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xyTa_gJkYwI
자기만의 스토리와 솔루션을 가지고 살다 간 이들을 보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수투성이 삶이지만 어제보다 더 나아지기 위해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선택한 사람들이지요. 특히 인생의 후반전을 자기답고 탁월하게 살다 간 이들을 보면 더 그러합니다. 토니 베넷 (Tony Bennett, 1926-2023) 역시 그런 이들 중 한 사람 입니 아닐까 싶습니다. 2016년 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받았습니다. 2021년 8월까지 Lady Gaga와 함께 공연을 계속했고요.
이 동영상은 토니 베넷( Tony Bennett, 1926-2023)과 레이디 가가( Lady Gaga)가 함께 부른 2021년 발매된 곡 "I've Got You Under My Skin"입니다. 긍정적 감정과 부정적인 감정을 동시에 담고 있는 노래입니다. 가사의 의미는 듣는 사람의 해석에 따라 다르게 다가올 수 있고요. 1946년 프랭크 시나트라( Frank Sinatra ,1915-1998) 버전도 있습니다만, 개인적으로 레이디 가가와 토니 베넷의 곡이 더 마음에 와닿습니다. 기억을 잃어가면서도 재즈 리듬에 맞춰 내공을 발휘하는 노장의 모습이 뭉클해서 더 그런가 봅니다. 이 노래는 사랑하는 사람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깊이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강렬한 감정을 표현한 곡이지요. 때로는 집착으로 중독으로 기울기 쉬운 그런 감정 말입니다.
2023년 96세의 나이로 사망한 토니 베넷( Tony Bennett, 1926-2023)은 70년 이상 지속된 그의 대중음악인으로서의 삶뿐만 아니라 인간애적 헌신으로도 많은 사랑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그는 청소년 당뇨병 재단, 미국 암 협회 등 다양한 자선 단체를 지원했습니다. 인종 차별에 맞서 싸우기 위해 마틴 루터 킹( Martub Luther King Jr. 1929-1968) 목사와 함께 셀마- 몽고메리 행진에 참여하기도 했고요. 또한, 뛰어난 화가로서도 활동하며 전 세계 갤러리에서 작품을 전시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영구 소장되어 있습니다. 1999년 아내인 수잔 베네데토( Susan Benedetto)와 함께 ETA(Exploring the Arts)를 설립하여 공립 고등학교 교육에서 예술의 역할을 강화하는 데 힘쓰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르네상스 3대 천재로, '신성한 자'로 불렸던 15세기말 피렌체의 젊은 천재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와 그들 못지않게 북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활짝 꽃 피웠던 베네치아 화풍을 대표하는 숨은 고수 티치아노 베첼리오( Tiziano Vecellio, 1488-90?~1576)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봅니다.
'미켈란젤'로 하면 퍼뜩 떠오르는 몇 가지들이 있지요. <피에타>, <시스티나성당 천장화>, <다비드상>, <최후의 심판>등등 말입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 Michelangelo Buonarroti,1475-1564)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대표적 조각가, 건축가, 화가, 그리고 시인이었습니다.
1494 Italy/wikipedia
그는 이탈리아의 북부 카프레제에서 아버지 로도비코 디 리오나르도 부오나로티와 어머니 프란체스카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6살 때 어머니를 잃고 남편이 석공인 유모 손에 의해 키워집니다. 돌과 망치를 장난감 삼아 놀던 아이는 평생 돌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발 보호를 위해 두꺼운 가죽 구두를 피부처럼 신고 다니는 젊은이로 성장합니다.
유모에게 젖과 함께 받은 것은
나의 조각을 만들기 위한
정과 망치를 다루는 법이었다.
몰락한 귀족출신입니다. 출신성분과 현실과의 괴리감 때문에 자존심이 유독 강했고요. 아버지 루도비코에게 집안 형편 때문에 다른 길은 어려우니 차라리 예술가가 되겠다고 말합니다. 상당히 반대했던 모양이지만 현실적으로 아들을 교육할 여력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린 미켈란젤로를 자신의 친구였던 기를란다요에게 데려갑니다. 미켈란젤로는 그렇게 수습생으로 도제수업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곧 기를란다요(1483-1561)의 공방에서 최고의 학생이 됩니다.
메디치 가문/ Arts & Culture
1)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Giovanni di Bicci de' Medici, 1360-1429)
2) 코지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 1389-1464)
3) 페에로 디 코지모 데 메디치( Piero di Cosimo de' Medici, 1416-1469)
4)로렌초 데 메디치 (Lorenzo de' Medici, 1449-1492)
5) 피에로 디 로렌초 데 메디치(Piero di Lorenzo de' Medici, 1472-1503)
메디치가 가계도/tygu
당시 피렌체를 통치하고 있던 사람은 '위대한 자 로렌초'였습니다. 그는 롤 모델이었던 할아버지가 조각가 도나텔로(1386-1466)를 후원해던 것처럼 자신도 조각가를 후원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로렌초는 그저 조각가 한두 명을 후원한 게 아니라 아예 규모를 키워'미술 아카데미'를 열었습니다.
메디치가 소유의 산 마르코 정원에 그리스 로마 조각들을 깔아놓고 수습생들이 이를 모방하면서 자유롭게 실력을 키우도록 했던 것이죠. 이 정원은 실제로 유럽 최초의 미술학교로 평가받습니다. 로렌초는 기를란다요에게도 수습생 중에 뛰어난 학생 있으면 몇 명 보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기를란다요는 당연히 학생들 중 최고였던 미켈란젤로를 로렌초에게 보냈고, 그렇게 미켈란젤로와 메디치 가문의 인연이 시작됩니다.
늙은 할아버지의 이빨치고는 너무 가지런하지 않니?
어느 날 로렌초는 이 '미술 아카데미'에 방문했고, 미켈란젤로의 조각을 지나가다 한 가지를 지적했습니다. 마침 미켈란젤로는 '판 Faun 신 (그리스 신화에서 인간의 머리에 염소의 몸을 가진 신)'의 두상 조각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로렌초의 지적을 듣고 미켈란젤로는 순식간에 조각을 수정해 노인의 치아처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의 천재성을 알아본 로렌초는 미켈란젤로를 자신의 양아들로 입양을 합니다. 로렌초는 그에게 당대 최고의 인문학자들에게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미켈란젤로 인생시기에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고, 걸출한 예술가가 탄생할 수 있는 기초를 다졌던 시간입니다. 거기에 더해 미켈란젤로는 앞으로 피렌체의 미래를 짊어질 메디치의 청년들과도 친분을 맺을 수 있게 됩니다.
16th Venice map/Tools
티치아노 베첼리오( Tiziano Vecellio, 1488-90?~1576)의 출생은 정확한 기록이 없습니다. 하급관리였던 그레고리오 디 콘테 데이 베첼리와 그의 아내 루치아의 아들로, 그는 이탈리아 북부 베네치아와 가까운 소도시'피에베 디 카도레 Pieve di Cadore'라는 도시에서 태어났습니다.
9세에 형 프란체스코와 함께 삼촌댁에서 살기 위해 베네치아로 갔습니다. 곧 그곳의 모자이크 제작자 세바스티아노 추카토의 도제가 되었습니다. 그 후 벨리니가 의 공방으로 옮겨가 당대에 가장 뛰어난 베네치아파 화가였던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1430-1516)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당시 베네치아는 이미 경제적, 문화적으로 부흥기였습니다. 동방무역의 80%가 향신료로 베네치아에 들어왔고 그림 그리는 안료의 재료 또한 함께 들어왔습니다. 집 한 채 값이 넘는 청금석 같은 비싼 안료를 다른 지역에 비해 손쉽게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우아한 베네치아 화파만의 색채로 회화의 표현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티치아노의 초기 작품들은 벨리니의 영향을 뚜렷이 보여주며 또한 벨리니의 또 다른 제자였던 동료화가 조르조네(1477-1510)와 함께 작업을 하면서 받은 영향도 보여줍니다. 그는 별칭으로 'Titian'으로 불렸고,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전성기, 베네치아 공화국 회화의 황금기에 태어난 운이 좋은 화가입니다. '베네치아화파'로 불리며, 조반니 벨리니(Giobanni Bellini, 1430-1516)에 의해 열어젖힌 문이 동료화가 조르조네( Giorgione Barbarelii, 1478-1510)에 의해 발전하게 되고 티치아노(Tiziano Vecellio, 1488-90~1576)에 의해 활짝 꽃 피우게 됩니다.
The Rondanini Pieta, 1552-64/wikimedia commons. Pieta by Titian, 1575/wikipedia
피에타(Pieta)는 이탈리아어로 '슬픔, 비탄'을 의미하며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도 담고 있습니다. 기독교 예술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이지요. 주로 성모 마리아가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떠안고 비탄에 잠긴 모습을 묘사합니다. 특유의 비장미와 주제로 인해 많은 예술가들이 자주 표현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보통 예수와 슬픔에 잠긴 마리아만을 묘사하지만, 때로는 다른 인물들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미켈란젤로의 < 론다니니 피에타 The Rondanini Pieta>(1552-64) 작품입니다. 이 조각 작품은 마리아와 예수가 불안정하게 서 있는 모습입니다. 이전의 '피에타'와는 다르게 인체 형상이 단순하게 표현되어 있고요. 미켈란젤로가 성 베드로 성당 재 건축을 감독하는 와중에 만들기 시작한 작품입니다. 이미 70대가 넘은 인생 후반전을 살고 있었던 그가 차가운 대리석에 혼신을 다해 영혼을 불어넣은 작품입니다. 제목이 '론다니니'인 이유는 미켈란젤로가 죽고 나서 론다니니 후작이 이 작품을 구입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입니다.
그가 죽기 3일 전까지, 돌먼지를 뒤집어쓰며 조각한 미완성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누군가 의뢰해서 주문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죽음의 문턱에 가까이 온 미켈란젤로가 누군가에게 잘 보일 필요 없이 노년에 그가 느낀 신의 아들과 어머니를 표현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을 10년 동안이나 붙잡고 있었지만 완성하지 못한 걸 보면 고민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젊은 시절 열정과 야심으로 그 어떤 조각보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피에타>를 만들었던 미켈란젤로입니다. 이로 인해 명성을 얻었고요. 하지만 한계가 있는 인간의 실력으로 한계가 없는 존재의 모습을 조각으로 남기려니 쉽지 않았겠지요. 지금도 커다란 방 한 칸을 이 작품 하나로 채우고 있지만 발길이 끊이지 않는 것에는 이유가 있어 보입니다. 미완성으로 마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보며 그가 품었을 성찰의 시간을 마치 관객인 우리가 채워야 할 것 같은 숙제를 떠안은 느낌으로 말입니다.
작은 성 베드로 조각과 십자가를 지고 있는 작은 예수 조각, 몇 장의 스케치가 그가 남긴 전부였습니다. 마지막도 그 답게 소박하기 그지없습니다. 다만 스케치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이유는 그가 죽기 직전 대부분의 스케치들을 불태웠기 때문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nWMNvyLVBA
Pieta by Tiziano Vecellio, 1575-1576/wikipedia
베네치아화파의 숨은 거장 티치아노의 마지막 작품도 <피에타 Pieta>(1575-1576)입니다. 티치아노의 유언과도 같은 마지막 작품으로, 자신이 묻힐 예배당을 위해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미완성인 채로 남겨져 훗날 팔마 일 조바네에 의해 완성된 작품입니다. 티치아노와 그의 아들 오라치오가 기증자로 오른편의 작은 그림하나가 놓여 있습니다.
베네치아가 전염병으로 고통받던 시기에 제작된 작품입니다. 티치아노 자신과 그의 아들 오라치오의 구원을 비는 간절한 염원이 담긴 작품이지요. 또한, 죽음, 성찬례, 부활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희생과 구원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가 죽은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모습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니고데모 또는 아리마대 요셉으로 추정되는 인물들도 보이고요. 티치아노는 니고데모의 모습으로 자신을 표현하여,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보거나 구원을 갈망하는 모습을 나타내고자 했습니다.
어두운 색조와 거친 붓놀림은 신체적 한계도 느꼈을 티치아노의 후기 양식을 잘 보여줍니다. 화려하고 강렬한 색채가 특징인 초기 작품에 비해 전체적으로 가라앉은 색채는 화면 전체를 지배하는 '슬픔'이란 단어를 더 부각합니다. 무엇보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심오하게 잘 표현되어 있고요. 인물들은 대각선으로 길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모세상과 헬레스폰트의 무녀상이 각각 놓여 있는 거대한 벽감이 작품의 웅장함을 더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1RqyiIpkbhM&t=4s
Pieta, 1499-1500/wikipedia. Assumption of the Virgin by Tiziano Vecellio/ www.wga.hu
피라미드 구도, 젊은 성모, 절제된 수난 표현 등이 특징인 미켈란젤로의 <피에타>(1499-1500)입니다. 24살에 만든 대리석 작품으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라는 자신의 이름을 대중에게 알린 작품이지요.
이 작품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이 성모 마리아의 무릎에 놓여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피에타'라는 이름의 이전 작품들과 달리 마리아의 얼굴이 앳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는 "정숙하고 순결한 여인은 영원히 늙지 않는다."는 미켈란젤로의 신념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Pieta by Michelangelo's/Talaria Enterprises
예수의 몸에 비해 마리아의 신체 비율이 거대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는 예수의 시신을 안정적으로 감싸 안도록 하기 위해 의도된 것으로 커다란 옷자락 주름을 잡아 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당시 해부학의 파괴로 보기도 하며, 전체적으로 삼각형의 구도가 상당히 안정적으로 보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또한 넓은 치맛자락은 하느님의 보호를 상징하는 사상적 의미도 담겨 있고요. 사망 후 사후 강직이 일어났어야 하는 예수의 몸이 부드럽게 늘어져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 점 또한 특징입니다. 작품에서 마리아가 예수의 얼굴을 외면하고 있는데,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사랑을 체감하지 못했던 20대의 미켈란젤로가 채울 수 없었던 부분이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Michelangelo's Signature and the Myth of Genius/ Hyperallergic
<피에타>는 미켈란젤로가 자신의 이름을 서명한 유일한 작품입니다. 마리아의 어깨띠 부분에 "피렌체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제작"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1972년 정신 질환을 가진 한 남성이 피에타를 훼손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후 복원되어 현재는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 방탄유리로 보호된 채 전시되어 있습니다.
Michelangelo's Pieta/Rome.US
https://www.youtube.com/watch?v=JbWGusfynCw&t=1s
Assumption of the Virgin by tiziano Vecelli/Vist Venice Italy
/Visit Venice Italy
/Vistit Venice Italy
티치아노의 <성모승천 Assumption of the Virgin) 작품입니다. 베네치아 프라이 교회의 중앙 제단에 걸려 있습니다. 멀리서도 지나가는 사람이 제단 쪽을 볼 수 있도록 이끄는 효과를 지닌 색채 중심의 대형 작품입니다.
생동감 있는 인물표현, 금빛과 붉은빛의 화려한 색채가 조화를 이뤄 천상으로 향하는 성모마리아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티치아노의 완성도 높은 작품입니다. 30대가 될 무렵 그려진 작품으로 거장 반열에 오르게 한 작품이지요. 이 작품을 계기로 저 멀리 로마까지 그의 이름이 알려지게 됩니다.
우선,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가장 아랫단은 속세를 나타내며, 사도들이 성모의 승천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기적을 보고 흠칫 놀라는 사도들의 모습이 보이시죠. 두 번째 단에서는 천사들에게 둘러싸인 성모 마리아가 세 번째 단을 향해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하느님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모의 승리가 나태 내는 장엄한 광경이 더욱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이 그림이 공개되었을 때 사람들은 강렬한 색채, 황금빛, 그리고 인물들의 제스처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1518년). 명암 표현이 풍부한 이 작품은 이후의 베네치아 르네상스 화가들 및 루벤스( Peter Paul Rubens, 1577-1640)와 반 다이크( Anthony van Dyck, 1599-1641)를 비롯한 여러 바로크의 대가들에 의해 널리 모방되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2MzPOrcsWB0&t=1s
당시 로마는 새로 선출된 교황 클레멘스( Clemens PP.VII, 1478-1534, 제219대 교황) 7세가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스페인 황제 카를 5세( Kark V, 1500-1558)의 힘이 커지자 위협을 느낀 그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황제세력을 몰아내고 싶어 합니다. 1526년 교황령, 프랑스, 베네치아 공화국, 피렌체, 밀라노 등이 참여하는 군사 동맹인 코냑 동맹( Guerra della Lega di Cognac, 1526-1530)을 맺고 황제 카를 5세와 맞서 전쟁을 벌입니다.
1494 이탈리아/위키백과
전쟁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은 1527년 발생한 로마 약탈 사건입니다. 황제 카를 5세 군대가 로마를 점령하면서 도시가 파괴되고 약탈, 살인, 강간 등이 자행되어 도시 기능이 마비되는 무정부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클레멘스 7세는 산탄젤로 성으로 피신하여 목숨을 부지한 후 항복을 선언하게 되고요.
코냑동맹전쟁(1526-1530)은 1530년 피렌체 공성전을 끝으로 카를 5세의 승리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이 전쟁의 결과로 카를 5세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프랑스를 제치고 주도권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메디치 가문은 카를 5세의 도움으로 피렌체의 통치권을 회복했습니다. 또한 로마 약탈 사건은 잉글랜드의 헨리 8세의 이혼 문제에도 영향을 미쳐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원인이 되기 했습니다.
5차 이탈리아 전쟁(코냑동맹전쟁), 5차 이탈리아 전쟁 당시 주변왕조/위키백과
Last Judgement, 1534-41/wikimedia commons Emperor Charles V Muhlberg,1548/WahooArt.com
조각가 미켈란젤로(1475-1564)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천지창조>를 그리고 본업인 조각가로 되돌아갔습니다. 약 25년이 흘러 환갑이 된 그에게 교황 바오로 3세 (Paulus III, 1468-1549)는 선대의 클레멘스 7세 ( Clemens VII, 1478-1534)가 계획했던 대로 서쪽 벽에 <최후의 심판>을 그리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6년의 작업 끝에 14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벽면에 온갖 인간의 형상을 망라한 391명의 육체의 군상이 드러났습니다. 해부학에 정통하고 원래 조각가인 미켈란젤로만이 해낼 수 있는 대작이 탄생한 것이죠. 이로써 시스티나 성당의 벽화와 천장화로 <성경>을 회화화하는 거대한 작업이 완성되었습니다.
<최후의 심판 Last judgement>은 1541년 10월 31일 모든 로마 시민의 찬탄 속에 공개되었습니다. 그림 속 인물들은 처음에는 모두 나체였습니다. 그의 신앙심으로 볼 때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죄성이 없는 순수한 나체였다고 생각을 한 모양입니다. 따라서 성인들과 사도들을 모두 나체로 표현한 것이지요. 불경하다고 생각하는 시민들과 교회의 권력자들이 아우성을 쳤지만 미켈란젤로는 특유의 카리스마로 꿋꿋하게 버텼습니다.
그러나 1564년 교황 비오 4세 (Pius IV , 1499-1565)는 나체의 부끄러운 부분을 모두 덧칠로 가리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연로한 미켈란젤로가 움직이지 않자 그의 제자인 다니엘레 다 볼테라 (Daniele da Volterra, 1509-1566)가 나체에 기저귀를 채우는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브라게토네'( Braghettone: 기저귀를 채우는 사람이라는 뜻)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다행히도 미켈란 젤로의 또 다른 제자 마르첼로 베누스티( Marcello Venusti, 1515-1579)가 덧칠하기 전의 작품을 모사해 놓아서 후대에 원작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Biagio da Cesena/wikipedia
Titian's triple portrait, Pope Paul III and his Grandsons, depicts Alessandro at Left/wikipedia
오른쪽 최하단에 지옥으로 쫓겨가는 악인들의 군상이 나옵니다. 그중 당나귀 귀를 한 지옥왕 미노스를 거대한 뱀이 휘감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지옥왕 미노스는 <신곡>에도 등장하는데, 그 얼굴이 교황의 의전담당인 비아지오 다 체세나 ( Biagio da Cesena)의 얼굴과 닮았다는 점입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 최후의 심판>이 거의 완성되어 갈 때 교황이 의전관 체세나를 대동하고 미켈란젤로의 작업장을 찾았습니다. 그때 체세나는 교황에게 이 그림들의 나체가 심히 불경하여 성당보다는 공중목욕탕에나 어울릴 것 같다고 말하게 되지요. 이에 화가 난 미켈란젤로는 그를 지옥에서 가장 나쁜 악인인 미노스의 얼굴로 그려 넣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비아지오를 지옥 입구로 보낸 것으로도 성이 차지 않았나 봅니다. 귀는 당시 멍청함을 상징하는 당나귀 귀로 묘사해 놓았고, 거기에 더 해 지옥의 뱀이 미노스, 즉 비아지오의 중요한 부분을 꽉 깨물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놓았습니다. 이는 '음탕함'을 상징하는 것인데 아마 당시에 비아지오가 실제로 문란했다는 소문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림을 보면 미켈란젤로의 작심이 느껴지는 부분입니다. 비아지오가 지나가다가 꽉 물린 미노스의 얼굴이 다름 아닌 자신의 얼굴임을 알아챕니다. 그래서 급하게 바오로 3세에게 제발 미켈란젤로에게 시켜 얼굴을 바꾸어 달라고 간청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바오로 3세는
"내가 천국은 관할인데 지옥까지는 교황의 관할이 아니어서 말이지..."라며 웃어넘겼다고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2MuTvQM61Y
/NBA Mania
카를 5세는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2세의 딸인 '후아나(정신질환)'와 신성 로마 제국의 후계자인 '미남공' 필리프 대공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서, '해가지지 않는 제국'이라 불릴 만큼 광대한 영토를 통치했던 인물입니다. 스페인,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신대륙을 포함한 넓은 지역을 다스렸습니다. 개인적으로 아버지 펠리페 1세의 이른 사망과 정신 질환을 앓았 던 어머니로 인해 부모의 사랑을 거의 받지 못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정치적 종교적 혼란 속에서 부침을 겪었으며 가장 광대한 영토를 보유했지만 살아생전 누려보지 못했고 수도원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스페인제국/나무위키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 1488-90~1576)의 대표적인 걸작 중 하나인 말을 탄 황제의 초상화인 < 뮐베르크의 황제 카를 5세 Emperor Charles V at Muhlberg>(1548)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1547년 황제가 신교도들을 물리치고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매우 탁월한 이 공식 초상화에서 티치아노는 홀쭉하게 여위어 보기 흉한 황제의 턱을 되도록 드러나지 않게 처리하고 위엄이 넘치는 자태로 그를 묘사했습니다. 하이라이트와 반사광의 적절한 표현으로 눈부시게 반짝이는 멋진 갑옷과 가슴을 가로지르는 붉은 장식대(가톨릭 교단과 신성 로마 제국의 성징), 그리고 배경에 그린 빼어난 황혼 풍경 등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은 훗날 대부분의 기마초상화의 기준이 됩니다.
모세상/Smarthistory Venus of Urbino by Tiziano Vecellio, 1538,Uffizi Gallery/wikinedia.org
"나는 이 영묘에 묶여서 청춘을 다 보내고 말았다. "
율리우스 2세 영묘/iStock
교황 율리우스 2세/위키백과
<모세상>( 1513-1515) 조각 작품입니다. 로마의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교회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무덤을 장식하기 위해 의뢰되었으며, 성경 속 인물인 모세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3층 구조에 총 40개의 조각이 들어가는 블록버스터급의 영묘를 주문한 것이었으나 갑작스러운 교황의 죽음으로 40년 동안 5번이나 설계도가 바뀐 채 한쪽 벽을 장식하는 벽무덤으로 끝나버린 프로젝트입니다.
모세상은 8피트가 조금 안 되는 크기로, 앉아 있는 자세로 표현된 되어 있습니다. 근육질의 팔과 분노에 찬 강렬한 눈빛이 특징적입니다. 모세는 팔 아래에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들고 있으며, 이는 그가 시나이 산에서 갓 받은 율법을 상징합니다.
모세상 머리에 있는 뿔은 라틴어 성경인 불가타에서 엑소더스 34장에 나오는 모세의 얼굴 묘사를 잘못 번역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히브리어 단어 "Karan"은 "빛을 발하다" 또는 "뿔이 나다"로 해석될 수 있는데 , 성 제롬이 이를 "뿔"로 번역하면서 모세가 뿔을 가진 모습으로 묘사되게 되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5LBI-otSbJM
티치아노는 여성의 누드화도 새롭게 개척했습니다. 1534년 작품 <우르비노의 비너스 Venus of Urbino>(1538)는 사실 이전 화가 조르조네( Giorgio Barbarelii, 1477-1510)의 1510년 작품 <잠자는 비너스 Sleeping Venus>와 비교해 구도상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Venus of Urbino by Tiziano Vecellio, 1534/wikipedia
Sleeping Venus by Giorgione ,1510/wikipedia
Olympia by Edouard Manet, 1863-65/wikipedia
바뀐 점이 있다면 여인이 누워있는 장소가 자연에서 저택으로 바뀌었고 여인이 잠들지 않고 깬 상태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정도입니다. 조금의 변화지만 의미적으로는 아주 큰 변화였습니다. 전통적인 여성 누드화의 여인은 절대 정면을 응시하지 않습니다. 또한 장소도 대부분 자연이었는데, 마치 침실에서 유혹하는 여인의 모습으로 변모했습니다. 이런 변화는 후대의 누드화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 <발가벗은 마하>,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 Olympia> 등이 대표적입니다.
조르조네( Giorgione, 1477-1510)는 베네치아화파의 창시자 조반니 벨리니의 공방에서 티치아노와 함께 공부한 동료화가입니다. 빛과 색채를 이용하여 그림에 이야기와 시적인 감흥을 담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독특한 그림을 그렸지요. 이전 선배들이 나무 판에 그리던 유화를 현재 쓰고 있는 캔버스천에 그리기를 처음 시도한 화가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림 속 배경이 독립적 의미를 갖게 되고 '풍경화'란 장르로 업그레이드될 수 있게 기여한 화가입니다. 요절하지 않았다면 티치아노와 버금가는 대가로 성장했을 화가입니다.
그리스도의 매장, 1510/wikimedia commons Alegorie der zeit by Titian/wikipedia, 1565-1570
미켈란젤로의 <그리스도의 매장>은 1500-1501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미완성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이 무덤으로 옮겨지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으며, 현재 런던 국립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가 그린 몇 안 되는 패널 그림 중 하나로, 등장인물들의 감정적 표현과 역동적인 구도가 특징입니다.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지만, 미켈란젤로의 뛰어난 조형 능력과 인체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엿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작품을 보시면 오른쪽 하단에 누군가를 그려 넣기 위해 빈자리를 남겨 놓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성모 마리아를 그리려는 자리였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는 왜 성모 마리아를 그리려는 자리를 비워두었을까요? 추측컨대, 성모 마리아의 얼굴 모델을 찾지 못했거나, 아니면 성모 마리아를 표현 하는데 꼭 필요한 파란색 울트라마린 안료를 구하지 못해서 그럴 수 있습니다. 그만큼 울트라마린은 비싸고 귀한 안료였으니까요.
비싼 청금석(Lapis Lazil)& 저렴한 Azurite/pinterest
https://www.youtube.com/watch?v=GGCktqbFN-s
An allegory of prudence, 1550-1565/wikipedia
티치아노의 <시간의 알레고리>(1550-1565) 작품입니다. 노인과 장년, 청년 그리고 늑대와 사자, 개를 통해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고 신중하게 행동할 것을 강조하는 작품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 의미를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의미를 전달한 작품입니다. ' 신중함'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관념을 눈에 보이는 이미지로 전달했습니다.
왼쪽 노년(과거, 티치아노), 장년(현재, 아들 오라치오), 그리고 청년(미래, 조카 마르코)을 나타냅니다. 공간의 축과 시간의 축을 일치시킨 표현으로 중세부터 이어져온 서구의 전통적인 도상입니다. 빛의 양 또한 다릅니다. 노인은 빛이 거의 없어 그늘에 얼굴이 가려져 있습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는 희미하다는 것을 뜻하죠. 청년에게는 오히려 너무 많은 빛이 들어가 오히려 뿌옇게 보입니다. 불투명한 미래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장년의 얼굴이 가장 선명하고 뚜렷하게 보입니다. 오직 현재만이 가장 확실하기 때문이죠.
각 인물의 아래에는 세 동물의 얼굴이 그려져 있습니다. 늑대, 사자, 개가 자리하고 있고요. 이집트 전통에서 가져온 것으로, 시간의 세 단계를 나타냅니다. 늑대는 과거의 기억, 사자는 현재의 맹렬한 행동, 개는 미래의 희망을 나타냅니다. 또한 교활한 늑대가 노년의 지혜를 나타내고 힘이 센 사자가 장년의 실권을 충성심 강한 개는 청년의 성실함을 의미합니다.
각 단계의 얼굴을 자신과 자신의 가족으로 그려 넣었습니다. 각 인물에 그려진 라틴어를 보면, "과거에서 배워(노인), 현재에 신중하게 행동해야(장년), 미래(청년)를 그르치지 않을 수 있다. " 티치아노는 과거를 돌아보고 신중하게 행동해야 미래에 그르치는 일이 없다고 자신의 후손들에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티치아노가 말하고 싶었던 신중함의 의미입니다.
Curators' intoduction to Michelangelo the last decads/ British Museum Events
https://www.youtube.com/watch?v=y8u2K9XJ2Hc
https://www.youtube.com/watch?v=dVSOEJEXzHE
https://www.youtube.com/watch?v=aAtJmY5Mxn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