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에서 찾은 나의 위안
다른 사람과 친해지는 방식으로 ‘험담’을 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며 ‘사람들이랑 친해지기 위해 꼭 저 방법을 써야 할까? 저 사람이랑은 거리를 좀 둬야겠어’라고 생각했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뒷담화 러버가 되었다. 물론 모든 이들이 그 대상인 것은 아니다. ‘미저리’한테만 그렇다. (그 사람의 성만 부르자니 다른 사람과 헷갈리고, 풀네임을 이니셜로 부르자니 친한 선배의 것과 같아 고민 끝에 붙인 별명이다. 미저리를 아는 사람들은 ‘이 별명은 정말 찰떡이야’라고 칭찬했다! 음하하하하)
일하면서 다양한 사람과 대면했지만, 만난 지 3주 만에 나를 ‘질리게 한’ 사람은 그녀가 처음이다. 일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감을 타인에게 100% 전이하고, 스스로 숙고하고 해결방안을 찾아보는 노력 없이 타인에게 질문을 난사하며, 타인의 업무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하루 종일 메신저 채팅창을 도배하는 사람. 게다가 다른 사람에게 나눠 줄 일의 종류와 역할, 필요한 인원을 고려하지 않고 그냥 흘러가게 두다가 결국 이를 보다 못한 타인이 나서서 해결하게 하며, 본인이 총괄인 업무임에도 자신의 판단과 결정없이 앵무새처럼 타인의 말을 자기 것 인양 읊어대는 사람. '부탁'이라는 말로 자신의 일과 책임을 전가하기 일쑤인 그녀.
난 끝내 ‘곧 정신병에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 사람과 일을 시작하고 수면장애와 이갈이를 겪게 되었으니 ‘곧’이 아니라 ‘벌써’인 셈이다. 이 격노, 성가심, 답답함, 안타까움을 내 안에 가둬두기만 한다면,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올라 기어코 폭발할 것만 같았다. 끝내 나는 이 사람과 물리적, 심리적, 업무적 거리를 두는 동시에 피난처를 찾았다.
다른 사람과 조심스럽게 이 사람에 대한 경험을 나누기로 결심한 거다. 먹잇감을 낚아채기 위해 적당한 때를 노리는 맹수처럼 다른 사람들이 나와 같은 경험을 했는지, 그녀가 타인에게 어떤 사람인지를 이야기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았다. 마침내 그녀에 대해 입을 뗀 순간, 놀라운 사실을 접했다. 아뿔사, 그녀는 공공연한 이 구역의 미친X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숨길 수 없는 미저리 본능은 여러 사람을 지치게 했고, 든든한 동지가 된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미저리가 미저리했다’는 말을 신나게 읊어대기 시작했다.
미저리를 향한 분노와 탄식의 말들은 하루도 빈틈없이, ’타닥타닥‘ 키보드를 타고 물 흐르듯 이어졌다. 미저리 때문에 부아가 치밀었다가, 미저리는 왜 저러고 살까 하며 측은해졌다가, ‘저러고도 안 짤리고 회사생활을 할 수 있구나’하며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끼다가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라는 끈끈함에서 위안을 얻는다.
오늘도 ‘온전히 좋은 직장동료’가 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리지만, 당분간은 사회적 결속력을 강화하고 행복감을 높여준다는 뒷담화의 긍정성에 기대어 하루하루 버텨보기로 했다.
하지만 소심한 ‘발끈함’을 이끄는 사건과 사람은 내 뒷담화 대상에 감히 오르지 못할 거다. 그 정도는 스스로 품는 나의 관대함을 믿는다. 나는 오직 그녀에 대해서만, 그리고 내 든든한 동지 A와만 작당하는 도덕적 한계선을 지킬 것이다. 나의 대피소인 메신저를 일정한 수준으로 정화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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