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이토록 악한가(2) : 『도덕감정론』(2)

도덕의 일반 원칙 그리고 미덕

by 김E

인간은 내 안의 판관들에 의해서 무엇이 동감을 일으킬 만한 적정한 행위인지를 알게 됩니다. 이것을 일종의 상태라고 합시다. 그러니까, 어떤 방향이나 의지가 없이 인간이 생래적으로 갖고 있는 특성 같은 거죠. 존재와 당위의 문제는 철학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입니다. 존재란 말 그대로 존재하는 상태에 관한 질문이고 당위란 그 존재가 무엇을 하는 것이 올바른가를 묻는 것입니다. 정치철학이나 도덕철학이라고 하는 것들의 뿌리가 이 당위(ought to)의 문제에 관한 것들입니다. 어떤 집단과 공동체가 올바른가를 묻는 것이 정치철학이고 더 본질적으로 인간에게 올바른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도덕철학입니다.


애덤 스미스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적정성의 개념은 아직 당위로 향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구태여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더라도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 내면에서 자기 자신과, 인간들의 관계와 심지어 우주와의 관계에서 무엇이 적정한가를 판가름할 수 있는 도덕적 기준을 갖고 있습니다. 존재론이랄까요. 이제 우리는 애덤 스미스에게 또 다른 것을 배울 차례입니다. 인간이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도덕철학적 물음에 대한 답입니다.


본문 (2) : 도덕감정이란 무엇인가

도덕의 일반 원칙 그리고 미덕


도덕의 준칙 : 비난받거나 칭찬받는 길, 처벌받거나 보상받는 길

애덤 스미스는 앞서 보여준 3갈래의 기준을 근거로 무엇이 도덕의 일반적 기준인지를 설명합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무엇이 처벌받아 마땅한 것인지를 알아 그것을 회피하는 것과 무엇이 시인(혹은 용인) 받아도 되는 것인지를 알게 하는 것이죠. 이런 논리는 사실 순환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일반원칙은 우리에게 무엇이 비난받아야 할 만한 것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 알게 하는데, 그것을 알게 하는 것은 바로 나를 둘러싼 적정성의 감각들, 3개 차원의 재판관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가증스럽고 경멸받아 마땅하고 또는 처벌받아 마땅한, 즉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고 혐오하는 모든 감정의 대상으로 만드는, 그런 모든 행위는 마땅히 회피되어야 한다는 일반준칙을 우리 자신에게 세운다. 반대로 다른 행위들은 우리의 시인을 받으며,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들도 그 행위들에 대하여 같은 호의적인 감정을 표시하는 것을 듣는다. 모든 사람들은 그 행위들을 존경하고 보답하려고 애를 쓴다. 그 행위들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가장 강하게 갈망하는 모든 감정들, 즉 사항, 감사,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 싶어 하는 등의 감정들을 자극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행위를 하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리하여 이러한 식의 행동을 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신중하게 추구해야 한다는 또 다른 종류의 규칙을 스스로 세우게 된다.(같은 책, p. 294.)
이 일반준칙이 세워지는 궁극적인 기초는 우리의 도덕적 관능에 관한 경험, 즉 특수한 경우에 우리의 자연적인 공로의 적적성에 대한 감각이 시인하거나 부인하거나 하는 것의 경험이다.(중략) 일반준칙은, 이와는 반대로, 어떤 종류의 모든 행동들은, 또는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 모든 행동들은, 시인되거나 부인되거나 한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발견함으로써 형성되는 것이다. (같은 책, p. 295.)
그러므로 우리가 더욱 고려해야 할 것은 준칙의 목적과 그 기초이지 준칙 자체가 아니다.(같은 책, p. 327.)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일반준칙이 확립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방관자가 동감하는 경향이 매우 크고, 그런 이유로 적정의 임계점이 높다고 말할 수 있는 걱정들은. 그것에 대한 직접적인 느낌이나 감각이 당사자를 다소 유쾌하게 하는 격정이다. 이와는 반대로, 방관자가 동감하는 경향이 매우 작고, 따라서 적정의 임계점이 낮게 위치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격정들은, 그것에 대한 직접적인 느낌이나 감각이 당자사를 다소 불쾌하게 혹은 고통스럽게 하는 격정이다. (같은 책, p. 461)


오늘날 우리 헌법체계를 비롯해 현존하는 근대국가의 법률 체계는 대부분 칸트의 정언명령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칸트는 말합니다.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 칸트는 애덤 스미스로부터 100년 후의 사람이고 칸트가 등장하기까지 아직 일반의지와 특수의지를 말해줄 루소를 비롯한 더 많은 선배 철학자들이 등장해야 합니다. 사실 애덤 스미스의 도덕철학은 칸트 보다는 그보다 훨씬 오래전에 살았던 아리스토텔레스류와 훨씬 가깝습니다. 현실과 행위를 근거로 행위의 올바름을 발견하는 방식이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덤 스미스가 근대적 철학자들과 유사한 면은 칸트처럼 일반한 원칙을 발견하려 들었다는 점입니다.


조금 더 쉽게 설명해 보죠.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고전시대의 사람들은, 우리가 익히 아는 동양의 공자나 맹자처럼 상황을 근거로 옳고 그름을 판단합니다. 같은 행동이 어떨 땐 의롭지만 다를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같은 행동이 어떨 때는 예가 되지만 다를 땐 그렇지 않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의 고대 그리스에서 최고의 미덕 중에 하나는 용기였습니다. 똑같은 행동이 어떨 땐 용기가 되고 다를 땐 만용이 되고 어쩔 땐 비겁이 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항복이라는 행위를 생각해 봅시다. 적국이 침략해 왔습니다. 많은 경우 적극 항전을 택하는 행동은 용감한 행동이라고 평가받지만 열에 아홉은 무참하게 패배할 것이고 패자들은 노예가 되거나 죽임을 당할 게 확실한데도 끝까지 싸움을 택하는 경우엔 다릅니다. 이 경우엔 항전이 만용이고 항복이 용기일 수 있습니다. 이 얘기는 이미 2400년 전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도 다룬 얘기입니다. 이렇듯 미덕들은 상황과 현실 속에서 평가받는 것이 고대 세계 도덕의 기준입니다.


반면 칸트 이후의 근대는 달라져요. 칸트의 시대를 지나면 이제 중요한 것은 명령 그 자체를 준수했는지 여부입니다. 정언명령, 내 의지의 준칙이 보편 한 입법 원리가 될 수 있느냐. 그리고 황금률, 남이 너를 그와 같이 대했다고 해도 너도 똑같이 대할 수 있느냐. 이제 윤리는 개념의 세계로 넘어옵니다. 예전엔 어떤 살인은 의롭고 다른 살인은 불의했습니다. 어떤 살인은 용감했고 다른 살인은 비겁했습니다. 이제 모든 살인은 잘못된 행동이 됩니다. 법적 판단을 받게 되고 처벌의 대상이 됩니다. 후에 다룰 일이 있겠지만 인간 개별이 가진 특수 의지들은 일반 의지 안에 포섭됩니다. 개인의 행동은 법률과 제도 안에 포섭됩니다. 개인은 정의나 불의를 판단할 수 없게 됩니다. 사적 자치가 사라지고 행정권한이 인간을 통제하게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모습이 되는 겁니다.


나 그리고 너를 위한 미덕들 : 정의, 자혜, 정의 그리고 자기 제어


그렇다면 애덤 스미스가 보기에 올바른 행위들은 혹은 그것을 위한 조건은 무엇이 있을까요? 애덤 스미스는 세 가지에 한 가지를 덧붙여 총 네 가지를 미덕으로 내세웁니다. 개인의 올바른 선택을 위해 필요한 것이 신중이고 세계(아니 우주라고 하는 게 맞을 까요?)와의 관계 속에서 올바른 행위를 하게 유도하는 것은 자혜와 정의입니다. 자혜는 타인을 행복하게 하고 정의는 타인을 불행하게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미덕들이 올바로 작동하게 하는 컨트롤타워가 있고 이 컨트롤타워는 내 안에 있는 적정성의 재판관에 의해서 작동됩니다. 그 미덕의 이름은 자기 제어입니다.


우리 자신의 행복에 대한 관심은 우리에게 신중의 미덕을 가질 것을 요구하고,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 대한 관심은 공정(정의)과 자혜의 미덕을 가질 것을 요구하는데, 이 둘 중에 전자 즉 공정은 우리가 남들을 해치는 것을 억제시키고, 후자, 즉 자혜는 우리가 남들의 행복을 증진시키도록 촉구한다. (같은 책, p. 499.)
그러나 비록 신중, 공정(정의), 자혜의 미덕들은 상이한 상황에서 두 가지 서로 다른 천성에 의해 우리에게 거의 동등하게 추천된다고 하더라도, 자기 제어의 미덕들은 대부분의 경우 주로 그리고 거의 완전히, 하나의 천성에 의해 우리에게 추천되는데, 그것은 곧 적정성의 감각, 즉 상상 속의 공정한 방관자의 감정에 대한 존중이다. (같은 책, p. 500.)


우리가 신중한 사람의 성품을 시인할 때 우리는 그가 침착과 심사란 미덕의 보호 아래서 행동하는 동안 틀림없이 누리게 되는 안전감을 특별히 만족스럽게 느낀다. 우리가 공정한 사람들의 성품을 시인할 때에, 우리는 그와 관계를 가진 모든 사람들, 즉 그의 이웃이든, 같은 사회단체든, 같은 직업이든 어느 곳에서나 그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누리는 안전감을 같은 정도로 만족스럽게 느끼는데, 그 안전감은 그가 누구를 해치거나 침범하지 않으려고 세심한 배려를 하는 것에서 나온다. 우리가 자혜로운 사람의 성품을 시인할 때, 우리는 그의 선행으로 인해 덕을 본 모든 사람들의 감사하는 마음에 공감하고 그들과 함께 그의 공로를 최고도로 인식하게 된다. (같은 책, p. 503)


본래 미덕이란 개념은 서양 세계의 전통적인 윤리론의 기초입니다. 어떤 행위를 할 때 그것이 올바른지 아닌지 판명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미덕인지 아닌지에 따라 판단할 수 있습니다. 어떤 행위가 용감하다면 그것은 도덕적인 행동이 됩니다. 반면에 어떤 행동이 미덕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예컨대 용기의 양 옆에는 만용과 비겁이 있는데 만용도 비겁도 올바른 행위가 아닙니다. 이런 미덕의 도덕은 사실상 그리스 이후 근대까지 꽤 오래도록 서양 세계의 윤리론을 지배해 온 방식입니다.


고전적 윤리는 미덕이란 무엇이고 무엇이 미덕일 수 있는지를 가르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고대 그리스의 미덕은 용기, 관후함 같은 것입니다. 관후함은 베풂이나 은혜로움 정도일 수 있습니다. 영어로 덕은 virtue라고 해석됩니다.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미덕은 arete라고 읽힙니다. 탁월함, 탁월한 상태입니다. 고대 세계에서 미덕은 본질적으로 공동체를 안전하게 유지하게 할 수 있는 최고의 기술로 다뤄집니다. 용기와 관후함은 개인적인 미덕처럼 보이지만 이 미덕들이 달성될 때 공동체의 목적에 부합합니다. 이때 공동체의 목적은 바로 행복(eudaimonia)입니다. 그리고 이때의 행복은 집단을 이뤄 의무와 책임을 다하고 있는 공동체 속의 시민을, 인간을 포함하는 개념이자 사실의 종합입니다.


우리가 윤리 교과서에서 배우듯이 로마가 예수교를 만나고, 종교인들이 스스로의 종교를 철학화 하면서 이런 미덕들을 이해는 방식이 조금씩 변합니다. 고전적 윤리는 공동체와 인간 속의 관계 만으로 충분합니다. 예수교가 들어오면 그 자리에 절대적 존재인 신이 등장합니다. 인간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명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신 밖에 없습니다. 이제 올바름을 판명하는 방식은 신에게 승인받을 수 있는지 여부가 됩니다. 선과 악, 신에게 승인받을 수 있는 선과 그럴 수 없는 악의 개념이 등장하면서 고전적 도덕에는 변경이 가해집니다. 이 행위가 다양한 미덕들의 관점에서 어떤 미덕에 해당하는지 아닌지가 아니라 신의 관점에서 선한지 아닌지만 남게 되는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애덤 스미스의 윤리는 전통적 서구 윤리와 예수교적 윤리의 결합물처럼 보입니다. 애덤 스미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고대 그리스를 비롯해 서구 세계 도덕의 전통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상황 속에서 어떤 행위의 올바름을 판정할 수 있다는 미덕의 윤리는 퍽 고전적이지만 그 판단을 하게 하는 것인 또 다른 제삼자의 존재는 절대적 존재 신을 가정 합니다. 애덤 스미스의 도덕철학은 그래서 전통적 서구 세계의 윤리의 연속 안에서 어떤 변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인간 내면에 있는 적정성의 판관들의 도움을 받아 언제든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미덕들의 컨트롤타워인 자기 제어를 통해 신중과 자혜, 정의라는 미덕을 실천해 나갈 수 있습니다.




애덤 스미스가 구성한 인간관이 슬슬 어디로 연결되는지 보입니다. 인간은 그대로 두어도 도덕적 행위를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 존재에 대한 믿음. 자유 경제과 국부론을 향한 애덤 스미스의 발걸음이 조금씩 뚜렷해지고 있습니다. 다음 편에는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로 연결되는 애덤 스미스의 책을 마저 살펴보고 간단한 감상과 비평을 덧붙여 마무리 합니다.






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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