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췌독 편
발췌독은 책이나 글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부분이나 중요한 핵심 부분만 뽑아 읽는 것이다. 목차와 서론, 그리고 결론을 훑어보고 대략의 구성과 논지를 파악한다. 그리고 내게 필요한 부분만 뽑아 읽는 것이 바로 발췌독이다. 주로 필요한 정보나 자료를 모으고, 관점을 비교하거나 시간 부족 등의 문제로 필요한 정보만 숙지하고자 할 때 사용한다.
보통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읽어야 제대로 된 독서를 했다고 생각하기가 쉽다. 그런 시각에서 보자면, 발췌독은 제대로 된 읽기 행위라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발췌독이 현대 사회 환경에 잘 맞는 중요 독서법이라 할 수 있는 까닭은, 발췌독이 다양한 보석을 엮는 구슬꿰기와 같은 읽기법이기 때문이다.
발췌독은 대략 세 가지 방법으로 접근해볼 수 있다.
첫째, 한 분야에 대한 식견을 넓히려 할 때, 연관된 책이나 같은 계통의 책들을 골라서 필요한 부분만 뽑아 읽는 것이다. 보통 특정 분야에서 연계된 책들을 함께 읽어가는 것을 계독(系讀)이라 하는데, 발췌독은 계독과 함께할 때 더 빛을 발한다.
책이라는 것은 일단 기본 태생부터 인터넷 정보와는 다르다. 저자는 책 한 권을 내기 위해 매우 많은 시간을 들인다. 무수한 시간 동안 자신을 되돌아보고, 자료를 모으고 기획하고 사색에 또 사색을 더한다. 삭제가 가능한 인터넷 게시물과 달리 인쇄물은 세상에 한 번 발행되면 되돌리지 못하고 자신의 이름과 함께 박제되기 때문이다. 또한 책 한 권이 제대로 출간되기 위해서는 출판사의 무수한 공정과 함께 큰 비용이 투자되어야 하는 등의 현실적 문제로 인해 저자는 현실적·심적 압박감에 자신의 최대 역량을 쏟아 넣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아주 짧은 책이라도 책에는 반드시 배울 만한 무언가가 담겨 있기 마련이다(물론 예외도 있다).
그런 측면에서 한 분야에서 같은 계통의 책을 다독하다 보면, 해당 분야의 기본 정보와 체계를 잡고, 흐름과 분위기를 파악하며 중요한 자료를 확보해가기에 용이하다. 그것은 마치 책이라는 가상공간 안에 그 분야의 여러 전문가를 모시고 동시에 질의응답을 던져볼 수 있는 것과 같다. 같은 분야라도 개중에는 입장을 달리하는 책도 있고, 또 같은 관점이라도 한발 더 나아간 책도 있다. 따라서 같은 계통의 다양한 관점을 대변하는 책들을 통해 쌓아가는 지식과 식견은 좀 더 창의적으로 다른 방안을 모색해볼 수 있는 기본 토대가 된다.
그런데 이렇게 여러 측면에서 하나의 문제를 바라본다거나, 무언가를 좀 배워가고자 하는 욕심에 질리도록 많은 북리스트를 뽑아보다 보면, 자연히 포기하고 싶은 마음부터 들게 마련이다. 일 년에 책 한 권 읽기도 쉽지 않은 이 바쁜 시대에, 여러 권의 책을, 그것도 같은 분야의 같은 계통의 책들을 여러 권씩 읽어간다는 것은 말만 들어도 엄두가 안 나는 일이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막상 실천할 수 없다면 그저 허망한 꿈으로 끝날 뿐이 아니겠는가! 때문에 정독만 고집해서는 책에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쉽지 않을 때가 많다. 사람의 시간과 에너지에는 한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두의 머리말과 맨 뒤의 결론을 쓱 보고, 목차를 뜯어보면서 저자가 잡은 책의 구성을 파악하고 사고의 흐름을 감지한 뒤, 필요한 부분이나 하이라이트만 뽑아보고 잘 정리해둘 필요가 있다. 여러 권을 제대로 읽으려는 부담감에 시간을 지체하여 앞에서 본 내용을 까먹거나, 아예 양에 질려 포기하는 것보다는 필요한 부분이라도 취하는 게 낫기 때문이다.
오랜 독서를 통해 독서력이 다져진 사람이라면 속독과 함께 필요한 부분을 파악하고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 읽는 발췌독이 숙련도를 높이는 데 빛을 발할 수 있다.
둘째, 발췌독은 하나의 관점이나 문제를 다양한 분야에서 비교 및 응용해보고자 하는 남독(濫讀)과 함께할 때 좋은 거울이 되어 준다.
한 가지 분야의 책만 주구장창 읽으면 준전문가가 될 것 같지만, 원래 창조란 완전히 다른 것을 만나는 신선한 충격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가진 화두에 대해 다른 분야의 관점에서 크로스 해 보는 경험이 필요하다.
나는 한때 결혼 후 여성이 남편 성을 따라가는 문화에 대해 궁금증을 가진 적이 있었다. 동양과 서양의 차이라고 하기엔 중국과 일본 역시 그랬기에 뭔가 부족했다. 그래서 역사학, 세계사, 민속학뿐만 아니라 잠재적 심리가 담긴 문학, 심리학, 사회과학, 여성학, 언어학, 종교학, 그리고 유전학과 자연계의 암수 관계 및 세력 다툼에 대한 분야까지 여러 책의 관련 부분만 발췌해 읽으며 생각을 정리해 갔다. 책을 다 읽는 게 아니다 보니 비록 책상 위에 쌓아놓은 책은 높았지만, 모두 정리하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한 가지 주제로 다양한 분야의 관점을 살펴보니 나름 얻는 것도 많았다. 가장 큰 이점은 더 넓은 시야로 문제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셋째, 발췌독은 한 가지 문제를 대하는 여러 시선과 관점을 나누어 보는 관독(貫讀)과 함께할 때 빠른 시간에 길을 알려주는 나침반이 된다.
고영성 작가의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서 이런 내용을 보고 큰 배움을 얻은 적이 있다.
“이전까지는 책을 다 읽고 난 이후 서평을 쓰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서평을 쓰기 위해 책을 읽어 보았다. 그러자 서평이 뚝딱 써지는 게 아닌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하나의 관점을 유지하며 책을 대하면 의외로 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다. 발췌독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목적과 관점을 분명히 하고 발췌를 해야 요긴한 부분을 더 정확히 찾아낼 수 있다. 목적과 관점이 분명하지 않으면 그냥 그 순간의 느낌에 따라 발췌를 하게 되거나, 정말 중요한 부분이나 꼭 필요했던 곳을 놓치고 엉뚱한 부분만 발췌하게 되기도 한다.
세상에는 다양한 관점과 그에 기인한 각기 다른 주장과 견해가 존재한다. 그런데 더 좋은 방안을 내놓거나 해결점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상반된 관점들을 깊이 있게 이해해야 한다. 그러려면 각기 다른 관점들이 주장하는 맥락과 흐름에 깊이 공감해 볼 필요가 있다. 내가 어떤 관점에서 이 책에서 필요한 부분을 발췌할 것인지, 목적을 정확히 하고 책에 접근할 때 우리는 책에서 더 깊은 공감과 울림을 얻어낼 수 있다.
이처럼 빠른 시간 동안 많은 이점을 얻을 수 있는 발췌독이지만, 자신의 주관으로 취사선택을 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보니 그에 따르는 단점이 생겨난다. 그러면 어떤 측면을 주의해야 단점을 최대한 줄일 수 있을까?
발췌독의 대표적인 단점이라면 필요한 부분만 고르는 과정에서 잘못된 선택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이다. 글에는 예기치 못한 반전이 있을 수도 있고, 끝까지 읽어봐야 진의를 알 수 있는 글도 있다. 또한 대개 자신이 보고 싶은 부분이 눈에 더 잘 띄기에 정작 저자가 말하고자 했던 본의와 다른 자료를 더 크게 해석해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 취사선택을 잘못하게 되면 맥락을 잘못 이해하여 저자의 논리를 왜곡하거나 정작 중요한 부분은 놓치게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올바른 발췌독을 하려면 우선 독서에 대한 깊은 이해나 바른 속독의 기술이 필요하다. 즉, 목차와 서론, 결론만 보고도 올바로 맥락을 유추할 수 있는 많은 독서 경험과 반전 등을 발견할 수 있는 글의 구성 및 흐름에 대한 이해 능력이 필요하다. 수많은 정독을 통해 쌓여진 내공이 없다면 발췌독은 간혹 엉뚱한 오류를 낳게 할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발췌독은 꼭 정리하는 습관이 뒤따라야 한다. 발췌독은 처음부터 끝까지 푹 빠져서 저자의 생각에 공감하며 함께 감흥을 느끼는 읽기법이 아니다. 따라서 잘 정리해두지 않으면 기억에서 금방 사라진다. 또 어떤 맥락 속에서 해당 부분이 사용됐는지를 잘 정리해두지 않으면 후에 발췌해 둔 부분의 전후 맥락을 잊어버려 엉뚱한 논리로 사용할 수도 있다. 이런 식의 발췌는 감당하기 어려운 더 큰 문제를 초래한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의 독서력이 없는 상태에서 제대로 정리하지도 않을 발췌독이라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나을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발췌독은 어찌되었든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어보는 읽기법이 아니다. 아무리 독서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사람이다 보니’ 당연히 실수를 하게 마련이다. 그렇다 보니 모든 발췌독에는 항상 저자의 의도를 잘못 이해하거나 핵심적으로 전하려고 했던 부분을 놓칠 수 있다는 위험이 따른다. 그러니 발췌독을 할 때는 이러한 부분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어야 실수를 줄일 수 있다.