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리의 여행)
베트남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눈 앞을 스르륵 하고 스쳐 지나가는 장면들이 있다.
먼저 베트남에선 오토바이가 흘러다닌다.
아마도 이 장면은 호치민이나 다낭이나 하노이의 아침 출근 시간을 직접 체험해 본 사람이라면 ‘맞아. 오토바이가 그냥 흘러 떠다녀.’라고 맞장구를 치실 것이다. 어떻게 도로를 가득 채우고 혼잡하게 움직이는 오토바이의 행렬이 하나같이 똑같은 패턴으로 움직이며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모여졌다 흩어 졌다를 반복하면서 퍼져나가는 것일까?
다음으로 베트남에선 ‘커피는 쓰어다’라고 해야겠다. 여기에서의 ‘쓰어다’는 터키 커피나 이탈리아의 에스페레소처럼 ‘무척 쓰다’라는 뜻이 절대 아니다. 베트남에선 연유가 들어간 달달한 아이스 커피(Ice coffee with milk)를 ‘쓰어다’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 베트남 연유 커피의 맛이 참으로 절묘하다 싶을 정도로 맛있고, 심한 중독성을 가지고 있다. 베트남에서 쓰어다를 한 잔만 마셨다면 모르겠지만, 두 잔을 마셨다면 아마도 여행을 마칠 때까지 짬이 생길 때마다 찾을 만큼 심각하게 중독 휴유증을 걱정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더하여, 베트남의 모든 식당이나 카페에서 쓰어다를 팔고 있지만, 호치민 노틀담 성당 앞의 빈 카페 공터에서 자전거를 타고 와서 얼음이 떨어질 때까지만 파는 진짜 길거리표 쓰어다 커피야말로 내가 경험한 최고 쓰어다 커피였다.
그 다음으로 베트남에선 ‘전통음식이라는 것이 길거리 음식이고, 길거리 음식이 곧 유명 레스토랑의 시그니처 메뉴’다. 마주하고 있으면 향신료 냄새나 비주얼의 생김새가 다 비슷비슷한 것이 쉽게 손이 가지 않는다. 거기다 양은 비교적 적고 생김새는 비슷하고 맛도 비슷한 베트남 음식은 결국 언제나 사뭇 낯설게 느껴진다. 그런데 이상하게 돌아서면 은근하게 다시 그리워지는 것이 또 베트남 음식이다.
그나저나........ 시방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여행이여?
물 흐르는 듯한 오토바이 행렬도 없고, 길거리 쓰어다도 없고, 돌아서서 그리워지기 전에 먹여야 할 베트남 음식도 없다.
우리가 있는 곳이 푸꾸옥이니 베트남이 틀림이 없는데도 그딴것들이 다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병아리 몰고 오토바이 행렬 속에 뛰어드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어 안되고, 병아리들이 할머니 할아버지가 길거리표 쓰어다를 목욕탕 의자에 앉아 느긋하게 마실 짬을 도통 주지않지, 랍스터도 싫다는 병아리들을 끌고 오징어 쌀구수나 퍼보코나 미꽝을 먹으러 갈 수도 없으니, 결국 몸은 분명 베트남에 체류 중이건만, 현실은 금식 기도원에 들어와 갇힌 느낌이다.
이게 아닌데?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예전의 그런 여행은 언제나 가능하려나?
‘할망구야. <겡구에게 방학을 주자?> 시즌은 정말 2편에서 끝나는 거니? 난 지금 정말로 그것이 궁금해.’
뜬금없이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우리가 탄 그랩택시가 킹콩마트를 지나가고 있다. 세리가 용케 알아보고 킹콩마트를 크게 외쳤던 때문이다. 새로운 숙소 입구가 저만치 보인다. 골목 안쪽까지 데려다 달라고 부탁한다. 큰길에서 거리는 얼마 안 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좁은 도로 사정에 비해 드나드는 차량과 오토바이로 인해서 항상 혼잡하고 지금 내리면 끌고 언덕을 올라가야 하는 캐리어가 네 개에 커다란 내 배낭까지 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골목 안쪽으로 건설현장이 있는지 육중한 레미콘 차량이 길이 막혀 오도가도 못하고 있었다. 다행히 우리가 예약한 숙소의 정문 앞이어서 거기서 하차를 했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 숙소이기도 한 이곳은 메이 풍 빈 방갈로(Bungalow Mai Phuong Binh)다. 다시 푸꾸옥의 중심 번화가라고 할 수 있는 킹콩마트 부근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킹콩 마트를 기준으로 이전 응우엔 빌라의 반대 방향의 비슷한 거리 정도 떨어진 곳의 가족이 운영하는 작은 빌라 형태의 방갈로로 고급 시설은 아니지만 여행자들의 평가가 비교적 좋은 가성비 위주로 선택한 방갈로였다.
정해진 체크인 시간에 조금 앞서서 일찍 도착한 것이었는데, 전 숙박자의 체크아웃이 다소 예정보다 늦어져서 지금 방을 치우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하기에 식당 겸 휴게실로 이용되는 공간에 짐을 내려놓고 쉬면서 기다리기로 했다.
첫 번째 가족형 빌라 숙소를 한껏 즐겼던 때문인지, 첫 인상에서부터 병아리들은 이곳의 환경이 썩 마음에 드는 듯 보인다.
수영장 주변으로 잘 정돈된 정원과 나무 숲이 빼곡하고, 여기저기 그네가 매달려 있으며, 주인집 강아지와 고양이가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끈다. 웰컴 드링크를 마시자마자 방갈로 곳곳을 벌써 둘러보고, 세리는 어느새 러시아 남자친구까지 사귀어 함께 뛰어다니며 놀기 시작한다. 태리는 제가 찍은 사진을 할머니랑 보다가 벌써 주체하지 못하는 웃음보를 터트리고 말았다.
마지막 숙소까지 참 감사한 일이다.
병아리 녀석들이 썩 마음에 들어 하니 말이다. 엄마 아빠라면 당연히 럭셔리한 리조트를 준비해 주었겠지만, 그러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이제껏 모두 준비했고 또 이렇게 항상 함께하고 있지 않니? 그렇게만 우리가 함께하는 지금의 순간들을 오래오래 기억해 주렴. 할아버지 기억은 좀 덜해도 괜찮아. 하지만 할머니의 소원은 너희 둘의 가슴속에 소중함으로 오래오래 기억되는 것이란다. 할머니를 부탁한다. 예쁘고 소중한 우리 병아리들아.
2025년에도, 그리고 2026년에도 할머니의 최고 지상과제는 ‘태리에게 맞춤형 친구같은 할머니’가 되는 것이다.
할머니에게 당면한 지상 최고의 책임과 의무는 적어도 지금 당장은 무조건 ‘큰손녀 우리 예쁜 태리’다. 작년부터 성장통(사춘기) 조짐을 보인 태리에 대한 할머니의 관심과 애정은 각별하다. 달랑 하나뿐이었지만 아들을 키울 때와는 완전 딴판이다.
‘우리 집안의 가장 소중한 손녀가 가장 중요한 시기를 아무 탈 없이 슬기롭게 지나가도록 가족 모두가 최선을 다해야 하는거야. 태리가 무탈하게 성장통 시기를 잘 극복하고 성인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들에게도 다행이고 며느리에게도 감사할 일이고, 동생에게는 바람직한 본이 되는 것이고, 남은 우리의 여생이 평탄해지는 지름길인 거야. 애지중지는 아니더라고 우리가 항상 녀석의 곁에 있고, 지켜보아 주고, 무슨 이야기든 항상 들어줄 준비를 하고 있다고 느끼게 해주어야 하는거야.’
‘잘 크고 있잖아.’
‘개뿔. 아들이 문제잖아. 사실은 지난번에 내가 막 뭐라고 했어. 네 딸이라고 네 마음대로 하지 말라고.’
‘아들이 뭘?’
‘내가 차마 말을 당신한테 못했었는데...... 안되겠더라고. 태리가 막 울면서 전화를 걸어왔어. 아빠한테 혼났다고.’
‘그래? 아들이 애들을 쉽게 야단치고 할 녀석이 아닌데?’
‘태리가 귀가 시간 약속을 정해놓고 허락을 받아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한참을 늦게 돌아왔대. 그래서 아빠가 야단을 친거라 하더라고.’
‘야단맞을만 했었겠네 뭐. 아들이 무턱대로 애들한테 화를 낼 녀석도 아니고.’
‘자세가 문제지 자세가. 태리도 알고 있었대. 잘못했다는 것을. 잘못을 하긴 했는데 조금은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고 설명을 하고 싶은데 아빠가 전혀 들어줄 생각을 안 하고 아빠의 생각대로만 판단하고 야단을 쳤대. 혼나야 하는 것은 맞는데 아빠가 들어봐 주었으면 하는 이유가 있었다는 거야. 그런데 무시하고 야단만 쳤대. 아빠가 자기에게 화풀이를 하는것 같았대.’
‘그랬어? 그건 안되는거지. 이놈의 자식이 그냥? 애가 좀 잘못했어도 변명이 아니라 이해받고픈 이야기가 있다고 하면 끝까지 들어줬어야지? 내가 아들을 단단히 혼내켜야 하겠네?’
‘개뿔. 혼내기는 누굴 왜 혼내켜? 아들이 누구한테 뭘 배웠겠니? 당신이 훼까닥하면 아들을 그냥 호되게 야단치고 했으니까 거기서 배운 게 그것뿐인 거지? 그런데 누가 누굴 야단쳐 지금?’
‘어허! 화살이 시방 왜 나한테 돌아와? 설혹 내가 그런 적이 있다고 해도, 지가 번듯하게 커서 부모가 됐으면 저는 그렇게 하면 안 되지. 당연히 그러지 말아야지? 이노무 자식을 내가 당장 불러서 혼쭐을 내던가 해야지.’
‘몰라서 그랬는걸. 아빠한테 그런 걸 제대로 배워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걸 누구를 탓하겠니? 그래서 가정 환경과 교육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고 누누히 말했지? 따지면 다 할아버지 당신 탓이지.’
‘미치겠네. 나도 그넘이 딸이었으면 안그랬을지도 모르잖아. 아들이니까 그러려니 했겠지. 그렇다고 이제 와서 40년 전의 일을 따지냐? 쪼잔하게? 다 내 탓이라고?’
‘이게 따지는 거야? 그때의 휴유증이 지금 반복해서 다시 터지게 생겼으니까 그러는 거지. 그래도 우리 아들은 확실히 다르더라.’
‘아들이 어쨌기에?’
‘내가 그러면 안된다고 설명하니까 묵묵히 듣고 나서는 순순히 고치겠다고 하더라고. 잘못도 인정하고, 태리랑 그날 일에 대해 다시 이야기를 해보겠다고 했어.’
‘잘됐네. 거봐. 그래도 아들이 나를 닮아서 바로 고치잖아.’
‘말은 바로 해야지? 당신을 닮았으면 안 바뀌었을걸? 다행히 안 닮았으니까 금방 고친거지. 그런게 얼마나 감사할 일이야?’
‘욕이니? 창찬이니? 그래. 그후에 태리는 뭐래?’
‘그날밤에 한참 이야기를 했고, 그후론 잘 들어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느껴진다고 하네. 이번에 비행기 속에서 그랬어.’
‘태리는 잘 클거야. 겡구가 짱구가 태리가 하고싶은 것에 이래라 저래라 할 타입들이 아니야. 그냥 지켜보아 주고 이야기 들어주고 조언해주고 제 스스로 선택하며 살아가도록 지켜보아 줄거야. 우리가 짱구를 그렇게 키웠듯이 말이야. 그럼 자연스럽게 세리도 그렇게 성장할 것이고....... 저들 바람대로 사는 모습을 언제까지 우리가 지켜볼 수 있을까가 걱정일 뿐이지만, 지금 이대로의 우리 사는 모습이면 우리 가족은 충분히 행복한거야. 지금처럼만 모두 노력하면서 살아가면 돼. 우리 태리는 아무 걱정 없어.’
‘아직 한참 여리고 어려.’
‘태리가 어린 것은 맞지만 절대 여리지는 않아. 쟤? 꼬리가 넷이나 달린 여우라니까?’
‘미련한 곰팅이 보다는 차라리 여우가 낫다니까?’
‘여우가 하나면 그렇지? 할머니는 꼬리가 아홉, 겡구는 꼬리가 여덟, 태리는 꼬리가 넷, 이젠 세리까지 꼬리가 나왔다니까?’
‘그래서 복이라니까? 곰팅이처럼 애지중지 극성떨지 않아도 되잖아. 다 알아서 스스로 잘 살아간다니까? 우리 겡구를 봐?’
‘겡구? 그러고 보니 그건 또 그러네. 우리 겡구가 곰팅이면 어쩔뻔 했어?’
ㅎㅎㅎㅎ
ㅋㅋㅋㅋ
대충 우린 이러고 산다.
어떤 날은 겡구 짱구 병아리 칭찬하는 즐거음으로 살고, 또 어떤날은 겡구 짱구 흉보는 이바구로 낄낄거리며 산다.
‘할머니. 짐정리 끝났으면 수영장에 가야하잖아요. 이젠 쪼기 벗고 헤엄칠 수 있단 말이예요.’
‘아직은 연습을 한참 많이 해야된다니까? 코를 막지 않고 물어 깊이 들어가려는 준비는 되었는데, 발이 바닥에 닫지 않고도 고개를 옆으로 들고 숨을 쉬는 연습을 많이 해야돼. 그 연습이 부족하면 지금이 오히려 제일 위험한 때야.’
‘그럼 얕은데서 쪼기 벗고 숨쉬면서 헤엄치는 훈련을 할께요. 깊이 들어갈 때는 다시 쪼끼 입을거에요. 됐지요?’
‘할아버지 할머니 없을 땐 함부로 쪼기 안벗기로 한 약속 알지? 있을 땐 말하고 벗어도 좋아.’
'할머니 할아버지 없을 때는 언니한테 도와달라고 하면 되지요? 언니만큼 헤엄치면 그땐 맘대로 해도 되는거지요?'
'그럼. 그땐 네 마음대로 해.'
'아싸!'
순식간에 훌러덩 벗고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우르르 몰려간다.
예전에, 이슬람권을 여행하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하나같은 그들의 따뜻하고 정이 넘치는 친절함이었다. 종교적으로 다름과 굴곡진 지나온 역사 때문에 다가가기 이전에 이미 거북함과 어색함과 알 수 없는 막연한 어떤 두려움에서 생겨난 거리감이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그들 표정에선 전혀 내가 가진 그런 거리감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언어소통에서 오는 불편함 정도가 전부였다. 언제나 환한 표정으로 웃으며 대해주었고, 방문객의 낯선 언어에도 끝까지 귀를 기울여 주었다. 자신의 이해나 설명이 부족하다 싶으면 아무나 지나가는 사람을 불러 도움을 청해서라도 방문객의 어려움이나 문제점을 해결해 주려고 애썼다. 신선한 충격의 연속이었다.
분명 우리세계(?)에서 접하는 친절과는 무언가 설명하기 어려운 그 무엇인가가 있다.
‘저는 한국에서 온 여행자이고 기독교인입니다. 개신교 신자입니다.’
뜬금없게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그들 앞에서 나는 ‘내가 가진 종교가 당신들과는 다른 사람입니다’를 먼저 확인시켜 주고자 하고 있었다. 어쩜 한국식 예의였을까? 아니면 너무나 살갑고 가깝게 다가오는 그들에게 놀라 적당히 거리를 두고 싶어서였을까?
‘노 프라블럼!’
고개를 돌려보니 한눈에 인텔리전스 분위기가 팍 풍겨나는 내 또래의 남자가 다가와 불쑥 악수를 청하는 것이었다.
‘당신이 기독교인이건 동양의 붓다 신자이건 우리에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남한이든 북한이든 또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지금 당신 주위에 모여선 우리 모두에게 당신은 손님입니다. 이슬람에선 손님을 알라께서 보내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당신은 알라께서 택하셔서 이곳에 보내주신 신의 선물입니다. 그런 당신을 우리는 온마음으로 환영합니다.’
터키 카파도키아의 아주 외진 시골 마을에서의 그날 일을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동굴집에서 터키식 진한 커피와 건과류와 꿀과 쨈과 빵을 내어왔었다. 그 아카시아 연한 빛깔의 꿀에서 은은하게 풍겨나오던 향기란?
‘손님은 신이 보내주신 선물!’
그렇다면 그런 만남은 언제나 신의 축복이 전제되고 허락된 실로 놀라운 은총의 기적이 아니겠는가.
그럼 우리의 여행은 언제나 천사와의 만남으로 이제껏 길게 이어져 온 축복과 기적의 연장 선상이었다고 해야 하겠다. 아직은 기회가 어느 정도는 남아 있다고 믿고 싶은, 우리 여행의 나머지 여정엔 또 어떤 신의 선물 같은 만남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후로 이슬람의 역사에서 크게 뜻 깊고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만남들을 찾아서 공부하기도 했다.(다음 기회가 되면)
그러던 중에 우연히 (만남)을 소재로 한 시 한 편이 아주 잔잔하게 내 가슴속 깊은곳까지 스며들었다.
바로 정현종 님의 <방문객>이란 시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표현인가? 어떻게하면 이보다 더 섬세하게 상대의 마음까지 헤아려가며 서로의 삶을 어루만지듯이 마음까지 전할 수 있을까?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며, 그의 과거·현재·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감동이며 공감이다.
나도모르게 노사연의 <만남>이 저절로 입술사이를 헤집고 새어나온다.
그리고 오늘, 여기 푸꾸옥에서 우리 예쁜 공주 세리(Seri Yun)에게도 신께서 놀라운 선물을 보내 주셨다.
봄에와 지안 언니를 세리가 만난 것이다. 서로에게 소중한 선물이었기를 이 할아버지는 진정으로 간절하게 기도한다.
안.녕. 반.가.워.
‘피가 나와요. 할아버지 저기 언니한테 지금 피가나요.’
세리의 다급한 외침에 선베드에 누워서 책을 보던 할아버지는 그야말로 혼비백산으로 바닥에 굴러떨어지고 나서야 벌떡 일어섰다.
‘언니가? 태리 어디있어?’
‘태리언니는 할머니랑 화장실 갔고요. 저기 저 언니요. 저 한국언니한테 다리에서 피가나고 있어요.’
한국언니? 뜬금없이 새삼 무슨 한국언니?
‘저랑 한국말로 인사했단 말이에요. 한국언니 발에서 피가 나고 있어요. 할아버지가 도와주세요.’
태리가 아니라는 말에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나서 고개를 돌려보니 풀장 저쪽 모서리에 아가씨 두 명이 쪼그리고 앉아 뭔가 허둥대고 있는 모습이 역력하다. 아가씨 두 명인데, 한 명은 갈색 머리로 러시아 계통 아가씨로 보이고 다른 한 명은 한국 아가씨가 틀림없어 보였다.
‘피가 난다’는 세리의 다그침에 일단 쫓아가 보았다. 나나 아내나 급한 응급처치라면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지만, 근자에 들어서는 하도 세상이 뒤숭숭해서 웬만하면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말자고 하면서 지내왔었다. 오지랍이 하도 넓어서 사람 구해주고 욕먹고, 목숨 연장시켜주고 마지막 목격자라고 경찰서에 불려다닌 적도 있어서 '이젠 제발 그만'하는 소리를 늘 할망구에게 들어왔다.
'아무도 없는 걸 어떻게 해? 세리가 부탁하잖아?' 쫓아가서 양해를 구하고 먼저 상처 부위를 살폈다. 이런저런 걸 따질 겨를이 없었다.
날카로운 것에 마치 칼에 베인 것처럼 상처가 나면서 한쪽으로 약간 피부가 벗겨져 있다. 물에서 막 나온 때문에 흘러나온 피가 배어나온 것처럼 번져가고 있었다. 급하게 집어 온 물 티슈로 닦아내고 여러겹으로 상처부위를 눌러주면서 일단 지혈을 시키고자 조치했다.
‘다행히도 큰 상처는 아니네요. 약간 베인 정도이니까 겁내지 않아도 돼요. 일단 가벼운 응급처치는 여기서 내가 할 수 있으니 걱정 말아요. 그러니까 자세부터 좀 편하게 앉고 옆에 친구 울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줘요.’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는 아가씨를 그제서야 제대로 쳐다보니 헐! 아가씨가 아니다. 그렇다고 어린이도 아니고 청소년이다. 나중에야 중학생이란 걸 알았다. 그런데 멀리서 볼 때는 키가 커서 아가씨인줄 알았다. 그래서 나름 엄청 조심을 했었는데...... 긴머리에 덩치만 큰 아직 소녀라니. 헐!!!!
‘세리야. 할머니한테 가서 이야기하고 비상약품 챙겨서 얼른 와달라고 해주렴. 상처 치료는 할머니가 더 잘해.’
소녀의 이름은 지안이고 인천에서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온 중학생이다.
여기 메이 퐁빈 방갈로를 운영하는 주인은 인근에 다른 숙소도 빌라형태로 운영을 겸하고 있는데, 조식 제공을 위한 식당과 수영장 시설을 공동으로 사용하게끔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안이네 가족은 근처의 숙소에 체류하고 있으며, 옆의 외국 친구는 이전 일정의 숙소에서 만나 친구가 되었으며, 숙소를 옮기며 헤어지게 되자 오늘 일부러 여기까지 놀러와 주었고, 함께 수영을 즐기다가 지금의 이런 사고를 당한 것이다.
다행히 지안이가 안정을 찾았고, 할머니가 쫓아와 상처를 지혈시키고 소독과 상처 치료 연고를 바르고는 붕대를 감아주었다.
손님이 다쳤으니 당연히 놀라서 호텔관계자도 쫓아왔지만, 일단 응급처치를 마쳤고, 보호자를 기다리기로 했다.
‘부모님 놀라지 않으시게 차분하게 연락을 해야하지 않겠니?’
‘동생하고 과일을 사러 가셨는데 곧 오실거예요. 그리고 제가 이직 핸드폰이 없어요. 고등학교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거든요. 치료해 주셨으니까 부모님 오실 때까지 그냥 기다릴래요.’
중학생인데 핸드폰이 없다는 이야기에 놀랐고, 가만히 지켜보니 지안이라는 소녀가 엄청 차분하고 사려가 깊다는 점에 또 한 번 크게 놀라고 말았다. 친구의 부상 때문에 당황해서 눈물까지 흘리던 소녀도 이젠 안정을 찾고 둘이 대화하며 웃기까지 한다. 그 두 소녀의 사이에 세리가 끼어들어 장난을 치고 한다. 그런 세리가 지안은 많이 귀여운가 보다.
잠시 지나서 지안의 가족이 돌아와서는 딸에게 정황 설명을 듣고 나서 우리에게 다가와 정중하게 감사인사를 한다.
우리 아들보다 약간 연배가 있어보이는, 첫 인상이 딱 무슨 연예계 종사자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남편과 거기에 잘 어울리는 동업자 분위기의 엄마였다. 연실 감사를 표하면서 일단 자신들 숙소로 가서 상처를 살펴보고 상황에 따라 인근 병원을 갈 생각이라 하고, 지안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딱 보니...... 지안이의 태도를 보면서 놀랐던, 꼭 그런 가족의 정서와 기풍을 충분하게 엿볼 수 있었다. 지안이나 동생인 봄에나 차분하고 사리 분별이 확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 병아리들에게는 절대로 없는...... 완전 반대 세상의 소녀들이나 마찬가지라고나 할까? 태리야. 세리야. 저런 면 좀 배우면 안되겠니?
사고는 낡은 시영장의 시설, 그러니까 얕은 쪽의 계단으로 만든 부분의 타일들이 떨어져 나가고 부서지기도 했는데, 걸어서 밖으로 나가려던 지안의 발 뒷끔치가 부러진 타일의 날카로운 부분에 쓸려 베이고 만 것이다.
나도 역시 처음 와서 수영장을 먼저 살펴보다가 이런 위험을 직감했었다. 그래서 여기서는 아쿠아 슈즈를 꼭 신어야 한다고 병아리들에게 당부해서 신켰고, 가능하면 그쪽은 가지 말라고 했었는데 그것을 모르던 지안이가 불의의 사고를 당하고 만 것이다.
저녁에 지안이 아버지가 동생 봄에(이제부턴 봄에 아빠라고)를 데리고 찾아왔다. 상처를 살핀 후에 병원을 데리고 갔는데, 다행히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고 해서 조치만 하고 돌아왔는데, 내일은 다시 함께 수영을 하러 올 예정이라면서 빠른 응급처치에 고맙다고 하면서 사후조치 경과를 알려주기 위해 부러 찾아와준 것이었다. 호텔측에도 저런 정도를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해 주었다고 한다.
잠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역시나 아이들에게서 이미 드러났듯이 가치관과 생활관이 조금은 남다른 으젓하고 어엿한 가장이었다. 참 보기 좋았다. 저런 가정 교육 분위기는 또 저런 결과로 드러나는구나 하고 말이다.
그런 참에 한쪽에선 세리와 봄에가 유독 남다르게 돈독함을 쌓아가고 있었다. 언니 태리와의 사이에선 많이 보지 못했던 그런 살가움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봄에 언니는요. 봄에 태어났다고 해서 그냥 봄에라고 이름 지었대요. 예쁘죠?’
그때 할아버지는 알아봤다. 세리에게 언니 천사가 생겼다는 것을. 하나가 아니라 세트로 생겼다는 사실을. 할렐루야!
식전 댓바람부터 일찍 일어난 세리는 오매불망 봄에 언니를 기다리고 있다.
‘세리야. 잘 자고 내일 만나’라면서 어제 저녁에 언니가족은 자신들의 숙소로 돌아갔다.
봄에 언니가 말한 내일이라는 시계 초침과 기다리는 세리의 시계 초침이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 이게 방정식으로도 안풀리고, 적분 미적분을 대입시켜도 도무지 답이 나오질 않는다.
‘할머니. 봄에 언니가 왜 안와요? 언제 와요?’벌써 몇 번째 되묻는지 모르겠다. 저만치 뒤에 책상에서 엿듣고 있는 태리의 표정은 여전히 무덤덤 무표정이다.
‘머리 손질하고, 예쁜 옷으로 갈아입고, 식당에 가서 아침을 맛있게 먹고있다보면 봄에 언니가 오지 않을까? 봄에 언니랑 온종일 수영하고 실컷 놀려면 아침을 든든하게 먹어두어야 하겠지? 아침부터 든든히 먹고 기다리면 곧 올 거야.’
‘그럼 봄에 언니하고 수영도 하고 우리 방에서 놀기도하고, 오늘 점심을 여기서 우리랑 먹어도 되나요?’
‘그럼. 할머니는 다 좋고말고. 다만 봄에 언니도 가족여행인 만큼 오늘 낮에 다른 스케줄이나 약속이 먼저 있다고 하면 그건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니? 그게 아니라면 온종일 여기서 놀다가 여기서 자도 좋고 언제든 우리랑 함께 식사도 할 수 있지. 부모님이 허락하시기만 하면, 그럼 되겠니?’
‘네. 좋아요 할머니. 어서 아침 먹으러 가요.’
헐!!!
하루아침에 친언니 태리가 세리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사상초유의 시태가 터지고 말았다.
지금 태리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묵묵히 한걸음 물러서서 이런 쌩뚱맞은 동생의 항명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을뿐이다.
그럼 그게 다일까?
당연하게 결코 아니다. 그 뒤에서 이 둘의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는 장난꾸러기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여기있다.
‘어떻게 될까? 태리가 봄에한테 한 순간에 완전히 밀려났네?’
‘그러게. 그래서 평소에 쪼금만 더 동생을 살갑게 감싸주라고 그렇게 했었는데도 안되더니.......’
‘그렇다고 세리도 지금 저렇게 멀짱하게 옆에 있는 언니를 쌩까면 안되는 거지. 언니 쏘셜 포지션도 감안해 줘야지.’
‘역풍이 불어서 한바탕 벌어지면 어떻게 하지?’
‘반대로 이번에 충격받아서 앞으로 동생을 소중하게 아끼게 될지도 모르지?’
‘태리가 그동안 동생한테만은 늘 냉정하고 차거운 언니였으니, 마냥 귀엽다고 보듬어주는 봄에가 나타나 푹 빠진 것이니까 태리 본인 책임도 있는 것이지. 곧 느끼겠지 뭐.’
‘세리가 남자친구에게만 각별한지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네? 그럼 그 어제 꼬마 남자 친구는 어떻게 해?’
‘봄에가 오곤 벌써 관심도 없던데? 그새 헤어졌나봐.’
ㅋㅋㅋㅋ ㅎㅎㅎㅎ.
우린 또 어느새 이런 실감나는 이바구로 살아있다는 감각을 깨우치고 있다. 아들 며느리 흉보는게 최고 재미고, 병아리 미래를 예측하고 감상문을 쓰고 조립하고 분해하고 또 심층분석하는 재미를 우리가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하나의 도구처럼 활용하는 개념은 있기는 있지만, 그래도 대책은 안 서는 그런 개구쟁이 할머니 할아버지가 바로 우리다.
누가 뭐라고 하면 또 어때?
이래뵈도 우리는 태리와 세리에 대해 조모 조부라는 나름의 확실한 지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인걸, 그건 증명서가 필요없어. 나란히 세워놓고 눈빛을 보면 단박에 팍 하고 나타나 확인이 가능하다고. 이런거 아무한테나 있는게 아냐?
녀석들은 우리에게 신이 보내주신 가장 고귀한 최고의 선물인 것을..........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시분이시여. 암튼 땡큐입니다.
세리는 일어나자 마자 바쁘다.
오늘은 머리 꼬랑지를 양쪽으로 길게 내려달라고 할머니를 재촉까지 한다. 고르고 골라서 예쁜 옷으로 갈아입었다. 봄에 언니가 올 것이니까 예쁘게 하고 기다려야 한단다. 세리의 이런 시츄에이션을 태리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한 걸음 물러나 있다. 창밖을 연실 내다보고, 발코니에 나가서 그네를 타고 밖을 살피는데 봄에 언니는 여전히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수영장을 돌아보고 식당으로 가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는데도 봄에와 지안 모습은 보이질 않는다.
‘언니다. 봄에 언니다. 할머니 봄에 언니가 왔어요.’
이게 도대체 무슨 날리지? 그게 지금 저렇게 호들갑을 떨 상황인가?
밖을 내다보니 봄에네 가족이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에 막 자리를 잡고 있었다. 봄에가 우리 방을 쳐다보고 세리와 눈이 마주쳤다. 서로 손을 마구마구 흔들어 반가운 아침 인사를 나눈다.
밖으로 쫓아 나가려는 세리를 할머니가 쫓아가 뒤에서 끌어앉고 말린다. ‘언니네 가족들 함께하는 아침 식사 시간이야. 지금 네가 나가면 가족적인 아침 식사 분위기가 흐트러지는 거야. 편하게 해주어야 하지 않겠니? 밥 먹고 나면 언니가 너한테 찾아올 거야. 기다리지 않을래?’ 할머니의 설명에 수긍을 한 세리가 제 자리로 가서 PDA 패널을 꺼내들었다.(세리가 지금 이정도인데, 나중에 이성 친구라도 사귀게 되면....... 어이구야. 우리아들 머리 좀 아프겠다. 거기다 태리의 성정까지 있고보면....... 아들아! 너가 아들인게 그래도 다행인게 아니었나 싶다.)
식사를 마치고 봄에와 아빠가 찾아왔다.
세리는 봄에 손을 끌고 제 자리로 가서 PDA로 무언가를 보여주기에 바쁘다.
봄에 아빠 이야기로는 다행스럽게 지안이 상처가 호전되어 별 불편이 없을 정도라고 알려주었고, 좀 있다가 수영도 할 생각이라고 알려준다. 오후에도 이곳에서 봄에가 놀 수는 있는데, 오늘 밤늦게 귀국 비행기를 탈 예정이란다. 하여 저녁 무렵에 공항 근처에 예약한 호텔로 옮겨서 마사지를 받고 휴식을 취하다 공항으로 갈 예정이란다. 꼼꼼하고 배려심이 상당한 젊은이다.
‘할아버지. 저요? 봄에 언니네 호텔에 따라가서 언니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다시 와서 수영장에서 놀아도 되지요? 금방 다녀올께요.’하고는 봄에랑 손을 잡고 밖으로 뛰어 나간다. 차 조심만 한다면 이런 상황에 별 문제를 두지 않는 것이 우리 아닌가. 봄에 아빠가 서둘러 뒤를 쫓아갔고, 조금 지나서 수영복 차림의 봄에와 세리가 돌아왔다. 방에 뛰어들어가 번개처럼 저도 수영복으로 갈아입고는 곧장 수영장으로 달려간다.
풍.덩.또.풍.덩.
어찌나 즐겁게 잘 노는지...... 봄에도 원래 우리 손녀 아니었나?
그러고 보니 오늘 태리는 수영 할 마음이 없나보네? 발코니에서 그네에 매달리거나 핸디폰으로 게임만 하고 있다. 부디 이 사태가 어떤 깨달음의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할머니 풀장에서 열심히 봄에 세리랑 놀아주고 있고, 할아버지는 실없이 왔다갔다 하면서 태리의 심기를 툭 툭 건드려 본다.
외출에서 돌아 온 봄에 아빠가 다른 일행들과 단체 점심약속이 있다고 딸을 데리러 왔다. 헤어지기 싫은 녀석들. 그러자 식사하고 와서 다시 또 수영할 수 있다고 하며 달래서 봄에를 데리고 갔다.
그럼 우리도 점심을 먹으면서 기다려야지.
모처럼 병아리들을 꼬득여 큰길가 현지 식당엘 가보았다. 할머니 할아버진 신나고 기대되는데 영 어색해하는 녀석들을 보자니 웬걸 더 귀엽다. 위는 모처럼 로컬 음식을 얼마든지 시켜서 실컷 먹을 준비가 되어 있는데....... ‘할아버지. 저는 그냥 방에 돌아가서 김하고 김치하고 밥 먹으면 안 되나요? 여기서 쌀밥만 사주세요.’라는 큰손녀 태리가 미워질라고 그런다.
‘할아버지 좀 봐줘. 삼겹살도 사주고 소고기 BBQ도 다 사줄게. 할아버지 최고 고민은 너희들 먹는 문제야? 겡구와 짱구가 너희들 입맛을 어떻게 가르친거니? 세상에....... 랍스터도 싫다, 크랩도 싫다. 타이거 새우나 가리비도 싫다. 그럼 베트남에 온 이유가 없게 되는 거잖아? 꼭 한 번 입맛에 들어맞은 <리스 그릴 BBQ>는 푸꾸옥엔 없어. 할아버지 배달의 민족정신은 당장 나짱까지 뛰어갔다 오고 싶다고? 이 녀석들 입맛을 사로잡은 베트남 음식 뭐 없니? 아이고 겡구야. 얘네 좀 어떻게 해주라. 시애비 돌아버리겠다. 아들. 네 말대로 정말로 팍 굶겨볼까?’
그나마 동생 세리 때문에 이 할아버지가 산다.
에피타이저로 쵸코 아이스크림을 해치우고, 분짜 하노이에 스프링 롤에 반세오에 볶음 쌀국수까지 주루룩 나왔는데, 할머니가 세리에게 요술을 부린다.
‘봄에 언니는 쌀국수를 엄청 좋아한대? 그리고 이 김말이 튀김 같이 생긴 스프링 롤을 다 먹고 모자라서 추가로 주문했다고 하던걸? 점심 먹고 다시 온다고 했으니까, 봄에 언니랑 저녁때까지 열심히 놀려면 세리도 점심을 든든히 먹고 힘을 내야 하지 않겠니? 어때? 세리도 쌀국수 먹어볼까? 봄에 언니처럼?’
‘그럼 언니가 저녁에 비행기 타러 갈 때까지 여기서 계속 수영하고 놀아도 되는 거예요?’
‘그럼. 그럴려면 점심을 우선 잘 먹어 둬야해.’
‘아싸!’
그날 세리는 처음으로 분짜 하노이라는 베트남 전통음식을 전혀 거부감 없이 처음으로 맛있게 먹었다.
물안경 쓰는데 걸린다고 양갈래 머리 꼬랑지를 하나로 묶어서 올리고. 다시 온 봄에랑 정말로 원없이 물놀이를 즐겼다.
저녁에 봄에 아빠가 오셔서 우리는 서로에게 덕담을 나누면서 아쉬운 작별을 했다.
혹시 봄에가 세리를 보고싶어 할 까봐 할아버지의 블로그 주소를 알려주었고, 봄에 아빠의 블로그 주소도 받았다. 그냥 이대로 헤어지기에는 너무나 아쉬운 만남과 이별이었기 때문이다. 두고두고 세리가 봄에 지안 언니를 보고 싶어 할 것 같아 그렇게라도 추억을 간직할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인천에 거주하는 지안과 봄에는 은율탈춤 보존히 청소년 반에 적을 두고 영재교육을 받고 있다고 한다. 지안이 태평소 악사를 맡고 봄에가 징 악사를 맡고 있단다. 국악 공부를 계속하면서 공연도 해나가고 있다고 했다. 자주 소식을 보내줄 예정이며 기회가 된다면 공연을 꼭 참관하고 싶다 인사에 대신했다.
은율탈춤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기에 더 이상 거론하기는 어렵지만, 45년 전 쯤에 학생운동에 한동안 열중했던 시기에 우리 모임 안에 타령과 꽹가리를 치던 친구와 장구를 치던 친구가 있어서 가끔 MT나 막걸리 파티 뒤풀이에서 들었던 기억이 새삼스레 떠오른다. 지금 그들은 뭐하며 살고 있을까?
거기다가 작별 인사를 하러 온 봄에 아빠가 아주 조심스레 건네주는 것이 있었다.
여자 꼬맹이 옷이었다.
봄에가 세리에게 무언가........ 꼭 기억에 남을만한 무언가를 선물해주고 가고 싶다고 했단다. 그래서 평소에 봄에 자신이 몹시 아끼던 보라색 원피스가 있는데 그걸 주고 싶어 하는데, 부모 입장에선 그런 선물이 몹시 조심스러워 어떻게 할지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아주 정중하고 감사하게 그 선물을 세리를 대신해서 할아버지가 받았다. 새로 산 것이 아니어서 망설였다는 이야기에, 결코 쉽지만은 않았을 그런 생각과 배려와 결정에 진심 어린 감사를 전했다. 세리를 부르고 할머니를 불러서 선물을 전해주고 지금의 이야기를 또 전했다. 아직은 좀 크겠지만 그냥 받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인사를 남기고 봄에 가족은 그렇게 귀국길을 서둘러 떠났다.
‘할머니. 내일 이옷 입고 킹콩마트까지 가도 되지요?’
‘물론 되겠지만, 봄에는 너보다 키가 한참이나 컸는데 잘 맞을까 모르겠네? 두었다가 나중에 좀 더 키가 커서 입으면 되겠지 뭐. 어떤지 지금 한 번 입어볼래?’
'엄마가 남에게 함부로 선물같은 것 받는거 아니라고 했는데. 이거를 안물어보고 받았는데 어떻게 설명하지요?'
'할머니 할아버지가 너를 대신해서 받은 선물이고, 충분히 고맙게 받을만한 상황이었으니까 다 괜찮을거야. 엄마 아빠한테 헐머니가 이야기 해 줄께. 걱정하지 마.'
'그럼 아빠한테 지금 전화해 주실래요? 이번엔 할아버지가 대신 받아주셨으니까 할아버지가 아빠한테 설명을 잘 해주시면 좋겠어요. 그러면 아빠가 다시 엄마한테 잘 이야기 해서 엄마가 허락해 주실것 같아요. 할아버지. 지금 전화해 주세요.'
그래서 할아버지는 곧 바로 아빠에게 전화를 건다. 할머니랑 귓속말로 '거봐. 우리집 실세는 겡구여 겡구'하면서 말이다.
'엄마도 그렇게 받는 선물은 아주 고마운거래. 이제 됐지?'
‘아싸!’
녀석 기분이 지금 최고라는 말이다. 제 맘에 쏙 뜨는 일이 생기면 ‘아싸!’를 연발하는 버릇이 있으니 말이다.
봄에 가족은 오늘 귀국이고, 우리 가족은 내일 귀국이다. 시간 참 빠르게 지나갔다.
-- (푸꾸옥 가족여행) 마지막 이야기는 다음이야기에서 이어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기다려 주세요.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