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안재의 여행갤러리(29)
“고통은 괴롭고 아프지만 성스럽고, 비애는 한없이 슬프지만 아름답다. 그러나 생은 비루하다. 시인은 그 비루한 생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바라본다. 외면하지 않는다는 것은 많은 다른 시인들처럼 거기에 덧붙이거나 채색하거나 섣불리 꾸미지 않고 정직하게 바라본다는 것이다.”
-- 이성복님의 <입이 없는 것들> 중에서.
어느 날 문득 자신의 발걸음이 탄력을 잃어가고 있음을 느끼게 되고 삶의 궤적들이 헐거워졌다고 생각되던 그 아침에 창밖으로 내리던 가을비는 그냥 우울이었다. 지금 내가 머문 자리는 애초에 내가 가고자 했던 그 길에서 한참이나 벗어나 너무나 멀리까지 벗어나 버렸다. 허니 어쩌겠는가? 지나온 이 길 또한 어쨌거나 내가 고르고 선택해서 달려온 길인 것을.
두 눈을 질끈 감고 그 흑백사진 같은 우울에다 어떤 채색을 하고 낭만적인 지난 추억을 덧씌운다고 해서 이미 기울어진 현실이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는 이젠 어디에도 없다.
그러기에 생은 비루한 것이라고 시인이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차(茶)나 다도(茶道)에 대해 배워두지를 못했으니 모처럼의 이렇게 우울한 아침을 위하여 아메리카노 대신 아주 진한 에스페레소 한 잔으로 휑해진 가슴을 달래본다.
늘 그랬던것처럼 조용히 짐을 싼다.
이럴땐 그저 마음이 향하고 발걸음이 이끄는 대로 어디로든 떠나는 것이 상책이다.
시간이 좀 지나고 나면 나는 다시 추스린 가슴을 부여잡고 지금 이 자리로 되돌아오고 말 것이다. 들에 나가 밭을 갈던 농부가 해가 지면 집으로 되돌아오듯 말이다. 내일 날이 밝으면 마저 갈아야 할 골밭이 농부에겐 아직 제법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게도 아직은 더 가야 할 길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울이란 놈이 아무리 뗑깡을 부리고 훼방을 놓아도 나는 그냥 내방식으로 내길을 간다.
‘내겐 아직도 가진 건 시간과 배짱뿐이라는 허세 가득한 존심(?)이 어느 정도는 남아 있으니까.’
‘어디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나 하나뿐일까?’
‘내가 아는 어떤 사람도 먼 과거에 이 길을 꼭 그런 마음으로 길을 걸었을지도 모르잖아?’
先生施敎 弟子是則 / 선생시교 제자시즉
溫恭自虛 所受是極 / 온공자허 소수시극
見善從之 聞義則服 / 견선종지 문의즉복
溫柔孝悌 毋驕恃力 / 온유효제 무교시력
赤毋虛邪 行必正直 / 적무허사 행필정직
游居常 必就有德 / 유거상 필취유덕
顔色整齊 中心必式 / 안색정제 중심필식
夙興夜寐 衣帶必飾 / 숙흥야매 의대필식
朝益暮習 小心翼翼 / 조익모습 소심익익
一此不解 是謂學則 / 일차불해 시위학즉
선생이 가르침을 주시거든 제자는 이를 본받아 온화하고 공손하며 스스로 겸허히 하여 받은 바를 깨달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착한 행실을 보면 따르고 의로운 일을 들으면 행하고 온화하고 유순하며 효도하고 공손하여 채 능력을 교만하게 믿지 말아야 한다.
뜻은 헛되고 간사하지 말아야 하며 행실은 반드시 바르고 곧게 하여야 하며 놀고 거처함에 떳떳하되 반드시 덕 있는 사람에게 나아가야 한다.
안색을 엄숙하게 갖추면 마음도 반드시 경건할 것이니, 일찍 일어나서 밤에 잠들 때까지 의복을 반드시 단정하게 하여야 한다.
아침에 더 배우고 저녁에 익혀서 마음을 조심하여 공정히 할 것이니, 아예 한결같이 하여 게을리하지 않는 것을 ‘배움의 법칙’이라 한다.
춘추 전국시대 제나라의 사상가이자 정치가인 관중(管仲)이 지은 <관자(管子)>에 나오는 내용이다.
늘 마음을 겸허히하고 스승의 올바른 가르침을 잘 받아들여 도리(道理)를 다하라는 말씀이다.
낱말 하나하나 마다 커다란 깨우침과 여운이 남는 소중한 가르침이다.
그렇다고 이해하기가 어려운 단어가 들어가 있는것도 결코 아니다. 그런 이유는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너무나 타당성이 짙은 평범한 우리네 일상생활 속의 그저 그런 아주 평범한 이야기일 뿐인데, 그 실천이 어렵다 보니 아주 거대하고 거창한 이상적인 표어처럼 되어버리고 말았다.
스승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깨우쳐 실천하기를 부단히 노력하며, 그 결과로 얻게 된 선한 영향력으로 모두가 도리와 이치에 맞는 세상을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기에 힘쓴다면, 그곳이 곧 천국이며 지상낙원이며 무릉도원이 아니겠는가?
아주 오랜 시간 실제로 그렇게 살다간 시인이 있었고 선비도 있었고 학자도 있었다.
아니지. 하나 둘이 아니고 성리학의 시대를 살다가 양반댁 남정네치고 소학이네 주역이네 공자와 맹자와 노자등 그 가르침을 모르거나 배우지 않았거나 빠져들지 않고 살아간 사람을 단 한 명도 찾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것이 당시에는 그들이 살아가는 이유이고 명분이고 소망이고 가치이자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러했음에도 여전히 세상 어디에도 지상낙원이나 무릉도원이 이룩되고 펼쳐졌다는 이야기나 기록은 없다.
이럴 때 사람들은 공염불(空念佛)이란 용어를 다반사처럼 꺼내들고는 한다.
필자의 표현으론 그냥 쉽게 ‘개뿔’이란 이야기다.
내가 진한 에스페레소 한 잔을 마시고 먼 길을 떠나기 위해 텐트며 침낭이며 캠핑 장비를 챙기고 있는 시간에......... 구부러진 나무지팡이 하나에 의지한 채 멀리 남도로 유배길을 떠나는 선비가 하나 저만치 앞서서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이제 그의 발자취를 더듬어 뒤쫓아 보려고 한다.
후대의 사람들은 입을 모아 그가 지금 걸어가고 있는 길을 ‘남도 유배길’이라고 이름 지었다.
성리학의 시대에 선비의 삶이란 과연 어떤 것 이었을까? 나는 지금 그것이 알고싶어졌다.
‘인생지사 새옹지마(人生之事塞翁之馬)’
선비가 의금부에서 풀려나 한양에서 내쫓기듯 양주로 향하던 때는 혹한의 겨울이 마지막 위세를 극한까지 떨치고 있던 한겨울의 끝자락이었다. 함박눈이 유독 하염없이 쏟아지던 음력 2월 27일에 그는 포졸들에게 강제로 끌려가다시피 흥인지문(興仁之門)을 빠져나와 언제 다시 도성에 돌아올 수 있을지 기약조차 할 수 없는 멀고먼 유배의 길에 올랐다. 모진 고문으로 몸이 성한 곳이 없었음에다가 곤장 백 대를 맞고 추방되어 걷기조차 힘든 상태였지만, 그래도 다행이라고 겨우 목숨만을 부지한 상태로 멀고 먼 유배길에 오른 상태였다. 지난날 암행어사가 되어 오갔던 그 길을 지금 죄인이 되어 포승줄에 묶인 채 유배지로 향하고 있었던것이다. 낮과 밤이 바뀌듯 하루 아침에 그의 인생이 그만 깊은 나락으로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지금 당장 그의 앞에 놓인것은 860리를 걸어서 정해진 기간 안에 고을 수령에게 죄인의 도착 신고를 하는 것이 당면한 최우선 과제인 것이다. 삭탈관직(削奪官職)까지 당하고 유배를 떠나는 그를 알아보거나 연민의 손길을 내밀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인생지사 새옹지마(人生之事塞翁之馬)’ 라고 누가 말했던가?
이제사 되짚어 보니 정말로 그러하지 않은가?
돌아보니 이제까지의 모든 것이 다 얼마나 부질없음인지 이제사 새삼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지금 누가 곁에 있어서 그의 억울한 형편에 대신 눈물이라도 흘려주는가?
지금 무엇이 남아 있어서 거덜이 난 몸을 이끌고 멀고 먼 유배길을 가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여 줄 수 있겠는가? 노자돈이라도 넉넉해야 호송 관원에게 부탁해 약간의 편의와 최소한의 치료라도 받을 수 있으련만 말이다.
지금 그에겐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곤장을 맞은 상처는 아물었다 다시 터져 피가 흐르고, 살을 에위는 혹한의 날씨에 죄수의 처지로 의복마저 제대로 갖추지도 못했으니, 걸으면서 시린발은 그럭저럭 견딜 수 있었지만 밤이면 사정없이 파고 들어오는 추위를 견디면서 내일 여정을 위해 잠시라도 잠을 청한다는 것이 참으로 고통스러웠다. 이런 상황에 세상에 누가 있어 지금 그에게 온돌방에서 하룻밤이나 따뜻한 국밥 한 그릇, 누더기라도 솜 옷 한 벌이라도 내어주겠는가? 정말로 야속하고도 야속한 것이 세상 인심이었다. 추위가 혹독하면 혹독할 수록, 가는 여정이 힘겨워지면 힘들수록 호송 임무를 맡은 포졸들의 눈치와 횡포까지 죄인은 감수해야만 했다.
지금 그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포항 땅 장기까지 기간 내 가야 하는 멀고 먼 유배길이 아주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뿐이다.
'죄인 정약전(丁若銓)을 곤장백대에 신지도에 유배하고, 죄인 정약용(丁若鏞)을 곤장 백대에 포항 장기로 유배형에 처한다 .'
모든 사태의 발단은 천주교의 전래 때문에 생겨났다고 할 수 있으며, 그 시작은 정조 임금이 급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면서부터였다.
천주교가 조선에 처음 소개된 것은 17세기 초반으로, 당시 명나라의 수도인 베이징에는 유럽의 가톨릭 선교사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으며, 이곳에 파견된 조선의 사신들을 통해 서양 관련 서적들과 신기술과 발명품들이 속속 전해져 들어왔다. 놀라운 선진 문물을 접한 당대 조선의 지식인들이 서양의 학문과 과학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이것들을 서양에서 가지고 온 선교사들과 자연스레 접촉하게 되었다. 하지만 조선의 지식인들 입장은 과학기술에 관한 관심과 탐구 욕구였지 결코 종교적 신앙의 접근은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남인(南人) 중심의 실학자들이 학문적 대상으로 천주교를 인식하기 시작했고, 점차 중인층과 서민층으로 천주교가 새로운 신앙으로 수용되며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1784년 이승훈(李承薰)이 세례를 받는 일을 계기로 천주교 신자가 증가하였으며, 이는 다시 천주교 서적의 유입을 부채질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1780년대 중반에 들어오면서 양반층들이 관련된 천주교 사건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으며 1791년(정조 15) 신해박해(辛亥迫害), 이른바 진산사건이 일어났다. 오백 년 조선 사회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성리학적 예의와 질서를 수호해야 할 양반층인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이 조상께 드리는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사름으로써 성리학적 질서를 정면으로 거부하였다는 점에서, 이제 집권층은 이를 곧 군왕에 대한 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그러했음에도 당시 군왕이었던 정조(正祖)는 진산사건에 대한 처결을 윤지충과 권상연에 국한하여 사형으로 마무리하여, 천주교도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의 발단으로 삼지는 않았다. 기본적으로 정조는 정학(正學)을 밝힘으로써 사학(邪學)의 확산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서학에 대한 강경한 대응이나 탄압은 가급 적 피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정조의 급작스런 사망 후에 발생하였다.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순조(純祖)를 대신하여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자, 경주 김씨와 노론 벽파(僻派) 세력은 정국을 일당전제의 정치형태로 전환하고자 했다. 대왕대비는 1800년(순조 즉위) 12월 18일 영조(英祖)가 내렸던 사도세자(思悼世子)에 대한 처분이 부득이했음을 강조하고 그에 반대되는 의견을 수용할 수 없다는 강경한 새로운 입장을 천명했다. 이는 벽파의 명분과 주장을 공식적으로 천명한 것이며, 이후 정국이 벽파를 중심으로 새롭게 전개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1801년(순조 1) 1월, 대왕대비가 ‘사학(邪學)’에 대한 토벌을 공식적으로 지시하면서 본격적인 신유박해가 시작되었다. 내수(內修)와 외양(外攘)을 겸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패륜의 사학도(邪學徒)를 철저히 소탕하도록 지시했다.
같은 해 2월 사간 박서원(朴瑞源)이 사학의 교주를 체포하고, 사학도를 극형으로 다스리기를 요청하자, 집권세력이된 노론 벽파는 사학을 금지하고 사학의 무리를 소탕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논의했다. 그 결과는 사학에 대한 철저한 탄압과 사학의 무리에게 일벌백계의 극형을 불가피한 것으로 보고 피를 볼 생각을 전제로 과감하게 실행에 옮겼다.
그 결과로 천주교의 지도급 인물들인 권철신(權哲身), 이승훈, 정약종(丁若鍾), 홍낙민(洪樂敏), 최창현(崔昌顯), 최필공(崔必恭), 이존창(李存昌), 유항검(柳恒儉) 등이 모두 처형되었다. 이런 숙청 과정을 거치면서 점차 남인 세력은 중앙정계에서 재기 불능의 타격을 입게 되었고, 지연 학연 혈연으로 그들과 어울렸거나, 연결될 가능성이 있는 인물들까지도 제거의 대상에 오르게 되었다.
이것이 1801년의 신유사옥으로 정약용의 셋째 형인 정약종(丁若鍾)이 사형을 당했고, 둘째 형인 정약전(丁若銓)과 막내 정약용(丁若鏞)은 각각 신지도와 포항 장기로 유배를 당했다.
어쨌거나 선비는 3월 9일에 포항 장기에 도착하여 관아에 신고를 했다. 선비는 마현리 구석골 성선봉의 집을 배소로 지정받아 본격적인 유배 생활에 들어갔다.
하지만, 같은 해에 황사영 백서사건이 벌어지자 또다시 연루 의혹을 받아 7개월 10일간의 장기 유배 생활을 마감하고 10월 20일에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어 문초와 고문을 당해야만 했다.
백서사건으로 다시 유배 길에 나서 약전은 흑산도로 동생 약용은 강진으로 내려가게 되었고, 나주까지 유배길 동행을 하게 된다.
바로 이 부분에서 몇 가지 가설들이 등장한다.
신해박해 사건으로 약전은 신시도로, 약용은 포항 장기로 유배를 떠난 것은 같으나, 다시 백서사건이 벌어지자 모두 한양으로 압송되어 추가 조사와 형을 받아 흑산도와 강진으로 유배를 떠나면서 나주까지 동행하였다는 설과, 신지도와 장기 유배 중에 백서사건이 벌어지자 원거리 유배형이 추가되어 유배형을 받고 있던 장소에서 새로운 유배지로 이송되었다는 설이다. 이송과정에서 천운으로 나주에서 두 형제가 우연히 상봉하여 마지막 정을 나누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여러 정황을 살펴보매 필자는 후자 쪽을 타당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하여, 장기 유배기념관 표지판 중에는 (한양에서 장기까지가 344km로 860리 길)이요, 다시 (장기에서 강진 다산초당까지가 290km로 725리)라고 적어 놓았다. 아마도 정약용은 이곳에서 유배생활 중에 죄가 추가되어 더 먼 곳인 강진으로 이송되었다고 보는 것이 아무래도 더 타당해 보인다.
선비는 장기를 떠나 꼬박 보름을 걸어 나주 인근 율정의 주막에 여장을 풀었다.
나주 영산포구가 내다 보이는 삼거리 주막으로 북으로는 한양에서 내려오는 길이요, 남으로는 제주도로 가는 유배길이요, 서쪽으로는 목포 유달산으로 가는 길이 열려있는 요충지였다. 육로상의 요충지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에는 바닷물이 이곳 나주 영산포까지 들어와 바다로 열려있는 해상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해서 늘 인파와 온갖 물자들로 차고 붐볐다.
해거름에 율정 주막에 여장을 풀고 하품이 저절로 나오는 것이 그간 보름의 여정이 녹녹치 않았음인지 산더미처럼 한꺼번에 피로가 몰려들기 시작하고 있을 즈음에 사립문 밖을 살피던 선비는 그만 경을 치듯 깜짝 놀라 맨발로 주막 마당을 가로질러 밖으로 뛰쳐나갔다.
‘형님. 약전 형님.’
그랬다. 땅거미를 등지고 터덜터덜 힘겹게 걸어오고 있는 사람의 품세가 멀리서부터 아무리 고개를 갸웃거리며 지켜보아도 틀림없는 세째형 약전이었다.
‘약용이가 아니냐? 너도 이길을 지나는구나. 너를 이곳에서 이렇게 다시 보게되다니....... 그래. 어디 상한 곳은 없느냐?’
‘소제는 형님 덕분에 무탈합니다. 형님 건강은 어떠신지요?’
‘같은 죄인 처지에 잔병치레조차 없다면 그게 어디 유배 생활이겠느냐? 그럭저럭 견딜 만은 하단다. 그나저나 하늘의 보살핌으로 우리 형제가 이렇게 노상에서라도 만나보게 되었구나. 어디 들어가서 지난 이야기라도 들어보자꾸나.’
형제는 두 손을 꼭 마주잡고 주막 안으로 들어갔다.
천우신조(天佑神助)라 해야할까?
유독 형제애가 넘치던 약전과 약용이 각자의 유배길을 따라 이송하던 중에 시골의 한 주막에서 우연처럼 만났다. 꿈엔들 이런 우연한 재회를 상상이나 해 보았을까?
그리고 그들은 또 꿈에도 알지 못했다.
이 밤이 지나고 날이 새면 형은 흑산도로, 아우는 강진으로 다른 길을 가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언제 유배가 끝이 날지, 언제 다시 형제가 만날 수 있을지 지금으로서는 아무런 기약조차 할 수가 없었다. 정녕 그들은 알지 못했다. 이 하룻밤의 재회가 그들이 살아서 함께하는 마지막 시간이라는 사실을 끝내 그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 밤이 형인 손암 정약전과 아우 다산 정약용에게 있어서 이승에서의 마지막 밤이 될 것을 누가 알았겠는가?
율정 주막에서의 밤은 깊어만 갔고 형제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새벽을 재촉하는 닭울음 소리가 그들에겐 얼마나 야속했을까?
새벽 미명이 밝아오자 선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먹을 갈기 시작했다
生憎栗亭店 (생증율정점)
門前岐路叉 (문전기로차)
本是同根生 (본시동근생)
分飛似洛花 (분비사낙화)
曠然覽天地 (광연람천지)
未嘗非一家 (미상비일가)
促促視形軀 (촉촉시형구)
惻怛常無涯 (측달상무애)
이 몸은 율정 주점을 미워하니
문앞의 길이 두 갈래로 갈라졌습니다
원래 한 뿌리에서 태어났으나
떨어지는 꽃잎처럼 흩날리겠지요
천지를 넓게 본다면
일찍이 한 집안 아닌 것이 없지만
생각할 여유도 없이 내 모습만 쳐다보니
슬픈 생각이 늘 끝이 없습니다
강진으로의 향하는 유배 길에 올라 나주 북쪽에 있는 율정의 주막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형과 하룻밤을 함께 지내고 아침이 되어 아쉬운 이별을 하면서 정약용이 형에게 지어준 시로 제목은 <봉간손암(奉簡巽菴)>이다.
약전은 영산포에서 배에 올라 흑산도로 향했다.
약용은 영산강을 건너고 월출산 자락을 넘어 오늘중에 강진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흑산도로 가는 배가 포구를 벗어나 사라질 때까지 차마 동생은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강진에 도착한 정약용(丁若鏞)은 곧장 관아로 가서 유배지 도착 신고를 했으니 신유년(1801년) 11월 22일의 일이다.
이젠 강진 고을 수령이 지정하고 허락한 영역 안에서 거처를 마련하고 유배생활을 시작해야만 하는데 어느 곳에서도 그런 선비를 위해 골방 하나 거처할 곳을 내주는 사람이 없었다. 선비는 강진이 처음이라 모든 것이 낯설기만 했는데, 그들은 이미 정약용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 전대 임금에게 극진한 은혜를 입었으나 교만하고 방자하였으며, 천주학쟁이로 조상을 내팽개쳤으며, 서양 귀신을 따르느라 체제를 부정하고 임금의 은혜를 저버린 배은망덕한 패륜아로 이미 저잣거리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누구를 막론하고 유배를 당해 이곳 강진까지 쫓겨온 정약용에게 도움을 주거나 은혜를 베푸는 자는 서양귀신 천주학쟁이로 오해를 사기 십상이고, 군주에 대한 충(忠)과 부모 조상에 대한 효(孝)를 저버리는 자이니 역신의 죄를 물어 함께 추궁하고 엄벌에 처하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고 있었다.
동짓달 밤이 이슥하도록 정약용은 아무것도 먹지 못하였고 거처를 마련하지 못한 채 추위에 온몸을 고스란히 내맡겨야만 할 상황을 맞이했다.
어느 집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물 한 모금 내어주지도 않았다. 마주치면 소스라치게 놀라 달아나거나 아예 문을 잠궈버리기 일쑤였다. 말을 건네도 돌아오는 대답은 전혀 없었다.
조선시대의 유배생활은 완전 자급자족이 원칙이던 시대였다.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 내야만 했다. 유배지까지가 너무나 멀고 여러 날이 걸리기에 웬만한 사대부나 부자가 아니면 누가 따라가며 수발을 들어주기가 어렵고, 척박한 유배지에서 행동거지에 제한을 받으면서 의식주를 해결한다는 것이, 사실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다. 양반의 체통을 굳이 개의치 않는다면 유배지에서 누군가의 집에 의탁해서 새끼를 꼬고 가마니를 치고 허드렛일이나 어느 정도의 농사일을 돕는 것으로 숙식을 해결하는 것이 그나마 보편적이며 현실적인 생존 전략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사대부나 아주 부자라면 한양의 본가에서 하인을 보내오고 현지에서 얼마든지 물자 구입을 통해 안락하고 평안한 유배 생활도 충분히 가능했다. 현지 고을 수령과의 원만한 교류와 배려를 통해서 말이다. 여기에 필수로 뒤따르는 것이 당연히 뇌물과 청탁과 부정부패가 아니겠는가? 어느 정도 재력이 있는 양반 정도면 유배지의 주막이나 유곽에 자리를 잡고 주색잡기로 세월을 탕진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약용의 경우 전임 군왕의 총애를 받았을만큼 어느 정도 권력과 재력을 갖춘 양반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지금 천주학쟁이로 몰려 사형제 중에서 이미 셋째가 참수형을 당했고 둘째와 막내가 여러 사건에 연루되어 흑산도와 강진으로 유배를 당한 마당에 그의 정씨 가문의 몰락은 불 보듯 뻔한 일이 되어버렸다. 가문의 몰락 정도가 아니라 역적으로 몰려 자칫 부녀자와 어린이가 노비로 끌려가고 성인 남자들이 모두 죽어 나가는 멸문지화를 걱정해야 할 정도의 상황이었다.
혈혈단신 고립무원에 달랑 혼자 내동댕이처진 처지였다.
먼 타지에서 밤새 서성거리다 동짓달 추위를 더는 견디지 못하고 이대로 객사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처지가 이럴진대 험한 바다 건너 흑산도에 안치된 형님의 처지는 또 어떨지 하는 생각에 저절로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때였다.
‘선비께서 천주학을 하셨다는 정씨 성의 나리십니까?’
‘정씨 성을 가진 것은 맞습니다만......... 누구십니까?’
‘한양에서 유배 오신 정씨 나리시라면 강진 고을 어디에서도 거처를 마련하실 수가 없을 것이니, 미천하고 누추하다 여기지 않으신다면 모셔 오라고 쇤녀의 어머니께서 보내셨습니다.’
‘보시다시피 지금의 내 처지가 무엇을 따질 형편이 되지 못 합니다. 그런데 어찌 저를 아시고 어머님께서 낭자를 보내셨단 말씀입니까? 그럼 댁이 어디신지요.’
‘한참 전부터 나리께서 동문 주변을 서성거리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건너편 정자나무 아래 주막이 저와 어머니가 함께 꾸려나가는 저희의 집입니다.’
‘그러시다면 아녀자 두 분만이 사시는 집에 제가 쉽게 어찌 들어갈 수 있단 말씀입니까?’
‘양반가의 저택이 아니라 술과 밥을 팔고 사람들이 너나없이 묵어가는 주막이랍니다. 반상이나 남녀노소 구별이 없는 곳이 주막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마음 편하게 가지셔도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신분이나 남녀 구별은 없겠으나 셈을 해야 하는데, 저는 지금 막 귀양을 온 처지로 노자돈 마저 바닥이 드러난지라 더는 셈을 할 재간이 없습니다.’
‘돈이 있으셨다면 나리 스스로 벌써 찾아오셨겠지요. 그런 사정을 익히 어머니께서 아시는지라 이렇게 저를 보내 모셔 오라 하신 것입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어젯밤은 작은 형을 만나 꿈속 같은 시간을 보냈더니만, 오늘은 뜻밖의 주막을 만나 더는 원이 없을만큼 따뜻하고 포근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주막의 여주인인 늙은 노파는 마중나와 가벼운 묵례로 인사를 대신하고는 서둘러 부엌으로 돌아갔다. 아랫목이 따끈따끈한 주막의 사랑채 작은 방 하나가 선비의 독차지가 되었다. 잠시 앉아서 문만 쳐다보면서 안절부절하다가 쌓인 피로에 저절로 눈이 스르르 감길 즈음에 문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노파였다. 작은 소반에 국밥 한 그릇하고 막걸리가 담긴 호로병이 놓여있었다.
‘모든 걱정 다 내려놓으시고 오늘은 이대로 편히 주무시유. 해가 중천에 뜨도록 푹 주무셔도 된다우. 배가 고파지거들랑 나오시유. 앞일은 차차 차근차근 걱정해 나가면 되는 것이라우. 사람이 일단은 살고나야 하지 않겠우? 적어도 이곳 주막에서는 내가 주인이고 뭐든 내 마음대로 한다우. 그러니 살길을 찾으셔서 떠나실 때까지는 나만 믿고 편하게 지내셔두 되겠수. 그럼 쉬시유.’
배가 부르고 등이 따습자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그만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렇게 편안한 잠자리에 들어본 것이 언제였던가 싶었을 정도였다.
인연(因緣) 아니면 기연(機緣)?
모든 것을 잃고 천길 낭떠러지 벼랑에서 뜻하지 않은 인연을 만났다.
한 늙은 노파와 과년한 딸이 국밥과 술을 팔아 하루하루 겨우 연명하는 그들 자신도 참으로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어떤 인연이 있어 추방된 나그네를 받아들여주었던 것이다.
실학자 정약용(丁若鏞)을 찾아 다산초당(茶山艸堂)에 오르다.
남도를 여행하면서 강진(康津)을 계획에 넣게 된다면 아마도 그 첫 번째 목적지는 다산초당(茶山艸堂)이 아닐까 생각된다. 한국의 정원문화를 이야기할 때 절대로 빠지지 않는 남도 여행의 일번지라 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 같다.
그런데 다산초당하면 반듯이 떠오르는 인물이 하나 있다.
다산초당(茶山艸堂)하면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당연히 먼저 떠오르고, 정약용을 논하자면 결코 다산초당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가 없다.
다산초당은 정약용 선생의 18년 강진 유배중에서 10년 넘게 칩거하면서 차(茶)의 향기와 책의 향기가 잠시도 떠나지 않게 늘 가까이 두고 지내시던 진정한 실학의 산실이었다.
천문, 지리, 건축, 의학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교육과 인문에도 유달리 조예가 깊었던 선생은 <목민심서> <흠흠심서> <경세유표> 등을 포함하여 약 500 여권의 방대한 서적을 집필하신 당대의 최고 유학자로, 차(茶)를 즐기는 정도를 넘어 다도(茶道)에도 경지에까지 이르렀으니, 여기 다산초당에서 천리 밖까지 차와 책의 향기가 퍼져 제자가 되기를 청하는 이들이 늘 줄을 길게 섰다고 한다.
그의 방대한 저술이 대부분 이곳에서의 유배생활중에 이루어졌다고 하니, 비록 죄인의 몸으로 먼 타향에 쫓겨 밀려난 처지였으나 밤낮으로 책 읽기와 글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사명감을 가지고 혼신을다해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늘 흑산도로 유배당한 작은형과 남은 가족들을 그리워하고 걱정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아주 먼 기억속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첫 번째 남도여행에서 여기 다산초당을 들리지 못하고 서들러 남해로 발걸음을 돌렸던 것을 그동안 두고두고 얼마나 아쉬워했었던가?
아무 때고 초당에 올라 선생이 늘 곁에 두셨던 차와 책의 향기를 직접 맡아보고 싶었다. 혹 이백 년의 시공을 초월하여 서생들의 책 읽는 소리가 초당에 오르면 들려오지 않을까 궁금했다.
그래서 세월이 흐르고 또 흐른 뒤에 찾은 초당에에 오른 길 중턱에는 황금 물결 잘 익은 벼들이 추수를 기다리고 있고, 굽어진 마을 입구 포장도로 위로 토실한 밤톨이 하나 뒹굴어 있는데 세리 할머니가 날렵하게 주워서 주머니에 넣고서는 ‘내꺼. 이따가 먹어야지’ 한다. ‘내꺼는 없을까’ 하면서 밤나무 아래를 기웃거려보는데 사방에 빈 쭉정이만 너저분하게 널려있다. 결국 나는 꽝을 치고 말았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 우편의 드넓은 공간에 다산기념관이 있다. 혹여 시간이 된다면 꼭 들러보고 싶지만, 일단은 서둘러 초당엘 다녀와야만 했다. 흐린 하늘에서 이따금 빗방울이 떨어졌고, 오늘은 캠핑을 계획했는지라 비라도 내리면 텐트를 설치하는데 낭패를 격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따라 자연스레 서둘러지는 발걸음이다.
언덕을 조금 오르면 다산초당의 초입이랄 수 있는 귤동마을(강진군 도암면 귤동마을)이 나타난다.
귤동마을은 해남윤씨(海南尹氏)의 집성촌이다.
마을주민 절대다수가 해남윤씨의 후손인 인척들이고, 성씨가 다른 사람은 결혼 등의 이유로 이들과 일가친척 사돈이 된 사람들이다.
오늘날에는 절대 적용이 안되겠지만, 옛날엔 그 집안의 가장 웃어른이 적어도 자신들의 집성촌 안에서는 진리요 법이었다. 웃어른의 생각과 말씀이면 그것은 법이나 나랏님의 말씀보다도 우선이었다. 보이지 않는 나라님 보다는 아침 저녁으로 마주치는 웃어른이 당연히 더 무서웠다.
집성촌 웃어른의 권위와 덕망이 곧 그 양반가문의 위상과 직결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시절에 강진군 도암면 귤동마을의 해남윤씨 집성촌의 최고 웃어른께서 힘들게 유배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정약용의 딱한 처지를 전해 들으시고는 친필 서찰을 아들 편에 보내 초대를 하였다.
‘내가 살고있는 귤동마을 뒷산에 아늑하고 조용한 곳에 만년에 조용히 책이나 읽으며 지낼까 하여 정자를 하나 지었는데, 나이가 들어 언덕을 오르기가 벅차다 보니 그만 방치하다시피 되었습니다. 비록 보잘것없는 누추한 정자이긴 하나 조용한 숲속에서 추위와 비바람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은 하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내가 두고두고 읽으려 장만한 천 여권의 책을 그곳에 두었으니 책을 읽으며 지내기에는 더할 나위가 없지 않을까 생각되어 감히 사돈 조카에게 권해볼 용기를 내보았습니다.’
강진 땅에서 도암면 귤동마을의 귤림처사(橘林處士) 윤단(尹慱)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윤단은 먼 남쪽 변방에서 덕망과 명성이 자자한 재야인사였던 것이다.
귤림처사(橘林處士) 윤단(尹慱)의 할아버지가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이고, 윤두서의 증조할아버지가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로 이 가문은 평소 남도 3대 부자라고 불렸다. 일례로 해남의 경작지중에서 절반이 윤씨문중 재산이라고 했다. 강진은 물론 사방으로 퍼진 윤씨 집안이 대부분 부지인데다가, 윤선도 시대부터 섬을 간척하여 농토로 만든 탁월한 부동산 부자 가문이었다.
그런 해남윤씨 윤두서의 손녀가 정씨 가문에 출가하여 낳은 아들이 바로 정약용 3형제인 것이다. 하여 해남 윤씨 가문은 정약용의 외갓집이 되며, 윤단은 정약용의 어머니 항렬이니 집안의 먼 외삼촌과 외조카 뻘이 되는 것이다. 하여 윤단은 주로 항렬이 같은 아들 윤규로(尹奎魯)를 통해 정약용과 소통하였다.
윤단의 서신을 받은 정약용은 즉시 시를 지어 초대에 답했다. 모든면에 있어서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특히 장서가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에 끌렸을 것이다.
정약용은 유배생활 8년만에 강진현 남쪽의 만덕산 중턱의 산정(山亭)으로 거처를 옮겼다.
책을 읽고 왕성하게 집필을 하는가 하면 제자를 거두어 가르치는 ‘다산학의 산실’이 되는 다산초당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모쪼록 정약용의 인생과 업적에는 해남윤씨 집안의 지대한 관심과 막대한 후원이 절대적이었다. 다산초당에 칩거하면서 비로소 정신적 육체적 안정을 되찾은 정약용은 가장 먼저 해남의 외가에 서신을 보냈다. 학문을 계속하고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책과 지필묵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몇 날 지나지 않아 소가 끄는 수레가 몇 대 도착했다. 해남 녹우당에서 책 이천권과 지필묵을 보내온 것이다. 초당의 서암이 도서관이 되었다. 초당에 머물러 책을 읽고 차를 마시며 집필을 하고, 낮에는 동암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후로 10년 동안 꾸준히 이어진 유배 생활이었다.
이 시기부터 정약용 선생은 이곳의 지명과 연유하여 자신의 호를 '다산(茶山)'이라 이름하였다.
어서 초당에 올라 글 읽는 소리와 차와 책의 향기를 맡고 싶다.
잘 정돈된 귤동마을 언덕길을 오르노라니 곳곳의 전통한옥에 숙소를 구하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여행자들과 곧잘 눈이 마주친다. 인사를 나누며 오르노라니 이내 초당으로 향하는 굽어진 조금은 가파른 오솔길이 나타난다.
‘어? 이건 아닌 것 같은데? 내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는 뜻인데?’
몹시 겸연쩍은 표정으로 마눌님 표정을 연실 살펴본다.
‘자꾸 쳐다보면 뭐가 달라지니? 어쩌겠어? 죽든살든 올라가 봐야지.’
이내 내 어깨를 툭 치면서 스쳐 지나가 가파른 언덕길에 앞장을 선다.
‘여보야. 이건 나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설마........’
‘괜찮아. 수술 후에 얼마나 회복되었나 테스트를 해보려는 당신의 음흉한 심뽀겠지 뭐.’
‘아녀! 절대로 아녀! 내가 세리 이름 걸고 맹세한다. 그건 오해여.’
아무도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인터넷 검색이나 여행기나 안내 책자에서도 정보를 얻지 못했다.
다산초당의 초입인 귤동마을에서 초당까지의 거리가 300미터에 불과하다는 표지판 사진은 보았어도, 또 과거에는 익히 유명해진 사진과 함께 ‘뿌리의 길’이라고 불렸다는 정보가 거의 전부였다. 굳이 거리를 염두에 두지 않아도 될듯한 300미터의 거리가 어떤 내용인지를 안내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분명 그 길은 빼곡한 숲속에 난 호젓한 산길이었다.
그런데 그 길에 약간의 경사가 있고, 우측으로 다산 선생께서 이곳에서 후학을 양성하고자 하셨을 때 실제 막내 제자였던 성균진사 윤종진의 묘가 아담하게 만들어져 있고, 초당에서 흘러내린 계곡물을 모아두고 있는 돌그릇이 있다. 여름날 초당을 오르내리는 방문객들에게는 생명의 단비와 같은 청정 샘물이었으리라. 그런가 하면 초당에서의 생활용품들을 항상 등짐으로 지고 나르기에는 벅찼을 테니 아마도 여기까지는 나귀나 소의 등에 싣고 와서 부려놓는 종점이었을 것이다. 여기에서부터는 본격적인 돌계단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92개나 되는 돌계단은 각 층의 높이가 현대의 우리가 익숙한 계단 높이보다 약간 높고 가파르며, 두 사람이 겨우 비켜 지나갈 정도로 좁기에 생각보다 힘겹다.
그것이 바로 나의 불찰이었다. 그렇게 세세한 내용까지는 차마 알지 못한 상태에서 다산초당 방문을 여행계획에서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집에서 호암지를 두 바퀴 산책하느니 조금 분위기를 바꿔 새로운 산책을 해보자고 구담봉과 옥순봉을 다녀오던 마눌님과 나의 평소 건강과 산책 스타일이라면 까짓 다산초당에 오르는 길 정도야 아무런 장애가 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지난달에 세리 할머니가 무릎 수술을 받았다. 수술 회복 중인 상태로 평지 산책은 좀 불편해도 가능한 정도였으나 계단은 좀 무리다 싶었다. 그런 상황에서 제법 가파른 경사면이 나타나더니 급기야 92개의 만만치 않은 돌계단이 그만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다산초당을 보통의 한국식 정원인, 산자락이 자연스레 흘러 내려와 평지를 만나는 지점의 흐르는 물줄기가 있고 드러난 바위가 있고 대나무와 소나무 숲이 있는 곳에 조성된 포근하고 아득한 정원쯤으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소쇄원이 그랬고, 부용동 정원과 운림산방이 그랬다. 그냥 가볍고 편안한 산책으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무릎 수술을 얼마 전에 받고 아직 회복중인 세리 할머니 입장에서 보자면 다른 정원들은 다 산책일 수 있겠지만, 다산초당은 혹여 설악산 권금성에 케이블카 없이 다녀오는 정도라고 할 수 있을까?
어쨌거나, 여기까지 왔으니 안 올라가 볼 수는 없지 않겠느냐며 씩씩하게 앞장을 선다. 송구한 마음으로 뒤를 쫄쫄 따라 올라가면서도 다시 내려올 걱정의 앞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귤동마을 입구에서 다산초당까지의 300미터 길은 봄과 가을에서 초겨울은 모르겠으나, 여름은 피해야만 할 것 같다. 만만하게 볼 녹녹한 길은 결코 아니다. 한여름 무더위는 적어도 지옥훈련 이상일 것이다.
92개의 돌계단을 힘겹게 오르고나면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그리 크다 싶거나 그렇다고 작다고 느껴지지도 않는 아담한 기와집이 나타난다. 바로 다산와당((茶山瓦堂) 이다.
다산초당은 해남윤씨 가문에 의해 본래 초가집으로 지어졌고, 정약용 선생이 칩거하시는 내내에도 분명 초가집이었다. 그러다가 방치되고 훼손되어 역사에서 사라졌던 것을 1958년 옛사료에 준하여 복원사업을 펼친다면서 초가를 걷고 기와집으로 리모델링을 해버렸다. 언제나 그렇듯이 있는 그대로의 역사적 문화재와 복원의 사이에는 늘 비슷비슷한 문제들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늘 그랬듯이 오류가 반복된다. 있는 그대로의 재현과 현실적 반영 사이의 괴리 내지는 갭을 채우거나 극복하는 것이 그리 요원해 보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많은 학자와 사람들은 지금이라도 본래의 초가로 복원해 진정한 다산초당(茶山草堂)의 본래 모습으로 되돌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런가 하면 다산이 이곳 다산초당에 정착하고 4년쯤 지난 시점에서 초의선사(艸衣禪師)와 제자 윤동을 동행하고 월출산 자락 백운동 정원을 방문하고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성리학이야말로 우주만물의 근본이자 이치라고 생각하고 추구하던 조선의 사대부(어느 정도 출세한 선비)들은 너도나도 앞다투어 경치와 지세가 빼어난 곳을 찾아내 도처에 별서(別墅)를 짓기 시작했다. 대궐 같은 본가나 태어난 고향이나 농장이 있는 곳에 소규모로 짓고 작은 살림집으로 사용하는 별장(別莊)과는 사뭇 다른 용도로 지었던 별서(別墅)는 성공한 선비로서 은근하게 품위를 드러내는 한 방편으로 주로 사용되었던, 주로 책을 읽고 손님을 맞아 학문을 논하고 가야금이나 거문고를 타며 시를 짓고 노래하던, 어쩌면 양반사회의 최고 사치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꼭 그런 부정적인 모습만은 아닌, 소쇄원이나 백운동 서원이나 부용동처럼 진정한 선비의 기개와 의지와 고귀한 인품이 서린 별서(別墅)들도 많이 있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15세기 후반 이후로 방방곡곡에 서원과 별서들이 급격하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다산이 만덕산 귤동 초당에 입주한 지가 그럭저럭 4년 정도 지난 시점이었으니, 그동안 초당 주변의 환경도 상당히 많이 다산의 생각과 방식대로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귤림처사 윤단이 사돈조카인 정약용에게 만덕산 중턱의 초당을 무상으로 임대해 입주를 한 시기가 1808년 3월이었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윤단은 아들 윤규로(尹奎魯)를 포함한 3형제를 보내 늘 다산의 곁을 지키며 그에게서 선비의 도와 학문을 배우도록 하였다. 더하여 모쪼록 다산이 초당에서 생활하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가장 먼저 다산은 초당을 수리하여 귤호초당(橘湖草堂)이라고 직접 이름을 지어 붙였다.
그리곤, 외갓집 녹우당에서 2천여 권의 서책을 빌려왔는데, 3칸짜리 초가 하나로는 비좁아 윤단에게 청하여 지원을 받아 1809년 겨울에 2칸짜리 초가 한 채를 더 지었으니 지금의 동암(東菴) 이다. 이곳은 처음 책을 쌓아두기 위한 공간(도서관)으로 마련하였으나, 다산은 주로 이곳에서 책을 읽다가 그냥 잠이 들고는 했다. 그는 이곳을 송풍루(松風樓)라 불렀으며 이 당시의 흐뭇한 심정을 담아 시를 짓기도 하였다.
“산에 사노라니 만사가 한적하기만 해
새로 지은 띠집(茅菴)이 딱 두 칸이라네
방은 겨우 병든 몸 기거할 정도이고
들창은 청산을 대할 만큼 냈다네
소나무 바람 소리 피리이자 거문고요
푸르른 바위들이 병풍이요 장막이지
이천 권 서책이 가득 쌓여 있기에
언제나 문에 들어 기쁜 얼굴로 그를 본다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세입자가 본래 주인이 걸어놓은 명패를 떼어버리고 자신의 명패를 떡하니 내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자신의 처지는 분명 초당의 주인이 아닌 무상 임대자 신분이었다. 혹여 훗날 유배에서 풀려나 귀향하면서 뒤란의 커다란 바위에 (정암)이라고 기어코 새겨놓고 떠난 이유가 자칫 세입자 처지로 떠나고 나면 모두 지워지고 사라질까 염려해서가 아니었을까?
어쨌거나, 초의와 윤동을 데리고 떠난 백운동 정원은 다산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별서의 완결판이었다. 그것은 현실의 세계에 펼쳐진 그런 흔한 정원이 아니었다. 서책을 가까이하고 성리학을 어느 정도 깨우친 선비라면 누구나가 꿈꾸는 그런 선계(仙界)의 이상향이었다.
다산은 초의선사에게 ‘백운동 정원 12경’을 그리게 해 초당으로 돌아왔다. 그림을 수시로 펼쳐들고 백운동을 그리워하던 다산은 초의선사에게 다산초당의 그림도 부탁을 해서 <다산도>를 그렸다.
다산이 백운동을 다녀온 1812년 9월까지는 적어도 초당과 동암, 두 채만 있었단 뜻이다.
서암(西菴)은 배우고자 하는 제자들이 몰려들게 되자 강학하는 장소이자 제자들을 위한 숙소로 추후에 만들어졌고, 천일각(天一閣)은 다산이 늘 흑산도로 유배를 떠난 형 약전을 그리워하던 장소로, 구강포(강진만)를 건너다보이는 저 너머에 흑산도가 있기에 늘 다산이 서 있었을 그 자리에 1975년 지금의 천일각을 조성해 '약전과 다산의 형제애'에 헌정했다고 해야하겠다.
다산초당(茶山草堂)에 올라 주변을 모두 돌아본다고 해도 정작 거기에 필요한 시간은 아주 짧다. 모닝커피 한 잔 마실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그곳을 찾은 여행자의 생각과 보고자 하는 관점과 하기 나름의 시간차는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말이다.
이를 바꿔서 다시 말하자면 ‘다산초당은 아주 작고 사실 볼 것이 별로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울러 이런 표현은 필자의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과 판단일 뿐임을 전제로 한다. ‘호남의 3대 정원’이니,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정원이니 하는, 그동안 들어왔던 평가들이 의아스럽게 생각될 정도였다.
지금 보고있는 다산초당과 주변의 환경을 포함하는 정원의 모습이 정말로 사람들이 하나같이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느껴서 찾아오는 한국식 정원의 원형에 가까운 소중한 문화유산으로까지 떠받들어져야만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떨쳐낼 수가 없다.
부석사 무량수전에 가면 유흥준 교수께서 일깨워주신 덕분에 배흘림기둥에 대해 감회가 새롭고, 법주사 팔상전에 가면 황룡사 구층탑은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해지고, 무위사나 미황사나 문화재급 건축물을 대하면 그만한 가치와 품격을 지닌 고귀함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다산초당에서는 아무것도 새롭거나 특별하거나 고귀한 품격이나 가치 같은 것을 느끼지 못하겠다. 물론 평소 내가 유불선에 대한 지식이나 깨우침의 깊이가 지극히 미흡하기 때문이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들이 ‘다산초당’ ‘다산초당’ 하는 것일까?
다산 정약용의 후광때문일까? 다산 선생은 대한민국의 역사가 기꺼이 자랑스러워 할만하고 존경받아야 할 지식인이자 선각자이셨기에, 전설과도 같은 그분의 온갖 이야기에 빠짐없이 항상 등장해야만 하는 성소와 같은 곳이기에 없던 가치와 평가가 더해진 것은 혹 아닐까?
정약용 이라는 사람의 이야기와 흔적을 제외하고 나면 다산초당은 과연 어떤 곳일까?
필자가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과 판단하에 의구심을 갖게 한 주요 원인은 ‘지금의 다산초당 모습은 다산선생이 조성하고 거주하시던 본래의 모습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는 데서 기인한다. 물론 그동안의 복원이 나름 충분히 자료와 근거에 의해서 심혈을 기울여 회복되었을 것이라는 점에는 이의가 없다. 그랬음에도 본래의 모습과 같은 것보다, 없던 것이 첨가되거나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형된 부분이 훨씬 더 많다는 심증을 떨쳐낼 수가 없다.
다산 성생은 귤원처사 윤단이 아들 3형제와 조카들의 교육을 위해 초빙을 하자, 이를 받아들여 1808년 만덕산 중턱의 초당(草堂)으로 거처를 옮겼다. 초당 처마 아래에는 귤호초당(橘湖草堂)이라는 작은 현판이 걸려 있었다. 해남윤씨 가문에서 이곳에 책 읽기 좋은 장소를 만들면서 지그의 천일각 자리에서 내려다보이는 강진만의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를 현판에 담아 내걸었던 것이다.
귤호초당이 말이 산중정자이지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사실은 아주 작고 협소한 움막집 정도였다. 겨울이 닥쳐오자 윤단의 지원과 아들들의 도움으로 다산선생은 초당을 대대적으로 수리를 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이 초당의 새로운 실제 거주자임을 암시하는 다산서옥(茶山書屋)이라는 현판을 만들어 걸었다. ‘다산이 책을 읽으며 거처하는 집’ 이란 뜻이다. 혹, 윤단의 그릇 크기를 시험해 보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남의 집에 세들어가는 처지로 주인이 내걸은 문패를 떼어내고 세입자가 자신의 문패를 내거는 행위를 보기에 따라서는 충분히 오해나 다툼이 생길 수 있지 않았을까? 지극히 보수적인 조선시대였는데 말이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산선생의 위명이 워낙 높았거나, 윤단의 도량의 컸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보수 공사는 마쳤으나 크기가 워낙 협소했고, 애초 겨울을 나기 위해 지은 건물이 아니었기에 그해 겨울의 초당 생활은 다산에게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임시로 만든 부엌에서 직접 취사를 해결하려니 굶기 일쑤였고, 결국 산자락 너머 백련사 승려들의 도움으로 겨우내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다. 당시 건물이라곤 이 초당 하나와 좀 떨어진 곳에 허접한 뒷간 하나가 전부였다.
새해가 되자마자 상황설명을 하곤 생활환경 개선에 박차를 가했다. 초당의 우측으로 초가 2칸을 새로 만들었으니 지금의 동암(茶山東菴) 이다. 다산은 완공 즉시 거처를 새로운 건물로 옮겼다. 이는 초의선사가 그린 <다산도>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다산초당은 작고 허름해 보이고, 동암이 더 크고 중심적으로 그려져 있다. 다산은 새로운 거처에 송풍루(松風樓)라고 이름 지었다. 물을 끌어들여 연못을 만들었는데, 그림을 보면 연못이 하나가 아니라 두 개였고, 돌을 쌓아 사다리 방식의 텃밭을 만들어 꽃과 채소를 심었고, 나무를 옮겨 심었다. 옛 방식의 정원을 조성하였던 것이다. 아래쪽의 언덕에도 돌을 쌓고 작지만 제전(梯田)을 개간했다. 사시사철 마르지 않은 계곡물을 이용해 쌀농사는 물론 웅덩이에 미나리도 심었다. 후에 제자들이 몰려들자 기숙사를 겸해 서암(茶山西菴)을 또 만들게 되지만, 분명한 것은 이곳 다산서옥(茶山書屋)의 중심은 분명 동암이었다는 사실이다. 건물도 가장 컸고 쓰임새로 가장 중요했고, 다산선생이 기거하는 안채가 바로 동암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다산 초당에 오르면, 모든 중심은 다산초당(茶山艸堂)의 현판이 걸려있는 가운데 건물이 중심이고, 가장 크고 멋지게 조성되어 있다. 동암은 초당의 보조 건물이고 서암은 부속 건물이나 창고로 느껴질 정도이다. 다산선생은 이 자리에서 십 년 이상을 거주하시는 동안에 9년을 넘게 동암에서 거주하시고 독서를 하시고 집필을 하시고 제자들을 가르치셨다.
그렇게 보자면 초당 건물과 동암 건물을 맞바꾸고, 현판도 당장 바꿔야 하지 않을까?
지금 조성되어 있는 다산초당의 현실감와 본질감은 당시와는 사뭇 다르다. 아니 정도를 넘겨 전혀 다르다.
꼭 이렇게 까지 해야하는 것일까?
아쉽게도 달라졌지만 잘했다고 생각하고 다행이라고 생각되는 부분도 있다.
귤동마을에서 초당에 이르는 정취 가득한 옛길을 '뿌리의 길' 이라고 해서 '남도의 걷고 싶은 길'로 오랫동안 각광을 받아왔다. 수백년 묵은 소나무 뿌리들이 서로 얽힌 채, 토사가 유실되자 그대로 건천에 뿌리를 드러내고서도 강한 생명력으로 자생하고 있는 아주 인상깊은 풍경이었다.
이번 여행길에 나름 기대되는 풍경이었지만, 소나무 뿌리 보호와 토사 유실을 막고 탐방객의 안전까지 생각하는 차원에서 마포꺼치로 오솔길을 덮어놓고 있었다. 참 잘한 다행스런 일이라 생각되고 노력하신 손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보았다. 바로 위에 뿌리를 드러낸 사진은 참고를 위해 네이버 이미지에서 빌려왔다. 느낌이라도 전할 수 있음에 감사하면서.
지금의 만덕산 중턱에 조성된 다산초당은 현대적으로 재해석 된 엎그레이드 버전이라고 해야겠다. 원본은 초의선사의 그림속에 있다. 그래서인지 옛 스러움이나 한국 정원의 전형이라 부르는데 거부감이 있으며, 나는 초의선사 그림속의 다산서옥에 의미를 두고 싶다.
다산 선생은 살아생전에 이곳의 정자를 다산초당(茶山草堂)이라 부르신 적이 없다.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본인이 직접 쓰신 다산서옥(茶山書屋)의 현판을 걸었고 또 그렇게 부르셨다. 후대에 지금의 건물로 복원하면서 남다른 유대를 맺었었던 명필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선생의 글씨를 집자해서 만든 현판을 지금 걸고 있다. 지금의 현판마저도 추사 선생이 직접 써준 것이 아니란 말이다. 추사 선생의 편지나 책자를 모두 뒤져서 ‘다(茶)’ ‘산(山)’ ‘초(草)’ ‘당(堂)’ 네 글자를 골라 별도로 짜깁기해서 만들었다는 뜻이다. 요즈음으로 치자면 심각한 저작권 위배 내지는 무단 도용과 사용의 범죄에 해당할 수 있다. 그렇게 짜깁기한 현판을 전면에 내걸고 중심에 세워 주인공으로 둔갑시켜 버린 것이다.
다산초당의 중심은 누가 뭐라해도 동암이라 하겠다.
그 동암에 '보정산방(寶丁山房)'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는데, 그 뜻이 ‘정약용 선생을 보배처럼 모시는 산방’이라는 의미를 담아, 이 현판의 글씨는 추사 선생이 정말로 직접 써준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같이 걸려 있는 다산동암이나 다산서암과 송풍루 현판의 경우에도 어떤 부지런한 양반이 추사의 서책을 열심히 뒤져서 음과 뜻에 맞는 한 글자 한 글자를 퍼 날라 짜깁기해서 만들었다고 보고 있다.
이미 상당히 너무 많이 알려진 이야기임에도 현판 앞에서 ‘이게 추사 선생 글씨체래’ 하면서 요리조리 살피며 쉽게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곧잘 보고는 한다.
‘저기요. 저는 서예 전시회에서 무조건 중앙에 위치하면서 크고 까다로워서 읽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글씨체가 무조건 그게 추사체라고 하는 습성이 생겨버렸거든요? 얼추 맞더라고요.’
‘대가는 대충 휘갈겨 써요. 초짜가 죽어라 그림 그리듯이 또박또박 정자로 쓰더라고요.’
‘악필이 혹 명필이 아닐까?’
혹독한 겨울 새집살이를 경험한 다산은 1809년 봄부터 대대적인 초당 재개발 사업을 벌였다. 윤단의 지원을 받아 세 아들과 모여든 제자들을 동원하여 토목과 건축은 물론 주변의 환경개발과 조경공사까지 본인의 생각과 뜻에 따라 모조리 뜯어고쳤다. 더불어 해남의 외가에 청해 서책 2천여 권을 빌려왔으니, 이때부터는 제법 산중생활에 썩 만족하였던 듯싶어 보인다.
의식주 생활이 확 개편되었지, 읽어야 할 서책이 수북이 쌓였지, 학문을 배우고 싶어 하는 제자들이 날로 늘어갔지, 거기다가 생활 주변의 숲속이 온통 자연산 차(茶) 생산지였으니 이만하면 더 바랄 게 무엇이겠는가?
혹여 나에게 누군가가 유럽의 수도원 다락방 한 칸을 내주면서, 성내의 박물관과 도서관을 마음대로 이용하게 해주고, 그곳에서 해야 하는 일이 수도원에서 생산하는 전통 포도주의 품질 검사를 하는 일이라면......... 아마도 딱 다산초당에서의 정약용 선생과 비슷한 처지가 아니었을까?
어쨌거나 이때부터 다산 선생의 초당살이가 스스로도 썩 만족스러우셨나 보다.
한양 도성에서의 벼슬아치 생활을 그리워하기보다, 이렇게 멀리 떠나와 새롭게 깨닫게 되는 사실들에 대해 감격의 소회를 남기기도 하셨으니 말이다.
그 소회의 결과물이 무수히 많은 책을 저술하시게 되는 것이다. 그런 깨달음이 <목민심서>와 같은 저술 속에 고스란히 녹아 담겨지게 되는 것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라는 시련이 없이 도성에서의 벼슬 생활이 순탄하게 승승장구하였다면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를 비롯한 수많은 저서는 우리가 접할 수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도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고난이 없었다면 우리는 목민관 정약용이 아닌, 양반의 허세만 가득하고 적당히 부패한 지극히 평범한 그저 그런 양반 벼슬아치 중의 하나로 그를 만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가 목민관 정약용을 만날 수 있었던 역사는 참으로 감사할 일이겠으나, 정약용이 깨닫고 집필한 그 위대한 사상과 가르침이 현실에 전혀 반영되지 못했다는 사실에 참으로 안타깝고 억울해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혼란의 조선 말기에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가 널리 알려지고 나랏일 하는 사람이나 일반 백성에게 깨우침과 울림을 주어서 실생활에 제대로 반영되었다면........ 세상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다들 성리학의 가르침과 뜻을 입으로만 떠들어대고 싸움질을 일삼으면서도, 멀리 유배를 떠난 죄인의 올바른 외침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죽여 없애지 못해 안달이었으니 말이다.
정약용의 가르침은 그저 공허한 외침에 그치고 말았다. 그것이 당시의 엄연한 현실이었다.
오늘에도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는 입시나 시험문제에서나 겨우 제목만 다루는 경우가 다반사일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나랏일(공무원)하는 사람 대상으로 ‘읽고 싶은 책’ ‘가장 소중하게 기억되는 책’을 설문조사 했더니, 압도적으로 1위에 꼽힌 책이....... 아니 시대를 초월하고 언제나 부동의 1위를 차지하는 책이 바로 <목민심서(牧民心書)>라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목민심서>를 제대로 읽어보고 내용을 이해하고 깨우침을 얻었느냐는 질문에는 다들 손사래를 쳤다고 한다.
나랏일 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목민심서>를 제대로 읽고 배우고 깨우치고 실천하기에 노력한다면, 적어도 저녁 뉴스에 정치면이 차지하는 비중이 지극히 줄어들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지금 그것을 다산 선생에게 책임을 물어 따질 일은 아니지 않겠는가?
지금의 우리 정치판을 혹 다산선생께서 내려다 보신다면, 차(茶)를 드실까? 술(酒)을 드실까?
혹여 술(酒)이라면 내가 얼마든지 대접해 드리겠는데 말이다.
어쨌거나, 초당(草堂)인 다산서옥(茶山書屋)을 완전 리모델링 작업한 이후로의 서옥에서 생활이 다산 선생에게는 나름으로 만족스러우셨던 것으로 엿보인다.
서옥 주변의 풍경을 시로 지은 것이 이때부터 쌓여가기 시작했고, 제자들과 학문을 강론하다가도 수시로 서옥의 사계절 풍경을 감상하고 취하면서 더불어 차(茶)를 마셨다는 기록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다산사경첩(茶山四景帖)>에는 정약용 선생이 다산초당 주변의 다조(茶竈), 약천(藥泉), 정석(丁石), 연지(蓮池), 석가산(石假山) 등 주변 경관을 묘사한 한시들로 이루어져 있다.
네 개의 경치를 노래하면서 다섯 개의 소재가 등장하는 것은, 작은 연못 속에 조성한 돌산을 하나의 소재로 보아 석가산(石假山)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사실 <다산사경첩>은 처음부터 소유자가 분명하게 정해져 있는, 다산이 직접 써서 보낸 서찰이라고 할 수 있다.
다산의 초당생활은 귤림처사 윤단이 아들들과 조카들의 학문을 가르쳐주십사 청하면서 시작되었고, 글을 배우고자 하는 제자들이 많이 모여들어 시골 학교가 되다시피 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다산은 윤규로(尹奎魯)의 넷째 아들 윤종진(尹鍾軫)의 총명함에 반해 어린 그를 유독 아꼈으며, 그런 이유로 <다산사경첩(茶山四景帖)>이라는 시문을 적은 서첩을 직접 만들어 건네주었다. 윤단이 선생을 초대한 이유였겠지만 이런 사실을 접하고 얼마나 기뻐했을까?
茶竈靑石磨平赤字鐫 / 푸른 돌 평평히 갈아 붉은 글자 새겼으니
烹茶小竈艸堂前 / 차 끓이는 조그만 부뚜막 초당(草堂) 앞에 있구나.
魚喉半翕深包火 / 반쯤 다문 고기 목구멍같은 아궁이엔 불길 깊이 들어가고
獸耳雙穿細出煙 / 짐승 귀 같은 두 굴뚝에 가는 연기 피어나네.
松子拾來新替炭 / 솔방울 주어다 숯 새로 갈고
梅花拂去晩調泉 / 매화꽃잎 걷어내고 샘물 떠다 더 붓네.
侵精瘠氣終須戒 / 차 많이 마셔 정기에 침해됨을 끝내 경계하여
且作丹爐學做仙 / 앞으로는 단로를 만들어 신선되는 길 배워야겠네.
茶竈在池亭之前 / 다조(茶竈)는 지정(池亭)의 앞에 있다.
藥泉 玉井無泥只刮沙 / 옥정(玉井)이 흐레는 없고 모래만 깔렸으니
一瓢取爽餐霞 / 한 바가지 떠 마시면 찬하보다 상쾌하다오.
初尋石裏承漿穴 / 처음엔 돌틈의 승장혈(承將穴)을 찾았는데
遂作山中煉藥家 / 도리어 산중에서 약 닳이는 사람이 되었네.
弱柳蔭蹊斜汎葉 / 길을 덮은 연한 버들 비스듬히 물에 떠있고
小桃當頂倒幷花 / 이마에 닿은 작은 복숭아 거꾸로 꽃을 달고 있네.
消痰破癖而堪錄 / 담도 삭이고 묵은 병도 낫게 하는 약효는 기록할 만하고
作事前宜碧磵茶 / 나머지 또 길어다가 벽간다(碧磵茶) 끓이기에 좋다오.
藥泉 在池亭西北隅坮唯沮 / 약천은 지정(池亭)의 서북쪽 모서리에 있다.
余鑿之 淸泉自石中迸出 / 처음에는 그저 웅덩이였는데, 내가 이를 파자 맑은 샘물이 돌 가운데로부터 솟아났다.
차 다(茶)에 부엌 조(竈)를 썼다.
마당 한가운데 평평하게 다듬어 놓은 평상바위의 이름이 바로 다조(茶竈)다. 차를 달이는 부엌이라는 뜻이다. 제자들과 함께, 혹은 혼자서 너른 마당 한가운데의 평상바위에 앉아 다기에 맑은 물을 끓여 찻잎을 넣어 향기를 먼저 음미하고 나서 잘 우러난 차를 마셨을 것이다.
전해지기는 일지암(一枝庵)의 초의선사(艸衣禪師)와 마주앉아 물을 끓이고 찻잎을 넣어 우려내고 나누어 마시면서 마시는 차에 대한 연구를 이야기하고 실사구시의 학문에 대해서 토론도 벌였다고 전한다. 그땐 누가 차를 끓여냈을까? 손님 접대 차원에서 다산이 손수 끓였을까? 연배가 한참 뒤지고 차에 대한 전문가 입장에서 초의선사가 끓여냈을까? 암튼 그것이 다산초당의 1경이다.
차 맛을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 바로 물맛이다. 그리고 이곳 초당의 찻물은 석간수(石間水)인 약천(藥泉)이다. 바위틈에서 쉼 없이 솟아나는 샘으로 하늘이 맑게 비치는 샘이라 찻물뿐만이 아니라 식수로도 그만이었다. 다산의 <동다기(東茶記)>와 초의선사의 <동다송(東茶頌)>에도 약천이 등장한다. 우리나라 차(茶) 문화와 시작을 함께한 우물이 약천으로 다산초당의 2경이다.
하늘이 맑게 비치는 우물이라 언제 떠 마셔도 좋다. . 바위틈으로 쉼 없이 솟아나는 샘이다. 다산은 이 물로 차를 끓여 마시면서 일지암(一枝庵)의 초의선사(艸衣禪師)와 차를 연구하고 실사구시를 논하였다. 그것이 다산의 <동다기(東茶記)>와 초의산사의 <동다송(東茶頌)>으로 전한다. 아니나 다를까. 약천 주위의 대나무 숲속으로 야생차밭이 무성하게 들어서 있다.
정약용 선생의 호인 다산(茶山)이 ‘차나무가 우거진 산’이란 뜻이 새삼 새롭게 느껴진다.
다조에 둘러앉아 약천에서 길어온 물을 끓여 찻잎을 넣고 우려낸 후에 향과 맛을 즐겨본 후에 후당의 주변 경관을 둘러보면 병풍처럼 둘러선 바위에 정석(丁石)이라 새겨진 글자를 볼 수 있다. 바위처럼 단단하고 굳은 다산의 마음을 담아 직접 새겼다고 한다. 정(丁)은 정약용(丁若鏞) 자신을 가리킨다.
애초 이곳의 정자는 해남윤씨 가문에서 조성해 귤호초당(橘湖草堂)이라 부르던 별서였다. 이곳에 강진으로 유배를 내려온 정약용(丁若鏞)이 과외수업을 조건으로 무상임대를 받아 꼬박 십 년을 거처하였다. 세입자의 처지였으나 입주하자마자 올 리모델링을 한 후에 다산서옥(茶山書屋)이라고 현판을 만들어 걸었다. ‘정약용이 거처하며 책 읽고 집필하는 집’이라고 떡하니 전세권을 등기까지 마쳐놓았다. 그러다가 강진 생활 18년 만에 유배가 풀렸다. 한양으로 돌아가야 하는 일이 생겨버린 것이다. ‘이제 내가 떠나 버리면 이곳은 다시 귤호초당(橘湖草堂)으로 되돌아갈 것 아니야. 나 떠나면 내가 머물렀던 흔적조차 모두 사라지겠지?’ 부동산이 본래의 주인에게 되돌아가는 상황에서 파헤쳐 놓은 것에 비하자면 원상복구라는 강제조항이 없었던 시기였길 망정이지, 그랬음에도 그냥 순순히 내어주고 물러나기가 몹시 아쉬웠나 보다. 억한 마음에(필자의 지극히 주관적인 호기심과 판단으로는) 냅다 후당의 자연석 바위에 ‘정약용 꺼’ 라고는 차마 새기지 못하고, ‘정씨가 머물던 바위’라고 새겨놓았다.
그래놓고는 그래도 양반 체면에 학자이신지라 계면쩍으셨는지 그럴싸하게 시를 한 수 지어 ‘정씨 바위(丁石)’라고 붙여 놓으셨다.
아마도, 정씨 선생께서는 오늘처럼 다산초당이 유명한 명소가 되어 수많은 여행객이 늘 찾아와 붐비고, 다산의 인생과 학문이 희대의 관심사가 될 줄은 미처 생각을 못 하셨던 것 같다. ‘조선의 대표유학자이자 천재 = 다산 정약용 = 강진 유배 = 다산초당 = 목민관’이 21세기에도 여전히 핫이슈로 뜨겁게 달아오를 줄은 모르고 떠나셨나 보다.
혹, 아셨거나 짐작이라도 하셨다면, 굳이 바위에 자신의 흔적을 새겨놓고 떠나는 심통은 부리지 않으셨을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피에타 상에 ‘이 조각상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만들었다’라고 성모 마리아 옷깃에 새겨놓고 평생을 후회했던 것처럼 말이다. 꼭 그런 상황이 아니었을까 나는 생각해 보았다.
대나무 집 서쪽머리에 바위로 된 층계
연꽃성 꽃주인은 정씨(丁氏)에게 돌아왔네
학이 날자 그림자 떨어져 이끼 무늬 푸르고
기러기 발자국 깊어 글자 자취 푸르르다
미불(米芾)은 절할 때도 거만한 모습 드러내고
도잠(陶潛)은 술 취해도 꾸민 행위 벗어났네
부열(傅說)의 바위와 우(禹) 임금의 굴 온전히 잡초에 묻혔거늘
어찌해서 구구하게 또 글자를 새기랴.
천재들은 꼭 저렇게 저질러 놓고 슬쩍 발을 빼는 엉큼스러움이 있다.
자기 손으로 써서 새겨놓고는 ‘어찌해서 구구하게 또 글자를 새기랴’가 지금 말이 되나? 본인 스스로 생각해도 살짝 치졸한 느낌이 들기에 ‘ 다른데다 더 새기지는 않을테니, 이번 한 번은 슬쩍 눈감아 주면 안 되겠니?’ 하는 뻔뻔한 본색이 은근슬쩍 드러나는 것 같다.
그런 행위는 정석(丁石)에서 끝나지 않았다.
정약용은 초당과 동암 사이에 인공으로 연못을 파서 만들었다. 지금은 하나뿐이지만 당시에는 지금의 연못 아래로 하나가 더 만들어져 두 개의 연못이 있었다.
땅을 파서 둘레에 돌을 쌓아 만든 연못에 나무에 골을 판 홈통을 연결해 계곡의 물을 끌어들였다. 거기에 물고기를 놓아 기르고 연꽃을 심었다. 석가산의 봉우리가 셋이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제자들과 강진만에서 잘생긴 돌들을 가져와 연못의 한가운데에 돌섬을 쌓아 올렸다. 이 섬을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이라 해서 모든 양반 선비들이 꿈꾸는 한국식 정원에는 반듯이 조성되어 있어야만 하는 하나의 원칙이자 이상향의 실현으로 여겨지는 필수조건 중 하나였다.
다산은 이렇게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석가산을 보면서 또 시를 지었다.
모래톱의 기이한 돌 모아 산봉우리 만들며
본디의 지닌 모습대로 실어다 꾸몄다네
험준한 산 묘하고 안정되어 세 탑 모양
험준한 바위틈에 소나무 하나 심었네
빙 두른 기이한 모습 봉황새가 쭈그린 듯
뾰족한 곳 얼룩 무늬는 죽순등걸 솟았네
거기에다 샘물 끌어 연못으로 둘렀으니
고요히 물 밑 바라보니 푸르름이 어룽어룽.
‘한국식 정원’이나 ‘별서’ ‘별장’에 대해서는 아마도 다음 장(이야기)에서 다시 좀 더 심도 있게 다루어보게 되겠지만, 얼핏 다산초당 툇마루에 앉아 쉬자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일단은 세속의 일, 그러니까 과거에 합격하고 벼슬길에 나가보니 돈과 권력에 집착하게 되고 불의와 타협하게 되고 시간이 지날수록 성리학의 참된 이념과 가치관과 동떨어진 삶에 익숙해져만 가게되었다. 더 많은 것을 탐하거나 차지하기 위하여, 살아남기 위하여 다투고 모함하고 시해하고 뺏고 뺏기는 일이 지극히 일상적인 다반사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그런 폐단의 피해당사자가 되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혹여 다툼에서 지게 되면 곤욕을 치루거나 삭탈관직이 되거나 귀양을 가거나 사약을 받기도 한다. 더 심하면 육족 내지는 구족이 화를 입는 멸문지화의 지경이 벌어지기도 한다.
벼슬에서 쫓겨나 유배에 오르면 다시 둘로 나뉘게 된다.
살아남아 복권이 되면 돌아가서 반듯이 복수를 하겠다는 부류와 허망함과 부질없음을 깨닫고 낙향하여 적당한 선비행세를 하며 유유자적 양반의 진짜 즐거움을 찾아가는 부류가 있다.
정약용의 귀양살이나 윤선도의 부용동 삶이나 이담로의 백운동 정원이나 양산보의 소쇄원이 모두 후자에 해당되는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조물주나 군왕의 절대적 권력의 횡포에서 물러나 자연 속에 숨어들 듯 은거하면서, 산거무사(山居無事)의 도가적 삶을 은근하게 지향하고 있지만, 그 은거지에서 나무와 바위와 물과 꽃과 물고기들을 상대로 소소한 권력 맛보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석가산은 은둔자가 자신만의 영역 안에서 행사하는 최소한의 창조행위인 것이다. 조물주나 임금이 자신들 맘대로 세상을 주무르는 것이 못마땅했던지라, 자신의 영역 안에서 자신의 생각과 행위로 실현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상세계를 다양하게 실험해보고 연구하는 행위의 연장선상이다고 나는 생각했다. 벼슬길에 나서서도 펼쳐보지 못한 자신의 이상세계를 그곳에서 그런 방법으로 실현해보고자 한 것이라고 말이다.
그들은 자연 속에 은거하면서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했으면서도, 자신들은 슬쩍 밖을 내다보기도 하고, 지인과의 지속적 교류를 통해 세상의 일(권력의 돌아가는 동태)을 꾸준히 예의주시하기도 했다. 왜? 현실과 이상 사이에는 항상 어떤 괴리가 존재하는 법이니까 말이다.
그런 이야기는 차차 더 풀어나가기로 하겠다.
만덕산 기슭의 다산초당 여행은 언제나 산자락 너머의 백련사로 연결된다.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두 곳 여행지 사이에 다산 선생이 끼면 즉시 한 몸으로 변신한다. 뗄 레야 뗄 수가 없는 불가분의 관계가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유명 여행지 중에는 이곳과 아주 흡사한 경우에 해당하는 장소가 또 있다. 전남 순천 땅 조계산에 가면 만날 수 있는 송광사와 선암사가 아주 닮은꼴이라 할 수 있다.
송광사에서 마당재를 넘어 선암사에 이르는 길은 그리 호락호락한 길이 아니다. 거리도 그렇다. 세 시간, 혹은 네 시간을 땀 흘려 걸어서 10.5km를 가야지만 반대편 목적지에 당도하게 된다. 종파가 달랐어도 서로 교통하면서 한국 불교 역사를 써내려 온 스님들이 넘나드시던 길이다. 그런데 이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은 여기 마당재 고갯길에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맛있게 보리밥을 먹을 수 있는 식당들이 있어서 여행객들에게 쉼의 소중한 시간을 제공해 준다. 필자가 꼭 권하고 싶은 그런 길이다.
거기에 비하자면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를 오가는 길 쯤이야........
거리도 1km 안쪽(800m)에 불과하고, 그럼에도 잠시 쉬었다 가라고 중간의 풍광이 빼어난 언덕에 해월루라는 정자가 있어 한 번쯤 올라 남도자락의 풍광에 취해보는 것도 좋다.
이 길에서는 대나무 숲속에 자생하고 있는 차나무도 만날 수 있고, 보기 드문 명품 동백 숲길은 빨간 동백이 떨어져 여행자의 발길에 즈려 밟히던 시기에 여행자가 올린 후기와 사진을 보고 무척 부러워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백련사 주위로 펼쳐진 너른 차밭도 너무나 인상적인 곳이다.
그리고 이 길은 다산초당의 정약용 선생과 백련사의 주지였던 혜장선사가 오고 가면서 차를 함께 나누면서 차를 연구하고 유불선을 넘나들며 학문을 논의하던 사색의 길이다. 대나무 바람 소리와 차의 향기와 동백의 선홍빛이 어우러진 사색하기 좋은 최고의 명품 길이라 생각한다.
그러면 뭐해?
개뿔!!!
다산선생이 흑산도로 유배 간 형을 그리워하던 자리에 세워진 천일각의 멋진 풍광에 실컷 취하고 나서 백련사로 향하는 길목의 안내간판 앞에 섰는데......... 아뿔싸!
세리 할머니가 지난달에 수술한 무릎 부위에서 위험 경고음이 울리고 말았다. 회복단계에서 가벼운 산책 정도의 여행 계획을 세웠는데, 느닷없이 등장한 다산초당의 가파른 92개의 돌계단이 조금 무리가 되었나 보다. 800m가 왕복이면 1.600m가 되는데......... 아직 내려가야 할 계단 길도 있고 해서, 일단은 이쯤에서 일단 조심해 내려가고 차로 백련사로 이동하기로 하고 하산을 시작했다.
아쉬움 보다는 당장 내려가야 하는 길에 더 걱정이 앞섰다. 이제 막 시작한 여행의 첫날인데 말이다.
<다산초당과 정약용> 이야기는 별도로 다음 기회에 아주 심도있게 다루어 볼 생각이다.
다행스럽게 귤동마을에 무사히 내려와서 주차장에서 차에 올라 백련사 방향으로 향하는데...... 또 아뿔싸!
비다.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이론? 이론? 이러면 안 되는데? 오늘 여행 첫날 저녁은 캠핑이란 말이야?
비가 와도 좋은데........ 텐트는 설치하고나서 오면 안되겠니?
<주작산 오토 캠핑장>
애초에 이번 여행의 거점은 오로지 해남땅 땅끝마을이었다.
그곳의 캐핑장과 카라반을 이용해 일주일을 보내고 올 계획이었다. 그런데 부득이하게 차질이 생겨버렸다. 내가 선택한 땅끝의 캠핑장이 연휴 기간 일요일과 월요일이 휴장이라는 것이었다. 월요일이 출발이었으니까 일단 하루를 보낼 장소를 섭외해야만 했는데, 모처럼의 긴 연휴 때문에 하루 숙소를 구하기 어려워 완도의 사설 캠핑장을 섭외했다가 우연히 주작산 캠핑장에 예약 취소된 자리가 있는 것을 알게 되어 긴급으로 하루를 예약했다. 소쇄원이나 백운동 정원 답사를 생각하면 오히려 다행일 수도 있는 선택이었다.
그래서 아무런 기대도 준비도 없이, 그냥 편하게 여행 첫날 강진을 돌아다니다가 해질녘 주작산 휴양림에 가서 텐트도 작은 것으로 가볍게 설치하고 최소한의 짐만 꺼내서 춥지 않게 하룻밤만 간단하게 보내고 나서 아침에 일찍 짐을 싸서 해남으로 이동한다는 것이 애초의 계획이었다.
카라반은 이미 예약을 마쳐 놓은 상태지만, 캠핑장의 경우는 선착순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연휴를 생각하면 그래서 일찍 서둘러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집에서 멀리까지 제법 시간을 걸려 이동하였고, 소쇄원에 취해서 시간을 많이 소요시켰던 터에다 다산초당에 머문 시간도 짧지 않았던 탓에 비록 저녁 무렵이기는 했는데 느닷없이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중부지방과 강원도는 주말까지 비가 내린다고 했지만 남부지방은 흐리기만 한다고 했는데.......
부랴부랴 서둘러 주작산 휴양림으로 향했다.
한 마디로 작고 아담한 야영장이다.
숲속 데크는 10개이고, 주자장 오토캠핑 데크는 6개 정도 되는 것 같다. 정말 소규모 야영장이다.
우리가 예약한 데크는 1번인데 2번 데크와 너무나 가까운 이유로 현재 2번은 예약을 받지 않고 있다. 덕분에 1번을 예약하면 단독으로 1번과 2번 데크 영역을 혼자 사용할 수 있다. 살짝 짐 나르는 부담을 제외한다면 나는 기꺼이 1번을 추천하고 싶다. 화장실. 취사장 사용에도 최고로 유익한 선택받은 장소라 할 수 있다.
굵게 변한 빗방울이 제법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사방에 어둠이 내렸다.
예상했던 것들이 순식간에 망자겼고 엉망이 되어 버렸다.
간단하게 가벼운 하룻밤을 예상했는데 비와 날씨탓에 그렇게 간단하게 넘어갈 수 없게되어 버렸다.
주작산 야영장의 데크 크기는 5x5m 사이즈다. 원래는 3.2x3.2 크기의 텐트를 치려고 했었는데, 그것으로는 비오는 밤을 편히 보내기는 무리고, 4x4의 몽골텐트를 치려니 면 텐트라 비를 맞으면 다음 날 회수에서 말리기까지가 여간 고역이 아니라 망설여지고, 쉘터형은 4x6m라서 땅끝에서나 사용할 예정이었다.
결국 작은 데크에 큰 텐트를 올렸다. 나머지 부분을 데크밖의 비탈노면에 노출시키는 방법을 선택했고, 작은 텐트를 이너로 넣었다. 어두운 마당에 비까지 맞으며 설치하느라 상당히 애를 먹고 사이트 핏을 살리는 것은 애초부터 포기했었지만 이제까지 캠핑 중에서 난이도가 약간 있었던 경우였지만 가장 폼이나지 않는 꼴이 되고 말았다.
장에 들려보지도 못했고 하나로 마트에 갈 상황도 없었기에 대충 싸 가지고 온 비상식량으로 저녁을 해결했다. 비 때문에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참으로 다행스럽게 따뜻하고 아늑한 휴식처는 제대로 완성되었다.
밤새 비가 제법 내렸다.
무수한 빗방울이 텐트위로 쏟아져 내리며 자잘거리는 잔 소움으로 밤새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우거진 편백나무 숲 위로 쏟아져 내린 비는 가지를 타고 흘러내리다 굵은 물방울로 뭉쳐져 울림이 있는 물소리로 텐트 위로 떨어져 부서져 나간다. 그 울림이 신선하게 느껴진다. 굵은 빗방울 소리와 tbv 사이를 헤집고 들어오는 편백 바람 소리 이야기를 하다가 저절로 잠이 들어 버렸다. 자장가였던 모양이다.
여느때처럼 일찍 일어나 모닝커피를 마시다 말고 밖이 환해졌음을 확인하고는 산책을 하시겠단다. 비가 내리고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따라 나가 아침 고요에 푹 빠져있는 캠핑장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정말로 작고 아담한 야영장이다.
다른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고, 오로지 우거진 숲속에서 조용하고 호젓한 캠핑을 즐기고자 하는 캠퍼들이 찾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다시 오고 싶어지는 그런 곳이다.
이젠 철수를 해서 서둘러 해남 땅끝으로 가야한다.
그런데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다.
대충 짐꾸리기를 시작한다. 비박때를 제외하고 이렇게 달랑 하룻밤만 보내고 서둘러 철수를 해본 기억이 전혀 없다.(시방 이게 뭔 짓이래?)
짐을 바리바리 싸서 트렁크에 쓸어 담다시피 집어넣고 뒤자리에 바닦깔판을 펼쳐 간다. 텐트를 폴대만 빼내고 나서 둘둘 말아 끌어안아 날라서 뒷좌석에 그대로 꾸겨 넣는다. 달리 선택할 방법이 없다. 차차 말려서 사용하는 것은 차후 문제다. 그나마 날씨가 도와줘야 하는 다른 영역이다.
‘떠날 때는 언제나 처음 왔을 때 처럼!’
주작산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더 남쪽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한다.
해남 땅끝 오토 캠핑장을 향해서.
‘선착순 입주에 밀려나면 큰일나는데....... 그래도 어디 들려서 간단하게 아침은 먹고갈까?’
‘여기까지 데려와서 전기없는 노지에 노숙시킬 생각이니? 먼저 가서 자리 잡고 나서 텐트 말리고 설치해서 뽀송뽀송한 캠핑 시켜줄 생각부터 해야지, 선착순을 코앞에 두고 지금 밥이 넘어가겠니?’
‘그 큰 야영장에 내가 자리 하나 차지하지 못할까봐?’
‘자리만 차지하면 그만이니? 고생 시키려고 여기까지 데려온거니? 캠핑장은 자리가 8할을 차지한다며? 제대로 된 자리 없으면 난 집에 올라갈래. 그러니까 최대한 성의를 보여봐.’
‘내가 좋은 자리 생각 안해 뒀을까? 걱정하지 마.’
‘당신이 좋다고 생각해 뒀으면 남들도 다 그렇게 생각해서 더 일찍 쫓아오는거야. 몰라?’
‘알써. 내가 죽어라 달려간다. 그 좋은 자리 꼭 차지한다. 나머진 날씨가 문제겠지만.’
‘날씨가 어째서? 내가 떠나올 때 비구름을 주작산에 묶어놓고 왔어. 그러니까 날씨는 좋을거야.’
‘하이고. 태리 세리하고만 다니더니 이젠 뻥까지 늘었어요. 뭐? 구름을 묶었다고?’
‘저기 봐. 해가 따라 오잖아?’
헐!!!!!!!
창밖을 올려다보니 아침 햇쌀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헐!!!!!! 이럴수가?
-- 다음 새로운 여행 이야기로 이어지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피안재.
-- 글 올리는 작업중입니다. 하는 일이 바쁘다 보니 조금 시간이 걸리겠습니다. 기다려 주세요.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