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아도르노, 들뢰즈에 대한 공부 중 내 생각
우선 아래의 내용은 공부 중의 떠오르는 막연한 생각의 필기일 뿐, 절대 해당 사상의 참된 내용이라고 볼 수는 없다. 즉 공부의 과정으로서 나타나는 것임을 주의해야 한다.
헤겔의 변증법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는 정, 반, 합의 도식적 이해일 테다. 그러나 나의 공부 과정 중 깨달은 바, 그러한 도식적 이해는 본연의 헤겔 변증법의 참된 이해로는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의식의 경험에의 학이다. 즉 의식이 경험하는 지평에서 정신이 현상함을 추적하는 것이 해당 저서의 목적이다. 그러한 경험함 즉 현상함은 결국 구체적인 무엇이라 할 수 있다.
일단 우선 변증법이라 함은 추상성에서 구체성으로 이행하는 운동 법칙이라고 이해한 후 정반합의 도식을 살펴보자. 가령 "국가는 시장에 개입해야 한다"는 정과, "국가는 시장에 개입하면 안된다"는 반은 그 모순의 투쟁을 통하여 조화로운 통일이 일어나는데, 이를 지양(Aufheben)이라 한다. 지양은 보존, 폐기, 상승으로 정과 반 한쪽으로 귀결하는 것이 아닌 조화로운 수렴 상승이다. 결국 위 예시에서의 합은 "국가는 개입해야 하는 경우 개입해야 하고, 그러지 말아야 할 경우 개입해서는 안된다" 정도로 도출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정반합적 도식에서도 결국은, 이 합이 정을 벗어나는 것은 아님과 동시에 순수한 정명제 자체는 아니다. 즉 위에서 논한 것처럼 추상적인 정명제에서 부정의 반명제를 매개로 구체적인 합명제로 지양된 것이다. 이가 바로 변증법의 구조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러한 도식적 이해를 조금 더 벗어나서, 이 추상적으로 이해된 변증법 즉 정반합을 더 구체적인 변증법의 이해로 변증법적으로 도약해보자.
헤겔은 지양을 즉자존재(An-Sich)와 대자존재(Für-Sich), 그리고 즉자-대자존재(An-Für-Sich)로 논한다. 즉자는 추상성이고, 대자는 규정성이며 즉자-대자는 구체성이다. 즉자는 순전히 주어진 그 추상적 무엇인데, 이에 규정이 행해진다. 규정이라 함은 무엇에 대하여 그가 아닌 속성을 부여함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대자(對者)적이라는 표현에 부합하며 동시에 부정성이라 할 수 있다. 또는 다시말해 규정함은 구획함이고, 결국 부정함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자를 통한 즉자의 자기인식, 대자 속에서 즉자의 발견이 즉자-대자존재로 이행함이다.
추상적 개념으로 주어진 즉자로 책이 있다고 하자. 이에서 종이로 이루어짐의 속성이 발견된다. 이러한 규정성, 부정성으로 우리는 다음의 개념을 환수한다: 종이로 이루어진 그 책은 책이다. 즉 책이라는 추상 개념은 구체성을 획득함과 동시에 그 본연의 개념으로 되돌아온다. 그러나 이는 닫힌 원환 운동, 즉 무의미한 순환이 아니라 나선의 변증법적 순환으로서 구체성을 획득해나가는 순환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전자책이라는 것이 또한 발견된다. 그러한 부정성으로 우리는 다시 책의 개념을 새롭게 환수한다. 전자책은 또한 책이며 종이로 이루어진 그 책도 또한 책이다. 즉 책이라고 하는 개념은 글이 적혀저 무엇을 전달하는 매개체라는 의미로 구체화된다. 이에는 종이책도, 전자책도 포괄하는 새로운 개념으로 넓어지며 구체적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이를 더욱 구체화해보자. 양질변환과 대립물 상호침투, 부정의 부정으로 말이다. 우선 다시 즉자적으로 질적인 규정, 빨강임을 떠올려보자. 그러나 이 빨강임에 개념에서 우리는 그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로 빨간 것인가?"하는 물음을 던질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질적인 계기에서 양적인 계기로 이행, 즉 어떠함에서 어느 정도로 어떠함이라는 구체적 지양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매개는 무엇인가? 이는 위에서 논한 것과 똑같이 부정성이다. 즉 빨강임이 어느 정도로 빨강임으로의 양질변환을 매개하는 것은 빨갛지 않음이다. 이러한 빨강임과 빨갛지 않음은 상호 침투한다. 이 침투로서 하나의 스펙트럼이 표상되고, 이 축 상에서 하나의 극단에는 빨강임과 반대 극단에는 빨갛지 않음이 존립한다. 이 축 위에서 빨강임과 빨갛지 않음 사이에 어느 정도로 빨강임이 놓인다. 결국 대립물의 상호침투는 양질변환의 원리다. 그러나 동시에 이렇게 이해된 어느 정도 빨강임은 이러한 양질변환, 대립물 상호침투 이전의 빨강임이 아닌 것은 아니다. 즉 이 어느 정도 빨강임은 빨갛지 않음을 매개로 하였으나 동시에 원래의 빨강임으로 회귀, 빨갛지 않은 것이 아닌 것이다. 이것이 부정의 부정이라 할 수 있겠다.
결국 이 구체성으로의 운동에는 또한 자기동일성의 재확인이라는 점 또한 발견된다. 즉자적 추상성은 대자적 규정성-부정성을 매개로 구체성으로 이행된 즉자-대자로 지양되나 이 지양됨 바탕에는 즉자적 무엇이 대자적 무엇에서 즉자아님 속 즉자임을 발견하는 것이다.
헤겔의 변증법은 결국 다름을 새로운 지평에서 통일해내는 매력을 갖는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어떤 폭력적 모습을 보인다. 서로 절대적으로 다른 질적인 것을 하나의 질적인 계기로 환수하는 것이다. 그에서 동시에 부여되는 것은 양적인 성질로 구체적 규정이 나타난다. 즉 이러한 변증법적 운동은 축차적인 서열을 도출한다. 이러한 변증법의 축차적, 동일화의 원리 즉 폭력으로서 모든 것을 동질의 양적 계기로 환원함의 대표적 예시가 자본주의일 테다.
자본주의는 다양한 질적 가치들 즉 절대적으로 구분되는 다양한 가치들의 병존에 대하여, 이를 자본이라는 질적 범주로 환수함과 동시에 그들에 양적인 정도를 부여한다. 명예, 사랑, 전통과 같은 가치들은 자본주의의 체제 아래에서는 자본이라는 질적인 가치로 변증법적으로 환수됨이며 동시에 양질변환적으로 양적인 성격이 부여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자본주의의 사회의 모든 수다한 질적으로 다른 가치들은 그 자본량이 매겨진다.
그렇기에 아도르노는 이러한 헤겔의 변증법적 동일화를 계몽의 변증법으로 설명한다. 어떤 수다한 무엇을 설명해내는 이성, 체계에서 더 수다한 무엇을 많이 설명해내는 구조로 이행함이 계몽의 변증법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결국 동일화의 무엇으로서 환수되나 그의 구체성, 즉 그 구조에서 정합적으로 설명되거나 정위되는 것은 늘어난다. 이러한 의미로서 계몽의 변증법의 계몽은 당연 동일화의 폭력으로서 긍정적 가치부여되지 않는다.
결국 아도르노가 부정변증법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헤겔의 절대적 관념론의 변증법이 보이는 어떠한 통일성으로 환수됨, 회귀함으로의 운동이 아니라 그러한 지양의 운동을 즉자와 대자의 치열한 갈등과 모순을 재확인하는 다름의 운동으로서 사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부정변증법을 통하여 아도르노는 자본주의적 사회의 동질화라는 폭력에 대항할 수단을 모색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즉 정과 반의 변증법적 운동은 합이라는 통일로 환수됨이 아니라, 정과 반의 모순이 끊임없이 드러나는 과정으로의 운동 자체인 것으로 재해석해내는 것이 부정변증법이라 대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들뢰즈의 헤겔 변증법 비판은 아도르노와는 또한 다른 관점에서 진행된다. 들뢰즈에게 헤겔 변증법은 애초 어떠한 같음의 지평 위에서 다름이 다뤄지는 것, 즉 개념적 차이로 진행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우선 들뢰즈는 반복은 차이를 낳는다고 말한다. 일상적으로 반복은 같음의 반복으로 이해되지만, 들뢰즈에게 이는 전도되는 것이다. 우리가 같은 음악을 여러번 듣는다고 해보자. 이 같은 음악은 분명 같은 음악이지만 매 경험은 결국 어떻게든 절대적으로 다르다. 이는 우리에게 잘 포착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차이다.
공장에서 인형을 아주 많이 생산해낸다고 해보자. 이들은 모두 같은 인형이지면 분명 각기 절대적으로 다른 무엇이다. 그런 차이를 들뢰즈는 절대적 차이, 미분화라 논한다. 라이프니츠의 미분은 한 점에서의 기울기다. 본래 기울기란 두 점 간의 기울기이지만, 미분은 어떤 한 점의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그 기울기를 도출해내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로서 들뢰즈는 이 절대적 차이를 미분화라 표현한다. 분명 연속적으로 이어진 선임에도 불구, 그에는 우리 인식 능력의 한계로 드러나지 않는 절대적 차이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헤겔의 변증법에서 부정은 이 절대적 차이와 어떻게 다른가? 헤겔의 부정은 규정, 즉 범주적 부정이다. 이 말은 즉슨 개념적 부정으로의 차이인 것이다. 남성과 여성은 차이를 갖는다. 그러나 이 차이 가짐은 어떠한 성별이라는 같음의 범주 내에서 차이 가짐이다. 왜냐하면 절대적 차이, 미분화라 함은 남성이라고 무엇을 개념화 내지는 동일한 무엇으로 치부하여 통일시키는 그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애초 헤겔의 변증법의 논리 속에는 모순의 전제로서 통일이 부여되어 있다. 헤겔의 변증법은 통일된 지평 위에서의 모순의 운동인 것이다. 그러한 변증법적 지양에는, 차이는 보존되지 않고 오직 폐기되며 은폐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