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랏돈 쓰는 사람이 시험 보는 날에 생각한 것
오늘 국회의 부름을 받았다. ‘비공식 절차’라는 말이 무색하게 매년 하는 국회 예산 결산 여야당 보좌진 설명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결산국회 대비 여야당 보좌관 설명회’는 정부부처가 제출한 결산내역을 보고 국회의원실 보좌관들이 궁금해하는 사항들에 대해 질의응답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에겐 줌(Zoom)도 있고, 구글미트(Google meets)도 있고 마이크로소프트 팀즈(Teams)도 있지만 보좌관이 부르면 사무실이 부산에 있건, 제주도에 있건 무조건 국회로 달려가야 한다. 공공기관 지방 이전을 해놓고 이럴 때는 왜 꼭 서울에서 ‘대면으로’ 회의를 해야 하는 걸까? 그건 바로 공공기관들에겐 보좌관이 갑(甲)이기 때문이다.
보좌관들은 공공기관에 자료를 요청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궁금한 건 뭐든 내줘야 한다. 그들은 줄곧 이 업무를 해왔기에, 때로는 순환근무를 하는 공공기관 담당자보다 빠삭하다. 국회의원들보다 보좌관을 만날 확률이 더 높으므로 공공기관 사람들에게 보좌관은 국회의원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거친 정치판에서 살아남은 국회 보좌관들은 꼬리 질문의 달인이다. 특히 예산 결산을 담당하는 보좌관들은 국회 상임위 중에서도 엘리트 정치인들의 수족인 경우가 많다. 그러니 괜히 보좌관 눈 밖에 나 피곤한 일을 겪지 않으려면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다 해줘야 한다. 그래서 나도 불려 갔다. 아니, 끌려갔다.
나는 이번에 국민의 힘 보좌진 설명회에 참석하게 됐다. 사무실을 잠시 벗어나 서울 구경을 한다는 감상도 잠시, 국회의사당으로 가는 마음은 무겁다. 제발 그곳에 도착하지 않기를!
국회의사당 앞 한강의 풍경도 잔디밭의 정경도 모두 평화롭고 아름답지만, 내 마음은 널을 뛰고 있었다. ‘과연 어떤 질문을 하려나? 제발 내가 답변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다 설명회 장소로 이동하는 발걸음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무겁다.
회의실에 들어가니 스무 명 남짓한 보좌관들이 앉아있었다. 연세가 지긋한 베테랑 보좌관, 일한 지 몇 년 되지 않은 것 같은 초보 보좌관들이 두루두루 섞여있다. 상임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국회의원실의 보좌관이 회의의 첫 말을 뗐다. 그리고 우리는 준비한 자료 순서에 따라 결산내역 브리핑을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듯, 당초 목적에 맞게 예산을 사용했는지가 결산 검토의 핵심이다.
한여름에 넥타이와 정장 재킷까지 갖춰 입은 A보좌관의 얼굴에는 윤기가 좔좔 흐르고 있었다. 용기, 패기, 그리고 왠지 모를 똘끼까지 엿보이는 그는 매우 젠틀해 보인다. 하지만 말은 안 해도 ‘내가 제일 잘 나가! 세상에서 내가 제일 똑똑해!’라는 걸 온몸으로 뿜어내고 있어 왠지 불편하다. 그는 지금 인사청문회에 참석한 국회의원 역할에 빙의한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A보좌관, 그는 틀림없이 서울대를 나왔을 거다!
“이런 거 있으면 여당 통해 제대로 지적받고 미리 수위 조정하세요!”
“저는요, 계획단계에서 예산항목 중복 여부 검토 안 한 거 이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일 다시 일어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부처 담당자랑 협의한 내역 제출하세요!”
K부서에서 어떤 지역에 코로나19 대응을 위해 지원한 사업이 있었다. 원래는 D예산 항목에서만 써야 하지만, 목적이 다르다는 이유로 E항목에서도 지원이 됐다. 사실 A보좌관의 말이 맞다. D항목에서도, E항목에서도 모두 코로나19 지원한 건 예산항목 중복 사용이다. 예산항목별로 고유한 목적에 따라 써야 하니까.
듣자 하니 K부서에서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상위 부처의 지시라고 했다. 1차 지원 완료 후, 부처에서 해당 지역과 추가 협의한 사항을 뒤늦게 알려온 것이다. 그래서 D항목에서 지원한 실적이 있지만 E항목에서도 그 사업이 추가 지원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 업무를 지시한 부처 담당자가 나와 설명해 주면 좋으련만, 부처 담당자는 온데간데없고 애꿎은 C대리님이 고생이다.
옆 부서 담당자가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보니 다음 순서인 나까지 긴장된다. 나에게 질문을 하면 안 될 텐데… 하는 사이 내 순서가 됐다. 나는 작년 국정감사(줄여서 '국감')에서 지적된 건의 조치결과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 난 작년에 이 부서에 있지도 않았지만 어쩌겠는가, 볼드모트 같은 그 일을 '지금' 맡고 있는 내가 설명할 수밖에.
“먼저 좋은 지적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작년에서 OOO의원실에서 지적해 주신 사항을 반영해 제도 개선 중입니다. 앞으로도 동일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E제도를 잘 운영하겠습니다.”
이 질의를 보냈던 의원실 보좌관이 묻는다.
“이거 지난 국감에서 지적한 건데 아직까지 검토 중이면 안 되지 않나요?”
그럴 줄 알았다. 아무도 맡고 싶지 않아 하는 바람에 이 부서 저 부서에서 핑퐁 하느라 1년 넘게 교착상태였던 그 업무. 최종 점검할 사항이 외부엔 비밀로 유지해야 하는 사항인지라, 외부에는 ‘완료’가 되었다고 공표할 수 없었을 뿐, 실은 부서 발령 5개월 만에 그 이슈를 해결한 나였다.
‘이럴 줄 알고, 내가 미리 다 준비해 왔지!'
나는 조목조목 무엇을, 어떻게 개선하느라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지 소상히 설명했다. 의원실에서 질의했던 내역도 모두 반영하고 더 좋은 방향으로 제도를 만들기 위해 기울인 노력에 대해서도 덧붙였다. 내부 TF(Task force)를 운영하고, 직원 전체를 대상으로 의견 수렴하는 등 눈에 확 드러나지는 않지만 시간이 걸리고 꼭 필요했던 그 과정들을 말이다.
“개선된 내역에 대해 상세하게 파악하실 수 있도록 자료 제출하겠습니다.”
나는 선제적으로 검토자료 일체를 보좌관실에 제출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당신들 말이 다 맞고요, 앞으로 잘하겠습니다아-’ 하고 나니, 지적할 거리를 찾느라 한껏 가까워졌던 보좌관의 미간이 조금 펴진 것이 보인다. 회사 전체를 들쑤셨던 이 문제, 추가 질의 없이 이 정도 선에서 방어했으니 성공이다! 마침 옆에 앉은 동료가 책상 아래 고이 숨겨져 있던 엄지손가락을 힘껏 들어 올려 나에게 보여줬다.
하지만 설명회가 끝난 후, 그 보좌관은 굳이 나와 팀장님의 휴대폰 번호까지 받아갔다. ‘설마 주말에 연락하는 건 아니겠지?’하는 걱정스러운 마음은 대관업무 5년 차 프로답게 평온한 두 입꼬리에 고이 감추었다. 어쨌든 설명회는 끝났고, 이제 당분간 국회에 갈 일은 없을 거다.
회초리 같은 눈초리를 견디며 보좌관들 앞에서 기관을 대표해 브리핑을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업무 전체를 아우르는 축적된 경험, 핵심만 논리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능력, 그리고 어느 정도 자료를 내어주고 우리 기관의 입장을 옹호할 것인지 결정하는 정무적 감각도 있어야 한다. 그러니 기관 대응의 최전선에서 우리 조직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나의 자세, 그리고 납세자에 대한 책무성을 지키려는 나의 윤리의식에 셀프 칭찬해 줘야겠다고 마음먹어 본다.
그래, 난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다.
‘나니까’ 이 정도로 깔끔하게 방어하고 끝낼 수 있었다.
그러니 자부심을 가지자!
회사를 대표해 시험 보느라 고생했으니, 오늘은 두 다리 쭉 뻗고 자야겠다.
내일도 나랏돈 쓰러 가야 하니까.
대문사진 출처 : 이미지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