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덤 스미스, 보이지 않는 손이 등장하기까지
이번에 읽어볼 책은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으로 잘 알려진 애덤 스미스를 경제학자가 아니라 도덕학자(Moralist)로 분류하게 했던 책, 도덕감정론입니다. "근대 경제학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는 애덤 스미스가 사실은 철학자였다." 그런 얘길 사회 아니면 윤리 선생님이 했던 기억이 납니다. 가볍게 읽었던 기사에서도 종종 그런 내용을 접했습니다. 근대 자유주의 경제학의 아버지인 애덤 스미스가 사실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감정을 분석하던 철학자였다는 놀라운 옛날 얘기류의 기사들요.
애덤 스미스가 살던 시대는 혼란과 분열의 시기이자 전쟁과 갈등의 시기였습니다. 역사 공부를 하다 보면 특별한 사건이나 인물이 없으면 사각지대가 생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근대 유럽이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사실 18세기 유럽은 어느 때보다 치열한 전쟁기였습니다. 종교전쟁을 매듭짓는 베스트팔렌 조약은 거꾸로 전 유럽을 거대한 전쟁터로 만들었죠. 거기다 애덤 스미스의 생애 중반에는 역사상 첫 총력전으로 불리는 7년 전쟁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많은 철학자들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마주 헤야 했습니다. 이 무렵에 그런 질문에 답했던 사람들을 흔히 모럴리스트라고 부릅니다. 애덤 스미스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고 이 책도 그와 같은 맥락 속에 있습니다. 분업화와 자유주의 시장 경제의 시발점이 된 이론을 만든 애덤 스미스가 사실은 도덕과 정의,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한 사람이었던 겁니다.
도덕감정론에 대한 가장 흔한 설명은 인간 내부에 있는 '동감(sympathy)'이라고 하는 감각이 인간의 행동을 제어한다는 겁니다. 그런 동감의 존재로 인간은 타인에게 악행을 저지르거나 어떤 보상이나 처벌이 적절한지를 판단할 수 있죠. 그런데 이 개념은 책 초반에 중요한 여러 개념 중 하나로 다뤄지기는 하지만 절대적인 건 아녜요. 동감은 말하자면 인간이 어떤 도덕적 판단을 하고 행위를 하는 동기이긴 하지만 절대적인 무엇은 아닙니다. 이 개념이 애덤 스미스의 윤리학 전부를 설명해 주는 것도 아닐뿐더러 애덤 스미스의 이론을 오해하게 만드는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단어가 주는 뉘앙스 때문에요. 애덤 스미스가 동감에 관해 뭐라고 말하는지 보죠.
타인의 슬픔에 대한 우리의 동류의식을 나타내고자 할 때 쓰는 말이 연민(pity)과 동정(compassion)이다. 아마도 본래 의미는 동일한 것이었겠지만, 이제 여기서 모든 종류의, 격정에 대한 우리의 동류의식을 나타내는 용어로 동감(同感 : sympathy)이란 말을 사용하더라도 그다지 부적절하지는 않을 것이다.(애덤 스미스. 도덕감정론, 박세일·민경국 공역, 비봉출판사, 개역 초판 3쇄(2012.9.17.) p. 7.)
그러므로 동감(同感)은 모종의 격정을 목격함으로써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격정을 야기한 상황을 목격함으로써 발생한다(같은 책, p. 9.)
동감은 우리가 타인을 마주할 때 발생하는 어떤 감정입니다. 그 감정은 해당 감정에 참여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어떤 기준에 의해서 확정됩니다. 말하자면 동감이란 내부의 도덕적 판단체계를 지나서 세상으로 드러나는 결과물인 거죠.
이 지점에서 살펴봐야 할 것이 바로 '적정성(propriety)'이라는 개념입니다. 적정성은 그것이 도덕적으로 옳은지 옳지 않은 지를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예를 들면 고문을 받고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는 어떤 사람이 끝까지 저항하며 단호한 표정을 짓는다면 그는 존경의 대상이 됩니다. 반면에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하층계급의 사람이 사람들 앞에 단호하고 위풍당당한 표정을 짓는다면 이는 경멸의 대상이 됩니다. 앞 선 사례에서 두 사람은 모두 당당함을 행사했습니다. 그런데 누구의 어떤 행동은 존경의 대상이 되고 다른 사람의 다른 행동은 경멸의 대상이 됩니다. 이유는 무엇일까요? 간단합니다. 이 둘 행위가 적정성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적정함이란 무엇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애덤 스미스의 독자적인 개념을 만나게 됩니다. 윤리나 사회 교과서 시간에 배우는 직관적인 느낌이나 동감이라는 단어가 주는 인상이 아니라 철학적 이론의 측면에서의 개념입니다. 적정성이란 자신 안에 있는 마음의 판결관 그리고 나를 밖에 놓는 마음 - 제삼자인 방관자, 그리고 절대자인 주님의 관점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관점이 특정 행위의 적정성을 판결하게 해주는 재판관들입니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보다 크게 느끼지는 못합니다. 타인의 고통이 그러리라 짐작만 해볼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종종 타인이 표현하는 감정이나 태도들에 반응합니다.
한 사람의 각종 감각기관의 기능, 즉 관능(官能 : Faculty)은 그가 다른 사람의 유사한 관능을 판단할 때의 척도가 된다. 나는 나의 시각으로써 당신의 시각을 판단하고, 나의 청각으로써 당신의 청각을 판단하며, 나의 이성으로써 당신의 이성을 판단하고, 나의 분개로써 당신의 분개를 판단하며, 나의 애정으로써 당신의 애정을 판단한다. 그것들을 판단할 이외의 다른 어떤 방법도 나에게는 없으며 또 가질 수도 없다. (같은 책, p. 24.)
바로 이 지점입니다. 이 지점에서 내가 아닌 바깥 세계, 상대에게 가져야 할 감정들, 어떤 것들이 도덕적인 감정인가 평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로 적정성의 판관들입니다. 이 판관들은 너와 나의 관계, 나와 공동체에서의 관계에, 그리고 더 멀게는 우주와 개인의 관계에서 어느 행동과 감정이 적정한 것인가를 알려줍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감정이나 태도에 지나치게 매몰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애덤 스미스의 기준에 따르면 판관들이 알려주는 것을 실천하지 못해 적정성을 훼손하고 있기 때문에 악덕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처럼 자신과 외부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들을 통해 적정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적정성은 우리 행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시인하거나 또는 부인할 때 사용하는 원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행위에 대해 판단할 때 사용하는 원리와 전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한 개인의 행위를 시인하거나 부인하거나 하는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문제를 우리 자신의 문제로 생각하는 경우, 그 행위를 일으킨 감정과 동기에 우리가 전적으로 동감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같은 책, p. 209.)
아직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어떤 점들이 보이지 않는 손과 자유시장 경제와 연결되는 논리들일까요? 미덕이 작동되고, 인간이 어떠해야 한다는 애덤 스미스의 세계관을 마주하면 어렴풋이 보이지 않는 손의 세계가 눈 앞에 드러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