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을 위해 일하고 있었는데 대관업무에 시간을 뺏기다니!
메일을 보자마자 양발에 모래주머니를 찬 느낌이었다. 또 [긴급] 앞머리를 달고 온 국회 발(發) 자료 요청다. 그놈의 요청 자료 작성 업무는 왜 가뜩이나 바쁠 때 몰려오는지 원. 이들 앞에 나는 항상 약자다. 그 이유는 단 하나, ‘내 일’을 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오늘까지 마무리해야 할 아주 중요한 결재가 있지만, 끝낼 수 없을 것 같다. 대관업무를 먼저 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관업무'란 관(官), 즉 정부의 행정, 입법, 사법기관을 상대하는 업무를 말한다. 공공기관의 대관업무 이해관계자는 정부부처, 국회, 감사원 등이 있다. 공공기관이 소속된 중앙 정부부처도, 공공기관의 예산을 주무르는 기획재정부도, 모두 중요한 대관업무 이해관계지만 그중 최고봉은 국회다. 국회는 행정 부처들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곳이다. 정부 예산을 최종 검토하고 승인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니 내로라하는 정부 기관들이 국회 앞에서 벌벌 떨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국회가 요청하는 자료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1순위가 된다.
7월과 8월은 국회의 예산 결산 시즌이다. 예산 결산이란 지난 한 해 동안 정부로부터 받은 예산을 계획한 대로 잘 집행했는지, 국회에 보고하고 승인을 받는 것을 말한다. 쉽게 말해 국회가 정부 기관의 돈 씀씀이를 잘 살펴보고 문제가 없었는지, 있었다면 뭐가 문제인지를 살펴보고 ‘지난해 예산 집행은 이제 완전히 종료야!’라고 도장을 꽝! 찍어주는 일이다.
국회가 주로 검토하는 건 이거다.
첫째, 작년에 받아간 돈을 다 썼나? 못 썼다면 왜 인가?
둘째, 계획한 항목에서 돈을 썼는가? 다른 항목에서 썼다면 이유가 무엇인가?
셋째, 작년에 계획한 예산을 올해까지 이어서 집행해야 한다면 그 이유가 뭔가? 그 이유가 타당한가?
이러니 가장 좋은 건 쓰겠다고 받아간 돈을 계획된 항목과 목적에 따라 ‘다 쓰는 것’이다.
국회가 작년 결산내역을 검토했는데 문제가 있다면 내년도 예산을 과감히 깎는 결정을 할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정부 기관은 결산 업무를 잘해야 한다. 자, 그럼 공공기관의 예산 결산 업무는 어떻게 진행될까?
먼저 공공기관은 소속된 정부 부처에 전년도 예산 결산내역을 보고한다. 공공기관의 결산 실적을 검토한 중앙 정부부처는 이것을 모아 나라 살림을 책임지는 기획재정부로 보낸다. 기획재정부가 모든 정부부처와 공공기관의 전년도 예산 결산 결과를 국회로 보내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국회 상임위원회와 예산정책처가 예산결산 검토를 시작한다.
국회 상임위원회란?
한국산업단지공단이라는 공공기관은 산업통상자원부소속이다. 이렇게 정부부처마다 관할하는 공공기관이 따로 있으며 국회도 마찬가지다. 국토위원회, 국방위원회, 교육위원회 등 각 분야별로 담당하는 분야와 정부부처가 달라지며, 이것을 ‘국회 상임 위원회(줄여서 상임위)’라고 부른다.
국회 예산정책처란?
국회 예산정책처(줄여서 ‘예정처’)는 정부 예산업무를 총괄하는 국회의장 바로 아래 있는 기관이다. 정부기관 결산을 최종 승인하는 기관으로, 핵심 업무는 국회 상임위원회의 결산 심의 기초자료로 쓰이는 분석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다.
예산 결산 시즌이 되면, 국회에서 질문이 쏟아진다. 결산 검토 초반부터 이슈가 있다고 인식되면, 앞으로의 모든 검토 과정에서 온갖 문의사항에 대응하느라 조금 피곤해질 수 있다. 그러니 답변서를 정확하고 빠르게 작성하는 게 중요하다. 이렇게 국회가 보내온 질문에 대한 답변을 작성하는 것을 ‘결산국회 대응자료 작성 단계’라 부른다.
국회에서는 이것을 보고 추가로 궁금한 사항에 대해 묻기 위해 정부 기관을 소집한다. 국회 예정처 담당자가 직접 업무 담당자를 부르기도 하지만, 더 무시무시한 건 국회 여당과 야당 국회의원실이 정부기관 담당자를 한 자리로 모으는 ‘결산국회 대비 여야당 보좌관 설명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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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의응답을 통해 국회가 결산 내역을 충분히 검토했다고 생각하면 비로소 국회 예산결산위원회(줄여서 '예결위')에 ‘전년도 예산결산 결과’를 심의 안건으로 상정한다. 예결위에서 여전히 쟁점으로 삼는 건 기관의 조치를 요구하는 ‘국회 지적사항’이 된다. 그리고 이건 예정처가 펴내는 ‘전년도 예산결산 보고서’에도 포함돼 전 국민에게 공개된다. 일 했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 뭐라도 지적하려는 국회와 이를 필사적으로 막으려는 공공기관의 싸움이 ‘한글 2020 프로그램’ 안에서 벌어진다.
‘잘못했으니 언제까지 뭘 해라’는 시정조치 요구사항이 보고서에 박히면 기관 입장에서는 꽤 피곤해지기 때문이다. 어떻게 문제를 개선할 것인지 계획을 내고, 또 그 계획대로 잘 이행하고 있는지 정기적으로 점검도 받아야 한다. 그러니 공공기관 입장에서는 무조건 지적사항을 최소화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국회 예정처의 전년도 예산결산보고서 초안이 나온다. 그러면 공공기관이 보고서 내용의 사실관계를 확인하며 마지막 변론을 한다. 이 과정이 끝나면 공공기관이 할 일은 조용히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다. 최종 보고서에 반영된 지적사항이 전보다 줄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러는 사이 국회 예결위도 전년도 결산결과에 대한 심의를 마치고 안건을 통과시킨다. 지적 사항으로 분류된 건이 있을 경우, 이에 대한 조치계획을 제출한 후에야 예산결산 업무가 종료된다.
결산 업무가 어려운 이유는 언제, 어떤 업무에 대해 자료 요청이 들어올지 알 수 없다는 거다. 그래서 국회 요청자료가 들어오는 날이면 온 신경이 곤두선다. 게다가 공공기관에 요청된 자료는 주무부처의 검토를 거쳐 제출해야 한다. 그래서 국회에서 똑같이 일주일의 기간을 줘도 자료를 작성할 시간이 더 적다.
게다가 한 번에 요청을 받으면 좋으련만! 이 의원실, 저 의원실은 꼭 같은 질문인데 양식을 달리하는 자료를 요구한다. 비슷하지만 살짝 다른 질의를 할 때도 있다. 이러면 내 시간은 두 배나 든다. 근데 이 일들은 시간만 잡아먹고 티도 안 난다.
그렇게 내 역량 개발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만 같은 5년 치 계약 목록, 사업비 집행률 부진 사유와 하반기 예산집행 계획을 작성하는 일을 몇 번이나 한다. 이 잡다한 업무를 하느라 내가 진짜 할 일은 항상 뒤로 밀린다. 이러니 대관업무 시즌에 ‘내 일’을 할 수 없는 거다.
공공기관이 소속된 정부 부처에서 국회와 제대로 소통을 못하면 일이 늘어나기도 한다. 자료를 두 번 작성하는 일도 있고, 반나절 만에 제출을 요구받기도 한다. 대관업무 총괄 부서 담당자에게 ‘이런 것 좀 상위 부처와 가르마를 잘 좀 타달라!’라고 요청해도 소용없다. 어떻게 감히 소속 공공기관이 상사와도 같은 주무부처에게 ‘일 좀 제대로 하세요!’란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결산업무를 할 때마다 반복되는 이 엄청난 비효율을 견디는 것은 온전히 정부부처 산하 공공기관 직원의 몫이다.
하루에도 몇 개씩 이런 요청을 쳐내다 보니 ‘요즘 왜 이런 업무만 하고 있어야 하나, 앞으로 얼마나 더 해야 하려나’ 싶다. 이런 일 말고 ‘진짜 내 일, 나의 성장을 위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다. ‘보고를 위한 보고’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고 생각하던 와중, 회사 동기가 말했다.
무지성으로 해.
그렇다. 모든 일에서 의미를 찾을 필요는 없지.
그리고 업의 본질을 생각해 보니 이 또한 내 본업이다.
국민의 세금으로 모인 예산을 쓰는 공공기관 직원이라면, 예산 결산은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업무니까.
내가 작성한 자료를 보고 추가 질의가 들어오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조직을 방어하는 내 임무는 완료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매미가 우는 예산결산의 계절, 이렇게 나는 마음을 다잡아 본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은 너무 깊이 생각 말고 무지성으로 빨리 해치우자고,
그다음 얼른 ‘진짜 내 일’을 하러 가자고.
나는 나랏돈 쓰는 사람이니까.
대문사진 : 국회 예산결산위원회 전체회의 사진(출처 :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