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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게 빚진 나의 성취

일에서 받은 축복을 세어봅니다


책상서랍을 정리하고 싶은 어느 날이었다. 묵은 때를 벗겨내듯 하나씩 치우며 내 삶도 개운해지고 싶었다. 그러다 이면지를 넣어둔 투명 파일에서 입사용 자기소개서를 발견했다. 그땐 분명 '이 보다 더 잘 쓸 수는 없어!'란 자신감이 충만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사회인의 눈으로 다시 보니 웬걸, 이 자소서로 회사에 어떻게 들어왔는지 정말 신기할 따름이다. 비밀의 열쇠는 마지막 장에 있었다. 누군가 친절하게 첨삭했을 뿐 아니라 전반적인 개선 방향까지 덧붙여 준 것이다. 누굴까 대체?!


입사해보니 재수, 삼수는 물론, 그 마저도 실패해 인턴, 계약직까지 가능한 가산점은 모두 채우고 회사에 들어온 사람들이 있었다. 반면 나는 아무 경력도, 가산점도 없던 상태로 이 회사에 ‘철썩!’ 붙었다. 계획한 바를 원하던 때에 정확하게 이뤘으니, 이때 나의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을 거다. 그리고 이 결과는 다 ‘내가 잘나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이 회사에서 일하고 있던 대학선배가 친절하게 내 자소서를 첨삭해주고 대면 피드백까지 줬던 거다. 그즈음 엄마가 나를 위해 얼마나 많이 기도했었는지도 떠올랐다. 그리고나서 깨달았다. 나의 출중함으로 채울 수 있었다고 생각했던 이력서 한줄 한줄이, 실은 많은 사람들의 기도와 뒷받침으로 가능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을 내가 너무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는 것을 말이다.


적당한 때에 원하는 부서에 배치를 받은 것도 알고 보면 내가 이룬 것이 아니었다. 원했던 직무의 업무를 하게 된 것도, 유관기관에서 잠시 일하게 된 것도 모두 내가 계획했으나 그것을 이뤄준 건 ‘주변 사람들’이었다. 마침 적절한 때에, 나를 둘러싼 분들이 좋은 말을 전해주셔서 내가 원하는 곳에 안착할 수 있었던 거다. 그 덕에 업무를 보는 시야도 넓히고 나와 조직에 대해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으니 참 감사한 일이다.


난 전형적인 ESTJ형 인간이다. 목적의식이 분명하고, 이뤄야할 계획이 뚜렷하다. 그리고 그 계획의 중심엔 항상 '내'가 있다. 그래서 계획하지 않은 일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 계획했던 일을 거저 얻는 것에 만족감을 느끼는 것, 계획에 내 노력이 빠져있는 것, 모두 나에게는 낯선 일이다. 고로 계획이 완성되지 않을 때는 마치 하나의 세계를 잃은 듯 절망하기도 한다. '내가 뭐가 부족했을까?' '내가 좀만 더 노력했음 성공하지 않았을까?' 하고 스스로를 찌르는 일도 빈번하다. 그래서 좌절의 순간은 더욱 또렷하나, 감동의 찰나는 흐릿하다.


누군가는 말했다. 어릴 때 꿈꾸던 일을 실제로 하게 되는 사람은 의외로 드물다고. 그런데 나는 예전에 품은 열망을 그대로 현실로 이루어냈으니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돌아보니 지금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 자체가 큰 복이다. 이와 같은 축복이 얼마나 자주 나를 찾아왔을까? 그리고 얼마나 오랫동안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그냥 흘려보냈을까?


그간 받아온 축복을 곱씹어 보니, 내 성취의 중심에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내 계획과 통제의 경계 안에서는 생각할 수 없던 것이다. 작가 은유는 삶이란 ‘타자에게 빚진 삶’의 줄임말이라 했다. 그렇다. 지금까지 내가 이뤄온 것은 온전히 내 것이 아니다. 나는 누군가의 풍성한 사랑과 지지, 헌신의 수혜자였다. 내가 받아온 셀 수 없이 많은 감사의 이유를 기억하며, 부족한 점은 건강하게 개선하고, 나눠줄 수 있는 복은 널리널리 퍼뜨려야겠다. 이렇게 나는 내 경계를 넘어서기로, 한 뼘 더 성장하기로 결심했다.


출처: https://unsplash.com/photos/t48eHCSCnds



* 커버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photos/pPPbmx0Tf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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