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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1. 몽마르트와 정글

앙리 루소 & 루이 비뱅

눈 밝은 이의 도움으로 삶의 기지개를 켠 이들이 있습니다. 제도권 밖의 그들에게 '기회'라는 이름의 '빛'을 선물해 준 이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그들의 열정을 알아봐 주었습니다. 비난과 조소가 딸린 시선이 아닌, 진심 어린 격려로 북돋아 준 사람입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꼼꼼함'을 기억해 주었습니다. 일상 속 '묵묵히' 그림으로 써 내려간 그들의 콘텐츠를 '가치'있다고, 그러니 와서 좀 보시라고 목소리를 내 준 사람입니다. 그들이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후원을 하고 전시할 공간을 만들어 준 사람이기도 하고요.





https://www.youtube.com/watch?v=CRJiuxXkJRQ



위 장면은 2008년 개봉한 프랑스 벨기에 합작영화 <세라핀 Seraphine>의 한 장면입니다. 이 영화는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가졌던 중년의 가정부 세라핀 루이( Seraphine Louis, 1864-1942)의 생애를 담고 있습니다. 아무도 자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지만 그녀는 그림 그리기만큼은 계속 이어갑니다. 바닥에 양초를 켜고 제대로 된 물감도 없이 자연에서 만든 그녀만의 독특한 자연염료를 사용해 살아 꿈틀거리는 그림을 그려냅니다. 그녀의 이런 작업을 저명한 미술 평론가인 빌헬름 우데( Wihelm Uhde, 1874-1947)가 알아보고 그녀가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돕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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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우데(Wilhelm Uhde, 1874-1947)는 폴란드 태생의 독일인으로 미술품 수집가, 작가, 법률과 미술사를 공부한 평론가로 20세기 미술을 움직였던 인물입니다. 1904년 파리에 정착해 피카소, 브라크 , 로랑생 등의 무명시절 작품을 구입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특히 그는 프랑스의 '나이브 아트 Naive art', 이른바 '소박파' 또는 아웃사이더 아트( Outsider ARt)를 발굴해 미술사의 주역으로 등장시킨 공로자이지요.




앙리 루소(Henri Rousseau, 1844-1910), 세라핀 루이( Seraphine Louise, 1864-1942), 앙드레 보샹( Andre Bauchant, 1873-1958), 카미유 봉부아( Camille Bombois, 1883-1970), 루이 비뱅( Louis Vivin, 1861-1936) 같은 이들이 그들입니다. 이들을 묶는 공통점은 전문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림이 난해하지 않고, 아이의 그림처럼 순수하다는 공통점도 있지요.




빌헬름 우데( Wilhelm Uhde, 1874-1947)는 모더니스트 회화의 초기 수집가로 1909년 앙리 루소( Henri Rousseau, 1844-1910)의 개인전을 개최합니다. 이 개인전은 루소가 생전 처음으로 연 개인전이고 그가 죽기 1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당시 화상이나 수집가들은 루소의 작품에 대해 멸시에 가까운 냉대를 보였습니다. 원근법도 모르는 '일요화가'가 끄적이는 별 볼일 없는 작품으로 말이죠. 우데는 오늘날 루소를 환상적인 천재로, 또는 피카소로 대표되는 입체파의 선구자적인 존재로 기록하도록 도움을 준 인물입니다.





루이 비뱅( Louis Vivin, 1861-1936)은 1927년 65세에 빌헬름 우데( Wilhelm Uhde, 1874-1947)의 주최로 첫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가끔 자신의 그림들을 집 앞 전시장에 내놓곤 했는데 우연히 미술사학자이자 화상인 그의 눈에 띄어 전시를 하게 되었습니다. 비뱅은 1934년 한쪽 팔이 마비될 때까지 그림을 그렸던 '몽마르트르' 토박이 은퇴 화가입니다.



오늘은 일반인에 가까운 앙리 루소( Henri Rousseau, 1844-1910)와 루이 비뱅( Louis Vivin, 1861-1936)이 어떻게 '화가'라는 꿈을 이룰 수 있었는지 찾아가 봅니다.





26692003-fs8.png Laval Map France Latitude & Longitude/Free Maps






앙리 루소( Henri Rousseau, 1844-1910)는 가난한 배관공의 아들로, 라발( Laval)에서 태어났습니다. 전문적인 미술 교육 없이, 독학으로 주말마다 그림을 그렸기에 '일요화가'의 대명사로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특이하게도 세관원 출신이고요. 젊은 시절 고향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급사로 일했던 그는 결혼 후에는 파리의 세관 사무소에서 일했습니다. 이 직업 때문에 루소는 세관원이라는 뜻의 '르 두아니에 le Douanier'라는 애칭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전문적 세관원의 모습이 아니라 단순한 통행료 징수원정도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게다가 세관 업무는 그리 바쁜 편이 아니었습니다. 출근해서 하는 일이란 고작 센강을 타고 올라온 상선들의 하역물품을 기록해 두었다가 세금을 매기는 게 전부였습니다.




세관원으로 일하면서 그림을 그리던 루소는 40세가 되던 해 미술관에 들어가 그림을 모사할 수 있는 허가증을 발급받게 됩니다. 바로 이듬해에는 작업실을 마련하고 공식적으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합니다. 49세가 되어 전업화가의 길을 걷기 위해 22년간 몸담았던 세관을 떠나게 됩니다.






루소는 그림을 그리는 재능 외에도 가끔씩 작곡을 하거나 시와 희곡을 쓰기도 했습니다. 시를 한 편씩 지어 친구들에게 보여주곤 했는데 어느 누구도 진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885년 첫 아내를 생각하며 작곡한 왈츠곡 '클레망스'가 프랑스 음악 아카데미에서 상을 받게 되면서 얼마간 인정을 받았습니다.





또한 아마추어 바이올리니스트이기도 했던 루소는 세관 퇴직 후 지급되는 소액의 연금으로 생활할 수 없게 되자 바이올린 레슨을 하기도 했습니다. 루소는 시와 음악에 대한 재능은 아마추어적인 것이었지만 그림에 대한 재능은 독창적이어서 아방가르드 작가들의 영감을 자극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사실과 환상을 교차시킨 독특한 것으로 이국적인 정서가 물씬 배어 나옵니다. 특히 원근법이 무시된 채 그려진 풍경화나 인물화는 마치 아이가 그린듯한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매력을 발산합니다.





그의 그림에서 뿜어 나오는 신비롭고 원초적인 에너지 때문이기도 하지요. 전통적인 교육 체계에 질린 지식인과 현대예술의 거장 피카소, 아폴리네르 등의 예술가들이 보기에 루소의 작업은 독특했습니다. 어색한 인체 비례, 환상과 사실의 색다른 조합 등 아이러니하게도 제도권 안에 없었기 때문에 발휘된 창의성 아니었나 싶습니다. 더군다나 주위의 비난이나 조롱에도 굴하지 않고 한결같이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그리는 루소의 끈기와 열정에 감동하고요.






250px-Vosges-Position.svg.png Vosges, France/wikipedia




세상의 인정보다 자신의 기쁨을 위해 붓을 들었던 화가 루이 비뱅( Louis Vivin, 1861-1936)은 '틈틈이'와 '묵묵히'라는 단어가 참 잘 어울리는 화가란 생각을 해봅니다. 그는 1861년 프랑스 보주( Vosges) 주 에피날 아돌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에 집안의 문이란 문은 그림으로 메웠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을 정도로 그림을 좋아했습니다. 그는 그림에 소질도 있고 관심도 있었으나 가정 형편상 제대로 공부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부친이 그의 화가 지망을 반대했습니다. 그랬기에 61세로 퇴직할 때까지 파리 중앙 우체국에서 근무했습니다.




우체국에서 근무할 때 우체국 아트 클럽에서 자신의 그림을 전시한 적이 있습니다. 재임 기간에 매일 우편 칸으로 이동하며 전국의 우체국 위치를 표시한 우편 지도를 그려 교육 공로훈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우편물을 배달하며 화가의 시선으로 바라본 파리의 곳곳은 지금까지도 파리 시민들에게 위로를 주는 보물 같은 작품이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위대해 보이는 점은 생활을 위해 우체부로 활동하면서도 그림이라는 꿈을 포기하지 않고 주어진 상황에서 최대한 펼쳐보고자 노력했다는 점입니다.






루브르 박물관 등에 소장된 그림을 보고 독학해서 자신만의 화풍을 창조했습니다. 동화 속에 나올 것 같은 그림스타일 작품도 있고, 이야기가 듬뿍 담긴 그림도 있습니다. 귀 기울이면 파리에 대해 조곤조곤 말해줄 것 같은 그림이 비뱅그림의 특징이지요. 그물눈처럼 섬세하고 아름다우며, 장식미도 넘칩니다.






은퇴 후 홀로 파리의 풍경을 캔버스에 담으며 누구보다 행복하게 삶을 마무리했을 루이비뱅(Louis Vivin, 1861-1936)입니다. 비뱅의 작품들은 1936년 그가 세상을 떠난 직후 파리, 미국, 독일을 순회하며 전시되었습니다. 게다가 모든 예술가들의 꿈이라는 뉴욕현대미술관 (MoMA)에 12차례 초대됩니다. 생계를 위해 선택했던 일과 짬짬이 자신의 꿈을 끼워 넣은 수많은 시간들에 의해 그의 그림은 더 많은 관객들을 불러 모으는 전시공간으로 옮겨집니다. 그의 그림을 통해 관람자들은 당대를 살아냈던 파리지앵들의 일상을 들여다볼 기회를 얻게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_PihJwqIeig






Child with a Puppet, 1903/ Arts Dot.com. The girl with a doll, 1905/Arts Dot.com




앙리 루소( Henri Rousseau, 1844-1910)의 왼쪽 그림은 마치 거인국에 와 있나 싶을 정도로 인형을 든 아이가 화면 가득히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그의 초상화들은 원근법과 비율이 맞지 않아 어딘지 모르게 초현실적이고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줍니다. 통통한 허벅지와 볼그스레한 볼을 가진 아이는 몸은 분명 아이인데 표정만큼은 어른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오른쪽 그림 또한 루소의 작품으로 그가 만년에 그린 작품입니다. 루소의 초상화 중에서 배경에 다른 사물을 그리지 않고 푸른 하늘로만 처리한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들판은 희고 빨간 꽃이 피어 먼 지평선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빨간 바탕에 흰 점박이 옷을 입은 아이가 화면 가득히 앉아 있습니다. 손에 든 인형과 꽃만 빼면 어른의 눈처럼 사물을 꿰뚫어 보는 듯한 맑은 눈으로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The Mystery of The Snake Charmer, 1907/Singulart Le Moulin de la Galette,1926







그의 그림 속에 표현된 밀림이나 동물, 사람등을 주제로 한 작품은 현실과 꿈을 한데 섞어 놓았기 때문에 순수하면서도 신비롭고 몽환적이었습니다. 그의 이런 독특하고 독창적인 화풍은 피카소를 비롯한 당대 전위예술가들로부터 칭송을 받았습니다. 특히 밀림을 주제로 한 그림들은 세상으로부터의 관심과 주목을 끄는데도 성공했고요. 그가 예술가로서 인정받고 호평을 이끌어내는 전환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오히려 독학으로 자신의 미술세계를 구축하였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의 내부에 잠재된 천재성과 열정이 어우러져 오늘날 '앙리 루소'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이미지를 만들어주었습니다.





게다가 주변환경 또한 루소의 이름이 알려지도록 돕습니다. 19세기말 유럽의 열강들은 식민지 확대에 혈안이 되었습니다. 이국적인 풍경들이 묘사된 작품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꾸준하게 이런 풍경을 그려온 앙리 루소가 주목받기 시작합니다. 이제 그를 초대하는 모임이 생겨 나기 시작했고요. 피카소( Pablo Picasso, 1881-1973)와 시인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1880-1918) 같은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Tiger in a Tropical Storm(Surprised!), 1891/wikipedia




https://www.youtube.com/watch?v=eAdFH-51YpM




The Hungry Lion Throws itself on the Antelope, 1905/wikipeida



The Dream,1910/wikipedia




앙리 루소( Henri Rousseau, 1844-1910)의 많은 그림들처럼 화면에 등장하는 사물들을 입체감 없이 평면에 죽 늘어놓은 듯한 작품입니다. 호기심이라기보다는 뭔가에 놀란듯한 눈을 가진 사자의 모습이 보입니다. 밀림 속 침입자처럼 갑자기 등장한 나체여인의 손끝을 따라가다 보면 피리를 불고 있는 어둠 속 정체 모를 인간의 모습도 보게 되고요. 선명한 색상으로 어스름한 정글을 지나가는 뱀의 모습도 보입니다.





앙리 루소의 <꿈 The Dream>은 1910년 작품으로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통해 꿈과 현실의 경계를 탐구하는 작품입니다. 그의 마지막 작품 중 하나로 64세에 '소박파'화가로 인정받은 그의 평생을 대표하는 작품입니다. '야드비가'라는 여인의 꿈속 풍경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루소가 남긴 가장 큰 캔버스 작업 중 하나로, 그의 예술 경력을 마무리 짓는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4OxZDy1Tk0&t=2s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요일은 꿈의 요일이었다. "
-루이 비뱅-





Le Moulin de la Galette,1926/wikipeida





루이 비뱅( Louis Vivin, 1861-1936)은 1889년부터 1936년까지 47년간 몽마르트르에서 생활했습니다. 파리의 우체부로 살면서 구석구석을 돌아다녔겠지요. 특히 그의 눈에 비친 몽마르트르의 건물들과 사람들 그리고 주변 환경을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 놓았습니다. 건물은 주로 무채색의 회색을 사용했습니다. 건물 본연의 색이 라기보다 세월의 때가 묻어 먼지가 쌓이고 빛이 바랜 자연스러운 모습을 표현하기 적합한 색이라서 그랬나 봅니다.




Paris, Montmarte: Cirque Medrano, 1925/Art.com






몽마르트에 위치했던 프랑스 서커스장입니다. 파리의 문화와 서커스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곳입니다. 1875년 벨기에 출신의 서커스 기업가이자 공연자인 Ferdinand Beert( 1835-1902)가 몽마르트 외곽에 설립했습니다. 그가 은퇴한 후, 그의 의붓아들인 Louis Fernando가 서커스를 운영했지만 재정적으로 성공하지 못했고, 결국 1897년 파산하게 됩니다. 이후 서커스의 스타 클라운이었던 제로니모 메드라노( Geronimo Medrano, 1849-1912)가 1년 후 서커스를 인수하여 Cirque Medrano로 이름을 변경했습니다.



Geronimo Medrano는 1912년 사망할 때까지 서커스를 계속 운영했으나, 이후 그의 아내 Berthe( 187601920)와 다섯 살 된 아들 Jerome( 1907-1998)에게 서커스가 상속되었습니다. Berthe는 Rodolphe Bonten과 결혼하여 그가 서커스 경영을 맡게 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점령기에 경쟁자인 Cirque d' Hiver 소유주에게 넘어가게 되고, 아들 Jerome Medrano는 레지스탕스에서 활동하게 됩니다. 현재는 문을 닫은 지 오래되었고, 몽마르트르의 희미한 추억으로 남아 있는 장소입니다.




Le Sacre Coeur, Montmartre/ Nice Art Gallery



Sacre-Coeur 는 파리에서 가장 높은 언덕인 몽마르트에 위치한 가톨릭 바실리카입니다. 1870년대에 시작되어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인 1919년 축성되었습니다. 이곳은 흥미로운 건축 양식과 탁 트인 도시 전망을 제공합니다. 영적인 분위기와 독특한 로마-비잔틴 양식의 건축물로 유명한 곳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8Y0R0_Fx6qg





몽마르트 , 눈 내린 테르트르 광장 Montmartre, La Place du Tertre sous la neige by Louis Vivin/ Art.Salon






루이 비뱅( Louis Vivin, 1861-1936)은 은퇴 후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경유 램프에 불을 켜고 이젤 앞에 앉습니다. 그의 책상과 의자에는 삽화가 있는 책, 잡지, 꽃 사진들, 다색 석판으로 인쇄된 그림엽서로 소복이 쌓여 있습니다. 그는 여러 자료 중 하나 또는 몇 개를 조합해 그림을 재구성하고 예술적 상상력을 더해 자신만의 색감을 덧입혔습니다. 비뱅의 그림은 초기 초현실주의 작품 같다고 평가되는데 그 이유는 그의 작업 방식이 현실과 상상력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크기가 크지 않아서 파리를 안내하는 엽서 같습니다. 비록 미술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20세기 초 다양한 화풍이 공존했던 프랑스 미술계에서 중요한 아티스트 중 한 명이 된 루이 비뱅. 그의 삶과 작품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천천히 가도 좋으니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라는 얘기 같습니다. 더군다나 후반전이 길어진 요즘 다양하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어떻게 하면 풍요롭게 노년을 맞이할지 고민하게 합니다.





The Muse Inspiring the Poet, 1909/wikipedia





앙리 루소의 < 시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 The Muse inspiring the Poet>(1909) 작품입니다. 루소는 시인 아폴리네르와 친근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아폴리네르와 그의 애인 마리 로랑생( Marie Laurencin, 1883-1956)을 그린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아폴리네르가 루소를 돕기 위해 주문한 작품으로 그림값으로 무려 5만 프랑(약 $58,486.50)을 지불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J0x1YOuMwQ





입체파 화가와 이론가들 사이를 요정처럼 다니던 마리 로랑생( Marie Laurencin, 1883-1956)이 영감을 주는 시선의 모델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몽마르트의 '핑크 레이디'라고도 불립니다. 색채의 연금술사이자 아폴리네르의 명시 '미라보 다리'의 실제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입체파의 일원으로서 파리 전위 예술가로 활동했습니다. 1920년대 이후에는 당시 입체파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품 경향을 선보였고요.


Mademoiselle-Chanel-par-Marie-Laurencin-1923.jpg?v=1649314006 Portrait of Mademoiselle Chanel by Marie Laurencin, 1923/ abientot




https://www.youtube.com/watch?v=mjsWwXN2aFg





https://www.youtube.com/watch?v=nKJyuGWC3Ew









Galerie Dina Vierny by Louis Vivin,1920





루이 비뱅( Louis Vivin, 1861-1936)의 < 개 콘서트>(1920) 작품입니다. 비뱅의 반려견인지 아니면 잡지 그림인지 알 수 없으나 비슷한 소재로 두 점의 그림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다섯 마리의 동물이 주인공입니다. '콘서트'라는 제목으로 미루어 보아 그들이 내는 울음소리가 마치 노래를 하는 듯 들렸나 봅니다. 개인적으로 개들에게 쫓겨 테이블 위로 올라 간 고양이와 개 사이의 대치상황 같기도 하고요. 여유로워 보이는 개 세 마리의 시선과 왠지 긴장한 듯한 고양이 두 마리의 시선이 그림에 긴장감을 줍니다. 원근법이 무시된 채 그려진 작은 의자와 테이블도 눈길을 끕니다. 흰 개보다 더 작은 느낌이 들어서 말입니다. 아이들에게 보여주면 뭔가 다른 해석을 내놓을 까요. 궁금해지네요. 비뱅의 그림 중 동물들이 그려진 앙증맞은 그림입니다.






The past and the Present, or Philosophical Thought, 1899/wikipedia commons






앙리 루소( Henri Rousseau, 1844-1910)는 가난했을 뿐만 아니라 가정적으로도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루소가 25세 때 10년 아래인 15세의 크레망스와 결혼하여 일곱 명의 아이를 낳았으나, 그중 다섯 명이 죽고 아내 크레망스마저 34세란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10여 년 동안을 부인 없이 지낸 루소는 55세 때인 1899년 미망인인 조세핀누와 재혼했는데 그녀 역시 4년 후인 1903년 사망하고 맙니다.






상처투성이가 된 루소는 말년에 다시 한번 사랑이 찾아옵니다. 문제는 안타까운 짝사람이었다는 점입니다. 쉰네 살의 과부에게 홀딱 마음을 빼앗긴 것이죠. 루소는 정성껏 마련한 선물을 건네곤 했으나 그녀는 좀체 마음을 열지 않았습니다. 시큰둥한 여자의 태도에 낙담한 루소는 절망 끝에 제 몸에 상처를 냈습니다. 상처가 덧나서 곪아도 치료를 마다했던 그의 몸은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이웃들이 루소를 병원으로 옮겼지만 이미 치료시기를 놓친 후였습니다. 더 안타까운 점은 여자는 병상에서 신음하며 죽어가던 루소를 방문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버림받은 사랑을 저주하며 쓸쓸히 눈을 감았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SyL5yoe_dk






Venice: Canal Scene with a Church/ Art UK



Florence/WikiArt.org



꽃이 있는 강변 Quai auxfleurs/ Christie's





The Football Players,1908/The Guggenheim Museum







앙리 루소의 < The Football Players, 190> 작품입니다. 슬로비디오를 보고 있는 듯한 완만한 동작과 팔자수염을 단 선수들의 표정이 유머러스합니다. 제 눈에 풋볼 같기도 럭비 같기도 한 이 그림을 통해 루소는 운동감을 느끼게 하고 싶었습니다. 이 그림 역시 정면에서 본 구도로, 앞에 넓은 면적을 깔고 삼면의 공간은 누런 나뭇잎 하나하나를 열심히 그려놓은 만추의 어느 공원 풍경인 것 같습니다.







Louis Vivin at Galerie St.Etienne/ Galerie St. Etienne,1925





강아지 그림을 그린 지 5년 후 루이 비뱅은 <발레>를 그렸습니다. 장소는 파리의 오페라 가르니에 (Opera Garnier)로 보입니다. 비뱅의 주머니 사정을 짐작해 보건대 직접 공연을 보고 그렸다기보다는 엽서나 사진 자료를 통해 간접적으로 공연을 경험하고 그림으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춤추는 발레리나와 관현악단의 흥겨움이 객석에도 전해집니다. 한 줄 한 줄 그은 좌석의 선들이 섬세합니다. 많은 관객들의 움직임을 담아내기 어려웠을 것 같고요.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thWNJCEOI50&t=0s


louis-vivin-les-fleuristes.jpg Les Fleruistes par Louis Vivin/ Artnet, 1914


louis-vivin-boar-hunting-1925-oil-on-canvas-paris-france-2E25GJY.jpg Boar hunting,1925/Alamy



Le dejeuner sur I'herbe, 1925/WikiArt.org









View of the Bridge Sevres, 1908




앙리 루소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의 작품입니다. 눈길을 끄는 것은 태양이나 구름이 떠 있던 하늘에 당시 인간이 만들어서 하늘을 날 수 있는 모든 장치가 다 묘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마치 잡지 표지사진 같은 느낌입니다.




그는 움직이는 것 , 나는 것, 진기한 것에 대하여 어린이들과 같은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원근법이나 기교면에서도 다분히 동화적인 느낌이 들고요. 물체의 단순화, 사물의 위치 등 벌써 실경과는 멀어진 창작적인 내용이 그려진 것으로 보아 루소는 이미 입체파들이 추구한 예술 활동을 먼저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낚시질하는 사람과 비행기 Les Pecheurs a la ligne,1908 /wikimedia commons











https://www.youtube.com/watch?v=RGNjsy6n7Ts




https://www.youtube.com/watch?v=nMA81xEG6FA



https://www.youtube.com/watch?v=sj1Q1tN8-N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