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말(土末)의 옛 정취를 찾아서 - <소쇄원>

피안재의 여행 갤러리(28)

by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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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말(土末)로 떠나는 날 비가 내렸다.

‘이 비 그치고나면 그땐 제대로 가을이 시작되겠지?’

사실 이번 토말 여행을 계획하면서는 처음부터 은근히 가을 여행을 기대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가을은 아직 우리 곁에 슬며시 다가와 머물지 못하고 있었다.

딱 여름과 가을의 한복판이라고 해야 할까? 가만히 있으면 선선한 듯하고, 조금만 움직이면 등에 땀이 차오른다. 아무리 계절이 그렇다고 해도 모처럼의 긴 연휴 덕분에 이렇게 토말(土末)을 다시 찾아가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은 무척 고마운 일이라 하겠다.

내 머릿속 기억세포의 텃밭을 다시 일구어야만 겨우 찾아낼 것 같은, 기억 저편의 어디쯤엔가 우리가 처음으로 토말(土末)을 찾아 여행했던 아련한 추억이 지금도 남아있기는 하다. 많이 빛바래고 퇴색해버린 흑백사진처럼 말이다.

기억하기로는 그날도 비가 내렸다. 계절은 지금과는 사뭇 다르게 겨울과 봄의 딱 한복판이었다.

아스라한 기억에 오래된 앨범과 봉지에 담겨있는 사진 뭉치를 일일이 꺼내 살펴보았지만, 끝내 첫 번째 토말여행의 사진들은 찾아내지 못했다. 그 당시 살아오면서 첫 번째로 심한 좌절을 겪었던 시기였고, 그런 이유로 이사를 하느라 짐을 줄이는 과정에서 아마도 모두 소실되었던 것 같다.

첫 토말(土末) 여행은 말 그대로 과거속의 흑백사진처럼 빛바랜 아날로그 시대 여행이었다.

핸디폰이 등장하기 전 삐삐가 주류였고, 내비게이션도 없어 커다란 지도책을 찾아가며 교차로마다 차를 세워 행인에게 길을 물어야 했고, 디지털 카메라도 나오지 않아서 필름값이며 현상 인화비를 무조건 아껴야만 했던 시절이었다.

당시의 토말은 완전 낙후된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최고 오지였다. 사방으로 비포장 도로가 흔했고 주변의 주택이며 창고 건물들이 대부분 슬레이트 지붕이었다. ‘여기도 우리나라인가?’ 싶었을 정도로 서울이나 부산이나 심지어 제주도에 비해서도 형편없어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까짓 태백이나 정선과 비교해 보아도 정말로 토말보다는 낫지 싶었을 정도였다.

그에 비하자면 지금의 두 번째 토말여행은 그야말로 최신식 디지털 여행이라 할만하다.

핸디폰 내비게이션이 캠핑장 입구까지 안전하게 데려다 주지, 비포장 도로는 찾아 볼 수가 없지, 디지털 카메라는 필름값 현상 인화료 걱정에서 완전 해방시켜 주었지, 거기다 하나로 마트가 사방에 널려있다시피 하여 짐 걱정을 팍 줄여주었지, 카페며 맛집이며 빼어난 명소가 사방에 즐비하지, 캠핑장 시설이 과거에 비하면 가히 천국의 별장 수준이니, ‘아서라. 더 바래서 무얼 하겠느냐? 이미 넘치도록 족하다고 높은 분께 아뢰어라.’

거기다가 호남 고속도로에 오르고 나니 거짓말처럼 쏟아지던 폭우가 딱 그치면서 간간이 햇살까지 내려 비추는 것이 아닌가.

‘이번에도 어김없이 날씨 요정이 우릴 찾아오셨나봐?’

'당근이지!'

그런데 말이다.

토말(土末)이란 곳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찌 이리도 멀더란 말이냐? 제주도나 울릉도 보다도 더 멀게 느껴지는 것은 도대체 왜일까?

분명 육당 최남선 선생께서는 저서 <조선상식문답(朝鮮常識問答)>에서, 한반도의 남쪽 끝인 토말(土末)에서 한양까지가 천 리요, 다시 한양에서 함경도 온성까지가 2천 리라서 우리나라를 3천 리 금수강산이라고 적어놓으셨다. 그렇게 보자니 토말이 분명 한반도 끝자락에 걸려있는 우리 영토인것은 분명한데 참으로 멀게만 느껴지는 것이 제정신으로 자청해서 찾아갈 길은 도무지 아니다 싶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역사속에서 여기 토말을 찾았던 사람들 대부분이 이순신 장군처럼 나라의 부름으로 군역과 전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찾아왔거나, 조정에서 탄핵을 당해 겨우 죽임을 면하여 유배 온 사람들이 태반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태생적으로 남도에 태어나지 않고서 이곳이 마냥 좋아서 찾아왔다는 사람을 내가 눈을 씻고서도 찾아볼 수 없음이 바로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자체가 왕정시대였으니 어디 군주의 입장에서 먼저 한 번 생각해 보자.

어떤 이유에서건 정이 뚝뚝 떨어지고 꼴도 보기 싫다고 판단되면 그때는 가차없이 참수형이나 사약을 내렸을 것이다.

남의 이목이 있어서 차마 사약은 내리지 못하지만 다시는 보고싶지 않다고 생각되면 제주도나 함경도로 유배를 보내버리고 나서 싸그리 잊어버리면 그만이다고 판단해 곤장을 쳐서 쫓아냈으니, 살아서는 다시 한양에 돌아오지 말라는 군왕의 깊은 속내가 담겼것다.

내치자니 아깝고, 그냥 넘겨버리자니 죄가 분명 적지않다 생각되면 토말이나 함양이나 거제도와 같은 인근의 외딴 섬으로 유배를 보낸다. 시간을 두고 다시 생각해 보고, 유배지에서 반성의 기미가 보이면 언제든 다시 불러 쓰면 되겠다 싶어 망설여질 때이다.

반대로 쫓겨나는 선비의 입장에서 보면, 사약은 가문의 명예가 박살이 나고 혈통이 단절되기 십상이니 절대 피해야 하겠고, 제주도나 함경도는 거의 저승길이나 마찬가지라 생각했을 것이고, 한양에서 가까운 곳일수록 언제든 부르시면 되돌아간다는 나름의 희망이 있었지만, 새재(조령)나 추풍령이나 아님 북쪽의 철령을 넘고 나면 억장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도성과 권력으로 되돌아간다는 희망은 지극히 미미하고, 멀고 먼 유배지에서 선비가 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었을테니 말이다. 죄인 처지에 말타기를 하고 등산을 하고 낚시를 하고 골프를 치고 여행을 다닐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양반 처지에 논밭 일을 하고 저자거리에서 장사를 할 수도 없음이요. 양반의 체통이 곧 살아있음의 증표였으니, 가진 것은 남는 시간뿐이요, 없는 것은 돈과 권력이니 매사가 부질없음 뿐이다. 그러니 울분을 삭이며 군주께서 다시 불러주시기를 고대하며 궁궐이 있는 북쪽 하늘을 향해 멍때리기를 일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적어도 한동안 지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느 책에선가 ‘왜 동토의 나라 러시아에 유독 대문호가 많이 태어났는가?’ 하는 사설을 읽었던 적이 있다. 그 이유는 무지무지 긴 겨울과 긴 밤 때문이라고 했다. 춥고 긴 겨울밤에 남아도는게 시간뿐인데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으로는 오만가지 사색과 상상이 무한대로 가능하고 그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서 무작정 긴 장문의 글을 쓰는 습관이 점차 생활로 변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마침 남도로 유배 온 선비들의 처지도 꼭 그랬다.

넘쳐 나도록 남는 시간에 도성에서의 양반 생활을 매일 회상하다가는 금방 정신병에 걸려 단명하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북쪽 하늘을 보며 허구한 날 간절하게 정성을 다해 예를 올려보았자 두세 달 지나면 이내 지치기 마련이다. 그새 군왕은 새로 등과한 신진 관료들과 허니문을 즐기고 있을테니 말이다. 양반의 체통은 지켜야 하고, 가진 것은 없고, 남는 것은 온통 무료한 시간뿐이니 이거야 정말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 아니겠는가?

그러다 보니 평소 멀리 내쳤던 서책을 다시 가져다 읽게되고, 사색의 시간이 길어지니 정신이 맑아지고 학문의 정수를 비로소 다시 깨닫게 되었으리라. 하지만 이제와서 학문이 높아지고 깨달으면 뭐해? 쓸데가 어디에도 없는 것을? 그래도 지난날 한양에서 이름 꽤나 알려진 선비였다고 소문이 나서 이곳 낙후된 시골의 양반들이 자식들 과외공부를 좀 시켜달라고 쫓아오지 않았던가? 변방에서의 후학양성이라는 명분으로 양반 체통을 지키기는 하였지만, 적지않게 사설학원 강의를 통해 어느 정도 유배 생활의 무료함을 달래고 생활의 윤택함과 풍류를 누리는 새로운 한 방편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게 어느정도 생활의 안정과 정신수양을 터득하게 되자 점차 짬을 내서 작심하고 들어앉아 시를 쓰고 책을 쓰기 시작했다.

헤아리기 힘들 정도의 훌륭하고 엄청난 분량의 시와 서책들이 바로 그 시기 유배지에서 만들어지고 쏟아져 나왔다. 하나같이 더없이 귀한 우리 문화의 고귀한 유산들이다.

그런데 말이다. 이 양반들이 만약에 한양에서 아무일 없이 그럭저럭 벼슬 생활을 계속했었더라면 절대로 이런 소중한 작품들을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가진 게 전부 남아도는 시간뿐인 유배지에서의 백수 생활 덕분에 탄생하게 된 것이 바로 유배 문학이다. 곱고 순탄하게 한양 벼슬생활 하면서는 죽어도 이런 생각할 이유가 없고 이런 작품을 쓸 시간도 없다. 마시고 취하고 끼리끼리 모여서 붕당 싸움질이나 했을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자고로 훌륭한 군주란 학문과 덕망이 깊은 관료를 골라 없는 죄를 만들어 씌워 유배를 보내서 후학을 양성하고 훌륭한 책을 많이 쓰도록 자주 쫓아내는 사람이 훌륭한 군주의 최고 덕목이 아니었을까? 이래서 훗날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이 생겨난 것일까?

그렇다면 어디 세종 임금은 누구 누구를 어디로 귀양 보냈지? 그때 나온 시와 서책이 무엇이 있지?



아무튼 토말(土末)의 역사에는 그런 과거사가 짙게 스미어 들어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남도의 멋과 정취가 되었고 맛 또한 거기에서 나왔다.

어딘지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있었고, 진한 아쉬움으로 남은 우리들의 첫 토말여행은 오래도록 마음 한구석에 허전함으로 간직되었다가, 그 덕분에 이번에 기어코 그곳으로 다시 발걸음을 향하게 하고 말았다.

두륜산에서 케이블 카를 타고 올라가 남도의 겨울을 만끽 했었다.

유교 사회를 추구한 조선시대 오백년 동안에도 한국 불교의 전통과 맥을 이어갈 수 있게끔 휴정스님(서산대사)께서 선교 양종의 대도량으로 중창하신 대둔사(大芚寺)는 커다란 충격으로 내 가슴에 남았다.

백제의 불교가 인도로부터 직접 들어왔다는 이야기에 연관된 미황사(美黃寺)는 조금은 황량해 보이는 듯한 애잔함이 저절로 묻어나는 아름다움을 간직한 사찰이었다. 내가 평소에 중창되기 이전의 강원도 고성 건봉사(乾鳳寺)를 최고의 사찰로 마음에 담고 살았는데, 화려하고 웅장함으로 중무장시킨 불사 이후로는 발길을 끊고 말았다. 처음 건봉사를 갔던 날의 느낌이 미황사를 보는 순간 되살아났다. 가슴 가득 어떤 울림이 미황사 곳곳에서 느껴졌었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찾은 남도 여행에서 미황사와 대둔사를 방문해 보고 나서는........ 다시는 이들 사찰을 찾아가보고 싶다는 마음을 접어 버렸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차차 이야기하기로 해야겠다.

그리고 나서 곧장 토말을 방문했었다.

바닷가 비탈 벼랑길을 조심스레 한참 지나서 겨우 삼각뿔 형태의 뾰족탑을 만났다. 토말탑은 바다를 향해 꿈을 싣고 나아가는 배의 돛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설명문이 적혀 있었다.

그 지난 여행이 정확히 몇 년 전이었는지는 새삼 기억에서조차 가물가물하다.

갈두산 정상의 봉수대 터에 건설된 지금의 멋진 전망대는 당시에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었다.

나주를 지나면서부터 교차로마다 표지판에서 <토말>을 찾았었다. 행인을 붙잡고 <토말>로 가는 방향이 어딘지를 수도 없이 물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남도자락 도로 표지판의 어디에서도 <토말>을 찾을 수가 없다.

심지어 음성으로 안내까지 하는 내비게이션에서 조차도 <토말>이라는 지명은 사라지고 없다.

이제 <토말>은 인터넷 검색창에서 맛집을 찾을 때만 등장한다.

아스라한 기억속의 <토말>은 언제인가부터 <땅끝>으로 변했다.

‘땅끝마을’ ‘땅끝 탑’ ‘땅끝 전망대’ ‘땅끝 오토캠핑장’ 등으로 모두 바꿔졌다.

북위 34°17′21″, 동경 126°31′22″에 해당하며, 해남반도의 끝이었던 <토말>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땅끝>이 지금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땅끝’의 한자 표기를 우리말로 바꾼 것이라고 하지만, 내 가슴에는 왠지 아련한 과거속의 ‘토말’이라 불리던 추억이 정겹고 그립다. 그저 나만의 생각과 느낌일테지만 말이다.

지금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에 있는 한반도의 최남단에 해당하는 곶(串)의 지명은 분명 ‘땅끝’이다.

현지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로는 ‘땅끝’의 본래 지명은 ‘지말(地末)’이었다고 한다. 할아버지 때 까지만 해도 그렇게 불렀었단다. 뾰족탑 자리에 일제시대까지 커다란 자연석에 ‘地末’이라는 글씨가 음각되어있어서 실제로 그렇게 불렀단다. 그런데 6.25 전쟁이 지나면서 보니 ‘地’자의 오른쪽 획이 지워지고 ‘土’자만이 남아서 그때부터 ‘토말(土末)’ 이라 바꾸어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다시 지금 그 자리엔 ‘땅끝’이라고 커다란 글씨가 새겨진 자연석이 놓여있다. 2008년부터 행정명에 의해 모든 명칭이 ‘땅끝’으로 개정된 것이다.

어디 그뿐이었던가? 그 시절엔 지금의 대흥사(大興寺)도 대둔사(大芚寺)란 사찰의 간판을 달고 있었다. 그 또한 차차 여행을 통해 이야기하게 되리라.

우리는 나주를 지나 담양에서 내렸다.

담양의 소쇄원((瀟灑園)을 이번 여행의 첫 목적지로 삼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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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의 소쇄원(瀟灑園)을 ‘우리나라 최고의 정원’이라고 감히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 해도 ‘대한민국의 정원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서 소쇄원을 빼고는 이야기 자체가 불가능해 진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이번 여행의 주요 목표가 토말 지역의 문화유산을 돌아보는데 주안점을 두고 계획한 와중에, 여행의 초입에 토말과는 조금 거리가 떨어진 담양지역의 소쇄원을 굳이 여행의 시작으로 추가하였다.

계획을 세우기로는 토말(해남지역) 인근의 녹우당(綠雨堂. 윤선도 유적지). 보길도 부용동(윤선도 원림). 다산초당(茶山草堂). 진도 운림산방((珍島 雲林山房). 백운동 원림(白雲洞 園林)을 필수로 하고, 거기에다 주어지는 여건에 따라 대흥사(大興寺)와 미황사((美黃寺)와 도솔암(達摩山兜率庵)을 비롯한 남도의 멋과 정취가 가득 서려 있는 문화유산을 찾아가 보기로 작정하고 나선 일주일 기간의 짧지도 만만치도 않은 여정이었다.

대충의 계획이 이러하였으니 그 여정에 소쇄원을 빼놓고는 진정한 남도 정원의 멋과 정취를 헤아려보고 느껴보기에 허점이 너무 크다고 생각되어져서 아예 여행의 시작을 담양을 경유하는 것으로 잡았다.

담양(潭陽)을 간다고 하니 아들은 대번 죽녹원(竹绿苑)을 근자에 다녀왔는데 무척 좋았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하지만 아빠의 마음속엔 온통 소쇄원((瀟灑園)뿐이니 어찌하랴. 다른 일정이 이미 가득 잡혀있는 상황에서 어렵게 선택한 소쇄원이었는지라, 혹여 훗날 다시 담양을 가게 되면 그때는 죽녹원을 꼭 찾아보리라 다짐하며 소쇄원으로 방향을 틀었다.


<조선의 3대 정원>이라는 제목으로 역사적 문화유산을 다루는 기사와 방송을 일상속에서 자주 접하고는 한다.

그런데 주재하는 사람에 따라 간혹 지목되는 <3대 정원>이 달라지기도 한다. 어찌 당연하지 않겠는가? 사람마다 대상을 바라보는 가치관과 주관적인 시선이 다 다를 수 있고, 또 그럴 수 있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참으로 이상하게 담양의 <소쇄원(瀟灑園)>만은 언제나 당연하다는 듯이 첫머리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한마디로 요지부동이다. 늘 이름을 올리고 있으니 ’소쇄원이 조선의 최고 정원이다‘라고 감히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조선의 정원을 이야기하면서 소쇄원을 빼놓고는 그 토론의 장 자체가 맹탕이다’라는 뜻일게다. 누군가에게는 ‘소쇄원을 3대 정원으로 꼽는 것은 당연하고 하겠지만, 그렇다고 조선 최고의 정원은 아니다’라는 주장도 당연히 존중되어야 한다고 본다. 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조선 최고의 정원이 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글을 쓰고 있는 나까지도 ‘소쇄원을 최고라고 하기에는 좀.........?’하는 속내가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소쇄원(瀟灑園)>은 조선 시대를 넘어 우리나라 정원의 역사를 통털어 대표하는 소중한 으뜸 문화유산인 것만은 분명하다.





소쇄원(瀟灑園) - 원림(園林)으로의 초대.



소쇄원이 이미 너무나 유명한 관광명소이기 때문인지 의외로 내 주변의 사람들 대부분이 소쇄원의 유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양산보(梁山甫)의 스승인 조광조(趙光祖)가 조선 사회에서 일대 개혁을 일으키다가 사화를 입어 사약을 받고 죽게 되자, 원통함과 울분을 삭이지 못해 낙향하여 이곳에 소쇄원을 짓고 은거에 들어갔다는 사실까지는 줄줄 외우고들 계셨다.

이 대목에서 대부분의 선비들은 당쟁의 결과로 화를 당하거나 모함을 당해 유배를 가기 일쑤고, 또 그런 와중에 당파싸움에 환멸을 느껴 스스로 벼슬을 버리고 시골이나 고향으로 낙향하여 유유자적 은둔생활을 하면서 선비 정신을 계승하는 것을 충분히 존경받을만한 선비의 길이라고 여겼다.

양산보가 소쇄원을 짓고 이곳에 은둔하게 된 것도 그와 같은 경우에 해당하기는 하지만, 한가지 짚고 넘어갈 사항은 양산보는 벼슬이나 관직을 버리고 낙향한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양산보는 벼슬에 오르거나 관직에 나가보지 못한 사람이다.

연암 조광조의 문하로 들어가 학문에 힘썼으나, 1519년(중종 14)에 현량과(賢良科)에 응시하여 낙방하였다. 하지만 스승이 실세 중에서도 최고 실세였는지라, 조광조의 제자인 양산보가 안타깝게 낙방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중종 임금이 친히 그를 불러 위로의 말과 함께 지필묵을 하사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후로는 양산보의 빼어난 재질을 염려한 훈구파들의 노골적인 반대로 끝내 관직에 나가지 못했으니 이래저래 시험운이나 관운은 타고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당대에 스승인 조광조의 권세라면 판서는 아니더라도 고을 현감 정도는 그냥 발령장에 사인만 해주면 되었을 법도한데 말이다. 어쨌거나 양산보는 한양에 머물며 조광조 문하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마른하늘에서 갑자기 날벼락이 떨어진 꼴이 되었다. 스승 조광조가 사약을 받고 죽었다.

출세는 이미 모조리 물건너가고 말았다.

자칫 죄인 패거리로 몰려 멸문지화를 당할지도 모르는 판이었다.

살자면 서둘러 야반도주를 해서라도 도성에서 멀리 달아나야만 했다. 더불어 서슬이 시퍼런 훈구파의 눈초리와 관심에서 멀어지고 지워져야 했다. 그것이 목숨을 부지하는 유일한 방편이었다.

그래서 양산보는 본능에 따라 아주 멀리 발걸음을 옮겼고 덕분에 기묘사화(己卯士禍)의 피바람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살아남은 조광조의 후학중에서 혹시나 누군가가 대성하여 다시 조정을 장악하지 않는다면, 그때까지 도성 근처에 다신 얼씬거리지 말아야 그나마 천수를 누릴 수 있다. 혹시나 천지개벽으로 다시 조정을 재집권하게 된다면, 그때는 달려가서 무조건 철저하게 복수를 해야한다. 삼족이나 구족을 죽이고 멸문지화를 일으켜서라도 스승의 원한을 풀어야 올곧은 선비라 할 수 있다. 사실은 그것이 곧 살아남은 자들의 출세가 되고 부귀영화가 자신들 차지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던 조선 시대 붕당정치가 탄생시킨 당파싸움의 본질인 것이다. 그럴싸한 명분을 만들어 내세우고, 그 때문에 반목하고 논쟁하고, 네가 죽어야 내 팔자가 활짝 핀다는 전제하에서 체면과 체통을 걸고 죽자사자 싸움질을 일삼는 것이 미덕이며 가치 기준이었던 양반님들의 잘난 선비 노릇이 바로 그런 시대적 작태를 연출했던 것이다.

사화를 피해 한양에서 서둘러 빠져나온 양산보는 고향에 은거하며 오랜 시간을 두고 소쇄원을 조성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양산보는 소쇄원에서 태어난 것일까? 소쇄원이 그의 생가이자 고향인가?

아니다.

양산보의 고향은 전라도 광주다.

본래 나주에 살던 부친이 이런저런 이유로 처가인 광주 동각면(東角面) 창교촌(滄橋村)으로 이사하여 살던 중에 그곳에서 양산보가 태어났다. 이후에 다시 창평(昌平) 내남면(內南面) 창암촌(蒼巖村)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성장하였으며, 15세가 되어 한양으로 상경하여 조광조의 문하에서 소학(小學)을 학습했다.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스승 조광조가 사사되자 다시 창평으로 낙향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소쇄원은 창평에 조성되었어야 한다. 그런데 사실은 창평 소재지에서 약 10km 정도 떨어진 지곡리 지실마을에 조성되어 있다.

필자인 내가 관심을 가진 것은 그가 자신의 고향에 내려와 있던 집을 개축한 것이 아니라, 이삼 십리나 떨어진 지실마을을 굳이 택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시작되었다.

양산보 역시 윤선도 못지않게 풍수지리에 능했다는 결론을 얻었다.

고향 창평에 돌아와 나름 살 방도는 찾았고,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지만, 주변환경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을것이라 생각된다. 하여 인근을 살피고 또 살피던 중에 배산임수 지형에다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골짜기 물이 흐르고, 대나무 숲이 우거지고 암반이 예사롭지 않은 풍수지리상의 명당 터를 발견하였으니, 그곳이 바로 지금 소쇄원이 조성된 지실마을 뒷산이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자고로 선비에겐 선비로서의 품위와 품격이 반듯이 따른다. 그것이 꼭 대궐 같은 집에 살며 부유함으로 도배할 필요는 없겠지만, 선비라면 갖추어야 할 필수 덕목을 갖춘다면 부와 권력과 명예 따위는 어느 정도 충분히 만회할 수가 있는 것이다. 서책을 가까이하고, 자유토론에 능하고, 풍류를 어느 정도 알고, 산수 좋은 곳에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단칸방 하나라도 있다면 능히 선비로서 존경을 받으며 양반 행세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양산보는 고심 끝에 지곡리 지실마을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이만하면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명당이었다. 이제 그 자리에 올 곳은 선비 정신을 담은 누각을 짓고 거처를 마련해 성리학을 바탕으로 어느 정도 경지에 올라 명망이 있는 선비들과 교류하면서 남은 여생을 보낼 수 있다면 굳이 관직에 나아가 출세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양산보(梁山甫)가 이곳에 정착해 은둔생활(隱遁生活)을 지속해 가면서 오랜 시간에 걸쳐 대략 1520년부터 1557년 사이에 손수 조성한 것이 소쇄원이다. 그리고 그 공사는 양산보가 떠나고도 그의 후손들에 의해 계속 이어져 내려갔다. 건축이야 전문가가 필요했을 것이고, 나머지 조경이나 담장 공사는 아마도 가족들이 손수 하나하나 손으로 직접 해나갔기에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까 싶다.

꼭 선비라는 틀에 국한 시키지 않더라도, 공부를 좀 했다거나, 벼슬살이를 좀 해서 관직이 놓았다거나, 부정축재든 아니든 돈을 좀 모았다고 하면 누구라도 경치가 빼어난 곳에 정자나 누각을 짓기를 열망했다. 학문을 이루고 풍류를 아는 선비라면 사방의 절경지마다 정자 몇 개씩은 가지고 있어야 비로소 선비나 학자로서의 품계가 높아지는 척도라고 여겼을 정도였다. 일례로 압구정이 누구 것인지 왜 거기에 세웠으며 어떻게 쓰였는지 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그렇게 따지자면 정자나 누각은 소유권자의 심성과 의지가 고스란히 담기기 마련이다. 선비의 체면과 체통 위에 세워지는 가장 큰 재산이자 대외명분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적어도 양산보의 경우에는 그런 가치관의 저변이 조금 남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모든 누각은 주인의 생각과 열망을 반영해 만들어졌다. 당연히 그 쓰임새나 목적은 주인의 생각과 일치한다. 하지만 선비라는 고귀한 인품 뒤에 감추어진 주인이 누각을 지은 뜻이나 까닭을 읽어내기란 꽤나 어려운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일찍 짐작되는 바가 있기는 하지만, 혹여 양반 체통에 누가 될까 심히 염려되어 표현을 자제하려 한다. 내게도 파평 윤씨의 양반 체통이 분명 내 몸속에 스며들어 있을것이기 때문이다.

양산보 선생은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 “어느 언덕이나 골짜기를 막론하고 나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니 이 동산을 남에게 팔거나 양도하지 말고, 어리석은 후손에게 물려주지도 말 것이며, 후손 어느 한 사람의 소유가 되지 않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내가 정성을 다해 손수 일군 정원이니 누구에게나 보탬이 되도록 늘 열어놓고, 어리석은 후손 하나로 하여 망가지거나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 훼손되는 일이 없기를 염원했던것이다. 더도 덜도 말고 양원(梁園)으로 길이길이 보전되기만을 바랬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앞서 실천하고자 한 선각자였다고나 할까?

양산보는 후반부 생을 다 바쳐서 소쇄원을 조성했고, 세상은 그의 소망대로 이 작고 소박한 양산보의 원림(梁園)을 기꺼이 사랑하고 아끼며 유지해가며 대대로 칭송을 그치지 않았다. 양산보의 바람대로 모두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이 소쇄원의 특별함이 아닐까 싶다.

더하지 않아도 좋고, 덜어내지 않아서 더욱 좋다.

소쇄원(瀟灑園)이야말로 한국인의 고유정서에 가장 잘 부합하는 원림(園林)의 표상이며 모범이 아니겠는가.

양산보 선생은 물론 선대로도, 그리고 후대에서도 관직에 나아가 벼슬아치로 크게 출세를 한 사람을 찾기 어려우니 당연히 가세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처가와 주변의 도움을 받았기에 소박하나마 이런 정원을 조성할 수 있었으니 그 또한 적지 않은 복을 받았음이라. 거기에 양산보 선생이 평소에 성리학을 연구하고 몸소 실천하고자 노력한 유학자였으며, 더하여 노장사상이나 풍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문을 꾸준히 탐구한 사람이었기에 그가 터득한 모든 사상을 집대성하여 이렇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정원을 조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늘을 덮은 대나무 숲길을 걸어 오르노라면 대숲이 끝나면서 소쇄원의 전졍이 눈앞에 가득 펼쳐지기 시작한다. 골짜기로 흘러내리는 계곡 건너로 제월대가 모습을 드러내고, 눈앞에 정원과 산을 구분 짓는 담장 옆으로 초가지붕을 덮어쓴 대봉대가 나타나면서 도대체 이제 시선을 어디에 먼저 두어야 할지 걱정하는 마음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어디에 시선을 둔들 어떻하랴.

마음과 발걸음은 어느새 소쇄원 영내에 이미 한참이나 들어선 것을.

와!!!

이제야 비로소 알겠다.

사람들이 왜 소쇄원, 소쇄원 하는지를 비로소 알것만 같다.

'맑고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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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쇄원의 배치를 목판(木板)으로 새긴「소쇄원도(瀟灑園圖)가 전해지고 있는데, 소쇄원은 각각의 기능과 공간의 특색에 따라 애양단구역(愛陽壇區域)과 오곡문구역(五曲門區域)과 더불어 제월당구역(霽月堂區域)과 광풍각구역(光風閣區域)으로 구분되어 있다.

이들 구역의 경계 가운데로 뒷산과 까치봉 사이에서 흘러내리는 계류가 사시사철 물소리를 내며 흘러간다. 그리고 이 흘러내리는 계류를 중심으로 사다리꼴 모양으로 소박한 정원히 형성되어 있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상태를 최소한으로 훼손하는 계획하에 조성된 정원은 굴곡진 경사면을 층계별로 나누어 계단식으로 조성하였는데, 이런 지형적 비대칭을 자연스레 하나의 큰 틀에서 조화를 이루도록 공을 들인 전형정인 산수원림(山水園林)이다.

처음 마중나온 기와지붕 아래를 흙으로 사이 메움을 한 직선적인 흙돌담이 대자연 속에서 그나마 정원을 품에 안은 집과 외부의 자연 사이에 경계가 있음을 은근하게 드러내 준다.

소쇄원에는 대략 두 개의 담장이 있어 나름으로 외부와 내부, 그리고 제월당과 광풍각 구역을 구분 짓고 있기는 하지만, 처음 막 나타나는 담장이 그대로 열린 채 훤히 뚫려 있는 느낌이고 보면 아무 때고 누구에게나 찾아오라고 손님을 늘 기다리고 있는 사랑채의 느낌이라고 해야하겠다.

대숲을 지나면 산자락에서 흘러내려온 듯 여겨지는 담장이 나타나고, 오른쪽으로 가면 뒷산이나 까치봉으로 향하는 숲길이고, 담장을 끼고 왼편으로 가면 소쇄원의 안채로 들어가는 초입인지라, 여느 양반댁 초입이라고 생각하면, 아무리 궁색하기로서니 그래도 싸리문이라고 하나 서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떨쳐 지지 않는다. 그랬어야 아무리 항시 개방된 정원이라 해도 엄연히 누군가의 가택이기에 헛기침으로 연통이라도 넣어보고, 갓끈이라도 당겨 잡아서 최소한 손님의 예라도 갖추었을 터인데 말이다.

여기서부터가 애양단구역(愛陽壇區域)이 시작된다고 하겠지만, 이곳의 터줏대감은 아무래도 몇 발짝 앞 계류가 작은 폭포를 이루며 쏟아져 내리는 비탈 암반 위에 둥지를 튼 멋진 초가 정자 대봉대(待鳳臺)가 나그네의 방문을 버선발로 뛰쳐나와 맞이해 준다.

정자 옆으로 벽오동 나무가 장성한 것을 보니 가히 봉황이 찾아와 내려앉아 쉴만한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봉황은 천 리를 날다가도 벽오동나무가 아니면 내려앉아 쉬지를 않고, 대나무 열매(죽실)만을 먹고 산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여기 소쇄원이야말로 봉황이 찾아와 잠시 날개를 쉬면서 선비들의 시문을 듣고 풍류를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였을 것이다.

이곳까지 버선발로 양산보 선생이 달려와 문객을 맞이하고 대봉대에서 차를 내어 반가움을 표했을 것이다. 사나흘 머물던 문객이 떠나고자 하면 여기까지 배웅나와 헤어짐의 아쉬움에 대봉대에서 또 송별주를 주거니 받거니 했을 것이다.

소쇄원을 조성하면서 양산보 선생이 말씀하시길, 송나라 시대 세상의 혼탁함을 경험한 주자(朱子)가 숭안현(崇安縣) 무이산(武夷山) 계곡의 경승지인 무이구곡(武夷九曲)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조용히 은거하면서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 속에서 새로운 깨달음과 기쁨을 얻었다고 하면서 자신 또한 그처럼 살기를 열망한다고 했다. 이는 결국 주자(朱子)의 무이정사(武夷精舍)가 곧 양산보(梁山甫)에게는 소쇄원(瀟灑園)이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대봉대에 올라 자리를 차지하고 가만히 주변을 이리저리 살펴보면, 마치 시간이 잠시 멈춰버린 듯한 느낌이 들고 새소리도 물소리마저도 잠시 숨을 죽인 듯 고요와 평온이 살며시 찾아온다. 그 잠시의 평온함은 오랜 삶의 부대낌에 지치고 상처 입은 심신을 추스르고 치유며 스스로 정리할 수 있는 짬과 공간을 우리에게 내어주는 것만 같다.

‘맑고 깨끗하게.

소쇄원에 현존하는 3개의 건축물 중에서 가장 먼저 손님을 맞이하는 건물이 바로 유랑하는 선비가 쓰고 온 삿갓을 닮은 초가지붕을 얹은 대봉대다.

대봉대에서 소쇄원의 정취가 그득 담긴 차를 한잔 마시고 나서 다시 흙 담장을 따라 소쇄원의 내원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애양단’(愛陽壇) 구역이다.

그런데 이렇듯 소쇄원의 외원에서 갈라서 내원으로 들어서는 지점이면 어디에든 대문은 아니더라도 흔한 싸리나무 사립문이라도 하나 서 있을 법도 하건만 아무리 눈을 씻고 사방을 둘러보아도 문은 보이지 않고 멋들어지게 산등성이에서부터 길게 흘러내린 듯한 흙 돌담이 보이는 전부다.

이곳의 지형을 잘 아는 풍수지리를 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소쇄원의 지형이 지네의 형국이기 때문에 담장을 쌓아서 지네의 강한 기운을 어느 정도 누르고자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가 하면 소쇄원 반대편에 들어선 '닭뫼'라는 마을에 대해서도 지네와 연관성이 있다고 전한다.

더하여, 이 대목에서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가자면, 양산보 선생이 조성한 소쇄원과 지금의 소쇄원 사이에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자면, 지금은 하늘을 가린 빼곡한 대나무 숲 사이로 난 외길을 따라 쭈욱 올라오면 소쇄원의 모든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여기 대봉대가 나타나지만, 양산보 선생이 조성한 당시의 소쇄원에 오르는 길은 숲사이로 또는 도랑을 따라 서너 갈래의 통행로가 버젓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아무 때고 아무라도 아무 길로 편하게 오갈 수 있게 부러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대봉대를 지나 애양단 근처에 자그마한 사립문이 하나 있어서, 비로소 소쇄원의 내원에 들어선다는 구분을 지었다고 한다. 더하여 오곡문의 열려진 담장에도 문이 하나 있어서, 우물과 계류를 이용하고자 할 때 여닫게 되어있었다고 한다. 세월의 풍파에다 임진왜란 같은 전란에 화재로 대부분 소실된것을 후대에 복구하는 과정에서 착오와 오류도 다소 있었고, 제월당 옆의 공터에 조성되었던 고암정사(鼓巖精舍)와 부훤당(負暄堂)은 지금으로서는 아예 흔적조차 찾아볼 수가 없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흙돌담의 구석으로 ‘애양단’(愛陽壇) 이라 적힌 글자판이 박혀있는데 바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의 글씨다. 옆에 바로 옆에 나란히 걸려 있다시피 한 오곡문(五谷門)의 글씨 또한 우암 선생의 글씨다. 우리나라 사림을 대표하는 대 유학자이자 명필이신 우암 선생의 글씨라 하여 유심히 살펴보고 또 들여다보지만....... 오호라! 통제로고........ 어떤 것이 잘 쓴 명필의 솜씨인지를 분간하지 못하는 까막눈 처지이고 보니........ 누가 보고 눈치챌세라 서둘러 허겁지겁 자리를 옮기고 말았다.

우.암.선.생.님.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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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보가 소쇄원을 조성하는데 크게 기여했고, 그 덕분에 아마도 소쇄원을 가장 많이 드나든 손님으로는 담재(湛齋) 김인후(金麟厚)가 아니었을까 싶다. 아마도 그는 아예 이곳에 눌러앉아 살았던 듯 싶다.

그런 김인후가 명종 3년(1548)에 소쇄원의 빼어난 정경에 대하여 오언절구(五言絶句)의 형식을 빌어 48영(詠)이란 시(詩)를 지었고, 후대에 전해지고 있다. 그중에서 애양단(愛陽壇)이란 제목의 시에 양단동오(陽壇冬午)’의 시제를 따서 송시열이 ‘애양단’(愛陽壇)‘이라 붙인 것이다

애양단은 한겨울에도 따뜻한 햇살이 잘 비치는 양지바른 곳으로, 그곳 담장이 꺾어지는 자리에 커다란 동백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그 자리에 동백이 서 있음 또한 그냥 심었을 리는 전무하다. 정원에 심어진 나무들과 정원과 돌덩이 하나하나에까지 나름 주인인 선비의 깊은 속내와 그가 추구하는 이상을 담았던 것이다. 동백나무는 효(孝)를 담고 있고, 매화나무는 선비의 기상을 뜻하고, 측백나무는 선비의 학문에 대한 성취도를 상징한다.

우암 선생의 글자판에 적힌 애양(愛陽)은 화사하고 따사로운 햇살 아래서 차분히 하루하루가 쉬이 지나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을 담고 있다. 늙으신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얼마 남지 않았을 여생을 걱정해 봉양하기 위한 시간을 아껴야만 한다는 간절함을 담았던 것이다. 결국 애양단은 효(孝)를 곱씹어 보는 지기수양의 장소였다.

동백나무를 한 번 지긋이 올려다보고 다시 내원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하면, 두 세걸음 옮기기도 전에 발치 앞에 흘러내리는 계곡을 건너는 다리 단교(斷橋)가 놓여 있다. 세속의 번거로움과 단절하겠다는 주인의 다짐이 서려있는 다리다. 그런가하면 애양단에서 굽어지며 뻗어나간 흑 돌담길은 이곳에서 담장도 돌다리를 타고 계류를 건넌다. 세속의 잡다한 것들은 아예 계류를 건널 엄두조차 허락치 않겠다는 기세다. 아니나 다를까. 계류를 건너자마자 허리가 싹뚝 잘린 듯 담장이 끊어지고 말았다. 산자락에서 있던 지형 그대로의 모습으로 언덕을 타고 내려오던 흙담장도 평지에 내려서자마자 역시나 허리가 잘린 듯 끊어지고 말았다. 두 담장의 잘린 공간은 사람 하나 겨우 드나들만 하다. 아주 옛날에는 이 잘린 허리에 아주 작고 허름한 사립문이 하나 매달려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전란 중에 불타 사라졌고, 복원 과장에서 이를 생략한 채 그냥 열린 쪽문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 열려진 쪽문 앞에 오암정(鼇巖井)이란 작은 우물이 있어 소쇄원에 머무는 사람들에게 식수를 제공했고, 앞쪽의 너른 너럭바위(鼇巖)에서 무더운 여름날이면 세수와 등목을 하고 빨래터로 사용했을 것이다. 애양단에서 여기 열린 쪽문까지의 흙담장 길을 오곡문(五曲門) 구역이라고 한다.

오곡문은 계곡의 물길을 자연 그대로 두기 위해 구멍을 내고 장대석 같은 자연석으로 담 밑을 받치게 하여 마치 담장도 사람처럼 다리를 건너가게 만들어져 있다.

이렇게 담장을 위해 만든 다리 아래를 통과해 흘러든 물이 정원을 흘러내리는 동안에 ‘다섯 번 갈지(之)를 그리며 대나무 숲 골짜기로 빠져나간다’ 해서 오곡(五曲)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본래의 자연 그대로의 모습에 최소한의 인공만을 가미해 조성하고자 노력한 소쇄원이었지만, 적어도 이 물줄기를 다룸에 있어서만은 본래의 원칙을 어기고 거의 모든 것을 인위적으로 만들었다. 의도적으로 암반을 다듬고 물길을 틀어서 기어코 다섯 구비 물길을 냈다는 뜻이다. 다섯 번이나 휘돌던 물길은 마침내 낙차가 제법 큰 바위벼랑을 타고 절구처럼 생겨 움푹 파인 조담(槽潭)에 곤두박질치고 나서야 잠시 숨고르기를 하며 고였다가, 다시 고랑을 타고 흘러내려간다. 여기 조담에 고였던 물줄기의 일부가 나무 홈통을 타고 대봉대 아래의 연못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그 연못 옆으로 드러누워 달을 올려다보던 너럭바위 광석(廣石)이며 거문고를 타며 풍류를 읊던 바위(榻巖)가 있다.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참으로 절묘한 자연과 인공의 조화’가 아닐까 싶어진다.

오곡문을 지나 좀 더 내원으로 들어가는 발걸음의 우측으로 남달리 신경을 써서 만들었음 직한 매대가 보인다. 매화를 주로 심었다 하여 매대(梅臺)라고 불렀으면, 그 위로 흙담장의 중앙에 길게 글자판이 붙어있는데, 거기에는 ‘소쇄처사 양공지려(瀟處士梁公之廬)’라고 적었다. 양산보 선생 사후에 그의 5대손인 양택지가 우암 선생을 찾아가 청하여 얻어 온 글이라고 전한다. ‘이곳은 처사 양산보 선생이 기거하신 소쇄원입니다’ 정도로 해석을 하면 혹 누가 되지는 않을까? 더불어 이와 함께 지금 걸려있는 제월당(霽月堂)과 광풍각(光風閣)의 현판 글씨를 함께 얻어왔다고 한다.

비로소 이제야 정말로 처사 양산보 선생 집의 대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왔다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비로소 소쇄원의 안채에 들었다 싶었을 때, 그때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 바로 제월당이다.

양산보 선생은 주로 여기 제월당(霽月堂)에 거처하시면서 독서로 여생을 보내셨다.

송나라 시대 황정견이 주무숙이란 유학자의 사람됨을 논하면서 '흉회쇄락여광풍제월(胸懷灑落如光風霽月)'이라고 비유한 데서 연유하여 따왔다. 이는 ‘가슴에 품은 뜻의 맑고 맑음이 비 갠 뒤 부는 청량한 바람과 비 갠 하늘의 상쾌한 달빛과 같다’는 뜻이다.

자신의 거처를 제월당(霽月堂)이라 이름 짓고자 한 양산보 선생의 기품이 엿보인다.

'제월당(霽月堂) 이라? 이참에 내 방문에도 제월당(啼怴堂) 이라고 한 번 써서 걸어볼까?'


계절이 지나 매화꽃은 없지만, 매대斷橋의 걸려 있는 ‘소쇄처사 양공지려(瀟處士梁公之廬)’ 글자판을 통해 이곳이 양산보 선생의 거처가 분명하니 서둘러 안채로 발걸음을 옮겨보기로 한다.

소쇄원은 안채에 해당하는 광풍각과 제월상 주변으로 4단의 자연석 축대를 쌓아 오르내리는 작은 문 위쪽으로는 측백나무와 산수유나무와 느티나무를 심었고, 지금 보리수나무 열매가 빨갛게 한창 여물어 있다. 아랫단으로는 난초와 매화와 계절마다 다른 꽃들을 볼 수 있게 가꾸었다.

양쪽으로 만들어 놓은 4개의 돌계단을 오르면 마침내 은거한 주인이 조용히 독서와 사색을 즐기며 먹을 갈아 막역한 선비들과 서신을 주고받고 학문을 논하던 공간 제월당(霽月堂)에 도착한 것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주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섬돌이 닳도록 드나들었다는 당대의 내노라하는 문인과 학자들의 모습도 자취를 감추었다.

송순(宋純) 임억령(林億齡) 김윤제(金允悌) 김인후(金麟厚) 고경명(高敬命) 정철(鄭澈) 등, 당대의 기라성 같았던 문인들은 모두 자취를 감추었고, 천정에 내걸린 그분들의 편액에서 당시의 분위기를 짐작해 볼 수 있음뿐이다. 가히 담양을 중심으로 한 호남 가단(歌壇)의 중심 인물들이 자주 여기 소쇄원에 모여 시를 짓고 세상을 논했다. 더불어 수많은 시인 묵객과 학자들의 정신적 위안처가 되었고 풍류와 낭만의 상징 공간이 되었다. 그저 쉽게 말하기 좋은 대로 은둔처이자 은둔의 공간만은 아니었다.

잠시 비껴나 숨고르기를 하며 안타까움을 토로하긴 했어도, 도망쳐 숨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좀 더 꼭꼭 숨어서 아예 문을 잠궈버리던가, 울분을 성토하며 차라리 역린이라도 꾸몄을 것이다.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에 팔작지붕으로 된 간결하고 소박한 제월당(霽月堂)은 ‘비 개인 하늘 사이로 드러난 상쾌한 달’ 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 얼마나 멋진 표현인가?

검색창에 (제월당)을 한번 검색해 보라. 이땅에 얼마나 (제월당)이 많은지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사방팔방으로 내놓으라 하는 양반님들 폼잡고 허세 부리는 곳에는 널린 게 (제월당)이란 이름이다.

멋드러진 정자를 짓고 누마루에 걸터앉아 낙락장송이나 대나무 숲을 바라보고, 정자 앞을 흘러가는 계류의 물소리를 들어가며 차를 한잔 마시면서 성리학 교서를 펼쳐 들고 앉았노라면 무릉도원이 따로 있겠는가? 정자 처마 아래 제월당(霽月堂)이란 추사나 초의선사나 송시열의 글씨로 현판이라도 내걸었다면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소쇄원은 물론이고 이름난 누각 주위에는 유독 배롱나무가 많이 심겼다. 배롱나무는 여름에 피기 시작하여 가을이 한창 무르익을 때까지 붉은 꽃을 피운다. 세상의 꽃들이 열흘 이상을 활짝 피우기 어렵다고 하는데, 배롱나무는 무려 백일 동안 붉은 꽃을 피운다. 그래서 배롱나무의 다른 이름은 백일홍(百日紅)이다. 꽃봉오리 하나가 백일동안 피는 것은 아니지만, 수많은 꽃봉오리가 피었다 지면 옆에서 다시 꽃을 피우고 또 떨어지기를 백일동안 계속한다. 늘 계속 피어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작아보이지만 있을 것은 다 갖추었고 협소하거나 비좁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사방으로 훤히 열려있기 때문이다.

왼쪽의 한 칸은 간촐하게 들어앉아 서책을 읽고 글을 쓰기에 알맞은 공간이다. 온돌방에 다락까지 딸렸다. 그리고 우편의 두 칸은 마루다. 주변 경치를 둘러보고 자연의 바람을 쐬며 차 마시기에 그만일 것 같은 넉넉하게 열려진 공간이다. 저절로 가슴이 탁 트인다.

마루에 앉아 아래쪽 광풍각의 지붕을 내려다보며 지난밤에 찾아 든 과객의 동태를 짐작해 보는 것도 멋스럽겠지만, 열린 뒤쪽 문을 통해 내다보이는 뒤란의 풍경 또한 무척이나 매력적이다.

소쇄원의 가장 높은 곳에 세워진 제월당은 말 그대로 온전히 집주인만을 위한 고유의 공간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 주인은 아마도 무척이나 정적인 사람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전통적인 한옥 지붕의 처마 끝선이 자연스럽게 휘어 올라간 팔작지붕의 전형적인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제월당의 빼어난 매력 중에는 단연 대청의 창살문이 분합문(分閤門)으로 되어 있다는 점일 것이다. 분합문(分閤門)이라면 일단 여타의 문처럼 열어 재친 후에 밖으로 내밀어 들어 올려서 처마 밑 걸쇠에 매다는 형태의 문이다. 내놓으라 하는 사대부나 부자 양반의 별채나 유명한 정자와 누각에서는 거의 필수적인 건축양식처럼 많이 등장한다. 흔히들 ‘들어열림문’이라 부르기도 한다.

건물의 벽과 문 역할을 동시에 하며, 사용 방법에 따라 채광의 정도를 조절할 수 있고, 열린 개방감으로 최고의 멋진 풍경을 감상하기에는 이보다 더할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양반과 선비들의 사랑을 받았다.

누대에 앉아 ‘들어열림문’을 통해 내다보이는 소쇄원의 정취는 아마도 옛것 그대로일 것이다.

왜 이곳 정원에 대해 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이 ‘맑고 깨끗하다’의 의미를 담아 ‘소쇄(瀟灑)’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으며, 고봉(高峰) 기대승 (奇大升) 이 시를 통해 이곳 소쇄원을 노래한 그 깊은 뜻이 이제야 어렴풋이 이해가 된다.

소쇄한 원림이 유벽하고 / 瀟灑園林僻

청진한 지개가 유원하였네 / 淸眞志槩悠

꽃을 심으니 따뜻한 꽃잎이 열리고 / 栽花開煖蘂

물을 끌어대니 맑은 물결 부딪히네 / 引水激淸流

고요하고 가난한 것 싫어 아니하고 / 靜與貧非厭

한가로이 늙는 것 걱정하지 않았네 / 閒仍老不憂

어찌 갑자기 세상을 떠날 줄 알았으랴 / 那知遽觀化

슬프게도 흰 구름만 떠 있네 / 怊悵白雲浮

- 고봉전서(高峯全書) 고봉속집 '모인에 대한 만장' 가운데 첫수-

이제 제월당에 머물만치 머물렀으니, 주인 없는 집에 불쑥 찾아와 머물다 물러가는 처지로 이렇게 안채인 제월당까지 올라와 잘 머물다 가노라고 없는 주인에게 작별인사까지 하고 나서 섬돌 아래 돌계단을 내려서려니............ 문득 강하게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 있다.

그것은 처음 이곳에 들기까지 만났던 대봉대(待鳳臺)며, 애양단(愛陽壇)이며, 오곡문(五曲門) 뒤로 병풍처럼 길게 늘어서 있는 흙담장길이다.

대문도 없이 늘 열려있는 길을 왜 이리 삥 돌려 길게 만들었을까?

괜히 사람을 한참이나 발품을 더 팔아 힘들게 들어오라고 부러 만들었던 듯 싶은 생각이 든다. 문은 열어놓고서도 대뜸 들어서는 낯선 방문객이 조금은 얄미워서였을까?

하긴, 어쨌거나 그건 양산보 선생의 맘이고 그 속내 또한 선생만 아시지 않겠는가?


소쇄원은 자칫 거대하다던가 장엄하던가 웅장하다는 표현과는 사뭇 거리가 멀다 하겠다.

그런만큼 애초 여기에 이 정원을 조성하고자 한 주인의 전체적인 구상과 그에 따른 작은 디테일에 대해서는 어쩌면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열과 성을 다해 높은 완성도를 이루었을 것이다.

시작에서 끝까지 오로지 주인의 오랜 열망에 따른 디테일한 연구 결과에서 이루어진 소산물일 것이다. 그렇다고 혼자 고집을 부리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 그를 아끼고 사랑하고 기꺼이 오랜 시간을 함께하고자 한 벗들. 그들의 집단 지성이 하나의 어울림으로 어우러져 드러난 것이 소쇄원이라 할 수 있겠다.

울창한 대나무 숲 사이로 나있는 여러개의 갈래길 중에서 자신의 취향에 맞는 길을 통해 처음 담장에 이르고, 대봉대를 지나고 애양단을 만나고 오곡문을 지나 단교를 건너면 비로소 주인이 머물고 있는 제월당에 이를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이곳의 지형적 분위기상 길고 조금은 어두운 언덕길은 적지않은 긴장감과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단교를 건너면서 배롱나무를 비롯한 계절에 어울리는 꽃이 피어 있고, 밝은 빛과 함께 시원한 천상의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면서 시원한 물소리를 가녀린 듯 울려 퍼지게 만든다면, 그 감동과 거기에서 파생되는 느낌과 감흥은 가히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흔한 대문이란 것이 없기는 하지만, 주인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에 손님은 적당한 긴장감 속게 그저 담장을 따라 내원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다. 이 담장길이 언제 끝나고 주인과 상면하게 될 것일 가는 손님의 몫이 아니다. 오로지 이 정원을 조성한 주인의 선택이었다.

담장을 따르는 동선이 왜 이리 길고도 머냐? 그러면 더 늦기전에 즉시 발걸음을 돌리면 된다.

동선이 길다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지극히 비효율적이고 폭망의 지름길이겠지만, 당시에는 그것 또한 선비의 멋이요 낭만이었다. 느림이나 기다림의 미학이 선비의 멋이었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내방객은 이 담장의 끝이 도대체 어디인지 짐작조차 어렵겠지만, 집주인은 그런 내방객이 대봉대를 지나기 이전부터 이미 방문객의 존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늘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긴 동선의 우회로는 일단 집주인에게 시간적 여유를 허락해 준다. 그 정도 시간이면 손님에 대한 판단과 대처할 방도를 충분히 모색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손님으로서도 이를 통해 내가 누구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어던 존재인지에 대해서는 직간접적으로 은근히 드러내 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안채에서 기별 뒤에 나올지, 누루에 앉아 기다렸다가 화들짝 놀라 맞이할지, 버선발로 뛰어나가 임금을 대하듯 맞이할지가 이 길다란 동선에서 어느 정도 판단이 섰을 것이다.

그렇게 따지자면 이곳 소쇄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월당에 앉아서 집 주인이 느닷없이 찾아오는 손님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척도인 이곳에서의 시야 확보가 아니었을까?

역모자와 연관있는 은둔한 선비로서 혹여 나라 세금을 먹고사는 포졸 나부랭이가 나타나면....... 그 다음 긴급한 상황이 무엇인지 생각을 넘어 상상이라도 해 본다면 말이다. 마중은 무슨 마중....... 일단 튀고 볼일이 아니겠는가?

어디까지나 그건 초 특급 비상상황 이야기고.........

담장의 길이가 더도 덜도 아니고 딱 고만하고, 손님이 필히 답장을 따라 돌아서 들어온다면 주인은 손님을 먼저 대략이라도 판단하고 대응을 하기에 나름으로는 충분히 시간을 벌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담장을 따른 우회로는 오로지 주인을 위한 시간과 여유를 위한 공간이 아니었을까?

그랬음인지, 단교를 건너 제월당까지 이르는 길에 아무런 장애물이 없다.

그저 아무 때고 버선발로 뛰어내려와 손님을 맞이할 수 있는 연출된 열린 무대와도 같다.

그런만큼 제월당에 오는 손님은 내려다보이는 광풍각 지붕과 계류가 흐르는 계곡과 제월당 뒤란의 풍경을 살피며 감탄했겠지만, 정작 주인은 오로지 대봉대 뒤의 담벼락만 쳐다보고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양반이라면 불청객의 불시 방문에도 항상 양반의 처신과 체통은 지켜야 했을것이니 말이다. 아무튼 긴 담장길을 통한 느린 동선은 손님과 주인 사이의 보다 침착하고 안정감을 추구하는 윈윈 전략일 수도 있었겠다.

‘우리가 남이가? 우린 서로 같은 양반 사이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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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월당 계단을 내려서 아래채로 가는 계단 위에 조성된 작고 낮은 문에 한글 경고문으로 ‘머리조심’이라고 적혀있다.

양반가의 별장이나 후당이나 서원에서 볼 수 있는 작고 낮은 문으로 ‘겸손은 선비의 미덕’임을 상기시키는 것을 넘어, 강제하게끔 만들어 놓은 것이라 하겠다. 서서 들어갈 수 있는 문에 ‘늘 자세와 마음가짐을 낮추는 겸손이야말로 선비다움의 척도일 것입니다’라고 적어 놓았다면 가르침이나 깨달음을 위한 표어일 수 있겠다.

그런데 이미 머리를 숙이고 쪼그려야만 통과할 수 있게끔 낮고 작게 문을 만들어 놓았다면........ 혹, 누가되었든 간에 그 문을 사전에 의도하고 만든 사람에게 머리를 숙이게끔 강요당하는 것은 아닐까 모르겠다. 그런 불손한 의도를 가지고 부러 그런 낮고 작은 문을 만든 사람이 정말 없었을까?

이 낮고 좁은 일각문을 고개를 숙이고 지나 돌계단을 내려서면 곧바로 광풍각 경내로 들어서는 것이 아니다. 앞과 뒤, 그리고 한쪽 옆이 모두 흙돌담 담장으로 에워싸이게 만든 아주 특별한 분위기를 간직한 독특한 공간을 만나게 된다. 보리수나무에서 아주 씨알이 굵은 잘 익은 보리수 열매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이 공간의 분위기가 아주 특별하게 느껴졌고,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소쇄원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편안한 느낌을 받았다. 우측으로만 열려있는 이 정적인 공간에서 벗어나면 아래쪽으로 미처 숫자를 세어놓지 못한 돌계단이 놓여있다.

돌계단을 내려서서 왼편으로 고개를 돌려보면 소쇄원을 통털어 가장 매력적이라고 칭송이 자자한 광풍각(光風閣) 정경이 두 눈 가득 쏟아져 들어온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이상하게 광풍각의 정경이 가슴속에 확 다가서기 보담은, 왠지 방금 내려선 돌계단과 굽어 휘어진 정적인 공간과 일각문에 자꾸 마음이 쓰이는 것을 어쩌지 못하겠다.

이 공간을 이렇게 부러 에둘러 비켜 돌아오게 만들고, 긴 계단으로 조심하게끔 만든 주인장의 뜻은........ 어쩌면 애양단 앞의 담장길을 한참이나 삥 돌아 올라오게끔 만든 속내의 연속성이 아니었을까? 애양단 앞의 길에는 찾아오는 손님과 내다보고 있는 주인의 처지와 입장에 분명한 차이가 있겠으나, 주인이 머무는 제월당과 손님이 머무는 광풍각 사이의 이 절묘한 공간에서는 주인과 손님의 입장과 처지가 언제든 교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담장 사이로 정적인 공간 특유의 울림이 있어 광풍각의 손님이 제월당에 오르고자 한다면 채 일각문에 닿기 전에 주인은 인기척을 눈치챌 수 있었을 것이다. 반대로 이번엔 주인이 일각문을 지나 손님의 처소로 내려가고자 한다면, 일각문 여는 소리와 계단을 내려딛는 발걸음 소리가 소슬바람을 타고 손님의 처소 문풍지 사이로 들여왔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오르나 내리나 삥 돌아가야 하는 시간적 여유가 서로에게 주어질 수밖에 없다. 화들짝 당황해하면서 서로 얼굴 붉힐 일이 없어지는 것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참으로 기발한 착상이 아니겠는가?

‘오셨는가? 내 기척을 듣고 기다리고 있었네. 어서 오르시게.’

이 상황에서는 찾아가는 사람과 맞아주는 사람의 입장이 수시로 얼마든지 바뀔수가 있는 것이다.


제월당이 주인이 기거하며 독서를 하고 사색을 즐기는 정적인 장소였다면, 광풍각은 손님이 머물며 시를 짓고 담소를 나누고, 학문을 토론하다 지치면 계류에 나가 가야금을 타고 곡차를 마시며 풍류를 즐기던 지극히 동적인 장소였다 하겠다.

소쇄원에 객을 맞아주는 사랑방 광풍각이 있다하니 어느 선비인들 이곳에 머물면 학문을 논하고 풍류를 즐겨보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곳에서 혹 기연을 얻어 송순(宋純) 임억령(林億齡) 김윤제(金允悌) 김인후(金麟厚) 고경명(高敬命) 정철(鄭澈) 기대승 (奇大升)을 만나 학문 토론은 어렵겠지만, 옆에 앉았다가 한시라도 한 편 얻을 수 있다면 가문의 영광이 따로 있겠는가? 혹여 술자리 맨 끝석이라도 낄 자리만 있었으면 좋지않겠는가? 그런 풍류를 수이 아무나 누릴 수는 절대 없을테니 말이다.


광풍각 누마루에 앉으면 바위 암반을 타고 흘러내리는 계류가 참으로 멋들어지게 보인다. 제법 비라도 쏟아지거나 장마철이면 우뢰와 같은 소리를 내며 폭포가 만들어져 쏟아져 내린다. 혹시나 계류 아래 외나무다리가 쓸려가 과객의 귀향길이 어려워지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 뒤로 하늘을 까마득하게 가리고 서 있는 대나무 숲에 비가 쏟아지고 세찬 바람이 불면 서거덕 거리며 숲이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먼길을 떠나온 선비의 애달픈 여러가지 속사정을 대신하여 성난 파도 소리처럼 대숲이 풀어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누구랑 곡차나 진하게 마시고 한바탕 제대로 취했으면 좋겠구나.’

‘여보세요. 거기 누구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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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바람의 뜻을 담은 광풍각(光風閣) 옆으로 석가산(石假山)이 조성되었다고 기록에 전하는데 필자의 개인적 생각으로는 그 기록이 참으로 모호하다 생각된다.

한국 정원의 전통양식에 곧잘 석가산이 등장하는데, 여기에서 가리키는 석가산(石假山)은 주로 못을 파고 주변이나 안쪽에 인공으로 돌을 쌓아 만드는 가짜 산(假山) 이라고 할 수 있다. 별장이나 누각 주변으로 샘이 솟아나는 물웅덩이가 있으면 못으로 만들고 연을 심었다. 괴석으로 가산을 만들고 주로 늙고 왜소한 소나무나 회양목이나 대나무를 심어 인공의 산을 만들었다.

그 석가산의 생김새와 분위기를 통해 만든사람(주인)의 기품을 은근히 드러내고자 의도하는 듯 했다.

기록에는 분명 광풍각 옆에 석가산이 조성되었다고 하는데, 필자의 부족한 식견으로는 도저히 석가산이 들어설 만한 공간도 샘도 보이지가 않는다. 계류 건너편에 두 개의 작은 연못을 만들었는데 그곳에 혹시나 커다란 괴석이 서 있었고 작게 인공의 산이 만들어졌다가 사라졌다고 하면 혹시나 하겠는데, 광풍각 주변으로는 그만한 공간이 잘 보이질 않으니 드는 생각이다.

더불어 소쇄원 자체가 그리 크다거나 웅장함이 없이, 그저 거대한 자연 한구석에 겨우 둥지를 틀고 숨어들었음은 그 자체로도 이미 작고 아담한 자연의 일부였을터인데, 굳이 그 한복판에 석가산을 조성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제월당에서 광풍각으로 내려오는 정적인 공간의 서쪽으로 너른 초지로 변한 공터가 펼쳐져 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고암정사(鼓巖精舍)와 부훤당(負暄堂)의 터라고 한다. 어디 그뿐인가? 김인후의 시에 따르자면 대봉대 초가정자 옆으로는 관덕정(觀德亭) 이라는 사랑채가 더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제껏 우리가 나눈 추론들이 적지않게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제월당에 앉아 손님이 대봉대를 지나 애양단을 지나 단교를 건너 제월당까지 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상황에 맞게 대처했다는 다소 양반스러웠을 행동에 다양한 변수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필자는 지금 당장 눈에 보여 지고 떠오르는 느낌을 이야기했을 뿐인데, 소쇄원의 실제 조성 모습이 지금과 사뭇 달랐다고 한다면, 원형이 사라지고 난 뒤의 수많은 감상과 기록들은 어쩜 전혀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양산보의 소쇄원 원형은 광풍각을 중심으로 주변에 10여채의 건물이 들어서게 조성되었다고 한다. 지금 남아 있는 달랑 3개의 건물만으로 진짜 소쇄원의 정수를 짐작하기는 그리 쉽지가 않다.

그가 비록 벼슬길에 올라 출세하지 못하고 낙향한 빈곤할 수밖에 없는 처지의 처사(處士)였다고 할지라도 소쇄원을 숱하게 드나들었던 당내의 내노라하는 선비들의 면면을 보자면, 비록 소박한 접대였다손 치더라도 썩 척박한 대접을 할 수는 없지 않았겠는가? 거기에다 멋드러진 풍류의 장이었다 하지 않았던가? 고기반찬은 없더라도 산채에 전을 부치고 술 항아리는 넉넉해야만 하지 않았겠는가? 더하여 수많은 양반들의 뒤치닥꺼리 해야 하는 가솔들의 숫자도 여럿이어야 했을 것이고, 그들이 기거하고 상차림을 만들 공간 또한 가까운 근처에 마련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렇게 따져본다면 석가산은 없어도 되겠지만, 광풍각에 하나 제월당에 하나 고암정사 뒤로 하나에다 사랑채가 있던 봉황대 인근으로도 하나, 가솔들의 숙소나 부엌 가까이도 하나쯤 측간(廁間)이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혹여 정원의 정취를 버리게 만들까봐 베르사이유 궁전처럼 주인 측간만 따로 만들어 숨겨놓고 아예 나머지는 만들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오로지 요강을 통해 해결하게 만들었고, 계곡의 아래쪽에서 해결하였으니 간접 수세식이었을지도 모를일이다.

측간의 터는 보이지 않고, 소쇄원 전체를 통털어 그런 부연 설명이 어디에도 없다.

하긴 기품있는 양반의 처지로 밝은 바람과 깨끗한 달을 이야기하다가 뜬금없이 측간을 이야기하려니 조금 얼굴이 달아오르기는 한다.

모든 것이 덧없는 세월의 탓이기도 하고, 이곳을 거쳐 간 전란과 화재의 탓이기도 하다. 거기에 그릇된 인식과 재해석에 따른 잘못된 복원과 관리의 미비로 애초 양산보가 조성한 원림의 원형은 상당히 많이 훼손되었다. 대봉대. 제월당. 광풍각만이 그나마 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보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나, 그런 와중에서 잘못된 복원과 관리 부족의 문제가 끊임없이 대두되고있는 실정이다.

창암촌. 황금정. 행정. 부훤당. 고암정사. 죽림재. 한천정사. 관덕정은 고증마저도 부실한 이유로 과연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이 가능 할지조차 의문시되고 있다. 어디까지나 복원사업이 언젠가는 진행된다는 전제하에서 하는 말이다.

그러니 긴 한숨이 터져 나오면서 고개들어 가려진 하늘을 올려다 볼 뿐이다.

그럼에도 대숲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결은 여전히 청아하다.

‘우리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까?’



길을 다시 찾아야만 할 것같다.

인문학을 오늘에 다시 되살려야만 할 것같다. 성리학의 이상이 실학이 되고, 그런 이상이 현실에 이르러 인문학의 이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양산보 선생이 소쇄원을 조성하면서 가졌던 진지하게 삶을 대하는 태도는 아마도 격물치지(格物致知)였으니, 사물을 맑은 마음으로 관찰하고 그 안에서 지혜를 얻어 깨닫고자 하는 자세였다. 이는 자연을 지배하거나 이용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더불어 살아가면서 인간 본래의 길을 찾고자 하는 진지한 마음가짐의 태도였다.

사화를 당해 죽음을 맞이한 스승의 비참한 말로를 직접 경험하고 나서, 두려움에 떨며 달아나 은둔생활에만 접어든 것이 아니라, 나름으로는 혼탁한 세상에서 잠시 비켜나서 독서와 사색을 통해 다시금 자신을 추스르고 지인들과 교류하고 학문을 논하면서 혼탁한 세상을 안타까워하고 때를 기다렸다고 이해하고 싶다.

달리 표현해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삶을 살아가고자 했다고 이해하고 싶다. 스스로를 다그쳐 게으름이나 방종하지 않게 다스리려 했고, 불손한 마음을 갖지 않기 위해서 손수 노동을 통해 정원을 가꾸었다. 억지로 세속에서 도망치고 싶지 않았고, 억지로 세상을 향해 억울함을 변명하고 분노를 토로하고 싶지도 않았다. 세속의 정치와 권력 속에서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는다는 것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곳 소쇄원(瀟灑園)에서 인간과 자연이 소통하며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찾고자 했다. 인간과 자연이 공존할 수 있는 방도를 찾아내서 그것을 세속의 정치와 권력의 다툼에도 적용될 수 있도록 하는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삶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말이다.

어쩌면 그것은 양산보 선생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앞으로도 영원히 역사속에서 풀어나가야만 하는....... 혹은, 영원히 풀지 못할 숙제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래서 더 인문학의 부활이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된다.

점점 혼탁해져만 가는 세상에, 그나마 인간다움을 부여잡고 의지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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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게재한 흑백사진 모음은 고인이 되신 사진작가 임응식(林應植) 선생께서 고건축시리즈(1977~79)에 발표하셨던 작품사진이다. 소쇄원 자료를 찾아보던 중 그리 오래전은 아니겠지만, 소쇄원이 지금처럼 관리되기 이전에는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살펴보면, 훼손과 보존이 얼마나 필요하고 중요한지와 복원 과정에서의 어떤 논란이 제기되었었는지, 나아가 복원과 관리에 애써준 손길들이 있기에 지금의 정감이 가득 서려 있는 한국 전통 정원의 빼어난 경관이 우리 곁에 머물 수 있게 되었는지, 앞으로 복원이 더 필요한지와 이정도에서 제대로 관리가 더 나을 수 있는지 등의 관심과 생각을 해봄에 있어서 충분히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하여 옮겨왔음을 먼저 밝혀두고자 한다.

사전에 어디에서 누구에게 양해와 허가를 구해야 하는지를 알 수 없어서 일단 옮겨왔으며, 먼저 고인이신 작가 임응식 선생님께 깊이 감사를 드리고 나서 다음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다.)




광풍각(光風閣)은 '비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라는 뜻으로 만든 찾아온 손님을 위한 사랑채로(1614년), 정면 3칸, 측면 3칸의 아담한 팔작지붕 한옥이다.

제월당의 온돌방이 왼편으로 치우쳐 있는 반면에, 광풍각은 정자의 한 가운데에 온돌방 1칸이 설치되어 있으며 삥 둘러 사방으로 마루가 깔려 있다. 온돌방 뒤로 앙증맞은 높이의 함실아궁이가 있다. 방의 문턱에는 머름대가 설치되었고, 정면과 양옆으로 분합문인 들어열개문이 달려 있다. 이 분합문을 모두 열어 처마에 걸면 실내와 내외가 하나로 통한다. 막돌 초석 위엔 두리기둥을 세웠고, 온돌방에는 각기둥을 세웠다. 천장은 연등 천장과 우물천장이라는 전통양식을 혼합하였는데, 서까래가 모이는 부분은 또 다른 눈썹 천장으로 되어 있다.

큼직하게 써서 붙여놓은 ‘광풍각(光風閣)’이라는 현판은 우암 송시열 선생의 글씨다.

광풍각은 양산보의 손자 양천운이 1614년에 계당을 중수하고 상량문을 쓴 시기를 전후해서 광풍각으로 불리게 되었다.


나의 할아버지이신 처사공께서 돌을 쌓아 오목하게 흙을 이겨

담장을 두른 다음 달을 볼 수 있는 곳에 집[霽月堂]을 지으시고,

거기 마루난간에 기대어 앉아 술을 마시며 시원한 바람을 쐬고

동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시름없이 즐기셨다.


졸졸졸 소리를 내며 흐르는 개울가의 바위에다

‘봉황새를 기다린다’라는 뜻을 지닌 대봉대(待鳳臺)를 세우셨으며,

그 옆 언덕에는 관덕정(觀德亭)이라는 사랑채를 지으시고,

그 마루 끝 층계 밑에는 매화며 단풍나무 등을 조성하셨다.


다시 낭떠러지 같은, 얼른 보기에는 위험한 곳에

축대를 쌓아 곁채를 지으시어 대청과 방[光風閣]을 마련하였다.


한벽산(寒碧山)이라는 산은 푸르다 못해

검은 소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는데

그 골짜기에 걸쳐 있는 다리에 작약을 기대었고

누운 듯한 곳에는 애양단(愛陽壇)을 쌓으셨다.

-- 양천운이 쓴 「소쇄원계당중수상량문(瀟灑園溪堂重修上樑文)」중에서



어떤이는 한국 정원의 특징을 있는 듯 없는 듯, 혹은 대자연 속에 숨어든 듯 가려진 듯한 자연스러움에서 찾는다. 애초 조성자가 있는 자연을 그대로 살리고 인공의 손길을 최소화하고자 하는 것이 한국식 정원이 가진 최고 으뜸의 덕목이다. 산등성이 언덕이 자연스레 흘러내리듯 보여지는 것처럼, 건물이나 정원을 에워싼 흙담장도 높이를 다르게 하며 산자락처럼 흘러내린 듯 만들었다.

현대에 들어서 이 ‘자연스럽다’는 말은 ‘어떤 특징이 없다’라거나 ‘개성이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지고 깊이 있게 바라본다면 이내 아주쉽게 그 진의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무엇인가 모자라거나 부족해서 개성이나 특징이 없게 만든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언제든 쉽게 드러날 수 있는 개성이나 특징을 처음부터 아예 없는 듯이 의도적으로 만들려 한다면, 거기에는 차원이 다른 단계에서의 아주 치밀한 계산과 기획이 필요해지기 때문이다. 없는 것을 있어 보이게 만들기보다는, 있는 것을 없어 보이게 만드는 것이 훨씬 어렵고 엄청난 창의성과 노력을 수반한다는 사실을 경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 치밀한 고도의 사전 계획이 있었기에 나무 한 그루 돌멩이 하나에 이르기까지 이름이 부여되고 의미를 담게 되는 것이다. 그토록 치밀한 계산과 기획의 결과로 생겨난 공간에다가 참으로 멋진 이름을 붙이게 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깊이가 더해지고, 하나하나의 의미를 알아갈수록 진한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이 한국의 전통 정원이다. 한국의 전통 정원이야말로 그 당시의 시대상이 고스란히 담긴 최첨단 하이테크놀로지의 집합체이며 완결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가끔은 ‘검이불루(俭而不陋) 화이불치(华而不侈)’라는 표현처럼, ‘화려한 듯 보이지만 결코 사치스럽지 않고, 검소해 보이지만 결코 누추해 보이지도 않는’ 그런 가치를 추구하면 지독하리만치 치밀하게 계산하고 기획하여 창조해 낸 것이 바로 소쇄원과 같은 우리 생활주변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우리에겐 아주 익숙한 조선의 정원인 것이다.

광풍각과 제월당을 이야기하면, 반듯이 온돌방 아궁이를 통해 나오는 연기를 다루는 굴뚝 이야기를 많이들 하고는 한다. 참으로 예쁘게 제월당 굴뚝을 만들어 놓았다. 광풍각 굴뚝은 그냥 축대에서 구멍을 찾아보아야 한단다. 하지만, 적어도 내게는 광풍각의 굴뚝이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광풍각의 빼어난 정취와 속에 담겨있는 많은 깊은 의미를 생각하면서 이곳저곳을 두루 살피기 보담, 나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광풍각 뒤란의 담장이 헐린 듯 뚫려있는 곳에 우뚝 솟아있는 배롱나무 고목이었다. 이 고목의 나이는 어쩌면 이곳에 설치된 담장보다 나이가 더 많을 것 같다. 광풍각을 짓고 나서 담장을 설치할 때 바로 그 자리에 이미 어느 정도 자란 배롱나무가 있었고, 그 배롱나무를 위해서 담장이 공간을 내어주고 한걸음 물러나 뛰어 건너간 꼴이기 때문이다. 틈새가 벌어진 담장이 되었으니 사랑채의 내부와 외부를 차단하는 담장으로의 역할은 애초부터 저만치 물건너 갔다. 그랬음에 담장은 분명히 그곳에 설치되었고, 오랜 세월동안 굳건하게 사랑채의 후원을 든든하게 지켜준것 같다. 어쩌면 고목의 어떤 신성한 기운이 열린 담장의 틈새를 그동안 훌륭하게 채워주고 대신해왔는지도 모르겠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자연스럽도록 누군가는 사전에 치밀하게 미리 계산하고 나름의 결과를 얻어냈고, 그 결과로 저렇게 운치와 정겨움과 멋스러움을 끌어내게 하였는지도 모르겠다. 저런 것이 한국 정원의 진정한 멋스러움이랄까?

주인은 알고 있었다. 그렇게하면 담장이 담장으로서의 역할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데 그랬음에도 그곳에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담장을 설치했다. 더없이 튼튼해 보이고 정감이 그득 서려 있고 옛스럽고 아름다운 조선 선비의 담장이 말이다.

단순히 현실적 차이와 미적 감각의 차이뿐일까?

아니면 형이상학적인 철학의 영역이며 이성과 감성의 지분을 비율로까지 산출해 내야하는 것일까?

두어라!

아서라!

어찌 이보다 더 그득할 수 있단 말이더냐.

지금 내 몸과 마음이 소쇄원의 푸른 빛에 한껏 젖었으니, 이제부터 대숲을 통해 들어오는 청아한 바람에 맡겨 대나무를 닮은 무늬가 가슴에 새겨지기를 기다려보기나 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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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사(處士)로서의 삶을 끝까지 추구하며 손수 이곳에서 정원을 가꾸었던 소쇄옹(瀟灑翁) 양산보(梁山甫)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참으로 멀리서 찾아와 잠시 머문 소쇄원 나들이였다.

여행의 첫날 아직 남아있는 일정이 분명히 있음에도 차마 쉬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만큼 인상적이었고 무척이나 좋았다.

차에 가서 침낭이랑 비박 장비 정도만 챙겨서 들쳐메고 다시 올라와 방문객들이 모두 떠나가는 해거름 이후까지 기다렸다가, 그냥 대숲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소리를 들으면서 제월당 누마루 한구석에서 남몰래 하룻밤 묵어갔으면 좋겠다.

새벽에 일어나 미명아래 누마루에 걸터앉아 따뜻한 커피 한잔 마시고(녹차 맛을 모르는 커피 중독자의 처지이기에) 훌훌 걷어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이 정원을 빠져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에고에고 꿈도 야무지다. 그러다가 자칫 범죄가 될지도 모르는데.

이제 우리의 다음 여정은 강진의 다산초당(茶山草堂 )으로 이어진다.

지나간 첫 번째 토말여행에서 다산초당을 드르지 않은 것을 얼마나 한탄했던가?

계획해둔 일정에 따라 이제 소쇄원을 뒤로하고 강진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그런데 아뿔싸.

배가 고프다. 충주에서 밀양까지 달려오면서 아무것도 먹지 못한 까닭이다. 휴계소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사서 마신게 전부였다.

SNS 검색을 해보니 인근에 소문이 자자하다는 맛집이 여럿 있다. 소쇄원에 들어오면서 이리저리 둘러 보았던 곳이다.

그래서 서둘러 맛집으로 유명하다는 생선구이 식당 <대가>를 찾아갔다.

블로그에 올라있는 이런저런 사연은 아무런 관심이나 상관이 없고, 배가 고파 내돈 내고 밥 사먹으러 왔다. 다행히 소문과 다르게 이날 웨이팅은 없었다.

‘그냥 맛있게 먹었어.’

그것이 식사를 마치고 난 후에 태리 할머니가 내놓은 간단한 평가였다. 내 생각도 그와 같았다. 어쨌거나 지극히 주관적인 우리만의 평가를 전제로 어느정도 맛있게 싹싹 비워 먹었다.

‘나름 맛있게 먹기는 했는데 소문처럼 아주 맛있거나 특별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네? 이 정도의 생선구이라면 우리 충주에도 몇 군데 있잖아? 난 차라리 우리 동네서 먹을 것 같아.’

‘나도 그래. 그럼에도 우리동네 보다 비싸잖아. 어쨌거나 먼 남도까지 와서 일단 생선구이는 먹어본거야.’

다시 강진을 향해 출발을 한다.

정약용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말이다.

한 40년을 넘게 같이 살다보니....... 이제 태리 할머니도 역사와 미술사에 대해서 나름의 일가견이 생기셨다.

중간 중간에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강력하게 어필하시니 말이다.

손녀들과 여행하면서 이런 잡다한 세상이야기를 직접 이야기를 통해 가르쳐주고 싶어서 지금도 열심히 공부하는 중이시란다.

이 할망구는 자나깨나 오로지 손녀들 생각뿐이다. 마치 아들을 낳았을 때부터 훗날 꼭 요런 손녀들이우리에게 올것이라고 작정하게 기다렸던 사람처럼 말이다.

그런 정도였으니 이번 여행이 모처럼의 우리 둘만의 여행이기는 했으나, 손녀들을 뚝 떼어놓고 온 할머니의 속내가 지금 심정이 어떠했으랴는 쉽게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태리한테 소쇄원 사진 몇 장 전송해 줄까?’

‘죽을래? 아님 내가 죽는 꼴을 보고 싶어? 병아리들은 우리가 지금 저희 떼어놓고 여행 떠나왔는지 모른단 말이야. 할머니 할아버지가 저희에게 이야기도 안하고 슬쩍 여행을 떠났다고 들키게되면........ 애들이 커서 어른이 될 때까지 그 원망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끝까지 이번 여행은 절대 비밀이야.’

‘그냥 말로 한번 그래본거지.’

‘그러게 왜 병아리 얘기를 꺼내냐고? 그새 또 보고 싶잖아? 지금 가서 데려올 수도 없고? 그냥 지금 뭐하냐고 전화 한 번 해볼까? 아냐. 그러다 불쑥 충주 가고 싶다고 하면 어떻게 해? 여행 취소하고 이대로 집에 달려가서 시침 뚝떼고 기다려? 그것도 안돼.’

‘아들보고 땅끝까지 배달해 달라고 하면 안될까?’

‘미쳤어? 절대 안돼. 그 먼 거리를 애들이 차에서 어떻게 견뎌? 너무 힘들어서 안돼. 그러게 애들 이야긴 여행하는 동안 꺼내지 말라니까?’

‘캠핑장에서 술 마시면 또 온통 병아리 이야기 할꺼면서.’

‘그땐 그거고........’

‘여기 세리 데려왔으면 생선구이 맛있게 먹었을텐데.......’

‘차 세워. 여기서 죽을래? 하지 말라니까? 그리고 우리 세리는 생선구이 안좋아해?’

‘해남가면 무화가가 제철인데, 과일 킬러 세리가 무화과는 좋아할테지?’

‘야! 너 정말 이럴 거야? 내가 더 이상 하지 말랬지?’

마눌님이 반말로 고성까지 지르신다. 이러다 욕설까지 나오겠다.

아니.......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내가 내 손녀 이름 부르는게 무슨 잘못인가?

그러면서 차를 달리다 보니 남해 바다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럼 강진인 것이다.

이제 다산초당이 그리 멀지 않다는 뜻이다.








--- 다음 이야기는 <다산초당>으로 이어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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