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리의 여행)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다큐멘터리를 연재하기도 했던 패트릭 스콧(Patrick Scott)은 뉴욕 타임즈의 요청으로 한동안 (급부상하는 베트남 관광사업 )을 연재해서 크게 각광을 받았다. 베트남의 역사와 문화와 풍속과 음식과 서민들의 생활은 물론 경제발전과 급성장하는 소도시를 심층 취재해 세상에 널리 알렸다.
그중에서 내게 매우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기사로는 푸꾸옥에 관한 심층취재 기사였으며. 특별히 스콧은 혼똔섬의 케이블카에 크게 매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재된 기사 내용 중에서 스콧은 푸꾸옥의 케이블카에 대해서 이렇게 적었다.
"세계에서 가장 긴 여객용 케이블카 시스템의 일부인 케이블카 객실에 앉아 있습니다. 약 8km에 달하는 구간을 조용히 달리는 케이블카는 베트남 남부 푸꾸옥섬 해안에서 에메랄드빛 바다 위로 50층 높이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화창한 3월 오후, 케이블카를 타고 혼똔섬으로 돌아가는 동안 수백 척의 형형색색의 나무 어선들이 수정처럼 맑은 수면위에 떠 있습니다. 섬 투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20분 남짓한 여정이 끝나갈 무렵, 푸꾸옥 케이블카역과 그 주변에 새로 지어진 마을이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역은 마치 실물 크기의 조립식 콜로세움 모형 같았고, 마을은 거대한 종탑, 광장의 바로크 양식 분수, 복원된 로마 유적 등 이탈리아 해안 도시를 정교하게 재현한 모습이었습니다. 그 주변에는 베니스, 아말피, 포지타노, 소렌토 등의 이름을 딴 거리들을 따라 수백 채의 파스텔톤 테라스형 건물들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는 거대한 선 월드 혼톰과 선셋 타운 관광 단지가 베트남에서 가장 놀라운 인공 명소 중 하나라고 언급하면서 기사를 마쳤다. 그의 연재에는 놀랍게 변모해 가는 베트남 사람들의 생활상과 경제발전에 중심을 두었으며, 그 핵심에 케이블카가 중용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베트남은 지난 20년 동안 전역에 약 26개의 케이블카 노선을 건설했다. 그중에 4개 노선이 세계에서 가장 긴 케이블카의 최상위순위에 꼽힐 정도인데, 이것들은 비교적 최근인 10년 안에 건설된 것으로, 베트남은 케이블카 건설에 있어서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진심이다. 그 진심이 고스란히 베트남의 경제와 관광 산업의 눈부신 성장으로 이어졌다. 그것은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아시아에서는 거의 독보적이며 세계적으로도 이미 최고로 인정을 받고있는 것이 바로 베트남의 케이블카 개발 분야이다. 그 내막에는 케이블카 개발에 있어서 세계 최고라 할 만한 오스트리아의 도펠마이어 그룹과 베트남 최대 관광 및 부동산 개발업체인 선 그룹이 협력하여 이뤄낸 결과라고 하겠다.
필자는 이것을 개발도상국 처지의 한국에서 겪었던 자동차 개발 사업과 비슷하다고 보고 있다.
최고 대기업이 되려면 적어도 자기 고유의 브랜드를 내건 자동차를 생산해야 한다는 풍조가 당시에는 만연해 있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최고 승자는 초기에 일본 미쓰비씨의 엔진을 가져와 드럼통을 자르고 펴서 두들겨 맞추었다고 하는 현대의 승리로 남았다.
베트남은 소재를 자동차에서 케이블카로 바꾸었다. 최고 재벌인 빈 그룹과 선그룹이 케이블카 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현재에도 무한 경쟁중이긴 하지만, 하지만 당장 베트남 케이블카의 최고 발전과 기준은 아마도 선그룹이 아닐까 생각된다.
베트남의 지형은 그야말로 가혹하다고 할만하다.
세계를 정복했던 몽골군이 베트남 침공을 실패하고 물러난 이유가 정글과 늪지와 병해충 때문이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때문에 그들은 산과 정글과 습지와 섬이 유독 많아서 도로 건설 보다는 케이블카 시스템 구축이 더 효율적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그 핵심에는 다리를 놓고 터널을 뚫어가며 건설해야 하는 도로 건설에 비하여, 우선 시간이 단축되고 크게 비용을 절감할 수 있으며, 건설 과정에서 발생하는 환경 피해도 훨씬 적다고 소리를 죽여가며 보충 설명을 늘어놓는다.
그런 이유들을 들어 베트남과 같은 개발 도상국에서 케이블카가 점점 더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활용되는 추세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베트남을 두고 이런 주장은 모두 거짓말이다. 핑계를 넘어 완전 거짓말이다.
개발도상국에서 케이블카를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활용하는 예는...... 적어도 베트남에는 없다.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에는 캐스케이드(The Cascade)라는 신개념의 대중교통이 등장했는데, 그것이 발전하여 현재 케이블카를 공공목적의 대중교통으로 사용하는 곳이 속속 등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베트남의 경우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캐스케이드는 예레반 도심의 중심가와 118m의 가파른 바위벼랑 위에 늘어서 있는 빈민가를 연결해 주기 위한 대중교통의 목적으로 세워졌다. 단절된 번화가와 빈민가를 연결해 서민들의 생활 향상을 위해 기획된 572개의 계단이 바로 캐스케이드다. (구) 소련을 통 털에 세 손가락 안에 꼽히던 예레반 출신 건축가 타마니얀은 고립된 산꼭대기의 서민들을 위해 이 거대한 계단을 구상하고 계획했다. 118M의 높이를 5개층으로 나누어 572개의 계단을 만들었다. 이 거대한 건축물은 단순한 그냥 계단이 아니라, 갤러리도 되고, 조각 공원도 되고, 휴식처도 된다. 드러나 있는 계단 건축 안쪽으로 5개 층의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해 놓은 것이다. 이 일대은 하나의 거대한 기념물이자 조각 공원이 되었다. 맨 위쪽에 정말로 거대한 예수상을 건설중이다. 타마니얀은 부자촌과 판자촌의 단절을 해결하여 문화생활과 여가생활은 물론 경제활동의 영역까지 원만한 교류와 소통을 통해 개선되어 나가기를 희망해 캐스케이드를 건설했다. 이 해괴한(?) 시도는 세계적으로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특히 개발도상국들의 도시 건설이나 재개발에 큰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이제 캐스케이드는 아르메니아 예레반의 랜드마크이자 아르메니아인들의 자부심으로 자리 잡았다.
극도의 열악한 환경이나 상황에서 에스컬레이터도 나름으로 훌륭한 대중교통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다는 사실을 훌륭하게 입증해 보여준 것이다.
그런 모범 사례로 점차 세계 각지에, 그리고 다방면에 걸쳐 퍼져 나가던 캐스케이드의 영향력은 남미까지 파급되어, 케이블카도 대중교통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마침내 입증해 내고 말았다.
볼리비아 수도 라파스에 설치된 ‘미 텔레페리코(Mi Teleférico)’케이블카는 산아래의 도심(라파스)과 산꼭때기(엘알토)의 사이를 연결해 주는 그야말로 완벽한 케이블카 대중교통으로 2014년 처음 개통해 꾸준히 노선을 늘려가 현재의 10개의 노선을 갖추고 있다. 흡사 우리나라 지하철 노선처럼 산꼭대기의 구석구석을 찾아 연결해 주고 있는 신개념의 대중교통이라 생각하면 되겠다.
라파스 케이블카는 처음 개통 5년 만에 누적 탑승객 2억 명을 돌파한, 세계에서 가장 긴 케이블카(30.5km)로 이전까지의 푸꾸옥 혼똔섬의 케이블카를 재치고 등극했다. 라파스의 높이가 해발 약 3.600m라고 생각해 보자. 백두산에 절반 높이를 잘라서 더 올려놓았다고 말이다. 그런 라파스의 까마득한 높이의 산꼭대기 마을에서 무언가를 내다 팔거나 구입하기 위해 등짐을 지거나 나귀를 몰고 라파스까지 고개를 넘고 넘어 벼랑길을 내려가고 산자락을 삥 돌아서 다녀오자면, 꼬박 하루가 걸렸으니, 거기에 또 힘은 얼마나 들었겠는가? 고개를 들어보면 저만치 언덕 위에 집이 보이는데, 겨우 도착하면 날이 어두워지고 초죽음이 되기 마련이다. 그런 산동네에 케이블카가 들어섰다. 아주 저렴한 대중교통 비용만 지불하면 언제든 아주 쉽게 도시를 오르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물류가 가능해졌고 의료가 필요한 비상시에 대처할 수 있었고, 가장 중요한 자녀들의 교육이 수월해졌다. 생활이 달라졌음이요, 꿈과 희망이 생겨났다.
이런 라파스의 ‘미 텔레페리코(Mi Teleférico)’케이블카는 개발도상국은 물론 많은 국가의 도시 재개발과 재건에 있어서 가장 이상적인 하나의 모범사례로 기억되고 있다. 아울러 ‘세계에서 가장 긴 케이블카’ ‘세계에서 가장 이용객이 많은 케이블카’ ‘세계에서 가장 지대가 높은곳에 위치한 케이블카’로 기네스북에 신기록 3종 세트로 적혀 있다.
베트남의 케이블카 개발 역시도 대중교통의 역할 대체를 늘 주장해오고 있지만, 거듭 다시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말짱 거짓말이다. 그 케이블카를 한 번 타보기 위해서 적어도 25달러(삼만칠천원)에서 45달러(육만오천원) 사이의 왕복 티켓을 구매해야만 한다면 그것을 대중교통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 정도면 뉴욕이나 런던의 시민들도 절대 감당해 내지 못하는 수준이다.
베트남의 케이블카는 오로지 대기업의 이윤추구만을 목적으로, 여행객을 끌어들일 만한 장소에만 건설하여 다른 교통수단이 불가능한 상황을 만들어 독점적 수익을 창출하기 위한 외통수 사업수단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절대 아니다.
베트남에 어떤 대중교통 수단으로서의 케이블카가 있는지 나는 아직 경험해보지 못했다. 대신 다낭의 바나힐 케이블카 2번, 나장 빈펄랜드 2번. 푸꾸옥 혼돈섬 케이블카 2번을 타보았지만, 하나같이 결코 싼 비용이 절대 아니었다. 현지인들의 대중교통과는 전혀 상관없는, 해외 여행자들의 주머니 사정을 노린 외통수 가격책정이다. 대중교통? 그 비용이면 손오공이나 염라대왕도 기절하고 말 것이다.
그럼 베트남의 재벌 기업들은 왜 그렇게 케이블카에 몰두하는가?
아마도 그것은 한국에는 있으나 베트남엔 없는 대략 3가지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것을 아주 쉽게 다시 풀어서 설명하자면 ‘국가 차원에서 책임졌어야 할 기본 인프라 구축’이 한국엔 이미 있고, 베트남엔 없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물론 이것이 아주 고리타분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으나, 필자의 주관적 생각과 판단에 근거한 것이다)
‘베트남 역사엔 대한민국 1970년대 초에 있었던 거대한 변화를 준비하는 국가 차원의 혁명 같은 역사가 없다.’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고속도로는 1968년에 착공해 1970년에 완공되었다. 기획에서 설계와 준설과 완공까지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구워 먹기 식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한민국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경부 고속도로의 완공과 동시에 정부는 포항제철공장의 건설을 목표로 진입도로와 공장 터를 닦기 시작하고 있었다. 포철 또한 착공 3년 3개 월만인 1973년 7월 3일에 준공식을 거행했다.
이 시기에 겹쳐서 1970년 4월 ‘새마을 가꾸기’란 이름으로 전 국민의 생활환경과 정신적 의식 개선을 위한 국민 운동이 처음 제기되었고, 71년에 근면. 자조. 협동을 기반으로 하는 (새마을 정신)이 본격적으로 등장하였으며, 72년에 전국민적인 (새마을운동)으로 발전해 나갔다.
이 3가지 혁신은 어느 일 개인이나 하나 둘의 특정 기업을 위한 것이 아닌,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국가발전의 기초적 인프라를 정부의 주도로 강력하게 밀어 부친 결과로 끝내 완성된 것이다. 정경유착. 부정부패. 찬반여론. 인권과 탄압 등의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끝내 목표 이상의 완공과 성과를 이루어 냈고, 세계를 놀라게 한 ‘한강의 기적’은 바로 이 3가지 혁신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대한민국이 이런 혁신의 기반을 이룩하고 나서야 비로소 외압(미국 지배)으로부터 독립(1975년)을 쟁취한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은 오랜 전쟁과 열강들의 수탈로 인해서 어떤 산업적 기반도 가지지 못한 열악한 환경뿐이었다. 정글에서 게릴라 전으로 수십 년을 이끌어 온 베트남의 유일한 정부 공산당은 국제 정세와 자본주의 방식의 시장경제에 문외한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가진 산업시설이란 것이 미국이 전쟁을 수반하기 위하여 한국군과 일부 특정 기업을 불러서 건설한 군사용 다리와 도로와 비행장과 군막 시설이 거의 전부였다.
세상은 무섭게 변해갔는데, 베트남은 어느 하나 제대로 갖춰진 것이 없었다. 하여 공산당 일당의 체제 안정을 우선적 기반으로 하고, 젊은 인재들을 선발해 해외로 유학을 보냈다. 그 인재들이 해외에서 선진문물을 배고 경제의 흐름을 목격하고 기술을 배워 베트남으로 돌아와 보니....... 기본 인프라가 전혀 준비되지 않았던 것이다. 고속도로가 없고, 현대적 공항과 항구가 없고, 제철소가 없고 발전소가 없어서 전기가 부족했다. 공부를하고 기술을 배워 돌아왔는데, 정작 그것을 써먹을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이 젊은 유학파들이 보고 듣고 배운 세상은 수십 년 전의 2차 산업적 개발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기계설비 공장을 세우고, 엔진을 개발하고, 플랜트를 건설해 수출하는 구닥따리 산업개발은 먼 과거속의 유물일 뿐이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산업은 3차 4차의 다분히 소프트 웨어적인 산업이었다. 다리를 놓고 건물을 짓고, 전기를 끌어오고, 철강을 생산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사업으로, 이들에게 그런작업은 그냥 기획하고 계산하고 나서 하청을 주어 비용을 지불하면 되는 사고방식을 가진 그런 21세기형 미래산업주의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이었기에 종합 테마파크를 지으면 돈을 벌겠는데, 멀리서 고속도로를 만들고 발전소를 지어 모자라는 전기를 끌어들이고 하는 험난한 기초 공사를 먼저 해야하겠다고 생각 할리가 없지 않겠는가? 그런 차원에서 보다 쉽고도 간단하게 도로 보다는 케이블카를 선택하게 된 것이다. 도로는 국가 차원의 몫이고, 케이블카는 자신들만의 독점 수익사업이 되기 때문이다.
베트남의 최고 재벌 자리를 놓고 다툼을 벌이고 있는 빈그룹(Vin Group)의 팜 녓 브엉(Pham Nhat Vuong) 회장과 선그룹(Sun Group)의 레 비엣 람(Lê Viết Lam)은 친구이자 사업 동지라고 할 수 있다. 두 기업은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통일을 완성한 베트남은 개혁을 위해 우수한 인재를 발굴하여 육성하는 차원에서 유학을 보냈다. 브엉 회장과 람 회장은 그 선발에 뽑혀서 나란히 모스코바 대학으로 국비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말이 국비유학생활이지 현지에서의 생활은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다. 같은 처지의 유학생 여섯명이 모였는데 브엉과 람이 그 중심에 있었다. 처음 이들은 작은 베트남 국수집을 열었고, 베트남의 친척에게서 수입하는 식재료를 인근의 동남아 식당에 납품함으로 수익을 낼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서 그들은 졸업하게 되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곧바로 귀국하는 대신 우크라이나 키이우로 우르르 몰려갔다.
당시 (구)소련이 몰락하면서 16개국이 독립을 하였는데, 우크라이나도 그중의 하나로 가장 크고 부유한 나라였다.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의 젊은 인재였던 이들은 사회주의의 심장인 모스크바에서 공부했고 사회주의 왕국 소련의 붕괴를 현장에서 누구보다 생생하게 목격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모스코바에서의 아르바이트를 통해서 자유 시장경제를 스스로 체험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사회주의 체제의 간섭과 제재가 완전히 풀려버린 것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맛을 보게 되었으며, 그것이 곧 새로운 기회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들은 우크라이나 키이우에 식재료 유통회사를 세우고 베트남으로부터 식재료를 수입했다. 자금 확대가 필요하자 친척들에게 큰 자금을 빌려 회사를 확장 시켰는데, 기존 시장을 점유하고 있던 거대 기업의 방해로 완전 폭삭 망해버리고 말았다. 다시 가족들에게 손을 벌리게 되었으며, 키이우 시장의 기존 상인들을 설득하여 상인 조합을 발족시켰다. 수많은 상인들이 가입하여 공동 구매와 판매에 주력하다 보니 엄청난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이들은 아예 대규모 공장까지 지어서 식재료를 스스로 생산하기에 이르렀으며, (구)소련에서 독립한 신생국들의 시장을 거의 독점하는 거대 기업으로 발전했다. 서유럽의 세계 유수의 식료품 회사들이 이들의 성장을 예의주시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이들은 자신들의 회사를 세계적인 식료품 회사에 막대한 금액으로 팔았다.
키이우에 있을 때부터 팜 녓 브엉(Pham Nhat Vuong)은 베트남으로 돌아갈 생각을 가지고 빈펄(Vinpearl)이라는 부동산 회사를 세워 투자를 하고 있었다. 베트남 정부의 환대속에 귀국하여 빈 그룹을 세우고 부동산 투자와 관광 사업을 통해 명실상부한 베트남 최고 재벌에 올랐다.
그러자 친구이자 동료였던 레 비엣 람(Lê Viết Lam)도 귀국하여 선 그룹을 세우고, 역시 관광과 인프라 개발을 주로 하였다가, 사업 다변화를 꿰하면서 회사를 여럿으로 분리 경영함으로 써, 지금 당장은 최고 재벌 순위에서 많이 밀려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빈 그룹과 선 그룹이 부자 경쟁에서 선두다툼을 하고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여, 기업적 윤리나 목표는 다소 다를지 모르겠으나, 그들의 시작과 뿌리가 같았던 만큼 그들의 시선과 지향하는 지점은 상당히 닮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베트남이라는 영토 안에서 벌어지는 부동산. 관광 인프라 분야에서 당연히 그들은 영원한 라이벌일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생산 중심의 산업 기반 인프라가 절대 부족한 베트남에서 이들이 선택한 것은 베트남의 현실적 문제를 충분히 고려한, 고부가가치 산업이랄 수 있는 테마파크와 같은 부동산 개발과 관광 산업 분야였다. 그 시작은 빈 그룹의 나짱 빈펄랜드였다고 할 수 있다.
빈그룹은 2001년에 우크라이나에서 돌아와 설립한 기업이다. 이들은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나짱에 빈펄랜드((Vinpearl Land) 사업을 시작했다. 흡사 우리나라 (용인 자연농원) 건설을 시작했다고 보아도 무방하겠다.
2006년에 완공하여 오픈한 이 사업은 베트남 국내는 물론 동남아 전역에서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내국인이 해외에서 벌어들인 막대한 자본으로 국유지 섬을 불하받아서 미래 산업이랄 수 있는 테마파크 단지와 대형 리조트 단지를 세우는 사상 초유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베트남 국내의 자본 시장과 동남아의 거대자본들이 베트남이라는 새로운 관광 시장에 대해 투자를 할까 말까 저울질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빈펄랜드 건설은 베트남의 개혁과 발전에 커다랗게 이바지하는 결과를 낳기는 했지만, 건설과 초기 운영 과정에서 많은 모순과 사회적 문제를 야기시켰다.
국가로부터 혼째섬(Hon Tre Island)의 일부를 불하 받았을 뿐인데, 빈그룹은 마치 섬 전체를 통째로 불하받은 것처럼, 외부로부터 접근을 차단 시킨 상태로 무자비하게 난 개발에 돌입했다가 사고로 들통이나는 대형사고를 쳤다. 케이블카 안전 기준 미달과 잦은 사고로 영업 허가권 문제가 수시로 발생하기도 했다.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결국 이런 문제들은 어찌어찌 넘어갔고, 그 배경엔 돈(money)이 위력을 발휘한 결과라고 소문이 나돌았다. 이 사건은 이후로 빈그룹의 기업 이미지 형성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고 말았다.
어쨌거나, 지금 이 순간에도 버젓이 운영되고 있는 빈펄랜드의 성공은 한순간에 빈그룹을 베트남 최고 재벌 자리에 오르게 만들었다. 하여 우리나라 사람들 일부는 빈그룹을 ‘한국의 현대’라고 보는 시선이 있다. 그 내막까지는 생략하겠지만 말이다.
나짱 빈펄랜드의 성공을 기화로 호이안의 리조트 사업. 하롱베이 리조트 사업. 푸꾸옥의 빈원더스가지 연이어 사업을 확장시키고 성공 시켰다. 부동의 베트남 최고 재벌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2025년 현재, 빈 그룹에 이어서 베트남 항공. 철강업체 화팟 그룹. 테콤 뱅크 그룹. 타코그룹 등이 그 다음의 베트남 최고 재벌 순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여기서 아이러니 한 것은, 한동안 빈 그룹에 이어 2위 자리에 올랐었고, 가끔은 1위 자리를 두고 엎치락 뒷치락을 했었던 선그룹인데, 지금 선그룹은 재벌 순위 상위에 전혀 모습을 보이지 않는 상태로 많이 처졌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현지인들의 평가는 여전히 선그룹이 빈그룹에 비해 뒤처질 이유가 전혀 없다는 평가가 절대적이다.
그럼 선그룹은 왜 순위에서 뒤로 밀려났을까?
그건 바로 창업주의 성향 때문이다.
선그룹 창업주 레 비엣 람(Lê Viết Lam)은 라이벌이랄 수도 있는 빈그룹이 기업의 사활을 걸고 도전한 빈펄랜드 건설에서 여러번 사고가 터질때마다, 그것이 빈펄랜드에 국한된 사고가 아니라 장차 어떤 기업이던지, 한 번의 실수나 실패가 기업의 사활을 걸어야 할만큼 치명적인 결과에 봉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에겐 ‘1위 기업’이니 ‘최고 재벌’ 이니 하는 평가가 별반 중요하지 않았다. 정당하게 평가를 받고 오래 가는 기업이 최고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 결과로 그는 기업을 여럿으로 쪼개 별도의 사업체로 발전 시켰다. 그룹의 목표를 위해 협력은 하지만 모든 노력과 투자와 성공의 결과는 분리된 개별 회사의 몫이 되게 만들었다. 기업 경영의 리스크를 최소화 시키기 위한 선택이었다. 한 회사의 실수나 실패는 오로지 그 회사만의 실패로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다. 하여 선그룹의 사업은 대부분이 별도의 개별 기업으로 쪼개 나누어 졌다.
이제 선그룹은 재계 서열에서 한참 아래에 있다. 하지만 베트남 경제에서 선그룹의 영향력은 여전히 빈그룹에 맞먹는다 할만하다.
베트남 경제에 관심을 가진 한국사람들은 선그룹을 (대한민국의 삼성)이라고 평가한다. 그 내막 설명 또한 여기서는 역시나 생략하겠다.
빈그룹이 2001년에 귀국해 회사을 설립하고 빈펄랜드를 건설하여 2006년에 개장하는 일련의 사태들을 친구이자 동료이자 경쟁상대였던 선그룹 최고 경영자는 누구보다도 세세하게 관심을 가지고 지켜 보았다.
어차피 그들이 잘 할수 있는 것, 그동안 보고 듣고 의견을 나누어왔던 미래지향적 경제발전의 흐름은 상당히 닮아 있었던 것이다. 험난한 고난의 길을 선발주자로 빈 그룹이 먼저 나서서 그야말로 멋지게 성공을 했다면, 후발 주자가 되는 선그룹이 뒤따라 나서서 선발주자와 당당히 경쟁을 통해 승리할 수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아마도 이 부분에서 저돌적 개척정신으로 무장한 빈그룹 창업자와 돌다리도 두둘겨 보고 건너야 직성이 풀리는 선그룹 창업자의 남다른 성향에 따라 그룹의 분위기나 차후로 벌어지는 기업활동이 크게 다르게 작용한 것이 아닐까 싶다.
빈그룹은 베트남 중남부에 걸쳐있는 중소도시 나짱을 선택해 섬을 거의 통째로 개발해 빈펄랜드를 성공시켰다. 그렇다면 그보다 좋은 입지조건은 없을까? 나짱은 비교적 작고 협소한 해안 도시에다가 아주 작은 공항마저 시내 중심에 놓여있는, 도시의 조건만으로는 많이 열악한 지역이었다. 늦은 출발을 만회하기 위해선 보다 확실하고 좋은 입지가 필요했다.(나짱의 신공항은 근자에 새로 건설 이전한 것이다)
그런 선그룹이 마침내 찾아 낸 것이 바로 바나힐(Bana Hill)이었다.
바나힐은 오랜 시간 프랑스 식민지로 착취와 굴욕적 시간을 보내야 했던 베트남 사람들의 뼈아픈 상처였다. 남북으로 길게 늘어선 베트남 지형의 중심부에 위치한 다낭은 베트남 식민지에서 수탈한 모든 물자가 이곳의 항구를 통해 프랑스로 실어 나른 중요 항구도시였다. 수탈을 위해 많은 관리와 상인과 프랑스 군대가 주둔했으며, 고위 관리와 부자들은 아예 프랑스에서 온 가족을 데리고 이주해 와서 프랑스에서 보다 더 화려한 생활을 즐겼다. 가혹한 무더위와 풍토병에 시달리자 그들은 인근의 최고 높은 바나나 숲이 있는 산꼭대기(바나힐)에 휴양 시설을 짓고 프랑스식 궁중 생활을 향유했다. 바나힐 정상에 이르는 길은 가혹할 정도로 험악했다. 겨우 짐을 나를 정도의 통로를 만들고 자재를 날라 바나힐에 프랑스식 소도시를 건설하는 동안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사람과 코끼리가 목숨을 잃었다. 식민지의 서러움을 넘어 노예 생활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바나힐은 완공되었다. 베트남 식민지에 거주하는 모든 프랑스 인들이 바나힐로 몰려들었다. 여름에는 아예 다낭의 총독부 관청이 바나힐로 이사를 해서 업무를 보았을 정도였다.
그런데 건설보다 더 가혹한 것이 식민지 재배계급의 풍요로우며 지속적인 생활 유지였다. 바나힐은 주변의 바나나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자급자족이 안되는 고립된 산악 도시였던 것이다.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심지어 씻을 것도 없었다. 천 명이 넘는 바나힐에 체류 중인 프랑스인들의 프랑스에서의 생활 못지않은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 수천 명의 식민지 사람들이 동원되어 노예 이상의 생활을 고스란히 감수해야만 했다. 먹을 식량과 과일과 술을 코끼리에 실어 날랐으며, 마실 물을 넘어서 프랑스인들의 목욕물까지 매일 산 아래 폭포에서부터 코끼리와 등짐으로 퍼서 지고 날라야 했다. 그 고충이 너무나 커서 산등성이를 넘다가 실족해서 떨어져 죽는 사람보다, 스스로 몸을 던져 이 모진 노동에서 벗어나고픈 사람들이 더 많았다고 한다. 더도 덜도 아닌 바나힐은 베트남 사람들에겐 결코 잊혀질 수 없는 악몽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당연히 식민지 해방 전쟁에서 이곳의 전투는 치열했고, 베트남 해방군은 이 치욕의 현장을 철저히 파괴했고 무단 방치함으로 아픈 상처를 기억에서 조차 지우고자 했다.
그런 바나힐을 선그룹 창업주는 새로운 시선으로 살피기 시작했다.
바나힐의 아픈 상처는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쟁취했고, 이제 미래를 위해 힘차게 약동하고자 하는 베트남인들에게 역경 극복과 희망이라는 하나의 서사적 스토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나짱이 달라졌다고 하면 관심이야 가지겠지만, 먹고살기 힘든 시절에 굳이 찾아가 볼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바나힐이 되살아났다고, 이젠 베트남 사람들 것이라고 하면, 과거의 쓰라린 상처를 기억하는 베트남 사람이라면 일생에 한 번을 꼭 와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것을 꼭 한 번 와보는 베트남 사람뿐만이 아니라, 동남아와 세계 여러나라 사람들이 찾아오게끔 만들면, 그것이 과거에 억울하게 돌아가신 영혼들을 위로하고 베트남의 후세들에게 자랑스럽게 남겨줄 자랑스런 현대의 유산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거기다 다낭은 감히 나짱과 비교할 대상이 아닌 훌륭한 입지조건을 이미 갖추고 있지 않았던가.
남과 북으로 길게 늘어진 영토를 가진 베트남에서 북부의 중심은 하노이가 있고, 남부의 중심은 호치민(사이공)이 있으며, 중부의 핵심 거점은 바로 다낭이었던 것이다. 식민지 시절 프랑스의 수탈의 중심지였기에 항만 도시의 인프라가 잘 갖추어져 있음이며, 베트남에 진군한 미군의 핵심적 요충지였기에 대단위 군대 주둔 시설이며, 해변의 위락시설이며, 군사적 목적의 공항까지 갖춘 명실상부 베트남의 세 번째 대도시가 바로 다낭이었다.
선그룹을 창업한 레 비엣 람(Lê Viết Lam)은 그런 전제로 다당 인근의 바나힐 개발에 자신과 기업의 미래를 걸었다.
빈그룹의 빈펄랜드와 어쩌면 비슷한 도전이었지만, 빈펄랜드의 실수와 오명을 절대로 반복하지 않는, 빈펄랜드를 훨씬 뛰어넘어 해외까지 자신 있게 선뜻 내놓을 수 있는 세계적 테마파크 공원 건설이 목표였다. 아시아의 디즈니랜드를 건설하겠다는 야심을 마침내 드러낸 것이다.
선그룹은 그 시작에서부터 온갖 화제의 중심에 섰다.
바니힐의 재건을 위해 과거 코끼리들이 짐을 날랐던 협소한 길을 확장해 건설차량들이 오르내릴 수 있게 만들었으며, 당시까지 누구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급격하게 가파른 표고 차를 극복하는 케이블카를 빈펄랜드 보다 더 길게 건설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단숨에 베트남을 뛰어넘어 세상의 관심을 끌기에 이미 충분했다. 빈펄랜드의 가장 큰 아픔이 케이블카(2006년 완공. 3.320 미터)였는데, 그보다 긴 케이블카를 수직에 가까운 벼랑에 설치한다고 발표한 것이다. 경악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바나힐의 케이블카는 최종 2013년에 완공이 목표인데, 수직에 가까운 표고 차를 극복하기 위해 부득이 3층으로 나누어 설치하겠지만, 최종 완공 시기에 맞춰 단일 와이어로 5.200 미터 길이의 세계 최장 케이블카를 그 옆에 별도로 건설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세계 최장 케이블카 설치라는 단 하나의 타이틀만으로 이미 선그룹은 한순간에 후발 주자로서의 핸디캡을 말끔하게 극복해 냈던 것이다.
‘세계에 베트남을 알리고, 다시 세계를 베트남에 알리기 위한, 베트남의 미래를 염두에 두고 꾸준히 사업을 발전시켜 나가겠다’는 것이 선그룹의 기업 캐치프레이즈다. 기업의 시대적이고 애국적인 사명감을 시작부터 어느정도 이미 저변에 깔고 시작했다고나 할까?
바나힐의 눈부신 성공은 선그룹을 확고부동하게 베트남의 자부심이라고 여겨도 좋을만한 기업으로 인식시켰다.
이어서 선그룹은 하롱베이 트램식 케이블카를 선보이며 세상에서 가장 큰 객실을 기록하였고, 갓빠섬의 노선에선 세상에서 가장 높은 케이블카 타워를 선보였고, 베트남 최고봉인 달랏의 판시판 산 정상까지는 세상에서 가장 긴 수직 등반 노선 등으로 한 때, 9개의 기네스 세계 신기록을 보유하기도 하였다. 이쯤되면 필자가 베트남을 (케이블카 왕국)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선그룹의 케이블카 개발의 하이라이트는 푸꾸옥 혼똔섬의 케이블카(Cáp treo Hón Thơm / Phu Quoc Cable Car)라고 해야겠다. 총길이 7.899km의 혼똔섬 케이블카는, 비록 볼리비아 라파스 케이블카(총길이 30.4km)에 의해서 순위에서 밀려났지만, 라파스의 케이블카가 12개 지선의 합계인 만큼, 단일 노선으로나 완성도를 따지면 혼똔섬 케이블카를 따라올 수 없다고 본다. 물론 사용하는 목적으로 따져 어느 것이 보편타당한 선에서 더 인간적이냐, 더 가치가 있느냐는 평가의 기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겠지만 말이다.
라파스의 케이블카를 아직 타보지 못했으니 비교 평가는 불가하겠으나, 그동안 나름 세계적이라는 케이블카와 국내 케이블카를 어느 정도 타본 결과로는 압도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것은 혼똔섬 케이블카이고, 예쁜 추억으로 담아두기에 가장 적합하고 또 타고싶은 케이블카를 꼽으라면 바나힐 케이블카라고 말하겠다. 그러고 보니 모두 선그룹 케이블카다.
이렇게, 어쩌면 앞으로도 한동안 베트남의 개발은 부동산과 광광 인프라 개척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고, 그러자면 케이블카가 그 중심에 놓일 수밖에 없어 보인다.
베트남은 젊은 나라다.
베트남은 지하자원이 아주 풍부한 나라다. 석유에서 가스까지 나오지 않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가. 하지만 아직 거의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항구는 어느 정도 필요충분 조건을 갖춘 듯 보이고, 항공 시설은 좀 더 보완이 필요해 보인다.
하지만 버트남에 가장 시급하고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바로 체계적인 도로망과 전력이다.(필자의 주관적 생각과 판단의 결과)
남북으로 길게 늘어진 영토를 가진 베트남의 북쪽 끝 하노이에서 남쪽 끝 호치민까지 국토의 대동맥이랄 수 있는 고속도로가 달랑 하나 건설되어 있다. 현대적 산업도로 형식이 아니라 오랜 내전 기간동안 서로 사용했던 군사도로를 포장해 놓은 정도다. 현대에 들어 대도시 중심으로 많이 확장 정비되었다고는 하나, 국도 1호선 전체를 보면 여전히 2차선, 혹은 3차선이라고 해야겠다. 흡사 우리나라 면소재지 시골 지방도로 수준이다. 그런 고속도로에 오토바이가 통행을 하고, 산악지방에선 소떼가 고속도로를 무단횡단한다. 오히려 이 고속도로 주변에 발전하는 도시가 있다면 그 소도시를 연걸하는 지선(지방도로)들이 더 고속도로 다울때가 많이있다. 아주 간혹은 고속도로에서 횡단보도를 본 적도 있다.
물류 수송에 있어서 전근대적 도로환경은 베트남 개발의 가장 치명적 약점이다.
육상 도로 운송의 단점을 확실하게 커버하는 것이 기차 운송이다. 운송 물량과 소요되는 경비 절약면에서 절대적이다,
하지만 베트남의 유일한 처도 운송로는 하노이에서 호치민으로 내려가는 통일로(국도 1호선이자 유일한 고속도로)와 수백 미터 사이를 두고 평행선을 이루며 내려가는데, 폭이 좁고 낡은데다가 지반이 열악하고 여전히 단선이다. 흡사 우리나라 6.25 사변 이후의 철도 풍경이다. 하노이에서 호치민까지 하루 반에서 이틀에 걸쳐 간다. 중간에 화물 운송이 많으면 중간 정류장에서 기다리는 방법밖에 없는 단선 노선이다. 우리 나라라면 고속철도로 2시간반이면 갈 거리를 이틀에 간다. 화물운송 기차면 세월아 네월아 일수 밖에 없다. 해안선을 주로 따라 가기에 지반이 약해 지속적으로 무거운 철광석 등을 계속 나르자면 계속 보수 작업이 필요해 보인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베트남을 여행하다보면 간혹 우리나라 70년대의 추억의 장면을 목격하곤 한다. 바로 오토바이 위에 서너개의 가스통을 싣고 달리는 풍경이다. 가끔 목격할 때마다 이젠 아득히 먼 과거의 우리 모습을 떨올려 보곤 한다.(어느 정도 나이가 지긋하신 세대여야만 알겠지만)
다음은 전기 부족이다.
베트남은 물이 아주 풍부한 나라이긴 하지만, 거의 평야지대이다보니 커다란 낙차를 이용한 수력발전이 불가능하다. 대책은 결국 화력발전일 수밖에 없겠지만, 발전소 건설과 연료를 보급할 항구나 운송망 확충, 거기에 뒤따르는 어마어마한 비용을 당장 정부가 떠안을 역량이 부족하다. 원자력은 복잡한 인접 국가들과의 상호관계와 기술 부족과 더 어마어마한 비용과 장기적인 계획과 시간 등으로 당장은 불가능해 보인다. 태양열 발전이 거론되고 극히 일부의 시골에서 전기부족을 이유로 지붕에 태양열 집열판을 설치하는 지극히 초보적인 개별 시험단계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상하게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스스로 알아서 내가 먼저 해보자 라는 의식이 상당히 부족해 보인다. 그런 것은 국가의 책임이자 몫이고, 국가가 강력하게 요구하면 모를까 하는 식이다. 툭하면 발생하는 정전사태에 대해서 감히 나서서 국가적 차원의 개선을 촉구하지 못하고, 굳이 필요하다 생각되면 개별적으로 소형 발전기를 집안에 들여놓는 정도라고 할까?
이점은 필자도 아직까지 베트남 사람들에 대해서 참 궁금해 하는 사항이다. 5호 담당제가 살아있는 과거의 공산체제도 아닌데 말이다.
베트남에서 사업을 하거나 하고자 하는 사람을 현지에서 만나본 느낌은 대충 이렇다.
베트남에는 원칙이 없다. 아니 원칙은 분명하게 있지만, 그 원칙을 집행하는 당사자에 따라 원칙이란 것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그런 차마 설명하기 힘든 애매모호 때문에 사업 활동을 벌이고자 함에 있어서, 통관 업무는 물론 세무와 고용 등의 일상적인 업무에 행정 절차적인 복잡성과 불확실성의 어려움이 항상 따라 다닌다. 공적 업무에 눈치를 살피고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이 21세기에 어디 말이나 되는 현실이란 말인가. 투자에 대한 증빙이나 보장받기가 어렵고 계약과 지출과 납세 등의 자료확보가 어렵기까지 하다. 이러다 보니 당연히 투자나 통관이나 인허가 절차가 번거롭거나 매우 까다롭고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짐작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다. 그러다 보니 관공서나 거래처 담당들이 수시로 ‘급행료’를 요구하는 것이 관행처럼 보편화되다시피 하고 있다. 부동산이나 영업 활동 등에 있어서 내외국인을 구분하거나 차별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고, 내부적으로는 언어소통을 포함한 고급 기술인력의 심각한 부족을 겪게된다.
경제 성장의 이면이랄 수 있는 부작용도 심해져, 빈부 격차 심화에서 파생되는 온갖 사회적 문제와 자연환경 파괴와 오염에서 생겨난 문제들도 점점 심각하게 다가오고 있다.
급격한 속도로 자본주의 시장경제 논리에 적응한 젊은이들이 중심이 된 노동운동의 변화는 이젠 별반 우리나라 강성노조의 투쟁 장면과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산업발전의 중간 단계를 거치지 못한 베트남에게 이제부터 당면하게 될 노동문제는 산업 기반 인프라를 갖추지 못한 그들에게 어쩌면 치명적 단점을 여실히 드러내게 되고, 어쩌면 가혹한 댓가를 치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 기업 삼성이 베트남에서 약 100만 명 이상의 고용을 창출해 왔으며, 2025년 대비 베트남 전체 수출의 약 25%을 담당했다. 삼성이 한동안 베트남을 먹여 살렸다는 표현이 사실 그렇게 심한 표현은 아닐 정도다.거기에다 다낭이고 나짱이고 호치민이고 하노이고 푸꾸옥이고 어디든 유명 관광지를 가보라. 대충 절반 가까이는 한국인이다. 역시나 한국이 지금 베트남을 먹여 살리고 있다는 표현이 결코 과장은 아닌 것이다.
그런 삼성이 최근에 베트남 공장을 인도로 옮기겠다고 나섰다. 이유는 한국의 극성 노조활동을 그대로 모방하거나 답습하고자 하는 극렬 노동자들 때문이란다. 삼성의 고용인력이 100만이면 거기에 기대어 하청으로 먹고사는 사람도 그 정도는 될 것이고, 그에 따른 가족들까지 합산하면....... 이것은 곧바로 사회적 문제를 넘어 국가 차원의 심각한 위기가 될 수 있다. 수출 25%가 급감하면 무역 불균형과 국제 수지의 추락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사회주의 공화국 베트남의 유일한 정당인 공산당의 선택이 심각하게 주목되는 이유다.
그들은 사회주의 공화국 일당 지배 체제를 절대로 포기 할수 없다.
거기에, 이미 베트남 사람들의 뼛속까지 깊게 파고들은 자본주의 자유시장경제의 생리를 거두어 들일수도 없다.
이 둘은 결코 하나로 합쳐질 수 없는 물과 불의 관계처럼 태생적 모순을 가지고 있다.
지금 베트남은 이런 치명적 모순 위에서 시대적 실험을 계속해 나가고 있다.
지금은 그저 좀 더 지켜볼 수 밖에........
‘할머니 얼굴이 화끈거리고 따가워요.’
‘오늘 햇볕 아래서 너무 많이 뛰어놀아서 그래. 피부가 화상을 입어서 따가운거야.’
‘선크림 발랐단 말이예요.’
‘선크림이 자외선을 완전하게 다 막아주는건 아니야. 또 물놀이하면서 씻겨나가기도 했을거고.’
‘어떻게하면 덜 따가울까요?’
‘찬물에 세수를 자주해주면 피부의 열기가 조금씩 식어가면서 덜 따가워질거야. 얼음찜질이 좋은데 지금 우린 어름이 없네? 마스크팩을 하면 금방 효과가 있을 텐데, 팩 해보았니?’
‘팩이요? 얼굴에 하얀 마스크 쓰는 거요? 엄마가 하는건 많이 보았는데 저는 안해봤어요.’
‘태리가 청소년이 다되었으니까 이젠 피부관리에 신경 쓸 때도 되었어. 한 번 해보자. 할머니가 도와줄게.’
‘그거 하기 싫은데? 공포 영화 악당이 가면쓰는 것처럼 엄청 이상해요. 안할래요.’
‘예쁜 숙녀가 되려면 이젠 너도 피부 관리에 신경을 쓸 때가 되었고, 지금처럼 화끈거리는데는 팩이 최고야. 금방 가라앉는다니까? 할머니도 할테니까 너도 같이 해보는 거야. 그러다 내일부터 자꾸 또 해달라고 하기 없기다?’
‘그거 쓰니까 엄마가 괴물처럼 되게 웃기게 변하던데 그걸 꼭 해야되요?’
‘덮어 쓰고 누워있으면 자기 얼굴이 안보이니까 괜찮아. 금방 편해져.’
할머니의 꼬득임에 넘어가 기어코 태리가 팩을하고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제 얼굴에 붙인 것을 당장 제가 볼 수는 없을 터이니, 할머니 말대로 절대 웃길 일은 아니다.
할머니는 태리 옆에 나란히 누워서 다독이고 있는데, 저만치 떨어져 이 모습을 지켜보는 동생 세리와 할아버지의 눈에는 마냥 신기하고 엉뚱하고 되게 웃기지 않는 풍경이 아닌가? 그래도 언니의 첫 경험과 도전에 침묵으로 성원과 응원을 보내야 하겠는데, 우리 세리는 그런 현실적인 인정과 암묵보다 훨씬 당돌하고 정직하다.
‘할아버지. 언니 지금 얼굴이 되게 이상해요. 꼭 괴물 같아요. 엄마랑 똑같은 괴물 가면 쓰고 누운 것 같아요. 웃겨요.’
이쯤되면 태리가 더이상 가만히 있을 수 만은 없는 상황인 것이다. 핸디폰 거울기능에 비춰서 제 얼굴을 확인하고는 기절초풍해 벌떡 일어나며 기어코 참았던 웃음보가 터져 버리고 말았다. 한 번 터지면 좀체 쉽게 그쳐지지 않는 그 웃음보 말이다.
‘윤태리. 웃으면 안돼. 웃으면 주름살 생긴단 말이야?’
‘그럼 어떻게 해야해요? 세리가 웃긴다고 놀리잖아요?’
‘놀린거 아냐. 놀란거지?’
‘네? 그게 그거지요? 할머니 이것 좀 어떻게 해주세요?’
‘뭘 어떻게 해? 조금 더 참고 이겨내야지? 웃지만 말고 얌전히........ 이리와. 너가 할머니도 해 줘봐. 그리고 할아버지. 세리 데리고 어떻게 좀 해봐. 태리 웃음보 또 터지면 주름살 생긴다니까?’
‘세리가 뭘 어쨌다고? 있는 사실을 그대로 이야기 했을 뿐인데. 그렇지? 세리야? 언니랑 할머니랑 정말 이상하지?’
세리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는데 할머니는 물티슈를 집어 던지면서 세리 데리고 밖에 좀 다녀오라고 성난 눈짓을 한다.
‘할아버지. 세리랑 산책 좀 다녀오시면 안돼요?’
‘명령이 아니라 부탁하는 거라면 다녀오지 뭐’하면서 세리 표정을 살피는 순간, 어떤 섬광처럼 번뜩임이 세리의 눈동자를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영악한 우리 작은 악마구리 세리를 누가 말려?
‘할아버지. 오늘 아직 철판 아이스크림 안 먹었어요. 할아버지가 하루에 하나씩은 사 주시기로 약속하셨잖아요. 언니는 꼼짝하지 않고 누워있어야 하니까, 지금 산책갔다가 아이스크림 먹고 오면 안 될까요?’
‘약속은 약속이니까...... 그런데 언니가 지금 가면 쓰고 운동중이니까 기다렸다가 같이 가야 하는게 아닐까?’
그러자 태리가 가면을 쓴 상태로 아주 어눌하게 대충 의사를 전해온다. ‘저 오늘 아이스크림 안 먹을 테니 얼른 나가세요.’라고.
‘거봐요. 언니가 오늘은 아이스크림 안먹는대 잖아요. 얼른가요.’
햐!!!! 야가 누구 동생이여?
요 영악한 녀석이 누구 자식인거여?
이 당돌한 악마구리를 할머니 할아버지는 어쩔거여? 언제까지 감당해 낼 수 있겠어?
이제 막 꼬리 하나가 생기기 시작한 꼬맹이 여우를 데리고 야시장으로 향한다.
세리는 아이스크림 가판대 앞에서 당찬 표정과 자세로, 마치 약속대로 내가 도착했으니 맡겨 놓았던 철판 아이스크림을 어서 내놓으라는 표정으로 심각한 표정으로 철판 아이스크림 전 공정을 지켜보고 있다.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엄숙하고 심지어 장엄하기까지 한 성스러운 공간을 만들어 내고 있다. ‘애를 누가 어떻게 말려? 할렐루야.’
야시장까지 나온 김에 오늘 저녁을 또 배달의 민족으로 해결하기로 하고 야시장 건너편 반세오가 되는 유일한 가계에서 이것저것 포장주문을 하고 세리와 마주 앉아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아이스크림을 마주한 녀석의 표정이 사뭇 심각하다. 그게 그렇게 심각할 정도로 맛있나? 이거 조금만 뺏어 먹어보려거나,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자칫 낭패를 겪을 것만 같다.
왜 음식은 이렇게 한참 걸려 나오는 거람? 오늘도 반쎄오랑 뿐짜 하노이는 포길 할 수가 없다. 망치 꼬치는 태리가 안 먹으면 감자튀김을 대신 주고 할아버지 안주가 되는 거고, 세리는 스프링 롤이면 될까? 오징어 튀김을 살 걸 그랬나?
그나저나 이녀석의 지금 심각한 이 표정을 어떻게 풀지?
‘세리야. 언니 몫의 아이스크림을 너에게 하나 더 사줄까?’하면 금방 환하게 풀어지기는 할 것같은데, 우리 가족의 평소 스타일 대로라면 그 비밀이 절대로 지켜질 리가 없을 테고, 그 비밀이 새나가면 태리와 할머니의 합동 무차별 공격에 할아버지만 죽어나갈 테니 그것이 문제로다. '애한테 그 차거운걸 한 번에 두개를 사 주었다고?' '내 몫을 말도 없이 그냥 주었다고요? 그럼 제꺼는 어디있어요?'
차라리 그냥 할아버지도 먹어보아야겠다고 하나 더 사러 갈까?
그럼 이 녀석의 반응은 또 어떻게 변할까?
참으로 예측이 불가능한 애물단지 우리 세리, 그래도 할아버진 무조건 너가 있어서 행복하단다.
오늘 하루가 바쁘고 길고 힘든 하루였음이 틀림없었기에 이젠 편안한 휴식에 들었어야만 하는데...... 어디선가 점점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음악소리가 전혀 심상치 않다.
그냥 외면하고 잠자리에 들었으면 참 좋으련만, 그 심상찮은 요란한 밴드음악소리가 끝내 우리 병아리들의 귓전을 어지럽히고 말았다.
‘할아버지. 저 음악소리가 뭔지 한 번 가보면 안돼요?’
‘아침에 할아버지가 가 보았는데 무슨 축제가 있다고 했어. 나짱에서 떠나오던 날 해변 광장 송년 축제 무대 기억하지? 그런 비슷한 노래공연을 하나 봐. 무대는 한참 작아 보였지만, 아마 거기서 들려오는 음악일 거야.’
‘잠간 구경하고 오면 안돼요? 어떤 축제인지 보기만 하고 오면요. 폭죽 터지는 소리도 들리잖아요.’
‘구경할 수야 있지. 그럴려면 우선 옷부터 갈아입어.’
‘밤인데 어때요? 그냥 지금 잠옷 차림으로 갈래요.’
‘야. 잠옷차림으로 어딜 밖에 나가?’
‘할아버지. 여기선 사람들 수영복 바람으로 다 돌아 다녀요. 잠옷이면 외출복이예요. 낮에 노랑머리 이모들 끈팬티 보셨잖아요?’
‘이모들을 보기는 했는데 끈팬티 입었는지는 몰랐는데? 할아버지는 못봤어.’라고 하자마자 할망구가 총질을 해온다.
‘개뿔. 안보긴 뭘 안봐. 뚫어지도록 쳐다보더구만, 저만치 사라질때까지 뒤돌아 보고 뭘 안봤다고 쌔카만 거짓말을 해?’
헐!
‘할아버지 쏘셜 포지션을 그렇게 싸그리 망가트리면 당신 처지는 좀 나아지니? 내가 킹이 되어야 당신도 퀸이 되는거야. 알간?’
잠옷 차림의 병아리들을 몰고 휘앙찬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요란한 축제 무대를 향해 찾아갔는데........ 축제가 그냥 말 그대로의 무슨 축제 음악공연이 아니라.........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을 위한 해변 파티였던 것이다. 대상과 목적이 분명한 개인적인 만찬 공연장이었다.
언젠가 우리나라 한강에 대단위로 중국인 관광객이 몰려와 단체로 치맥 파티를 열었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났는데, 딱 그런 푸꾸옥 비치 뷔페 파티를 요란하고 성대하게 치루는 중이었다.
자주 세계 곳곳에서 중국인들의 이런 특이한 행사가 벌어진다고 하는데....... 어디까지나 그들(중국인)의 취향과 어떤 열망이나 목표의 결과일 테니, 지금 당장 눈앞의 상황을 두고 이렇다 저렇다 하기는 좀 그렇지 않을까 생각되어 이쯤에서 접기로 하겠다. ‘꼭 저렇게 티를 내고 요란을 떨어야만 할까? 저런 야단법석을 누군가에게 의도적으로 보여주고 과신함으로 자신들의 품격이나 지위가 상승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게 단체가 공공연하게 느끼고 추구하고자 하는 자랑거리일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그날 밤 인터컨티넨탈 호텔 프라이빗 비치 일대를 넘어 푸꾸옥 마리나 지역 전체가 몹시 시끄럽고 지루한 밤이 되었다.
어떤 상황을 두고‘호떡 집에 불이 났나봐.’라고 하는지를 또 한번 정말로 실감나게 경험했다. 조금은 끔찍한 다신 격고 싶지않은 경험이었지만.
다음날.
오늘은 또 한번 우리의 숙소를 이동하는 날이다.
이번 여행을 마무리하게 될 세 번째 숙소를 찾아 다시 즈엉동으로 이사를 해야 한다. 당연하게 이제 우리의 여행도 종반을 향해 치닫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한 만큼, 이제 시계 바늘은 우리의 바람을 무시하고 점점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시즌 3)는 당연히 없겠지만, 이번 여행이 며칠만 더 길었었으면 좋았을것 같아.'
헐!!!!
피곤했음인지 이번 여행 들어서 가장 늦은 시간까지 늦잠을 자고 일어난 병아리들, 할머니의 우려와 걱정과는 다르게 그야말로 최상의 컨디션으로 아침을 맞이하기 시작한다.
은근히 오늘 다시 이동할 새로운 숙소에 대한 기대감을 엿보이기까지 한다.
‘거기도 수영장은 있겠지요?’ ‘킹콩마트는 먼가요?’‘야시장은 멀어도 되는데 철판 아이스크림 가계는 있나요?’‘방은 2층 3층이 아닌가요? 그럼 엘리베이터는 있겠지요?’‘거기도 배달은 되지요? 등의 질문이 나왔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방은 수영장 앞에 있는 1층이고, 킹콩마트는 지난번 호텔 거리 비슷하고, 야시장은 17번 버스로 3 정거장이고, 음식 배달은 어디까지나 할아버지 몫이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가장 다행스러운 것은 근처에 철판 아이스크림은 없다는 것이었어. 대신 마트에서 파는 것은 많이 있어.’라고 빈정거리듯이 대답해 주었다.
‘아이 참. 그게 가장 중요한 것이란 말이예요.’하는 세리의 장탄식은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일이었다.
신통하게도 녀석들은 일어나자마자 자신들의 짐정리를 벌써 시작한다. 적응을 넘어 이젠 당연한 습관 정도랄 수 있다.
아침에 입을 일상복으로 잠옷을 갈아입고, 낮에 물놀이 할 수영복을 따로 챙기고, 낮에 이동할 때 갈아입을 옷을 또 따로 챙기고, 나머지는 구분하고 차곡차곡 자기 캐리어 안에 쌓듯이 담아놓는다. 인형이며 장난감이며 아이패드며 PDA 패널까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제 것은 제가 가장 잘 알고 있기에 제 마음에 들게끔 제 스스로 해야 하는 게 최고라고 그간의 경험을 통해 얻은 참으로 신통하고 다행스러운, 할아버지 입장에서는 크게 감사한 일이라고 해야 하겠다.
‘끝! 이사 준비 다했어요. 그럼 이제 아침을 먹으러 식당에 내려가도 되겠지요? 할머니 가요.’라며 손을 잡아끄는 세리를 쳐다보는 할머니 표정이 황홀함 그 자체다. ‘우리 세리가 어느새 이렇게 다 컸구나. 너무너무 이뻐서 이 할머니가 어떻게 하면 좋겠니?’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아침부터 벌써 또 홀리는구나. 그러기에 제 에미까지 속지 말라고 경고를 보내주고 있잖아? 하여간 여우여 새끼여우.’ 그렇다고 안속으면 또 할머니가 아니다.
그럼 이게 여기서 끝이냐?
결코 아니다.
유럽식 아침 조식 메뉴(빵. 오믈렛. 베이컨. 토마토. 야채. 계란 후라이. 프랑스식 샌드위치. 쌀국수)를 여기 앨버트 호텔의 마지막 아침으로 정말 맛있게 먹는다. 다양하고 풍성한 조식은 아니었지만, 우리 병아리들이 당연하게 기꺼이 선택하는 아침 메뉴였기에 그런대로 만족스러웠다. 추가되는 디저트 음료가 녀석들 입맛에 꼭 맞았기에 할아버지의 다소 어정쩡한 쓰어다 커피(베트남 아이스커피)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커피는 아무 때고 밖에서 얼마든지 베트남 아이스 연유 커피를 마실 수 있으니 말이다.
할머니는 오늘따라 귀엽고 예쁜 세리의 재롱에 그만 넋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홀려도 제대로 홀려버렸다.
지금 이 순간의 할머니 표정을 보니........ (시즌 3)는 필연이고, (시즌 5)까지는 필수 선택으로 보인다. 내 예감으론 틀림없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시증 3)는 더 이상 없다고?’
개뿔!!!!!
‘지금의 당신 표정이나 눈빛을 봐. 정말 그만둘 수 있겠는지? 속일걸 속여야지 정말 어이가 없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마리나 비치와 작별하기 위해 산책을 나갔다.
화창한 날씨가 벌써 뜨거워지기 시작하고 있었기에, 세일링 클럽의 풀에도 벌서 뛰어든 사람들이 여럿 있었고, 바다에서 수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그러면서 혹시나 녀석들이 한 번 더 바다에서 수영하며 놀고 싶다고 하면, 서둘러 데리고 돌아가 수영복만 갈아입고 다시 나오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엉뚱하게도........ ‘할아버지. 호텔로 돌아가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풀장에 가서 수영하고 싶어요. 바다 수영은 별로예요. 풀장이 더 좋아요’ 하는 것이 아닌가?
어쩌겠어? 풀장이 더 좋다는데. 할아버지도 여기 풀장은 정말 마음에 드는걸.
체크아웃까지는 아직도 시간이 한참이나 많이 남아 있으니, 그래 실컷 놀아보자.
너희만 좋다고 하면 내일도 모레도 여기 풀장 또 올 수 있어. 즈엉동에서 택시나 19번 버스 타면 되고, 여기가 근처 숙소 이용자에게만 무료라는 전제는, 할아버지가 이미 풀장 관리자들과 안면을 트고 지내고 있어서 아무 때나 와도 장기투숙자로 알고 그냥 패스야. 그건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실컷 놀고 언제든 말만 해. 할아버진 너희를 위해서라면 언제든 다 할 수 있어.
약.속.
너희가 어서 자라서 주민등록증 들고 할머니 할아버지랑 호프집에 가서 생맥주 1.000cc를 마시는 딱 그날까지 이 할아버지는 언제나 현역이고, 너희들의 팬이고, 너희들의 보호자야. 걱정하지 마. 너희만 좋다면 할아버지는 언제까지든 (우리가 주인공인 겡구시즌)을 계속할 수 있어. 할아버지 약속을 기억해 주렴.
우리 여우공화국 만세. 만만세.
그저 병아리 두 마리만 양쪽에 품고 있으면 거기가 천국이라고 감사해하는 태리 세리 할머니 파이팅.
(시즌 2)에서 끝내는 거다? ㅎㅎㅎㅎ
이렇게 아름답고 깨끗하고 넓고(3개나되는 풀) 쾌적한 시설을 갖춘, 거기다가 지속적인 관리까지 썩 우수한 풀장을 그냥 공짜로 마음껏 사용할 수 있었다니, 이 수영장(Phu Quoc Marina Pool) 하나만으로도 푸꾸옥 중남부 마리나지역은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건물 사이로 슬쩍 드러나 보이는 야자나무 숲과 바다와 붉은 노을은 그냥 덤이다.
거듭 다시 이야기해서 어린이나 노약자가 동행하는 가족여행이라면 즈엉동 시내상권에 머물라고 권하겠지만, 비교적 활동이 자유로운 여행객이라면 무조건 마리나 지역을 선택하라고 권하겠다. 물론 비싼 비용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럭셔리 추구의 여행자라면 이런 권고없이 그냥 유명 탑 브랜드 리조트를 가시면 되겠지만 말이다. 가성비를 염두에 두고 멋진 여행을 고민하는 여행자에 국한해서 드리는 말씀이다.
거기다가 푸꾸옥 야시장의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쯔엉동 야시장이 우선 꼽히고 남부 선셋타운 야시장과 소나시 야시장이 이미 텃세를 부리며 활발하게 영업하고 있지만, 야시장은 늘 혼잡하고 소란스럽고 약간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바가지 상혼 같은 부작용이 늘 따라붙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거기에 비하자면 마리나 지역의 야시장(Chợ đêm Ẩm thực Phu Quoc Marina)은 특별히 분리해 야시장이라 부르기조차 조금 망설여질 정도이기는 하지만, 나름 아주 매력적인 동네 야시장이다. 붐비지 않는 적당한 정도에다가, 풍성하거나 화려하지는 않지만, 흔히 야시장에서 볼 수 있는 베트남 해산물이나 음식들로 기대하거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 있다. 소박하고 정겨운 동네 시장 느낌이다. 필자 개인의 취향과 판단에 따른다면 푸꾸옥에서 가장 멋진 시장이었다.
MR LEE BBQ나 KING QUÁN.HOÀNG MẬP BBQ 등 이름에 BBQ가 들어있다고 해서 반듯이 무슨 튀김집이나 통닭구이 집은 아니다. 모든 음식 중에서 삼ㄹ거나 끓이는 것이 아니면 얼추 모두 BBQ에 해당한다고 보면 된다. Mai cong chua(7번집)은 한국 여행자들에게 가장 유명한 맛집이고, Sin Sin BBQ.Sin Sin BBQ는 야시장 초입의 첫 집으로 맛이며 친절도 훌륭했고, 우리 병아리들에게 쌀밥을 무료로 나누어 주던 고마운 식당이다. 우리 병아리들의 원픽이었던 까메오 샌드 아이스크림 가판대가 있고, 야시장 건너편 모서리 1층에 비스트로 5(Okei Bistro 5 – Waterfront)에서는 야시장에서 하나같이 거부되던 반쎄오를 기가 막히게 조리해 냈다.
이젠 슬슬 지쳐갈만큼 풀장에서 열심히 놀다보니 어느덧 호텔 체크아웃을 준비해야할 시간이 되었다.
호텔로 돌아가 샤워를 한 후에 옷을 갈아입고 짐을 챙겨서 후런트에서 체크 아웃을 신청했다.
‘정말 잘 쉬었다 간다. 댕큐!’
써 앨버트 비치 호텔에 숙소를 정했던 것이 참 다행스럽고 즐겁고 유익한 시간이었다. 가성비를 먼저 생각한다면 무조건 최고였다고 하겠다. 아직도 호텔 건축 마감이 완전히 마무리된 것이 아니기에, 가끔 공사에 따른 소음이 있고 객실의 구석구석에 마감이 덜 된 상태가 그대로 드러나 보이기도 한다. 그랬음에도 가성비를 생각하면 다시 또 올만 하다 생각한다. 다만 아침 조식만은 지금의 단품 방식이 아닌, 조금 허름해도 뷔페식으로 선택의 기회가 있었으면 한다. 대부분의 베트남 음식이 비교적 그 양이 적다는 점에 있어서의 아쉬움도 뷔페식이라면 말끔히 해결될 터이니 말이다. 그 점은 확실히 아쉬웠다. 그래서였나? 혹시 내 푸념을 들으셨던 것일까?
사용한 객실 체크를 하는 동안에 웰컴 드링크가 아니라 굿바이 드링크를 선물로 내주는 것이 아닌가?
큰 길가로 난 테라스 겸 야외 테이블에서 작별 음료를 마신다. 오늘따라 오렌지 주스 맛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는 작은 여우 세리의 행복해하는 모습에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는 할머니를 어쩐다? 평생 지금처럼 이렇게만 하고 살고 싶다는 표정이다.
체크 아웃을 마치고 짐을 밖으로 내어놓고 그랩 택시를 불렀는데, 이 시각에 근처에 차가 없었는지 5분 정도 걸린단다.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병아리들을 우르르 몰고 조가비 마리나 기념비로 가서 아위운 작별 기념사진을 찍는데........ 이건 그냥 사진 찍는 것이 아니라 무슨 축제에 참여했다가 무대에 오른 스타들 기념사진 촬영장 같다. 우리 작은손녀 세리의 저 끼(?)를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작년까지만 해도 할아버지가 카메라를 들여대면 멋쩍어해고 뿌리쳤었는데, 이제는 아예 작정을 하고 기다렸다는 듯이 서비스 포즈 까지 선뜻 취해 보여주는가 하면, 더 찍어 달라고 재촬영을 요구하는 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이 사진들이 확대되고 인화되어 할머니 집의 거실과 모든 문과 할아버지 서재의 벽변을 가득 채우는 것을 보아왔던 녀석들이 이제 그런 새로운 변화에 적응을 넘어 재미를 들여가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우리 집 갤러리는 한동안 100% 할머니 사진 전시회였는데, 하나 둘 병아리 사진들이 내걸리기 시작하더니 현재는 절반 이상이 병아리들 차지가 되어 버렸다. 장차 더 어떻게 변할지를 할머니는 짐작하고 있다. 한 번 그런 푸념을 했었다.
‘정말로 이렇게 무차별 침공을 해도 되는거야? 그래도 이쁘네. 이쁘게 커가는게 고스란히 담겨있네. 어쩌겠어? 아무리 그렇다 해도 내 사진을 다 빼지는 말아줘. 최소한의 할머니 존재감만은 끝까지 남겨줘. 알았지?’(우리집 갤러리에 현재 지분은 그래도 할머니가 조금 많지 않을까? 병아리는 두 마리니까 말이다. 금년 안에 (3 : 3 : 3 :1)의 황금 비율로 만들어서 1은 할아버지가 점령해버릴까?)
안녕 마리나. 안녕 써 앨버트 비치 호텔.
수영장도 안녕. 철판 아이스크림도 안녕.
오래오래 기억할게.
이제 우린 쯔엉동으로 다시 돌아간다.
여기는 아직 푸꾸옥이다.
<겡구에게 방학을 주자(Let's give Genggu a vacation)> 시즌 2는 아직 여전히 진행형이다. 우리 가족은 그랩 택시에 올랐다.
-- 다음 이야기는 즈엉동에서 이어 나가겠습니다. 찾아주시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