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차(1) : 신나는 사업계획

내 손으로 만든 사업계획, 자식 같은 내 것들의 기억

by 김E


2년 차의 시작, 첫 인사발령


입사 후 첫 팀은 이미 8월부터 기능 이관과 해체가 결정돼 있었습니다. 당시 우리 갑인 지사님께서 소위 시민단체의 입김 때문에 업무 이관결정을 내렸다는 건 후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3년 동안 17개 광역자치단체 중에서 17등, 16등, 16등을 해오던 업무를 11등으로 만들었고 내년에 무얼 해야 할지 감이 좀 잡히고 있었습니다. 10월이 지나면서 팀장은 인수인계를 고려해 업무를 하라는 지시를 내렸죠. 그렇게 부서가 사라졌습니다.


2년 차의 시작은 인사발령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본부를 떠났어요. 누구는 전산팀으로 누구는 인사팀으로. 부서가 해체되면서 본부에 남은 건 나밖에 없었어요. 첫 팀 팀장님은 본부장님이 널 예쁘게 봐서 남긴 것 같다는 얘길 했지만 돌아보니 내 기분이 상할까 봐 해준 얘기였어요. 본부원이 정규직만 서른 명이 넘고 기간제에 파견직까지 하면 50명이 넘습니다. 아무리 그 해에 들어온 정규직 신입이 나 밖에 없었다고 해도 챙길 만한 대상은 아니었을 겁니다. 아마 전년도에 노조와 일으킨 불화로 날 반기는 팀이 없던 건 아니었을까요.


부서를 옮기고 나서는 매일매일 깨졌습니다. 전년도엔 신입이 혼자서 중앙정부 사업을 끌고 가서 평가도 받았는데 이게 뭐야. 지출 품의 오타부터 시스템에 입력하는 지출결의 숫자 같은 것들. 업무를 무성의하게 대한다거나 꼼꼼하지 않다는 게 모두 혼날 이유였습니다. 지금도 기억납니다. 발령 후 첫 팀 회의 때였네요. 팀장은 오자마자 내게 부서 주간업무보고를 챙기도록 했죠. 첫 주부터 와장창 깨졌죠. 네가 뭔데 사업명을 제멋대로 고쳐 쓰느냐. 기본적인 업무 파악부터 다시 해라!


4월인가 5월인가엔 팀장과 크게 부딪쳤습니다. 연구용역 중간보고 자료를 살펴보고 있었어요. 사무실에 와서 전날 업체에서 보내온 파워포인트 자료를 읽어보고 어느 정도 정리가 됐길래 팀장에서 포워딩을 했죠. (지금이라면 예쁘게 컬러 출력해서 필요한 포인트에 띠지를 붙이고 한 장짜리 보고 문서를 작성해 첨부했을 겁니다.. ) 아홉 시가 되자마자 팀장에서 박살이 났습니다. 아마 그 형님 성격상 욕도 했을 거예요. 자료 다 살펴본 게 맞냐. 메일 읽은 시간이랑 포워딩한 시간 보니까 별 차이 안 나는데 너 일 똑바로 못하냐? 본부 회의실 불려 들어가 또 깨졌죠. 이번엔 내쪽에서 언성이 높아졌습니다. 다 살펴봤고 문제없어서 전달드린 거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 일 하겠다고 하는 게 잘못이냐.


그날 저는 점심시간까지 나가서 들어오지 않았어요. 멀리 간 건 아니고 사무실 건물 앞에서 서성거렸죠. 전년도에는 사회경력 20년 넘는 어르신들도 칭찬했는데 몇 개월 만에 무능한 사람 취급을 받게 되다니. 두시쯤 팀장이 절 불렀습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했죠. 잘 생각해 보고, 네가 잘못했으면 네가 사과하고 내가 잘못했으면 내가 사과하마. 당신은 다음 날 워드 타이핑한 편지를 줬습니다. 남자들끼리 참 징그럽죠. 그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가끔 섣부르게 흥분하거나 화를 삭이지 못했지만 일에는 늘 진심이었고 후배들에게 상처 입힌 자신을 차잭하는 착한 사람이었어요. 나는 10년의 기관 생활 중 6년을 이분의 팀원으로 함께할 예정입니다.


신규사업을 만들라고?


나는 팀장이 의도적으로 나를 괴롭히려고 든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내가 덤벼들었던 노조위원장이랑 친했거든요. 팀장은 내가 건방지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고작 2년 차 주제에 싹수없고, 제멋대로다 이런 평판이 가득했거든요. 그래도 언성 높이며 다툰 후로 우리는 어느 정도 서로를 인정했습니다. 팀장은 내 업무에 대해 조금 더 진지하게 체크했고 저 역시 팀장의 업무 지시에 조금 더 고분고분해지기로 했습니다. 12살 어린 동생에게 먼저 사과를 할 수 있는 어른은 그렇게 많지 않잖아요. 돌이켜 보면 그 역시 팀장 경력 2년 차, 관리자로 훈련받고 있었고 이제 겨우 40대 초반이 됐을 뿐이었습니다.




연초 몇 억이 배정돼 있던 사업이 있었는데 여러 이유 때문에 구체적으로 집행하기 어려운 상태가 된 것 같았습니다. 관계사들과 협조가 잘 이뤄지지 않았거나 사업성이 없었거나 그도 아니면 정치적 입김 때문이었을 겁니다. 팀장은 이 예산을 전용해 사업을 만들자고 협상을 한 거 같았습니다. 그 무렵 그 의사결정이 어떻게 난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아요. 그냥 그렇게 분위기가 흘러갔고 선배 사업 예산을 뺏은 꼴이 됐죠. 분명한 건 나에게 뭔가 새로운 일을 할 기회가 주어졌다는 겁니다.


팀장은 연구용역 결과를 바탕으로 사업을 한번 만들어 보자고 했어요. 사회생활 대부분이 그렇지만 회사에는 일을 가르쳐주거나 방향을 제시해 주는 선배 같은 건 없어요. 좋습니다. 큰 예산은 아니지만 한 번 해보죠. 일단 해보고, 부딪쳐 보는 겁니다. 그리고 배우고 성장해야 해요. 기왕 주어진 기회니까 멋지게 해보고 싶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참 어설펐습니다. 공공 분야에서 신규사업을 만들어낸다는 건 기존에 했던 유사한 사업들을 참조해서 사업 이름을 바꾸고 모델을 조금 바꾸는 수준이에요. 나는 그런 관행 같은 건 알지 못했고 애초에 뭘 복붙하고 이런 걸 싫어하고 불편해했어요.


열심히 사업계획을 만들었습니다. 논문도 살펴보고 전년도에 했던 행정안전부 사업과 지침들도 참조했습니다. 계약법이나 비용 보조금 관련 법체계 같은 건 아무것도 몰라서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사법시험 인근을 얼쩡거렸다지만 행정법은 정말 젬병이었거든요. 심사기준은 어떻게 하고 보조금 지급 시기는 언제로 할지, 중간 점검은, 전문가 매칭은 등등. 상급기관에도 몇 번을 왔다 갔는지 모릅니다. 지금은 해져서 내버린 백팩에 노트북을 넣고 전철에 버스를 타고 수도 없이 갑을 만났습니다. 메일을 몇 번을 주고받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산을 키웠다 줄였다. 3년 치 계획으로 갔다가 다시 1년 치로 줄었다가 직접 지원금을 늘였다가 간접 지원 금액을 줄였다가. 지원기준을 늘렸다가 줄였다가. 내가 복잡하고 기다랗게 계획을 만들어 보내면 상급기관 파트너를 그걸 보기 좋고 깔끔하게 요약해 주곤 했습니다. 과장 보고 끝났다. 국장 보고 들어간다. 이러면서요.


기관장 결재를 타기까지


어느 정도 완성되면 초안을 출력해 팀장에게 가져갑니다. 팀장은 회의실로 날 부릅니다. 그리고 빨간펜을 하죠. 이 부분은 챙겼냐? 이 사람들 만나봤어? 연초에 투닥거리긴 했지만 당신은 일을 만들어 본 진짜 실무자 출신 팀장이었어요. 진지하게 대화를 나눴죠. 한두 차례 더 팀장과 대화를 해 실무단에서 점검이 끝나면 다음으로는 본부장 보고가 이어집니다. 내가 있던 조직은 공조직이고 공무원식 문화가 꽤 강한 관료조직이었어요. 결재를 태우자면 대면보고가 기본이었습니다. 팀장과 함께 본부장에게 결재 태울 내용을 보고 했을 겁니다. 본부장은 한번 더 체크합니다. 예산, 이해관계자. 경과 이런 것들요. 이제 2년 차인 나는 모를 부분들을 팀장에게 따로 얘기했을지도 모르죠. 내가 맡은 사업은 소위 공약 사업도 아니고 언론 관심을 받는 사업도 아니었어요. 그땐 그저 기관장 결재를 받는 사업을 혼자 만들어 냈다는 게 벅찼습니다.


나는 대학 때부터 엄청나게 많은 보고서와 기획서를 썼어요. 취미활동처럼 광고 공모전을 열몇 개를 나갔습니다. 본상은 못 받았고 대부분 결선 탈락이나 파이널리스트 뭐 이런 거였어요. 학부 때 내 별명은 실패의 아이콘이었습니다. 1년에 네 번에서 여섯 번 정도 했으니 포트폴리오가 엄청 쌓여있었죠. 회사에 와서 정말로 돈을 들여서 뭔가를 한다는 건, 그리고 그것을 내 손으로 설계해서 세상에 내보낸다는 건 정말 신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끼린 사업이라고 불렀지만 이게 바로 정책이란 것의 실체였습니다.


기관장 결재를 받기까지 몇몇이나 협조 결재를 받았는지 기억이 안 납니다. 보통은 팀장, 본부장이 직라인이고, 재무팀장, 기획실장, 감사실장이 대표 결재 전 협조라인이었을 거예요. 기관이 커지고 나서는 거기 이사에 경영관리본부장까지 붙죠. 보통 팀원 7~10명가량 되는 부서에 쌓이는 문서가 1년에 3000개~5000개가량 됩니다. 이 중 타 부서나 기관에서 날아온 협조 문서가 1000개쯤 된다면 품의, 계획, 결과 보고 등 직원들이 직접 생산하는 문서는 2000~3500개가량이라고 볼 수 있죠. 그런데 그 와중에 기관장 결재까지 가는 건 담당자별로 1년에 대여섯 개도 되지 않아요. 금액이 정말 큰 지출인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사업계획과 결과보고가 다죠. 빠르면 1년 차 후반쯤 되면 혼자 힘으로 사업계획을 씁니다. 나는 첫 사업계획과 결재가 직장생활에서 얼마나 소중한지 꼭 말해주곤 했습니다. 저는 후에 처음으로 기관장 결재를 받는 후배들에게 말했습니다. "이거 이제, 니 거야, 당신이 책임지고 1년 동안 해나가는 거라고."


진지한 의미로 내가 만든 첫 사업계획을 결재받고서야 이제 나는 내 일을 하게 됐습니다. 조금 벅차고 감동스럽기도 했죠.


그땐 몰랐습니다. 그게 험난한 직장생활의 진짜 시작이라는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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