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이토록 악한가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3)

'악'을 처벌한다는 것, 그리고 내 안의 '악(evil) '들

by 김E

본문 (4) : 재판

복종은 의무였고 다른 사람이어도
결과는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이제 정의의 법정으로 가봅시다. 아이히만은 아르헨티나로 도망쳐 가족과 생활하다 납치 당해 재판에 서게 됐어요. 여기부터 살펴보죠. 예루살렘이 아이히만을 납치할 권한이 있는지 그리고 재판을 할 권한이 있는지. 둘 모두 쉽게 넘어가기 어려운 법적인 문제입니다. 소송법에서 다루는 관할 문제거든요. 재판부는 이 논리를 피해 갑니다. 재판부가 아이히만을 법정에 세운 논리는 독일인이 유태인을 학살한 것과 같습니다. 유태인이 무국적자라 학살당했듯이 아이히만도 무국적자라 이스라엘의 법정에서 처벌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아이히만은 제3제국이라는 독특하고 괴상한 국가의 공직을 맡으면서 흔하게 미덕인 복종을 했을 뿐이고 그 자신의 양심은 그것과는 무관한 문제라고 주장합니다. 주어진 일을 착실하게 해 나갔을 뿐이고 죄가 있다면 복종을 피할 방법을 찾지 못한 것인데 복종하지 않았다면 자신 또한 죽은 목숨이었다는 것이죠. 우린 이런 장면을 너무 많이 봐요. 국가가 저지른 참극의 주체들이자 의사결정권자들이 시켜서 한 일일 뿐이고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몰랐다고 떠드는 장면과 사람들 말이죠.


재판부는 이 독특하고도 한심한 주장에 추상같은 판결을 내립니다. 법리는 늘 주장한 사실에 뒷받침되는 반례 사실을 찾아내는 형식논리학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아이히만의 핵심 주장인 복종의무라고 하는 것과 무관한 자발성을 찾아내면 이 법리는 기소한 검사의 승리로 끝날 것입니다. 항소재판부는 항소의 주요 논점 중 하나인 복종의 반례를 발견해 상관의 명령 없이 자발적으로 범죄 행위를 결정한 이유를 발견했다고 주장합니다. 아이히만이 가장 중요한 결정을 한 인물 스스로였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이 아니어도 똑같았을 거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똑같이 아이히만과 그 공모자들이 아니었으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라고 선언합니다.


한나 아렌트는 재판부와 생각이 다릅니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그저 그런 게으르고 흔해빠진 인물이고 불성실하고 일상에 천착하는 인물이라는 면모를 부각했습니다. 또한 악에 저항하는 일이 생각보다 대단히 어렵고 무시무시한 일이 아닐 수 있었음에도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에 무책임한 결과라고 밝혀오기도 했고요. 요컨대 재판부가 인용한 "억누를 수 없는 피의 갈증과 광신적 열정" 따위가 아니라 그저 익숙하고 편안한 방식을 지속시킨 이유, 누구도 거절하지 않아서 계속된 흔해빠진 일상이 악의 얼굴이었다는 거죠. 이 책의 유명한 마지막 문단을 옮겨 봅니다.


결국 교수형을 받게 된 아이히만은 적포도주 한 병을 마시고 두건을 머리에 쓰지도 않은 채 우스꽝스러운 말을 읊으며 그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다시 한번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신을 믿는 자라고 분명히 진술하면서 자기는 기독교인이 아니며 죽음 이후의 삶을 믿지 않는 점을 일반적인 나치스 식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그는 "잠시 후면, 우리는 모두 다시 만날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운명입니다. 독일 만세, 아르헨티나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 나는 이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죽음을 앞두고 그는 장례 연설에서 사용되는 상투어를 생각해 냈다. 교수대에서 그의 기억은 그에게 마지막 속임수를 부렸던 것이다. 그의 '정신은 의기양양하게 되었고', 그는 이것이 자신의 장례식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사악함 속에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같은 책, p. 349)

감상 (1) : 우리가 만나는 악의 얼굴들

책임을 회피하는 관료제와 결재체제
여전히 뻔뻔한 어떤 사람들

한나 아렌트가 보여주고 있는 악이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악과는 다릅니다. 이 악은 화려하고 현란하기보다는 게으르고 흔해 빠졌죠. 자신이 속한 조직과 집단이 보내는 공포의 신호에 잠식 당해 자신을 드러내 보이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악의 일부가 돼 악이 계속해서 적 동하도록 만드는 종류의 악입니다. 적당한 경쟁주의, 출세 지향,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언어를 상실한 형식주의들이 그 악을 실체적인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말할 때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그 악의 본질로 다루는데 나는 해석이 좀 달라요.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자들이란 아무것도 맡지 않은 자들일뿐입니다. 오히려 이들은 무엇인가 해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악에 봉사할 수 있었습니다. 무언가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안을 바로잡고 붕괴시키는 대신 실패할 때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이유 그리고 그 자신이 이 행위에 찬동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이들은 악을 구체화시키고 고도화시키는 쪽을 택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결과가 바로 악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악의 평범성을 실천적으로 체험한 건 518과 이후 지속되 온 군사 정권의 각종 조작 사건들일 것입니다. 체제유지라는 목적을 위해 스스로 악이 되기를 서슴지 않는 사람들. 군인들은 민간인을 학살하고 경찰들은 학생들을 고문해서 있지도 않은 일들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상처 입은 사람들은 상처 입었다는 이유로 숨어버렸지만 범죄를 저지른 악당들은 오히려 고개를 빳빳이 들고 세상을 활보하며 그 자신이 이 세상에 거대한 기여를 했다는 둥 헛소리를 늘어놓았죠.


내가 일상에서 겪은 일들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아렌트가 말한 인류사적 범죄와는 다르겠지만 일상에서도 평범한 악들은 도저처에서 목격됩니다. 관료제는 책임 문제를 결재체계 속에 숨겨놓고 이 제도는 언제든 악을 구체화하고 정당화할 수 있는 도구가 됩니다. 힘없는 자들의 침묵과 묵인 속에 힘 있는 이들은 조직의 발전과 미래를 위한다는 둥 온갖 이유를 대면서 불법을 정당화하고 비위를 지속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나름대로의 최선이 악을 키워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을까요?


감상 (2) : 악과 처벌

범죄자의 처벌과 방치되는 일상의 악들,

그 넘을 수 없는 간극

한나 아렌트는 진정한 의미의 악은 단죄될 수 없다고 썼습니다. 근대적 법률 체계에서 그들의 행위를 범죄로 단정할 수 있는 방식은 무엇인가? 유태인 스스로도 학살 행위에 동참했고 어쩌면 가장 강력하게 반발하며 스스로의 생존을 주장했더라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을 방치한 자들의 책임은 어디에 있나? 한두 명을 교수대에 세우고 죽임의 책임을 지우면 사라진 생명들, 피와 뼈, 육신을 가진 한 인생의 삶들이 회복될 수 있는가? 더불어 그와 같은 종류의 행위들이 정말로 반복돼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들과 함께요.


다시 518 군사정변은 얘길 해보죠. 그중 몇은 여전히 살아있고 떵떵거리면서 이 사회에 중요한 인물들로 대접받고 있습니다. 독일이 패망한 것처럼 이들 역시 패망하지 않았더라면 민주정이 서고 역사를 살피는 작업들이 이뤄지지 않았더라면 이들은 심지어 형법상으로 처벌받지도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이미 범죄로 선언된 이들의 역사를 반복해 다시 세우려는 자들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악의 단절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새삼 깨닫게 됩니다. 형사법적 처벌이 악을 단죄한 것인가, 그것이 정말 악을 매듭짓는 행위인가. 여전히 질문하게 됩니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악들은 징벌되지 못해요. 덩치가 큰 조직에는 늘 악당이 등장합니다. 부정하게 공금을 쓰고 회사의 생산성을 떨어뜨리고 직원들 간의 관계를 이간질하는 사람들 말이죠. 이들을 제거하자면 구체적인 노력과 실천이 반복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기까지 이르지 못하고 일상의 관성 안에 녹아들어요. 악은 계속 살아남고 단죄되지 못한 채 악인 채로 집단과 조직 심지어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그대로 두면 조직은 계속 무너져갈 겁니다. 이런 악들은 어떻게 단죄할 수 있을까요?


국가가 권력행사를 독점하는 근대 법제도는 사적구제를 금합니다. 만일 누군가가 용감하게 히틀러를 저격해서 죽였다면 이 행위는 살인이나 테러행위일까요 아니면 역사를 구한 구국의 행위일까요? 기분상은 구국의 영웅으로 보이지만 아마도 쿠데타를 일으켜 정치세력이 변경된다면 모를까, 현대 형법은 이 행위를 살인의 죄로 의율 할 겁니다. 명백한 의도와 계획이 있으니 형은 가중될 가능성이 높고요. 내가 말한 직장의 악, 징벌되지 못한 그 악을 내 자력으로 처벌했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다수 직원들은 좋아하겠지만 형사고발의 대상의 되거나 징계대상자가 될 겁니다. 악은 무엇이고 이들은 도대체 어떻게 끊어낼 수 있을까요?


나오면서

악을 막는 방법,

일상 공간에서의 부단한 성찰과 부단한 저항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일상들을 다시 돌아보게 만들었다는 면에서 이 책의 독서는 의미 있습니다. 나는 '악은 저지되지 못한 선'이라는 법언에 동의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이히만이 말했듯 그것이 잘못되었고 틀렸다는 이야기를, 거부나 저항을 받아보지 못해 행위들을 반복합니다. 그리고 한 편에선 우리 안에 있는 악을 들여다보게도 합니다. 내가 그 평범한 악의 기여자가 아닌지 살피게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벌어지는 일들을 매 순간 매때 섬세하고 진지하게 무엇보다 구체적으로 살펴야 합니다. 언어화되지 않은 생각은 대체로 아무런 쓸모가 없고 그것들은 곧잘 힘과 권력, 악에 포집되는 특성이 있습니다. 언어는 올바름과 그렇지 않음을 구분하게 합니다. 악이 되지 않는 길은 부단한 성찰과 부단한 저항뿐인 것입니다.



* 다음은 근대 경제학의 아버지이자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의 아담 스미스가 아직 경제학자가 아니라 도덕철학자 시절에 썼던 도덕감정론을 살펴봅니다.

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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