티치아노 기법의 특징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Augsburg, Germany/BBC







한스 홀바인 2세(Hans Holbein the Yonger, 1497-1543)를 소개합니다. 15세기 -16세기 독일의 거장입니다. 북유럽 최고의 초상화가이기도 하고요. 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갔던 일중독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독일 남부의 상공업이 발달한 도시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우크스부르크파의 창시자인 화가 한스 홀바인 1세(Hans Holbein the Elder)입니다. 삼촌인 지그문트와 함께 다소 보수적인 성격을 띤 독일 후기 고딕 양식의 그림들을 그렸습니다. 이름이 같은 아버지와 아들을 구분하기 위해 이름 뒤에 "1세( the Elder)"를 아들의 이름뒤에는 "2세( the younger)"를 붙였습니다. 홀바인은 어려서부터 형과 함께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아우크스부르크파 고유의 정밀하고 사실적인 화풍을 익혔습니다.






홀바인이 독일 미술의 2번째 세대에 속하는 화가로 활동을 시작할 무렵 당시 독일은 알브레히트 뒤러( Albrecht Durer, 1471-1528)와 마티아스 그뤼네발트( Matthias Grunewald, 1470-1528), 루카스 크라나흐( Lucas Cranach, 1472-1553)등이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미 성숙한 걸작들을 그려내고 있었지요. 특히 한스 홀바인에게 마티아스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 제단화는 큰 영감을 주었고, <The Body of the Dead Christ in the tomb> 작품을 그려 충격을 주었습니다.





Basel, Switzerland/Pinterest






홀바인 형제는 1515년경 스위스의 바젤에서 독립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바젤은 인쇄업과 인문학이 크게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바젤에서 유명한 화가인 한스 허브스터의 문하생으로 들어갔습니다. 2년 뒤 독립한 그는 출판계의 대부 요한 프로벤이 출판하는 서적에 삽화를 그렸습니다. 1519년, " 바젤 화가 길드"로부터 가입을 허가받아 바젤 미술계의 화가가 되어 이듬해인 1520년부터 직업화가로 정식으로 활동했습니다.





같은 해인 1520년 한 제혁업자의 미망인과 결혼하고 바젤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1521년경에는 바젤 시청의 대회의장에 벽화들을 그렸고요. 종교개혁(1517)의 여파로 1522년경 바젤에 신교 강경파인 칼뱅파가 들어오게 됩니다. 신자들은 근검하고 절제된 생활 태도를 지향하다 보니 집을 꾸미는 것도 일종의 사치라고 반대했습니다. 1526년경 격렬한 성상파괴 폭동과 언론에 대한 엄격한 검열이 이 도시를 휩쓸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화가들의 가장 큰 수입원인 교회 제단화를 더 이상 그릴 수 없게 됩니다. 화가들이 먹고살 길이 막혀버린 거지요. 홀바인은 1526년 말 네덜란드의 인문주의 학자인 에라스뮈스( Desiderius Erasmus, 네덜란드 로테르담- 1535,7,12 스위스 바젤)의 소개장을 받아 바젤을 떠나 네덜란드를 거쳐 영국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납니다.




여기 바젤에서는 미술이 철저하게 냉대받고 있습니다.

- 에라스무스(Desoderius Erasmus)-





에라스무스의 추천장을 들고 영국 런던으로 건너온 홀바인 . 그와는 유명한 <우신예찬 In Praise of Folly >(1511)의 삽화를 그리며 알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대표적인 풍자문으로 평가받는 작품입니다. 친구 토마스 모어의 별장에서 집필한 책이고요. 종교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행태를 비판하며 종교적 폐해에 대한 결정적인 공격을 가한 책입니다.







영국에서 홀바인은 토머스 모어 경( Sir Thomas More, 1478-1535)의 도움으로 성공적으로 정착합니다. 당시 영국의 회화는 낙후되어 있었습니다. 홀렌 보트 가문 등 몇몇 네덜란드 미술가들이 장악하던 중에 영국 궁정에서 독일 르네상스의 대표 화가를 반겼습니다. 홀바인은 1526년부터 1528까지 런던에서 활동했고, 이때부터 사진처럼 정교하게 묘사한 홀바인만의 초상화가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스위스 바젤로 돌아가 활동하다 다시 영국 방문길에 오릅니다. 1533년경 홀바인은 이미 궁정의 저명인사들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4년 뒤에는 헨리 8세의 궁정 화가가 되었고요. 생애의 이 마지막 10년 동안 홀바인은 왕족과 귀족을 모델로 한 초상화를 150점가량 그렸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실물 크기의 초상화도 있었고 세밀 초상화도 있었습니다. 홀바인은 초상화가로서뿐만 아니라 궁정의 패션디자이너로서도 활동했습니다. 그는 왕의 모든 예복을 디자인했으며 그 밖에도 왕족을 위하여 단추와 버클에서부터 행렬용 무기와 마구, 책의 장정에 이르기까지 250가지가 넘는 품목의 정교한 디자인을 남겼습니다. 그가 인생 말기에 그린 작품들은 예술적으로 최고의 수준에 이르렀고 그가 그린 초상화는 영국의 회화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wikipedia







튜더왕조 가계도/딴지일보



영국 헨리 8세와 부인들 /에펨코리아







Portait of Henry VIII of England, 1539-1540, Museo Thyssen/wikipedia


Portrait of Henry VIII, 1536-37/wikipedia






한스 홀바인( Hans Holbein the Younger, 1497-1543)이 그린 헨리 8세의 초상화입니다. 어떠신가요? 왕의 초상화를 자주 볼 일 없는 일반인들에게 이 초상화의 위엄은 단연코 최고일 겁니다. 이미지를 정치에 활용할 줄 알았던 왕이기도 하고요. '무섭고, 두렵고, 그리고 신성하게'라는 헨리 8세가 추구하는 이미지를 가장 만족시킨 초상화가가 바로 한스 홀바인입니다.




헨리 8세의 보석 사랑은 유명합니다. 흰색 깃털로 치장한 모자에 박힌 사파이어와 진주장식, 상의에 박힌 붉은 빛깔 보석장식, 손가락에 낀 보석 반지 그리고 커다랗고 둥근 목걸이 장식 역시 시선을 잡습니다. 온몸에 화려한 보석을 두르고 부강한 권력과 절대 권력을 과시하고 싶었나 봅니다.




1535년 토마스 모어의 추천으로 홀바인은 헨리 8세의 궁정 화가가 되었습니다. 그의 초상화는 카메라로 찍은 듯한 사실감이 특징입니다. 홀바인의 헨리 8세 초상화는 보는 이를 왕의 존재감으로 압도합니다. 황금빛 자카드 천으로 된 소매 주름은 왕의 넓은 어깨를 강조하고, 금사로 화려하게 수놓아진 붉은 벨벳 상의 안에는 엄청난 양감의 몸통이 가득 차 있습니다. 신체 비율을 전체적으로 확대시켜 마치 문학에서 과장법을 사용하듯 시각적 효과를 이용하여 왕의 위엄을 강조했습니다. 이 시기는 헨리 8세가 자신의 이혼 문제로 교황 클레멘스 7세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 사이에서 줄타기하고 있던 때이기도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dZcqAss92w&t=2s


Henry VIIIand Henry VII, Cartoon for Wall Painting in Whitehall, 1537/wikipedia



Christina of Denmark, 1538/wikipedia







이 작품은 덴마크의 크리스티나의 초상화로, 그녀는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의 막내딸입니다. 1538년, 헨리 8세는 세 번째 부인 제인 시모어 ( Jane Seymour, 1508-1537)가 산후 후유증으로 죽자, 네 번째 부인을 찾고 있었습니다. 헨리 8세의 명령을 받고 홀바인은 16세의 크리스티나의 모습을 담기 위해 브뤼셀로 보내졌습니다.




1535년 남편인 밀라노 공작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검은 상복을 입고 있는 크리스티나의 모습입니다. 검은색 털 안감의 새틴 드레스와 검은색 모자를 착용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얼굴과 손은 깊은 검은색과 대비되어 창백하고 여리게 보입니다. 사춘기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차분하고 평온한 태도는 그녀의 존재감을 돋보입니다.



홀바인이 크리스티나와 함께 보낸 시간은 1538년 3월 12일 오후 1시부터 4시까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짧은 시간 동안 홀바인은 초상화의 기초로 사용될 스케치를 만들었습니다. 헨리 8세는 이 이미지에 매우 만족했다고 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 기분 좋아 하루 종일 음악가들에게 악기를 연주하게 했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러나 혼담은 실패합니다. 크리스티나 입장에서 다행한 일이었죠. 헨리 8세는 1547년 사망할 때까지 크리스티나의 초상화를 소장했다고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s2qI6PeD8







The Old Woman, 1505/wikipedia




조르조네(Giorgione, 1477,78-1510)의 < The Old Woman> (1505)입니다. 노화라는 주제로 그려진 그림입니다. 그는 이 그림을 통해 시간의 흐름과 인간 삶의 자연스러운 변화를 담담하고 진지하게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이 초상화는 단순히 인물의 외모뿐 아니라, 나이 듦에 대한 철학적 사유와 인간 존재의 덧없음을 상징적으로 전달합니다. 그래서 보는 이로 하여금 삶과 죽음, 시간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만듭니다. "시간과 함께"라는 종이쪽지를 들고, "오늘은 내 차례, 다음번은 관람객차례"라는 듯 볼품없는 그녀의 모습과 주름, 희어진 머리칼에서 '시간'이라는 공평한 선물을 기억하게 합니다.









The Ambassadors, 1533, National Gallery,London/wikipedia
unlocking hidden mysteries/Quaerentiao OLD






한스 홀바인( Hans Holbein the Younger, 1497-1543)이 그린 <대사들 The Ambassadors>(1533)은 최초의 실물 크기 초상화로 꼽히는 작품입니다. 수많은 초상화 가운데 최고를 꼽으라면 주저하지 않고 뽑을 정도입니다. 로마 가톨릭은 헨리 8세의 이혼을 회유하기 위해 프랑스 외교관 장 드 당트빌( Jean de Dinteville)과 그의 친구 조르쥬 드 셀브( Georges de Selve)가 대사로 파견된 상태였습니다. 장 드 당트빌은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초상화가로 유명했던 한스에게 자신들의 그림을 의뢰했습니다.








Peter Apian's arithmetic book/wikipedia







작품을 보면 왼쪽에 장 드 당트빌, 오른쪽에 조르쥬 드 셀브가 서 있습니다. 긴장한 듯 보이지만 자신감이 있어 보이는 표정이고요. 그리고 구석구석에 재미있는 장치들을 숨겨 놨습니다. 장 드 당트빌이 들고 있는 단검에 그의 나이 29세, 조르쥬 드 셸브 옆에 놓은 책에는 그의 나이 25세가 적혀있습니다.







The Ambassadors(detail)/ www. wga.hu




그리고 인본주의, 문학, 항해술, 과학 등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소품들이 책상 위에 놓여 있습니다. 섬세하게 그려진 지구본을 비롯해 기술의 발전을 의미하는 각도기등도 보입니다. 당트빌의 지식과 부가 상당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네요. 하단에 펼쳐진 성가집과 줄이 끊어진 류트는 16세기 거세게 불었던 신교와 구교 간의 불협화음을 나타냅니다.



Lute with broken string/wikipedia




A Page from the Lutheran hymnal/wikipedia






가장 특이한 것은 중간에 비스듬히 등장하는 해골문양입니다.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은 허영심을 경계하고 겸손하라는 의미로 당시 여러 초상화에서 '왜상기법( anamorphosis)'이라는 이름으로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혹시 커튼 뒤에 숨겨진 그리스도상이 보이실까요? 왼쪽 상단 커튼에 가려져 놓치기 쉽습니다. 이런 대사들의 파견 노력에도 불구하고 헨리 8세는 이혼을 강행했고 엔 불린과 결혼했습니다.





The Carpet and the globe/ Smarthistory




anamorphic Art/Amusing Planet



아나모르포시스 anamorphosis) 기법은 특정 관점에서 의도된 형상이 나타나도록 왜곡된 이미지를 활용하는 예술 기법입니다. 아나모픽 기법은 '일그러진 상'을 의미하며, 특정 각도나 방법으로 볼 때 작가가 의도한 형상이 나타나도록 하는 착시 예술의 일종입니다. 관람자가 이미지를 인식하기 위해 특정 위치에서 보거나 특수한 장치를 사용해야 하는 시각 예술 기법을 아나모르포즈( Anamorphose) 또는 아나모픽 아트 ( Anamorphic Art)라고 합니다. 특정한 지점에서만 제대로 보이며 , 그 지점이 화면을 기준으로 사각에 위치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OvxK_3HEco









두명의 초상화 Doppio ritratto, 1502-03/wikipedia

오른쪽: Portrait Georg Gisze by Hans Holbein/Alamy







조르조네의 < 두 명의 초상 Doppio ritratto>(1502) 작품입니다. 초상화의 인물이 누구인지보다 인물이 지닌 '태도'와 '기분'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앞에 조그만 오렌지를 들고 있는 남자는 사랑에 빠져 있나 봅니다. 어둠 속에서 조용히 떠오른 듯한 그는 다소 무기력한 몽상가 같은 모습입니다. 반면 뒤에 있는 남자는 사랑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단호한 표정으로 서 있습니다. 사랑에 빠진 몽상가와 단호한 현실주의자라는 대조적인 인물의 내면 상태가 바로 조르조네가 그리고 싶었던 부분입니다.





이 작품 외에도 여러 작품에서 그는 자부심에 가득 찬 표정, 멍한 표정, 놀라는 표정, 멜랑콜리한 표정, 허탈한 표정 등 다양한 표정들을 그렸습니다. 덕분에 그림 속 인물들은 우아함이나 혹은 영원함을 지향하는 무표정의 마법에서 해방되어 살아 있는 인간의 감정을 담아낼 수 있었습니다. 인물의 아름다움은 생김새에서 만 나오는 게 아니라는 것, 그가 가지고 있는 분위기에 서도 나온다는 것을 조르조네는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Portrait of Georg Gisze, 1532/The Art Stroy




한스 홀바인의 < Portrait of Georg Gisze>(1532) 작품입니다. 런던에서 독일 상인이었던 게오르크 기세를 그린 초상화입니다. 이 작품은 독일 르네상스 미술의 마지막 걸작 중 하나로, 홀바인이 영국으로 가기 전에 스위스 바젤에서 그린 그림입니다.





호사스러운 융단과 인장, 깃펜, 동전, 편지가위 등으로 보아 이 사람이 상인임을 설명합니다. 꽃병의 꽃들은 사랑과 순수를 상징합니다만, 놓여있는 위치가 조금만 잘못 건드려도 깨지기 쉬운 모양새입니다. 그만큼 겸손해야 한다는 뜻이지요.






홀바인은 초상화를 통해 주인공의 지위를 외관상 해치지 않으면서도 상징적으로 정확하게 묘사했습니다. 인물을 가까운 거리에서 그린 듯 화면에 빈틈없이 채워져 있습니다. 인물의 심리를 꿰뚫는 그의 통찰력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K38qqvLQ2I




베네치아화파(Venetian School)


자코포 벨리니(1400-70):초기 르네상스



사위 안드레아 만테냐(1431-1507)/ 형,젠틸레 벨리니( 1429-1507)/ 조반니 벨리니 ( 1430-1516)

세바스티아노 델 피 옴보(1485-1547)

자코포 베키오( 1480-1528)

조르조네( 1477-1510)

티치아노( 1488-90~1576)





폭풍 Tempest, 1505/Italian Renaissance ART








밤과 폭풍우 같은 자연현상과 여기에서 비롯된 정취를 묘사하는 데 특히 뛰어났던 조르조네( Giorgione, 1477-78~1510)의 대표작 <폭풍우 Tempest>(1505)입니다. 풍경을 독자적인 주제로 다룬 혁신적인 그림으로 르네상스 풍경화의 이정표가 되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1506년경 베네치아의 귀족 가브리엘레 벤드라민의 주문으로 제작되었습니다. 폭풍우 치는 언덕과 도시,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여인, 병사 등 연관성 없는 요소들이 한데 어우러져 주제와 의도가 무엇인지 해석이 분분한 작품입니다.





애초에 등장하는 소재들이 특정 주제 아래 상징적 알레고리로 작용하는지, 그렇지 않으면 주제 없이 자유롭게 그린 그림인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번개를 제우스의 상징으로 보아 신화적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아기를 모세로 보고 구약성서에서 이집트를 떠나 피신하는 중 휴식을 취하는 모세를 의미한다는 견해도 있고요. 또한 군인은 아담, 여인을 이브로 보고, 젖을 먹는 아기는 죄를 짓지 않은 상태의 카인으로 보기도 합니다. 전경에 숨어 있는 뱀은 이브를 꼬여 낸 뱀으로, 배경의 번개 치는 언덕과 마을은 이들이 추방된 낙원으로 보는 견해이지요. 또한 베네치아에서 당시 유행하던 포에지로 보기도 합니다.



혹자는 화면 중앙에 있는 부러진 두 개의 기둥과 건물 외벽에 그려진 바퀴가 도시 파두아를 의미한다고 해석해 반 베네치아 성향의 캄브라이 연맹 전쟁, 즉 베네치아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경고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어찌 되었든 제 눈에 바람에 나무가 흔들리고 있고, 천둥 번개가 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어쩌면 이 그림에서 화가의 관심사는 바로 '폭풍'그 자체일지도 모르지요. 초록색과 아쿠아마린의 청량한 물색과 여러 푸른색이 기가 막힌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 이 작품에 눈을 떼기 힘든 매력입니다. 이렇게 그림에 대한 스토리를 쉽게 짐작할 수 없다는 점 또한 조르조네 작품의 치명적인 매력이고요.






사물과 인물을 나중에 공간 속에 배치한 것이 아니라,
땅, 나무, 빛. 공기, 구름 등의 자연과 인간을 하나로 생각했다.
이것은 거의 원근법의 창안과 맞먹는 새로운 영역을 향한 하나의 발돋움이었다.
이제부터 회화는 소묘에 채색을 더한 것 이상의 의미가 되었다.
회화는 그 자체의 비밀스러운 법칙과 방안을 갖는 하나의 예술이 되었다. "
-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



곰브리치가 지적한 대로 조르조네는 지금 폭풍이 올 것 같고 비가 올 것 같은 느낌, 무릎이 쑤시고, 땅에서 습한 냄새가 올라오는 것처럼 우리가 실제적으로 감각할 수 있는 미묘한 흐름과 공기의 변화를 그리고 싶었던 것인지 모른다. 데생이 아닌 미묘한 색채의 사용으로만 말이다. 잘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이 미묘한 뉘앙스들을 살리는 것에 화가가 도전한 듯 보인다.





https://www.youtube.com/watch?v=LFA_qmGuY2A&t=1s







The Body of the Dead Christ in the Tomb, Kunstmuseum Basel/Wikipedia, 1521






거기에는 인간의 시체가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을 뿐이다.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에 받았던
끝없는 고통, 상처, 고뇌,
십자가를 지고 가거나 넘어졌을 때 행해졌던
보초의 채찍질과 사람의 구타...
적어도 6시간 동안 계속되었던
십자가의 고통을 다 참아낸 자의 시체...
-표도르 도스트엽스키-




한스 홀바인의 (Hans Holbein the Younger, 1497-1543)의 <The Body of the Dead Christ in the tomb>(1521) 작품입니다. 이 작품을 보고 많은 이가 충격에 빠졌습니다. 중지를 뻗고 있는 예수의 손 모양도 그렇고, '예수의 시신'에 머물러 있는 '죽음'을 너무나 사실적으로 표현한 탓도 크지요.





십자가에 매달린 모습의 예수님 모습을 상상하는 사람이라면 벌어진 입과 헝클어진 머리카락, 온기가 빠져나간 피부, 마른 나뭇가지 같은 손과 발. 거기에 과감하게 긴 수평적 구성까지 이 모든 것들이 충격으로 다가올 겁니다. 게다가 그 몸이 누워있는 관의 단면을 그대로 보고 있자니 더 그렇고요. 손발의 상처가 아니라면 푸르스름하게 부패해 가는 누군가의 시체정도로 여길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러시아의 작가 표도르 도스토엽스키( Flodor Mikhailovich Dostoevsky, 1821-1881)가 오로지 홀바인의 이 그림을 보려고 여행 중에 바젤에 들렀습니다. 돌처럼 굳어져 간질 발작을 일으키려 할 때처럼 공포에 휩싸였다고 말한 걸 보면 작가 역시 큰 충격을 받은 모양입니다. 몇 달 후 제네바에서 쓰기 시작한 소설 < 백치 The IDIOT>에서 미슈킨 공작의 입을 빌어 그날의 충격을 표현합니다. 종교개혁의 한복판에 살았던 홀바인이 느낀 종교에 대한 적극적 비판이란 생각도 해봅니다.



저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오히려 신앙을 잃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
그들은 이 시체를 보면서 어떻게 순교자가 부활하리라고 믿을 수 있었을까?









The Idiot by Fyodor Dostoevsky/ Goodreads






https://www.youtube.com/watch?v=AHEL1KCnRE4





https://www.youtube.com/watch?v=MMmSdxZpseY









홀바인 가족초상 The Artist's Family, 1528-1529/ www.wga.







홀바인이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불행하게도 일부가 잘려 나갔습니다. 성모자 형식을 빌려서 그렸고요. 그래도 아내의 시선이 어딘지 모르게 슬픕니다. 그런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는 아들 역시 엄마의 감정선을 따라가는 듯싶고요.




홀바인이 타지에서 번 돈으로 집도 한 채 사주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아이들이 어렸습니다. 아들 필리프가 여섯 살, 딸 카타리나가 두 살입니다. 한창 아버지의 존재가 필요한 때이죠. 아내 엘스베스에게 살림과 양육을 모두 맡기고, 혼자 타국으로 몇 년을 떠나 있었던 홀바인이 반가울 수만은 없었을 겁니다. 일이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던 홀바인의 처사를 나무랄 수 없지만, 떨어져 있는 가족에게 커져가는 남편의 명성만큼 가족들의 희생 또한 골이 깊었겠지요.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입을 꼭 다문 표정에서 남편에 대한 아내의 서운함이 짙게 묻어납니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한스 홀바인의 정직성이 돋보이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저라면 가족의 얼굴을 그리는 순간만큼은 화사하게 표현했을 텐데 말입니다. 그는 가족들의 고통을 그대로 받아들였나 봅니다. 마치 속죄하듯, 심리 묘사가 뛰어난 그의 초상화의 특징답게 아내의 서운함도 표현합니다. 이렇듯 홀바인은 거친 저항 대신 타협 없는 사실성으로 내면을 표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532년 다시 2번째로 그의 가족을 떠났고, 주로 영국에서 생애의 마지막 11년을 보냈습니다.











The Three Philosophers, 1508-1509/wikimedia Commons

Erasmus by Hans Holbein the Younger/Venetian Red Art Blog-WordPress.com






조르조네( Giorgione, 1477-78~1510)의 '세 철학자들'은 1508년 -1509년 사이에 제작된 작품으로, 세 남자의 몽환적인 분위기가 특징적입니다. 조르조네의 예술적 기술과 혁신적인 접근 방식을 보여주는 르네상스 미술의 중요한 예시로 꼽히는 작품입니다.



<세 철학자들>은 청년, 장년, 노년의 모습을 나타내는 세 남자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들의 몽환적이고 우울한 분위기는 조르조네 특유의 화풍을 잘 드러냅니다. 조르조네의 능숙한 구도, 명암법, 색채 사용, 세 부 묘사를 통해 깊이 있고 사색적인 분위기를 성공적으로 전달한 작품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조르조네 사후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가 그림을 완성했다고 전해지지만, 그림의 구도와 색채는 조르조네의 화풍과 일치하여 세바스티아노는 약간의 마무리만 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Erasmus,1523/Artchive





당시 홀바인은 네덜란드 로테르담 출신 인문학자 에라스무스와 가까이 지내면서 그로부터 새로운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홀바인은 에라스무스의 초상화를 여러 점 그렸는데 현재 3점이 전해옵니다. 에라스무스를 오랜 시간 면밀히 관찰하면서 여러 초안과 밑그림을 그린 뒤에야 그림을 최종적으로 완성함으로써 홀바인 특유의 정밀하고 사실적인 묘사가 한껏 녹아있는 작품입니다.




위쪽 모피차림의 그림은 소매 끝과 웃옷의 가장자리 모피털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굳게 다문 입술에서 학자의 강한 의지가 엿보이고요. 아래쪽 그림 속 에라스무스의 모습을 보면 두 손과 옆얼굴의 모습을 섬세하게 묘사했습니다. 그의 지적인 우아함과 총명함을 잘 표현했고, 명암의 대조로 인물의 고요한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Studies of the Hands of Erasmus/wikimedia Commons









https://www.youtube.com/watch?v=3McMcZ4MmKo





https://www.youtube.com/watch?v=cWGvPjNPo1U





https://www.youtube.com/watch?v=3UnbWlZnYv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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