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이토록 악한가(2) : 『도덕감정론』(4)

우리가 진실로 믿어야 할 것들.

by 김E

이제 약간의 감상과 비평으로 근대 경제학의 근간이 된 애덤 스미스의 출발에 관한 이야기를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이 책을 읽던 무렵 로스쿨 입시를 하고 있었고 세상을 향한 분노에 가득 차 있었죠. 그러면서 실상 사회가 작동되는 방식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어요. 10년이 더 지나서 이제 나는 세상의 중요한 결정이 얼마나 사소한 동기로 정해지고 집단과 조직이라는 이름 안에서 올바른 것들이 얼마나 손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절대 동의하기 어려웠던 애덤 스미스의 본성론이 일부 '필요'하다는 걸 배웠습니다. 그땐 쉽게 동의했던 인간에 대한 전망이 '지나치게' 낙관적이라는 생각도 하게 됐습니다.


감상(1) : 본질적인 질문

인간 존재는 정말로 믿을 만 한가?

다른 사람의 동의라는 또 다른 멍에


인간 존재를 낙관할 수 없는 증거들


인간은 정말 자기 것을 나눠주고 스스로의 욕망이 적정선을 넘지 않도록 절제하는 존재인가요? 내가 보기엔 많은 경우 그렇지 않습니다. 한동안 정치인들이 돌려 읽었다는「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지는가」에서 스티븐 래비츠키와 저자들은 민주정치 제도의 참여자들이 자기 절제를 포기하고 극단화되고 있다는 걸 지적합니다. 전 세계 대부분 선진 민주국가들에서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국가가 수용한 난민집단이 국가의 경제를 갉아먹는다는 주장, 범죄자와 내란 선동으로 갈라져 싸우는 세계 최고의 문화-IT 강국, 매일매일 전 세계 주식시장을 뒤흔드는 세계 최강대국의 사업가 출신 대통령의 말들이 모두 그렇죠.


내가 보기에 이런 현상은 일시적인 것도 특수한 것도 아닙니다. 극단주의자들과 과격주의자들은 한 체제가 활력을 잃고 동력을 잃을 때마다 등장합니다. 현실이 고달픈데 이유가 분명하지 않거든요. 1차 대전 이후에 히틀러는 독일 패망과 불경기의 원인을 유태인에게서 찾았습니다. 히틀러는 유태인만 사라지면 세상이 나아질 거라는 간명한, 그러나 어떤 합리성도 없는 슬로건으로 독일 최고 권력자가 됐습니다. 나폴레옹의 조카였던 나폴레옹 3세는 반복된 혁명과 반동으로 혼란에 빠진 프랑스에 나폴레옹주의라는 극단적으로 보수적인 기치를 들고 등장했습니다. 이미 유럽 최고의 공화정체가 자리 잡은 프랑스에서 나폴레옹 3사는 무려 황제가 됩니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폭넓은 권리와 다양성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많은 권리를 존중할수록 혼란이 가중됩니다. 하나의 권리를 존중하면 다른 권리가 제한되니까요. 어떤 사람들의 담배냄새를 맡지 않을 권리를 지켜주자면 다른 사람의 담배를 필 자유가 제한해야 합니다. 경기가 좋고 이웃을 배려할 여유가 있을 땐 괜찮습니다. 불황이 찾아오고 생계와 생활이 힘든 과제가 되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내 삶이 팍팍해진 이유를 찾게 되는 거죠. 이민자들 때문에, 소위 정치적 올바름 때문에, 여성주의자들 때문에 등등. 이런 걸 반동이라고 합니다. 젊은 남성들의 여혐과 젊은 여성들의 남혐 모두 같은 맥락입니다. 한 사회의 침체가 지속돼 활력을 잃고 성장 동력을 잃으면 극단적인 세력들과 이 목소리들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겁니다.


비율로 보면 역사의 대부분은 경제적으로 불황이었고 전쟁기였습니다. 자기를 절제하고 이웃을 배려하기 하는 '본성'이 발현되기보다 인간의 이기심과 야만이 득세할 수 있는 시기가 더 길었다는 겁니다. 미덕이요? 생존이 과제인데 신중이고 자혜고 하는 것들은 배부른 소리 일 뿐입니다. 인간의 존재를 낙관하는 애덤 스미스의 인간관은 납득할 만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너에게 승인받지 않더라도


또 다른 불만도 있습니다. 그의 주장은 좋게 보면 다수의 선량한 도덕감정에 힘을 실어줄 수 있지만 그 도덕감정에 부합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외면하게 합니다. 애덤 스미스는 그 자신이 시인받을 수 있다고 믿을 수 있어야 행동할 수 있다고 쓰고 있는데 시인이란 자신을 바라보는 타자의 감정 혹은 생각을 읽어내는 것입니다. 이건 어쩌면 일종에 자기 검열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 검열의 기준은 적정성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적정성이란 감각이 실재할까요? 실재한다고 해도 애덤 스미스의 주장대로 일반원칙으로 나아갈 만큼 확고한 것일까요. 애덤 스미스는 책에서 다양한 행동들이 이해받고 시인받는 경우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사례들이 그럴듯하고 동의할 만한 것이라고 해도 그가 내세운 개념들이나 전제들을 믿을 근거는. 내가 보기에 없습니다. 만일 적정성이란 개념이 그저 관념적인 가정이라면 애덤 스미스 스스로 비판한 사회계약론적 가정도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무엇보다 내 존재가 타인의 반응에서부터 시작되고 그것이 심지어 일반원칙을 세우는 근거가 된다는 건 별로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젊은 직장인들이 많이 하는 블라인드라는 앱 있습니다. 별별 이야기들이 올라오는데, 나는 직장에서 겪는 어떤 행동 하나하나를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서 승인을 요구하는 걸 보는 게 좀 이상했습니다. 초년생이라 그럴 수 있다지만 누가 봐도 빤한 걸 아니라고 하거나 저 정도 질문을 해야 할 정도 인가 싶은 내용도 많았습니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인간은 스스로 책임을 짊어지는 존재입니다. 남들이 승인하거나 시인하지 않더라도 나는 나인 겁니다. 나는 제3의 적정성의 판관에 의해서 도덕적 판단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 나 스스로의 행복과 기쁨을 위해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질 수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판단을 회피한다는 것은 책임도 그리고 거기서 발생하는 권리도 회피한다는 뜻입니다.


감상(2) : 적정한 것과 올바른 것

당신들을 불쾌하게 할지라도,

정말로 필요한 건 더 나은 세상을 향한 믿음


세상을 바꿔온 것은 언제나 당신을 불쾌하게 한 말들과 사람들


돌이켜 보면 세상은 늘 나를 불쾌하게 말을 하는 사람들이 바꿔 왔습니다. 매일매일 황제가 암살당하고 새로운 황제가 들어서던 제정 로마 시기에 주님 아래 만인은 똑같다는 예수교의 가르침은 급진적이고 불쾌한 주장이었을 겁니다. 예수교는 오로지 주님만 믿으면 행복과 평화가 찾아온다고 했습니다. 매일매일 서로 죽고죽이고 사라지고 대체되는 황제의 권위가 아니라 이승을 넘어 저승에까지 행사할 수 있는 주님의 권능과 지복의 개념은 혼란한 로마인들에게 명쾌하고 확실한 메시지가 됐을 겁니다. 그래서 더욱 불편했을 것이고 그래서 한번 빠져들면 쉽게 헤어 나오기 어려웠을 거예요.


이런 얘긴 어떤가요. 고등학교 2학년 문학 시간에 들은 얘기입니다. 교과서에 나오는 문학가들 죄다 친일파다. 서정주 시인은 일본이 패망할지 몰랐다고 했답니다. 그런 사람들이 듣기에 독립운동가들은 너무 이상한 사람들이었을 겁니다. 일본은 이미 서구 열강에 어깨를 맞대는 세계 최강대국인데 더 이상 국가가 아니게 된 그 무엇을 위해 몸 바치고 싸운다고요? 조선-한국 독립에 대해서는 많은 주장이 있고 2차 대전 종료가 가장 중요한 동기이긴 했지만, 독립을 주장한 그 많은 선지자들, 영웅적으로 자신의 삶을 던진 사람들이 없었다면 서구 열강이 한국을 독립 대상으로 설정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불편한 사람들이 변화를 만든 겁니다.


세상은 늘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들, 익숙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공격하고 또 바로잡으며 변해 왔습니다. 애덤 스미스의 주장은 통념적이고 현실적이긴 하지만 그와 같은 변화의 말들, 변화의 생각들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애덤 스미스의 말대로 개인의 격정은 타인에게 충분히 이해받기 힘들어요.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이라면 날 어떻게 볼까라는 일종에 허상적 자아를 소환해 자기를 객관화해봅니다. 그런데 그런 자기 객관화가 '옳은 것'을 결정해 줄까요? 나의 '옳음'이란, 그리고 그것을 지탱하는 나라는 '존재'는 각자의 지식과 경험, 세계관과 경험에 의해 확정됩니다. 그리고 그 존재는 비록 외부세계가 승인하지 않거나 타인을 불편하게 하더라도 어떤 옳음을 주장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나'인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진보해 온 '인간'과 '문명'


우리가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는 이유는 (1) 되돌릴 수 없을 가능성이 매우 크고 (2) 한 종의 한 개체가 한 종의 다른 개체를 죽이는 것이 용납되는지 확인할 수 있는 명확한 근거가 없고 (3) 만일 누군가가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3-1) 이 권리로 인해 우리는 누군가에게 죽게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면 되는 순간이 오고 (4) 이는 영원히 되돌릴 수도 없는 것을 영원히 되돌릴 수 없는 사건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형이 논란이 되는 이유는 민주주의를 이루고 있는 근간인 관념, 즉 모든 인간은 동일하게 존엄하고 가치 있다는 판단이 훼손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견해가 만들어지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법률적 존재인 시민, 아니 개인이 존재해야 하고 그 개인이 보호받아야 할 권리 개념이 필요합니다. 신분제에서는 생명의 무게가 다릅니다. 어떤 사람의 존재는 다른 사람의 존재보다 고귀해요. 중세 유럽에서는 신분의 명예 때문에 처형 도구도 달랐습니다. 우리가 세계사 시간에 배우는 함무라비 법전도 전제는 신분에 입니다. 법률로 정하지 않으면 처벌이 과해지니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형벌 기준이 만들어진 겁니다. 고작 200년 전에 미국 남부에서 흑인은 거룩한 주님의 말씀을 근거로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고 유럽 최고의 문명국 중에 하나라는 스위스에서 여성에게 투표권이 주어진 건 1970년대에 들어서였습니다.


나는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자기 절제를 천성적으로 할 수 있는 존재라고도 믿지 않습니다. 인간은 사악하고 비겁하고 이기적인 존재인 경우가 많습니다. 종종 헌신적이고 이성과 경제의 측면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희생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나 순간들은 늘 예외적입니다. 그럼에도 붋구하고 그 무수한 인간들의 상호작용 끝에 세상은 계속 나아져 왔습니다. 낙관해야 할 것은 인간 내면의 적정성의 판관이나 도덕 감정이 아닙니다. 역사와 그 역사를 만들어낸 인간들이 굽이굽이 먼 길을 돌아 더 많은 사람들의 자유와 평등, 희망과 행복을 위해 전진시켜 왔다는 것일 겁니다. 나는 적어도 그렇게 믿습니다.


나오면서..


650페이지에 달하는 책입니다. 비판적으로 접근하긴 했지만 두꺼운 만큼 깊은 통찰력 있고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문체가 지루하고 책 전체의 논리 얼개가 단단하게 지어져 있어 한 문장을 놓치면 따라가기 힘든 부분이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몇 개의 개념을 여러 차원에서 분석하고 있기 때문에 또 천천히 쫓아가면 잘 따라갈 수 있기도 합니다.


애덤 스미스는 생전에 유머러스하고 사람들에게 큰 사랑을 받은 현자 같은 사람이었고 합니다. 인간에 대한 애정과 단호한 결기가 함께 드러납니다. 그 자신이 엘리트 출신이라는 점들을 잘 숨기지 못하면 면도 적지 않은데 급진주의자들을 향한 비판이랄지 국가 제도의 지향이 안정성 유지에 있다는 주장이 대표적입니다. 그의 주장들은 곧이어 나타날 로베스피에르나 여타 혁명 정부들의 무능을 예견하는 듯이 보이거나 무수한 진보적 정치세력들이 보수세력의 권력을 강화한 결과로 이어진 사례들을 설명합니다.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우는 각각 미덕들에 대한 설명들 역시 탄탄한 지성과 폭넓은 경험의 소산. 비할 바 없이 훌륭하며 깊은 예지를 주기도 합니다.


애덤 스미스의 이야기는 오늘 같이 급진적인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많은 불황기, 침체된 사회 분위기에는 썩 와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봤습니다. 어쩌면 애덤 스미스의 상상은 한 사회가 활력을 유지하고 건강할 때에 의미 있는 이야기 일 수 있다는 것, 건강성과 활력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어떤 조건들을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죠. 그가 후에 주장하게 될 자유 경제 역시 바로 그런 활력들이 전제될 때에 가능한 사상이 아니었나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건강한 사회를 위해 살펴봐야 할 이야기들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겁니다. 오늘처럼 비관적 전망과 불행한 현실 진단이 가득할 때 거꾸로 인간 내면에 도덕을 판명할 수 있는 본성이 있다는 주장은 한편에선 희망찹니다. 이런 주장은 사실 여부를 떠나서 오늘 시기에 무척 필요한 이야기 일 수 있다는 얘깁니다. 처음 말했던 낙관과 긍정이 필요하다는 믿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네 편에 걸친 애덤 스미스의 이야기는 이것으로 마무리합니다. 이어서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존재해서, 인구의 수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던 냉혹하고 무시무시한 주장을 펼쳤던 토마스 맬서스와 인구론을 만나볼까 합니다.

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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