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손의 세계
도덕철학자였던 애덤 스미스는 인간은 자기 자신 내부의 목소리와 우주와의 관계 속에서 무엇이 적정한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적정성의 판관들의 도움을 맡으면 이른바 나 자신과 그리고 나 자신 바깥 세계와의 관계에서 작동하는 미덕들을 판명하고 또 실현할 수 있게 됩니다. 나 자신의 내부와 외부 세계와의 관계들 속에서 미덕이나 올바른 감정들이 작용을 확인하는 감정적 표현을 애덤 스미스는 동감(Symphaty)라고 불렀습니다.
철학에는 본성론이라고들 하는 게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인간 본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의 결과물이죠. 한 체계를 세운 철학자들은 고민들은 두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세계를 해체하거나 혹은 구성하거나. 언어마저 해체했던 비트겐슈타인을 비롯한 20세기 철학자들이 전자의 방향이라면 미덕의 목록을 펼쳐놓고 그 내용을 살펴보던 아리스토텔레스는 후자입니다. 그리고 후자의 철학자들은 어떤 인간상을 그려요. 그 인간상으로부터 세계를 구성해야 하니까요. 논리학에서는 이걸 전제라고 부를 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당시 그리스 세계의 시민들, 현실의 존재들로부터 시작합니다. 오늘 관점에서 다분히 비과학적인 행복, 선 같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스승 플라톤이 그린 세계의 구성은 2000년간 서구 지성사를 지배했습니다. 애덤 스미스의 도덕철학 역시 내가 보기엔 어떤 세상을 그리기 전에 구성한 인간상, 세계 구성의 전제입니다.
애덤 스미스는 책 마지막에 다른 학자들의 그렸던 본성론과 비교해 본인의 주장을 정당화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정당화된 본성론, 인간에 대한 상, 논리 체계의 전제는 그 유명한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 : 나라들의 부)으로 이어지게 될 겁니다.
애덤 스미스는 인간의 야심과 이기심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건 인간이 가진 야심과 이기심이 늘 어느 적정한 순간에 멈추고 만다는 겁니다. 애덤 스미스가 보기에 인간이란 스스로가 가진 격정과 부덕을 스스로 멈추고 억제할 수 있도록 디자인된 존재입니다. 더불어 자신 말고 다른 인간들 역시 그렇게 설계 돼 있어서 상호작용을 통해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명할 수 있는 기준을 배우게 됩니다. 이미 국가는 이러한 상호작용을 통해 법을 만들고 제도를 만들어 왔습니다.
우리의 법체계란 또한 온당한 도덕적 행위의 준칙들은 이와 같은 적정성에 완전히 합하도록 우리의 감각이 인도한 것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인류 감정의 결과인 인류의 법률은 부지런하고 부단히 노력하는 반역자의 생명과 재산을 몰수하고, 절약하지도 않고 조심하지도 않지만 선량한 시민의 충성과 공익정신에 대해서는 특별한 보상을 한다. (같은 책, p 312)
보이지 않는 손이란 인간이 가진 자기 억제의 힘들의 총합입니다. 이는 비단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경제적 자율조정의 기제의 이야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 본성이 발현된 결과물로 사회가 작동되는 종합적 메커니즘인 것이죠. 이 책에 딱 한번 그 유명한 보이지 않는 손이 등장합니다. 보이지 않는 손이 하는 일이란 적정한 토지 분배를 돕습니다. 인간 스스로 갖고 있는 본성이 조화롭고 자율적인 억제를 이끌어내 궁극적으로 사회 전체의 이익을 증진시킨다는 겁니다.
(전략) 또한 그들이 수천 명의 노동자를 고용해서 추구하는 유일한 목적이 그들 자신의 허영심과 만족될 수 없는 욕망의 충족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개량의 성과를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어 가진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서 토지가 모든 주인에게 똑같이 나누어졌을 경우에 있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생활필수품의 분배를 하게 된다. 그리하여 무의식 중에 부지불각 중에, 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키고 인류 번식의 수단을 제공하게 된다. (같은 책, pp. 345~346)
애덤 스미스는 앞에 살펴본 미덕 세트를 과거의 철학자들과 비교해 봅니다. 학자들은 곧잘 자신을 역사적 존재들 옆에 세우길 좋아하니까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과 비교해 보면 신중의 관점에 미덕을 둡니다. 자기 자신과 개인의 판단과 행실의 측면에 치우쳐져 있다고 돌려서 비판하는 거죠. 우리가 윤리 교과서에서 배우는 에피쿠로스학파 사람들은 미덕을 쾌락을 위한 도구로 봅니다. 애덤 스미스는 미덕이 어떤 효용이랄지 도구적 목적으로 위한 게 아니라고 봅니다. 애덤 스미스에게 미덕은 그 자체로 중요한 그 무엇입니다.
이러한 두 부류의 격정들에 대한 제어는, 그것을 제어함으로써 얻게 되는 효용으로부터 나오는 아름다움과는 무관하게, 즉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경우에 신중, 정의, 적절한 자혜에 따라서 행동할 수 있게 한다는 효용으로부터 나오는 아름다움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서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 자체로서 일정한 정도의 존경과 찬사를 받을 만한 것 같다. (같은 책, p.452.)
애덤 스미스는 감정이 곧 인간이 가진 도덕적 본성을 드러내는 표현이라고 봤고 동감이란 적정성의 기준에 의해 도덕감정이 외화 된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동감이란 3중의 기준에 의해서 평가된 결과이기도 합니다. 미덕이란 이러한 감정의 형태, 도덕감정이 지향해야 할 목적지입니다. 완전한 도덕은 미덕에 도달함으로써 완성됩니다. 나 자신을 위한 신중, 외부 세계와의 관계를 위한 자혜와 정의의 미덕들, 그리고 그 미덕을 관리하는 자기 제어라는 미덕은 감정을 통해 도덕을 드러내는 도덕적 존재인 인간이 지향해야 바입니다. 도덕적 존재에서 미덕이란 당위로 나아갑니다. 애덤 스미스 세계에서 존재가 당위로 나아가는 드라마가 이렇게 펼쳐집니다.
애덤 스미스는 세상이 어둡고 침울하고, 인생은 비참하며 미래는 무전망이 나은 전망인 것이 분명한 사실이라는 설명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 설명을 받아들이면 첫째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 별다른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어지고 둘째로 그가 세운 적정성이나 동감의 개념들이 적합하고 효율적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공간들은 없거나 좁아지게 됩니다. 애덤 스미스가 비관주의적 전망이 가득한 주장들에 대해서 강력한 비판을 숨기지 않는 이유입니다.
현실에 불만을 품고 있던 정당의 지도자들은 언제나 매우 그럴듯한 개혁의 계획을 제시하면서 이러한 계획은 현실의 모든 불편을 제거하고 고통으로부터 즉시 구제해 줄 뿐만 아니라 앞으로 도래할 모든 시대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불편과 고통이 다시 밟생하는 것을 방지해 줄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것을 이유로 그들은 종종 새로운 모델의 정체를 제시하고, 또 대제국의 신민들이 지난 수세기 동안 그 아래에서 평화와 안정, 그리고 영광까지 누려왔던 현재의 정부체제를 그 가장 본질적인 부분에서 변경시킬 것을 제안한다. (중략) 그러나 그 정당의 과격성은 모든 타협과 절제 그리고 합리적인 조정을 거부하고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함으로써 결국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만다. 그리고 조금만 절제했더라면 상당히 많이 제거되고 구제되었을 불편과 고통들은 치유의 희망조차 없이 전부 그대로 남게 된다.(같은 책, pp. 441~442)
특히 애덤 스미스는 그가 도덕감정론을 쓰게 된 중요한 동기가 된 맨더빌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버나드 맨더빌은 그 유명한 꿀벌의 우화에서 사치나 부패와 같은 악덕이 사회를 굴러가게 하는 미덕이라는 전복적인 주장을 펼칩니다. 맨더빌의 책 역시 경제학이라는 학문 분과가 등장하기 전에 쓰인 일종에 도덕 철학서였어요. 읽어보면서 꽤 불편했지만 통쾌하고 재밌기도 했습니다.
맨더빌 박사의 저서 꿀벌들의 우화(The Fable of the Bees)의 큰 오류는, 모든 감정들은, 그것의 정도 및 그것이 향하는 대상 여하를 불문하고, 전부 악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모든 것을 다른 사람들의 실제 감정, 혹은 다른 사람들의 당위적 감정과 어떤 관련을 가지고 있는 허영심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책, p. 599)
애덤 스미스는 맨더빌의 주장에 대해 정치경제학적 차원보다는 도덕적 차원에서 비판합니다. 애덤 스미스 자신이 만든 적정성과 동감에 관한 일반이론이 갖는 인간본성에 대한 설명력을 무기로 맨더빌의 주장에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윤리적으로 폭력적일 수밖에 없는지 말하는 것이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대의 또 다른 중요한 라이벌이자 후에 역사상 정치철학 사상에서 더욱 중요한 지위를 갖게 되는 토마스 홉스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비판 합니다. 흔히 만인을 향한 만인의 투쟁으로 잘 알려진 홉스의 이론에 대해 애덤 스미스의 비판도 자못 '도덕'적입니다. 당대에 옳다고 여겨지는 세상의 가치를 전복시킨다는 것, 인간이 갖고 있는 본성적 가치들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홉스는 인간은 본래 악하고 경쟁적이라 법과 제도를 통해 자기를 옥좌서 사회를 구성하고 안정을 지향했다고 설명합니다. 애덤 스미스는 법률과 제도로 스스로를 얽어매지 않아도 인간은 본성상 스스로를 억제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홉스 씨가 공개적인 의도는, 이러한 생각을 보급시킴으로써 인간들의 양심을 교회의 권력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세속적인 권력에 복종시키려는 것이었다. (중략) 마찬가지로 그의 학설은 모든 건전한 도덕학자들의 반감을 불러일으켰는데, 그 이유는. 그의 학설은 옳고 그름 사이에는 천연적 구별이란 존재하지 않고, 그것은 무상하고 가변적인 것이며, 그리고 완전히 행정장관 개인 의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중략) 그의 가증스러운 어느 한 학설을 논박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입증할 필요가 있다. 즉, 모든 법률이 제정되기 이전에, 혹은 실제의 기구나 제도가 확립되기 이전에, 인간의 정신은 태어날 때부터 일종의 관능을 부여받았는데, 이 관능에 의해 인간은 어떤 행동과 감정들 중에서 정확하게 칭찬받을 만하나고 유덕한 특성들을 구별해 내고, 또 다른 행동과 감정들 중에서 틀렸고, 비난받을 만하고, 악한 특성들을 구별해 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할 필요가 있다. (같은 책, p 612)
오늘날 사회계약론에 대한 비판은 대부분 사회계약이라는 개념이 가설적 진리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가설의 최초 전제가 어떤 면에서 봐도 대단히 비현실적이라는 데서 비판받습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마이클 샌델은 1900년대 후반 가장 중요한 정치철학자인 존 롤스와 그의 정의론을 향해 지나치게 사회계약론적이라고 비판한 적 있습니다. 무지의 장막(veil of ignorance)이라는 전제가 말 그대로 가설적 전제라는 거죠. 마찬가지입니다. 홉스의 가설적 전제는 현실세계를 배제하고 그 때문에 현실 속에 있는 어떤 올바른 것들을 모조리 무시하게 한다는 견해입니다.
다른 이론가들을 향한 비평을 보면서 애덤 스미스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확인할 수 것은 그가 본질적으로 인간의 가능성을 긍정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애덤 스미스는 인간이 안정과 평화를 스스로의 힘으로 제어하고 또 만들어 낼 수 있는 본성을 갖고 있다고 봤습니다. 그런 본성을 가진 존재의 가능성을 애써 무시하고 또 외면하고 악과 이기심을 본성이라고 가르치는 이론은 인간에게 심지어 유해합니다.
책을 통해서 애덤 스미스가 왜 자유경제 이론을 주장하게 됐는지는 알게 됐습니다. 애덤 스미스의 세계에서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스스로를 억제하고 공동체를 지켜갈 수 있는 존재입니다. 국가나 제도가 할 일은 그 본성이 더욱더 잘 발현되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것은 서로 무엇이 올바른지 배우는 더 많은 상호 작용을 통해서 확대될 것이고, 그럴수록 미덕들을 계속 함양될 것입니다. 애덤 스미스가 본 인간, 그리고 그 인간이 지향해야 할 바를 잘 이끌면 인류의 공영은 더욱 증진될 것입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손이란 결국 인간 본성 그 자체인 것입니다.
오늘을 끝으로 새로운 책으로 넘어가려고 했는데 짚어볼 내용이 많아 한 편 더 다룹니다. 다음 편에서는 애덤 스미스의 본성론과 미덕 세트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합니다. 특히 책을 읽던 무렵 나는 굉장히 강하게 진보적 성향을 갖고 있었고, 적정성을 일종의 강제성이나 폭력적인 기준으로 읽었어요. 또 당시에는 한참 법철학을 열심히 공부하던 무렵이라 현대적 죄의 관점에서 이 책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그 무렵의 기억과 그 사이 축적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을 마지막으로 살펴보고 다음 편으로 넘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