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학생회장이 노조 지도부가 되기 까지
이번 이야기를 시작하기가 무척 어려웠습니다. 여러번 썼다 지우길 반복한 끝에 간신히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만큼 마음의 상처가 남았다는 뜻이겠죠. 그럼에도 다시 시작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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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어떤 사람들이 내게 노조를 하겠다고 조언을 구해오면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생각 보다 강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특히 회사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예상보다 더욱 고약해요. 더 비열하고 이기적입니다. 조금 더 아끼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당신의 선량한 마음은 보상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고 네가 궁지에 처했을 땐 대부분 사람들이 당신을 모른척 할 겁니다. 그리고 어쩌면 인생 자체가 망가질 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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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고 1기로 입학해 1학년때 부학생회장, 2학년때 부반장에서 반장으로, 3학년때 반장 뭐 이런걸 계속 했어요. 기숙사에 살았고 층장이란 타이틀도 있었죠. (그래봐야 점호나 챙기는 역할이었지만요) 대학에 와서도 단과대 학생회를 했고 300명 규모 학부의 회장을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 있잖아요. 남들 하기 싫어하는 거 떠맡는 사람들, 늘 앞에 나서게 되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학생회장을 맡을 땐 내 전임자들 보다 잘 할 자신이 당연히 있었어요. 0으로 시작되던 학번이던 내 대학 시절의 대학생들의 지상과제는 취업이었습니다. 그무렵 까지 나는 아직 현실을 살고 있지 않았어요. 음악을 하겠다고 집을 나가서 홍대에서 공연을 했고 학교에 돌아와서는 대부분 별 쓸모가 없는 공모전을 열몇개씩 하면서 방학을 보냈죠. 남들 다 쌓는 토익 성적 같은 스펙 같은 건 없었습니다. 물론 그 무렵 나는 몸이 점점 더 망가져 가고 있었고 생의 전망이 퍽 긍정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것들을 던졌습니다. 매일매일 새벽까지 프로젝트를 했고 밤새 술을 마셨어요. 누구는 내게 뜨거운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그러지 않으면 하루하루를 견딜 수 없었거든요.
그때 나는 적지 않은 좌절을 했습니다. 그 시간의 끝에 내 곁에 있던 사람들의 결과물들은 엉망이었습니다. 우리끼리 열정적인 시간을 보냈지만 나와 함께 학생회를 했던 아이들은 병원으로 실려가거나 휴학을 했습니다. 누구는 별종 취급을 받았고 누구는 독특한 사람으로 평가 받았습니다. 내가 무시 했던 누구는 대기업을 가고 누구는 은행으로 갔어요. 나는 실패자가 돼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내 젊음의 말들, 낭만의 언어들은 대부분 아무 것도 아닌게 돼 있었죠. 나는 다짐했습니다. 다시는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겠다. 다시는 다른 사람들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일 따위는 감히 하지 않겠다. 죄책감과 상실감으로, 우습지만 가볍지 않은 결심을 하던 스물 일곱 되던 겨울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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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7년이 지났습니다. 서른 네살을 앞둔 겨울이 오고 있었습니다. 나는 당시 만났던 애인과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여행 계획을 짠다거나 부모님과 함께 식사예약을 준비하는 등 뻔하디뻔한 직장인과 공공기관 직원으로 가을을 마무리 하고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너무도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생활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만 회사의 혼란 역시 내가 모른 체 할 수 없는 일상들이었습니다. 회사 통폐합에 따른 직급과 급여 체계 조정을 두고 하위 직급 간담회를 조직하거나 참석했고 당시 노조 사무국장이던 첫팀 사수 형님과 함께 통합 과정에서 '우리'측에서 준비해야할 것들에 관한 아이디어를 제안하거나 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했어요. 물론 어디까지나 내 역할은 서포트 였습니다. 이미 몇차례 회사 게시판에 실명으로 글을 써 욕을 먹기는 했지만 나는 여전히 공채 막내에 2년차에 불과 였습니다. 통합을 앞두고 공채 일정이 취소 됐거든요. 무엇보다 나는 어린 날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겠다' 다짐을 했습니다.
내 사수는 늦여름부터 노조위원장에 나서야겠다는 이야기를 전한 바 있습니다. 나는 답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면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 거 같습니다. 무엇 때문에 노조를 하려 하십니까. 그게 설명이 안 되면 안 될 거 같습니다. 몇번 더 그런 얘길 나눴어요. 나는 그무렵까진 현학적이고 관념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법철학 책이나 정의론 같은 것들, 헌법이론, 민주주의와 공화제도의 가치 같은 다분히 고전적이고 철지난 이론 같은 것들을 지침으로 삼았죠. 여전히 나는『대한민국 헌법』같은 걸 취미활동을 읽습니다. 로스쿨을 준비한다고 많은 고전을 읽기도 했습니다. 존 로크의 통치론(Two Treatises of Government)은 삼권분립 이전의 가부장적 통치 구조를 바탕으로 한 이권분립을 다룬 책이었고 칼 슈미츠의 정치신학 같은 책들은 민주주의의 취약점을 공부하게 해준 책이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조직이란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자면 적어도 5년은 필요해요. 관념이나 아니라 실질적인 의미의 조직이요. 그런데 고작해야 고전에서 읽은 지식 같은 걸로 나보다 7년이나 선배를 앞에 놓고 가르쳤으니 지금 와서 보니 참 건방진 막내 공채 였습니다.
그리고 꽤 시간이 지나 사수 형님이 내게 와서 말했습니다. 아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되고 싶다. 그런 얘길 했던 거 같습니다. 지금이야 모르는 사람이 됐지만 나는 그의 모습에서는 진심을 읽었습니다. 그 대답은 세 아들의 아버지로서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비싼 답안지였습니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나는 그와 함께 할만한 파트너 들을 함께 찾기로 했습니다. 사수 형님보다 나이가 더 많고 경력이 더 많은 선배님들, 나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회사 경력이 더 많고 이미지가 매우 좋은 누구 등등. 몇주에 걸쳐 누군가를 만나 업무 파트너가 돼달라고 선거에 함께 하자고 설득 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당시 노조는 부패하고 이기적인 집단으로 평가 받고 있었어요. 실제로 부패했고 이기적인 집단이었던게 맞으니까요. 위원장과 부위원장은 알량한 노조 권한을 이용해 자기네들 승진 등에 치부하기 바빴어요. 조합원 다수가 반대했던 임금피크제를 조합 규약 운운하면 제멋대로 통과시키는 명백한 불법은 물론 비정규직을 조합원으로 받지않는 걸 목표로 한다는 비상식적인 말들을 떠들곤 했습니다. 조합원들은 벌써 6년이나 연임한 위원장이 회계자료를 공시하지 않는다는 문제제기를 했고 나를 비롯한 몇몇 직원들은 운영이 투명하지 않은 점, 비민주적인 점에 대해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손사레를 쳤어요. 회사가 통폐합 되는 시점에, 게다가 부패하고 이기적이고 무능한 집단이 된 노조에 합류하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네들의 망치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맞습니다. 당시 노조는 가라앉는 배였습니다.
네가 날 도와주면 안 되겠냐. 사수 형님은 내게 부탁 했습니다. 사수 형님은 네가 사무국장이 되어야 겠다고 말했죠. 나는 사람들을 추천하면서 당신을 돕겠지만 직함을 받는 것은 사양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사람들 앞에 나서고 싶지 않다고 말했고 그런 직책을 맡을 만한 경력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죠. 세 사람이 거절했고 당시 노조 부위원장이 선거에 나가겠다고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러닝메이트가 없으면 선거에 나갈 수가 없었어요. 선거 참여를 가늠하는 그녀는 난폭하고 이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자기가 승진을 못했다고 1년 1번인 승진 인사를 2번으로 늘리자고 했고 적어도 세명 많으면 다섯명 정도가 그녀 때문에 퇴사를 했거나 (후에) 갑질 신고를 고려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노조위원장이 되면 안된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당시 애인이 뭐라고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부모님에겐 말하지 않았죠. 내 스스로를 이렇게 설득 했던거 같습니다. 사무국장은 서류를 쓰고 실무를 전담하는 역할. 사무국장 정도라면 사람들 앞에 나서는 자리는 아니지 않느냐.
그렇게 노조 참여를 수락했습니다. 그리고 선거가 이어졌습니다. 단일 후보 였음에도 노조 전반에 대한 불신 당시 후보로 나온 사수에 대한 비토 등등 더해져 선거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나는 의리라고 썼습니다. 함께하는 직원들에 대한 의리 때문에 런닝메이트에 나섰다고 말했죠. 정말이었습니다. 내가 아는 성실한 직원들은 저렇게 비열하고 악독한 사람들에게 상처 입어야 할 어떤 이유도 없다. 그렇게 믿었어요. 그런 사람들 위해 뭔가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영광이겠다고 썼던거 같습니다.
간신히 절반 넘는 득표로 2년의 첫 집행부 임기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 벌써 꼭 8년 전 작성했던 노조 사무국장 입후보 신청서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