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대한 생각, 해석
밀란 쿤데라의 대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주제를 굳이 하나의 단어로 요약해야 한다면 '키치'라 할 수 있다. 키치라는 표현은 꽤 대중화된 듯하다. 가볍게 말해 "A급인척 하는 B급"이라는 표현이 그러한 키치에 가장 간단히 어울리는 듯하다. 그러나 이 책에서의 키치는 그것으로만 표현하기 부족하다.
키치는 무거운 것으로 취급하지만 실제로는 가벼운 것이다. 숭고한 이상이 바로 키치다. 키치는 그런 의미에서 전체주의적, 공산주의적 이상뿐만 아니라 또한 민주주의적, 자본주의적 이상 등을 숭상하는 것을 지칭한다. 단지 그러한 이상의 숭상뿐만이 키치의 요건이 아니다. 키치로의 이상에는 모순이 내포되어 있다. 정확히 말해, 모순과 어떤 그곳에 존재하는 '가벼움'에 대한—무의식적이건, 의식적이건 간에—의도적 외면이 필히 존재한다. 그 의도는, 키치에서의 숭고한 그것이 필연적이고, 그것을 숭상하는 자들의 삶을 정당화시켜 주는, 영원한 '무거운 것'으로 여겨지기 위해서다.
삶은 과연 유가치한 것인가? 우리의 소중한 무엇인가? 세계 또한? 이들은 모두 필연적 프로그램에 따르는 조화로운 일부인 것일까? 이에 "그렇다"라고 대답하는 정신이 무거운 것이다. "그래야만 하는가?", "그래야만 한다!"라 말하는 정신, 즉 Es muss Sein!이라 대답하는 정신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는 그 당시에는 "그래야만 하는 것"으로의 필연성이, 시간이 지나 후회의 우연성이 된다. 그리고 이 무거움은 짐이 된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그러한 무거움을 견딜 수 있는 정신을 요구하는 시험이 된다. 인생의 모든 것이 똑같이 반복된다면, 모든 행위 모든 순간이 중압감에 짓눌리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가벼운 것은 또 좋은 것일까? 참을 수 없는 이 가벼움은, 인생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지게 만든다. "한 번은 아무것도 아니다", Einmal ist Keinmal. 인생은 반복되지 않는다. 단지 한 번뿐인 인생에서, 그 무엇을 해도 좋다. 그런 정신 앞에 놓인 세계는 무한한 자유의 세계이기도, 후회라는 게 공허한 개념인 세계이기도 하다. 너무 가벼운 나머지 지상에 붙어 있을 수 없다. 즉 이 가벼움은, 결국 죽음에로의 의지다. 삶의 부정이다.
본 주제로 돌아와서, 키치는 무엇인가? 무거움 속의 가벼움의 조소다. 키치라는 말은 분명 실재로는 가볍지만, 무거운 것으로 숭상하는 세태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키치가 지시하는 것은 '무거운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키치에는, 그 간주함이라는 형식의 필연성에 의하여, 그 간주되는 것이 진짜 그러한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표현으로서 그가 내포하는 가벼움은 폭로된다. 그리고 이러한 사태에 대하여 무거운 것을 숭상하는 그 진중함에 조소하는 것이다. 그러한 디오니소스적 조소가 키치다.
주인공이 무대에 오르게 되면 새로운 어떤 것, 웃음에 끔찍하게 반대되는 것이 나타난다. "그래,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거야! 그래 나는 살 가치가 있어"라는 생각으로 인해 수많은 개인들이 심각한 동요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삶 나와 너 그리고 우리 모두가 다시금 당분간 우리에게 관심거리가 된다. 그러나 긴 시간을 두고 보면 지금까지 웃음과 이성과 자연이 이 위대한 목적의 설교자들을 지배하는 주인이 되어 왔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짧은 비극은 결국 언제나 영원한 현존재의 희극에게 자리를 물려주거나 뒤로 물러난다. 아이스킬로스의 표현을 빌리면 한없는 웃음의 파도가 이 비극들의 가장 위대한 주인공들조차 압도해 버린다.
- 니체, '즐거운 학문' -
키치는 조악함을 표상한다. 키치라는 말로써, 무거운 것으로 포장된 가벼운 것의 조악함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는 그 자체로 어떠한 조소다. 우주적 관점에서의, 그 한낱 가벼운 것들을 숭상하는 자들에 대한 조소다. 어떤 가치도, 어떤 체계나 이상도 모두 다 키치다. 그리고 이 키치야 말로 인간의 존재 방식이다. 그러한 모순의 발견, 변증법적 투쟁으로 나아가는 것이 삶이다.
모든 무거운 것으로 간주되는 것들은, '죽음에로의 선구', 즉 죽음에로-앞질러-감으로 키치가 드러난다. 무거운 것들은 우리의 고유한, '한 번' 뿐인 죽음 앞에서는 그저 무(Nichts)다. 모든 무거운 것, 가치의 체계에 침잠한 인간 정신인 일상 속에서, 죽음은 삶의 본래적인 가벼움을 일깨운다. 왜 테레자와 토마시는 비극적 죽음 앞에 서야만 했는가? 아니 정확히 말해, 작가는 왜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는가? 이 죽음은 모든 Es muss Sein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저 허무, 즉 Einmal ist Keinmal, 한 번이기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게 만든다.
그러나 이 가벼움은 인간으로서 참을 수 없다. 그것이 형이상학적 소질이건, 삶에의 의지이건, 우리의 유기체적 본능이건 간에 이 세계와 삶은 단순한 가벼운 것일 뿐임에 납득할 수, 참을 수 없다. 그렇기에 인간은 가치를 창조한다. 그리고 옛 자명성의 붕괴와 이뤄지는 이러한 능동적 창조는 위버멘쉬의 징표다. 그렇게 안주하지 아니함으로, 항상 '넘어서는' 것이 위버멘쉬라면, 영원히 회귀하는 키치의 노력이야 말로 니체적 주체다. 완수되지 않을, 절대 '간주되는 것' 이상을 넘어서지 않지만 그러한 것들을 영원히 해체하고 창조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키치는, 인간 존재의 존재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위버멘쉬는 그저 이런 키치에서 저런 키치로 항상 '넘어갈' 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존재자를 포함해 모든 인간 존재자에게는 늘 키치의 방식으로 세계가 나타난다. 그렇게 세계와 관계 맺음에서 인간은 키치함으로 존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