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증법이란 무엇인가

사고의 고된 노동으로의 변증법

by 잠좀자자

*테오도어 아도르노, 「변증법 입문」, 홍승용 역, 세창 출판 도서를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또한 본고의 작성자는 단지 학부생이며, 공부의 과정 속에서 작성된 글인 만큼, 그 신빙성에 대하여 의문갖고 본고에 접근하길 경고하는 바다.


변증법의 대중적 인식 비판


변증법은 흔히 정반합으로 이해된다. 즉 정립(thesis)-반정립(antithesis)-종합(synthesis)으로 이어지는 상승의 운동을 통하여 일종의 마술처럼 정과 반의 모순을 초월해버린다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변증법에 대한 이해에 머물고는, 그것이 단지 개념의 기교술 정도에 그치는 장난질에 불과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결코, 이는 절대 그러한 기교술이 아니다. 또한 모순을 뛰어넘어버리는 마법같은 논리학도 아니다. 이는 오히려 일상적이며, 또한 진중한 것이다. 치열하게 진리로 다가가고자 하는 인간의 정신 운동을 묘사하자면 바로 변증법일 것이며, 우리의 모든 사유 속에는 변증법적 계기가 발견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우선, 정반합이라는 변증법의 잘못된 이해부터 살펴보자. 어떤 진술 A가 있고, 그에 대하여 반대되는 진술 B를 대질시킨다. 그러한 갈등을 통해 A나 B 일방의 승리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이 동시에 존립하여 상승하지면 결코 A나 B에 머무는 것은 아닌 새로운 질적인 도약으로의 C가 도출되는 것이다. 이러한 변증법의 매력은, 단지 이중일택의 문제를 더 나은 해결책으로 고양시키는 데에 있다. 결국 요약하자면 止揚으로 쓰는 지양, 즉 Aufheben은 세 가지 의미를 갖는데, 보존/폐기/상승이다. 즉 변증법은 지양이며, 그에는 원래의 대질되는 계기들이 보존됨과 동시에 폐기되고, 또한 그 결과는 상승한 질적 도약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이러한 변증법의 논리가 이해되는가? 즉, 우리는 어떻게 모순되는 두 진술을 초월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헤겔에 따르면 분명 변증법은 세계의 진행 원리이자 질서이고, 논리학으로서 신의 자기인식 과정이라고 논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반합으로의 변증법이 헤겔의 그러한 면모를 어떻게 담아낸단 말인가? 결국, 정반합으로의 변증법은 변증법을 도식화하고 정태적으로 만든 공허한 가상일 뿐이다. 결코 변증법은 그러한 정태적 도식으로의 무엇이 아니며, 생동하는 과정이기에 이러한 변증법 이해는 어떤 의미에서 반-변증법적이다. 정반합은 단지 변증법에 무지한 이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매개하는 간략한 소개 정도일테다.




즉자, 대자, 즉자대자. 추상에서 구체.


그렇다면 본래적 의미의 변증법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우선 우리는 사유의 운동이 추상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이행하며, 지금 이 변증법에 대해 이해하는 순간조차도 변증법적 계기 속에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즉, 변증법은 추상성에서 구체성으로의 이행이다. 그러므로, 본고 또한 변증법의 이해를 위하여 그 변증법의 모두를 한번에 그대로 내보이지는 않을 것이며, 변증법적으로, 먼저 추상을 제시한 후에 구체성으로 이행하는 변증법적 운동을 이 글 전체에서 내보이고자 한다.


우선 위에서 논했듯 변증법은 추상에서 구체로의 이행이다. 우리는 그러한 직접적으로, 그 자체로 있는 것을 즉자존재(卽者存在, Ansichsein)라 칭한다. 이러한 즉자는 그 자체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을 뿐이며, 어떠한 인식됨으로의 표상도 아니라 그저 그의 현전이다. 즉, 그렇기에 그저 추상적인 것이다. 우리는 이에 인식을 통하여 규정성을 부여한다. 이러한 규정성에 있어서, 우리는 그것을 무엇에 대한 것으로 정립한다. 이러한 무엇에 대한 규정성을 대자존재(對者存在, Fürsichsein)이라 칭한다. 이러한 규정은 부정이다. 즉 이미 규정함에서 그것은 제한되고, 부정된다. 추상적인 즉자로 주어진 펜에 대하여, 우리가 그 펜을 붉다고 규정할 때, 펜은 빨건 것으로 제한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증법적 운동의 결과는 즉자대자존재(卽者對者存在, An-und-Für-sichsein)이다. 즉자대자는 대자의 부정성, 규정성을 다시 즉자로 환수함으로서 자기동일성을 재확인한 결과다. 우선은 위처럼 설명이 난해한 것을 일단 용인하길 부탁한다. 아래에서 더 구체적으로 지양해보도록 하자.


우선, 추상적 즉자에 규정을 통해 대자가 대립하고, 그 둘이 즉자대자로 지양됨은 우선 제시됨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이 실재로 어떻게 일어나는가? 우선 변증법은 끊임없는 유동적인 운동이라는 점에서 결코 도식화되어 설명가능한 무엇이 아니라는 점을 먼저 밝히고자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변증법을 예화함으로서, 그에 암시되는 운동과 모순의 계기로서의 변증법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이해해야 하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우선 그 사람은 우리에게 즉자적으로 주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즉자적 추상은 무와 다름없으며, 즉 아무런 이해도 갖지 못한 상태다. 우리는 이에 어떠한 규정을 더한다. 그는 남성이다라고 해보자. 그러면 그는 그 자체로 남성인 것은 아니나, 그에게 남성이라는, 그 자체가 아닌 속성이 부여된다. 즉 그는 그가 그 자체로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속성인 무엇을 통해 제한규정된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그는 남성이라는 대자적 규정이 존립한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이러한 남자임은 분명 그와 동일시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는 남자다. 즉 남자로의 그, 대자적으로 남자라는 규정성을 부여한, 속성을 지닌 그는 우리가 처음 즉자적으로 주어진 그라는 한에서 같은 그다. 결국 그렇게 규정된 대자존재는 즉자존재와 동일하다. 그렇게 대자존재는 즉자존재로 환수되어, 즉자대자존재로 지양된다. 그러나 이러한 즉자대자존재로 지양됨에는, 질적인 도약이 존립한다. 바로 우리가 즉자적 추상이었던 그것을 규정의 대자를 매개로 더 구체화된 인식을 획득했다는 것이다.


이해되는가? 결국 변증법은 추상에서 구체로 이행하는 운동이다. 이제 더 변증법을 구체화해보자. 위에서는 모순과 부정성의 계기가 비교적 덜 드러나기 때문이다. 어떤 개념으로 책이 즉자적으로 있다. 우리는 이 책에 대한 관념으로, 종이로 되어 있고, 표지가 있는 글이 적힌 정보전달체 정도로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전자책이 등장했다 해보자. 이때, 이러한 전자책의 등장은 어떤 사태다. 사태는 개념이 아닌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본래적으로, 즉자적 추상으로 지닌 책의 개념이 과연 전자책이라는 사태를 포괄해낼 수 있는가? 여기서 바로 부정성, 모순의 계기가 나타난다. 우리가 가진 개념의 한계가 드러나며, 이 개념이 더이상 사태에 부합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변증법적 지양이 나타난다. 기존의 사태를 설명해내는데에 만족하던 개념이, 새로운 사태, 모순과 부정의 계기를 만나 개념을 수정한다. 즉 우리는 책의 개념을 글이 적힌 정보전달체로서의 의미를 강화하여 이해함으로서, 전자책을 책이라는 개념으로 환수해내는데 성공한다. 그렇다면 그 결과가 어떠한가? 우리는 변증법적 과정 이전보다 책의 개념을 더 풍부하게, 구체적으로–이 구체적이라는 의미는 헤겔적이다. 즉 더 많은 것을 지님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일상적 의미에서 오히려 더 많은 외연을 갖는 개념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이해되는 것과는 괴리되게 말이다–환수해내었다.




전체와 부분.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모순의 계기, 대자와 즉자를 즉자대자로 초월해내는 운동이 가능한가? 이러한 초월의 과정이 우리에게 흔히 주어지며, 수많은 현상을 설명할 수 있음은 이제 명료해졌으리라.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변증법의 근본구조에 대한 물음이 남는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체계와 전체다. 우리는 부분을 전체라는 계기 속에서 이해할 때, 또한 변증법이라 할 수 있다. 즉 단지 주어지는 사태를 분석하고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 체계와의 구조연관 속에서 대상을 사유하는 사변–변증법은 탁월한 의미에서 사변인데, 사변이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전체를 사유함이라는 의미의 Spekulation이라는점에서 그러하다–인 것이다. 전체 구조연관 속에서 부분은 정위된다. 즉, 주어지는 부분은 그 자체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속해 있는, 하지만 그 부분 자체는 아닌, 전체와 대질되어서 이해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대질의 과정은 고된 사유의 노동이며, 그로 얻는 인식은 구체화된, 더 많은 계기를 그 부분에 녹여내는, 구체적인 인식으로의 결과로 이어진다.


타인을 이해하는 문제라 할 때, 타인이 단지 나에게 보여주는 모습만을 바라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은 단지 부분이며, 그와 내가 함께 속해있는 전체의 맥락이나 상황의 구조관계 속에서 연관을 찾아내고, 그 보여준 모습을 이해해낼 때 참된 이해로 거듭나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전체와 부분은 변증법의 핵심적 요소를 이룬다. 그럼에도 변증법은 수월한 과정은 결코 아닌데, 이는 바로 전체라는 것이 절대로 우리에게 그대로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 전체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유한한 존재자에게 불가한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전체는 어떤 의미에서 예감될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예감된 전체라는 계기를 통해 우리는 부분을 변증법적으로 이해함과 동시에, 예감된 전체 또한 넓어진다. 즉 전체는 부분을 매개로 또한 다시 환수된다. 결국 전체 구조계기 속에서 부분을 사유하며, 동시에 전체와 부분을 새롭게 환수해내어 그들을 넓혀나가는–구체화하는–인식이 변증법이다.


이제 헤겔의 변증법을 예시로 들어보자. 존재와 무의 변증법이 그것이다. 물론 이에는 나의 자의적 이해가 개입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므로, 주의하며 읽기를 권장한다. 우선 추상적 즉자로의 무규정적 존재가 있다. 이 순수한 존재는 그 무엇도 내포하지 않기에, 그 자체적으로 부정성의 계기를 갖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는 어떻게 매개된단 말인가? 존재는 그것이 존재로서 존재하려면, 사유되어야만 한다. 즉 존재는 사유되지 않을 때 존재가 아니다. 이는 결국 사유의 전체 계기에서 존재를 사유함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사유는 존재이며 존재는 사유다. 결국 사유라는 전체 구조연관 속에서 존재는 의미가짐이고, 그로써 존재는 무를 산출한다. 즉 사유가 부재하는 존재는 무와 다름없다. 그리고 이렇게 대자적으로 도출된 무는, 존재가 아닌 것이며 일종의 존재에 대한 규정성이다. 즉 존재에는 사유되어야만 함이 규정되고, 그러한 규정에서 도출되는 순수존재의 상관자로의 무다. 이러한 무와 존재는 결국 서로를 향하고, 변증법적으로 지양된다. 존재와 무는 사유라는 전체 구조 연관 속에서 서로 항상 매개되어 있다. 이러한 매개를 통해, 존재가 무로 향하여 생성이, 무가 존재로 향하여 소멸이 존립한다. 이것이 우주의 시작에 대한 헤겔의 변증법적 설명이다.


여기서 또한 중요하게 드러나는 변증법의 핵심은, 모순과 부정성의 계기가 즉자존재에서 필연적으로 전체 구조의 연관, 매개 속에서 드러나야만 한다는 것이다. 절대로 외부적인 모순의 계기를 덧붙임이 아니라, 오히려 이 모순은 즉자로부터 나온다. 그런 의미에서 위 내용을 추상해보자면, 우주의 존재를 대략적으로 제시할 수 있다. 신의 정신–물론 이를 기독교적 신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테다–이 순수 존재로서 있으나, 그는 무규정됨으로서 아무런 존재도 아니며 오히려 무다. 그러한 신은 결국 존재-무-생성의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자연을 낳는다. 이러한 자연은 결코 신이 아닌 것이지만 동시에 신으로부터 나온 것으로의 외화태다. 여기서 정신, 즉 신과 자연은 대립하고 변증법적으로 운동하는데, 이가 바로 일종의 인식이다. 정신은 자연, 즉 객관을 정신 속에 포섭하고자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서로 다른 객관과 정신, 즉 주관이 일치하게 되는 매개는 바로 객관이 주관에서 외화된 외화태임이라는 전체 구조 계기 속에 있다. 즉 그러한 변증법적 운동은, 객관 속에서 주관의 재발견이며, 객관이 주관으로부터 외화된 것임을 인식하고 환수해내는 자기동일성을 확인하는 운동인 것이다. 결국 세계의 진행은 신의 자기인식으로의 운동이며, 현실과 관념의 대립과 지양의 운동이다.




변증법의 요구, 끝없는 변화와 유동성.


그러나 여기에서 변증법의 이해를 멈추어서는 안된다. 즉, 변증법의 의의가 무엇인지 고찰해보아야 한다. 변증법은 결고 정태적 상황을 용납하지 않으며, 그 무엇도 절대적인 것으로 두지 않는다. 즉, 진리는 헤겔에 따르면 모든 운동의 끝에서야 성립하는 것이며 오히려 진리 자체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무한한 운동, 유동성의 요구가 변증법에 있으며, 이는 부정과 모순을 드러내는 비판으로 수행된다. 우리를 옥죄는 모든 즉자적 관념들에 대하여 우리는 늘 부정적 계기와 모순을 드러내고자 노력하며 비판한다. 이러한 비판을 통해 관념은 변화하고 운동하며, 그렇게 지양되나 이에서 결코 멈추지 않고, 또다시 비판한다. 이것이야 말로 아도르노가 발견한 변증법의 가능성이다.


결국 변증법은 치열한 사유의 노동을 요한다. 그 무엇도 정태적으로 사유하지 않으려는 비판 정신이다. 어떤 현상에 대한 비판을 통해 그것을 변화시키려 해보았다고 했으나, 그것이 변치 않았다고 해보자. 그럼에도 우리는 그 불변을 또한 동시에 변화의 전체 구조 속에서 생각해야 한다. 즉 그것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되며 불변마저도 변화의 계기 속에서, 변증법적으로 인식해야만 한다. 이는 굉장히 고통스러운 것이다. 단지 주어지는 것을 그대로 절대 받아들이지 않고, 늘 전체 속에서 사유하라는 요구는 어떠한 순진한 인식도 배격하는, 비판적 정신의 극단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이가 모든 것을 부정해버리는, 모슨 앎을 뺏어가며 앎을 불확실하게 만드는 폭력이 아니라, 오히려 굳은 지식으로의 폭력을 벗어던지고 더 나은 앎으로 나아가는 매개라는 점에서 변증법은 단지 회의주의나 상대주의로 귀결되는 무엇은 아니다. 늘 변증법의 요구 속에는 전체 속에서 대상을 사유함으로서 더 나아진다는 것이 존립한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개념이 그 사태를 실제로 참되게 포괄해내고 설명해내는지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숙고하고, 개념을 절대 굳어진 상태로 둬서는 안되며, 항상 사태와 대질하여 개념을 참된 것으로 만들도록 개념의 운동을 사유의 고된 노동을 통해 지속시켜 지양해야만 한다. 이것이 철학자의 의무인 것이 아닐까?


물론 위의 이해는 굉장히 순진한 이해이고, 물론 그렇기에 비판을 독자들에게 요하는 바다. 이러한 비판을 대자삼아 나는 내가 기존에 갖고 있던 본래의 개념으로 환수해내어, 부정성을 매개로 더 나은 이해로 지양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코 그 정태적 상태에 머무르지 않겠다는 결단이야말로, 변증법의 실천적 의의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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