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 인권 변호사는 무슨, 공공기관에 입사하다.

by 김a

실패한 도전과 시작된 취준

대학 졸업 무렵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스스로가 봐도 멋진 동기를 품고 인권변호사가 되겠다며 로스쿨에 도전했다. 3년간 네 군데의 로스쿨에서 다섯 번쯤 면접을 봤고 코 앞에서 두 번 미끄러졌다. 방법이 잘못됐나 싶어 학점을 이수하며 사법시험에 도전하기도 했다. 학벌도 그저 그랬고 학부 성적도 평균이었다. 리트 점수가 압도적인 것도 아니었다. 겉으론 변호사 운운했지만 사실은 게으른 생활에 자기만족이나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자조와 후회의 시간들. 시험과 함께 아니, 정확히는 실패와 함께 4년을 보냈다. 함께 하던 벗들은 번듯한 직장에 차를 사고 결혼도 한다는데. 그 무렵 만났던 애인은 내게 도망갈 이유가 됐다. 포기하자. 애인에게 맛있는 밥이나 먹이고 부모에게 사람 구실이나 하면 될 일이다. 4년간의 실패를 뒤로하고 취업시장에 뛰어들었다.


한 달 동안 매일 몇 개씩 이력서를 보냈고 최종면접을 보는 날이 이어졌다. 원서를 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공공기관에서 2월 초였는지 1월 말이었는지 서류합격 결과와 필기시험 날짜가 문자로 날아들었다. 다시는 돌아올까 싶던 경기도, 후에 행사장으로 수십 번 썼던 그 강당. 족히 200명은 넘는 인원이 필기시험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필기시험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객관식 경제상식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경제 논술이었다. 경제상식은 한국경제신문인가 사이트에 있는 단어들을 외웠고 논술은 적당히 얼버무리면 되겠다 싶었다. 다행히 경제상식은 그야말로 상식이었다. 논술 문제를 보고 '운명'을 직감했다. 전년도 로스쿨 면접서 중요하지만 놓쳤다고 생각했던 문제, 법조인이 내 길이 아니구나란 걸 느끼게 했던 문제. 당시 과제는 한중 FTA와 법률시장에 관한 내용. 화가 나서 집에 와 열심히 본 기억이 났다. 입사 논술 과제는 한중 FTA와 중소기업의 관계였던가. 이 회사가 나를 붙여주려나 보다. 시험이 끝나고서 버스정류장으로 내달렸다. 나는 애인에게 맛있는 걸 먹이자고 꿈을 포기했다. 그날 강남 딘타이펑에서 딤섬을 먹었다.


며칠 후 필기시험 합격과 면접 일정을 통보받았다. 한국말이야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떠들 자신이 있다. 수차례 최종면접을 봤다. 게다가 나는 로스쿨 면접에서 전직 검사와 판사를 앞에 두고도 거침없이 내 주장을 펼친 사람 아니던가. 영어가 문제였다. 유학파였던 당시 애인은 성의껏 몇 페이지에 달하는 자기소개 스크립트를 써줬다. 나는 욕실에 누워서까지 영어 문장을 외웠다. 캐나다에서 초등학교를 다닌 적 있던 대학친구는 내 스크립트를 보더니 웃었다. 편하게 말할 수 있는 수준으로 고치란다. 면접 당일 다대다 면접을 마치고 영어면접이 이어졌다. 해외 경험이 없던 내게 외국인과의 직접 대화한 건 학부 때 마케팅 수업과 영어 회화 과제 때 친구가 소개해줘 여럿이 같이 만났던 덴마크인 아네트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다대다 면접에선 이제 충분히 말했으니 그만 말하라는 제지를 들었고, 영어 면접은 업무보다는 사적인 이야기들을 나눴다.


그리고 일주일쯤 후 합격문자가 왔다. 문자를 받고 무슨 기분 이었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로스쿨 예비 1번은 요즘 말로 박제도 해놨는데. 어리둥절한 채로 엄마와 애인에게 문자를 전송하지 않았을까. 그때 내 곁에 사람들에 내게 무슨 말을 했는지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누구는 합격 발표 나면 취업 전에 여행을 다닌다는데. 나는 술 마시다 지갑을 잃어버려 주민등록증도 다시 만들어야 했고 신체검사에 범죄기록증명 등을 분주하게 뗐다. 그 무렵 소중 했을 것들, 내 밥벌이를 시작하게 해 준 그 문자는 어디 있는지, 입사 전 한 시간을 넘게 달려가 작성한 근로계약서 또 어디 있는지. 퇴사를 하면서 챙겼는지 말았는지.



입사, OT, 기관장과 저녁식사

입사일은 3월 2일. 기관통합이나 정규직 전환을 겪어 기관이 커진 이후에는 직원이 너무 많아져 더는 공동 행사장으로 쓰지 못하는 교육실에서 월례 조회가 있었고 정규직 공채 직원들이 첫인사를 했다. 현장 조회에 참석한 100여 명 남짓한 직원들 앞에서 한 마디씩 포부를 전했다. 나는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건 사령장을 들고 단체사진을 찍었다는 것, 어떤 사람들은 반기는 표정을 어떤 사람은 떨떠름하고 불쾌한 표정이었다는 것뿐이다.


일주일에 걸쳐 신입직원들이 발령될 부서의 팀장들과 업무 사항을 안내해 주기 위한 오리엔테이션이 이어졌다. ERP 사용법을 배웠고 우리 기관의 법적 지위, 무슨 출자출연기관법이 어쩌고, 연 출연금이 얼마에 예산이 얼마라는 둥. 이런 얘긴 나중에 노조를 하면서야 정확한 의미를 알게 된 것들이다. 일주일간 여러 부서장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후에 본부장으로 은퇴한 어느 부서장은 구내식당에서 밥을 머는데 밥을 일찍 먹어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타박했다. 공무원 출신 다른 본부장은 우리 기관이 여성들에게 최적화돼 있는 기관이라고 했고 어느 팀장은 민간 경험을 빗대면서 이만한 회사가 없다고 했다. 돌이켜 보면 그 말들이 정말 맞는 말이었다.


당시 보직을 놓았던 그리고 꽤 오랜 시간 내 팀장님이 되는 평가업무 담당자는 우리 회사의 가장 큰 장점은 부자들을 위해 일하지 않는 회사라는 거라고 말했다. 그 양반 참, 그때도 그런 말을 했다. 나는 지금도 그가 그 얘길 진심으로 했다고 믿는다. 이후에 종종 그 기억을 얘기하면 당신은 멋쩍어했다. 회사는 일하기 위해 모인 곳이라는 말을 한건 다음 주 내 첫 팀장님이 될 분의 가르침이었다. 그 열정적이던 분이 내가 퇴사할 즈음엔 많이 편찮으시다. 기억을 떠올리니 마음이 무겁다. 일을 하다 보면 우리 갑인 공무원들의 수준이 한심하니 적당히 이해하고 살자 말들 등등의 이야기도 기억에 남아있다. .


오리엔테이션이 끝나던 금요일, 신입직원들과 당시 대표와 저녁 일정이 있었다. 고졸 출신으로 대형은행의 고위직까지 오른 당시 대표님은 우리가 입사 동기라고 첫 말씀을 시작했다. 이어서 이 어려운 시절에 취업에 성공한 당신들은 효자 효녀라고도 했다. 당신은 사회생활은 "네 덕 내 탓" 하나만 기억하면 된다고 반복했다. 잘한 건 도와준 당시 덕분이고 못한 건 부족한 내 탓이란 얘기. 맞다, 직장생활을 해보니 중요한 태도다. 그리고 대부분은 갖지 못하는 태도기도 하다. 이후에도 대표님은 주옥같은 말씀을 많이 하셨다. 시키는 일만 하는 놈 보통 놈, 시키는 일도 안 하는 놈 못난 놈, 안 시킨 일도 하는 놈 될 놈. 이라던가. 2차까지 마치고 술에 취해 집에 가던 길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여전히 어떤 생각들은 또렷이 기억난다. 앞서 잠시 다녔던 작은 회사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 나는 이제 어른들의 세상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제 직장생활이란 걸 하게 됐다는 거다.




인권변호사가 돼 사람들에게 받은 도움을 돌려주겠다는 둥 자기소개서에 쓰는 멋진 말은 더는 하지 않을 거야. 나는 실패했으니까. 나는 그만한 노력도 하지 않았고 그만큼 대단한 삶을 살 운명의 존재도 아니니까. 많고 많은 사람들처럼 조용하게 세상에 섞여가야지. 내가 가진 사소한 사연 같은 건 전부 없는 걸로 치고 살아야지. 더는 이 세상에 우연히 도착한 여행자처럼 끝없이 세상과 나 사이에 거리를 인식하면서 잘못된 세상을 제자리로 돌려놓겠다거나 보통 사람들의 연약한 삶들에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는 인생을 살겠다는 말이나 생각은 하지 말아야지. 그런 다짐을 했다.


나는 실패자였다. 그 모든 것들은 그저 알리바이일 뿐이야. 내가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내가 세상과 불화하는 까닭에 만들어낸 말장난일 뿐이라고. 그래서 나의 신념의 말들은 고작 말들 일뿐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렇게 믿기로 하고 어른들의 세계에 들어가기로 했다. 나는 그저 애인에게 맛있는 밥을 사 먹이고 엄마와 아버지에게 사람구실하는 아들이면 된다. 그렇게 내 직장생활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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