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설의 심리학주의 비판
후설 현상학의 근본적인 도입은 아니지만, 그러한 돌파구를 모색하던 시기로의 후설 연구가 바로 ‘논리연구’다. 이에서 현상학의 핵심적 개념이 처음으로 다뤄지고 있다. 이러한 초기 지향성 개념을 논의하기 앞서 길잪이의 역할로서 후설의 심리주의 비판에 대하여 간략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존재한다.
‘논리연구’에서의 후설의 주 관심 주제는 논리학의 지위와 더불어 학문적 지식과 이론의 가능 조건에 대한 것이었다. 후설에 따르면, 지식이론이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지식의 가능 토대의 정립이었다. 그러나 심외(心外)의 독립적 실재에 대한 지식의 획득 가능성 내지는 그 원리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물음은 후설에게 심외에의 세계 존재에 대한 물음과 같은 형이상학적 물음들로 간주되기에 거부되는 것이었다. 즉 후설은 어떠한 특수한 형이상학—실재론 혹은 관념론—에 몰두하려 함이 아니오, 그가 집중한 바는 칸트적 형식적인 물음들로의 지식 가능조건에 대한 물음이었다.
이러한 일환으로서 당시 유행하던 철학적 입장들이 지식의 가능성을 설명할 수 없음을 비판한 것이 심리학주의 비판이다. 심리학주의에 따르면 인식론은 지각, 믿음, 판단, 앎의 인지적 본성과 관계하나 이들은 모두 심리적 현상으로 환원되어 심리학적 구조분석에 의존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단지 인식론만이 아니라 학적 추론 일반에도 적용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논리학은 심리학의 일부이어야만 하며 그 논리 법칙의 본성과 타당성은 경험적으로 탐구되어야할 심리적인 무엇이다. 심리학주의의 요지는 논리학에 심리학이라는 이론적 토대를 제공함이다.
후설에게 이는 심리학과 논리학의 근본적 차이를 무시한 중대한 오류를 지닌 것이었다. 논리학은 사실적 존재를 대상으로 하는, 경험적인 무엇이 아니다. 논리학은 이념적 구조와 법칙을 목표삼기에 그는 확실성과 정확성에 의해 특징부여된다. 그러나 심리학은 의식의 사실적, 경험적 본성에 대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는 모호함 내지는 개연성으로 특징부여된다. 따라서 논리학의 심리학으로의 환원은 논리의 필증성, 선험성, 이념성—의심할 수 없는 확실성, 비경험적 타당성—을 철저히 무시하는 범주오류다. 심리에 대한 경험적 탐구로는 필증적 논리 법칙을 발견하거나 설명하는 것이 불가하다.
심리학주의의 근본오류는 대상과 인식 작용을 올바로 구분하지 못한 점에서 연유한다. 작용은 시간 계기 속 시작과 끝을 갖지만 이는 논리적인 것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우리가 말하는 논리학의 법칙에서는 비시간적이고 대상적인, 영원히 타당한 무엇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러한 논리학의 원리들의 실재적 대상과 의식에 의해 포착되더라도 그 논리 자체가 실재적(real)인 무엇은 아니며 이들은 완전히 구분되는 이념적(ideal)인 무엇으로서 우리가 인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념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의 구분 징표는 무엇인가? 후설은 심리학주의를 비판함에 있어 플라톤주의에 접근한다. 이에 따르면 이념적 원리들의 타당성은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것과는 독립적이다. 물론 주의할 것은 후설이 완전한 플라톤주의자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의 플라톤주의의 활용은 논리적인 한에서 논해진 것이지, 어떠한 존재론적 무엇으로 활용한 것은 아니다.
후설은 의미이론적 맥락에서 인식의 시간적 장용성과 이념성의 무시간성의 차이를 계속해서 논증한다. 어떠한 의미/의미함에 대하여 이는 의미하고 있는 그것의 지칭이기도, 무엇이 의미하는 작용 및 과정을 지칭할 수도 있다. 이 용례는 엄격히 구분된다. 즉 “A의 의미는 B”라 할 때, A의 의미로의 B 그것을 지칭하는 것과 A가 B를 의미하는 작용/과정/사태를 지칭하는 것이 다르다. 따라서 의미하는 작용이 다르더라도 동일한 의미를 각기가 품는 것이 가능하며, 각자 내에서도 동일한 의미를 재차 반복하여 떠올리는 것이 가능하다. 결국 그 의미는 언제나 동일하게 같은 것으로 남게 된다. 물론 의미하는 작용은 늘 바뀌더라도 말이다.
그럼에도 이가 절대적 의미의 보존을 의미하는 것과는 괴리되고, 맥락 의존적으로 의미가 달라질 수 있음을 또한 주장한다. 그럼에도 후설이 역설하는 바는 어떠한 부차적인, 형식적 변화—발화자, 청자, 장소, 시간 등—가 의미의 변화를 초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경험적 탐구로의 심리학주의는 위의 수다한 변양태 속에의 단일한 의미성의 고정불변함을 근거로 그들의 실재성과 이념성의 혼동에 대하여 비판할 수 있었다. 만약 이념성이 심리학적 무엇이라면 이는 타자에게서 되풀이되는 것, 더 나아가 스스로에 있어서 다른 시간적 계기 속에서 어떤 의미를 반복해서 표상하는 것 또한 불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심리학주의적 결론에서는 어떠한 학문과 이해, 전달도 불가능하게 된다. 즉 회의주의 논박; 심리학주의—뿐만이 아니라, 이념성의 실재성으로의 모든 환원하는 자연주의, 경험주의적 시도—는 자기논박적 회의주의를 수반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 이후, 후설은 그의 본래적 목적으로의 지식의 가능 조건을 명시하고자 한다. 이에 이념적이고 선험적 가능 조건의 두가지 유형을 구분하는데, 이는 객관적인(논리적인) 것과 주관적인(노에시스적인) 것이다. 객관적 조건은 어떤 이론의 선험적 토대를 구성하면서 학문이라는 개념의 위반을 제외한 어떠한 위반이 불가한 근본 구조를 의미한다. 이에 일관성과 무모순성이 요구된다. 그러나 이에서 머무르지 않고 후설은 노에시스적 가능 조건을 환기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실현된 지식에서 주관적 의미에서 이야기할 때 충족되어야 할 조건이다. 즉 인식하는 주관이 참과 거짓, 타당성과 부당성, 사실과 본질, 명증과 부조리를 구분할 수 없다면 객관적이고 학문적인 지식은 불가능한 것이다. 즉 전자의 객관적 조건은 이론 자체의, 후자의 노에시스적 조건은 학문을 수행하는 주체에 대한 것이다.
이에서 후설이 다시 심리학주의로 회귀한다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의식은 경험적 심리학이 아닌 학문으로 탐구할 수 있다. 후설이 강조하는 바는 가능성의 사실적, 인과적 조건이 아니라 이념적 조건인 만큼 그러한 목표의 아래에서 당연 심리학적이고 신경학적인 접근은 배격된다. 결국 주관이 지식을 갖기 위해 소유해야만 하는 능력에 대한 탐구다.
이러한 주관성으로 방향잡음은 계속해서 견지된다. 우선 우리가 마주한 문제 상황은 논리학을 심리학의 토대로 설명하는 것이 불가함, 그리고 여전히 객관적 진리가 앎이라는 주관적 작용 속에서 어떻게 알려지는지의 역설이 있다. 결국 지식의 가능성의 규명에는 단지 객관적 이념성만이 아니라 그와 관계하는 주관적 작용, 그리고 그 관계 자체에 대한 해명이 필시 요구되는 것이다.
프레게 또한 이념성과 실재성의 구분을 바탕으로 심리학주의에 대한 비판을 수행한다. 그러나 후설과 프레게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후설은 이 비판이 지향성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후설의 일인칭적, 주관의 문제에 대한 관심이 프레게와의 차이점이었다.
논리학의 객관성에 대한 설명으로서 단지 공허한 사변적 가정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이념적 대상들 자체로의 관심돌리는 것이 요구된다. 이는 우리의 사유가 실제로 소여된 것에만 토대할 수 있도록 사태 자체로의 귀환을 요구한다. 다시말해 이념성과 실재성이 무엇인지를 아무런 선입견 없이 탐구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경험을 통한 그것의 소여에 주목해야 한다.
이 소여된 것은 필시 의식 속에서만 나타날 것이기에 의식에 대한 탐구가 선제적으로 필요하다. 결국 이의 탐구를 위해 주관성으로 회귀해야만 한다. 그것들이 자신을 그것인 바대로 보여주는 곳은 오직 주관성 속에서이기 때문이다. 결국 학문의 근본물음에 답하기 위한 접근양식으로서 부자연스러운 접근, 즉 대상에의 주목이 아니라 의식 작용들을 반성하고 주제화하고 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로서만 우리는 인식 작용과 인식 대상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정리하자면, 후설의 심리학주의 비판은 이념성의 실재성으로의 환원 불가능성에 기초한다. 그리고 이에서 구체적으로 의미작용과 의미하는 것 사이의 차이를 분석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소여되는 사태에 대하여 우리의 의식 작용으로 되돌아가 분석해야만 한다. 이 주관성으로의 귀환은 물론 심리학주의로의 역행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는 대상의 작용으로의 환원 시도—심리학주의가 그러했던 것처럼—는 부재하고, 다만 대상을 작용들과의 관계 내지 상관관계 속에서 이해하려는 시도만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후설은 이를 통해 선험적 구조의 이해, 기술을 바랐다. 그러한 점에서도 생물학적, 신경학적 토대를 찾고자 하는 심리학주의와는 근본적으로 차이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