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온 토말여행)'운림산방( 雲林山房)'

(다시 돌아온 토말여행)

by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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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편 무악산(毋岳山) 너머로 해가 뉘역뉘역 내려앉으면 육조거리에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양반의 점잖은 체면도 포기하고 허겁지겁 몰려나오는 행태로 보아하니 아무래도 하급관리가 틀림없어 보인다. 적어도 품계가 높거나 뼈대있는 가문의 관리라면 가마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중 나온 하인의 안내를 받으며 거드름을 피우듯이 느긋한 행보를 보여야만 했다. 하긴, 목구멍이 포도청인 마당에 양반 체면이 다 무엇이란 말인가? 육조거리의 모든 관리는 묘시(오전 5~7시)에 출근해서 유시(오후 5시~7시)에 퇴근하는 것이 관례였으며, 관직이라는 것이 보기와는 다르게 박봉이어서 조선 시대에는 양반들 조차도 하루에 두 끼니가 겨우였다. 그러니 퇴근하면 서둘러 집으로 가서 보리밥에 시래기된장국이 전부라 해도 일단 허기를 모면하고 볼 일이었다.

그런 와중에 지금 한 무리의 관리들이 한패거리 모여서 왁짜지껄 어디론가 몰려가고 있었다.

오늘은 퇴근길에 주막에서 허기진 배를 채우고 모주(막걸리)로 모처럼 목구멍에 풀칠이라도 하게 된 날이다. 요즘으로 치면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직장 단체 회식의 날인 것이다. 그것도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을 정도로 막강한 권력과 재력을 갖춘 높은 양반이 내시는 회식이 아닌가? 왜 오늘 예조(禮曹) 관리들에게 회식을 베푸시는 것까지는 알지도 못하고 궁금하지도 않다. 기억해야 하는 것은 오로지 ‘퇴근하고 나서 수진방(壽進坊) 주막으로 가라’는 상급 관리의 전언이면 너무도 충분했던 것이다.

정6품 예조 좌랑의 전언에 의하면, 지난날 예조판서를 지냈고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던 김흥근(金興根) 대감이 임금을 배알하면서 한성 복귀를 기념하는 자리를 마련했다는 이야기가 전부였다. 김흥근이 누구인가. 당대 최고의 세도가 안동김씨 김조순의 셋째 아들인 현 병조판서 김좌근(金左根)에게 이래라저래라 막말까지 해대는 한 살 터울의 형으로 두 사람은 8촌 형제였던 것이다. 두 사람은 늘 물과 불의 관계처럼 으르렁거리며 서로 못 잡아먹어서 난리였다. 하지만 조선 천하를 호령하는 김조순의 안동김씨라는 뼈대 있는 가문의 체통과 남의 이목을 생각해서 서로 외면하며 극구 참고 있던 사이였다. 예조판서로 떵떵거리던 김흥근을 경상도로 몰아낸 배후에 김좌근이 힘을 썼던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돌았었다. 그런 그가 지금 한성에 돌아온 것이다.

해가지고 어둠이 찾아오고 대청마루에 환하게 불을 밝힌 주막거리가 그야말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뒤늦게 김흥근이 찾아와 ‘많이들 드시라고’ ‘주모에게 있는 음식 다 내오라고’ 큰소리로 외쳤다. 그동안 꾸준하게 김흥근과 연줄을 대어왔거나, 또 그에게 잘 보여, 한몫을 잡으려는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구름처럼 몰려들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아무런 상관없는 지나가던 사람들까지 몰려들어 그야말로 한바탕 한양도성의 대대적인 동네잔치가 되고 말았다.

‘내 아우 좌근이가 귀한 그림을 얻었다고 동네방네 떠드는 소리가 먼 경상도까지 들리더구나. 긍재(兢齋 金得臣)의 그림이라 하던데......... 누가 보았더냐? 그렇게 동네방네 떠들어 댈만한 그림이더냐? 혹시 그게 진품은 맞는다고 하더냐? 어디 누구 본 사람이 있으면 그 그림 이야기 좀 해 보려무나.’

두 팔촌 형제가 평소 용호상박 다투던 관계라 자칫 나섰다가 낭패를 당할지 몰라 다들 서로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소인이 보았사옵니다. 여기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보았을 것인데 나서지 못하는 이유를 모르겠어서 감히 여쭙겠습니다.’

‘누구신가? 어디 보고 느꼈던 대로 이야기 해 보시게.’

‘도화서 화원으로 있는 유숙(劉淑, 1827~1873)이라 합니다. 말씀하시는 그림은 <노상알현도(路上謁見圖)>라는 그림으로 긍재(兢齋 金得臣) 선생께서 그린 풍속화가 맞습니다. 무더운 한낮 들녘 길에서 갓을 쓰고 나귀를 타신 양반이 있고, 나귀의 고삐를 잡은 벙거지를 쓴 마부의 손에 회초리가 들렸고 등짐을 진 하인이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대 길에서 마주친 사내와 아낙이 비켜나며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는 풍경을 담았습니다.’

‘노상알현이라......... 듣고 보니 그저 그런 일상의 장면이 아닌가? 그 그림에 어떤 특별함이 있더냐? 정조임금께서 김홍도와 백중(伯仲)하다 라고까지 칭송하신 것은 내 일찍부터 들어 알고 있지만, 임금의 행차도를 그리던 도화서 화공이 느닷없이 시골 들판에서 양반 행차도를 그렸단 말이냐?’

‘풍속화를 그린 것 뿐입니다. 주막거리나 투전판이나 대장간이나 강가에서 천렵하는 그림도 있습니다.’

‘내가 아는 긍재 선생이 맞는지 모르겠구나? 그렇다면 내 아우 좌근이가 그토록 칭찬을 늘어놓는 것은 그 그림의 무엇이 어떻게 달라서 저러는 것이냐? 내가 지금 그림을 보고 있는 듯이 어디 소상하게 설명해 보거라.’

‘길을 가던 남녀가 논둑길에서 출타하는 양반을 만났습니다. 패랭이를 쓴 채 땅바닥에 넙죽 엎드린 남자는 긴 막대기를 내려놓은 것으로 보아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으로 보이고 아마도 노인일 성싶어 보이기도 합니다. 곁에는 전모를 쓰고 걸낭을 맨체 머리를 숙이고 두 손을 모아 부처님에게 공양을 드리기라도 하는 자세로 공대를 보이는 여성이 비켜 서 있습니다.’

‘양반과 상민이 노상에서 마주쳤으니 지극히 당연한 것이 아니냐? 그래 나머지 그림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이냐?’

‘상것들이 지극한 예를 갖추었으면, 이를 받고있는 양반의 태도에서도 그에 합당한 최소한의 응대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무슨 말이냐?’



긍재 김득신(兢齋 金得臣 1754년 ~ 1822년)작. <노상알현도(路上謁見圖)>



‘아랫것들은 황송할 정도로 예를 갖추는데, 갓끈을 길게 늘어트린 양반의 시선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먼 앞을 그저 무덤덤하게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양반을 보필하는 권솔의 처지이기는 하나 엎드려 절하고 있는 상민의 같은 처지임에도 나귀 고삐를 잡은 길잡이는 거드름을 피우는 몸짓으로 귀찮다는 듯 시선을 돌려버리고 있습니다. 뒤따르는 하인의 표정과 몸짓에서도 거만하고 불량스러운 기운이 저절로 느껴집니다. 신분의 차이는 분명히 있겠으나 최소한의 경우나 예우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어느 누가 보아도 지극히 타당하다 여겨지지 않는, 그런 일이 저잣거리에서 실제 벌어지는 사태를 꾸짖는 뜻이 담겼다고 보았습니다.’

‘결국 못된 양반질을 긍재 선생이 노골적으로 까발렸다는 말이 아니냐? 그런 그림을 아우는 왜 그렇게까지 요란을 떨며 자랑을 한단 말이냐? 혹 저가 저러고 돌아다니니까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

‘신분의 차이는 당연하겠으나, 거기에도 최소한의 법도는 있어야 아름답지 않겠느냐는 질문이 아니겠습니까?’

‘도화서 화원의 처지에서 선배인 긍재 선생을 위해 그토록 열변을 토했으니, 그 열의에 감복해서 내가 너에게 특별한 상이라도 내려야 하겠구나. 긍재 선생께서 크게 기뻐하실 것이야. 그럼 이참에 하나 더 물어보자.’

김흥근은 품속에 갈무리해 두었던 부채를 하나 꺼내 들어 펼쳤다. 부채에 그림과 글씨를 넣었으니 선면산수도(扇面山水圖)가 틀림없다. 김흥근은 활짝 펼친 부채를 사방으로 천천히 돌려가며 보여주었다. 죄중의 시선의 모두 한곳으로 쏠렸다.

‘다들 시.서.화에 일가견들을 가지신 분들이실터이니 어디 이 선면의 그림이 누구 그림인지 알아맞춰 보셨으면 좋겠소. 그림의 낙인으로 파악하려고만 하지 않는다면, 내가 오늘 밤을 홀딱 새워가며 주야장창 취할 수 있도록 거나하게 한상차려 주겠소. 누구든 나서서 이 그림을 그린 화가와 그림의 내용을 알아 맞춰 보시구려. 내 이번에 올라오면서 아주 귀하게 얻게 된 부채라오.’

김흥근의 속셈은 뻔했다.

앙숙인 아우 김좌근이 긍재 선생의 그림을 구한 핑계로 세간의 이목을 끌고자 하였으니, 그렇다면 어디 내 것도 한 번 구경해보라고 어디서 어렵게 구한 부채를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어떤가? 도화서 화원 유숙(劉淑)이라고 했지? 그래 이 그림을 알아 보겠는가? 스승의 그림처럼 이 그림에 대해서도 맞춘다면 내 자네에게 아주 크게 상을 내리겠네. 어떤가? 아시겠는가?’

‘화풍으로 보아 어렴풋이 짐작은 하겠으나 아직 공부하고 있는 미천한 처지라 감히 그림의 내용까지는 모르겠사옵니다.’

‘저런저런, 아쉽구만. 하지만 하나만 더 묻겠네. 그럼 이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그림인가?’

‘절대 아닙니다. 여백의 미를 살리고자 하는 구도를 능숙하게 사용하는 솜씨이며 여유롭게 느껴지는 필치를 보아 결코 상서로운 그림은 아닐 것입니다. 소인의 재주로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칠 뿐입니다.’

‘매우 솔직하고 겸손한 사람일세 그려. 자네만큼 이 그림의 진가를 알 수 있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야. 여보라. 유화원이 돌아갈 때 절대 섭섭지 않게 상을 보내주도록 하여라.’수하에게 명을 내리는 김흥근의 표정은 무척이나 흡족한 모양이었다.

‘내게도 그 그림을 한 번 보여주시겠나. 이참에 부족한 식견을 넓혀 보고 싶네.’

뒤쪽에서 이 잔치판의 주인인 김흥근에게 마음대로 하대를 하는듯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고개를 돌려 본 김흥근은 허겁지겁 대청마루를 뛰어내려가 맨발로 갑자기 나타난 노인의 앞에 나아가 허리를 굽혀 예를 갖추었다. 나타난 노인이 누구이기에 세상을 쥐락펴락할 것 같던 김흥근이 저렇듯 금새 순한 양으로 만들어 버렸단 말인다.

‘좌상대감께서 어떻게 여기까지......... 이제 막 올라온 처지로 본의 아니게 소란을 떨어 송구스럽습니다. 누추하오나 잠시 오르셔서 좌정하시고 목이라도 축이심이 어떠실지요?’

좌의정 권돈인(權敦仁)은 머지않아 영의정에 오를 것이라고 알 만한 사람은 모두 알고 있는 조정의 최고 대신 중에 한사람이다. 안동김씨 세도의 핵심인 김조순과도 막역한 사이이며, 김흥근의 아비 김명신과는 서로 호형호제하는 그런 사이였다.

‘전하를 배알하고 나서 내가 따로 자네를 잠시 보았으면 하였네만, 벼락처럼 떠났기에 차차 다음에 보자하고 있었네. 퇴청하고 나서 내 지인과 약속이 있어서 수진방엘 들렸다가 이렇듯 자네의 잔치를 보게되었네. 누를 끼칠 생각은 없었지만 이렇게라도 잠시 볼까 해서 들린 것이네. 잠시면 되겠네. 그런데 지금 자네가 귀한 그림을 얻어 좌중에게 상까지 걸고 자랑중이시니, 어디 내게도 식견을 넓힐 기회를 주시겠는가? 나는 상은 주어도 받지 않겠네.’

‘어찌 그런 서운한 말씀을 하십니까? 미처 살피지 못해 예까지 찾아오시게 해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김흥근은 지극한 예를 갖추면서 부채를 권돈인에게 넘겼다.

부채를 펼쳐 든 권돈인이 대청마루 아래 몰려선 사람들을 쳐다보면서 한 사람을 손짓해 불렀다.

‘어서 올라오지 않고 뭐하고 있는가? 오늘 내가 약속했던 지인이라네. 와서 이 그림 좀 살펴주시게. 그림이라면 나보다 자네가 우선 아니겠는가? 여기 내 옆에 앉아서 찬찬히 그림을 좀 살펴 보아주시게. 전혀 모른다고 하면 오늘 내가 대 망신을 당하게 되는 것이야. 자네에게 달렸네. 어여. 여기 편하게 앉아.’

이게 시방 무슨 해괴망측한 사태란 말인가? 주변을 가득 에워싼 관리들은 물론 주인 격인 김흥근 마저도 놀라 까무라칠지경이었다. 초로에 접어든 이 나라 조정의 좌의정 대감이 생판 처음 보는 서른 줄의 애송이에게 살갑고 자애로운 친절을 베풀며 자기 옆에 끌어다 앉히고 나서, 손에 들었던 그 귀한 부채를 넙쭉 건네주는 것이 아닌가?

‘어떤가? 내가 짐작하는 그 그림이 맞는가?’

‘그렇습니다. 호생관(毫生館) 선생의 <강심초각(江深草閣)>이 맞습니다.’

순간 장내에 적지않게 소요가 일어났다. 모여든 군중이 알아채지 못한 그림의 내용을 서른 줄의 젊은이가 단번에 알아맞힌 것이다. 그런 진위 여부야 옆에서 멍한 표정으로 금방이라도 놀라 까무러칠 지경의 김흥근의 지금 표정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감심초각의 제화는 두보의 시구에서 나왔습니다. 백년지벽시문형(百年地僻柴門逈 : 백 년이나 땅이 외지니 인가의 사립문 멀고), 오월강심초각한(五月江深草閣寒 : 오월이라 강이 깊어 초가정자 싸늘하네) 라고 적었고, 또 마지막에 스스로 그린 사람이 삼기재(三奇齋)라고 밝혔습니다. 평소 최북(崔北) 선생님은 스스로 자기자신이 문장과 글씨와 그림에 남다른 재주를 가지고 있다고 여기셔서 삼기재라고 호를 지으셨습니다. 그림은 좀 전에 유숙 화원의 설명대로 대국(중국)의 화풍을 물려받아 여백의 미를 중시하면서도 물가의 정자와 언덕과 나무와 먼 산을 유려하게 배치하였고, 제한시킨 몇 가지의 색만을 연하게 사용하여 화폴 전체를 보다 맑과 화사하면서도 생기가 돌게 그려냈습니다. 두보의 시구를 써 내려간 필체는 느린 듯 여유를 보여 보는 이에게 편안함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호생관 선생의 화풍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호생관 최북(毫生館 崔北, 1712년 ~ 1760년)작. <강심초각(江深草閣)>




‘좌상대감, 이 젊은이가 누구이기에 이렇듯 쉽게 그림을 알아버린것입니까? 소개해 주시지요?’

‘그게 궁금하면 내 다음에 만나 소개해 드림세. 이제 우린 가야하겠네.’

‘가시다니요? 제게 볼일이 있으셔서 찾으셨다면서요?’

‘아참. 그랬었지? 내 나이가 들으니 자꾸 깜빡거려. 잠시 몇마디만 전해주고 싶네만........... 대신, 자네가 그렇게 부채 그림을 좋아한다니 내 수일 후에 여기 이 친구가 그린 부채 하나를 선물해 주겠네. 멀리 경상도까지 다녀온 데 대한 선물로 말일세. 기다려 보면 차차 아시게 될 것일세.’

‘그럼 이분이 화가시라는 말씀입니까? 어쩐지 식견이 남다르다 했었지요. 이참에 오늘 아예 소개를 해 주시지요?’

‘혹시 여기에 지필묵이 있는가? 그럼 가져오게 하시게. 통성명 대신 여기서 그림을 그리는 것을 직접 한 번 보여주겠네. 다행히 내가 옆에 있어서 따로 부탁하지 않아도 거절은 하지 않을 것이야. 가저 오게 하시게.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동안 자네는 잠시 나 좀 보시게나.’

지필묵이 당도했다. 도화서 화원 유숙이 먼저 나서서 열심히 묵을 갈았다.

‘오늘은 모처럼 자네의 난초 그림을 보고 싶네. 난을 한 번 시원하게 쳐주시지 않겠는가?’

좌상대감이 칭찬을 아끼지 않은 젊은이가 화선지를 펼쳐놓고 나서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였다.

권돈인은 김흥근을 데리고 측간으로 갔다. 일을 보고 나와서 주변을 쓰윽 한 번 둘러보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노상알현도>는 내가 잠시 좌근에게 빌려다 자네 부친과 함께 감상을 해었다네. 자네 부친의 감상평이 무엇이었는지 아는가? 저렇게 참 교훈을 잘 가르쳐 주는 그림이 어디 있겠느냐고 하셨네. 양반들의 세태가 작금에 지나쳐도 너무 지나치다는 뜻이 담겼던 것이네. 부친께서 <주역>을 꺼내셨지. 이귀하천 대득민야(以貴下賤 大得民也)라 하셨네. 귀한 것이 천한 것 아래를 가서 제대로 보아야, 그러고 나서야 제대로 민심을 크게 얻는다는 말이지. 자네가 경상도로 나갔다 와야 했던 이유도, 또 앞으로 어떻게 생겨날지 모를 일들도, 우선은 처음으로 돌아가서 겸손함과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나아가야 온전하게 멀리까지 갈 수있는 것이네. 명심하시게. 주변을 늘 예의주시하고 처신에 늘 유념해 주게. 자네가 돌아온다는 소문이 나면서부터 이상한 이야기들이 심심치 않게 나돌고 있네. 내 귀에도 들렸으니 자네 부친 귀에도 들렸을 것이네. 부디 지중하시게. 오늘 같은 일은 여기서 그만 끝내시게. 병석에 누워계신 자네 부친을 대신해하는 당부일세.’

말을 마친 권돈인이 먼저 대청마루로 다시 돌아갔다.

사방에서 탄성 소리가 터져나오고 있었다.

어느새 대청마루 위에 청초한 난초가 심겨 자라나서 난초 향기를 풍겨내고 있었다. 그윽한 묵향과 함께 말이다.

젊은이는 그림의 끝자락에 소치(小痴)라고 쓰고는 옆에다 붉은 낙인을 찍었다.

그제서야 김흥근은 그 젊은이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소치 혀련의 손을 잡아 끌며 대청마루를 나서려던 권돈인은 난초 그림을 보려고 몰려든 사람들 틈에서 쪽빛 비단 장삼을 걸친 앳된 청년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소스라 치듯 놀라 자신도 모르게 함부로 내뱉으면 절대로 안되는 실성한 소리를 흘려버리고 말았다.

'전하! 저 저 저........ 전하!'

어수선한 중에 어떨결에 터져나온 소리라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은 겨우 김흥근과 허련뿐이었다.

전하라니? 이 세상에서 그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존재는 오로지 단 한사람 뿐이 아니던가?

땅바닥에 넙죽 엎드리려는 좌의정 대감의 허리춤을 강하게 잡아 일으키는 검은 손길이 있었다.

'잠행중이십니다. 고정하십시요. 좌상대감.' 왕의 출타중에 호위를 책임지는 운검의 수장이었다.

젊고 어린 왕(헌종)은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사람들 틈에 섞여서 주막거리를 나섰다. 다섯의 운검이 거리를 두고 뒤를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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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86%8C%EC%B9%98_%EB%8C%80%EB%82%98%EB%AC%B4.png?type=w966 소치 허련(小痴 許鍊, 1809-1892)



옛날 임금님들은 이따금 미복잠행(微服潛行)을 나서기도 했다. 미행 또는 잠행이라 줄여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어쨌거나 군주가 민생을 살펴보기 위해 변복을 하고 민정 시찰을 나가셨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민정 시찰이라는 게 아주 어쩌다 심심풀이 삼아 한두 번 다녀온 것을, 마침 그날 무슨 사건이 얼마나 심각하게 발생했다고 거창하게 민생을 살펴 정책에 반영하기 위함이었다고 과하게 의미를 두려는 생각은 아예 접었으면 싶다. 흔히 요즘도 대통령의 지지도를 여론조사를 통해 평가를 받듯이, 임금이 아첨꾼인 신하들의 여론조사 결과를 직접 한 번 알아보기 위하여 직접 나섰다고 보는 것이 올바르다 하겠다.

늘상 들어앉아 상소문을 읽거나 매사에 부축까지 받으며 움직이는 처지이고 보면, 민정시찰을 나가본 들 도성 밖 어디를 얼마나 다닐 수 있겠는가? 궁궐에서 사대문까지 거리가 상당하거늘, 주변을 속여가며 나선 길인데 사대문까지 가는 길이 일단 엄청 힘들지 않았겠는가? 변복을하고 잠행을 하는 처지에 가마를 탈 수도 없고, 말을 타고 사대문까지 내달릴 수도 없지 않았겠는가? 설사 사대문 밖을 나섰다고 치자. 저질 체력에다가 궁궐까지 돌아갈 방도를 염두에 두자면, 거기까지 나오기는 했어도, 딱히 어딜 거거나 무슨 일을 벌인다는 것이 거의 어불성설이다. 그나마 도성 밖 서민 생활에 일가견이 있는 수행원을 동행했다면, 어디 저잣거리 시장이나 주막 정도에 들려서 ‘나랏님이 잘하시는 것 같다던가’ ‘귀신은 뭐하느라 헛지랄하는 나랏님을 안 잡아먹는지 모르겠다’는 세평 정도는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민생 시찰이 아니라 군왕의 여론 지지도를 슬쩍 들여다보는 정도가 거의 다였을 것이다. 혹시나 하필 그날 술에 진탕 취해서 길을 가던 중 변복한 군왕 일행과 맞닥트려서, ‘안 비켜? 양반이면 다냐? 까불면 임금 나부랭이가 와도 너희들 오늘 다 죽는거야?’ 하고 까불기라도 했다면.......... 제대로 사고를 친 것이 되지 않겠는가?

사실 그 미행이라는 것이 그저 새로 임금에 즉위하면 초기에 한두 번 실행해 보는 요식행위였지 않았을까? 실제 효과는 거의 전무 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했을 것이다. 태조 이성계는 한양 천도후에 실제로 자주 사대문 밖 성터 건설 현장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미행을 가장 생활화했던 성종 임금은 미행 중에 묘령의 여인을 보고 반해서 실제로 사고를 치는 스캔들을 벌이기도 했다.

일찍 왕위에 올라 젊어서 요절했던 헌종의 경우에는 잠행중에 소치 허련을 만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매스미디어를 통해 요즘이야 대통령의 얼굴을 누구나가 잘 알고 있지만, 조선 시대에 혹여 임금을 만났다 해도 감히 올려다 볼 수 없었던 그 시절에 주막에서 국밥에 막걸리를 먹으면서 한참 나랏님 욕을 하고 있는데, 뒤편에 앉아 있는 양반이 그분이고, 옆에 있는 사람들이 조선제일검 호위무사들 이라면............ ‘어이, 나랏님 양반. 신분증 좀 봅시다. 보이스 피싱범인지 아닌지 내가 어떻게 알아? 언제 우리 만났어?’

지질이도 재수없는 그날은 인생을 통털어 가장 재수없는, 돌부리에 걸려 똥더미에 나자빠진 날이 아니고 무슨 날이겠는가?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 -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45~1806) - 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 1758?~1813) - 오원 장승업(吾園 張承業, 1843 – 1897) - 안견(安堅, 미상) - 호생관 최북(毫生館 崔北, 1712 – 1760) -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 1668~1715) - 긍재 김득신(兢齋 金得臣 1754 –1822) -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로 이어지는 전통을 조선 후기 회화의 계보라고 미술사는 적고 있다.

정선은 누가 뭐라해도 우리나라 진경산수화의 창시자라 할만하고, 군왕의 사랑을 듬쁙 받았던 김홍도는 최고의 풍속화가임이 틀림없다. 거기에 여인의 아름다움을 섬세한 필치로 담아낸 신윤복이 있었고, 환상적인 꿈을 세계를 하나의 화폭에 고스란히 담아낸 안견은 <몽유도원도>의 유명세에 가려져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붓 하나로 먹고살겠다고 몸부림친 시대의 풍운아 최북을 빼놓고는 조선 회화를 제대로 써 내려갈 수가 없다. 새로운 시대 예술을 고민했던 윤두서는 선비 화가라는 새로운 반열의 이름을 올렸고, 김득신은 해학적이고 개성 있는 또 다른 풍속화의 맛과 멋을 우리에게 소개했다. 그러고 나서 글씨를 그림의 영역으로까지 승화시킨 김정희의 업적도 결코 빼놓을 수가 없다.

여기에 조선 회화에 보석같은 존재인 심사임당이 있고, 소치 허련은 아직 그 계보에 오르기 전이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당장 좌의정 권돈인(權敦仁)과 안동김씨 세도가의 기린아인 김흥근 사이에 거론된, 호생관 최북(毫生館 崔北)과 긍재 김득신(兢齋 金得臣)을 지극히 간략하게라도 짚어보고 나서 소치 허련(小痴 許鍊)으로 넘어가야만, 이쯤에서 서서히 운림산방의 이야기를 마무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EC%B5%9C%EB%B6%81.png?type=w966 호생관 최북(毫生館 崔北) 작품 모음.



산비탈 언덕에 메추리 한 쌍이 따사로운 볕을 누리며 평화롭게 놀고 있다. 국화와 갈대가 있어 더욱 싱그러움이 전해져 온다. 윤곽선 없이 스쳐 지나간 붓 터치만으로 그린 국화와 쭉쭉 뻗어낸 갈대의 건조한 필선과 대비되어, 깃털 하나까지 정말로 꼼꼼하고 세세하게 그린 메추리는 당장이라도 화폭 밖으로 뛰쳐나올 것만 같다. 이런 것이야말로 운필의 맛이 그림의 멋과 격조를 더해 주는 문인화의 특징이 아니겠는가.

특이한 언행과 개성적 화풍으로 조선 후기 화단에 조금은 유별난 선명한 족적을 남긴 최북은 유독 실감 나도록 정밀하게 메추리 그림을 잘도 그려서 세간에선 ‘최메추리’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그런가하면 문장과 글씨와 그림에 모두 뛰어난 재질을 가졌다고 자부하여 삼기재(三奇齋)라는 호를 스스로 지어 사용했다.

붓 하나로 먹고사는 문제를 모두 해결하겠다고 나선 시대의 풍운하였지만, 그런 결의와는 다르게 평생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마도 그런 생활고에서 발견한 어디서든 쉽게 적응하며 편하게 삶을 살아가는 메추리를 즐겨 그린 것이 아닐까 싶다.

하루는 한 선비가 거금을 가져와 산수화를 부탁했는데 막상 그림 받는 날에 넘겨받은 그림엔 산만 표현되어 있고 물을 그리지 않았기에 그 선비가 왜 물을 안 그렸냐며 이를 항의했더니 ‘그림 밖이 물인데 안 보여?’라고 소리치며 내쫓았다고 한다.

그런 거친 성품은 높으신 분들 앞에 가서도 기죽지 않았다. 최북이 젊은 날에 어떤 높으신 양반의 인상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림을 그려달라는 요청을 거절하자, 그 고관이 화가 치밀어 곤장을 맞아 죽기 싫으면 그림을 그려 내놓으라고 협박하자 ‘이건 남이 나를 저버린 게 아니라 내 눈이 나를 저버린 것이다’라고 소리치며, 스스로 자신의 한쪽 눈을 찔러 애꾸가 되었다. 당연히 이를 본 고관은 기겁을하고 죽어라 도망쳤다.

최북의 그런 괴팍한 성격 때문에 항상 대인관계가 썩 좋지 못했고, 술을 워낙 좋아해서 그림을 팔아 아무리 돈을 벌어도 생활비와 술값으로 전부 쓰다 보니 뛰어난 그림 실력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가난을 면치 못했다. 심지어는 생계와 술값을 벌기 위해 평양과 동래까지 쫓아가 그림을 팔기도 했으며, 그런 가난은 죽는 순간까지 이어졌다. 죽기 직전에도 열흘 동안 굶다가 그림을 팔아 겨우 돈을 마련했다고 하며 그 돈으로 술을 마시고는 만취한 채로 겨울밤에 한양의 눈구덩이에서 누워 자다가 결국 객사했다. 죽었을 때의 나이가 49세였다. 실로 아까운 죽음이었다.

최북은 손가락에 먹을 묻혀 그림을 그리는 지두화(指頭畵)라는 당시 청나라 화법을 즐겨사용하기도 했다.

조선 후기의 문인 화가인 조희룡은 최북을 김득신, 이인문, 김홍도와 같은 반열에 놓았으며, 최북의 또래인 문인 정범조는 최북을 정선과 심사정에 견주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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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s-G9OEUA2obNiAZ8yW-7MVMjWtOynBJOV_Wstxl5lWDDuvJXhZK1V2V3mrkMSZE-wRpDqwFrTZ.png?type=w966 호생관 최북(毫生館崔北, 1712 - 1760년 ) 풍속화와 궁중화 <정조의 화성행행도>



긍재 김득신(兢齋 金得臣)은 조선 후기 미술사에서나, 활약상에 비해 기록이 매우 적으며 그의 생애에 대해서도 별로 알려진 것이 없는 특이한 존재이다.

김득신은 화원 가문인 개성김씨 출신으로 44년 이상을 화원으로 봉직하며 화사 군관으로 초도첨사(椒島僉使)를 지냈던 전형적인 조선 후기 도화서 화원의 면모를 보여준 화가이다. 동생인 김석신(金碩臣), 김양신(金良臣), 아들인 김건종(金建鍾), 김수종(金秀鍾), 김하종(金夏鍾)이 모두 도화서 화원이었다.

자연과 풍속화를 잘 그렸는데, 영조 임금은 현재 심사정과 겸재 정선과 함께 긍재를 삼재(三齋)라 불렀을 정도였다. 하지만 조선 후기의 미술사에선 긍재 김득신을 김홍도(金弘道)와 신윤복(申潤福)과 더불어 ‘조선의 3대 풍속화가’라고 적고 있다.

긍재는 영·정·순조대의 도화서 화원이자 규장각 초대 자비대령화원이다.

하지만, 극히 일부의 세속적 평가에서 긍재는 한 마디로 ‘단원 김홍도의 아류’라는 혹평을 오랫동안 받아온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교과서에까지 실렸던 긍재의 그림 <파적도(破寂圖)>를 보는 순간 사람들은 그것이 김홍도의 그림이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버젓이 범하고 있을 정도이다. 긍재의 대표작 다섯 점을 골라 김홍도의 그림 열 점에 뒤섞어 놓고 구분하여 고르라고 한다면, 전문가가 아니라면 절대 쉬운 문제가 아니다.

긍재의 회화적 기량은 조선 후기 도화서를 대표하는 궁중 화가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다만 그의 화풍에서 보아, 도석인물(道釋人物), 산수, 영모(翎毛) 등의 묘사에서 김홍도의 영향을 크게 받았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는 김홍도의 후기 풍속화풍을 계승하는 동시에 산수를 배경으로 삽입한 것이 긍재만의 특징이라 하겠으며, 여기에 해학적 분위기와 정서를 더욱 가미하여 조선 후기의 풍속화에서 김홍도 못지않은 역량을 발휘했던 훌륭한 화가라고 평가해야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중인 계급 출신인 긍재로써는 그의 젊은 시기에 출신을 따지지 않고 실력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였던 성군 정조(正祖)를 만나 무한한 능력을 발휘하였으나(나이 22세 때부터 47세까지 25년간의 정조 치세 시기), 정조 사후 그의 인생 하반기에 접어들어서 중인 출신 관료를 배척하는 노론 벽파의 행태에 따라 벼슬을 그만둘 수밖에 없을 것이며, 단원 김홍도와 같은 야인의 생활을 힘들게 유지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바로 이 도화서 화원 재직 시기에 <정도의 화성행행도>를 최득현(崔得賢), 이명규(李命奎), 장한종(張漢宗), 윤석근(尹碩根), 허식(許寔), 이인문(李寅文) 김득신(金得臣)등이 함께 그렸다.

그런 이유로 비교적 인생 후기에 내놓은‘노상견알도(路上見謁圖)’‘출문간월도(出門看月圖)’‘소상야우도(瀟湘夜雨圖)’ 등의 작품은 사회 또는 제도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이 내포되어 있어 정조 사후 그가 관직에서 물러나 야인생활 시기의 작품임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정조 사후 50대에 야인생활을 하면서 도화서 화원 출신 화가답지 않게 문인 화풍의 소상팔경도나 사군자(四君子) 그림도 자주 그려 현재 이 같은 그림이 다수 현존하고 있어, 그가 비록 중인 출신이지만 이런 문인 화풍의 그림이 사대부의 전유물이 아님을 통해 일종의 저항적 의식으로 드러내고 싶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정조 사후 관직에서 물러난 긍재는 그래도 어느 정도는 집에서 한가롭게 책을 읽고 때로는 그림을 그렸을 것인데, 정순왕후와 시파 김귀주에 의한 노골적인 벽파 세력의 척결, 이어진 천주교 탄압과 이후로 김조순과 안동김씨 일문에 의한 세도정치의 만연으로 부정과 부패가 갈수록 심해지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부질없이 바르지 못하게만 변해가고 있는 세상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화폭에 많이 담았다고 여겨진다.

긍재의 대표작이라 평가받는 <파적도(破寂圖)>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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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웬 소동이냐. 시골집의 고요와 평화를 깨는 일대 사건이 벌어진다. 검정 도둑고양이가 노란 병아리를 잽싸게 채서 달아나고 그야말로 한바탕 난장판이다. 깜짝 놀란 어미 닭은 눈에 시뻘겋게 독이 올라 날개를 파닥거리며 죽을 각오로 덤벼들고 나머지 병아리들은 혼비백산 흩어진다.”

이런 파적도에 대하여 미술사가인 오주석은 일찍 ‘김홍도와 신윤복의 사이에 끼어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한던 김득신이 그린 조선 최고의 풍속화다’라고 평가했을 정도였다.

제목의 <파적도(破寂圖)>는 '고요함(寂)이 깨진(破) 모습을 그린 그림(圖)'이란 뜻이다. 말 그대로 고요하고 평화롭던 와중에 돌연 느닷없이 나타난 고양이로 인해 분위기가 급변한 상황을 나타내고 있다. 하여 묘박계추도(猫搏鷄雛圖), 야묘도추(野猫盜雛)라는 다른 제목으로도 불리며, 어쨌거나 둘 다 '고양이가 병아리를 물고 도망치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누가 뭐라 해도 이 그림의 백미는 어미 닭의 핏발선 눈빛이다. 비록 고양이보다 한없이 나약한 존재지만 제 새끼를 구하려 날갯죽지를 한껏 펴고 부리를 크게 벌린 채 달려들고 있다. 절정의 모성애가 아닌가. 도망가는 병아리 네 마리 중 한 마리는 다른 방향으로 냅다 뛰고 있다. 화면구성의 묘미를 살리려는 작가의 의도가 숨어있는 한 마디로 재치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말했다. 김득신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파적도>를 보고 나서 평가하라고 말이다.

여러 작품에서 비록 주제와 소재가 비슷하다고 해서 김득신을 ‘김홍도의 아류’라 폄훼할 수 없다. 특히 저 <파적도(야묘도추> 그림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살펴보았다면 절대 그런 망발은 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조선시대 후기에 김득신 이라는 훌륭한 화가가 실재했음을 비로소 제대로 실감할 수 있게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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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불러서 오느라 고생이 많았겠구나. 오는 도중에 불미스런 경우는 당하지 아니하였느냐?’

소치 허련은 넙죽 엎드려 이마가 바닦에 닿는 소리가 들렸을 정도로 머리를 찧으며 절을 올렸다.

‘미천한 소인이 전하를 뵙사옵니다. 궁궐에 들 것이라는 생각을 꿈에도 가져본 적이 없어서 궁궐의 예법을 몰라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 아닌지...... 소인 지금이 꿈인지 생시인지 몰라 허둥대고 있을 뿐이니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그것이 어디 그대의 잘못인가? 그날 주막거리에서의 일이 생각이 나서 좌상대감께 자네를 만나게 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한 내 탓인 게지. 어려워하지 말고 어디 고개를 들라.’

‘미천한 소인이 어찌 전하의 용안을...........’

‘내가 괜찬다고 하지 않았느냐? 어디 그날 주막 대청마루에서 의기양양하게 좌중을 압도하던 기개 넘치던 그 화원이 맞는지 궁금하구나. 어서 고개를 들라. 그날 좌상이 손사래를 쳐서 말리시던데, 그래 너는 나를 알아볼 수 있겠느냐?’

‘전하라는 좌상의 말씀은 들었으나 어찌 소인이 전하의 용안을 올려다 볼 수 있었겠습니까? 멀리서 나가시는 뒷모습을 잠시 살폈을 뿐이옵니다.’

‘그럼 나는 너를 알겠는데, 너는 나를 알지 못한다는 소리가 아니냐? 잘 보아두거라. 내가 바로 네가 전하라 부르는 그 사람이니라. 혹 다음에 궁 밖에서 마주치면 아는 체는 하지 않더라도 알아는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어서 고개를 들어보거라.’

허련은 고개를 들어 용상에 앉아 있는 군왕을 올려다보았다. 좀 야위고 허약해 보이는 갓 스물 정도의 아직은 앳된 표정의 젊은 군왕이 옅은 미소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최내관은 준비해 놓은 것을 내오도록 하라.’

부름을 받은 최내관이 선비가 독사나 필사에 쓰는 낮은 책상인 서안(書案)을 들고 다가와 소치 앞에 놓았는데, 서안에는 문방사우가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붉은 보료를 내려놓았는데, 보료 위에는 두 자루의 붓과 부채 하나가 놓여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함부로 접할 수 없는 최고급 붓이자 부채였다. 당나라에서 들여온 부채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아직 아무런 무늬나 색채가 없는 백지상태였다.

‘그날은 아우성치는 인파들 득세에 너의 그림을 제대로 감상힞 못했구나. 그 아쉬움이 너무나 커서 이렇게 경황 중에 너를 부른 것이니, 지금 여기에서 나를 위해 그림을 하나 그려주었으면 좋겠다. 붓은 네 마음대로 고르도록 해라. 필요하면 너른 평상을 가져오라 하겠다. 아무쪼록 그날처럼 의연한 모습으로 좌상과 추사가 마냥 칭찬을 아끼지 않던 너의 그림 솜씨를 보고 싶구나.’

‘전하의 분부가 계셨으니 최선을 다하기는 하겠으나 세간의 소문이 모두 허명이었던지라 감히 전하의 용안을 어지럽힐까 심히 두렵사옵니다. 더하여 소인이 지금 전하를 알현하고 있다는 사실이 꿈인지 생시인지 모두지 믿기지 않아 정신은 혼미하고 가슴이 요동치며 손이 떨리는 터라 전하의 분부를 감히 받들 수 있을지 심히 걱정이될 뿐입니다. 부디 통촉해 주시옵소서.’

‘그런 걱정은 말거라. 내가 이미 좌상께 부탁드려 너의 그림은 보았음이니라. 너의 출중한 그림 실력은 이미 잘 알고 있기에, 어디 이참에 나를 위한 그림을 그려달라는 것이다. 나도 남들처럼 그런 멋진 부채를 하나쯤 갖고 싶구나. 천천히 모든 부담을 내려놓고 소재가 무엇이든 상관없으니 네 마음껏 내 앞에서 너의 그림을 그려 보거라. 평상은 준비되었느냐?’

‘소인은 평상보다 그냥 바닦이 편하고 좋사옵니다. 하오시면 최선을 다해보겠는데 전하께서는 매화를 좋아하시는지요?’

‘왜 아니좋아하겠느냐? 서책을 가까이 하고 싶은 사람치고 매화를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느냐? 매화를 그려주겠느냐?’

소치 허유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림 그리기 위한 자세를 바로잡고 앉아 한참 지긋이 눈을 감고 상념에 잠긴 후에 그의 심신은 지극히 안정되고 여유로워 보였다. 다만, 아무리 그렇기로 그래도 군왕이 내려보고 있는지라 미세한 손의 떨림까지 평소처럼 제어할 수는 없었다.

무질서 해보이는 소치만의 붓자국이 흩날리고 있다.

잎보다 꽃이 먼저 피는 매화는 북풍한설의 모진 추위를 이겨내고 마침내 화사한 봄이 당도했음을 알림으로 예부터 지조와 군자를 상징한다고 하여 선비들로부터 꾸준한 사람을 받아왔다.

그 다가온 봄의 화사한 만큼이나 선명한 분홍색으로 홍매를 사랑하여 그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소치처럼 백매를 통해 반쯤 피었거나 활짝 핀 꽃들과 꽃봉오리까지를 조화롭게 배치하여 흑백의 조화만으로도 충분히 매화향이 은은하게 떠돌게끔 만드는 화가들도 있었다.

소치의 경우는 주로 그렇게 갈필만으로 수묵의 백매를 즐겨 그렸는데, 줄기의 내부에는 필선을 가하지 않고 윤곽선 부분에 농묵으로 먹점을 찍는 방식으로 입체감을 살리기도 했다. 매화의 어떤 상징성보다 오히려 갈필의 독특한 붓 터치를 이용해 조화의 아름다움을 담아내려 노력하는 것으로 보여졌다. 무질서 해보이는 붓놀림이 이어질 때마다 매화 꽃송이가 봄바람에 휘날리며 매화향이 은근하게 풍겨나왔다. 묵향을 가득 담은 봄의 향기였다.

흑매가 바람에 날리는 여백에 허유는 시를 써 내려갔다.

‘향기는 꽃술에도 없고 향기는 꽃받침에도 없구나. 뼛속깊이 가득 스며든 향기를 드리니 그것을 감상하소서.’

헌종임금의 얼굴에 지극히 만족스러워하는 환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그제서야 소치는 속으로 얼었던 가슴을 끌어내렸다.



%EB%8B%A4%EC%9A%B4%EB%A1%9C%EB%93%9C-down.png?type=w966 원나라 문인화가 황공망(黃公望)의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



매화가 그려진 부채를 뚫어져라 한참이나 쳐다보던 헌종임금은 뒤에서 그림 하나를 꺼내 최내관에게 건넸다.

‘내가 곁에 두고 자주 꺼내보면서 마음의 평안을 되찾게 해주는 그림이다. 알아 보겠느냐?’

그림을 받아들자 마자 소치 허련은 그 그림에 대해서 한 눈에 세세한 것 까지 알수 있었다. 소치는 일체의 망설임도 없이 군왕의 질문에 답을 했다.

‘원대의 문인 화가인 황공망(黃公望) 선생의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 부분 모작입니다.’

‘오호라. 그걸 이처럼 단번에 알아채다니 너의 식견이 참으로 놀랍구나.’

‘모든 것이 추사 스승의 덕분이옵니다. 처음 소인을 거두신 이후로 북송의 미불, 원말의 황공망 선생과 예찬, 청대의 석도 선생의 그림을 최소 열 번씩 따라 그리게 하시면서 남종 문인화의 정신과 필법을 배우고 깨우치게 해 주셨던 때문이옵니다.’

‘그랬구나. 그림에 대한 관심과 안목이야 조선 역사를 통 털어도 추사를 따르자가 없다고 하더니만, 너를 보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새삼 실감하게 되는구나. 그럼 너는 이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의 전체 그림을 여러 번 모사하였다는 말이냐?’

‘황공망 선생의 그림을 가장 많이 따라 그렸습니다. 그때마다 스승께서 더 심도있게 가르침을 주시곤 하셨습니다.’

‘과연 추사로고, 암. 추사라면 당연히 그랬겠지......... 언제고 네가 모사한 부춘산거도 전체 그림을 보여줄 수 있겠느냐?’

‘소인에겐 너무나 과분하신 분부이시옵니다. 전하께 이미 보고 계신 그림처럼 조선의 훌륭한 화가들이 이미 앞서서 많은 <부춘산거도> 모사본을 남겼습니다. 소인은 감히 거기에 미치지 못하옵니다. 분부를 거두어 주시옵소서.’

‘네 그림솜씨 또한 이리도 뛰어나거늘 어찌 그렇게 한결같이 뒷걸음을 친단 말이냐?’

‘황공망(黃公望) 선생은 원대 미술의 종사(宗師)로 추앙을 받고있는 분이십니다. 그런 선생께서 3년이나 걸려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를 그리셨습니다. 추사 스승께서도 중국 문인화의 최고 작품이라고 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림을 보면 얼추 가을이 먼저 떠오르는데 제목엔 부춘(富春)이라 했으니 봄이 만발했다는 뜻이 아니겠느냐?’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전하께 보신바대로 그림의 내용은 가을이 분명하옵니다. 대륙의 항주(杭州) 지역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물줄기가 있사온데, 그 물줄기 이름이 부춘강(富春江)으로 그곳 강변의 수려한 경치들 담았다고 하옵니다. 그림은 분명 가을을 배경으로 겹겹이 둘러선 부춘 강변의 산봉우리와 울창한 소나무 숲과 빼어난 기암괴석과 구름과 안개와 연무에 덮인 농가들이 아름다운 정취를 자아내고 있다 하겠습니다. 대륙 강남지방의 빼어난 산수를 변화무쌍하면서도 맑은 먹빛으로 원근감을 잘 살렸으면서도 더없이 안정적인 구도를 묘사함으로 자연과 초목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문인화의 경지를 한 차원 높게 이끌어 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내가 느낀 것이 바로 너의 이야기와 참으로 똑같더라는 말이다. 허니 이렇게 하면 어떻겠느냐? 시간은 얼마가 걸려도 상관하지 않겠다. 네가 그리고 싶어질 때, 부춘강(富春江) 주변의 풍경을 그려서 내게 보여주도록 해라. 언제든 그림이 완성되면 좌상대감께 알려 한 번 더 궁궐을 다녀가도록 하여라. 이번처럼 그림 이야기도 더 해주고.......... 추사의 새로운 소식도 가져오도록 하면 좋겠다. 알겠느냐?’

허련은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임금께서 지금 당장 유배생활 중인 추사 스승의 이야기를 꺼내시지 않았던가 말이다. 스승은 지금 분명 유배중인 죄인의 몸이었기 때문이다. 하여 좀 전의 그림 설명 때도 스승의 이름을 거명하면서 못내 가슴을 졸였던 소치였다. 그랬는데 지금 임금께서 새로운 스승의 소식을 알아 오라고 하시지 않으셨는가 말이다.

궁궐을 나서자마자 스승에게 서신을 먼저 보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듣자니 추사의 막역지우인 초의선사의 차가 기히 일품이라는 이야기가 있더구나. 추사가 특별히 부탁해서 소치 자네가 제주도까지 차 배달을 다녀오기도 했다지? 어디 기회가 된다면 내게도 그 차를 좀 맛보게 해 주면 좋겠다고 전해주려무나.’

‘아니? 이 양반이 아무리 임금이라지만, 어떻게 그런 일까지 죄 다 꿰듯이 알고 있단 말인가? 귀신인거여 시방?’

훗날 소치는 이날의 일을 자신의 서책에 기록으로 적어 남겼다.

궁궐을 나와 하늘을 올려다 보니 쟁반 같은 둥근달이 소나무 위에 떠 올라 있었다고 말이다.

‘한성 땅 장안에서 오늘 밤 나보다 영광스런 대접을 받은 인간이 있으면 어디 한 번 나와보라고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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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선재(樂善齋)에 들어서면서 보니 여기저기 사방으로 아주 익숙한 글씨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가만히 다가가 살펴보니 틀림없는 추사체 글씨 편액에다가 완당(阮堂)이라고 낙인이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향천(香泉)이며, 연경루(硏經樓)하며, 유재(留齋)에다 자이당(自怡堂)이 있었으며, 고조당(古藻堂)이 그것이었습니다. 거기에다 낙선재 뒤에는 평원정(平遠亭)의 편액까지 모두가 스승님의 추사체로 걸려 있었습니다. 전하께서 스승님의 학식과 글씨에 대한 평소 생각이 어떠신지 짐작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 전하께서 친히 붓 두 자루를 내어놓으시고는 맘에 드는 것을 골라 그림을 그려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 눈먼 장님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어찌 아니 그렇겠습니까?’

말을 그친 소치는 숨을 고르면서 좌중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가 내뱉는 말 토씨 하나라도 놓칠세라 주막 당장 안쪽을 가득 채운 사람들이 일제히 마른 침을 삼키고 있었다.

아마도, 이 시기가 소치 허련의 최고 전성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군왕과 직접 대면하고 교류하는 화가를 넘어, 그의 재주를 아껴 벼슬을 내려 관복을 입고 궁궐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하려고 직분에도 맞지 않는 무과 벼슬까지 하사하셨으니 한양은 물론이요, 조선팔도에 그에 대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을 정도이니, 그가 나타났다면 주막 근처가 문전성시를 이루는가 하면 권문세가와 부자들이 그를 식객으로 초대하기 위해 줄을 섰을 정도였다.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번져나갔는데, 소치가 평소 교류하는 사람들 명단에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있어 그와 함께 난을 치며 흡족해함은 물론 소치의 솜씨를 칭찬하고 상까지 내렸다고 하니 거기에 더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좌의정 권돈인이 아예 소치를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였고, 김흥근이 그를 자주 식객으로 초대하는가 하면, 흥선대원군 못지않게 난초 그림에 일가견이 있는 민영익 대감 등 당대의 최고 실력자들 즐겨 소치와 교류하기를 원했다.

소치는 언제든 그들이 원하는 그림을 그려주었으며, 권력자들과 부자들과 예술을 통한 인연을 넓혀가고자 했다.

상황이 그쯤되자 덩달아 소치의 그림을 가지고 싶어 하는 호사가들이 떼로 몰려왔다. 개중에는 나름의 학식과 덕망을 갖춘 지식인들이 소치와 조선의 미술과 중국의 미술에 관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거나 토론을 벌이고 싶어 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허련이 누구였던가? 당대 최고의 학식과 덕망을 갖춘 유학자 추사의 제자인 데다, 어느 정도 고증적 혜안이나 판단에 있어서 스승 못지않을 정도로 날카로웠던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찌 알았으랴?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흥진비래(興盡悲來)라고 말이다.

자고로 언젠가는 반듯이‘흥(興)이 다하면 비(悲)가 온다’고 말이다. 그것이 순리이자 자연의 범칙이라고 말이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 아무리 큰 권세라도 십 년을 넘기지 못하며, 이는 결국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니 꽃이 열흘을 넘기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분수에 맞게 처신하라는 불멸의 교훈이었다. 하지만, 인간이란 태생적으로 자신만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란 확신과 자신으로 살아가는 유별난 존재로, 비로소 깨닫고 나면 이미 때가 늦었음을 늘 후회하고 한탄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기에 인생무상(人生無常) 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평소 유약했던 헌종 임금이 21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요절했다.

헌종은 아버지 효명세자가 20세의 나이로 급작스레 요절하고, 할아버지 순조마저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왕세손의 신분으로 7실에 왕위에 올랐다. 안동 김씨의 세도가 시퍼렇던 시절에 섭정을 맡은 신정왕후는 두 번째 권문세가인 풍양 조씨 집안이었다. 이런 권력다툼의 연장 선상에서 첫 왕비를 김조순의 손녀이자 김좌근의 딸을 효현왕후 김씨로 맞이했으나, 효현왕후가 16세의 나이로 후사를 만들기도 전에 급작스레 사망했다.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세력다툼은 결국 중간지대라 할 수 있는 효정왕후 홍씨를 계비로 맞이하게 했다.

절대권력 안동 김씨의 견제를 받으며 왕권 강화를 꿈꾸는 것이 크게 무리였을까? 증조부인 정조 임금을 그렇게 닮고 싶어 했던 헌종은 1849년 7월 25일 향년 21세의 나이로 보위를 이을 후사도 없었으며, 형제도 없었는지라 정조의 직계 혈통은 여기에서 끊기고 말았다.

호사가들은 그런 헌종을 가리켜 영민하였으나 너무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세도가들로부터 끊임없는 견제와 간섭을 받아 이른 나이에 요절한 비운의 왕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서 스승인 추사가 세상을 떠나자 소치가 받은 충격은 대단히 컸던 모양이다.

소치 허련의 스승 추사(秋史 金正喜)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유별나 보였을 정도로 극진했다고 널리 알려져왔다.

추사가 정치적 모함으로 결국 제주도 귀양을 가게되자, 그 길로 따라나서 해남까지 쫓아가며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스승의 제주 유배 생활이 9년 동안 이어지는 동안, 초의선사와의 가교역할을 맡아 귀한 차를 가지고 세 번이나 바다를 건너 스승을 찾아 문안했고, 그곳에서의 체류 기간을 모으면 1년을 넘겼을 정도였다.

그렇게 스승인 추사마저 세상을 떠나자 짙은 허무가 찾아왔다.

궁궐 안팎에서 미력한 군왕을 세워놓고 벌여대는 세도가들의 권력 행패를 직접 목격하였고, 그들이 돌아서서 펼치는 향락에 취해보기도 했었다. 그런 폐단으로 인해 스승과 같은 학식과 덕망을 갖춘 지식인들이 배척을 당하고, 개혁을 주장하면 모함을 받아 유배지로 쫓겨나거나 사약을 받아 죽임을 당하는 일들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목격했던 것이다.

하릴없는 한양에서의 생활이 지겨워졌다.

언제 불어닥칠지 모르는 가혹한 운명의 끝자락이 보이는 것 같아 점차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문득 어릴적 고향이 그리워졌다.

숙부인 허대(許岱)가 일가를 이끌고 진도에 정착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던 시절에, 철부지 허련은 숙부의 붓으로 여기저기 사방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고, 이를 눈여겨보던 숙부가 그에게 그림을 그릴 기회를 제공해 주었고, 남다른 조카의 그림 솜씨를 안타깝게 여겨 마침내 초의선사에게 보내 화가의 길로 나서게 해주었던 것이다. 숙부가 써준 편지를 들고 바다 건너 해남 땅 대둔사 일지암의 초의선사를 찾아간 길이 그만 이리도 오랜 유학의 길이 되고 만 것이다.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스승 추사의 장례를 치고나서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강진 다산초당에 들러 어려서 많은 가르침을 내려주신 다산 선생께 인사드리고, 해남에 들러 첫 스승이신 초의선사 곁에 잠시 머물다가, 고향 진도로 돌아가 숙부 허대의 영전에 이제야 심부름을 마치고 무사히 돌아왔노라고 귀향 인사드리고 나서, 허 씨 일가친척들이 모여 사는 인근에 어디든 작게라도 터를 잡고 조용하게 도서이정(圖書怡情)의 낙으로 남은 여생을 살아가야 겠다고 마음먹었다.

결국 하염없이 가을비가 쏟아지던 날에 소치는 조용히 한양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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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가 속절없이 구질구질 내리던 날에 소치(小痴 許鍊)가 초부면 마재리(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의 다산(丁若鏞) 선생의 묘소에 나타났다. 선생의 묘역에 올라 상석 앞에 엎드려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소식을 전해들은 정학연(丁學淵,1783~1859)이 하인들의 부축을 받으며 아버지의 묘역까지 올라왔다.

정학연이 누구인가? 다산 선생의 아들로 추사와 초의선사가 가르침을 얻고자 강진 다산초당을 찾을 때마다 자리를 만들어주고 소통의 장을 마련해준 또 한 명의 은인이 아니었던가? 학연이 오히려 동갑내기인 추사나 초의선사보다 세 살이나 연상이었으나 늘 친한 벗처럼 이들을 이끌어 주었던 존재였다. 애초 초의선사와 먼저 교류가 있었으나, 다산초당을 찾아온 추사의 성품을 알아보고는 초의선사와의 인연을 소개해준 사람이 바로 정학연이었다. 그런 학연이었는지라 추사의 제자이자 초의선사의 제자이기도 한 소치 허련의 그림 솜씨를 알아채고는 늘 또 한 명의 스승처럼 아끼고 돌보아 주신 은인이었다.

‘많이 지쳐보이는구나.그렇게 힘이 들더냐?’

‘스승께서 떠나시고 나니 세상 모든 것이 다 하릴없고 부질없어 보였습니다.’

‘외로운 것이지. 두렵더냐?’

‘문득 뒤돌아보니 본래의 제 길에서 너무 멀리 벗어난 것을 느꼈습니다. 돌아갈 곳도 모르겠고 돌아갈 방도도 알지 못하겠습니다.’

‘초의가 너를 데리고 초당을 찾았을 때의 모습을 내가 아직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느니라. 그러고 보니 네 눈빛도 표정도 그때와는 다르게 많이 변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구나. 잠시 물러나 자신을 추스를 필요가 있어 보이니라. 필요하면 얼마든지 내 집에 머물러도 좋다. 이렇게 굿은 날씨에 멀리서 찾아온 너를 보셨으니 아버님께서도 무척 반가우셨을 것이야.’

‘문안을 여쭈었으니 이길로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여 해남으로 내려갈까 합니다.’

‘초의에게 가려느냐?’

‘그렇습니다.’

‘참으로 다행스럽구나. 추사는 비록 떠났지만 그래도 너는 아직 돌아갈 곳이 있지 않느냐? 초의라면 아마도 네가 돌아오리라는 것을 알아채고는 지금 기다리고 있을 것이야. 나이를 제법 먹어서 이젠 그곳으로 돌아가지는 못하겠으나 마음속엔 늘 해남과 강진이 그립구나. 초의에게 내 안부를 꼭 부탁한다. 이 길로 곧장 떠나려느냐? 그간의 궁금한 일들이 참으로 쌓였는데 말이다.’

‘이렇게라도 뵈었으니 다행으로 생각하고 여기서 인사를 올리겠습니다. 지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차마 더 쉽게 떠나지 못할 것 같아섭니다. 자주 뵙지 못하여도, 궁금하실 일은 차차 서신을 통해 그간의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소치는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려 정학연에게 절을 올리고 언덕을 내려갔다.

예산에 들러 추사의 무덤을 찾아 예를 올리고 지금 자신의 처지를 스승께 눈물로써 하소연을 했다.‘이 모든 사단이 스승께서 먼저 떠나신 때문입니다. 제자가 언제든 혼자 남겨질 것이라고 가르쳐주시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스승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해남 땅에 이르니 마침내 고향에 돌아온 듯 알 수 없는 기운이 느껴졌다. 한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기분이다.

한 걸음에 대둔사(大芚寺, 현 대흥사)를 찾았으나 초의선사(艸衣禪師)는 출타중이었다.

보름 전에 금강산엘 다녀오신다고 길을 떠나셨다고 한다. 겨울 지나 봄에 돌아오신다 하셨단다.

소치는 아차 싶었다. 중도에서 길이 어긋난 것이다.

초의선사는 당연히 친구인 추사의 무덤을 찾아 예산엘 들리셨을 것이지만, 소치 자신이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다녀온 지라 방금 자신이 다녀간 사실을 초의는 모르실 것이다. 금강산 가시는 길이라면 당연히 다산 선생의 묘소엔 들려 정학연 선생을 만날 터이니 지금쯤이면 자신의 낙향 소식을 접하셨을 것이다. 하룻밤을 스승의 거처에서 지내면서 수치는 많은 상념에 잠겼다.

그리고는 날이 새자마자 초의 스승께 ‘봄에 오신다고 들었으니 봄이 오기전에 와서 스승님을 기다리겠습니다. 혹여 먼저 오시면은 소식을 알려주세요.’라는 서신을 남겨놓고 서둘러 진도로 건너갔다.

먼저 부모님과 숙부 허대(許岱)의 무덤을 찾아 인사하고, 무덤의 정리에 온 정성을 쏟았다.

임시 거처를 마련하고는 진도의 가장 높은 산자락을 찾아 올라다니면, 추사와 초의에게 어깨너머로 배운 풍수에 관한 기억을 되살려 자신이 장차 거할 터전을 찾기 시작했다.

마침내 점찰산(尖察山) 아래 사계절 마르지 물이 시원하게 흐르는 산골짜기 깊숙한 제법 너른 평평한 언덕에 자리를 잡았다. 점찰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니, 산골짜기 첩첩산중에 아침저녁으로 피어오르는 안개가 구름 숲을 이루고 있는 가히 명당이라고 불릴만한 그런 터였다.

‘이곳에 집을 짓고 들어앉아 그림이나 그려야겠다. 하니 이제부터 내 집을 운림산방(雲林山房)이라 해야겠다.’


하릴없고 다 부질없다.

점찰산 정상에서 시선을 돌려 북쪽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디선가 피냄새가 은근하게 느껴져 오는 듯 했다.

조선의 지식인들이 모여 성리학의 이념 완성을 통해 군왕을 보필하여 태평성대를 이룩하겠다던 성스럽고 거룩한 목표는 한낮의 공염불에 지나지 않았다. 한양에 머무는 동안 지켜보았던 숱한 군상들의 부침과 명운의 성쇠가 얼마나 많았던가? 선비의 올곧고 한결같은 기개와 절개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오로지 권력을 탐하고 향락적인 양반 생활에 취하여 누구든지 헐뜯고 질시하고 모함하고 죽음의 구렁텅이로 쫓아낸 뒤, 그 쫓겨난 자의 부와 권력과 땅과 가족들까지 빼앗는 일이 당연시되는 양육강식의 짐승들로 전락하고 말았다. 친구도 일가친척도 스승도 형제도 더는 소용이 없었다. 필요하다면 언제든 임금마저도 갈아치울 판이었다.

그것이 선비정신의 속내였다. 조선 사대부들의 정체성이었다.

정약용이 쫓겨났으며, 김정희가 또 그렇게 쫓겨났다. 좌의정인 이재 권돈인 마저도 이제 곧 잠시 영의정에 올랐다가 파직되어 쫓겨날 예정이 되어 있었다.

고르고 골라서 뽑았다는, 성리학의 고고한 정신에 어느 정도 도와 품격을 이미 이루었다는 조정의 대신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하나같이 피 맛을 본 승냥이들로 모조리 변해있었다.

성리학의 이념과 가치와 소중함을 깨달은 드높은 인격들과 세상 모두에게 유익함을 추구하던 아름다운 천재들은, 조정의 피에 굶주린 승냥이로 변한 허명뿐인 성리학자들에겐 공존하기 힘든 새로운 위협이었다. 피 맛을 모르면서 군왕을 보필하고 백성을 보살피며 성리학의 이상이 고르게 펼쳐진 태평성대는 임금이나 꿈꾸고 추구하는 이상일 뿐이지, 도성을 차지하고 임금을 에워싼 승냥이들에게 세상은 그저 형편없고 분란뿐이고 모순덩어리여야만 자신들의 득세가 나름 변명이 되었던 것이다.

남쪽 골짜기로 시선을 돌리니 저만치 발아래 작은 초가 하나와 작은 연못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단촐해 보여서 오히려 그득하지 않은가.

외졌으매 적막해 보임이 오히려 세속의 잡다함에서 벗어난 아늑함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운림산방(雲林山房) 이름지어 붙인 자신의 선택이 스스로 더 만족스러웠다.

작은 초가 한 채에 작은 연못 하나가 전부이지만, 여기 점찰산에서 내려다보이는 골짜기와 진도의 앞바다가 모두 운림산방의 터가 아니던가? 이렇게 너른 터전에서 나오는 호방함을 그 무엇과 바꾸겠는가?

갈필로 흰 구름을 군데군데 그려 넣은 듯이 드넓게 펼쳐진 하늘이 사뭇 안온하다. 아낙네의 거머쥔 연초록 치맛자락처럼 둘러쳐진 주변의 산세가 수려하고 청신하다. 군데군데 잔뜩 운집하여 붉은빛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동백의 꽃봉오리 하나하나가 붉은 물감을 흥건히 붓으로 찍어내는 것처럼 참으로 기발하다.

그래서 도서이정(圖書怡情)이다. 여기에 머물면서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니 그저 더없이 마음이 즐겁다는 말이다.

소치(小痴 許鍊)는 산등성이를 타고 하산길로 접어들었다.

능선이 끝나는 지점에서 골짜기로 내려서면 산방으로 낸 작은 소로가 나온다. 그 길을 따라가면 작은 연못에서 흘러내리는 물길에 작은 나무다리를 놓았다. 이제 그 다리를 건너면 진정한 자신만의 세상인 운림산방(雲林山房)에 드는 것이다.

이날, 이 순간의 장면을 고스란히 옮겨 담은 그림이 바로 소치가 만년에 그린 <선면산수화(扇面山水畵)>다.

운림산방의 실제 풍경을 그가 평생 추구한 남종화로 재해석한 소치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산방 입구의 아름드리 소나무가 화폭에 그대로 있고, 동백나무 숲과 연못을 이어주는 홍애교(紅愛橋)가 앙증스럽다. 그리고 그 다리를 건너고 있는 선비가 바로 지금 점찰산에서 내려온 소치인 것이다.

화폭에서 풍겨나오는 그 풍경과 정취가 실제 운림산방(雲林山房)이다. 더도 덜도 말고, 딱 거기까지가 소치가 만들어 거주하면서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던 운림산방이다. 운림산방에 기거하면서 도서이정(圖書怡情)의 생활을 실천하던 소치의 결과물이 바로 <선면산수화(扇面山水畵)>인 것이다. 이 그림 하나가 당시의 그 모든 것을 그대로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지금의 운림산방 모습은 과거의 실제 모습과 너무나 달라져 있다.

부침이 심했던 소치와 그의 후손들이 경제적 어려움으로 운림산방을 포기해야만 했던 상황까지 내몰렸었던지라, 방치되고 훼손이 심했던 것을 복구와 복원하는 과정과, 소치와 후손들의 미술 세계가 재조명을 받게 되고, 진도대교의 개통과 함게 불어닥친 관광 열풍의 결과로 운림산방이 유명 관광지로 탈바꿈하게 되자, 미술관과 관리를 위한 건물들이 더하여져서 지금의 운림산방이 된 것이다. 그 역시도 시대의 변화와 필요에서 생겨난 만큼 겸허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소치가 스스로 만들어 들어앉아 살았던, 도서이정(圖書怡情)의 생활을 영위하던 진짜 운림산방(雲林山房)을 찾아보고 싶다면, 그땐 <선면산수화(扇面山水畵)>를 꺼내 보면 된다. 그 화폭을 가만히 살피다 보면 당신도 소치를 만나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소치 선생님. 퇴직 후 시골생활 할 만 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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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의 고향으로 돌아온 소치는 첨찰산(尖察山, 485m) 기슭에 작품 활동을 하면서 기거할 곳을 지었으니 그곳이 바로 운림산방(雲林山房)으로 1856년의 일이다.

애초에 소치는 해남 땅에 있는 윤씨 종가인 녹우당을 염두에 두고 산방을 짓기 시작하였으나, 해남 윤씨는 원체 호남의 대부호였으니 녹우당도 그렇고 보길도의 원림까지 언제든 가능하겠지만, 든든한 후원자였던 스승 추사까지 먼저 세상을 떠나고 나서는 솔직히 한양에서의 생활마저 그리 썩 녹녹치 않아지자 부득불 낙향한 처지였으니 찬 서리와 비바람만 피할 정도라도 솔직히는 일단 안심이 아니었을까?

결국 초기의 운림산방은 초가로 지은 안채와 작은 연못 운림지(雲林池)이 전부였다. 거기에 후대에 이르러 사랑채와 기와로 지은 화실이 보태져서, 흔히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운림산방의 제 모습이 완성되었다고 보면 되겠다. 물론 처음의 연못은 거의 둠벙에 가까운 크기였겠으나, 기와 건물을 지을 정도의 어느 정도 가세가 일어섰을 때 확장했다고 보면 되지 싶다. 더 솔직히는 처음엔 이 연지를 가로질러 흐르는 도랑을 건너려고 나무로 무지개다리를 걸쳐 놓았다가, 연못 확장 공사를 벌였을 때, 쬐끔 폼나라고 화강암으로 무지개다리를 만들어 홍애교라 이름 붙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니까 원형은 쓰러지지 않았을 정도의 초가에 물을 긷고 빨래하는 둠벙 정도가 본모습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운림지 안의 연지석가산의 경우도 풍류를 제법 안다는 조선의 선비들의 정신세계 속에 뿌리 깊게 자리 잡았던 신선 사상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하지만 정작 소치 자신은 이런 석가산의 정취를 누리지 못하지 않았을까?

소치가 기록을 남기매, 정원을 가꿔 아름다운 꽃과 희구한 나무를 심어 구름속에 선경을 꾸몄다고 적었다.

대둔사 일지암의 초의선사가 보내주셨다는 수백 년 묵은 매화나무가 유독 돋보이고, 주변으로 자주 목력과 동백이 심겨져 있다. 정원 가득 푸르름 속에 해치 두 마리가 익살스런 표정으로 여행자를 맞이한다.

비록 녹우당이나 보길도 원림에 비할바는 아니겠으나, 그래도 이곳의 주인이 묵신(墨神)이라 불리던 소치(小痴 許鍊)가 아닌가. 건물의 위풍이야 좀 남루해 보일지라도 주변의 산수와 구름이 내려앉은 산방의 풍경만은 ‘몽유진도(夢遊珍島)’라 부르기에 절대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한 마디로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맞먹을만한 실경산수를 갖추었다는 뜻이다.

솔직히 나(필자)의 속내로는 “리얼리?‘하는 의구심을 떨쳐내지 못하겠지만 말이다.‘아무리 그렇기로....... 비교할 데다 비교를 해야지. 안 그래? 설마하니 그 정도는 아니잖아?’에구. 내 속내를 들켜버렸다.


'도서이정(圖書怡情)'이라!

멋지다. 뜻도 참 좋다. 운림산방에서 도서이정의 삶이라니....... 그야말로 신선의 삶이 아니겠는가? 무릉도원이 예가 아닌가?

‘한양에 오원 장승업이 있다면, 남도에는 소치 허련이 있다.’는 소문이 조선팔도에 퍼져나갔다.

그런 소치가 기거하는 운림산방의 기둥엔 스승 추사 김정희 글씨체가 걸려 있다.

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

고회부처아녀손(高會夫妻兒女孫)

‘가장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과 나물이고, 가장 바람직한 생활은 부부와 자녀 그리고 손녀와 함께하는 가족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소치는 한시도 스승에 대한 존경을 내려놓지 않았음이며, 스승의 그림과 글씨는 물론 가르침까지 잊지 않으려 마루 기둥에 붙여놓았을 정도였다.

당연히 행복했어야 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한시도 행복하지 않았다.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불행해져 갔다.

소치가 말년에 그린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선면산수도>를 보면 이 시기의 소치 속내를 고스란히 들여다 볼 수 있다.

우리가 흔하게 부르는 <선면산수도>는 그냥‘부채에 그림 산수화’라는 뜻이고, 이 그림의 본래 제목은 <운림각도(雲林閣圖)>로, ‘안개가 그린 수필화’라는 뜻이다.

그림을 보면 점찰산의 험준함이 거칠게 그대로 드러나 있고, 그 험준함에 녹아들 듯이 곳곳에 스며들어있는 노송들과 푸른 연못과 보잘것없어 보이는 초가 두 채가 어울려 산방 이라는 정취에는 조금은 어색해 보이는 서늘한 정취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오늘다라 이곳의 이름에 들어있는 운림(雲林)은 자취를 감추었다. 무엇인가 신비로움을 걷어 낸 산방의 진면목을 드러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바로 이 시점에서 가장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다름 아닌 지팡이를 짚고 무지개 다리를 건너는 노인의 모습이다. 아마도 이 노인은 소치가 부러 그려 넣은 자화상일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보고 또 보아도 지금 노인의 모습은 어디 무릉도원에서 은자로 살아가며 도서이정(圖書怡情)을 특기이자 취미로 삼아 살아가는 탈 속세의 모습이 어디에서도 전혀 엿보이지 않는다.

어디 그뿐인가?

그림 위쪽에 빼곡하게 추사체로 서내려간 글 속에도 또 그런 내용으로 가득하니 이를 어쩔소냐? 그 내용을 대충 추리면 이렇다.

‘깊은 산골에 있는 나의 집에 여름이 오면 뜰에 푸른 이끼가 깔린다. 소로엔 떨어진 꽃잎들이 가득하다. 찾아오는 손님이 없으니 솔 그늘에 누워 새소리를 들으며 낮잠을 즐긴다. 단잠에서 깨어나면 솔가지 모아 차를 달여 마신다.’



%EA%BE%B8%EB%AF%B8%EA%B8%B0IMG_6773.jpg?type=w966 소치의 손자인 남농 허건作 <운림산방> 전경.




‘덧없음 이렸다.’

‘모두 부질없다.’

‘속세를 끊고 벗어나려고 부단히 애를 썼건만, 결국 속세를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이 아니던가?’

산림에 사는 이의 영일(寧日)은 느긋하고 완연한 것이 답일진대, 어찌 고독한 심회는 풀리지를 않는가 말이다.


세상과 동떨어진 산중의 생활이라 흡사 신선의 삶이라 생각하기 쉽겠지만, 신선이 아니고서야 짙은 외로움까지 떨쳐낼 순 없지 않겠는가? 지나온 삶의 전성기를 한양 땅에서 당대에 내놓으라 하는 사대부들과 부자들과 날고 긴다는 사람들과 어울려 흥청망청 유흥을 실컷 즐겨 본 처지로, 한없이 적막하기만 한 고립무원의 생활이 어찌 힘겹지 않겠는가?

더하여 친교가 없고 후원자도 없는 처지라 이내 곳간이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으니 어찌 추위와 배고픔이 고통스럽지 않았겠는가?

‘운림산방에서 도서이정의 삶이라...........’

그 짓도 찾아오는 사람이 있고 등 따습고 배가 부를 때나 할만한 것이라,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항상 엄청난 괴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어쩐다?

소치는 부랴부랴 한양 땅에 다시 발을 내딛는다.

무소불위의 흥선대원군도 만나고, 명성황후의 친정 일족인 민영익도 찾아간다.

한동안 사라졌던 소치가 나타났다는 소문에 도성의 풍류가객들이 몰려들었다. 그들과 흥청망청 풍류를 즐기며 댓가로 쓱쓱 그림을 그려 주었다. 돈과 권력과 향락을 찾아서 나비처럼 사쁜사쁜 날아다녔다.

스승인 추사가 살아있을 때의 소치 모습은 이제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이제 소치 스스로가 그에게 그림을 댓가로 풍류와 술과 안주를 돈을 들여 사줄 사람을 찾아 나서는 처지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사람들이 그런 소치를 점차 외면하고 멀리하기 시작했다. 점차 예술가가 아닌 천덕꾸러기로 전락한 것이다. 그는 이제 과거의 당당하고 자랑스러웠던 천재 화가가 아니었다. 생계에 쪼들려 사정사정 쫓아가 구차함을 견디며 그림을 팔아 몇 푼 받아서 겨우 생계를 꾸려가야 하는 그림 장사꾼이 되었던 것이다.

결국엔 권문세가나 부자들이 아닌,전국의 돈이 좀 있다는 중인들의 주문을 받아 그림을 보내주다가, 그것도 여의치 않게되자 어디 누구든 그림을 사겠다고 하면 부산도 가고 평양도 찾아가서 그림을 그려 주고 돈을 받는 환쟁이가 되고 말았다. 오늘날로 쳐서 좋게 말하자면 정식 화가가 되었다고 하고 싶지만, 당시까지의 엄연한 법도는‘그림은 예기(藝技)에 그쳐야지 돈벌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에 가까운 선비정신이 엄연히 살아있던 시대였다.

화가라고 절대 그림을 팔아서 생계를 해결하지는 않았다.

그림은 선비들끼리의 교류에 한 방편이자 선물이었던 것이다. 받은 그림에 돈으로 값을 치루는 것이 결코 아니라, 예우로써 한 턱을 쏘고, 감사의 도리로서 선물을 보내 화답하는 것이 선비다움이었다. 결국엔 돈으로 환전이되어야 먹고 살겠지만, 노골적으로 드러내놓고 그림을 사고파는 것은 선비가 아닌 평민들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다.

평생 스승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겠다며 사대부로서의 삶을 지향했고, 시‧서‧화(詩書畫)에 능해 삼절(三絶)이라 불리기도 했던 문인화의 거두였지만, 지금 현실은 돈벌이를 위해서라면 모란을 그리고 또 그리고 또 그려서 허모란(許牡丹)이란 빈정거림을 들었을 정도로 저잣거리에 나앉은 환쟁이가 되고 말았다.

온갖 수모를 겪으면서 돈을 조금 모으면 남들의 질시하는 시선을 피해 진도의 산방으로 내려갔고, 허기와 외로움이 몰려오면 또 전국을 쏘다니며 그림을 그려 팔았다.

‘그림은 어디까지나 취미로 하는 여기(餘技)이지 그림을 팔아 돈을 벌지는 않는다.’는 당대 문인 화가들의 불문율을 깬 셈이자, 지조와 절개를 생명처럼 중하게 여기던 추사의 유지를 내던진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런 소치의 절망적 행태를 아직 살아있어도 모두 지켜보고 소문을 들어야 했던 초의선사의 속내는 또 어땠을까?

‘이놈아. 사는 게 그렇게 힘들걸랑 차라리 내 옆에 와서 머리 깎고 중이나 되지. 그런 너를 내려다보는 추사의 심정을 헤아려 보았느냐? 그 많은 인연의 복을 지금 이렇게 내치는 것이냐?’하며 통곡했을지도 모르겠다.





-- 소치의 작품 중에서 <노송도>외 몇 몇 작품은 꼭 이야기 해보고 싶었는데, 너무 길어졌고, 소치의 후반기 이야기는 좀 불편하기도 하고 해서 이쯤에서 마치고 다른 남도 여행지로 옮겨갈 까 한다. 다른 이야기를 끌어나가면서 또 필요해진다면 소치의 못다한 이야기는 얼마든지 더 다루어 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부족한 장문의 글을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드리고, 더 부단히 노력해 계속 글을 써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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