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기관에서 일하는 내가 '안정적으로 불안한' 이유
‘평생직장’이란 말이 옛말이 된 요즘, 여전히 입사한 회사에서 퇴직할 수 있는 곳이 어딜까?
바로 철밥통, 신의 직장이라 불리는 공공기관이다.
공공기관에서는 월급이 나오지 않을까, 휴직으로 커리어가 단절될까, 내일 내 책상이 없어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월급도 꼬박꼬박 나오고, 복지 혜택도 보장된다. 이런 면에서 공공기관은 분명히 안정적이다. 그런데 공공기관 직원들은 물론, 공무원들까지 왜 이 좋은 곳에 다니기를 그만두는 걸까? 이런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성과와 보상이 불명확하다.
공공기관은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다. 사적 영역에서는 명확하게 정의된 시장과 고객이 있다. 그리고 여기서 최대의 매출을 확보하는 것이 목표다. 하지만 공공 영역은 전 국민을 대상으로 공익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다. 그래서 공공 분야의 일은 ‘성과’ 보다 ‘과정’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숫자로 환산되는 결과물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다 기회가 평등한지, 과정이 공정한지, 결과가 정의로운지가 더 중요한 곳인 거다.
그렇다 보니 이 업계에선 무엇이 성과인가, 어떻게 성과를 증명할 것인가, 그것을 어떻게 얼마나 보상할 것인가에 대해 합의가 없다. 성과가 분명하지 않으니 직원에게 주어지는 보상도 불투명하다. 그러니 누가 일을 잘했는지, 그 평가가 공정한지가 항상 이슈다. 그렇다고 사회적 인정이나 정서적 보상이 있나? 그것도 아니다.
사회에서 흔히 공공기관을 수식하는 말은 철밥통, 신의 직장, 방만경영, 낙하산이다. 게다가 보통 상사와 결이 맞냐가 평가를 잘 받는 지름길이기에 일할 의욕이 꺾인다. 열심히 일해도 일한 만큼 보상받을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니, 일을 하면 할수록 더 많고 어려운 일이 쌓인다. '너 잘하니까 이것도 해'라고 볼드모트 같은 일을 덜컥 받은 적도 있다. 여기서 내가 일한 만큼의 몫을 가져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확실한 성과를 내는 것도 쉽지 않고, 그걸 해낸다 하더라도 대가가 없으니 무엇을 보고 일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결론은 성과 평가가 불가능하고 인센티브 역시 어렵다는 것입니다. 저는 인센티브는 포기했습니다. 포기하니 행복이 찾아오더군요."
- <홍보의 신>, 충주맨 김선태 주무관 -
둘째, 업무의 책임과 압박이다.
공공기관은 주무부처, 기획재정부, 국회, 감사원과 같은 상위 기관의 감시와 통제를 받는다.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일이고, 지켜보는 눈도 많으니 여기서 일할 때는 항상 큰 책임이 따른다. 이런 책임을 다하기 위해 다른 기관에서 요청하는 일에 업무 시간의 대부분을 쏟는다거나 본업 외의 일을 더 많이 해야 할 때도 많다.
그뿐 아니다. 공공기관은 항상 ‘민원’의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다. 민원은 누구나, 언제든, 무엇에 대해서든 제기할 수 있다. 일을 아무리 잘했어도 민원이 발생했다는 사실 만으로 문제가 된다. 공공기관의 약점을 이용한 악성 민원이 생기면 다른 일을 전혀 못하고 그 업무에만 매달려야 한다. 여기저기서 ‘어떻게 됐냐’고 묻는 전화와 이메일에도 끌려다녀야 한다.
이때 상위기관에서 자주 하는 말 중 하나는 ‘담당자 징계해라’다. 언제 내가 한 일에서 외부 지적이나 민원이 발생하고, 최악의 경우 징계까지 받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벌벌 떨린다. 그래서 공공기관에서는 일을 잘해서 성과를 내는 것보다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셋째, 낮은 급여다.
회사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사기업에 다니는 사람들은 계약연봉 외에도 PS(Profit Sharing, 초과이익분배금), PI(Productivity Incentive, 생산성 격려금), 초과이익성과급, 목표달성장려금 같이 다양한 수당을 받는다고 들었다. 그런데 공공기관의 임금은 크게 연봉과 성과급으로 나뉘는 단순한 구조다. 그런데 연봉이나 성과급 모두 회사 혼자 결정할 수 없다.
공공기관의 임금 상승률은 매년 기획재정부가 주관하는 공공기관운영위원회를 통해 결정된다. 2024년 임금 상승률은 전년대비 2.5%로 최저임금 상승률인 5%에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성과급도 기획재정부의 공공기관 경영평가 결과에 따라 달라지는데, 등급별로 차이가 크지 않다. 가장 좋은 등급을 받아도 연봉의 1%도 안 되는 금액을 1년에 딱 한번 받는다. 그러니 성과급이 거의 없는 거나 다름없다. 호봉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일 잘해서 더 좋은 등급을 받겠다는 사기 진작도 되지 않는다. 아주 낮은 급여는 아니지만, 그런다고 일한 만큼 보상받는 것 같지도 않은 이 애매한 돈을 받고 계속 일해도 되는 걸까? 이 돈 받아 언제 집도 사고 가정을 꾸려갈 수 있을지 연차가 쌓일수록 이런 고민은 더 커진다.
승진은 또 어떠한가? 공공기관은 한 해에 몇 명을 승진시킬지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 기획재정부에 전국 350개의 공공기관 사이 경쟁을 통해 매년 승진 인원과 예산을 따와야 한다. 다음 직급으로 승진하기 위한 근속연수는 늘어만 가는데, 승진을 기다리는 선배들이 앞에 수두룩하다.
그렇다고 복지가 좋은 것도 아니다. 작년엔 정부에서 효율화라는 명목으로 안 그래도 별로 없는 복지를 줄이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회사 창립기념일 유급 휴가도 없어질 뻔했다. 공공기관은 효율화란 명목으로 자주 정부의 수술대에 오른다. 월급은 고정, 예산과 업무는 느는 환경 속 대체 무엇을 보고 일해야 할까? 공익을 위한 사명감과 자부심만으로 일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넷째, 이 회사를 나가면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기업은 한 직무에서 계속 일하면서 쌓은 산업에 대한 이해와 업무 지식을 바탕으로 커리어를 쌓으며 이직도 비교적 자유롭게 할 수 있다. 그런데 공공기관은 대부분 순환근무가 원칙이다 보니 다양한 업무영역을 조금씩 경험한다. 전략기획, 마케팅, 브랜딩, 영업, 판매처럼 똑 떨어지는 단어로 내가 쌓아온 경험의 영역을 선택할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그 대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커다랗고 두루뭉술하고, 누구나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일반행정’이다. 오래 일한다고 커리어가 쌓인다거나 소위 말해 ‘먹고 살 능력'이 갖춰지는 것이 아니니 퇴사 후 삶이 두려워진다.
게다가 사기업에서 공공기관으로 이직하는 것은 쉽지만 반대는 어렵다. 기업 입장에서 공공기관 경험은 크게 선호하는 경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기업으로 이직한 동료는 공공기관에서 일한 전체 경력의 반만 인정받았다고 했다. 공공기관 중에서도 민간에서 활성화되지 않은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면 더 문제다. 산업군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고 업계가 좁기 때문에, 이직을 어디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애매하다. 60세 정년퇴직을 하고 나면 난 뭐 하면서 살 수 있을까?
그래서 계속 고민하게 된다. ‘내가 그동안 뭘 했나, 앞으로 뭘 할 수 있는 사람인가?’ 그것이 나를 비롯한 동료들이 끊임없이 자기 계발을 하고 부캐를 고민하는 이유일 것이다. 이 회사 들어오려고 NCS도, 논술도, 영어도 공부했는데, 일하는 것도 모자라 회사를 나가기 위해 또 공부를 해야 한다니!
그동안 공공기관이 ‘신의 직장’으로 불린 건 정년보장의 안정성,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워라밸, 높지도 낮지도 않게 적당히 보장된 연봉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건 모두 옛말이 된 지 오래다. 올해 국가직 9급 공무원 1차 시험 응시율은 2018년 이후 가장 낮고, 9급 공무원 임용 경쟁률은 31년 만에 역대 최저치라고 한다. 그만큼 공공 영역에서 일하는 것의 매력이 떨어진다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공무원, 공기업, 공공기관 구분 없이 공공영역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이런 소식들이 자주 눈에 띄는 것을 보면, 나처럼 공공기관에 있어도 꾸준히 불안한 이들이 참 많은 것 같다.
공공기관에 있는 것이 정말 안정적인 걸까?
이제 ‘공공기관=안정적’이라는 세상의 시선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