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럽 트래블>
겨울이라는 계절이 천천히 뒷걸음질 쳐서 물러나고 나면 파릇파릇 연초록의 새싹들이 이제 곧 움트기 시작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한두 차례 불어올 꽃바람쯤이야 화사한 봄 날씨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감수하리라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웬걸?
눈이 펑펑 쏟아졌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축축하고 무거운 눈이 폭탄처럼 쏟아져 내렸다.
서설(瑞雪) 이었으면 좋겠다. 부디 상서러운 눈이었으면 하고 바래본다.
베란다에 나가보니 눈 구경도 좋지만 일단은 무척 춥다. 그래도 서설이 하늘 가득 쏟아지는 풍경이 아쉬워 패딩을 껴입고 머그잔 가득 커피를 새로 타서 들고 다시 나선다.
베란다에 펼쳐놓은 캠핑용 의자에 앉으니........ 여기가 바로 유럽의 겨울 야외 커피 테라스가 아닌가!
노틀담 성당 건너편의 카페이고, 마르세유 올드 포트의 사마르티안 카페이고, 몽펠리에 코미디 광장 노천카페이고, 바르셀로나 람블라스 거리의 노천카페에 앉아있는 느낌이다. 로마 나보나 광장의 노천카페도 좋았다.
‘추워 죽겠는데 무슨 청승(?)이람? 안쪽 문은 닫아주고 개폼을 잡아도 잡아야지? 난방비가 어디서 저절로 나오니?’
촌철살인(寸鐵殺人) 이라 새겨진 비수 하나가 날아와 폐부를 사정없이 관통해 나가면서 모처럼 찾아온 노년의 낭만(?)을 풍비박산(風飛雹散), 아주 작살을 내고 만다.
서설(瑞雪)의 상서로운 기운은 그새 어디 가고, 기억에서도 가물가물해진 해빙기의 비포장도로 진흙탕 수렁이 흑백사진처럼 펼쳐진다. 노년의 모처럼 낭만이 사치는 아닐진데........ 뭐 보태준 것도 없으면서 분탕질은 왜 하는거여? 시방?
‘개폼이라니? 쌓인 눈을 보니까 언덕에 주차시켜 놓은 차를 아파트주차장으로 옮겨와야 하는가 하고 내다보는 거지.’
‘커피잔까지 들고 앉아있는 폼이 솔향기 캠핑장에서 보았던 개폼 같아서 그렇지? 개폼은 그만 잡고 얼른 들어와. 우리 같은 노년 고뿔엔 약도 없어.’
‘당신이 지금 내 서재를 점령하고 있으니, 내가 갈데가 없어서 그렇지? 난 지금 중립지역으로 피난을 나온거라구?’
‘개뿔. 텃세 부리기는......... 그럼 여기 병아리들을 안방으로 옮겨주면 되잖아?’
‘그렇게는 못하지. 당신 사진을 빼서 옮겨주고 그 자리를 새로 병아리들로 채울 수는 있지만 그렇게는 절대 못해.’
‘개뿔. 벌써 절반도 더 빼앗겼구만. 아예 내 사진을 다 빼버리든가?’
‘뭐. 여행 한 두 번만 더 다녀오면 곧 그렇게 되지 않겠어?’
‘죽을래? 백번을 양보해도....... 30%는 남겨놔 줘. 방을 폭발해 버리기 전에, 알았지?’
‘거긴 엄연히 내 영토인데? 폭발시키려면 당신 영토인 안방을 폭파시켜야지?’
‘하여간 병아리들에게 자리를 뺏기는 것 까지는 알겠는데, 그래도 최소한의 내 자리는 보장해 달라는 말이야. 알았지?’
‘하는거 봐서.’
‘LA 갈비 구워줄게. 가서 술이나 사와.’
‘어제 술 사왔는데, 그걸 다 마셨니?’
‘누가 마셨겠니? 아직 한 병은 남았던데 그거로 되면 내버려 두고. 모자를 것 같으면 슈퍼 다녀오고?’
‘당연히 슈퍼 가야지? 갈비 먹는데 한 병으론 모자라지. 내일 것까지 아예 또 채워놓지 뭐.’
아파트 주자장에서 우리집을 올려다 보니, 아직 잔설이 내리는 주변 풍경에다가 우리집 베란다에서 내다 보이는 풍경 정도면 나름 분위기 짱이었을 텐테........ ‘태리 할망구가 이제 나이가 들더니 감성이 바닥나서 그런지 낭만을 몰라. 낭만을. 옛날엔 안 그랬는데 말이야.’라고 중얼거리며 슈퍼로 향한다. 구멍 뚫린 슬리퍼 바닥 틈새로 싸늘한 물기가 파고 올라온다.
지난 늦가을에 베란다 정리를 싹 해버렸다.
평소 꽃을 좋아하는 아내와 푸른 식물을 천장에서 문지방에 매다는 것을 좋아하는 우리는, 아마 이 아파트 전체를 통 털어 손에 꼽힐 만큼 집안에 식물을 많이 기르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가끔 장기 여행을 다녀오면 죽어버리고, 성장이 빠른 식물들은 잔손이 너무 많이 가고 해서, 정말로 큰맘 먹고 베란다를 완전히 비웠다. 실내 식물들도 대부분 방출을 해버렸다.
대신 간단하게 캠핑 테이블과 의자를 셋팅해 놓았다.
캠핑을 무척 좋아하는 우리 병아리들 때문이다. 할머니 집에 오면 항상 캠핑과 연결되는 무엇인가를 만들어주고 싶어서 그랬다. 볕이 좋으면 거기서 겡구 짱구 디스를 하면서 커피도 마시고, 어쩌다가는 와인잔을 기울이기도 하고, 이 겨울이 지나면 병아리들 데려가다 베란다에서 오징어 야채 튀김과 스파게티 요리를 해보고 싶어서 과감하게 변화를 주어 보았다.
할망구나 나나 그런 선택에 대해서 엄청 만족해 하고 있다. 우리 병아리들이 좋아하는 램프와 사진도 거기 놓여있다.
봄이 오면 우리 병아리들 캠핑 요리 실습장으로 쓰일 예정이다.
그리고 혹시 베란다에서 자겠다고 할 때를 생각해서 사무실 창고에 보관하던 따수미 텐트를 다용도실에 꺼내다 놓았다. 베란다에 미니 텐트를 펼쳐주고 (그리스 신화)를 읽어 주어야지.
한참 글을 깨우치고 있는 세리에게 할아버지가 선물해줄 첫 번 째 책은 너무도 당연하게 (그리스 신화)다. 마지막 책은 할아버지가 이미 한참 전에 아빠 짱구에게 선물한 (일리어드)와 (오딧세이)다. 나중에 아무때라도 혹시 할아버지가 그리워지면 아빠에게서 그 책을 물려받아서 꼭 한 번 정독해 주렴. 할아버지 마음은 아마도 그 책속 어딘가에 숨어있을 것이야. 예쁜 손녀를 기다리면서 말이야.
‘대지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는데, 올림푸스 산에는 그 계절들을 담당하는 네 명의 님프가 있단다.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에 해당하는 계절의 님프 한 명은 지상 어딘가에서 우리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 것이지. 이제 곧 봄을 담당하는 님프가 하늘과 땅을 구분하는 경계에 설치된 구름으로 만든 무지개 문을 통해 내려올 텐데, 그 문의 이름이 사계절(포시즌)이란다. 봄의 님프가 내려오면 얼었던 얼음이 녹고 온갖 식물들이 파릇파릇 새싹을 피우기 시작하는 것이지. 그럼 임무를 마친 겨울 님프가 구름문을 통해 올라가고, 봄의 님프는 이 세상 어딘가에서 사람들과 함께 씨를 뿌리며 함께 생활을 하는 것이지. 다시 여름의 님프가 내려와서 다시 하늘로 올라갈 때까지 숲이 우거지고, 들판에 꽃들이 피고, 과일과 곡식들이 무럭무럭 자라도록 사람들과 함께 열심히 일을하면서 자신에게 부여된 직분을 다하는 것이지.’
이 할아버지는 늘 우리 소중한 병아리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 주고 싶단다. (그리스 신화) 전체 이야기를 가능하다면 직접 이야기 해주고 싶어.
‘지금 이렇게 내리는 눈은 아마도 하데스(죽음의 신)이 봄이 오지 못하도록 부리는 심술일지도 몰라. 세상 만물이 푸르게 다시 활동을 시작하는 봄을 다스리는 여신 데메테르(대지의 여신)에게는 제우스 신(신들의 왕)과의 사이에 낳은 페르세포네라는 아름다운 딸이 있었는데, 요정들과 함께 봄의 들판에서 뛰어놀다가 웅덩이 옆에 핀 수선화를 꺾으려던 페르세포네에게 반한 하디스(죽음의 신)가 강제로 지하세계로 납치하여 자신의 아내로 삼아버리려 한 것이야. 딸을 잃어버린 데메테르가 딸을 찾기 위해 넉 달 동안 온 세상을 쫓아다니느라 풍요롭고 따사로운 대지를 돌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풀이 자라지 못하는 겨울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란다. 이대로 두면 세상이 온통 망하겠다고 생각한 신들이 모여서 회의를 통해 페르세포네가 하디스에게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 그래서 신들의 왕인 제우스에게 페르세포네를 데메테르에게 돌려주어 다시 대지를 푸르게 돌보게 해야 한다고 요청했지. 제우스는 신들의 전령사인 헤르메스를 하디스에게 보내 페르세포네를 데메테르에게 돌려보내 달라고 요청했지. 하디스도 제우스의 명령은 절대로 거부할 수 없었어. 그래서 페르세포네를 지상으로 올려보내게 되었는데, 비록 납치를 하기는 했지만, 하디스는 정말로 페르세포네를 사랑하게 되었기에 헤어지기가 싫었어. 반대로 페르세포네는 하디스를 사랑하지 않았고, 어떻게든 지상의 데메테르에게 돌아가고 싶었지. 그렇다고 제우스의 명령을 거부할 수도 없는 하디스는 한 가지 꾀를 내서 떠나는 페르세포네에게 지옥의 붉은 석류 과즙을 몰래 먹게했단다. 페르세포네는 지상으로 올라와 어머니 데메테르에게 돌아갔고, 대지의 여신은 다시 온 세상을 푸르게 만들어주었지. 꽃이 피고 곡식과 과일이 자라서 가을에 추수하며 거둬들이는 계절이 된 것이지. 그런데 그때가 되면 페르세포네가 먹었던 석류의 기운이 드러나면서, 햇빛이 있는 지상에서는 살 수 없게 되었던 것이야. 살기 위해서는 한동안 햇빛이 없는 지하세계에서 생활을 해야 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하디스가 만든 것이지. 어쩔 수 없이 추수가 끝나면 페르세포네는 지하세계로 내려가 봄이 오기를 기다려야 했고, 딸이 없는 넉 달 동안 어머니 데메테르는 딸에 대한 그리움과 걱정으로 식음을 전폐하고 대지를 돌보지 않게 된 것이지. 그게 지금의 겨울이 된 것이란다. 그리고 지금 내리는 눈은 아마도 때가 되어 페르세포네를 데리러 오고 있는 어머니 여신 데메테르가 빨리 오지 못하도록 일부러 눈을 뿌려 미끄럽게 길을 가로막으려는 하디스의 심술일지도 모르겠다.’
‘세리야. (그리스 신화)에는 온통 그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가득 들어있어. 오래오래 곁에 두고 읽어보렴.’
우리집은 할머니 영역과 할아버지 영역으로 확실하게 나뉘어 있다.
안방과 거실은 챠밍여사의 영토다.
서재와 작은 방은 내 영토다.
앞 뒤 베란다는 공유영역이다.
혹, 소유권 지분 분쟁이 생긴다면야 100% 양도 지분을 이미 확보하고 있는, 하나뿐인 아들의 판단과 결정에 따라야 하겠지만, 어쨌거나 아들의 묵인하에서 우리는 서로 각자의 고유 영역과 활용에 대해서 무조건적 자율권 행사에 대해 적극 지지와 인정을 해 주고 있다.
‘적어도 내 영역 안에서는 내 마음대로’라는 불가침 조약을 충실하게 이행해오고 있는데....... 지금 내 서재를 침범해서 차지하고 있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사람은 분명 챠밍여사다. 남의 서재를 독차지 하며 서 있는지가 족히 20분은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처지에 공유 영역인 베란다에서 눈 구경을 좀 한다고 ‘개폼’ 운운을 하다니......... 감시 카메라만 아니라면 한바탕 어떻게 해보겠는데 말이다.
아!!!! 그넘의 (감시카메라)가 항상 문제다.
지금 우리집에는 여러개의 감시 카메라가 사방에 빼곡하게 설치되어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감시 카메라의 눈은 곧 우리 병아리들인 태리와 세리의 눈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 병아리들이 언제 어디서든 할머니 할아버지의 일거수일투족을 빤히 쳐다보고 있기 때문에 항상 말 한마디도 조심해야 하고, 표정 하나하나에도 지극히 신경을 써야 한다는 말이다.
결국, 병아리들 감시 눈초리 때문에 큰 소리도 못하고, 부부 싸움도 못하고, 맨날 허허 털털 웃으며 지내야 만 한다는 말이다. 오랫동안 짱구와 겡구가 우리에겐 제일 무서운 존재였는데, 이젠 뭐 ‘다 늙은 부모에게 지덜이 어쩌겠어?’하는 배짱이 생겼다 싶었더니, 이젠 겡구나 짱구와는 비교도 안 되는 가장 무서운 존재들이 등장했다. 바로 우리 병아리들이다. ‘싫어. 이젠 할머니 할아버지랑 안 놀래.’하면 우리의 나머지 인생이 얼마나 지옥같을까? 그래서 우리는 오로지 오매불망 병아리바라기가 되어 버렸다. 그런 처지에 사방에서 녀석들이 감시 카메라를 통해 할머니 할아버지를 지켜보고 있으니, 한순간 한순간이 긴장감과 초조함의 연속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고난이 심하고 어렵다 하더라도 우리는 너끈히 이를 극복할 자신이 있다,
할머니가 지금처럼 좀 서운하게 하고 짜증나게 하면 할아버지는 곧바로 감시 카메라로 달려가서 태리에게 일러 바친다.
할아버지가 좀 투정이라도 부리면 할머니는 곧바로 세리 감시 카메라로 달려가 할아버지의 행위를 비난하고 힐책을 한다.
그러면 녀석들은 항상 똑같은 표정으로 침묵으로 일관한다.
‘할머니. 할아버지. 저희가 지금 어이없는 표정 짓는거 보이시죠?’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 그게 끝이다. 우린 아무일도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변한지가 꽤 오래 되었다. 얼굴 붉힐 일이 거의 없다. 녀석들이 항상 우리를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아주 가끔 할아버지가 세리 감시 카메라에 뽀뽀를 해주는게 할 수 있는 전부다.
외출을 하려면 현관문의 병아리 감시카메라에게 먼저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해야 나갈 수 있다. 돌아 올때도 마찬가지다.
각자의 방이나 서재에 들어 갈 때도 그 방을 지키는 병아리 감시 카메라에게 인사를 해야 드나들 수 있다.
거기다 더해서, 우리집은 현관문을 제외하고는 문을 걸어 잡글 수가 없게 되어 있다. 병아리 감시카메라들이 어디서든 항상 지켜볼 수 있게 언제나 모든 문(현관문과 화장실만 제외)은 항상 활짝 열려있다. 24시간 문이 있으나 마나 한 오픈형 하우스다.
할머니 말씀으론 수일 내로 화장실에도 감시카메라를 다실 생각이시란다.
이렇게 우리 아파트에는 사방으로 무서운 감시 카메라들이 설치되어 있다.
지금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서재를 점령하고 20분이나 주둔하고 있는 이유는 갤러리의 사진 때문이다.
서재의 벽면을 여행 사진으로 채우면서 처음 이름은 분명하게 (챠밍여사 여행 갤러리)였다. 여행을 다녀오면 그때 그때 새로운 사진으로 그동안 꾸준하게 업그레이드를 계속해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병아리들 사진이 하나둘 자리를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할머니 갤러리)인지 (병아리 갤러리)인지 구분 짓기가 애매해 졌다. 어디 그뿐인가? 여행을 거듭할수록 항상 꺼내놓고 보고 싶은 모습과 풍경들이 많아져서 이제는 우리집 자체가 그냥 병아리들 갤러리화 되어가고 있는 형국이다.
‘아무리 그렇지만 이거 내 자리를 너무 빨리 치고 들어오는 것 아니야?’라고 늘어만 가는 병아리들 사진을 두고 푸념 아닌 푸념을 늘어놓은 지도 썩 그리 오래되진 않았었다.
그러니 어쩌겠어?
좀 더 사실적으로 말하자면......... 그동안은 우리 둘이 여행하면서 늘 죽어라고 할망구 사진만 찍어대는 게 거진 여행의 전부이다시피 했지만, 병아리가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되는 마당에 할머니에게 단독으로 카메라 프레임이 쫓아갈 확률이 줄어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 아닐까? 더없이 예쁜 병아리들이 둘씩이나 옆에 있고 나면 말이다.
어쩌다 보니 정말로 그게 현실이 되고 말았다.
이번 푸꾸옥 여행을 다녀와서 사진 갤러리 업그레이드를 마친 상황이었으니, 요즘 할머니가 툭하면 저렇게 내 서재를 차지하고 망중한을 보내는 것이 자주 있었다.
‘병아리 지분을 줄여야 하나? 아니면 액자를 더 구입해서 사진 개수를 늘려야 하나?’
그러고 보니 현실적으론 내 서재에 걸린 사진이 전부가 아니지 않은가?
이따금, 사진 업그레이드가 계속되고 여행에 대한 추억이 쌓였다 싶으면 그 사진들을 모아서 <피안재의 여행 갤러리>라는 사진 앨범을 여러 권 만들어 왔는데, 정식 제본판으론 그간 4권을 만들었다. 그간 사진 앨범 3권까지는 역시나 완전 챠밍여사 사진집이었으나, 4권째에는 절반 이상의 분량이 병아리들의 귀엽고 예쁜 사진으로 채워졌다. 그래서 아예 아들 집으로 보내주어 보관하게까지 했다. 두 권을 만들어 나눌까도 생각했지만, 언젠가 이 사진첩 모두가 아들에게 갈 것이기에 하나만 만들었고, 미리 보내준 것이라 생각했다. 살아서 여행을 계속하는 동안에 계속해서 만들텐데......... 이러다 혹시 완전히 병아리 사진첩으로 변하는게 아닐까? 그럼 병아리가 두 마리린데 평생 겡구가 데리고 살게 아니고, 시집들을 가게 될거라면 이제부터 세 권씩 만들어 놔야 하는 게 아닐까?
우이 씨. 이거 괜히 시작했나?
그때였다.
서재에서 나와 베란다로 다가온 챠밍여사가 툭 하고 한 마디를 던졌다.
"내 사진도 좀 바꿔주면 안될까?"
"내 사진도 좀 바꿔주면 안될까?"
어이쿠. 어쩐지 아까 나한테 개폼이니 할 때부터 어째 분위기가 좀 거시기하다고 했더니 기어코 터졌다. 푸꾸옥 여행에서 돌아와서 보니까 마눌님 독사진이 통 보이지 않더라 했지. 병아리들과 같이 찍은 사진도 제대로 나온 게 별로 없었고 말이다. 부러 그런것은 절대 아니었지만, 하여간 드러난 걸 보니 이제까지와는 너무나 달랐는데 내가 너무 심했나?
우이 씨. ‘겡구 방학 (시즌2)만 아니었으면 지금쯤 프라하에 있었을 것 아니야? 죽어라 마눌 사진만 찍고 있었을 텐데 말이야. 아이고 내 팔자야.’
이제 막 병아리들과 여행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않은 처지이고, 당장 겨울 캠핑을 또 준비하기도 그렇고, 어쩐다?
예전에 걸었던 사진들을 꺼내 몇 장만 추려서 추억 갤러리라도 꾸며줘야 할까보다.
아무리 그렇기로 지금 내가 뭘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자꾸 미안한 생각이 들지?
‘알았어. 이상하게 이번 여행에선 당신만 잘 눈에 띄게 나온 사진이 없더라고. 편집하면서 나도 그런 생각을 했었어. 언제가 되었던 다음 여행에서는 좀 다른 상황에서 액자에 담을 사진을 염두에 두고 신경 써서 찍어볼게. 다음 여행까지만 기다려.’
‘그런 뜻 아니야. 잘 찍었어. 우리 병아리들 정말 예쁘고 깜찍하게 잘 나왔어. 내가 반할 정도로 잘 나왔어.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런 뜻이 아니고, 또 다음이 되어도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을 거야. 어차피 병아리들과 함께 있으면 나도 당신도 온통 병아리 생각뿐이야. 당연한 것이고, 또 당연하게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 그래서 이번엔 우리 둘이서만 가고 싶다는 것이야. 내 말인 즉은, 무조건 옛날처럼 우리 둘이 떠나고 싶다고.’
‘알지. 그래서 원래 올 겨울엔 우리 둘이서 유럽 가기로 했던 것 아니었어. 태리가 다이렉트로 할머니한테 쇼부(勝負)치지 않았다면, 우린 지금 프라하와 부다페스트 사이의 어딘가에 있었을 거잖아. 그러니까 이젠 (시즌2)도 마쳤겠다, (시즌3) 타령은 하지도 말고 무조건 다음 여행은 우리 둘이서 만 가자고. 알았지?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기다려. 사진 잘 찍어와서 액자 다 바꿔줄게. 상황 봐가면서 미리 준비하다 보면 시간 또 금방 갈거야.’
‘(시즌3)하고 상관없이......... 태리나 세리가 또 가고 싶다고 하면 우리는 무조건 또 가게 되어 있어. (시즌5)가 되어도 갈꺼구, (시즌10)이라도 병아리들이 가자면 또 얼마든지 갈 거야. 우리가 가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도 없잖아. 그러니까 병아리들하고 별개로 우리 둘이서만 가자고.’
‘알았어. 차차 계획을 세워보자고. 바쁜 시기만 피해서 차차 준비를 해보자고. 알았지?’
‘내 사진도 좀 바꿔줘. 너무 오래 되었잖아?’
‘알았어. 차차 준비해서 다음에 여행 다녀오면 곧바로 다 바꿔줄게. 기다려.’
‘지금! 지금 바꿔줘.’
‘지금 어떻게 바꿔? 그럼 옛날 사진중에서 맘에 드는 것으로 골라. 액자 사진 바꿔줄게.’
‘그게 아니고 지금 당장 우리 둘이서 유럽으로 떠나자. 이렇게 된 거 추운 겨울은 이미 여러번 겪어봐서 지겨우니까, 사방에 들꽃이 피는 따뜻한 유럽이 언제야?’
‘오월에 피기 시작해서 6월이면 사방 들판이 온통 들꽃천지지. 6월 말이면 돌아다니는데 서서히 초여름처럼 더울테고.’
‘그럼 오월이 좋겠다. 지난번에 계획했던 프라하도 5월엔 춥지 않겠지? 꽃들이 피겠지?’
‘우리나라에 오월에 철쭉이 피면, 얼추 알프스 인근에도 같은 과의 꽃들이 피는거야. 고산지대 높이 차이는 있어도, 계절적인 변화는 얼추 비슷한 거야. 더 이른 꽃들은 4월 말부터 필 것이고, 더군다나 여름이 짧은 고산지대의 모든 꽃들은 서둘러 피는 법이야. 프라하나 부다페스트나 계절의 추이는 우리나라랑 크게 다르지 않아.’
‘그럼 오월에 가자. 춥지 않고 들꽃만 피었으면 좋겠어. 그쯤이 가장 빠르고 좋을 것 같아. 기간은 유럽에서 보름은 너무 짧고, 한 달이 좋기는 한데 사실은 우리가 바쁘게 일해야 하는 철이기도 하니 3주쯤이 좋겠다. 알았지?’
‘한참 일해야 하는 시기일텐테 괜찮겠어? 혹시나 일에 휴유증 있을지 모르고 다녀와서 나중에 후회되면 어떻게 하려고? 봄에 열심히 일해서 벌었다가 가을에 추석 연휴 이용해 가는 게 좋지 않겠어?’
‘사실은 내가 푸꾸옥에서 돌아오면서 부터 곰곰해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 가고 싶어. 오월이 딱 좋겠어. 물론 당신도 바쁜 시기일 텐데........ 그래도 더 늦기 전에 오월쯤엔 일단 떠나고 싶어.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이따가 술 한잔하고 나서 자세하게 다시 이야기해 줄게. 대신 당신도 5월에 프라하에 가고 싶은지 아닌지만 지금 대답해 줘. 그게 가장 중요하잖아?’
‘당신이 가고 싶다면 무조건 가야지. 우리가 프라하 이야기를 한 지가 벌써 몇 년 전부터야? 본래는 당신이 파리 타령만 덜했다면 그때 프라하를 먼저 갔었을걸? 유럽 여행의 사정도 급격하게 나빠지고 있잖아. 우리가 자주 다닐 때의 만만했던 유럽 여행이 지금은 결코 아니야.’
‘당신도 가고 싶다는 말이지? 알았어. 당신이 지금 가진 달러나 유로화 얼마나 남았니?’
‘그동안 다 쓰고 이젠 잔돈 정도밖에 없어. 왜?’
‘또 쪼잔하게 돈 타령하고 있을까봐 그러지 왜는? 좋아 이번 여행 경비는 100% 내가 쏜다. 비행기 표에서부터 숙소랑 체재 경비까지 얼마가 들던 내가 다 댄다. 그럼 됐지? 내 카드로 당장 비행기 표부터 사도록 해.’
‘많이 들어. 코로나 사태 이후로 엄청 올랐어.’
‘올랐든지 말았던지 이번 여행은 내가 다 책임진다니까? 선물이야. 내가 당신에게 해주고 싶은 여행 선물이라고. 알았지?’
‘그런 선물 받을만큼 뭐 특별히 잘한게 없는 것 같은데?’
‘그렇기는 하지만 뭐.......... 유럽 여행 가이드는 당신만한 사람이 없잖아? 당신 말대로 유럽 여행이 개판 오분 전처럼 까다롭고 비싸졌다면 이번이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다녀오면 되잖아. 다신 유럽을 못 간다고 해도 프라하하고 부다페스트는 꼭 가보고 끝을내도 내야 하지 않겠어? 내가. 유럽 여행의 필수 코스라 늘 여겨왔었으니, 마지막 유럽이다 생각하고 다녀오고 싶어. 다음에 선택의 기회가 있다면 당신 혼자만 다녀와서 칭찬을 줄줄 늘어놓던 조지아 아르메니아는 기회가 된다면 선택으로 가고 싶고, 유럽에서 딱 한 가지 아쉬운거라면........ 로마. 로마를 제대로 못 느껴본 게 정말 아쉬워. 피렌체는 정말 좋았으면서도 로마는 이상하게 별 감흥이나 기억이 별로 없어. 로마라면 당일치기로라도 한 번쯤 꼭 다시 가보고 싶기는 해.’
‘예전처럼 바쁘게 많이 걷는 여행을 원해? 아니면 파리와 몽펠리에처럼 느긋하게 한곳에 머물며 카페에서 멍 때리는 여행을 원해?’
‘후자. 골목길 걷다가 카페에서 죽치고 앉아 멍 때리고, 또 골목길 걷다가 맥주 한 잔 마시고, 시골 산책하며 들꽃 구경하는 그런 느긋한 여행을 원해. 성당 구경은 얼마든 좋겠지만 또 박물관이나 미술관 가서 하루 이틀 안하던 중노동 같은 그런 여행은 되도록 줄여주고, 그렇다고 마냥 멍만 때리지는 않겠지. 우리 하던 가락이 있는데 말야. 가끔은 좀 무리를 해서 많이 걷는다 해도 괜찬아. 연일 이어서만 아니면. 내가 이번 여행을 서두는 이유가 무릎 때문이란 것을 염두에 두어주었으면 좋겠어.’
‘어차피. 우리는 또 어떤 도시든 가는 곳 마다 모조리 걸어서 다닐 텐데 그게 제일 걱정이지 뭐.’
‘매일이 아니고 충분히 쉬면서 다니면 견뎌낼 수 있어. 대신 이번에도 캐리어 끌고 간다. 유럽의 돌멩이 골목길 사정을 잘 알지만, 지금 내가 배낭을 다시 지는 것은 크게 무리야.’
‘어차피 나는 배낭을 멜테니까 당신 캐리어를 내가 끌면 돼. 알았어. 알았어. 우리 둘이서 오월에 프라하로 간다.’
‘다녀와서 내 사진도 좀 바꿔 주는거야?’
‘당근이지. 출장 경비 완전 부담이라는데 병아리 사진을 다 떼어서 이천으로 보내는 한이 있어도 무조건 바꿔줄게.’
프라하(Praha) in 부다페스트(Budapest) out.
거기에다 이번엔 직항이닷.
흔히들 사람들은 체코 프라하(Praha)와 오스트리아 빈(Vienna)을 거쳐서 헝가리 부다페스트(Budapest)를 연결하는 여행을 <동유럽 3국 여행>이라고 한다. 관광 여행 상품 안내서에도 여행 잡지에서도 블로그나 방송에서도 <동유럽 여행>이라고들 한다.
우리가 지금 계획하는 여행 또한 이런 보편적으로 널리 알려진 지도상의 스케줄을 기본 바탕으로 해서 변형되어 갈 것이다. 그 이야기를 하고 싶다.
여기에 폴란드. 벨라루스. 슬로베니아. 슬로바키아. 루마니아. 세르비아. 불가리아. 보스니아 헤르체코바. 크로아티아까지를 동유럽에 포함 시키기도 한다.
아래 지도에서 보듯이 유럽의 동쪽에 위치한 지정학적 근거에서 나온 명칭이고, 하나같이 (구)소련에서 독립한 신생 독립 국가 연합(CIS)에 속한 나라들이다.
그런데 정말로 이들을 지정학적 위치를 근거로 (동유럽) 이라고 불러도 좋은 것일까?
나는 절대로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모두 유럽의 중앙에 위치한 (중앙유럽 국가)들 이라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21세기 현재에 이르러 러시아를 (구) 소련이라고 부를 수 없듯이, 미얀마를 버마라고 부를 수 없듯이, 조지아를 구루지아라고 부를 수 없듯이, 그리고 지금 튀르키예를 더이상 터키라고 부르지 않듯이 위에 거명된 나라들을 더 이상은 (동유럽)이라 부르지 말아야 하겠다고 거듭 강조하고 싶다. 그들은 유럽의 중심에 위치한 (중앙 유럽)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럼 무엇이 문제가 되어서 이런 오류가 생겼을까?
그 해답을 구하자면 먼저 한 가지 질문을 던져야만 한다. 지리에 관한 아주 쉽기도 하고 또는 어려울 수도 있는 문제다.
지구를 흔히들 오대양 육대주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러시아(Russia)는 어디에 해당하는가?
답은 거기에 있다.
러시아를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또 하나의 대륙이라고 보지 않는다면 말이다.
러시아는 자체로 하나의 대륙일까? 아니면 육대주 어딘가에 속하는 것일까? 러시아는 아시아의 북부와 유럽의 동부에 걸쳐있다. 그럼 아시아인가 아니면 유럽인가? 모든 국가는 크기를 넘어서 하나의 단일체제로 어디에든 속하게 되어 있다.
흔히 우리가 (구) 소련이라고 부르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Союз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спублик)이 1991년 12월 붕괴되기 까지 미국 중심의 서방세계 언론에서는 소비에트 연방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 지독한 동서냉전의 시대를 가리킨다.
대신 올림픽이나 국제사회의 교류에 있어서는 비록 소비에트 연방에 속해 있기는 하나, 민족주의 입장에서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등의 단위로 구분해 불러주었다. 체조에서 10점 만점을 최초로 받았던 루마니아의 코마네치가 대표적이라 하겠다. 동서 냉전의 시대에 동유럽 최대 최강 국가는 유고슬라비아 연방이었다.
바로 이 시기까지 동유럽이라 하면 당연하게 유고슬라비아를 필두로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등이 동유럽 국가에 해당했다.
소비에트 연합이 붕괴되고, 유고 연맹이 분열되면서 소련과 서구 열강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 지역은 민족적으로 분리가 되었고, 종교적으로 분리가 되었고, 영토라는 지리적 환경으로 또 분리되었다. 그런가 하면 열강의 노림수와 이해관계에 따라 더 분리되는가 하면, 불합리한 이해관계가 억지로 합쳐지기도 했다. 속된말로 난장판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유고 연방의 분리와 함께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분리되었고,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분리되었고, 세르비아와 보스니아와 헤르체코비아와 알바니아 등으로 나뒤어 독립국가가 되었다. 참으로 복잡한 이해관계가 새로 어지럽게 생겨났으며, 그 배경엔 러시아와 미국과 영국과 프랑스 등이 크게 작용했다.
당시까지는 이지역을 뭉텅그려서 그냥 동유럽이라 부르는 것 까지는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 (구)소련은 몰락해서 지도에서 사라졌다. 대신 소련 연방의 맹주였던 러시아가 떨어져 나간 영토를 추스르며 국제 무대에 등장했다.
국제사회는 유럽의 동쪽에서 아시아 대륙의 북쪽에 걸쳐있으면서 아메리카 대륙에 걸치는 알래스카까지의 이 거대한 동토의 왕국을 유럽에 편입시켰다. 지금 러시아는 분명 유럽에 속한다.
이제, (동유럽)하면 러시아를 빼고는 동유럽을 거론할 수 없으며, 러시아의 등장과 함께 유럽의 동쪽 지형이 완전히 바뀌고 만 것이다.
(동유럽)을 거론하자면, 일단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들어가고, 코카서스 지역의 신흥 국가인 조지아와 아르메니아를 먼저 꼽아야만 한다. 거기에다 카자흐스탄 같은 이슬람 국가들까지가 진정한 (동유럽 국가)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런 전제를 깔고 유럽 전체 지도를 펼쳐보자.
체코, 오스트리아. 헝가리는 동쪽 변방이 아니라 유럽의 한복판, 아니 정중앙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젠 그들을 (중앙 유럽)이라고 바꿔 불러야 하지 않을까?
여전히 러시아를 동유럽이라 불러주시 싫다면, 조지아. 아르메니아. 카자흐스탄을 (동유럽)이라 불러야 맞다.
아래 지도를 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아래의 유럽 지도가 명실상부 현재의 유럽 국가들을 빠트리지 않고 모두 포함하고 있는 진짜 유럽 전도라 하겠다. 어디 체코. 오스트리아. 헝가리가 우측 구석에 쳐박혀 있는가 말이다. 한가운데 정중앙에 떡하니 버티고 있지 않은가? 어디가 (동유럽)인가? 한 번 가리켜 보라.
“(동유럽)의 지정학적 위치에 따른 개정의 정당성과 필요성을 앞에서 피력을 했었는데, 당장 이번에 계획하고 있는 실질적인 세부 여행계획을 설명하려 시도를 해보니, 매번 표현이 잘못 표기되기도 하고, 또 이 글을 읽어주시는 분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느닷없이 (동유럽)이 (중부유럽)이 되고, 또 엉뚱하게 (진짜 동유럽) 이야기가 나오면 정말로 헷갈릴 것 같아서, 이번 글과 다녀와서의 여행기에서만은 지금 당장 항간에 통용되고 있는 (예전의 동유럽)이란 표현을 그냥 사용해야만 할 것 같다. 어디까지나 쉽게 설명을 하고 또 이해를 쉽게 하게끔 써 내려가고 싶은 마음에서 이번까지는 통념에 맡겨 편하게 써 내려가고자 한다. 이해를 구하면서 말이다.”
푸꾸옥 여행이 이번 겨울방학에는 생략하게 되었다는 가정하에서 챠밍여사와 단둘이서 만 떠나는 (동유럽 여행)을 실제로 계획을 했었다. 겡구와 짱구와는 이미 합의된 사항이었는데 그만, 태리가 할머니에게 직접 전화해서 울먹이며 ‘할머니. 베트남 여행 다시 가고 싶어요’하는 바람에 동유럽 여행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때 세세하게 계획했던 (2026년 동유럽 여행) 코스와 스케줄은 대충 다음과 같았다.
인천공항 출발 --> 폴란드 크라프트(Kraków) --> 자코파네(Zakopane) --> 브로츠와프(Wrocław) --> 체코 프라하(Praha) --> 야간열차 이용. 장거리 이동. --> 헝가리 부다페스트(Budapest) --> 플릭스 버스 이용. 장거리 이동. --> 크로아티아 자그레브(Zagreb) --> 플리트비체 (Plitvice Lakes National Park) --> 두브로브니크 (Dubrovnik) --> 인천공항 도착.
핵심은 겨울여행인 만큼 동유럽의 진짜 겨울을 만끽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폴란드의 크라프트를 첫 방문지로 삼았고, 가장 기대한 것은 자코파네의 대자연 속에서 그냥 멍을 심하게 때리고 싶었다. 며칠을 그렇게 보내다가 브로츠와프를 거쳐서 프라하에 오면, 아무것도 안 하고 사흘 정도를 올드시티 프라하 성에서 서성거렸을 것이다. 그리고는 야간열차를 이용해 중간 과정을 모두 과감히 생략하고 곧장 부다페스트로 가서, 프라하에서 그랬던 것처럼 중세에서의 멍때리기로 또 사흘쯤 보내고 싶었다. 나머지 남겨놓은 넉넉한 시간을 모아서 다른 곳에서 쓰기 위한 소도시 여행등을 과감하게 모두 생략한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빈과 할슈타트 대신 크로아티아를 선택했다. 이탈리아를 드나들면서 늘 아쉬웠던 지척에 있는 크로아티아가 이번 여행의 대미를 장식해줄 것이다. 남겨놓은 시간 모두를 잘 분배해서 크로아티아에서 또 멍때리기를 실컷 하다가 두브로브니크에서 귀국하는 것이 애초 세웠던 여행계획이었다. 윤태리 전화 한 통에 순식간에 날아가버린 한 겨울밤의 꿈이었지만 말이다.
이번엔 또 상황이 달라졌다.
챠밍여사가 느닷없이 (동유럽을 가자)고 선언하고 비행기 표를 구매한 이후에, 느닷없이 TV에서 (동유럽 여행)에 대한 선풍을 일으키고 있는 방송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풍향고) 시즌2라나 뭐라나?’
‘그 사람들 참 여행 어설프고 험난하게 한다. 정말 가지가지 하고 다닌다.’
인터넷 앱 사용을 하지 못하는 전제 때문이라고들 연실 핑계를 대는데, 허 참. 그게 시방 말이 되나?
시쳇말로 우리가 여행을 좀 다녀봤는데, 우리 부부의 스페인 여행때 까지 우리도 앱이라는 것 없이, 오로지 발품과 눈치로 다녔었다. 파리 여행 때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핸드폰 로밍을 하고 다녔다. 그러니까 우리가 앱을 사용한 것도 비교적 근자에 있었던 일이다. 지도 하나만 들고 다녀도 이 세상 어디든 다 다닐 수 있다. 너끈히 다니고도 남는다. 물론 앱을 사용해 보니 편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가끔은 우리가 처음 나름으로 고생하면서 다녔던 그 아날로그 방식의 여행이 그립기도 하다.
챠밍여사가 풍향고 방송에 푹 빠졌다.
왜냐하면 서툴고 어설픈 연예인들의 좌충우돌식 여행이, 당장 목전에 잡혀있는 우리 여행 코스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무지무지 재미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번 우리의 여행도 어쩔 수 없이 (동유럽 3국) 여행이 될 수밖에 없겠다.
체코(프라하)와 오스트리아(빈)과 헝가리(부다페스트)가 중심이 되는 여행이다.
하지만,‘이번이 마지막 유럽여행 이다 생각하고 프라하를 꼭 다녀오고 싶다’는 챠밍여사의 속마음을 읽었으니 흔하게 남들이 하는 그런 지극히 보편적인 평범한 유럽여행을 기획할 수는 없다. 내가 이래뵈도 태리 세리 할아버지가 아닌가? 자칭 여행이 취미이자 특기인 사람이 아닌가?
선택은 단 두가지 뿐이다. 집중이냐 분산이냐?
(프라하 in – 부다페스트 out) 이라는 비행기 스케줄 외에는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다. 내 맘대로가 아닌가?
거기다 가진 것이라곤 ‘시간’과 ‘배짱’ 만이 내가 가진 전부다.
좋은 여행, 그리고 멋진 여행을 꾸려갈 경험과 능력은 아직 충분하게 남아있다. 난 아직 현역이다.
집중이냐? 아니면 분산이냐?
프라하와 부다페스트를 베이스 캠프로 삼고 주변의 여러 소도시들을 당일치기 여행 등으로 많이 다니느냐?
아니면, 무슨 수를 쓰던지 여행의 중간에 먼 이탈리아로 방향을 틀어서 피렌체에 며칠 묶으면서 당일치기 형식으로라도 로마를 기필코 다녀오느냐를 결정해야만 한다.
체코 프라하에 머물면서 생각했던, 폴란드 크라프트나 브로츠와프, 그리고 빈에서 연계를 생각했던 짤츠브르크나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 등을 포기한다면, 제법 거리가 상당하겠지만 로마와 피렌체를 못 갈 이유도 없다.
유럽을 여행하면서 항상 현실적인 고민과 고충이 되는 것은 항상 교통 연계에 따른 이동과 교통비 문제다.
기차는 안락하고 편리한데 비싸다. 비싼 정도를 넘어서 대부분 비행기(국적기) 수준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비싼편이다.
유럽 전지역에 걸쳐 저가 항공은 상상초월로 저렴하다. 다만 그 저렴함이 달랑 서류가방 하나만 들고 다닐때만 가능하다. 캐리어나 배낭이라도 가지고 이용하려면, 수화물 비용이 엄청나서 차라리 기차 1등석을 타는 편이 낫다.
버스 노선은 유럽 전역에 고루 잘 퍼져있다. 아주 저렴한 편이지만, 이동 시간이 길고, 상황에 따라 휴게소 이용이나 화장실 문제등 고려할 사항들이 있다. 요즘은 장거리 노선의 경우 화장실이 딸린 버스도 많이 있다. 특히 녹색의 플릭스 버스 노선이 그중 가장 으뜸으로 유럽 전역을 커버해 주고 있다. 일부 노선은 비행기처럼 휴대하는 수화물 비용을 따로 청구하는 경우도 있다.
자가용이나 렌트카 이용이 아니라면, 패키지 여행자가 아니라면, 기차와 비행기와 버스를 잘 선택해 이용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즐겁고 행복한 여행을 하는 지름길인 것이다.
로마와 피렌체를 가고 싶다.
그렇다면 프라하에서 빠져 피렌체로 향했다가 빈으로 돌아올 것인가, 아니면 빈에서 빠졌다가 다시 빈으로 돌아왔다가 부다페스트로 이동할 것인가가 핵심 포인트다.
며칠 안에 이 결정은 먼저 내려야만 한다. 전 일정의 숙소 예약이 필수는 아니지만, 거점 중심도시를 이동할 때는 적어도 첫날은 일단 숙소가 정해져 있어야 유동적인 모든 상황에 대처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주 중요한 전제가 된다.
우리가 급하게 여정을 바꾸어서 모로코에서 자정을 넘겨 스페인 알헤시라스 항구에 도착했을 때, 배낭을 메고 심야의 우범지대라는 항구를 돌아다니며 숙소를 찾아다니는 불상사를 겪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자면, 가능하면 빠른 시간안에 대략적인 이동 루트를 결정하고 나서, 먼저 이동하는 첫날 묵게 될 숙소 정도는 확보가되어야 만 어느 정도 마음이 놓이게 된다.
프라하에 도착하는 날과 피렌체에 도착하는 날과, 빈에 도착하는 날고, 부다페스트에 도착하는 날 정도가 필수 요건이 되는 것이다. 이탈리아를 포기하느냐, 아니면 어떻게든 갈거냐?
어렵다.
하지만 어렵더라도 챠밍여사의 컨디션을 염두에 두고 한 번쯤 모험을 해볼 가치도 충분하다 생각된다.
여유로운 느긋한 여행이냐? 아니면 예전처럼 무지하게 바쁜 여행이냐?
어쩌겠는가? 하늘이 허락해 주시는대로 할 밖에..........
1> 체코 프라하(Praha)
2> 오스트리아 빈(Vienna)
3> 헝가리 부다페스트(Budapest)
4> 폴란드 크라프트(Kraków)
5> 독일 드레스덴(Dresden)
6> 체코 체르키크롬로프(Cesky Krumlov)
7>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Bratislava)
8> 오스트리아 할 슈타트(Hallstatt)
A> 이탈리아 피렌체(Firenze)
B> 이탈리아 로마(Rome)
1> 체코 프라하(Praha)
체코(Czech Republic)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프라하의 봄’이 떠오른다.
원제는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인데, 소재가 ‘프라하의 봄’을 다루고 있어서, 영화 수입업자가 원제가 너무 길다고 해서 ‘프라하의 봄’이라고 바꿔버리면서 시작되었다. 명배우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쥘리에트 비노슈가 주연을 맡아 1988년 영화로 발표되었는데, 영화는 별로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배우들의 연기만큼은 절대적이었다 인정받았다.
‘프라하의 봄(Prague Spring)’은 1968년 1월 5일부터 8월 21일까지 프라하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을 가리킨다. 이 평화적 시위는 이후로 (구)소련 연방에 지배를 받아왔던 많은 민족에게 민주화에 대한 열망의 불씨를 전해주는 도화선이 되었다. 그 불씨가 커져서 마침내 1989년 11월 17일 ‘벨벳 혁명(sametová revoluce)’이 일어났고, 결과로 소련이 물러가고 자유주의 체코슬로바키아 정권이 탄생했다. 하지만 3년만인 1992년에 민족문제와 종교문제를 들어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은 ‘벨벳 이혼(sametový rozvod)’으로 또다시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 독립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체코와 분리된 슬로바키아를 하나로 엮어서 이들의 역사적인 옛 이름은 보헤미아(Bohemia) 혹은 보헤미안(Bohemian) 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보헤미아라는 용어가 지리적이나 민족적으로 체코슬로바키아 전역을 고루 포함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부분 지역을 포함하기에 흔히 그렇게 부른다 해서 별 무리는 아니지 싶다.
이 지역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보헤미안은 역사적으로 아주 오래전부터 떠돌이나 방랑자로 그냥 통용되었다. 영어의 배가본드(vagabond.)와 같은 의미로 쓰인다. 유럽 사람들은 애초부터 아예 가난뱅이 떠돌이나 범죄자, 도망자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해왔다. 비슷한 처지로 집시(Gypsy)가 있다. 집시가 모두 보헤미안인 것은 아니겠지만, 보헤미안의 상당수가 집시처럼, 혹은 집시와 함께 떠돌며 생활을 유지한다고 과거의 프랑스 사람들은 여겨왔으며, 이 때문에 많은 마찰이 생겨나기도 했다.
사실 이런 인종 차별적인 폄하와 괄시는 로마제국에 의해서 생겨났다고 보겠다. 보헤미안의 조상이 알프스산맥 너머에 흩어져 살며 약탈을 일삼는 켈트족이었기 때문이다. 로마는 그들을 야만인이라고 낙인찍고 몰살시키려 부단히 애를 썼었다. 그런 편견이 이어져 20세기에 히틀러에 의한 유대인과 집시들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로 이어졌던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프라하는 마냥 아름답고 낭만적인 여행지만은 아닌 것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흘러가는 불타강이 내려다 보이는 카를교 어느 난간에 기대어 앉아서 스메타나의 교향시 <나의 조국(Ma vlast)>의 2악장 ‘불타바’를 들으면 어떤 위로와 평안이 찾아오려나? 아무래도 이번 프라하에서는 스메타나의 교향시를 들으며 다녀야겠다.
프라하 성. 바츨라프 광장과 화약탑. 얀 후스 동상과 구시청사의 천문시계. 그리고 카를교와 알폰소 무하 박물관과 체코까지 왔으면 무조건 맥주에 맘껏 취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체코 사람들은 르네상스 시대부터 이미 프라하를 ‘북쪽의 로마’라고 불려졌다고 자부심을 갖는다.
그런데 오스트리아 사람들도 짤츠부르크(Salzburg)가 아주오래 전부터 이미 ‘북쪽의 로마’로 불렸다고 주장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두 도시는 참으로 많이 닮았다.
하여, 이번 여행을 통해 어느 도시가 더 ‘북쪽의 로마’로 불릴만 했는지 그 진위를 한 번 따져볼 생각이다.
‘중세의 풍경이 고스란히 눈 앞에 펼쳐지는 백탑(百塔)의 도시 프라하(Praha)’가 이번 여행의 첫 번째 버킷 리스트에 올랐다.
2> 오스트리아 빈(Vienna)
유럽은 어느 도시에서나 거리 곳곳에서 은은하게 클래식 선율이 흘러 나온다.
유럽이 여행자에게 베풀어주는 낭만적인 정취이자 매혹적인 선물이라 하겠다. 공원이나 거리의 곳곳에서 길거리 악사들을 아주 흔하게 만날 수 있다. (겨울 나그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헝가리 무곡) (첼로 협주곡 1번 다장조)를 듣기 위해 불편한 복장을 갖추고 굳이 음악회나 오페라 하우스를 찾아가지 않아도 된다. 그들이 꼭 세계적인 연주가일 필요도 없어 보인다. 추측하기에 지금 그 흘러나오는 선율을 듣고 있는 당신 역시 그 음악들을 모두 제대로 이해하는 최고의 청취자나 클래식 애호가는 아닐 것같아 드리는 말씀이다. 하지만 아무러면 어떤가? 그 선율에 귀를 쫑긋거리는 마음만 가지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겠는가?
분명 어디선가 들어보기는 했는데 제목이 생각나지 않거나, 알지 못하는 음악이 지금 다시 흘러나오기 시작하고 있다.
내가 유럽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이유중에 하나다.
그런 이곳이 바로 비엔나(Vienna)다. 어떤 이는 꼭 빈(Wine)이라고 부르는 이름을 두 개나 가지고 있는 바로 그 도시다.
이름이야 어쨌던, 세상 사람들은 이 도시를 “영원한 음악과 예술의 도시”라고 부른다.
그런가 하면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광과 슬픔이 아로새겨 있는 장엄한 건물들이 즐비한 도시의 분위기나 현지인들의 생활 모습이나, 특히 주로 사용하는 언어를 보자면 오스트리아와 스위스와 독일은 사뭇 닮아있다. 아마도 그것 또한 역사 뿌리가 먼 과거엔 같은 하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공용어는 독일어다. 가문의 핏줄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얼마 가지 않아서 다들 한곳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비엔나는 적어도 내 생각으로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파리나 로마나 런던에 비하자면 숲과 정원(녹지)이 많고 조용하고 깨끗하며, 어딘가 모르게 한 박자 느린듯한 템포로 걸으며 살아가는 듯한 현지인들의 모습을 조금은 낯설게 만나볼 수 있다.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어딘가 모르게 우아하고 여유가 있어 보이는 점잖은 차림의 사람들이다.
많이 낯설다.
오랫동안 유럽의 정치와 경제 그리고 문화의 중심지로, 늘 바쁘게 급변하는 세상의 흐름을 이끌던 정신없는 도시가 바로 비엔나였기 때문이다.
그런 결과로 비엔나의 다른 얼굴은 늘 비싼 물가로 찾아오는 사람들의 주머니 사정을 털어내는 겉과 속이 전혀 다른 호화롭고 사치스런 그런 도시이기도 했다.
지금 이 순간의 비엔나가 가진 현지인들의 우아하고 여유로운 표정은 어쩌면, 그들이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성공하고 나서 정년을 넘긴 인생 후반의 사람들이 경제적 여유와 품위를 지키며 노년의 휴식기에 접어든 사람들이 상당수이기 때문에 풍겨나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젊은이들은 아직 성공이나 부를 웬만큼 이루지 못했기에, 성공과 부를 얻기 위해서 밀라노나 로마나 파리나 베를린으로 대거 나가버린 나이 지긋한 성공한 사람들의 도시가 바로 지금의 비엔나가 아닐까 보여진다.
코로나 사태 이후로 모든 면에서 급변한 유럽의 사정 속에서, 나에게 비엔나 하면 가정 먼저 떠오르는 것은,‘과거에도 물가가 비싼 곳이었는데, 이젠 정말로 여러 날 체류하기가 영 거북해진 초고물가 도시’라는 인상이 가정 먼저 떠오른다.
‘오늘도 변함없이 어디선가는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오고 있겠지만........ 그냥 편하게 패스를 해 버릴까? 아니면 죽기살기로 짧게 치고 빠져나올까?’ 그것이 문제로다.
‘비엔나는 하루나 이틀? 짤츠부르크는 관심을 끄고, 인스부르크나 인터라켄은 여행 방송으로 대처하고, 아무리 그렇다 해도 할슈타트(Hallstatt)만은 할망구에게 어떻게든 보여주고 싶은데? 어쩐다? 당일치기를 해서라도....... 동유럽은 어차피 이번이 마지막이라는데.......... 로마를 갈까? 아니면 오스트리아에서 며칠을 머물까?’
클림트의 <키스>는 왜 (풍향고)에서 그렇게 떠들썩 하게 다루어 가지고? 성 슈테판 성당이 그렇게 엄청난 감동이었다고?
헐!!!!!
그럼 내가 그동안 할망구를 끌고 다니면서 보여줬던 바티칸 성당의 감동과 피렌체 두오모의 부르넬리스키를 찬양했던 감동과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의 감동은 그냥 연습이었나? 하기야 소피아는 잊어 버렸나? 그넘의 (풍향고) 때문에 느닷없이 성 슈테판 성당 타령을 하니 말이다. ‘어이. 유재석씨? 책임질꺼여?’이렇게 보면 만듯이 비엔나를 가기는 가야겠는데........
성 슈테판 대성당도 가야하고, 게른트너 거리 산책도 해야하고, 오페라 하우스 입석 관람석이라도 구해봐야 하는데, 호프부르크 왕궁도 있지, 쇤브룬 궁전과 벨베데레 궁전도 있고, 거기다가 <키스>는 안 보더래도 여기까지 왔으면 카라바조와 라파엘로는 보고 가야 하지 않을까? 슈테판 성당을 보아야 한다면 옆에 있는 (앙커 시계)가 나는 더 궁굼한데 말이다.
이거 비엔나를 어쩌지?
음악가들의 공동묘지도 찾아봐야 하고, 거기에서 폰 카라얀이 지휘하는 비엔나 필이 연주하는 베토벤의 교향곡 정도는 한 번 들어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럼 며칠이 걸릴까?
로마(Rome)야! 도대체 너를 어쩌면 좋겠니?
3> 헝가리 부다페스트(Budapest)
헝가리 부다페스트(Budapest)를 다녀왔다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다.
‘도나우 강의 진주’ 혹은 ‘동유럽의 파리’라고 하나같이 부다페스트의 남다른 아름다움을 칭송한다.
굳이 여기에 초를 치자면, 한창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풍향고 2>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쏙 빠졌지만 말이다. 출연진(유재석. 지석진. 양세찬. 이성민)의 동유럽에 대한 관심도(?)가 적었거나, 아니면 이 또한 앱 사용 제한에 따른 지식과 정보의 한계성(?)이 잘 드러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이번 방송에선 부다페스트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그런 흔하디 흔한(?) 정도 세간의 속설을 그대로 타넘고 말았다. 혹, 다음 시즌에는 어디가 되었던 선택되는 여행지에 대하여 더 죽어라 파고들지 않을까 기대가 된다. 다음 시즌을 기대하면서 아무튼 파이팅이다.
여기에 더해서 부다페스트를 좀 안다는 사람들이 항상 전면에 내세우는 이야기가 또 있다.
‘부다페스트(Budapest)는 부다(Buda) 지역과 페스트(Pest) 지역이 세체니 다리가 건설되면서 하나의 도시로 묶여서 탄생했다’는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 정도는 알고 있어야 그래도 부다페스트를 다녀왔다고 할 수 있을만큼, 이런 이야기가 하나의 잣대가 되어 버렸다.
이 이야기는 맞는 말이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완벽한 대답은 아니다.
부다페스트는 2개가 아닌 3개의 마을(소도시)이 하나로 합쳐진 것이라 해야만 완벽한 해답이 될 수 있다.
이곳에 최초로 들어선 마을(소도시)의 이름 역시 부다(Buda)였다. 위치는 <어부의 요새>에서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간 현재 부다페스트 행정구역 구분상의 2지구와 3지구에 해당된다.
현재 그 장소의 중심엔 헝가리 고고학 박물관(Aquincum Museum)이 있으며, 뒤쪽에서 로마 목욕탕 발굴이 현재에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이 일대는 대단위 로마군대의 주둔지이자 로마가 건설한 소도시가 있었으며, 이 순간에도 활발하게 발굴중이다. 온수가 나오는 사우나가 있는 목욕탕을 건설했을 정도라면 이 도시의 중요성이나 규모를 어느 정도 쉽게 짐작해 볼 수 있다.
로마가 동서로 나뉘었다가 이곳을 지배하던 서로마가 멸망하고 나자, 게르만족이 나타나 이 지역을 점령하고 다스렸다. 9세기 후반에 이르러 동북아시아와 연관이 있다고 추정되는 유목민 마자르족이 게르만족을 몰아내고 이곳 도나우강 일대에 자신들의 나라 헝가리 왕국을 건설했다.(유럽에서 거의 유일하게 헝가리만이 한민족과 정체성이나 문화적 동질성이 유독 비슷하다는 사실에 자주 놀라곤 한다.)
초대국왕 이슈트반 1세가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한편, 한참 아래의 남쪽 강변 언덕에 왕궁과 관청을 짓고 성을 쌓게되자 귀족과 부자들이 우르르 몰려들기 시작했다. 부다(Buda)의 중심이 옮겨간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중심지 왕궁과 관청 일대를 부다(Buda)라 부르기 시작했고, 옛 중심지인 원래의 부다를 옛부다(Old Buda)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 변하여 그냥 쉽게 오부다(Obuda) 라고 바꿔부르게 되었다. 어부와 소시민들이 살던 지역에 왕궁과 관청이 들어서고 귀족과 관리들이 모여들자, 어쩔 수 없이 서민들은 강을 건너 옮겨 살기 시작하였으니 지금의 페스트(Pest) 지역으로, 여기에서의 페스트 어원은 ‘도자기 굽는 마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판자촌이나 빈민촌이었던 것이다.
헝가리 왕국의 지속적인 번영과 발전을 위해선 부다와 페스트의 합병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역설해 오던 세체니 백작의 거룩한 헌신으로 1848년 다리가 완공되었고, 그의 업적을 기려 <세체니 다리>라 이름지었다.
결국 <세체니 다리>는 오부다(Obuda)와 부다(Buda)와 페스트(Pest), 3개의 마을(소도시)를 통합해 현재 헝가리의 수도인 부다페스트를 완성 시키게 된 것이다.
카를교에 못지않게 아름다운 다리로 손에 꼽히는 <세체니 다리>에는 양쪽의 다리 입구를 지키고 있는 네 마리의 사자상이 아름답기로 또한 명성이 자자하다. 유명 조각가들마저도 이 네 마리 사자상의 자태가 너무나 아름답고 완벽하여 전혀 흠잡을데가 없다고 입을 모았을 정도였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는 참으로 웃기는 사태가 발생했다.
부다페스트의 한 어린이가 여기 사자상이 모두 혀가 없다는 사실........ ‘울지 못하는 사자’라는 진실(?)을 폭로해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만들었다.
그후로 헝가리 사람들은 이를 두고 새로운 농담을 만들어 냈다.
사자상이 울면 세상에 어떤 일이 벌어진다던가, 사자상이 울면 어떤 재앙이 닥칠지도 모른다거나, 혹 사자상이 울면 헝가리가 월드컵에 우승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등등 말이다. 우리나라 화순 운주사의 천불천탑이 제대로 완성되었다면 아마도 세상은 어떻게든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와 비슷한 이야기다. 어디를 가나 이런 전설같은 이야기는 많이 있다. 그곳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말이다.
혹, 내가 갔을 때 사자상이 울면....... 사자상 두 개쯤 가져와서 우리 아파트 입구에 설치하게 되려나?
부다페스트는 특히 온천으로 유명한데......... 내가 사우나는 물론 목욕탕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냥 계곡 물탕이 좋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온천이 세계적이라 하지만 얼추 그냥 패스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상하게도 부다페스트에 끌린다. 이건 아주 오래전부터 그래왔다. 프라하 보다 부다페스트에 더 끌린다. 별다른 이유가 없음에도 말이다. 이번 여행의 말미는 그 부다페스트다. 여러 날 그냥 파묻혀 있다가 저절로 부다페스트의 아름다움과 정취를 그냥 온몸 가득 담아서 돌아오고 싶다.
프라하의 인기만큼이나 체코의 전통음식과 맛집에 대한 기사도 넘쳐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사실적으로 따진다면 알프스 북동쪽의 동유럽 국가들의 대표 음식이란 게 언어별로 부르는 이름은 다를지 몰라도 내용은 비슷하다 못해 거기서 거기인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그랬음에도 나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가게 된다면 거기에서 꼭 먹고 싶은 음식이 있다.
굳이 어디가 원조인지까지는 따지지 않더라도 굴라쉬(Goulash)는 헝가리 굴라쉬로 부다페스트에서 먹어보고 싶다. 다음으로는 피자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꽈배기도 아닌 것이 샤워 크림을 홀라당 뒤집어쓰고 나오는 랑그스(Langos)를 먹고 싶고, 길거리 산책이나 도심 투어를하게 된다면 굴뚝빵(Kurtos kalacs)은 실컷 먹으며 다니고 싶다.
4> 폴란드 크라쿠프(Kraków)
“신은 이 어둠 속 지하의 막장에서 신을 찾으며 절규했던 이들에게 결코 화답하지 않았으며 신의 대리자들 또한 기꺼이 지하로 내려가 그들을 찾지 않았다.”
폴란드의 비엘리치카 소금 광산에 대한 어느 비평가의 기사다.
창조주의 외면과 방치는 소금 광산에서 끝나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 동안 나찌 독일에 의한 피해와 상처가 가정 처참한 국가가 바로 폴란드였다. 수도 바르샤바는 온전한 건물이 단 한 채도 남아 있지 않았을 정도로 완전치 파괴되어 폐허로 변했다. 나찌 독일의 침공에서 치명상을 입었고, 나찌를 몰아내려는 연합군의 융단 폭격으로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폴란드인의 상당수를 채웠던 유대인들이 게토에 갇혔다가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가스실로 끌려가 잔인하게 학살되었다.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입은 국가가 폴란드며, 수도 바르샤바는 완전하게 초토화되었다. 지금의 바르샤바는 2차대전 이전의 모습으로 완벽하게 재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럼 폴란드는 언제나 억울한 피해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2차대전 이전까지는 폴란드가 갑질(?)로 얼룩진 세상을 어지럽히는 극악무도한 악덕업자였다. 아마도 이런 경우를 인과응보(因果應報)라고 하는 것 같다.
내가(필자) 폴란드 역사에 관심을 갖고 언젠가 여행을 가 보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 영화 <대장 부리바(Taras Bulba)>를 보고 나서였다.
4년 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의 발발 소식을 접하면서 폴란드 역사가 떠올라 <대장 부리바(Taras Bulba)>를 인터넷을 통해 찾아서 다시 보았다.
조심스럽게 <대장 부리바(Taras Bulba)>를 떠올리면, 폴란드 근현대사가 떠오르고, 이어서 미국의 트럼프 정권과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정권과 러시아의 푸틴 정권이 떠오른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위대한 로마도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렸다. 트럼프와 푸틴과 네타냐후가 로마를 꿈꾸기는 했을 수 있으나, 로마를 능가할 수는 없다. 무너진 로마는 처절한 대가를 치루어야만 했다. 미국도 러시아도 이스라엘도 언젠가는 그 대가를 반듯이 지불해야만 할 것이다. 인과응보(因果應報)는 인류 역사가 증명하는 불변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서 폴란드 여행을 꿈꾸게 된 장면은 바로 끝없이 펼쳐진 대평원을 내달리는 말들 때문이었다. 산이 없는 대평원에 가도가도 끝이 보이지 않을만큼 밀밭이 펼쳐지고, 해바라기밭이 장관을 이루는 곳이 바로 폴란드였기 때문이다. 그 들판을 기차를 타고 달려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기차 차창밖으로 부족을 이끌고 말을 달리는 율 브린너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번적이는 은빛 투구에 화려한 왕국 근위대의 복장을 한 폴란드 기병대가 그 뒤를 쫓고 있다. 쫓고 쫓기는 기마부대 간의 처절한 전투장면이 벌어지고 마침내 코사크족의 부족장 부리바와 폴란드 군대 장교 복장을 한 아들이 전장터에서 마주치는 17세기 우크라이나 대평원에서 벌어진 실제 역사이다.
중동과 소아시아를 통일한 이슬람 제국 오스만 투르크(터키)의 유럽 침공이 시작되었다.
삽시간에 유럽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직면하고 말았다. 그 최전선이 바로 폴란드였다.
폴란드는 우크라이나 지역의 대평원에서 유목 생활을 하는 호전적인 유랑민족인 코사크족을 끌어들여 전쟁을 치르면 승리하겠다는 확신을 가지고, 부족장 부리바에게 전쟁에 참여해 연합군으로 승리를 쟁취하게 되면 우크라이나 평원에 코사크족의 나라가 건설되도록 허락하겠다고 약속했다. 전쟁은 대대적인 폴란드의 유럽군 승리로 끝이났다. 하지만 폴란드는 코사크족의 나라를 허락해 줄 생각이 처음부터 아예 없었다. 토사구팽(兎死狗烹)을 당한 것이다. 코사크족은 폴란드 왕국을 대상으로 전면전을 펼쳤고, 오스만에 대항하느라 잠시 기력을 잃었던 폴란드는 재기해 무섭게 코사크족을 몰아세웠다. 끝내 코사크족은 멸망당했다. 역사에서 지워지고 사라졌다. 하지만 동유럽 지역의 약소국가와 유량 부족들은 이 사건을 ‘대홍수’라고 기억하며 교훈을 잊지 않았다.
“강대국이 호의를 베푸는 결과는 언제나 토사구팽(兎死狗烹)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며, 세상의 정의가 살아있다면 언젠가 반듯이 인과응보(因果應報)가 뒤따르리라는 믿음이었다. 한 마디로 폴란드는 신뢰를 잃었다.”
아니나 달랐을까.
물러갔던 오스만 투르크(터키)가 재침공을 해왔고, 다급해진 폴란드 왕국은 서방 세계와 동유럽의 여러 부족과 약소국가들에게 도움을 청했는데, 그들은 아직 대홍수 사건(코사크족의 비애)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은 외면을 하거나 오히려 오스만 투르크에게 길안내와 정보를 내주었다. 코사크족의 한을 대신 풀어준 것이다.
결국 폴란드 왕국도 멸망했다. 실질적 영토 지배를 강행하지는 않았지만, 왕국의 지배자들이 끌려가 처형되고 교체되었으며, 일부 영토 할양과 식민지 지배를 받게되었다. 이 일로 폴란드는 유럽 역사에서 약소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작금은 미국과 러시아와 이스라엘이 깊게 되새겨야 할 덕목들인 것이다.
내가 가장 보고싶은 폴란드는 수도 바르샤바가 아니라 예전의 수도 크라쿠프(Kraków)다. 중세 시대의 폴란드가 가장 잘 보존되고 있는 도시가 바로 크라쿠프다.
2차 대전 때 나찌 독일군의 주력부대와 지휘부가 가장 많이 모인 곳이 바로 크라프트였다. 독일군의 최고 핵심지역으로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 나찌는 크라프트가 이미 어떤 곳인지를 알고 선택했었기에 침공하면서도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 연합군의 무차별 반격으로 바르샤바가 초토화되자마자 독일은 허겁지겁 주력부대와 지휘부를 모조리 이탈리아와 알프스 이남으로 철수해 버렸다. 덕분에 크라프트는 전쟁 전이나 후나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는, 특혜받은 엉뚱한 도시가 되고 말았다.
전쟁 동안에 게토(유대인 집단 거주지역)를 통해 수많은 유대인들이 체포되어 끌려왔고, 여기를 통해 가스실로 가게 되었지만, 그런 비극을 통해서 기적이 일어났던 <쉰들러 리스트>가 실제로 벌어진 도시가 바로 여기 크라프트였다. 크라프트를 이야기하면 그 이름이 생소한 사람이 대부분이겠지만, <쉰들러 리스트>라면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크라프트는 그렇게 성스러운 곳이다.
기적 같은 이야기는 그것만이 아니다.
나찌 독일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던 그 시기에 전쟁의 한복판이던 독일의 한복판에서 한 사내아기가 태어났다. 전쟁 물자를 생산하던 군수공장에 강제로 끌려온 폴란드인 어머니와 프랑스 외인부대 군인 장교로 전쟁에 참여했다가 포로로 독일에 끌려온 폴란드인 아버지가 전쟁 말기에 도망쳐 숨어지내며 사랑을 나누다가 태어났다. 전쟁이 끝나자 그들은 고향 크라프트로 돌아갔다. 크라쿠프에서 성장하면서 미술에 재능이 있던 소년은 19세에 크라프트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꾸준히 성장하며 발전하는 그에게 온 유럽의 미술가와 평론가들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2006년에 로마의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대성당을 위해 새로운 청동문과 세례 요한 동상을 제작하도록 의뢰받았다. 온 세상의 뜨거운 관심을 받게되었다. 적어도 미켈란젤로급은 되어야 제작 의뢰를 받을만하다고 벌써부터 소문이 나돌았기 때문이다. 지금 안젤리 대성당에 가면 그 작품을 언제든 만나 볼 수 있다. 나(필자)는 로마에 갈 때마다 방문해 감상을 했다. 세 번이나 말이다.
하지만 그를 더 유명하게 만들어준 화제의 작품은 시칠리아 아그리젠토에 가면 만나볼 수 있다. 콩코르디아 신전앞에 누워있는 거대한 청동조각상 <추락한 이카루스>로, 이 작품을 만든 조각가가 바로 크라프트가 가장 사랑하는 조각가 이고르 미토라이(Igor_Mitoraj)다. 파리에서 사망했고 이탈리아 피사 근처인 피에트라 산타에 묻혔다.
애초의 지난 여행 계획에서는 첫 방문지가 여기 크라프트였고, 여기에 거점을 두고 자코파네를 다녀온 뒤에 브로츠와프를 거쳐서 프라하로 들어갈 계획이었다.
크라프트는 멀다. 커다란 영토의 폴란드에서 한쪽으로 치우친 아주 먼 도시다. 프라하에서 들어가거나, 부다페스트에서 들어갈 수 있는데, 어디에서든 교통여건을 따져볼 때, 긴 이동시간을 필요로하는 아주 먼 여행지다.
상황에 따라 아주 유동적이겠지만, 크라프트는 그래도 꼭 가보고 싶은 로망의 도시다.
5> 독일 드레스덴(Dresden)
독일 작센지방의 주도(州都)인 드레스덴(Dresden)의 다른 이름은 “북구의 피렌체”다.
그만큼 드레스덴은 아름다운 도시다.
드레스덴의 영주이자 폴란드 국왕이었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 1세는 재위 기간동안 유럽 최고의 예술가와 장인과 음악가들을 불러들여, 엘베 강변에 고색창연하고 우아한 도시를 건설했다. 그만큼 아름다운 드레스덴은 매우 유서 깊은 매력적인 도시다.
그 아름다움을 신께서 질투하여서였을까? 아니면 그릇된 민족의 망상이 세상을 향해 저지른 만행에 대한 인과응보(因果應報)였을까?
하룻밤새 드레스덴은 암흑의 지옥으로 변했다. 그야말로 초토화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날 밤 ‘블록버스터(blockbuster)’라는 용어가 드레스덴에서 탄생했다. 거대자본이 투자되어 엄청난 흥행 효과를 창출해낸다는 할리우드의 영화적 용어가 사실은, 1945년 2월 13일 벌어진 드레스덴 폭격 (bombing of Dresden)에서 ‘투하된 폭탄 한 발에 한 블록(동네)이 날아갔다.’는 데에서 기인해 생겨난 용어다. 이 폭탄이 바로 새롭게 등장한 신무기로 베트남전에서 위력을 보인 네이팜탄의 등장이었다. 미군은 일본에 원자폭탄을 떨어트렸고, 영국군이 주도한 연합군 폭격엔 신형무기로 네이팜탄이 처음 등장한 것이다. 네이팜탄을 ‘끈적한 휘발유 폭탄’이라고 풀이를 하겠는데, 뼈에 닿을 때까지 꺼지지 않고 살을 태웠다고 전설에 등장하는 고대의 전쟁 무기인 ‘그리스의 불’에서 기원했으며, 오늘날 절대 사용 금지의 팻말을 달게 된 백린탄의 원조격 이었던 것이다.
드레스덴 폭격 (bombing of Dresden)은 하룻밤새 두 번의 공격이 이어졌는데, 800대의 폭격기가 대서양을 건너와서 4천 톤의 네이팜탄을 쏟아부었다. 도시는 부서지고 화염에 휩싸였으며, 결국 드레스덴의 90% 이상이 파괴되고 사라졌다. 그야말로 완벽한 초토화였다. 느닷없이 들여 닥친 무차별 폭격에 도망칠 생각은 꿈에도 못하고 무조건 아파트 지하실로 대피하는 것이 시민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그 아파트의 지붕과 창문과 마당과 도로에 네이팜탄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집계한 바에 따르면 약 2만 오천구의 불에 탄 시체가 사방에 널렸다. 폭격 후 행방불명된 사람의 숫자가 13만 오천 명에 달했다. 대부분이 지하실에서 집단으로 화염에 휩싸인 채 매몰된 민간인 피해자였다. 길거리에 나뒹굴던 2만 오천구의 시체도 일일이 신원확인이 불가능하여 그냥 공터에 모아 쌓아놓고 다시 휘발유를 부어 태워 버려야만 했다.
참혹하기만 했던 이 융단 폭격은 쾰른과 함브르크에서도 똑같은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결국 독일은 항복하고 말았다.
나찌 독일은 아우슈비츠 학살(Auschwitz)을 통해서 강제수용소에서 최대 백만명 이상을 가스실로 보내 무참하게 살해했다. 그런 악행에 대한 죄값이었을까? 결코 적지않은 숫자의 독일인들이 네이팜탄에 의한 불지옥에서 목숨을 잃었다.
드레스덴 하이데프리트호프 공동묘지에 가면 희생자들을 기념하는 비석에 이렇게 적혀있다.
“그날, 얼마나 죽었던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이름없는 너의 상처에서 그날의 가혹하고 참혹했던 시련을 본다. 인간이 만든 불지옥에서 타들어 가는 자신을 보면서 겪어야만 했던, 당신의 아픔을 우리는 결코 잊지 못한다.”
왜 그들이 거기서 그렇게 죽어야만 했는가?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이란과 가자지구에서, 그리고 아프리카를 비롯한 세계 도처에서 여전히 부당한 전쟁이 벌어지고 무수한 생명들이 지옥불에 타들어가야만 하는가?
인간이 얼마나 더 잔혹한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전쟁이 끝나게 되는 것일까?
왜? 무엇 때문에? 이 모든게 과연 누구의 잘못인가? 신은 왜 침묵으로만 일관하는가?
나찌는 아우슈비츠에서 가스실에 끌어다 넣고 백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연합군의 네이팜탄의 독일 본토 무차별 폭격으로 결코 그에 못지않은 숫자의 독일 민간인이 또 불의 지옥에서 화마에 휩싸여 사망했다.
서로 주고 받았으니 피장파장이면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일까?
그날의 드레스덴 폭격을 진두지휘한 프리먼 다이슨은 훗날 자신의 회고록에 이렇게 적었다.
‘전쟁이 끝난 뒤 나찌 전범들과 나의(연합군 폭격 사령부) 차이는 오로지 하나, 그들은 전범으로 감옥에 갔거나 사형을 당한 반면, 나는 자유롭게 거리를 돌아다닌다는 사실뿐이다. 그렇다고 정말 죄가 없는 것일까?’
지금 드레스덴은 여전히 아름답고 고색창연하다.
다만 그날 벌어진 폭격의 상처가 남겨 놓은 불에탄 석재들이 도시의 복원과 재건에 다시 사용되어, 도심의 곳곳에서 결코 지워낼 수 없는 어떤 아픈 교훈을 아로새겨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 피해자들이 겨우 살아남아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며 한장 한장 벽돌을 쌓아 본래의 드레스덴을 고대로 재현해 놓았다. 실로 거룩한 용기와 희생과 극복을 위한 단합된 노력의 결과라고 하겠다. 그것이 본래의 독일인들이 가진 민족 정신이 아니었을까? 그런 드레스덴이 더 없이 소중하게 생각되어 나는 꼭 이번에 가볼 생각이다.
‘트럼프야. 푸틴아. 네타냐후야. 제발 더 이상 나대지 좀 말아라. 이 쌍*의 자슥들아.’
‘드레스덴에 와서 인간성 개조 좀 하고 가면 안되겠니?’
‘네*들의 그 개*꺼리로 언젠가 반듯이 너그들의 소중한 누군가가 불지옥에서 자신이 스스로 타들어 가는 고통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라. 인류 역사가 그 증인이다. 요새 귀신들은 다 뭐하고 있으신가? 저런 *들 안 잡아 가시고 말이다.’
네타냐후 나무라고 싶어서 이스라엘 성지 방문을 포기했다.
푸틴 욕하고 싶어서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관 방문을 포기했다.
트럼프 쌍욕하고 싶어서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방문을 포기했다.
대신 우리는 드레스덴을 가기로 했다.
드레스덴을 돌아다니면서 고색창연한 우아한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가를 실컷 느껴본 후에, 돌아오는 기차에서‘지구의 안녕을 위해서 당장 사라져야만 하는 악당 삼총사에 대해 고래고래 쌍욕을 범벅으로 날려주마. 기대해도 좋아.’
네타냐후와 푸틴과 트럼프를 지켜보고 있으면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다. 혹 그가 이들의 배후가 아닐까?
1209년 프랑스 남부 알비 지방에 파견된 교황 특사 아르노 아모리(Arnaud Amalric)가 떠오른다. 그는 이렇게 외쳤다. 그 일로 며칠만에 이만 오천명이 몰살당했다. 그리고 차후로 20년에 걸쳐 트럼프 방식의 제멋대로식 중교재판을 통해 수십만명을 더 죽였다.
"Caedite eos. Novit enim Dominus qui sunt eius."(모두 죽여라. 주님께서는 누가 당신의 백성인지 아신다.)
트럼프도 따라 외쳤다. 네타냐후와 푸틴도 곧 따라할 기세다.
“잠재적 위험성이 엿보였다. 싸그리 죽여 없애라.”(오직 트럼프만의 촉으로 그렇게 판단하고 결정했다. 미국 국민은 모두 병신인가?)
6> 체코 체스키크롬로프(Cesky Krumlov)
“보헤미아의 숲으로 가고싶다. 그곳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찬찬히 바라보며, 어둑한 곳에서 입에 물을 머금고 하늘이 내려준 천연의 공기를 마시며 이끼 낀 나무를 바라본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살아있기 때문이다. 어린 자작나무 숲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듣고,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볕을 쬐며 푸른빛과 초록빛에 물든 계곡의 차분한 오후를 즐기고 싶다.”
에곤 쉴레가 빈을 떠나 체스키 크롬로프을 향하면서 그의 친구에게 보낸 서신의 일부다.
그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삶의 대부분을 빈에서 보냈으며, 독일의 여러도시와 파리와 프라하를 돌아다녔는데도 늘 마음으로는 체스키 크롬로프를 그리워했다. 쉴레는 어머니와 사이가 썩 안 좋았지만, 어머니의 고향인 크롬로프만은 달랐다. 하여 마침내 크롬로프에 정착하기로 하고 들어왔지만, 그가 크롬로프에 머문 기간은 지극히 짧았다. 그의 정신세계와 사생활에 대한 추문과 의심이 끊이질 않아 체포되기도 하였고, 결국 그는 크롬로프에서 추방되고 말았다. 그 사건들에 대한 진실과 진위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채 온갖 추측만이 여전히 난무하고 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에곤 쉴레는 크롬로프를 사랑했고, 크롬로프는 그런 쉴레를 강제로 내쫓았다. 그렇게 아주 짧은 시간을 겨우 크롬로프에 머물렀음에도 쉴레의 가장 많은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미술관이 지금 크롬로프에 있다. 모두 합치면 돈으로 환산하기가 벅찰 정도다. 아마 지금 크롬로프의 사람들은 쉴레가 짧게나마 크롬로프에 머물렀다는 사실에 크게 감사하고 있을 것이다.
필자의 주관적인 생각으로 볼 때, 유럽 미술사에서 가장 센세이셔널(sensational)하게 등장 했던 화가를 꼽으라면 첫째는 당연하게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를 꼽을 것이며, 둘째로는 피카소(Pablo Picasso)요, 셋째로 에곤 쉴레(Egon Schiele)를 꼽아야만 하겠다. 아쉽게도 쉴레는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난 뒤 사흘째 날에 스물여덟 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제인 칼리르는 쉴레의 작품세계를 기괴하고 에로틱하며 포르노적이고 정서적으로 매우 불안해 보인다고 평가했다. 성적 에로티즘과 절망과 죽음에 관해 초점을 지나치게 맞추고 있다고 가혹하게 평가했다. 쉴레는 다른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지만, 자신의 초상화도 많이 남겼다. 고호나 렘브란트 못지않게 말이다. 그렇게 보면 그들과 쉴레는 어딘가 모르게 정서적으로 많이 닮아보인다. 말년에는 여전히 누드화를 많이 작업했지만, 보다 아주 노골적인 방식으로 그렸다.
빈과 파리와 프라하와 할슈타트와 드레스덴을 비롯한 독일의 여러 도시를 모두 다녀 본 에곤 쉴레가 끝내 푸른 자연속에 제대로 살아있는 도시로 체스키 크롬로프를 꼽았다. 어머니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으면서도 어머니의 고향인 크롬로프를 늘 그리워했다. 체스키 크롬로프의 그 무엇이 그토록 쉴레의 마음을 잡아끌었던 것일까?
전 유럽을 통털어 푸른 대자연속에 진정으로 아름답게 살아있는 도시는 체스키 크롬로프가 유일하다고 에곤 쉴레는 말했다.
'능력있는 큐레이터를 보유한 진정성 있는 미술관이나 갤러리라면 카라바조와 에곤 쉴레의 작품 정도는 소유하고 있어야 제대로 된 미술관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 결코 허언은 아니다. 21세기 미술계의 가장 뜨거운 감자는 인기가 여전한 카라바조와 새롭게 떠오르는 에곤 쉴레라 하겠다.
체코의 숨겨진 보물인 체스키 크롬로프(Cesky Krumlov)의 다른 이름은 ‘보헤미아의 진주(Perle in Böhmen)’다.
지금은 체코 여행에서 결단코 빼놓을 수 없는 프라하 다음으로 손에 꼽히는 관광명소가 되었지만, 1992년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 전까지는, 프라하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아주 작은 시골 마을이어서 찾아오는 사람조차 별로 없었던 감추어진 벽지였다. 하지만 소문은 꾸준하게 있었다. 어찌어찌해서 겨우 가보기는 했지만........ 한 번이라도 체스키 크롬로프를 가본 사람이라면 유럽에서 가장 아름답고 평온한 곳이라고 첫 손가락에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대상이자 평가로 세계의 여행자들에게 동시에 열풍처럼 다가온 여행지가 하나 더 있었으니 바로 오스트리아의 할슈타트(Hallstatt)였다. 아름다운 호수마을로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곳이 바로 할슈타트다. 우리나라에는 모 드라마에 촬영장소로 등장하면서 현재까지도 엄청난 열풍을 이어나가고 있다.
화사한 옷차림으로 인생 사진을 제대로 한 장 건지려는 젊은 연인들에겐 아마도 그리스 산토리니 이아 마을과 볼리비아 우유니 소금 사막과 더불어 삼대 명소가 할슈타트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것 어디까지나 젊은 청춘들에게나 해당 되는 이야기고....... 그런 젊은이들에겐 이런 질문을 하고 싶어진다. ‘그곳에 또 가고 싶으십니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같은 시기에 비슷하게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체스키 크롬로프는 사뭇 달랐다.
‘그냥 몇 날이고 아무것도 안하고 머물고 싶다. 아니 살고 싶다. 그냥 이대로 아름답고 평온한 크롬로프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드러누워 하늘과 숲을 바라보기만 하고 싶다’라고 말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두 번 세 번 다시 오고 싶다고 말한다.
크롬로프는 우리가 늘 그리워하며 가고 싶은, 방학이 되어야 가 볼 수 있는 그런 먼 시골의 ‘외할머니네 집’‘고모네 집’ ‘이모네 집’ 같은 그런 곳이다.
빨가벗고 물장구 칠 수 있는 개울이며, 마을 입구에 당산나무와 서낭당이 있고, 원두막이며 작은 예배당이 있고, 밥 짓는 부엌에서 나는 연기가 빠져나가는 굴뚝이 있고, 마을 가운데 우물이며 빨래터며, 좁은 골목에서 쫄랑거리며 따라오는 강아지와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던 그런 마음속의 고향 같은 그런 마을인 것이다.
많은 여행자들은 크롬로프를 찾아서 먼 과거의 중세시대로 돌아가는 시간여행을 즐긴다.
아기자기한 좁은 골목길을 돌아다니면서 중세 시대의 건물들을 보고 당시의 생활을 그려보기도 하고, 작고 소박한 기념품들 파는 매장에서 예쁜 추억들을 주워 담는다. 햇볕이 잘드는 앙증맞은 테라스에 앉아 체코 정통 맥주를 마시거나 비엔나 커피를 마시기도 한다. 가고 싶으면 걷고 쉬고 싶으면 아무데나 주저앉아도 된다. 마을 한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크롬로프 성에 오르기 위해서는 앙증맞을 정도로 작은 목조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이 ‘이발사의 다리’에는 또 왕자와 이발사의 딸 사이에 가슴 시리도록 아픈 사랑의 전설이 새겨져 있다.
할슈타트((Hallstatt)가 호수풍경이 무척 빼어난 언덕에 들어선 세계적 호텔 체인의 거대한 리조트 옥상에 예쁘게 꾸며진 루프탑 레스토랑이라면, 체스키 크롬로프는 꾸불꾸불 이차선 지방도로를 따라 먼 시골여행을 떠났다가 햇볕이 잘 드는 어느 숲가에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한적한 어느 카페의 야외테라스 같은 분위기라고 애써 표현하고 싶다.
할슈타트가 아름답고 매력적인 멋진 여행지라는 것은 충분히 이미 충분히 알고 있고 공감하고 있다.
하지만, 그랬음에도 시간적이든 어떤 이유로든 할슈타트와 체스키 크롬로프 중에서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크롬로프를 선택할 것이다. 사실은 지금 그런 경우를 가상해서 여러 가지 스케줄 체크를 하고있는 중이다.
크롬로프를 이야기하자면 늘 그 이름이 독일어 'Krumme Aue'에서 유래했으며, 이는 '구부러진 초원'이라는 뜻으로 번역된다는 이야기가 따라붙는다. 너무도 당연하게 그 이름은 불타바 강이 크롬로프 마을을 급격하게 휘감아 돌며 지나가는 데서 기인한다. 혹시나 이런 설명이 어렵다면, 아주 쉽게 우리나라 안동 하회마을을 연상하면 되겠다. 차이라면 하회마을은 강변에서 떨어져 아쪽에 마을이 들어선 반면에, 크롬로프는 그 휘어 지나가는 물줄기 양쪽으로 마을이 건설되어 있다는 정도의 차이다.
여기 불타바 강변에 처음 정착한 사람들은 당연하게 로마제국에게 멸시당하고 적대시 받던 알프스 산맥 이북의 켈트족이었다. 6세기 경이 되어서부터 북쪽에서 슬라브족이 남하하면서 대립과 마찰이 일어나고 서로 섞여서 공존하는 방식으로 이어졌다. 그런 와중에 게르만족의 로젠베르크 가문이 체스키 크롬로프 지역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곧 보헤미아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유럽의 중세시대는 봉건영주의 시대다. 왕이 있고, 훗날 신성로마제국 같은 명목상의 최고 권력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실제적 권력은 각 지역을 차지하고 실제로 지배하던 봉건 영주들의 세상이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고 하겠다. 황제나 왕 보다도 실질적인 지배 권력은 영주였다는 뜻이다. 실제로 왕보다도 또는 황제보다는 더 권위를 가진 영주들이 여럿 있었다. 평생 시칠리아를 벗어나지 않았으면서도 유럽 전체를 통치했던 프리드리히 2세 황제 보다는, 크롬로프 성에 거주하면서 수시로 들판으로 사냥을 나가고 마을을 순시하면서 세금을 거둬들이는 보헤미아 영주가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훨씬 막강한 권력을 가진 실세였던 것이다. 그게 중세 유럽 역사의 내면인 것이다.
크롬로프 성을 건설하였고, 교회와 병원을 세웠다. 정육점과 양조장을 만들었다. 프란치스코회 수도사들과 클라라회를 불러들여 이들을 후원했다. 나아가 룩셈부르크에서 유대인들을 받아들여 라트란(Latrán)이라 불리는 동네를 만들어 정착하도록 했다. 유대인들의 정착은 행정의 향상과 상업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은광 채굴이 엄청난 부를 선물했으며 공예와 무역의 거점으로 점차 발전해 나갔다. 더하여 크롬로프는 아름다운 자연 속에 전통적인 르네상스 양식의 소도시로 점차 변모해 나가기 시작했다. 당대 최고의 건축가 발타자르 마기(Balthazar Maggi)를 초청해 본래의 성채에 르네상스 양식의 탑을 개축해 올렸는데, 보헤미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르네상스 양식의 탑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이러한 발전은 지배 가문의 후손이 없어서 단절되고, 또 새로운 지배 가문이 들어서기를 반복하면서 어느 정도 질곡의 세월을 헤쳐나가면서 체코와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국가와 민족 간의 반목과 분쟁으로 점차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구) 소련 연방의 등장으로 모든 분란 사태는 일시에 마무리 되었다.
공동 생산과 공동 분배의 이념아래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공산주의(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시대에 이런 체스키 크롬로프는 더 이상 아무런 쓸모가 없는 골칫덩이 시골 촌동네로 전락하고 말았다. 사회주의 체제 아래서 크롬로프는 어디에도 쓸모가 없는 과거의 영광만을 간직한 부르주와 세상의 표본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름다운 마을이었기 때문인지 차마 부숴버리지는 않았다. 워낙 먼 시골이라 2차 세계 대전과 흑백 내전에서도 별 피해 없이 온전하게 살아남았다. 그런 무관심과 방치가 오히려 지금의 크롬로프가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살아남는데 결정적으로 기여를 했다. 광물이 나왔거나 우수한 품질의 목재 생산지였던가 했더라면 지금의 크롬로프는 사라졌을 것이다.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고 체코가 한참 개발을 시작하였을 때도, 크롬로프는 대도시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진 오지였기에 살아남았다. 개발의 열풍이 초기에 닥쳤다면 중세 분위기는 지금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서서히 개발의 열풍이 크롬로프에 다가왔을 때, 가볼 수 없었던 동유럽을 궁금해하는 서유럽의 여행자들이 하나 둘 크롬로프를 다녀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입을 모아 ‘유럽 전체를 통털어 가장 아름다운 중세마을’로 입소문을 내기 시작했다. 온 유럽의 여행사들이 먼저 나섰다. 개발로 훼손되기 전의 최고로 아름다운 유럽 마을을 가보아야 한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며 여행자를 끌어모았다. 프라하만 보았다고 동유럽의 체코를 모두 보았다고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체스키 크롬로프는 개발 대상지역이 아니라 지금 그대로의 모습을 보존해야 하는 유네스코 문화재 보존구역으로 바뀌고 말았다.
7>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Bratislava)
체코슬로바키아(Czechoslovakia)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다들 어느 정도 나이가 지긋하신 분이리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체코(Czech Republic)와 슬로바키아(slovak Republic)의 전혀 다른 나라로 알고 있을 것이다. 또 당연하게 그것이 맞다.
하지만 비교적 근자에 이르기까지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한 나라이면서 또 항상 다른나라 이기도 했다. 참 묘하게 말이다. 어짺거니 지금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엄현이 다른 독립된 국가들이다. 체코의 수도는 프라하(Praha)이고, 슬로바키아의 수도는 브라티슬라바(Bratislava)인데, 사실 그런 내막까지 알고 있는 사람 또한 별로 없다.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민족도 같고, 언어도 비슷하고, 문화와 생활풍습까지도 비슷하다 못해 거의 똑같다는 느낌인데, 그 모든 원인이 역사적으로 태생은 같은 슬라브족이었으나, 중세 시절의 대 모라비아 왕국(800?~907) 이후로 시작해서 1918년까지 거의 10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전혀 다른 나라로 지내왔다는 사실이다. 그 과정속에는 동쪽의 카르파티아산맥을 넘어온 마자르족(헝가리)에게 모라비아 왕국이 멸망당하게 되는 사건이 있었고, 이때부터 체코지역엔 보헤미아 공국이 들어섰고 슬로베니아 지역은 헝가리 왕국에 속하게 되어 완전 분리되었던 기나긴 역사가 있었다.
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1918년) 연합국에 의해 같은 슬라브족이라는 이유로 체코슬로바키아(Czechoslovakia)라는 하나의 연방 국가로 탄생했다. 이후로 소비에트 연방(소련)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인구와 면적에서 절반 정도의 극심한 차이가 이들 사이에 존재(체코 인구 1천 만명. 슬로바키아 인구 540 만명)하자, 소비에트 연방의 입장에서도 차등 대우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주요 관직은 모두 체코인에게 돌아갔고, 경제발전도 인구 밀집 지역인 체코지역을 중심으로 펼쳐져 체코는 날로 변해갔지만, 전통 농업만 계속 유지되던 슬로바키아 지역은 절대적으로 낙후될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이제는 통용 언어마저도 체코어를 쓰도록 강요당하는 처지에 놓였다.
소비에트 연맹(구 소련)이 해체의 계기가 되는 벨벳혁명(1989년)이 일어나자 체코와 슬로바키아 진영의 지식인들이 모여 1993년 1월 1일을 기해 갈라서기로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체코슬로바키아로 합쳐 진지 75년 만의 이별이었다.
당연하게 슬로바키아는 주변의 체코나 오스트리아. 헝가리에 비해서 많이 뒤떨어진 낙후된 국가로 전락했다.
그러다보니 수도인 부라티슬라바(Bratislava)의 인지도도 프라하나 빈이나 부다페스트에 비해서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도 솔직하게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브라티슬라바를 찾는 사람중에 현대적 트랜디한 분위기의 여행을 찾는 젊은이들의 숫자는 현저하게 적은 편이다. 하지만 조금은 올드하고 빈티지한 여행지를 찾는 사람들에게는 최적의 여행지라고 할 수 있겠다. 구 소비에트 연방의 상징처럼 느껴지는 소련식 아파트 숲의 다소 썰렁한 듯 삭막한 분위기의 공산치하의 동유럽 풍경을 절실하게 느껴볼 수 있는 색다른 매력도 있다.
대부분의 여행객들은 빈에서 당일치기로 다녀 가거나, 아니면 프라하와 부다페스트를 이동하면서 중간 기착지로 들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걷다보면 도나우강 옆의 언덕에 우뚝 솟아있는 성이 보이고, 오랜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교회와 중세 건축물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 구시가지가 나온다. 흐라브네 나메스티에 광장과 흐비에즈도블라보 나메스티에 광장 주변엔 온통 중세 건물들과 구 소련이라는 공산주의 시대 건물들이 여타의 다른 도시들과는 전혀 다른 멋과 분위기로 다가온다. 이런 다소 이질적인 풍경들이 강 건녀 편까지 끝없이 뻗어 나가 있다. 이내 풍경이 바뀌어 포도밭과 농장과 아기자기한 작은 마을들이 이어진다.
거기다가 시내를 걷다보면 지하의 하수도 공사를 하던 짖굿은 할아버지가 슬며시 곁눈질로 지나가는 아가씨들의 치마속을 훔쳐보고 있다.
우리나라 같으면 성추행으로 혼쭐을 당하기 십상이겠지만, 브라티슬라바의 그 할아버지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그 못된 버릇(?)을 버리지 않을 심사로 보인다.
타트라 산맥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슬로바키아의 봄 풍경이 기다려진다.
8> 오스트리아 할슈타트(Hallstatt)
2010년 경의 어느날,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오스트리아 잘츠카머구트의 할슈타트(Hallstatt)에 유독 눈에 띄는 한무리의 중국인 단체여행단이 도착했다. 누가 보아도 이들은 그저 통상적인 여행객들과 엄청나게 달라보였다. 무슨 연구단체의 연구원들이 무슨 학술대회를 하러 찾아온 사람들 같았다. 할슈타트의 황홀하리만치 빼어난 아름다운 풍광을 구경하러 온 것이 아니라, 길거리의 화분 하나하나, 돌계단의 크기와 높이, 식당들의 테이블 크기와 테이블보의 색깔과 창문의 크기와 방향까지, 교회 건물의 구조와 높이와 건축자재와 색채에 이르기까지 거의 연구 논문을 준비하는 듯 보이는 단체 여행객이었다. 지역 자체가 워낙 협소할뿐더러 물가는 유럽을 통 털어도 최상급인데, 이 수상한 중국 단체여행객들은 어마어마한 경비를 들여가면서도 좀체 보편타당한 여행자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런 어색한 단체 여행단은 돌아갔고 2년 정도 시간이 흘렀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할슈타트로 오세요. 그렇다고 멀고 먼 오스트리아까지 갈 필요는 없어요. 이젠 광둥성 후이저우시(惠州)에서 아름다운 할슈타트를 만나볼 수 있습니다. 후이저우 하슈타트어(哈施塔特)로 오세요.” 라는 광고와 기사가 중국 대륙 전체에 대대적으로 홍보되기 시작했다.
진짜 할슈타트를 방문했던 수상한 중국 단체관광단은 사실 중국이 보낸 산업 스파이였던 것이다.
설계 전문가와 엔지니어들을 보내 할슈타트를 샅샅이 조사한 뒤, 마을 전체 구조는 물론 건물 외관과 방 내부, 실내 장식에 이르기까지 꼼꼼히 사진과 동영상으로 몰래 담았을 정도로 지독할 정도로 치밀하게 복사본 설계도를 만들었다. 이것을 토대로 호수를 파고 중앙광장의 천사 조각 기둥을 세우고, 교회, 호텔, 식당과 기념품점, 골목길까지 거의 똑같게 만들었다.
물론 이런 표현은 자기들 만의 생각과 처지에서 나온 명분일 뿐, 제삼자의 입장에선 하나같이 어설프게 만든 조잡한 짝퉁일 뿐이다. 정말 허접하기가 이를 데 없다.
도대체 저런 어처구니 없는 짓(?)을 왜 중국인들은 자주 저지르는 것일까? 그 허접함과 해괴망측이 중국인들의 정체성과 상관이 있는 것일까? 다른 종족들은 아닌데, 오로지 한족들만이 저런 멍청한 기질을 민족 특성으로 가지고 태어난단 말인가?
이런 표현이 결코 중국(한족)을 폄하하기 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사전에 분명히 밝혀두고 싶다.
중국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서양 마을을 베끼는 건 중국의 자존심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 없다”는 격렬한 비판이 쏟아졌고, 다른 한 편에선 “가까운 동네에서 유럽의 마을을 만날 수 있으면 시간과 돈을 아낄 수 있으니 환영”이라는 반응이 엇갈렸다. 해외여행을 하기 어려운 형편의 평범한 중국인들에겐 짝퉁 마을일지라도 어느 정도 ‘대리 만족’을 할 수 있으니 그래도 좋다는 이야기가 퍼져나갔다.
중국 경제성장의 결과로 수많은 중국인 여행자들이 대거 해외로 몰려다니며 물쓰듯 돈을 써대고 있던 상황이었다. 혜주(후이저우)를 찾는 관광객이 하루 수십 명에 불과했는데, 후이저우 하슈타트어(哈施塔特) 라는 짝퉁 호수마을을 건설한 후에 하루 1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몰려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일부 중국 건축가들은 “유럽 마을 복제는 기술적으로 중국이 서양을 뛰어넘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표현이 참 재미있지 않은가? 지금 중국은 대한민국을 대상으로 동북공정(東北工程)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혹 그렇게 본다면 머지않아 몽골의 역사를 중국사에 편입부터 시키고 나서, 몽골의 서구 정벌을 근거로 서양공정(西洋工程)을 펼쳐서, 본래 유럽은 중국의 지배하에있었다 라고, 그동안 늘 그래왔던 것처럼 역사왜곡의 장을 좀 더 세계적으로 확장해 나가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도대체 뭐가 나아진단 말인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2012년 중국 광둥성 후이저우에 오스트리아 할슈타트(Hallstatt)를 본떠 만든 마을이 등장했다. 중국 국영 부동산업체가 한화 약 1조원을 들여 조성하면서 이름도 하슈타트어(哈施塔特)라고 붙였다.
어떻게 이런 기발한(?)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참으로 중국스럽다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일단 그런 발상에 존경스러울 정도다.
그럼 중국측(?)의 그런 발상이 끝까지 효력을 나타냈는가 하며? 꼭 그렇지도 않았다.
후이저우 하슈타트어(哈施塔特)가 처음 등장했을 때, 정말 구름처럼 많은 인파가 연일 몰려들었다. 진짜 기대 이상의 대성공이었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만 이었다.
‘가짜 할슈타트가 이 정도면 진짜 할슈타트는 얼마나 아름답다는 거야?’라는 궁금증과 호기심을 가지게 된 중국인들이 너나없이 비행기를 타고 오스트리아로 향하는 새로운 진풍경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가짜 할슈타트를 보려고 삼십만원을 쓰던 중국의 젊은 여행자들이 기꺼이 삼백만원을 들고 오스트리아로 날아갔다. 중국 당국과 투자자들의 표정은 닭 쫓던 개꼴의 모습이 역력했다. 다른 표현으로 이럴 때 우린 ‘* 대주고 뺨 맞고’‘ 한 방에 * 됐네’라고 한다.
거기다가 대한민국의 모 드라마와 모 항공사의 광고에 할슈타트가 등장하면서 또 여행자들이 몰려가기 시작했다.
할슈타트 관광 수입은 마구마구 늘어서 좋기는 한데, 조용했던 마을에 때아닌 사람들이 떼로 몰려들면서 아비규환 난장판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현지인들의 본래 생활 유지가 불가능해진 것이다.
성난 주민들이 피켓을 들고 길거리로 나서기 시작했다.
‘제발 그만 좀 와.’‘좀 조용히 살자.’‘오스트리아 정부는 하루 방문객 숫자를 삼백명으로 제한해 달라.’
찾아 오는 사람은 넘쳐나고 수용할 수있는 여건은 절대 부족하고, 덕분에 지금 할슈타트는 전 유럽을 통털어서도 가장 최상급의 높은 물가를 유지하고 있다.
거기에다 전 유럽을 통털어서 가장 드나들기 불편한 여행지로 꼽히지만, 개선의 여지는 없어보인다. 그 역시나 돈으로 얼마든지 커버가 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지금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고 있다.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할슈타트)냐? 아니면 (체스키 크롬로프)냐?
20대 30대 젊은이나 신혼여행이나 화보 촬영에 목숨을 건다면 (할슈타트)가 제격이겠지만, 노년에 아름답고 휴식 같은 여행이라면 (체스키 크롬로프)가 제격이다.
이 둘을 다 보는 것도 좋겠지만, 하나만 선택하고 다른 여행을 솔직히 계획하고 싶다. 그런 여행지가 내 로망에는 분명 아직 남아있다. 그런데 문제의 핵심은 바로 아내 챠밍여사의 현재 컨디션이다. 그곳은 아주 많이 걸어야만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지난 본래의 동유럽 여행 계획에서 굳이 폴란드 크라쿠프로 들어가고자 했던 이유는 오로지 하나 자코파네(Zakopane) 때문이었다. 자코파네를 보고 나서 프라하든 부다페스트든 보러 갈 생각이었다.
지금의 상황에선 솔직히, 이탈리아을 완전히 포기하던가, 오스트리아를 포기해야만 자코파네를 갈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프라하에서 자코파네로 갔다가, 오스트리아 빈으로 11시간의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 가능하기도 하다. 그런데 자코파네를 제대로 즐기려면 최고의 컨디션으로 많이 걸어서 쏘다녀야만 한다. 그게 문제이자 우리에게 당면한 치명적 약점이기도 하지 않은가?
아무래도 (자코파네) 이야기는 별도로 마지막에 좀 거론해 많은 이들에게 소개를 해보고 싶다.
할슈타트에 대한 이야기도 덮고 넘어가기로 한다. 할슈타트를 대상으로 할 이야기는 지극히 간다하다 할 정도로 별로 없다. 그냥 풍경과 오가는 방법등이 전부라 해도 무방할 정도다. 더 파봐야 소금광산 이야기 정도라 할까?
그래서 일단 덮어 두기로 하고, 혹여 이번 여행에사 방문하게 된다면 추후 여행기에서 세세하게 거론해 보기로 한다.
9> 그외 내가 꽁꽁 숨겨놓은 동유럽 최고의 여행지들
모라브스키 크룸로프(Moravský Krumlov)는 체코인들이 아끼고 존경하는 마음의 고향 같은 소도시다.
크롬로프(Krumlov) 하면 ‘급류가 휘감아 돌아나가는 마을’을 가리키는 용어로, 흡사 우리나라의 안동 하회마을을 연상하면 되겠다. 지질학적 특징으로 동유럽의 산악 지역에는 이런 독특한 형태의 마을이 여럿 생겨났고, 현지인들은 그냥 편하게 여기저기 다같이 크롬로프라고 불렀다. 경기도 광주가 있고 전라도 광주가 있어도 꼭 구분해야 할 필요성이 없는 경우는 그냥 광주라고 부르는 것처럼 말이다. 거기다가 대한민국의 웬만한 도시엔 죄 다 남산이 있지 않은가? 그냥 대표 격을 따진다면 서울 남산이고, 경주 남산을 꼭 가리켜야 하게되면 경주를 붙여주면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롬로프는 체코를 비롯한 동유럽에서 그런 흔하디 흔한 지명일 뿐이었다.
그러다가 체코 체스키크롬로프(Cesky Krumlov)가 알려지면서 전 세계에서 프라하 다음으로 여행자들이 몰려드는 체코의 유명 관광지로 탈바꿈하면서 언제부터인가 크롬로프 하면 세상이 모두 당연하게 체스키크롬로프(Cesky Krumlov)를 떠올리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거기다가 에곤 쉴레의 도시가 또한 체스키크롬로프가 아니었던가? 언제부터인가 이제 크롬로프하면 체스키크롬로프를 너무나 당연하게 떠올리게 된 현상 앞에서 은근하게 체스키인들의 오랜 자부심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체코인들의 중세도시 체스키크롬로프(Cesky Krumlov)’가 된 것이다.
하지만 동유럽 일대 전체는 수많은 질곡의 역사를 내재하고 있다.
오랜 역사와 전통의 중세 봉건시대가 존재하였기에, 국왕을 가진 폴란드 헝가리 체코 등의 왕국 이전에 한 단계 아래의 수많은 봉건 영주들이 다스리던 소왕국 개념에다가, 나중엔 신성로마제국이나 합스부르크 왕가 같은 제국주의 형태로 변해가지만, 그 심연의 밑바닥에는 부족이나 민족의 개성과 전통이 엄연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따지면 따질수록, 파보면 파볼수록 무척 목잡한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좋게 말하면 ‘하나의 거대한 간판 아래 수많은 따로 또 같이’라고나 할까? 역사의 흐름에 따라 거기에 등장하는 이름들이 바뀌고, 또 편을 수시로 바꿔가면서 편을 먹었다. 이합집산이란 말이다. 거기에 영주들 간의 복잡한 혼인동맹의 결과로 족보를 따져보면 중세 이후의 유럽 역사 대부분이 그냥 막장 드라마다. 도그들의 난장판 마셔라 부어라 축제라고 보면 정확하다.
그러다 보니 그냥 그렇게 통용되던 지명에도 어느대 부터인간 은근하게 형용사를 첨가해 민족성이나 봉건영주의 족보를 덧붙이는 경우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체코의 동부 국경 인근에 위치한 한 크롬로프가 ‘우리도 엄연한 체코의 크롬로프지만 체코인들의 체스키크롬로프가 아니라, 우리는 분명한 모라비아 왕국의 크롬로프다’ 하면서 지명을 모라브스키 크룸로프(Moravský Krumlov)라고 바꾸는 사태가 벌어졌다.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독립한 16개국에 대한 공부를 한동안 해왔던 나(필자)의 입장에서는 모라비아인들의 이런 입장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나름으로 충분히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우리나라에도 축구나 야구를 보면 어떤 지역적 감정이 아주 정당한 것처럼, 또는 역사적으로도 합리적인 명분이 있는 것처럼 드러내는 경우가 늘 있지 않은가 말이다.
모라비아 강 유역을 기점으로 한때 독일 일부와 체코슬로바키아 전역과 폴란드 일부와 크로아키아 일부에까지 세력을 떨쳤던 모라비아 왕국의 핵심 중심지가 바로 모라브스키 크룸로프(Moravský Krumlov)였기 때문이다. 그 후에 질곡의 역사를 거쳐 보헤미아 왕국과 합수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거쳐 체코의 일부 소도시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말이다.
‘너희들은 체코 아니야? 모라비아를 새삼스레 이제와서 따져?. 우리는 오로지 정통 체코였다고.’라고 체스키크롬로프 사람이 말했다.
‘정통으로 따지자면 우리가 더 정통 체코이지? 그 체코 안에서도 눈부신 모라비아 왕국의 혈통까지 이어받은 뼈대 있는 도시가문이 바로 우리 모라브스키 크룸로프(Moravský Krumlov)가 아니겠어? 너희들이 에곤쉴레를 앞세워 문화 수준을 떠드는데, 우리에겐 알폰스 무하(Alfons Mucha)가 있어. 어디 이야기 해봐. 너희 체스키크롬로프가 알폰스 무하 앞에서 정통이니 뭐니 따질 수 있겠어? 체코의 정신과 정통성이 살아있는 곳은 바로 여기 모라브스키 크룸로프(Moravský Krumlov)야. 어디 아니면 아니라고 말해봐.’
이내 모든 사태는 진정되었다.
보헤미아 왕국의 후예라는 자부심을 가진 체스키 크룸로프(Český Krumlov)가 체코에는 엄연하게 있고, 또 모라비아 왕국의 후예라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모라브스키 크룸로프(Moravský Krumlov)가 또 체코에는 엄연하게 있다.
그런 모라브스키 크룸로프(Moravský Krumlov)의 다른 이름은 바로 알폰스 무하(Alfons Mucha)의 도시다.
프라하 여행중 성 비투스 대성당 방문에서 무료로 만나 볼 수 있는 알폰스 무하의 스테인드글라스를 가이드들은 입장권을 꼭 구입해서 가까이 가서 보라고 입을 모아 강추한다.
체코인들의 영혼이라고 까지 추앙받고 있는 화가 알폰스 무하(Alfons Mucha)가 인생을 걸고 매달렸던 장엄한 슬라브의 대서사시와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았던 진품들을 보기 위해 서라면 기꺼이 남부 모라비아(South Moravia)에 위치한 모라브스키 크룸로프 성(Moravský Krumlov Chateau)을 방문해 보라고 친절하게 안내해 준다. 거기에는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무하의 역작 <슬라브 서사시>에는 체코의 역사와 문화와 정통성이 고스란히 담겨있기에 전문가의 시선과 입장에서까지 그렇게 꼭 가서 느껴보라고 권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무하의 서사시>를 감상하기란 그리 녹녹한 사정은 결코 아니다. 프라하에서 모라브스키 크롬로프성 까지는 285km 정도 떨어져 있고, 기차로 대략 3시간 40분 정도 소요된다. 하지만 기차 노선이 많은 편이 아니고, 버스와 병행하여 갈아타거나, 시간이 좀 많이 늘어나는 버스 이동방법도 있기는 하다. 대개의 여행객이 프라하에서 당일치기로 선택을 하게 되는데, 가는데 4시간, 돌아오는데 4시간에, 환승이나 휴식이나 식사 시간을 더하고 나면, 정작 미술관람에 허용되는 시간이 적어서 쫓아다니다 마는 하루가되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기꺼이 온전히 하루를 다 바쳐서 모라브스키를 찾는 여행객들이 꾸준히 늘고 있다. 사전에 알폰소 무하의 미술 세계에 대해 어느 정도 사전 공부를 철저히 하고 가게 된다면 미술관에 체류하는 시간과 노력을 훨씬 절감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꼭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여행은 공부하고 노력한 만큼 여유롭고 풍성해지기 마련이다.
알폰스 무하(Alfons Mucha)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는 사라 베르나르(Sarah Bernhardt)라는 여배우에게 팜므파탈(femme fatale)을 당했다. 무하가 베르나르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의 인생은 훨씬 밝고 여유롭고 낭만적으로 살아가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 팜므파탈이 없었다면 화가 알폰소 무하나 작품 <슬라브 대서사시>를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쩜 그렇게‘백만송이 장미의 주인공 화가인 조지아의 니코 피로스마니가 흠뻑 빠졌던 마리에서 온 여배우 마르가리타와의 팜므파탈과 그렇게 똑같은지 다소 놀라울 지경이다. 마지막 결과까지도 영 판 닮았다.
파리에 머물던 가난한 화가 지망생 무하에게 지스몽다(Gismonda)라는 연극의 포스터 요청이 들어왔다. 이게 원래대로라면 무하에게 올게 절대 아니었다. 원래 지곡한 역사란 순리대로에서는 좀체로 탄생하지 않는 법이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 반듯이 필요하다. 그 연극의 주인공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당대 최고의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Sarah Bernhardt)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만......... 무하가 그린 이 포스터가 그야말로 (천만관객)을 훌적 돌파해 버린 것이다. 연극 때문이 다가 아니고, 여배우가 다가 아니고, 각본이 다가 아니고, 그냥 무하의 포스터가 하나의 미술 작품으로 공전희 히트를 날려버린 것이다.
극성 수집가들이 거액의 뒷돈을 주고 인쇄소에서 포스터를 빼돌리는가 하면, 포스터 광고판을 통째로 뜯어가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제 알폰스 무하는 경이로운 아르누보 예술가 반열에 올라서게 되었다.
19세기에 등장한 아르누보 미술은 고착화된 자기들만의 리그라고 할 수 있는 아카데미 예술에 대한 반항에서 시작되었다고 하겠다. 그런 아카데미 미술 관점에서 무하의 그림을 보자면, 수준이 한 참 떨어지는 스케치나 습작이나 춘화 정도로 보였을 것이다.
그렇게 순수 예술(그림과 조각)과 응용 예술 사이의 형식에 얽매이는 틀(장벽)을 무너트리자는 데서 시작된 것이 바로 아르누부 운동이다. 이들은 꽃이나 식물 덩굴에서 영감을 받아 장식적인 꼬여있는 듯한 곡선을 많이 사용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미적으로도 다양하고 화려한 색채등을 통해 인테리어 디자인과 그래픽 아트와 가구 분야와 유리 공예는 물론 도자기와 직물공예와 보석이나 금속 공예 등에까지 널리 퍼져, 프랑스 화가 모리스 드니, 피에르 보나르, 에두아르 뷔야르는‘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그림으로 장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하가 그린 인생 역작이자 시리즈 캔버스 작품인 ‘슬라브 서사시(Slav Epic)’는 18년의 작업 끝에 총 20개의 크기가 (6m X 8M)나 되는 초대형 작품으로 전시할 공간을 찾을 수가 없었을 정도의 대작이다. 결국 남부 모라비아(South Moravia)에 위치한 모라브스키 크룸로프 성(Moravský Krumlov Chateau)에서 2021년 7월 31일부터 2026년 12월 31일까지 전시되고 있는 중이다.
그럼 2027년 1월 1일 부터는 어떻게 되느냐?
여기까지 이 글을 읽어주는 분들에게 하나의 선물이자 힌트를 이쯤에서 드려야 하겠다.
무하의 ‘슬라브 서사시’를 굳이 보겠다고 왕복 교통으로 만 8시간을 허비해 가면서 바삐 뛰어다니는 노고를 줄이고자 한다면, 1년만 기다렸다가 2027년 하반기쯤부터 프라하에서 그냥 편하게 감상하면 되겠다.
무하는 죽음을 앞두고 ‘슬라브 서사시’를 프라하시에 무상으로 기증하는 유언을 남겼다. 유일한 전제조건은 ‘프라하가 슬라브 서사시를 전시할 수 있는 전용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는 조건과 그 효력이 2028년부터 적용된다’는 유언이었다.
하여 프라하시는 허겁지겁 대대적인 프로젝트를 벌였다. 하여 2025년 2월 24일에 이미 옛 사바린 궁전을 미술관으로 개조해 (무하 박물관)을 개관하였다. 프라하 중심부 나 프르지코페(Na Příkopě) 거리에 위치한 바로코 양식의 사바린 궁전이 그곳이다. 이 박물관 건물 자체만으로도 무하의 아르누보 예술 세계 못지않을 정도로 눈이 부시게 화려하다. 이미 많은 무하의 작품들이 전시 공개되고 있다. 그리고 지금 ‘슬라브 서사시’를 전시할 공간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다. 금년 말일까지 모라브스키 크롬로프 전기가 끝나면, 철수와 이동과 새로운 공간에 전시를 준비하는 상당 기간의 공사가 진행된 후에, 내년의 중 후반기에는 다시 개관될 것으로 추측된다. 이제 머지않아 프라하에서 알폰스 무하의 대표작 ‘슬라브 서사시’를 감상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이번 여행에서 거기까지 기를 쓰고 가야할까? 말아야 할까?
다시 프라하를 또 간다는 보장을 할 수 없는 입장이고 보면 어떻게 한다?
체코어로는 체스키 라이 (Český ráj)라 불리지만, 일부 검색창이나 여행 안내서에서는 보헤미안 파라다이스 (Bohemian Paradise)라 불리기도 하는데, 체코인들이 즐겨 찾는 트래킹 명소로 정평이 나있다. 프라하에 거점을 두고 일일 나들이로 이곳을 찾는 여행자들이 최근 들어 급증하고 있다.
깎아지른 사암 절벽, 울창하고 소나무 향 가득한 깊은 숲, 중세의 역사가 보존된 장엄한 캐슬과 샤토(포도 양조장)뿐만 아니라 시골의 정취 가득한 통나무집까지, 이 모든 것들이 한 지역에 모여 조화를 이루면서 뿜어내는 독특한 정취와 아름다움은 이곳을 찾아오는 여행자들에게 창조적 영감을 주고 삶에 휴식과 활기를 불어넣어 주기에 충분해 보인다.
경이로운 자연의 신비로움으로 가득한 거대한 사암들로 가득한 곳으로 높이가 약 60m에 이르며 제각각 독특한 형태로 인해 ‘합창단의 지휘자 (Kapelník)’, ‘지휘봉 (Taktovka)’, ‘등대 (Maják)’ 혹은 ‘용의 이빨 (Dračí zub)’와 같은 별명에서 충분히 연상될 만큼 개성 있는 빼어난 풍광을 가지고 있다. 거대한 바위들 사이에 난 미로 같은 길에서 잠시 길을 잃더라도 이내 가느다란 틈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빛을 따라가기만 하면 다시 새로운 길을 만나게 됩니다. 하여 길을 잃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겠다.
가벼운 배낭에 빠게트 빵이랑 커피랑 캔맥주 사과 두알정도 가지고 하루쯤 서성거렸으면 좋겠다.
체스케슈비차르스코(Ceske Svycarsko)는 체코 북서부 엘베 사암 산맥에 위치한 국립공원으로 보호받고 있는 이 지역은 또 하나의 이름인 보헤미아 스위스(Bohemian Switzerland)로 알려져 있다.
일찍 중세 시대부터 중요 교통로였던 보헤미아 스위스 지역에는 무역로를 보호하기 위해 소규모 시장과 봉건영주와 기사들 소유의 많은 성(요새)이 건설되었다. 흡사 독일 낭만 가도의 동유럽판이라 할만하다. 그러다 보니 이 성 중 몇몇은 중세 도적 영주들의 은신처로도 사용되면서 지나가는 상인들을 공격하는 악의 소굴로 명망이 드높기도 했다. 그저 반듯이 지나다녀야 하는 요충지였을 뿐이었다. 그것이 민족 간의 왕국 간의 분쟁 씨앗이 되기 마련이었다. 이 지역은 고대부터 소수의 게르만, 슬라브, 켈트 부족들이 바쁘게 드나들면서 늘 분쟁을 일으켰던 탓으로 정착하려는 인구가 드물었으나, 12세기에 독일어를 사용하는 정착민들에 의해 점차 봉건 국가로 발전해 나가기 시작했다.
근대의 낭만주의 시대에 들어서 비로소 예술가들은 이 지역의 독특한 바위의 야생적인 아름다움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예를 들어, 예술가 루트비히 리히터나 작곡가 칼 마리아 폰 베버가 유명한 오페라 <Der Freischütz>를 여긴 라텐 근처를 배경으로 하여 작곡했다.
이 지역은 일찍부터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관리되었을 만큼 아름다운 풍경과 기암괴석과 맑은 물이 흐르는 산골짜기로 체코는 물론 가까운 국경 너머의 독일사람들에게까지 널리 사랑받는 다양한 트래킹 코스가 개발되어 있는 천혜의 자연공원이다.
그런 와중에 2022년 7월에 발생한 대규모 화재로 인해 공원의 상당 부분이 전소되는 큰 상처를 입었다. 지금도 곧곧에 화재의 상흔이 그대로 남아있으며, 세월이 어루만져 회복되기를 기다리는 자연치유 중이다.
특히 프라브치카 문(체코어: Pravčická brána)은 유럽에서 가장 큰 자연 사암 아치입니다. 여행자들은 입을 모아 ‘천국의 문’이라 외친다.
아마도 세상의 수많은 여행자들이 여기 보헤미아 스위스 국립공원을 찾는 이유가 (프라브치카의 문) 때문이 아닐까 라고 생각될 정도이다.
중간에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야 하는 번거로움과 배차시간이 총총하지 않다는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까지, 프라하를 찾는 여행자라면 반듯이 다녀가야 하는 프라하 인근의 명소로 사랑받고 있다. 체코와 독일에 걸쳐있는 산맥의 국경 인근에 위치해 있다. 기차를 갈아타는 역에서 내리지 않고 두 정거장만 더 가면 바로 독일의 드레스덴 역일 정도로 독일에 가까운 지역이다.
챠밍여사의 현재 컨디션상 더 깊숙한 곳이나 다른 코스로의 트래킹은 허락되지 않겠지만, 적어도 (프라브치카 문)이 있는 첫번째 전망대까지는 쉬엄쉬엄하면서 온전한 하루를 투자해서라도 푸르른 대자연의 품속에서 맘껏 거닐어 보고 싶다.
폴란드에서 지금 당장 가보고 싶은 여행지 하나를 고르라 한다면 나는 촌각도 지체하지 않고 무조건 자코파네(Zakopane)다.
자코파네(Zakopane)를 사람들은 ‘폴란드의 겨울 수도’ 혹은 ‘타트라 산맥의 수도’라고 부를 정도로 폴란드 사람들에게 자코파네는 그만큼 아주 특별한 장소다. 상주인구 2만 8천 명의 조용하고 소박한 산골 소도시인 자코파네에 겨울 주말엔 대충 25만 명의 인파가 몰려든다. 한겨울에 자코파네로 여행을 떠나면 얼추 웬만한 사람은 다 거기서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폴란드 사람이라면 수도가 바르샤바라는 것을 모두가 알겠지만, 폴란드 사람치고 바르샤바는 못 가본 사람이 있을지 몰라도 자코파네를 안가본 사람은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폴란드인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사랑을 받고있는 아주 특별한 곳이다.
여름에는 하이킹과 등산으로 겨울에는 스키를 즐기기에 최적인 자코파네의 남다른 인기에는 사방에서 솟아나는 온천이 단단히 한몫을 한다. 관광과 산악 스포츠와 온천 휴양지라는 특수성을 모두 갖춘 아주 특별한 도시 자코파네를 ‘폴란드의 돌로메티’ ‘폴란드의 알프스’로 부르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가 않을 지경이다.
하지만, 정작 자코파네가 세상에 드러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근자의 일이다.
겨울이 길고 척박한 산악 지역으로 인해 이곳은 사람이 정착해 살지 못하는 지역으로 방치되어 왔었다. 19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타트라 산맥의 지하 광물을 연구하는 학자나 생물 연구자나 기후 연구가와 겨울을 제대로 체험해 보려는 화가나 예술가들이 극히 일부만 찾아왔을 정도였다. 사람이 정착하기에는 너무나 험준한 오지 중에서 절대 오지 취급을 당했다.
1873년에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한 명망있는 한 사람이 여기 자코파네를 찾아왔다.
티투스 차우빈스키(Tytus Chalubinski)는 폴란드는 물론 동유럽의 상류사회에서도 명망이 놓은 훌륭한 의사였다. 최고 귀족과 부유층 환자의 결핵을 치료하던 중에 절대적 안정과 휴식을 위한 최적지를 찾다가 고립된 고산지대의 온천지역을 발견했던 것이다. 현재까지도 자코파네 인근에는 호호우프 온천, 사플라리 온천, 부코비나 타트르잔스카의 온천이 성업 중인데 치료와 휴양에 최고로 인정받고 있다.
차우빈스키는 환자들과 겨울 자코파네를 찾았다. 치료와 안정과 휴식을 병행하면서 저명한 환자들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주말을 이용해 폴란드의 문화. 예술. 과학계의 저명인사들을 초청해 작은 음악회와 파티를 열었다. 살면서 겨울치고 안아파본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차우빈스키는 겨울내내 결핵 환자를 치료하면서 자코파네에 머물렀고, 부유층과 귀족들이 줄을 이어 자코파네로 겨울 휴양을하기 위해 찾아왔다. 온천으로 지겨운 사람들이 스키를 가지고 왔다. 어느 곳이나, 눈이 산더미처럼 쌓인 무제한의 산악 자유 슬로프였던 것이다.
겨울이 지나 일상으로 돌아간 부자와 귀족들의 머릿속에 자코파네에서 보냈던 겨울휴가가 떠나지 않았다.
그들이 앞장서서 자코파네로 가는 길을 새로 만들었고 별장을 짓기 시작했다.
다시 겨울이 찾아왔을 때, 주말이면 폴란드의 상류층은 거의 모두가 자코파네에 머물고 있을 지경이 되었다. 자코파네의 작은 음악회에서 부자들의 상거래가 이루어졌고 귀족들과 고급관리들이 모여 국정을 논의할 지경에 이르렀다. 폴란드 수도에서 벌어질 일이 적어도 겨울에는 자코파네에서 이루어질 정도였다. 그때부터 자코파네는 ‘폴란드의 겨울 수도’라는 별명을 얻었다.
긴 겨울동안 마냥 온천과 스키 타는 것으로만으로는 지루했던 부자와 관리들은 이제 점차 자코파네의 환경과 개발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철도를 개설했고, 정식 스키장을 개장했고, 케이블카가 설치되었다. 온천 관광단지 조성과 함께 광업과 야금산업에 박차를 가했다. 지금의 겨울과 여름 성수기의 관광사업 만큼이나 자코파네는 점차 광업과 야금 산업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티투스 하우빈스키(Tytus Chalubinski)에 의해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자코파네는 그야말로 폴란드의 횡재였다. 길에서 주운 로또나 마찬가지였다.
폴란드 정부로부터 공식적으로 온천 도시로 1886년에 지정되면서 본격적인 관광사업이 시작되었고, 1889년에는 개발을 전제로 과도하게 숲을 마구잡이식으로 남벌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국영 기업 블라디스와프 자모이스키가 자코파네의 영지 전체를 매입하여 개발에 따른 본래의 자연환경 훼손을 최소화하는 장치를 마련하였다. 아울러 학교건설과 상수도 설치, 우체국 등 도시 건설에 필요한 기초 인프라 확장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하우빈스키에게 진정한 자코파네의 가치가 재발견되자마자 자코파네는 '폴란드의 영혼'으로 떠받들어졌고, 많은 위대한 폴란드 인사들의 인기 안식처가 되었다. 특히 격변기의 폴란드 엘리트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사랑을 받았다. 정치인, 예술가, 과학자, 스포츠맨 등 다양한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해 휴식과 여유를 찾았다. 20세기 후반에는 타트라 국립공원이 설립되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자코파네 자체는 점점 늘어나는 관광객을 수용하기 위해 크게 확장되고 있다.
그런 자코파네도 20세기 중반,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39년 9월 나찌 독일군이 자코파네를 점령했다. 자코파네에 머물던 폴란드 지배층이 뿔뿔이 흩어져 산속으로 도망쳤다. 독일은 대대적인 소탕전이 아닌 꾸준한 설득과 회유 작전을 펼쳤다. ‘폴란드의 정신’이라고 까지 불리는 자코파네가 가진 어떤 상징성 같은 것을 염두에 둔 선택이었다. 이곳은 곧 동유럽을 침공하는 독일군의 핵심 거점이 되었다. 전쟁이 거세지면서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하더니 폴란드 전역에 걸쳐 대대적인 소탕전이 벌어졌다. 이 전쟁으로 폴란드인 약 6.000.000명이 사망했다. 그중 절반이 유대인이었다.
자생적으로 생겨난 독립군인 폴란드 민병대가 자코파네를 향해 산악전을 펼쳤다. 눈과 혹독한 추위와 험준한 산악지형을 이용한 게릴라전에 돌입한 것이다. 산속 동굴에서 기거하며 눈보라를 이용해 독일군 진지를 기습했고, 높은 바위벼랑 위까지 대포를 밧줄에 묶어 끌어올려 없는 비행기 폭격을 대신 포탄을 날렸다. 침략을 당했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는 폴란드인의 기상을 드높였다.
마침내 1945년 1월 독일군이 자코파네에서 철수했다.
짧았던, 지극히 짧은 독립과 평화가 찾아왔다.
독일과 러시아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을 치르면서도 동시에 내부의 흑백 내전에서 끝내 승리한 볼셰비키 혁명당이 러시아 공산당의 간판으로 정식 국제무대 전면에 뛰어든 것이다. 러시아 공산당의 군대인 소련군이 독일군을 몰아치면서 폴란드에 진군해 왔다. 한때 독일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일 때는 서로 동지였다. 먹을 식량을 나누고 적 소탕을 위해 작전을 함께 짜고 무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새로 진군해 온 소련군에겐 공산당과 부르조아라는 엄연한 경계가 있었고, 짧은 해방을 맛본 폴란드인 사이엔 그런 공산당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사람과 이도저도 아닌 방관자들이 뒤섞여 있었다. 거기다 유대인과 가톨릭과 개신교 신자로 종교 문제도 섞여 있었다. 더해서 중세 이후로 뿌리 깊게 전해져 온 민족 간의 분란도 뒤섞여 있었다.
러시아 공산당의 무장 세력인 소련군이 폴란드를 새롭게 점령했다.
폴란드는 또다시 아비규환 지옥으로 변해갔다. 자코파네도 다를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친구가 친구를 고발하고, 조카가 삼촌을 향해 총을 쏘고, 선생이 제자들을 모아서 가스실로 가는 기차에 태우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지옥같은 세상이 도래했던 것이다. 붉은 완장을 차야만 그 지옥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붉은 완장은 항상 피에 굶주려 있었다.
자코파네는 이제 붉은 완장을 찬 소수의 공산당원 만을 위한 휴양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프로레탈리아 혁명을 주도한 극소수의 혁명 세력만을 위한 완전 브루조아 형태의 온천 휴양지로 말이다.
훗날 체 게바라가 모스코바를 방문 한 후에 비행기에 오르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소련의 사회주의 혁명은 실패한거야. 그것은 애초부터 혁명이 아니었어. 민중은 하루 세끼를 못 먹어 두끼로 겨우 해결하는마당에, 크렘린의 혁명세력들은 은쟁반에 금 포크로 스테이크를 자르고 있으니 그게 어디 민중들을 위한 혁명이었겠어? 지들끼리나 잘 먹고 잘 살자는 협잡꾼들이지? 전제정권하의 황제나 귀족들이 하던 짓꺼리와 다를게 하나도 없잖아. 그런 저들이 혁명을 해서 성공했다고?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지. 프로레탈리아 혁명은 저런것이 아니야. 카스트로와 나는 절대 저렇게 하지 않을거야. 제대로 된 진짜 혁명을 성공시켜야지?' 라고 푸념을 늘어 놓았다.
게바라는 이런 자신의 심정을 카스트로에게 그대로 전했다.
하지만, 그랬음에도 게바라는 볼리비아 정글에서 전투를 벌이다 사망했다. 그럼에도 게바라가 떠나고 난 후의 카스트로 생활은 게바라가 그렇게 욕을 해댔던 크렘린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 전한다.
이제 자코파네는 그런 사회주의 혁명과 관계해 크렘린 생활을 많이 닮은 사람들을 위한 전용 놀이터가 된 것이다.
하지만 무심한 세월은 흐르고 흘러서 상처받은 사람들의 영혼을 어루만지고 다독거려주면서, 지난간 상처들을 망각의 저편으로 실어 보내고, 새로운 희망을 노래하며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어 주었다.
지금 드러난 자코파네의 파란 하늘과 푸른 숲처럼 말이다.
그리고 사방에서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처럼 말이다.
자코파네는 아름답다.
자코파네는 화사하고 평화롭다. 그야말로 이제는 세상에 별로 남지 않은 싱그러운 지상낙원인 것이다.
내가 꿈꾸는 산악 트레킹의 첫 번째 로망은 언제나 이탈리아 돌로메티 트레킹(Dolomites Trekking)이고, 두 번째는 폴란드 자코파네 트레킹(Zakopane Trekking)이고, 세 번째는 아르메니아 데이비드 가레자 트레킹(David Garejeli Trekking) 이고, 네 번째는 조지아 카즈베기 트레킹(Kazbegi Trekking) 등으로 이어졌는데, 데이비드 가레자와 카즈베기는 이미 다녀온 바가 있었지만, 언젠가 마눌님에게도 꼭 한번 보여주고 싶어서 아직 떨어내지를 못한 상황에서, 자코파네가 사정거리 안에 들어왔음인데........ 역시나 마눌님의 무릎 상태 때문에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고 있는 중이다. ‘확 그냥 마차를 태우고 다녀 봐? 그런데 마차에서 내려도 한참 걸어 다녀야 하는데? 또 호수도 한 바퀴는 돌아야 하고. 그렇다고 포기하자니 또 이런 기회가 올까?’
말고 화창한 날에 구발우우카까지 케이블카를 타고 가면 정상에서 타트라 산맥의 무한한 파노라마 전망과 함께 유럽사람들에게는 지극히 일상적이지만 우리에겐 한없이 어색한 일광욕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돌레메티 트래킹의 하이라이트처럼 이곳에서 코스치엘리스코나 하렌다 방향으로 개척되어 있는 여러 개의 트레킹 코스 중에서 골라 얼마든지 더 들어갈 수 있다. 더 큰 용기를 내서 건너편 산악지역까지 들어간다면 그곳으로 설치되어 있는 카스프로위 비에르흐 케이블카를 이용해 하산하면 되는데, 그 정도의 코스를 선택하려면 어느 정도 전문가 수준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이래나저래나 자코파네는 트래킹과 산악 활동을 즐기는 관광객들에게 가히 천국이라 말해주고 싶다.
이번에 나는 간절하게 그곳에 가고 싶다.
' 여보야. 어떻게 기운 좀 내봐.'
가고싶은 마음이 간절해서인지 자코파네 이야기에서 유독 많은 사진이 올라가고 말았다.
어치피 말을 꺼내 소개할 생각이었으니 제대로 하고 싶었다.
또 누가 알겠나?
우리는 혹시 못가게 될지라도, 누구에겐가 이런 이야기와 무심코 골라서 올린 사진들이 방문하고픈 욕구를 부채질해서 누군가가 대신이라도 다녀오게 되고, 혹여 그 여행이 기대나 상상했던 이상이 될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나에게 있어 최고의 기쁨과 보람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그런 일이 실제로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집에 가훈은 없다. 하지만 아들에게는 귀가 따갑도록 해온 당부가 있다. 이젠 그 당부를 우리 손녀들에게 할 모양이다.
하나. 책을 많이 읽어라. 책에는 양서와 악서가 따로 없다. 많이 읽다보면 스스로 정화하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많이 읽어라.
둘. 친구를 많이 사귀어라. 너와 친구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절대 거절하지 마라. 너도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었다 거절당하지 않으려면 늘 마음을 열고 친구를 맞이해라. 너의 신념과 가치관이 올바르다면 나쁜 친구에게 쉽게 동요되지 않을 것이니 언제나 당당하게 여유와 자신감을 가지고 모든 친구를 환하게 웃으며 맞이해라.
셋째. 여행을 많이 해라. 아빠는 여행을 취미이자 특기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아무런 이유나 조건을 굳이 달지 말자. 그냥 여행 그 자체를 사랑하고 여행을 즐겨라. 그럼 인생이 고독하거나 황폐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보너스 당부 하나. 가끔은 진심으로 누군가에게 또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렴. 하나님도 부처님도 알라신도 시바신도 상관없단다. 어떤 절대자가 존재한다는 겸손한 마음으로 너 자신을 위해, 가족을 위해, 친구를 위해, 나아가 아주 가끔은 국가나 인류의 평화를 위한 기도를 해라. 그러다 그 기도의 성찰을 위해 무엇인가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기걸랑은 또 그렇게 해보는 것도 좋지 않겠니?
오랫동안 버킷 리스트에 담아 놓았던 로망의 (동유럽 여행)을 주비해야 할 시점에서 내가 알고 있고, 또 그렇게 해보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담아 글로 옮겨 보았다.
분량이 너무 길어져서, 이미 너무나 유명한 이탈리아의 로마와 피렌체 이야기는 생략하기로 해야하겠다.
어딘가 있을 이미 써서 올린 여행기에 어느정도는 충분하리만치 소개를 했던 이유도 크게 작용했다고 하겠다.
찾아주셔서 감사하고, 여기 까지 읽어 주셔서 감동이고, 나머지 이야기는........ 여행을 다녀와서 6월에는 정리를 해서 내가 직접 찍은 사진들과 함께(여기까지의 사진은 대부분 구글과 네이버의 이미지에도 도움을 받았음) 새로운 이야기들로 여앵기를 써서 꾸준히 엎그레이드 할 계획이다. 아마도 5월 초순에서 한 달 가까이는 유럽에 체류할 계획이다.
여행사 직원도아니고, 외교부 직원도 아니고, 재벌도 아니고, 로또가 당첨된 것도 아닌 처지에, 현장을 접고 떠나는 마음도 솔직히 마냥 편하지는 않지만, 이번 여행은 오로지 마눌님께서 청하시고 비용 부담하시고 길 안내만 잘하라고 맡기시는 여행이라 다른 이유나 변명이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만수무강으로 가는 외통수 지름길이라 달리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그럼, 진짜 동유럽 여행기는 6월 중에 이어나가게 되겠습니다.
5월 중에 프라하로 들어가서 6월 첫날에 부다페스트에서 나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스케줄도 현재는 준비된 것이 없습니다.
길 따라 바람 따라 기차길 따라 마음 내키는 대로 가 볼 생각입니다.
비행기 타려다 저가항공 화물 운송비에 질리면 기차타고, 성수기나 주말 기차비용이 비행기 보다 비싸면 장거리 버스 타고, 지루하면 가다가 내리던가, 그것도 아니면 방향을 틀어 다른 곳으로 가던가, 우리가 가진 것이라곤 (시간)과 (배짱)뿐인데 무엇이 어렵고 두렵겠습니까?
병아리들과 함께가 아니라는게 가장 두렵고 힘들것 이라는 생각은 처음부터 하고 있었는데, ‘너네는 학교 가야지?’
‘뭐라고? 휴학한다고? 부모님 허락 있으면 가정휴학이라는 게 있다고? 아서! 할머니 통장 빵구나. 너넨 다음에 보자?’
-- 부족한 장문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본 (동유럽여행기)는 다녀와서 6월에 계속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